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조심스럽게 은하를 안아들고 보건실로 향해 걸음을 옮기는 태하. 팔에 안긴 몸은 생각보다 가벼웠고, 숨소리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민희 역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뒤를 따르며 은하의 핸드폰을 꽉 쥐고 있었다.
보건실로 향하자마자 은하를 조심스레 침대 위에 내려 놓았다.
놀란 보건 선생님이 급히 다가와 은하의 상태를 살폈고, 담임 선생님 역시 소식을 듣고 보건실로 달려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큰 소리에 갑자기 놀란 듯 하더니… 가방에서 약을 꺼내 먹었어요.”
“약? 무슨 약?”
민희는 서둘러 은하의 가방을 뒤적여 은하가 먹었던 작은 약통을 꺼냈다.
하얀 플라스틱 통. 뚜껑을 돌려 열자, 안에는 작은 푸른색 알약이 들어 있었다.
보건 선생님은 약통을 받아 들고, 곧장 라벨을 확인했다.
“프로프라놀롤…?”
보건 선생님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단순한 진정제가 아닌, 베타 차단제. 심장의 과도한 반응을 억제하고 불안과 공황 증상을 완화 시키는 약.
주로 트라우마나 극심한 불안 장애를 겪는 환자들에게 처방 되는 약이었다.
“너희들은 그만 나가 있어.”
보건 선생님의 단호한 목소리에, 민희와 태하는 짧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얼굴에는 걱정과 혼란이 가득했지만, 선생님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문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보건실 문 앞에는 뜻밖에도 백이현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의 표정이 단단히 굳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또 구경이나 하러 온건가 싶어서.
그때, 저 멀리 복도 끝에서 누군가 다급하게 뛰어오는 모습. 탁, 탁, 탁. 빠르게 복도를 가로지르는 단단한 구두 소리가 다급했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보건실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남자. 강우주. 은하의 오빠였다.
우주는 거침없이 보건실 문을 열었다.
“은하야!!”
우주의 시선이 곧장 침대 위로 향했다.
창백한 얼굴, 식은땀이 맺혀 있는 이마, 규칙적이지 않은 가쁜 숨결. 본능적으로 은하의 손을 붙잡았다.
“은하야. 강은하!”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걱정과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
보건 선생님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우주에게 약통을 전했다.
“베타 차단제를 복용한 상태인데도 이 정도라면….”
우주는 은하의 손목에 손을 올리고 능숙하게 맥박을 재기 시작했다.
너무 빨랐다. 이건 단순한 불안 발작이 아니었다. 스트레스 반응이 극심했다는 뜻.
“일단 병원으로 가야겠어요. 선생님. 연락 드리겠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당황한 듯했지만, 그런 우주의 태도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연락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곧장 은하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보건실 문 밖을 나서자, 이제야 이현과 태하, 민희의 모습이 보였다.
“은하 친구들이구나. 챙겨줘서 고마워.”
이현과 태하는 입을 꾹 다물었고, 오직 민희만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은하는 괜찮은 거에요?”
“괜찮아야지. 또 보자.”
그렇게 정신없는 인사를 건넨 후, 우주와 은하의 모습은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
은하는 눈을 감은 채, 자신을 감싸는 온기를 희미하게 느끼고 있었다.
공중에 붕 떠 있는 듯한 느낌. 동시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하야. 오빠야. 조금만 참아.”
분명 오빠인데, 낯익은 목소리인데. 의식을 되찾지 못한 몸은 대답할 기운조차 남아았지 않았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눈 감고 있어.”
언젠가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 같다. 그때마다 지금처럼 몸이 무거웠고, 눈을 뜨면 늘 어딘가로 옮겨져 있었다.
우주는 급히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으로 향했고, 신속하게 은하의 상태를 확인했다. 산소 마스크가 씌워진 뒤 안정제까지 투여됐다.
“은하야. 오빠가 너무 욕심 낸 걸까. 너한테 학교는… 정말 무리였던 걸까….”
발걸음 소리와 함께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우주의 동기. 정신의학과 의사, 김설희.
설희는 우주와 대학교 때부터 함께 해온 꽤나 친한 동료 의사였다. 그리고, 은하의 상태에 대해 설희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강우주. 은하 왔다며. 괜찮아?”
“아니… 한동안 이러지 않았는데….”
설희 역시 은하의 상태를 신중하게 살폈다. 그리고는 걱정스럽다는 듯 은하와 우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괜찮아. 호흡이랑 맥박, 다 돌아오고 있어.”
그때, 은하의 희미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오빠….”
두 사람은 이제야 안도하는 듯, 긴 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여기 병원이야. 눈 뜰 수 있겠어?”
익숙한 천장, 주위엔 기계음이 잔잔하게 울리고 있었다. 몸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아까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지는 않았다.
