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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대신 너의 파멸을
죽음 대신 너의 파멸을
Author: 유리구슬

1화 가장 완벽한 날의 지옥

Author: 유리구슬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07 18:00:21

결혼 3주년 기념일.

서지안은 남편 강민우를 위한 깜짝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다.

조수석에 놓인 고급스러운 가죽 상자 안에는 최고급 명품 시계가 들어 있었다.

그가 평소에 지나가듯 예쁘다고 말했던 한정판 모델.

지안은 그 시계를 구하기 위해 몇 달 전부터 해외 바이어를 통해 백방으로 수소문했고, 마침내 오늘 아침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민우 씨가 이거 보면 얼마나 좋아할까.”

어두운 밤길을 달리는 차 안에서, 지안의 입가에 맑고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창밖으로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햇살이 비추는 것처럼 따뜻하고 설레었다.

지난 3년간의 결혼 생활은 지안에게 유일한 안식처였다.

능력 있고 다정한 남편은 언제나 그녀를 먼저 생각했다.

재계 서열 5위, 대한민국 굴지의 대기업 서그룹의 적통 후계자라는 무거운 왕관.

그 왕관의 무게에 짓눌려 숨이 막힐 때마다 민우는 그녀의 곁에서 다정한 위로가 되어 주었다.

할아버지인 서 회장 역시 처음에는 배경이 평범한 민우를 ‘데릴사위’라며 몹시 경계하고 탐탁지 않아 했다.

지안은 그런 할아버지와 맞서 싸우며 민우를 지켜냈다.

그가 그룹 내에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자신의 실적을 기꺼이 양보했고, 임원들 앞에서도 그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이제 서 회장도 민우의 성실함을 인정하고 그를 서그룹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늘 밤은 가평에 있는 서그룹 소유의 프라이빗 별장에서 둘만의 시간을 보내기로 한 날이었다.

원래는 함께 출발하기로 했으나, 민우는 오후에 급한 회사 일이 생겼다며 먼저 별장에 내려가 있겠다고 했다.

‘비도 오는데 운전 조심하라고 문자라도 보낼까? 아니야, 서프라이즈로 가는 거니까 연락하면 안 되지.’

지안은 와이퍼가 바쁘게 움직이는 앞 유리를 바라보며 액셀러레이터를 조금 더 깊게 밟았다.

밤이 깊어갈수록 빗줄기는 굵어졌다.

가평의 산길은 가로등 하나 없이 칠흑 같은 어둠에 묻혀 음산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지안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남편의 놀란 표정만을 상상했다.

연락도 없이 별장에 도착한 시간은 밤 11시가 훌쩍 넘어서였다.

깎아지른 듯한 가파른 절벽 위에 위태로우면서도 고풍스럽게 솟아 있는 별장은 1층과 2층 모두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지안은 차에서 내려 우산을 받쳐 들고 현관으로 걸어갔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선 순간, 지안은 흠칫 걸음을 멈췄다.

평소와는 다른 기묘한 공기가 감돌았다.

지나치게 고요하면서도, 묘하게 습하고 끈적한 기운이 거실을 채우고 있었다.

“민우 씨? 나 왔어. 자고 있어?”

대답은 없었다.

우산을 내려놓고 거실로 걸음을 옮기던 지안의 시선이 바닥에 흩어진 낯선 물건들에 꽂혔다.

현관에서부터 거실 소파로 이어지는 길목에 벗어던져진 남자의 넥타이.

민우가 오늘 아침 출근할 때 지안이 직접 매주었던 네이비색 실크 넥타이였다.

그리고 그 옆에 아무렇게나 툭 던져진, 붉은색 레이스가 달린 여성의 슬립 속옷과 값비싼 트렌치코트.

지안의 발걸음이 돌처럼 굳어졌다.

숨이 턱 막혔다.

저 트렌치코트와 속옷은 절대 지안의 것이 아니었다.

더 끔찍한 사실은, 그 옷들이 너무나도 낯익다는 점이었다.

불과 지난달, 이복동생인 서유라가 백화점에서 예쁘다며 조르길래 지안이 직접 카드를 긁어 사주었던 바로 그 브랜드의 한정판 코트였다.

