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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작가: 명가율
일이 이렇게까지 술술 풀릴 줄은 정말 생각도 못 했다.

대표이사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고 나서도, 우연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 계속 맴돌았다.

차현율 같은, 그렇게 젠틀하고 다정한 남자가 왜 독신주의일까? 심지어 집안에서까지 혈육을 잇기 위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정도로 태도가 단단하다니 말이다.

그녀의 기준으로 보면 돌덩이처럼 차갑고 딱딱한 성격의 차시헌이야말로 그런 쪽에 더 어울린다.

우연은 입술을 살짝 내밀고, 다시 고개를 숙여 남은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프로젝트팀에 직접 다녀온 터라 밀린 일이 적지 않았다. 제때 처리하지 못해 진도가 늦어지기라도 하면 차시헌의 기분이 또 나빠질 것이다.

그때, 내선 벨이 갑자기 울렸다.

“대표이사실로 와.”

“네, 대표님!”

우연은 마지막 서류를 파일철에 넣고 숨을 고른 뒤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프로젝트 3팀에서 올린 자료, 그 땅의 양도 계약 효력을 확정할 수 없어서 내가 반려했어. 그래서 자금 제공 측에 새 토지 소유권 증명을 서둘러 준비하라고 알렸어.”

차시헌의 짙은 눈썹이 살짝 움직이자, 우연은 곧장 새 프로젝트 서류에 계약서가 하나 빠져 있는 이유를 설명했다.

반년 동안 그의 곁에 있다 보니 어느 정도는 그의 성향을 알게 되었다.

설명을 다 듣고도 차시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그것이 곧 최선의 반응이다.

남은 업무는 별문제 없을 거라고 판단한 우연은 그 자리에서 잠깐 멍하니 서서 다음 계획을 머릿속으로 굴렸다.

그때 다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커피.”

“아, 네! 지금 타 올게요.”

이제 우연은 차시헌의 취향을 거의 달달 외울 지경이었다.

예전에는 이것저것 다른 종류의 커피도 마시더니, 요즘에는 우연이 내린 것만 입에 대고 있었다.

대표이사실을 나선 우연은 바로 하얀 그룹 안에 있는 바 카운터로 향했다. 이곳은 회사에서 따로 마련해 둔 공간으로 평일 내내 열려 있었다.

콜라, 캔 커피, 각종 이온 음료 같은 것들이 무료로 제공된다.

청소 직원들까지 와서 마셔도 되었다.

우연이 다가가자, 바 책임자가 잽싸게 옆의 작은 문을 열어 주며 웃었다.

“대표님은 진짜 하루 한 잔은 꼭 드시네요.”

“그러게요. 대표라는 자리가 쉬운 자리는 아니잖아요.”

우연은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에는 차시헌을 위해 따로 준비된 핸드드립 커피 기계가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분주히 준비하고 있는데,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커피가 더 좋아요?”

차현율이었다.

우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밖으로 나갔다.

“차 팀장님, 제가 지금 핸드드립 커피 내리고 있는데 한 잔 드셔 보실래요?”

“어? 진짜 우연이네요, 우 비서님.”

차현율은 그렇게 말하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드디어 자신의 실력을 뽐낼 기회라고 생각한 우연은 그 한 잔에 평소보다 더 정성을 들였다.

차현율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셔 보고 연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향도 좋고 맛도 진하네요. 고마워요, 우 비서님.”

“커피 한 잔 내린 것뿐인데요, 별거 아니에요. 마음에 드시면 나중에 또 드시고 싶을 때 저한테 메시지 주세요.”

그는 가볍게 웃었다.

“그럼 진짜 부담 없이 부탁할게요.”

“네. 저는 너무 좋은데요.”

이런 작은 에피소드 때문에 우연이 대표이사실로 돌아가는 길은 조금 늦어졌다.

그래도 다행히 차시헌은 온 신경이 일에만 가 있는 사람이라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가 서류를 다 검토하고 나기만 하면 오늘 할 일은 끝나는 셈이다. 우연은 속으로 조용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차시헌이 문서를 덮는 순간, 우연은 그것을 가져가려 손을 뻗었다. 이제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 퇴근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퇴근 후에 약속 있나?”

“...없어요. 혹시 야근할 일 생기셨어요?”

우연은 야근을 딱히 싫어하지 않았다. 하얀 그룹은 야근 수당과 보상이 매우 후한 편이었다. 어디에서 일하든 결국 돈을 벌어야 하기도 했다.

설령 계약을 다 이행하고 동생과 함께 경안시를 떠나게 되더라도 살아가는 데는 돈이 필요하다.

“아니.”