“응….”
“일단 쉬어. 수액 다 맞으면, 집에 가자. 알았지?”
“응.”
은하는 짧게 대답한 후, 다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우주는 익숙한듯 베드 옆에 자리를 잡았다.
설희는 힘내라는듯 우주의 어깨를 두드리고, 병실을 빠져 나왔다. 표정은 어두웠고, 가슴이 조여들었다.
벌써 세번째 전학이라고 들었는데, 이게 또 무슨 일이지.
은하와 우주는.. 대체 언제쯤 평범한 삶을 되찾을 수 있을까.
종례 시간이 다가오자, 하나 둘 자신들의 자리로 모여드는 학생들. 은하 역시 책상 위에 있는 교과서와 필기구를 정리하던 중, 새하얀 쪽지 하나를 발견했다.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쪽지를 펼쳐보았다.[은하야, 나 태하. 중요하게 할 말이 있어.조용한 곳에서 이야기 하고 싶어. 아무래도 이현이 눈치도 보이고.혹시 학교 끝나면, 옥상 창고 쪽으로 잠깐 와줄 수 있어?짧게 얘기하고 끝낼게. 부담 없어 와줘, 기다릴게.]‘태하…?’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태하를 바라보았다. 순간, 태하와 이현이 미묘한 신경전을 벌였던 급식 시간이 떠올랐다.‘이현이 눈치도 보이고.’쪽지 속 문장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런 식으로 조용히 부르는 건,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부담 없어 와줘, 기다릴게.’마지막 말도 은근히 신경 쓰였다. 강요는커녕, 묘하게 부탁을 하는 느낌이랄까.쪽지는 곱게 접혀 주머니 안에 들어갔고, 이내 짧은 종례가 시작됐다.평소와 다름 없는 담임 선생님의 미소, 그리고 학생들의 우렁찬 대답.은하의 귀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미 쪽지를 받고 난 뒤, 머리속엔 궁금증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드디어 시작된 하교 시간.교실을 나서던 중, 민희가 은하를 향해 다가왔다.“은하야. 바로 집에 갈 거지? 나도 오늘 학원 가는 날이니까 같이 가자.”“어? 그게….”“왜? 어디 가?”“태하가 옥상에서 잠깐 보자고 해서.”민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옥상은 박찬희 무리들의 아지트인데. “정태하가? 옥상에서?”“응.”에이, 별일 아니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태하인데. 그리고, 그 자식들만 옥상을 쓰라는 법도 없는 거잖아? “알겠어. 그럼 내일은 꼭 같이 가자~ 내일 봐!”민희는 별 생각 없다는 듯 자리를 떠났고 은하는 옥상을 오르는 계단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드디어 다다른 문 앞. 손잡이를 붙잡고 천천히 밀어 열어 보았다.이상하게도 그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찬 바람만이 불고 있을 뿐.‘창고가 어디지…
노트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껏 집중한 모습의 태하.은하는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다가, 어느새 눈을 감고 책상에 엎드렸다. 새벽에 일찍 깨서 그런지, 피곤함이 밀려왔기 때문. 오빠가 일주일간 집을 비운다는 사실에, 잠을 설친 탓도 있었고.조용하기만 한 교실 안, 문제를 풀던 태하가 문득 은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책상에 엎드려 곤히 잠들어 있는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났다. 살며시 일어나 은하의 어깨에 코트를 덮어준 뒤, 다시 자리로 돌아와 공부를 이어갔다. 그렇게 조용한 아침, 그들만의 시간이 잔잔하게 흘러갔다. 잠시 후, 교실 문이 벌컥 열렸다.태하는 책을 넘기던 손을 멈추고 자연스레 고개를 들었다.?늘 수업 시작 시간이 다 돼서야 모습을 드러내던 백이현이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등교를 해버린 것.이현은 특유의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태하는 그의 시선이 교실 안을 훑고 있다는 걸 느끼고 말아버렸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당연히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든 강은하. 동시에 보란듯이 덮여있는 태하의 코트가 그의 눈에 들어온 순간이었다.이상했다. 평소처럼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았다. 대신, 아무런 표정 없이 태하에게 다가갔다.“흠, 시험 기간인가 보네.”“응. 어쩐 일로 일찍 왔어?”“요즘 잠이 좀 안 와서?”두 사람의 대화 소리에 은하가 잠에서 깨어났다.그 순간, 무엇인가 자신을 덮고 있는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태하구나. 또 챙겨준 거구나.“정태하. 이거… 네 거야?”“응. 추울까 봐. 날이 쌀쌀하잖아.”“고마워.”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태하는 별 말 없이 무심하게 책장만을 넘겼고, 은하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책상 위에 다리를 올려둔 이현은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사실 모든 상황이 짜증 났다. 더 이상 그의 학교생활은 재미있지 않았다. 하나같이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점심시간, 급식실.늘 그렇듯 이현, 태하, 그리고 영주가 같은 테이블에