쿵, 쿵, 쿵, 쿵.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며 귓가에 이명이 울리기 시작했다.

지안은 손에 든 시계 상자를 부서질 듯 꽉 쥔 채, 홀린 듯이 2층 침실을 향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계단씩 오를 때마다 두터운 마호가니 원목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소리가 점점 선명해졌다.

거칠고 탁한 숨소리.

살이 부딪히는 노골적인 파열음.

그리고 소름 끼치도록 익숙한, 콧소리가 잔뜩 섞인 여자의 교태로운 웃음소리였다.

“아학, 아앗…… 민우 오빠…… 너무 세…… 조금만 조심해. 지안이 언니가 눈치채면 어쩌려고 이래?”

“상관없어. 그 년이 여기를 어떻게 알아? 지금쯤 본사 창고에서 내가 엉터리로 던져준 연말 결산 서류나 뒤적거리면서 밤새우고 있겠지. 일밖에 모르는 멍청한 여자니까.”

남자의 목소리는 지안이 지난 3년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낯선 톤이었다.

언제나 나긋나긋하고 다정했던 강민우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는 낮고, 비열하며, 탐욕에 가득 찬 짐승의 목소리만 남아 있었다.

“그래도 언니 은근히 예민하잖아. 서 회장 노인네도 아직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고. 오빠, 우리 조금만 더 조심하자. 응?”

“서 회장? 하, 그 늙은이는 이미 끝났어. 내가 지시해서 매일 먹는 고혈압 약을 다른 약으로 바꿔치기해 뒀거든. 이미 약효가 돌아서 오늘내일하고 있어. 조만간 자연스럽게 심장마비로 깔끔하게 가실 거다. 서그룹은 이제 내 손아귀에 들어오는 거야, 유라야. 그리고 넌 내 옆에서 안방마님 노릇이나 하면 돼.”

문밖에서 그 끔찍한 대화를 모두 듣고 있던 지안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폐에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박힌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자신이 지금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안은 떨리는 손을 들어 문고리를 잡았다.

이 모든 게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알량한 희망조차 산산조각 낼 시간이었다.

달칵.

문이 열리고, 시야에 들어온 광경은 지안이 평생 쌓아온 세상을 통째로 무너뜨렸다.

넓은 킹사이즈 침대 위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엉켜 있던 두 남녀가 일제히 문 쪽을 바라보았다.

강민우. 그리고 서유라.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믿었던 남편과, 친동생처럼 아끼고 품어주었던 이복동생이었다.

“……너희들.”

지안의 입술에서 덜덜 떨리는 쇳소리가 새어 나왔다.

눈물이 고이기도 전에, 펄펄 끓는 용암 같은 분노와 충격이 전신을 난도질했다.

“어머, 언니?”

유라는 놀란 척 시트로 제 가슴을 가렸지만, 그녀의 눈동자에는 당혹감이나 죄책감 대신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찾은 듯한 비열한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반면 민우는 찡그렸던 미간을 느릿하게 펴고 서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당황해서 변명하거나 무릎을 꿇을 줄 알았던 남편은, 오히려 짜증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닥에 떨어진 샤워 가운을 여유롭게 걸치며 지안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서지안. 연락도 없이 여긴 왜 왔어? 매너 없게.”

“강민우…… 서유라…… 너희들 지금 내 눈앞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이게 다 무슨 상황이냐고 묻잖아!”

지안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지만 민우는 가볍게 콧방귀를 꼈다.

그는 탁자에 놓인 샴페인 잔을 들어 올리며 비아냥거렸다.

“보면 몰라? 네가 멍청하게 회사 일에 미쳐서 야근이나 하고 있을 때, 난 진짜 내 여자를 안고 있었던 거지. 그게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워?”

“진짜 여자? 강민우, 내가 네 아내야! 내가 3년 동안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나 아니었으면 넌 아직도 평사원 딱지 떼지도 못했을 텐데!”

“아내?”

민우가 샴페인 잔을 탁자에 소리 나게 내려놓더니 지안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는 지안의 턱을 으스러져라 거칠게 잡아 올렸다.

