تسجيل الدخول“어제 그 말,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뭐?”
“유치하다는 말, 굉장히 거슬리더라고?”
순간, 주변 학생들의 웅성거림이 살짝 커졌다. 몇몇 학생들이 흘끔거리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현은 그런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분위기를 즐기는 듯 팔짱을 끼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은하를 지켜보았다.
은하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와, 볼수록 웃기는 애네. 이거.”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현의 표정에서 장난기가 싹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 주변 학생들 사이에서도 점점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은하는 대답 없이 이현의 얼굴을 쳐다보았고, 책으로 시선을 돌린 뒤 작은 한 숨을 내쉬었다. 이현은 그 반응에 더 기분이 나빠져 버렸고.
“전학생 주제에 나 백이현을 무시한다라….”
묵직한 중얼거림에 주변은 더 조용해졌다. 학생들은 은근슬쩍 두 사람을 지켜보며, 대화가 대체 어디까지, 어떻게 이어질지 궁금해 하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은하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다시 한 번 숨을 내쉬며, 책장을 넘겼다.
“좋아. 유치한 게 무서울 수도 있다는 걸 느끼게 될 거야.”
이현은 그렇게 경고의 말을 내뱉고 교실을 나섰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했지만 은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조용히 책을 읽었다.
물론 수업 시간 내내 이현의 말이 신경 쓰이긴 했다. 그가 뱉은 말은 단순한 관심이 아니었으니까.
근데 뭐? 알게 뭐람. 지금 중요한 건 백이현 따위가 아니란 말이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민희가 또 다시 활짝 웃으며 은하를 찾아왔다.
“은하야, 어제는 누구랑 밥 먹었어? 오늘은 나랑 먹을래?”
민희는 첫날부터 자연스럽게 다가왔던 아이였다.
지나칠 정도로 활발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소심하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압적이지 않은 친절함이 있었다.
“응. 그러자.”
“그럼 빨리 가자. 늦으면 줄 엄청 길어져!”
급식실로 향하자 민희의 말처럼 이미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식판을 들고 줄을 서는 동안에도,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곤거림은 여전했다.
“어? 전학생이네?”
“백이현이랑 뭔 일 있었다던데?”
민희도 그런 시선이 느껴졌는지, 슬리슬쩍 은하를 바라보며 눈치를 살폈다.
“신경 쓰지 마. 전학생한테 관심이 몰리는 건 당연한 거잖아.”
은하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이런 시선쯤은 너무나도 익숙했다.
식판을 들고 자리에 앉은 은하와 민희는 가벼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 사실, 어제 좀 놀랐어.”
“응? 뭐가?”
“너무 까칠해서!”
“아… 미안. 내 성격이 원래 좀 그래.”
“아니야. 오히려 좋았어. 혹시, 괜찮다면… 나랑 친구 할래?”
순간 말문이 막혔다. 친구. 그 단어는 여전히 낯설고 불편했다.
물론 그동안 친구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제대로 ‘친구’라고 부를 만한 관계는 과연 얼마나 있었던가. 기억에 남는 이름이 딱히 없는데.
은하는 짧은 침묵 끝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되게 재미없는 성격인데.”
“괜찮아. 나랑 반대니까!”
“그래. 그럼….”
그렇게 전학 온 지 이틀이 되던 날, 은하에게 친구가 생겼다. 생각보다 빠르게 생긴 친구였다. 그건 전부 민희의 살가운 성격 덕분이었고.
하지만 그 분위기를 깨는 듯한 목소리가 또 다시 들려왔다.
“전학생. 여기 있었네?”
여전히 장난기가 섞인, 나른한 어조. 은하와 민희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맞다. 백이현이다.
이현은 여유로운 태도로 식판을 들고 은하의 옆 자리에 앉았다. 주변 몇몇 학생들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힐끔거리고 있었다.
“같이 먹자고.”
은하는 '또 시작이네' 라는 생각이 몰려왔지만, 한숨을 내쉬며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은하의 표정을 살피던 민희가 머뭇거리며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백이현, 오늘은… 우리 둘이 먹고 싶은데….”
이현의 손에 들려 있던 숟가락이 짐짓 멈췄다. 그리곤 예상치 못한 방해에 불편하다는 표정으로 민희를 바라보았다.
민희는 긴장한 듯 했지만, 나름 확고한 눈빛으로 이현을 보고 있었다.
“아, 그래?”
“응.”
“근데 어쩌지? 싫은데?”
태도와 표정은 가벼운 농담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명확한 도발이기도 했다. 민희는 당황한 듯 입술을 앙다물었다.
역시나 강은하는 쫄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뜻을 전했다.
