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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작가: 명가율
우연이 나간 뒤에도, 차시헌의 굳게 찌푸린 눈썹은 풀릴 줄을 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표이사실 문이 다시 두드려졌다. 들어온 사람은 우연이 아니라,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 온 친구 진원호였다.

그는 문턱을 넘기도 전에 이미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리 집 영감탱이는 도대체 무슨 바람이 든 건지, 나보고 꼭 선 자리 나가래! 시헌아, 너 한번 생각해 봐라. 다들 미친 거 아니야? 맨날 나만 보면 애 낳으래, 대를 잇으래! 우리 아버지가 힘이 없지, 내가 힘이 없냐고? 나 아직 젊어! 더 놀아야 한다고! 왜 꼭 한 그루의 삐딱한 나무에 묶여서 죽어야 하냐, 어?”

그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길게 찢어진 눈매에는 ‘강제 결혼’에 대한 진한 불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차시헌이 한마디도 받지 않자, 진원호는 바로 토라졌다. 그는 툭 뱉듯 말하며 다가왔다.

“야, 그래도 너는 좋겠다. 차씨 가문에서 대를 잇는다고 등짝 맞는 건 네 조카밖에 없으니까. 넌 아무도 뭐라 안 하잖아.”

“왜 왔어?”

차시헌의 말투는 늘 그렇듯 차가웠고 얼굴에 표정도 없었다.

“야, 너 진짜 평생 일만 하다가 끝낼 거냐?”

진원호는 혀를 찼다.

“몇 년을 봐도 네 옆에는 여자 그림자 하나 없고. 솔직히 말해 봐라, 안 답답하냐? 아니면... 그냥 혼자서 잘 해결하는 타입이냐? 연애 쪽으로 고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 형아가 다 알려 줄게.”

차시헌이 다시 서류를 집어 드는 걸 보자, 진원호는 스스로 재미없어진 듯 손을 휘저었다.

“노잼 새끼. 난 간다.”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바로 그때...

차시헌이 입을 열었다.

“친구가 하나 있는데, 물어볼 게 있다고 하더라.”

“오?”

시작부터 이런 멘트가 나오다니 진원호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냉큼 돌아와 가까이 다가섰다.

“좋지, 얘기해 봐.”

차시헌은 잠시 말을 고르듯 마른침을 삼켰다.

“그 친구가... 어떤 여자랑, 예상 밖의 상황에서 같이 잤어. 자기 전에는 여자가 엄청 적극적이었는데, 자고 나니까 남자가 ‘책임지겠다’고 한 걸 여자가 딱 잘라 거절했지.”

진원호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바로 손뼉을 쳤다.

“그 남자, 침대에서 완전 꽝이네. 아니, 꽝도 아니라 아주 형편없었던 거야. 그래야 여자 태도가 전후로 그렇게 확 뒤집히지.”

차시헌의 미간이 더 강하게 찌푸려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야... 설마 그 ‘친구’라는 놈, 너냐?”

“나가.”

“치, 농담도 못 받아 주냐. 당연히 너 아니지. 너는 하루 종일 금욕 모드라 한 번도 해본 적 없지?”

이번에는 두 글자조차 없다. 그저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진원호는 장난이 좀 심했음을 깨닫고, 어깨를 으쓱하며 서둘러 나갔다.

문이 닫히자 대표이사실은 다시 고요해졌다.

그러나 차시헌은 손에 든 서류에 도무지 집중할 수 없었다.

어젯밤 일이 다시 떠올랐다.

확실히 우연은 몇 번이나 아프다고 했다. 울먹이는 소리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태어나 처음 느껴 보는 감각에 젖은 데다가 술까지 더해져서...

‘혹시 정말 그것 때문에... 태도가 달라진 걸까?’

생각할수록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그런데 이걸 우연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었다.

‘나도 처음이었다.’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 배려하지 못했다.’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대놓고 꺼낸단 말인가.

증명할 수도 없고, 해명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오늘 밤 또 만나서 ‘이번에는 잘할게’라고 몸소 증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짜증이 치밀어 그는 벌떡 일어났다. 사는 동안 이렇게 억울하게 입을 막혀 본 건 처음이었다.