그의 손길에는 지안이 알던 그 어떤 온기도 없었다.

“서 회장 데릴사위 노릇 하면서 내가 얼마나 속으로 피를 토하며 기어 다녔는지 알아? 네 밑에서 비위 맞추며 개처럼 살았던 이유가 오직 널 사랑해서인 줄 알았어? 착각하지 마, 서지안. 난 네 껍데기와 서그룹이라는 배경이 필요했던 것뿐이야.”

지안은 턱 뼈가 부서질 것 같은 통증보다 가슴 한가운데를 찌르는 배신감이 더 끔찍하게 아팠다.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시선을 돌려 침대 위의 유라를 보았다.

어릴 적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서자로 들어와 외로워하던 이복동생.

본처의 딸인 지안은 그런 유라가 가여워, 친자매처럼 아끼고 챙겼다.

유라가 갖고 싶다는 것은 다 사주었고, 할아버지에게 혼날 때마다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다.

“유라 너…… 너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는데? 널 동생이라고 생각해서, 네가 해달라는 건 다 해줬잖아!”

유라는 침대 시트를 몸에 두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바로 그거야, 언니. 언니는 항상 다 가졌잖아! 서그룹의 적통 후계자, 대단하신 할아버지의 사랑, 돈, 명예, 그리고 완벽한 남편까지. 난 언제나 언니가 불쌍하다며 던져주는, 쓰다 남은 찌꺼기만 받아먹는 기분이었어. 그 알량한 동정심이 얼마나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지 알아?”

“찌꺼기라니…… 내가 널 얼마나 아꼈는데!”

“그 잘난 척하는 위선이 역겨웠다고! 솔직히 말할까? 민우 오빠, 원래 나랑 먼저 사귀던 사이였어. 언니가 중간에서 서그룹 후계자 자리를 굳히려고 번듯한 배경의 남편이 필요하니까, 오빠를 돈으로 뺏어간 거잖아. 우리는 그저 우리의 사랑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언니가 부당하게 훔쳐 간 것들을 되찾는 것뿐이야.”

유라의 목소리에는 깊고 어두운 열등감과 독기가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지안은 비틀거리며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미친 인간들이다.

단단히 미쳐버린 쓰레기들이었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코트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려 했다.

경찰이든, 할아버지 비서실이든, 이 지옥 같은 상황을 끝내줄 누군가에게 연락해야 했다.

당장 이 두 사람의 추악한 민낯을 만천하에 까발리고, 회사에서 완전히 매장시켜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민우의 행동이 한 박자 더 빨랐다.

그는 지안의 손목을 강하게 낚아채더니, 스마트폰을 빼앗아 대리석 바닥에 사정없이 내팽개쳤다.

콰직! 하는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최신형 액정이 산산조각 나며 파편이 튀었다.

“어디에 전화를 하려고? 서 회장?”

민우가 비열하게 웃으며 부서진 스마트폰을 구두 굽으로 짓밟았다.

“이미 늦었어, 서지안. 네가 지난달 해외 투자 건이라며 나한테 백지 서명해서 넘긴 법정 대리인 위임장 기억하지? 네 명의로 된 서그룹 핵심 계열사 지분 40%가 이미 어제 날짜로 내 페이퍼 컴퍼니로 완벽하게 넘어갔다. 서 회장이 지금 당장 쓰러진다고 해도, 경영권 방어는커녕 이사회에서 넌 바로 쫓겨날 거다.”

“뭐……? 위임장이라니? 그, 그건 싱가포르 신규 사업 건으로 네가 꼭 필요하다고 해서……”

“그러니까 네가 날 너무 맹신한 게 죄지. 서지안, 넌 밖에서는 얼음 마녀니, 천재 상속녀니 똑똑한 척 다 하면서도, 집 안에서는 나한테 한없이 바보 같았어. 그래서 등쳐먹기 참 편했지. 유라가 위조한 서류들에 네가 직접 도장을 찍어줄 때마다 우리가 뒤에서 얼마나 비웃었는지 넌 평생 모를 거다.”

지안은 전신이 얼음물에 빠진 것처럼 차갑게 식어갔다.