“어. 여기서 먹어. 우리도 밥 먹자. 민희야.”
이현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자신을 여전히 무시하는 듯한 태도가 분명히 느껴졌고, 당연히 기분 좋을 리 없지 않은가.
은하는 더 이상의 반응 없이, 숟가락을 들어 조용히 밥을 떠먹기 시작했다. 민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 진짜 재미없는 애네.”
백이현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여전히 은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마치, 어떻게든 은하의 반응을 끌어내고 싶다는 듯.
말없이 밥을 떠먹고 있는 그 태연한 모습이 오히려 더 신경을 박박 긁어댔다.
그때, 멀리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태하가 그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탁.’
이현과 은하의 맞은편에 식판을 내려놓으며,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는 정태하.
“네가 더 재미없어 보이는데?”
태하가 은하의 어깨를 두드리며 진정 시켰다.“은하야, 진정 좀 해.”“…….”“백이현이 시킨 거 아니야. 정문 앞 편의점에서 민희를 만났어. 네가 나를 만나러 옥상으로 갔다는 데 그 소리를 듣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온 건 백이현이라고.”은하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을 붙잡고 있던 태하의 손마저 뿌리치면서. 눈은 이미 감정을 넘어선 무표정에 가까웠다. 마치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터벅터벅 창고 밖을 향해 걷기 시작하는 은하. 발걸음 소리만이 무겁게 옥상 바닥을 울렸다.생각보다 심각해진 상황에 태하와 이현은 제자리에 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태하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이건 아니잖아….’이현 역시 마찬가지였다.평소 같으면 가벼운 농담이라도 던지며 넘어갔겠지만, 이번 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그저 붉어진 뺨으로 멍하니 제 자리에 서 있었다.은하가 점점 멀어져 가는 동안, 남겨진 두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잠시 후, 쿵! 둔탁한 소리가 계단 쪽에서 울려 퍼졌다.본능적으로 계단 쪽을 향해 뛰는 태하. 이현 역시 곧장 그 뒤를 따라 나섰다.다급히 계단으로 달려 내려간 그들 눈 앞에는, 무릎을 꿇은 채 계단에 기대어 있는 은하의 모습이 보였다. 옆에는 바닥에 쓰러진 책상 하나가 놓여 있었고.다리에 힘이 풀려 걷는 것조차 힘들었던 은하가 책상을 지탱했고, 고장난 다리로 인해 힘없이 굴러 떨어진 것.“강은하!”태하가 은하의 어깨를 붙잡았고, 이현은 뒤쪽에 서서 은하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괜찮아?”태하의 질문에 침묵이 이어졌다.그리고, 잠시 뒤 들려오는 믿을 수 없는 대답.“저… 안 들려요.”“뭐?”텅 비어버린 눈동자에 태하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너… 지금…”더 이상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흐릿한 눈동자는 제대로 된 초점조차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현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제야 은하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눈동자를 가까이 바라보았다.
“야, 왜 이렇게 겁먹었어?”“진짜 공황장애 있는 거 맞냐니까?”“어떤 느낌인지 좀 궁금하지 않냐?”그들의 비웃음이 점점 거칠고 악랄해지던 순간, 손길 하나가 창고 문을 반복적으로 세게 열고 닫기 시작했다.'쾅!! 콰앙!!'강렬한 소리가 울려퍼졌다.“이 소리에 반응 한다 던데? 신기하지 않냐?”“…!”갑자기 툭- 바닥에 주저 앉는 은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마치 모든 것이 무너지는 신호처럼 느껴졌다.몸이 굳었다. 움직여야 하는데, 도망쳐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함을 느끼고 말아버렸다.'콰앙!! 콰아아앙!!!!!' 거친 쇠의 마찰음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고, 은하는 마치 더는 움직일 수 없다는 듯,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듯. 이미 풀린듯한 동공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서서히 눈물 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눈앞에 선 형체들이 점점 어둡게 일렁였다."대박, 얘좀 봐.""완전 굳어버렸네. 저기요? 강은하씨?""진짜 문만 닫혀도 이러네. 문 트라우마냐 뭐냐?""잘 찍고 있냐.""오케이."찬희의 손에 들린 핸드폰은 여전히 은하를 향해 있었고, 문을 열고 닫는 그 친구 역시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은하에겐 지금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모든 상황을 생각하고, 판단한 겨를 따윈 없어 보였다.