...

정작 우연은 그런 고민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차씨 가문과의 계약이 너무 무거웠다. 지금 머릿속은 오직 한 가지뿐, 차현율에게 접근해 그의 씨를 얻는 것이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우연은 우혁의 담당 주치의에게 전화를 걸었다.

“공여자는 이미 서명했습니다. 저희는 기증 전 준비에 들어가겠습니다. 다만...”

의사는 책임감 있게 덧붙였다.

“법적으로는 공여자에게 기증을 강제할 수 없습니다. 동의했다 하더라도 언제든 번복할 수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럴 일 없을 거예요.”

그렇게 큰돈이라면 외삼촌이 평생 벌어도 만지지 못할 금액이었다.

우연은 의사와 몇 마디 더 나누고 전화를 끊었다.

이제는 눈앞의 업무부터 처리해야 했다. 그러고 나서 차현율을 공략할 방법을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다가... 하늘도 도와준 것일까.

새로 올라온 프로젝트 자료 더미에서 우연은 차현율 팀의 기획서를 발견했다.

순간 의욕이 확 살아났다. 그녀는 파일을 열어 집중했고, 마음을 다해 문제 될 만한 부분을 찾아냈다. 그리고 바로 프로젝트 부서로 향했다.

“실례지만 차 팀장님 계신가요?”

문을 두드리자 조수처럼 보이는 남자가 한 독립 사무실을 가리켰다.

“안에 계세요. 제가 말씀드릴게요.”

“네, 고마워요.”

잠시 기다린 끝에 우연은 안으로 들어갔다.

차현율은 누군가와 전화로 프로젝트를 논의 중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발견하자 바로 손짓으로 앉으라고 했다.

우연은 가볍게 OK 사인을 보내고 자리에 앉았다.

무심코 그의 사무실을 둘러봤다. 여기는 딱 봐도 젊은 사람의 공간이었다.

벽에 걸린 색감의 잉크화, 한정판 샤넬 서핑 보드, 누군가의 친필 사인, 책상 위 값비싼 공예품들까지.

흑백만 가득한 차시헌의 규격화된 대표이사실과는 너무 달랐다. 세 살 차이라고 했지만, 취향은 도무지 같은 시대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미안해요. 법무팀에서 계약 건으로 전화 와서요.”

통화를 끝낸 차현율은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는 대신 직접 걸어와 우연의 옆에 섰다. 목소리는 여전히 따뜻했다.

“비서님은 무슨 일로 오셨어요?”

“그게요.”

우연은 그가 올린 프로젝트 자료를 꺼내 페이지를 열었다.

“차 팀장님, 해외에서 막 들어오셔서 그러신가 봐요. 국내 프로젝트 수익률 계산 방식이랑 여기 공식이 조금 달라요.”

일 이야기라는 걸 알자, 차현율의 표정이 금세 진지해졌다.

우연은 열심히 설명했다.

현재 국내 투자업계 흐름, 위험도를 먼저 차감해야 수익률이 정확해진다는 것, 그리고 기업 실사 시 특허가 법인 명의인지 철저히 확인해야 한다는 것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이 특허 명의가 꽤 중요한 편이에요. 해외랑은 기준이 조금 다르니까요.”

차현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정말 그렇네요. 이건 제가 못 본 부분이에요.”

우연은 바로 카톡 QR코드를 띄웠다.

“괜찮으시면... 연락처 교환할까요? 나중에 궁금한 점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너무 빠른 접근일 수도 있다는 걸 알았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눈치 보이게 보이기 싫어 우연은 곧바로 당황한 척하며 휴대폰을 거두었다.

“아... 죄송해요. 다른 뜻 아니었어요. 그냥 예전에 도와주신 것도 있고, 제가 도울 수 있는 게 있으면...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어서요. 순간 남녀 간 거리감 같은 건 생각을 못 했네요...”

그 순간, 차현율이 미소를 살짝 지으며 자기 휴대폰을 그녀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카톡만으로는 부족하죠. 번호도 같이 저장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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