그날 저녁, 은하의 집 주방에서는 오늘도 음식을 만드는 소리로 가득했다.평소보다 일찍 퇴근해,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우주.은하는 말없이 식탁에 앉아, 오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냉장고 문이 자꾸만 열리고, 정신없이 바쁜 손길이 자꾸만 오갔다.“오빠. 양이 너무 많지 않아…?”“일주일이나 비우는데. 충분히 해 놓고 가야 마음이 편하지.”“배달 시켜 먹어도 돼.”“안 돼. 잘 챙겨 먹어야 돼.”우주가 계란을 풀며 덧붙였다.“약 말이야, 가벼운 증상일 땐 되도록 먹지 말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꼭 챙겨 다니고. 알겠지?”“나, 오빠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잘할 수 있어.”“알아. 이건 그냥 습관 같은 거야. 그래야 오빠 마음이 놓이니까.”은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문 밖, 거리는 이미 어둑해지고 있었다. 혼자 있는 일주일이라는 시간. 정말 혼자서 잘 버틸 수 있을까?긴 시간 혼자 남는 상황은 처음이었지만, 은하는 우주와는 다르게 별 걱정이 되지 않았다. “맞다. 새벽 출발이라, 내일은 학교 혼자 가야 하는데, 괜찮겠어?”“걱정 마시고 잘 다녀 오세요.”***다음날 새벽, 은하는 희미한 새벽빛이 비치는 천장을 바라보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벌써 가는 거구나….’ 방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부스럭 거리는 소리들. 옷감이 스치는 소리, 서랍이 조심스레 열리는 소리까지.우주는 최대한 조용히 움직이려 했지만, 은하는 원래 잠이 깊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깊이 잠드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이불을 걷어내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푸른 여명빛이 내려앉은 창밖.잠시 머뭇거리다, 결국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선 은하의 눈에 커피를 내리고 있는 우주의 모습이 보였다.테이블 아래에 놓인 묵직한 캐리어. 위에 올려진 서류와 여권까지.“미안, 시끄러워서 깼구나?”“괜찮아.”“좀 더 자지. 아직 일러.”“언제 출발해?”“이제 나가려고.”가슴 한 켠이 묘하게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
홀로 교실로 돌아가던 중, 복도에서 한 학생과 어깨가 세게 부딪힌 이현. 차가운 눈빛이 그 학생을 매섭게도 노려보았다.“야. 눈깔을 어디다 두고 다니냐?”“미, 미안해….”“됐으니까 꺼져.”학생은 재빨리 자리를 떠났고, 그 모습을 찬희네 무리들이 흥미롭다는 듯 지켜보고 있었다. 주먹까지 쥔 모습에 키득거리는 소리가 얄밉게 울려 퍼졌다.“맞지? 쟤 요즘, 기분이 영 별로라니까.”“또 강은하 때문인가?”툴툴 거리며 교실로 돌아온 이현의 눈 앞에 영주가 밝은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야, 백이현! 어디 갔다 와. 한참 찾았잖아.”“왜?”“학교 끝나고 백화점 구경 가자. 겨울 신상 엄청 들어왔대!”“됐다. 관심 없다.”“왜 또 그래? 태하는?”그때였다. 영주의 눈에 은하, 그리고 민희와 함께 웃으며 교실로 들어서는 태하의 모습이 보였다.그 광경을 마주한 영주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술을 앙다물었다.“짜증 나네. 진짜.”그 짜증스러운 목소리에도 이현은 별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렸지만, 이상하게도 교실로 돌아온 세 사람의 모습을 바라본 그의 기분 역시 찝찝했다. 머릿속에는 아직도 던졌던 말이 맴돌고 있었다.기분이 상한 영주는 자신의 교실로 돌아가며 세 사람을 향해 차가운 말을 던졌다. “고새 절친이라도 됐나 봐? 셋이 아주 보기 좋네~”은하는 별 반응 없이 영주를 지나쳐 버렸고, 태하와 민희 역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반응들이 더더욱 기분 나빴고 말이다.자신의 반으로 돌아온 영주의 입이 삐죽 나와 있었다. 자리에 털썩 앉자 핸드폰 진동음이 짧게 울렸다. [이영주. 학교 끝나고 얘기 좀 해.]‘박찬희? 얘가 날 왜 찾지?’곧바로 메시지를 입력하려다 멈칫했다.찬희와는 크게 엮인 적도 없었고, 평소에 그렇게 자주 대화하는 사이도 아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영주는 찬희의 무리가 싫었다. “뭐야, 갑자기.”핸드폰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이내 메시지 창을 닫았다. 지금은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으니까.