남편이라는 자가 자신을 파멸시키기 위해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철저하게 덫을 놓고 기다려왔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은 그가 던진 거짓된 사랑의 달콤한 말에 속아, 제 발로 눈을 가린 채 덫에 걸어 들어왔다는 사실.

“이 더러운 사기꾼 새끼들…… 내가 가만 둘 것 같아? 법대로 해! 내가 내일 당장 변호사들 동원해서 너희 둘 다 횡령이랑 사기로 감옥에 쳐넣을 거야! 서그룹 정보망이 그렇게 만만한 줄 알아?”

지안이 짐승처럼 악을 쓰며 민우의 뺨을 향해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이 닿기도 전에 민우의 크고 억센 손이 지안의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

짝-!!!

고막이 찢어질 듯한 파찰음과 함께 지안이 힘없이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눈앞에 별이 튀었고, 입술이 터져 비릿한 쇳물 같은 피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바닥에 쓰러지는 충격에 손에 꼭 쥐고 있던 가죽 시계 상자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정성스럽게 포장된 리본이 풀리며,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남편을 위한 선물이 비참하게 바닥에 쏟아졌다.

민우는 바닥에 떨어진 시계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더니, 구두 끝으로 그것을 툭 차서 침대 밑으로 굴려버렸다.

“법대로? 네가 무슨 수로? 서지안, 이제 너한테는 아무것도 없어. 회사도, 돈도, 그 잘난 회장 할아버지도. 넌 그냥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껍데기일 뿐이야.”

“오빠, 대충 정리해. 피 보기 전에.”

어느새 가운을 걸쳐 입은 유라가 다가와 민우의 팔을 감싸 안았다.

“이 년이 살아서 내일 아침에 회사에 나타나면 골치 아파지잖아. 어차피 오늘 밤 가평엔 폭우 경보까지 내렸어. 비도 많이 오는데, 빗길에 불행한 사고로 죽은 걸로 깔끔하게 끝내는 게 어때? 아내를 잃고 슬퍼하는 비운의 후계자, 완벽한 시나리오잖아.”

유라의 소름 끼치도록 태연한 음성에 지안은 전신에 한기가 돌았다.

단순한 불륜과 사기가 아니었다.

그들은 완벽한 범죄를 위해, 처음부터 자신을 오늘 이 별장에서 죽일 계획이었다.

민우의 눈빛이 살의(殺意)로 번뜩였다.

강민우의 눈에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짐승의 굶주린 눈빛이었다.

지안은 본능적으로 죽음의 공포를 감지했다.

여기서 저들에게 잡히면 끝이다. 죽는다.

그녀는 찢어진 원피스 자락을 움켜쥐고 필사적으로 바닥을 기어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딜 도망가!”

뒤에서 민우의 거친 고함과 함께 무거운 발소리가 쫓아왔다.

지안은 맨발로 복도를 내달려 계단을 굴러떨어지듯 내려갔다.

현관문을 걷어차듯 열고 별장 밖으로 뛰쳐나가자,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쏟아지는 장대비가 그녀의 온몸을 때렸다.

차가운 빗물이 눈을 가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달렸다.

주차해 둔 차에 타서 시동을 걸어야 했다.

하지만 너무 당황한 나머지 차 키를 거실 바닥에 떨어뜨리고 온 것이 뒤늦게 떠올랐다.

어쩔 수 없이 산길을 따라 아랫마을로 내려가 구조를 요청해야 했다.

하지만 가평 별장의 지리적 구조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어둠 속에서 방향을 잃은 지안은 정문이 아닌, 별장 뒤편의 깎아지른 절벽과 이어지는 나무 데크 전망대 쪽으로 달려가고 말았다.

발밑이 진흙탕에 미끄러져 몇 번이나 크게 넘어졌다. 무릎이 깨지고 피가 빗물에 씻겨 내려갔지만 아픔을 느낄 새도 없었다.

어느새 지안은 벼랑 끝 난간으로 몰려 있었다.

데크 아래는 시커먼 강물이 집어삼킬 듯 굽이치는 수십 미터 아래의 계곡이었다.

뒤를 돌아보자, 우산도 쓰지 않은 채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민우와 유라의 실루엣이 보였다.