차시헌의 단정한 얼굴에 보기 드문 어색한 기색이 스쳤다.

얇은 입술을 한 번 다물었다가 떼며, 그는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전에 네가 말했지. 경안시에 새로 생긴 이탈리아 음식점, 거기 가 보고 싶다고.”

이 말을 듣는 순간 우연도 떠올렸다.

그때는 어색한 거리를 조금 줄여 보려고, 그가 이탈리아 음식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한 번 모시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그 제안은 아주 단칼에 잘려 나갔다.

그런데 지금은...

“대표님, 저 이미 거기 가 봤어요. 맛이 별로더라고요.”

“...”

“혹시 중요한 손님이랑 약속 잡으신 거면, 다른 괜찮은 곳 몇 군데 추천해 드릴까요?”

차시헌은 눈살을 한번 찌푸렸다.

“그럴 필요 없어.”

“알겠습니다. 그럼 다른 일 없으시면, 저는 이만 나가 볼게요.”

우연은 두세 걸음 뒤로 물러난 뒤, 재빨리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예전처럼 어떻게든 구실을 만들어 대표이사실에 조금이라도 더 머무르려 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차시헌은 손을 들어 미간을 문질렀다. 옆에 놓인 휴대폰 화면이 번쩍이며 켜졌다. 진원호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아까 네가 말한 네 친구 이야기 말인데, 나 또 하나 떠오른 가능성이 있다? 혹시 그 여자 밀당 하는 중 아니냐?]

‘밀당이라...’

차시헌의 검은 눈동자가 조금 전 우연이 나간 방향으로 슬쩍 향했다.

두 가지 가능성 모두 쉽게 단정 내릴 수가 없었다.

...

퇴근 후, 우연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병원에 가서 동생을 보는 것이었다.

이미 면회 시간은 지나 있었기에, 그녀는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둔 채 밖에서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성지원은 바로 이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우연이 온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시간을 내 그녀를 달래 주려 나왔다.

“우연아. 20억이라는 돈은 웬만한 사람은 평생 벌지도 못 하는 돈이야.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사고나 고비 좀 끼어드는 것쯤은 어찌 보면 당연한 거지. 그래도 우리는 진짜 불행 중 다행인 편이야. 계약금 제때 들어와서 기증 준비도 안 밀렸잖아.”

“응.”

우연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지금은 그냥 어떻게든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려 애쓸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현실에 짓눌려 숨이 막혀 버릴 테니까.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기운 빠진 우혁의 모습을 올려다보니, 가슴속 깊은 곳에서 쓴물 같은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그 감정을 제대로 짐작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전에 그녀가 대학에 합격하고 해외 연수까지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 때, 부모님은 돈 걱정은 하지 말라고 말해 줬다. 그래서 별다른 의심 없이 해외로 나가 금융을 전공했다.

하지만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 돈은 우혁이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모은 돈이었다는 것을.

그때 우혁의 성적은 반에서 항상 상위권이었고, 학교에서도 그가 명문대에 갈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었다.

퇴학 후에도 학교에서는 여러 번 집으로 찾아와 복학을 권했다. 하지만 우혁은 끝내 돌아가지 않았다.

그때의 그 선택은 우연이 평생 갚을 수 없는 빚이다.

성지원은 친구의 표정만 봐도 그녀가 또 예전 일을 떠올린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숨을 쉬며 조용히 휴지 한 장을 건넸다.

“울지 말고 눈물 닦아. 아무리 험한 길이라도 결국은 걸어서 지나가는 수밖에 없잖아.”

그제야 우연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허겁지겁 눈가를 훔치고 억지로 웃어 보였다.

“하늘이 길을 완전히 막지는 않는다잖아. 이렇게 천문학적인 금액인 20억을 벌 기회를 얻은 것만 해도 나는 이미 감사해. 나 진짜 괜찮아, 지원아. 너까지 걱정할 필요 없어.”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다행이다. 또 도와줄 일 있어?”

우연은 원래 없다고 하려다가 문득 한 가지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전에 차시헌 대표를 위해 지어 준 위장약 있잖아. 그거 몇 통만 더 챙겨 줄 수 있어? 지금 목표는 그 사람이 아니지만, 그래도 하얀 그룹에 계속 붙어 있어야 차현율한테도 다가갈 수 있으니까, 그 사람 심기는 건드리면 안 되지.”

성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괜찮은데, 우리 아빠가 지금 이모 집에 가 있어서 다음 주나 돼야 돌아오거든. 정확한 배합은 나도 잘 몰라.”

“괜찮아, 다음 주에 줘도 돼. 여기 아직 한 통 남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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