그때였다. 웃으며 철문을 열고 닫던 학생이 문 밖에서 느껴지는 강한 충격에 순식간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뭐하냐 니들?”“박찬희!!!!”어떻게 안 건지, 백이현과 정태하가 나타난 것.찬희를 포함한 무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현과 태하는 망설임 없이 창고 안으로 들어섰고, 가해자들 모두가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길이 은하에게로 향했다.헝클어진 머리카락, 교복은 이미 창고 안의 먼지로 더러워져 있었다. 무엇보다 벌벌 떨며 바닥에 주저 앉은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이현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터져 나왔다.“미친 XX들이, 돌았지? 어?”태하는 은하를 향해 달려가 자신의 교복 마
종례 시간이 다가오자, 하나 둘 자신들의 자리로 모여드는 학생들. 은하 역시 책상 위에 있는 교과서와 필기구를 정리하던 중, 새하얀 쪽지 하나를 발견했다.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쪽지를 펼쳐보았다.[은하야, 나 태하. 중요하게 할 말이 있어.조용한 곳에서 이야기 하고 싶어. 아무래도 이현이 눈치도 보이고.혹시 학교 끝나면, 옥상 창고 쪽으로 잠깐 와줄 수 있어?짧게 얘기하고 끝낼게. 부담 없어 와줘, 기다릴게.]‘태하…?’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태하를 바라보았다. 순간, 태하와 이현이 미묘한 신경전을 벌였던 급식 시간이 떠올랐다.‘이현이 눈치도 보이고.’쪽지 속 문장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런 식으로 조용히 부르는 건,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부담 없어 와줘, 기다릴게.’마지막 말도 은근히 신경 쓰였다. 강요는커녕, 묘하게 부탁을 하는 느낌이랄까.쪽지는 곱게 접혀 주머니 안에 들어갔고, 이내 짧은 종례가 시작됐다.평소와 다름 없는 담임 선생님의 미소, 그리고 학생들의 우렁찬 대답.은하의 귀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미 쪽지를 받고 난 뒤, 머리속엔 궁금증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드디어 시작된 하교 시간.교실을 나서던 중, 민희가 은하를 향해 다가왔다.“은하야. 바로 집에 갈 거지? 나도 오늘 학원 가는 날이니까 같이 가자.”“어? 그게….”“왜? 어디 가?”“태하가 옥상에서 잠깐 보자고 해서.”민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옥상은 박찬희 무리들의 아지트인데. “정태하가? 옥상에서?”“응.”에이, 별일 아니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태하인데. 그리고, 그 자식들만 옥상을 쓰라는 법도 없는 거잖아? “알겠어. 그럼 내일은 꼭 같이 가자~ 내일 봐!”민희는 별 생각 없다는 듯 자리를 떠났고 은하는 옥상을 오르는 계단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드디어 다다른 문 앞. 손잡이를 붙잡고 천천히 밀어 열어 보았다.이상하게도 그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찬 바람만이 불고 있을 뿐.‘창고가 어디지…
노트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껏 집중한 모습의 태하.은하는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다가, 어느새 눈을 감고 책상에 엎드렸다. 새벽에 일찍 깨서 그런지, 피곤함이 밀려왔기 때문. 오빠가 일주일간 집을 비운다는 사실에, 잠을 설친 탓도 있었고.조용하기만 한 교실 안, 문제를 풀던 태하가 문득 은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책상에 엎드려 곤히 잠들어 있는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났다. 살며시 일어나 은하의 어깨에 코트를 덮어준 뒤, 다시 자리로 돌아와 공부를 이어갔다. 그렇게 조용한 아침, 그들만의 시간이 잔잔하게 흘러갔다. 잠시 후, 교실 문이 벌컥 열렸다.태하는 책을 넘기던 손을 멈추고 자연스레 고개를 들었다.?늘 수업 시작 시간이 다 돼서야 모습을 드러내던 백이현이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등교를 해버린 것.이현은 특유의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태하는 그의 시선이 교실 안을 훑고 있다는 걸 느끼고 말아버렸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당연히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든 강은하. 동시에 보란듯이 덮여있는 태하의 코트가 그의 눈에 들어온 순간이었다.이상했다. 평소처럼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았다. 대신, 아무런 표정 없이 태하에게 다가갔다.“흠, 시험 기간인가 보네.”“응. 어쩐 일로 일찍 왔어?”“요즘 잠이 좀 안 와서?”두 사람의 대화 소리에 은하가 잠에서 깨어났다.그 순간, 무엇인가 자신을 덮고 있는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태하구나. 또 챙겨준 거구나.“정태하. 이거… 네 거야?”“응. 추울까 봐. 날이 쌀쌀하잖아.”“고마워.”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태하는 별 말 없이 무심하게 책장만을 넘겼고, 은하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책상 위에 다리를 올려둔 이현은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사실 모든 상황이 짜증 났다. 더 이상 그의 학교생활은 재미있지 않았다. 하나같이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점심시간, 급식실.늘 그렇듯 이현, 태하, 그리고 영주가 같은 테이블에