번개가 번쩍이며 그들의 기괴하게 일그러진, 웃고 있는 얼굴을 하얗게 비추었다.

“하아, 하아…… 오지 마! 다가오면 뛰어내릴 거야! 내 시체가 발견되면 너희들도 무사하지 못해!”

지안이 난간을 등진 채 악을 쓰며 소리쳤다.

하지만 거친 폭우와 천둥소리에 그녀의 목소리는 힘없이 흩어졌다.

“뛰어내린다고? 그거 고맙네. 우리 손에 피 안 묻히게 해줘서.”

민우가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차갑게 비웃었다.

“언니, 참 불쌍해. 평생 태양처럼 높이 떠서 오만하게 살다가, 이렇게 진흙탕에서 개처럼 비참하게 가는 기분이 어때?”

유라는 민우의 뒤에 서서 팔짱을 낀 채, 마치 재미있는 영화의 결말을 구경하는 관객처럼 즐거워하고 있었다.

“내가…… 내가 너희를 저주할 거야.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반드시 복수할 거야!”

지안의 핏발 선 눈에서 빗물과 뒤섞인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억울함과 분노가 가슴을 톱으로 썰어내는 것 같았다.

스스로의 어리석음이 뼈에 사무치도록 원망스러웠고, 인간의 탈을 쓴 저 위선자들의 추악함에 치가 떨렸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민우가 지안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는 지안의 얇은 어깨를 양손으로 으스러져라 거칠게 움켜쥐었다.

“잘 가라, 서지안. 다음 생에는 주제 파악 좀 하고, 너무 사람 믿지 말고 살아.”

“이 악마 같은 자식아――!”

지안이 민우의 가슴팍을 붙잡고 늘어지며 발버둥 쳤지만, 건장한 남자의 완력을 이길 수는 없었다.

민우는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지안의 손을 뿌리치고, 전신에 힘을 실어 그녀의 가슴을 절벽 쪽으로 거칠게 밀쳐냈다.

쩍, 우두둑-!

낡고 비에 젖은 나무 난간이 지안의 무게와 민우의 강한 힘을 이기지 못하고 속절없이 부서져 나갔다.

지안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

발밑에 닿아 있던 단단한 땅이 사라지고, 지독한 부유감이 온몸을 덮쳤다.

아래는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절벽.

그리고 날카로운 암초들이 도사리고 있는 얼음장 같은 강물이었다.

빠르게 추락하는 짧은 순간, 마치 시간이 느려진 것처럼 지안의 시야에 난간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두 사람의 모습이 선명하게 박혔다.

떨어지는 자신을 보며 서로의 허리를 끌어안고 승리감에 도취된 미소를 짓는 강민우와 서유라.

‘내가 왜 죽어야 해?’

‘왜 나만 이런 억울한 지옥을 겪어야 하는 거지?’

차가운 칼바람이 온몸을 할퀴고, 시야가 암흑 같은 허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 지안은 남은 생명력을 모두 쥐어짜 내어 마음속으로 피맺힌 절규를 토해냈다.

‘신이시여, 만약 당신이 존재한다면…….’

‘제발 내게 단 한 번의 기회를 주세요.’

‘저 짐승만도 못한 악마들의 목을 내 손으로 직접 비틀어버릴 수 있는 기회를……!’

쿠우우웅-!!!

연약한 신체가 거친 바위에 부딪히며 뼈가 으스러지는 둔탁한 파열음이 협곡에 메아리쳤다.