다음날, 출근을 한 우주는 곧장 설희의 방부터 찾았다. 한 손에는 테이크아웃 커피잔이 들려 있었다. “김설희, 잠깐 시간 돼?”서류를 정리하던 설희가 우주의 목소라에 고개를 들었다. 반갑게 웃으며 들어오라는 손짓.“아침부터 웬일이야? 내 방에 다 찾아오고?”“그… 내일 학회 말이야. 이번엔 가야 할 것 같아서.”“잘 생각했어. 이번엔 원장님이 단단히 벼르고 있는 것 같더라.”“그래서 말인데… 은하 부탁 좀 하려고.”역시나 설희답게 고개부터 끄덕이는 모습에 우주는 안도했다.“나야 좋지. 은하도 오랜만에 보고. 근데 은하는 뭐래? 이렇게 부탁하는 거 알면 또 싫어할텐데.”“어, 안 그래도 민폐라더라.”설희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것 봐. 근데 은하 말도 맞긴 해. 고2면, 한참 예민할 나이잖아.”“그래도 미성년자잖아. 아직은 불안하기도 하고…”그가 걱정하는 건, 은하가 단순히 혼자 있는 게 아니다. 혼자 있을 때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 그게 가장 두려웠다.그리고 그 마음은, 옆에서 오랜 시간 봐왔던 설희 또한 알고 있었다.“그럼 이렇게 하자. 갑자기 찾아가기 보단, 은하랑 연락해서 의견 묻고 갈게.”“고맙다. 김설희.”“너도 좀 내려놔. 네 인생은 은하를 돌보는 게 전부가 아니야.”단호하게 떨어진 말에 우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설희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건 우주에게 있어서 만큼은 가장 어려운 일.은하는 이미 그의 전부다. 유일하게 지켜야 하는 세상이란 말이다.***민희와 함께 초코우유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은하. 민희와 함께 있는 모습은 확실히 자연스러워 보였다.태하가 두 사람을 향해 다가가 말을 걸었다.“매점 다녀오는 길이야?” “응.”초코우유를 손에 쥐고 야금야금 빨아 마시는 모습. 언제나처럼 무덤덤한 표정이었지만, 태하에 눈에는 그 모습이 귀여워보였다.“은하야, 너 초코우유 좋아해?”빨대를 물고 있는 입술이 잠시 멈칫하더니, 별 의미 없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냥.”“앞으론
주방에서는 오늘도 싱크대 물이 흐르는 소리와 도마에 칼이 부딪히는 소리가 부드럽게 공간을 메웠다.저녁을 준비하던 우주가 미소를 지었다. 은하를 집에 데려다준 태하라는 녀석, 그 녀석의 서글서글한 말투와 표정이 자꾸만 떠올랐다. ‘벌써 친구가 생긴 걸까?’기분이 묘하게 들떴다. 항상 혼자였던 동생이, 외로운 뒷모습만 보이던 동생이 누군가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따뜻해졌다.“은하야. 밥 먹자.”“응.”평소처럼 마주 앉아 저녁 식사를 시작한 두 사람. 우주가 은하의 눈치를 스리슬쩍 살피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기 시작했다.“아까 데려다 준 친구, 태하라고 했지?”“응.”특별한 의미 없이 던진 듯한 짧은 대답. 하지만 우주는 그 반응조차도 다르게 받아들이려 노력 중이었다.생각해보니, 이번 학교에서 만큼은 유독 빠른 시간 안에 적응을 하는 것 같았다. 공황증상으로 인해 쓰러졌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저번에 보건실 앞에서도 가장 표정이 안 좋던데. 태하는 어떤 애 같아?”“몰라.”“응? 몰라?”“아직은 잘 모르겠어.” 단순히 관심이 없어서 인지, 아니면 감정을 숨기려는 방어막이 발동한 건지. 정확하게는 몰랐지만, 지금은 그런 태도조차 분명한 의미가 있었다.“국 식겠다. 어서 먹어.”“오빠도.”***늦은 저녁, 방에서 쉬던 은하가 물을 마시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우주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걸까.“안된다니 까요. 저번에도 분명 말씀 드렸잖아요.”“아니, 동생이 아직 학생인데 혼자 있다니까요?”“당장 내일 모레 일정인데, 갑자기 또 이러시면….”오빠답지 않게 감정이 격해지고, 언성이 높아진 듯 한 목소리.통화 상대가 누구인지, 정확한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이건,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라는 것. 은하는 조심스럽게 우주의 방 쪽으로 다가가 귀를 귀울였다.“일주일은 너무 길어요. 안됩니다.”“네. 그럼 차라리 그만두겠습니다.”불편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