그날 저녁, 은하의 집 주방에서는 오늘도 음식을 만드는 소리로 가득했다.평소보다 일찍 퇴근해,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우주.은하는 말없이 식탁에 앉아, 오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냉장고 문이 자꾸만 열리고, 정신없이 바쁜 손길이 자꾸만 오갔다.“오빠. 양이 너무 많지 않아…?”“일주일이나 비우는데. 충분히 해 놓고 가야 마음이 편하지.”“배달 시켜 먹어도 돼.”“안 돼. 잘 챙겨 먹어야 돼.”우주가 계란을 풀며 덧붙였다.“약 말이야, 가벼운 증상일 땐 되도록 먹지 말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꼭 챙겨 다니고. 알겠지?”“나, 오빠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잘할 수 있어.”“알아. 이건 그냥 습관 같은 거야. 그래야 오빠 마음이 놓이니까.”은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문 밖, 거리는 이미 어둑해지고 있었다. 혼자 있는 일주일이라는 시간. 정말 혼자서 잘 버틸 수 있을까?긴 시간 혼자 남는 상황은 처음이었지만, 은하는 우주와는 다르게 별 걱정이 되지 않았다. “맞다. 새벽 출발이라, 내일은 학교 혼자 가야 하는데, 괜찮겠어?”“걱정 마시고 잘 다녀 오세요.”***다음날 새벽, 은하는 희미한 새벽빛이 비치는 천장을 바라보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벌써 가는 거구나….’ 방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부스럭 거리는 소리들. 옷감이 스치는 소리, 서랍이 조심스레 열리는 소리까지.우주는 최대한 조용히 움직이려 했지만, 은하는 원래 잠이 깊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깊이 잠드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이불을 걷어내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푸른 여명빛이 내려앉은 창밖.잠시 머뭇거리다, 결국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선 은하의 눈에 커피를 내리고 있는 우주의 모습이 보였다.테이블 아래에 놓인 묵직한 캐리어. 위에 올려진 서류와 여권까지.“미안, 시끄러워서 깼구나?”“괜찮아.”“좀 더 자지. 아직 일러.”“언제 출발해?”“이제 나가려고.”가슴 한 켠이 묘하게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
홀로 교실로 돌아가던 중, 복도에서 한 학생과 어깨가 세게 부딪힌 이현. 차가운 눈빛이 그 학생을 매섭게도 노려보았다.“야. 눈깔을 어디다 두고 다니냐?”“미, 미안해….”“됐으니까 꺼져.”학생은 재빨리 자리를 떠났고, 그 모습을 찬희네 무리들이 흥미롭다는 듯 지켜보고 있었다. 주먹까지 쥔 모습에 키득거리는 소리가 얄밉게 울려 퍼졌다.“맞지? 쟤 요즘, 기분이 영 별로라니까.”“또 강은하 때문인가?”툴툴 거리며 교실로 돌아온 이현의 눈 앞에 영주가 밝은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야, 백이현! 어디 갔다 와. 한참 찾았잖아.”“왜?”“학교 끝나고 백화점 구경 가자. 겨울 신상 엄청 들어왔대!”“됐다. 관심 없다.”“왜 또 그래? 태하는?”그때였다. 영주의 눈에 은하, 그리고 민희와 함께 웃으며 교실로 들어서는 태하의 모습이 보였다.그 광경을 마주한 영주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술을 앙다물었다.“짜증 나네. 진짜.”그 짜증스러운 목소리에도 이현은 별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렸지만, 이상하게도 교실로 돌아온 세 사람의 모습을 바라본 그의 기분 역시 찝찝했다. 머릿속에는 아직도 던졌던 말이 맴돌고 있었다.기분이 상한 영주는 자신의 교실로 돌아가며 세 사람을 향해 차가운 말을 던졌다. “고새 절친이라도 됐나 봐? 셋이 아주 보기 좋네~”은하는 별 반응 없이 영주를 지나쳐 버렸고, 태하와 민희 역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반응들이 더더욱 기분 나빴고 말이다.자신의 반으로 돌아온 영주의 입이 삐죽 나와 있었다. 자리에 털썩 앉자 핸드폰 진동음이 짧게 울렸다. [이영주. 학교 끝나고 얘기 좀 해.]‘박찬희? 얘가 날 왜 찾지?’곧바로 메시지를 입력하려다 멈칫했다.찬희와는 크게 엮인 적도 없었고, 평소에 그렇게 자주 대화하는 사이도 아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영주는 찬희의 무리가 싫었다. “뭐야, 갑자기.”핸드폰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이내 메시지 창을 닫았다. 지금은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