서지안의 의식은 순식간에 깊고 차가운 심연의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지독한 고통마저 차단되어 버린, 완벽하고 비참한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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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헉……! 허억, 헉……!”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마치 거친 사포로 기도를 박박 긁어내는 듯한 끔찍한 고통에 눈이 번쩍 뜨였다. 입을 쩍 벌리고 물 밖으로 내동댕이쳐진 물고기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아, 아아……!”전신이 산산조각 나는 듯한 끔찍한 파열통. 차가운 강물 속으로 가라앉으며 허파에 물이 차오르던 그 생생한 감각이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지안은 비명을 지르며 제 목을 부여잡았다.하지만 손끝에 닿은 것은 차갑고 날카로운 계곡의 암초가 아니었다. 부드럽고 푹신한 최고급 구스다운 이불의 촉감이었다. 귓가를 때리던 미친듯한 폭우와 천둥소리도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짹짹거리는 평화로운 새소리와 함께, 커튼 틈새로 눈이 부실 만큼 따스한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여기, 어디야.”지안은 덜덜 떨리는 양손을 들어 허공을 더듬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손톱이 다 빠져버렸던 손가락이 멀쩡했다. 흉터 하나 없이 깨끗하고 하얀 두 손.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상체를 일으켰다. 시야에 들어온 풍경은 너무나도 익숙해서 오히려 이질적이었다.연한 크림색의 실크 벽지. 방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캐노피 침대. 그리고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고풍스러운 화장대와 수많은 향수병들.이곳은 가평의 별장이 아니었다. 결혼 전, 자신이 평생을 살아왔던 한남동 서 회장 저택의 본가, 바로 자신의 방이었다. 강민우와 결혼하면서 신혼집으로 분가한 이후로는 명절에만 가끔 들르던 곳.지안은 홀린 듯이 침대에서 벗어났다. 다리에 힘이 풀려 카펫 위로 맥없이 쓰러졌지만, 아픔을 느낄 새도 없었다. 그녀는 네 발로 기다시피 화장대 앞으로 다가갔다.화장대 거울 속에 비친 여자는 지안이 아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다. 결혼 후 그룹의 후계자 자리를 지키기 위해 밤낮없이 일에 치여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았던 피곤한 30대의 서지안이 아니었다. 생기가 돌고, 볼살이 미세하게 남아 있는, 그 어느 때보다 눈부시게 빛나던 20대 후반

  • 죽음 대신 너의 파멸을   1화 가장 완벽한 날의 지옥

    결혼 3주년 기념일. 서지안은 남편 강민우를 위한 깜짝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다.조수석에 놓인 고급스러운 가죽 상자 안에는 최고급 명품 시계가 들어 있었다. 그가 평소에 지나가듯 예쁘다고 말했던 한정판 모델. 지안은 그 시계를 구하기 위해 몇 달 전부터 해외 바이어를 통해 백방으로 수소문했고, 마침내 오늘 아침 손에 넣을 수 있었다.“민우 씨가 이거 보면 얼마나 좋아할까.”어두운 밤길을 달리는 차 안에서, 지안의 입가에 맑고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창밖으로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햇살이 비추는 것처럼 따뜻하고 설레었다.지난 3년간의 결혼 생활은 지안에게 유일한 안식처였다. 능력 있고 다정한 남편은 언제나 그녀를 먼저 생각했다. 재계 서열 5위, 대한민국 굴지의 대기업 서그룹의 적통 후계자라는 무거운 왕관. 그 왕관의 무게에 짓눌려 숨이 막힐 때마다 민우는 그녀의 곁에서 다정한 위로가 되어 주었다.할아버지인 서 회장 역시 처음에는 배경이 평범한 민우를 ‘데릴사위’라며 몹시 경계하고 탐탁지 않아 했다. 지안은 그런 할아버지와 맞서 싸우며 민우를 지켜냈다. 그가 그룹 내에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자신의 실적을 기꺼이 양보했고, 임원들 앞에서도 그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이제 서 회장도 민우의 성실함을 인정하고 그를 서그룹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오늘 밤은 가평에 있는 서그룹 소유의 프라이빗 별장에서 둘만의 시간을 보내기로 한 날이었다. 원래는 함께 출발하기로 했으나, 민우는 오후에 급한 회사 일이 생겼다며 먼저 별장에 내려가 있겠다고 했다.‘비도 오는데 운전 조심하라고 문자라도 보낼까? 아니야, 서프라이즈로 가는 거니까 연락하면 안 되지.’지안은 와이퍼가 바쁘게 움직이는 앞 유리를 바라보며 액셀러레이터를 조금 더 깊게 밟았다. 밤이 깊어갈수록 빗줄기는 굵어졌다. 가평의 산길은 가로등 하나 없이 칠흑 같은 어둠에 묻혀 음산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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