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황후는 두 번 죽지 않는다: Chapter 1 - Chapter 10

30 Chapters

제1화

서안하가 눈을 떴을 때, 자신이 열네 살이 되던 해로 돌아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침 후작부에서는 오라버니 서운민의 장례가 치러지고 있었다.새하얀 여우털 망토를 걸친 그녀는 후작부의 회랑을 천천히 걸었다. 처마 아래 걸린 흰 초롱이 그녀의 손끝에 스치자 가볍게 흔들렸다.그때, 시녀 남연이 황급히 손난로를 그녀 손에 쥐여주며 나직이 말했다.“아가씨,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우선 몸부터 돌보셔야지요.”상심?서안하는 잿빛으로 가라앉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희미하게 웃었다.그녀는 조금도 슬프지 않았다. 죽은 그 사람은 애초에 그녀의 친오라버니가 아니었으니까.당시 온 소실은 서안하의 어머니인 당 마님과 같은 날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제 아들을 몰래 바꿔치기해 후작부의 적자로 둔갑시켰다. 반면, 서안하의 친오라버니인 서운기는 졸지에 서자가 되어, 어린 시절 내내 온 소실의 학대를 받으며 자라야 했다.서안하는 곧장 빈소로 향했다.당 마님은 두 눈이 퉁퉁 부은 채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통곡하는 모습이었다.“어머니, 며칠째 한숨도 못 주무셨다 들었습니다. 우선 방으로 돌아가 조금 쉬세요.”서안하는 시녀에게 눈짓했고, 그대로 당 마님을 부축해 억지로 빈소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하지만 그녀는 내내 울부짖으며 몸부림쳤다.“민아! 내 아들아! 난 안 돌아간다! 우리 민이 곁을 지켜야 해!”서안하는 당 마님을 침상에 눕히고 이불을 여며준 뒤, 시녀들을 모두 물렸다. 그러고는 그녀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어머니, 이제 그만 우세요. 서운민은 어머니 아들이 아닙니다. 제 친오라버니도 아니고요.”당 마님은 흐느끼다 말고 그대로 숨이 턱 막힌 듯 굳어버렸다.“너…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게냐?”서안하는 침상 곁에 앉아 당 마님의 손을 꼭 감싸 쥐었다. 깊은 우물처럼 차분한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제 말은, 서운민은 애초에 어머니 아들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그 사람은 온 소실의 아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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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온 소실의 손목은 낯선 어멈에게 단단히 붙들린 채 허공에 멈춰 있었다.곧이어 어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고작 후작부의 이름 없는 소실 주제에 감히 국공부 사람을 함부로 치려 드십니까? 대체 규율은 어디에다 처박아두고 배운 겁니까?”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유 어멈이 급히 앞으로 나섰다.“국공부의 규율도 별반 대단한 것 같진 않군요. 고작 노비 하나가…”그 순간, 그림자 속에 서 있던 서안하가 눈 밑에 깔린 음습한 기색을 감춘 채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선 어멈은 제가 어렵게 호국공부에서 모셔온 분입니다. 유 어멈이 불만이 있는 건가요, 아니면 온 소실께서 불만이 있는 건가요? 그럼 우리 함께 할머니 앞에 가서 말씀드려볼까요?”그제야 온 소실도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았다.고작 노비 하나와 계속 실랑이를 벌이는 건 체면만 깎아먹는 일이었다. 더구나 상대는 호국공부 사람이다. 일이 커질수록 손해를 보는 쪽은 결국 자신이었다.온 소실은 억지로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억울한 기색을 내비쳤다.“다 오해다. 됐으니 이쯤에서 끝내자꾸나. 괜히 고모의 휴식까지 방해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서안하는 담담히 입꼬리를 올렸다.“온 소실께서는 앞으로 국공부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는 게 좋겠군요. 다 어머니 체면을 내세워 어렵사리 모셔온 분들입니다. 지금 후작부에 사람이 부족하다는 건, 누구보다 온 소실께서 잘 아시지 않습니까.”며칠 전 당 마님은 후작부에서 장례를 도울 사람을 더 보내달라고 요구했었다. 하지만 온 소실은 호국공부 쪽에서 직접 사람을 보내 서운민의 장례를 더욱 성대하게 치르길 원했다. 그래서 일부러 후작부의 인력이 부족하다는 핑계를 대며 당 마님더러 알아서 방법을 찾으라 떠넘겼던 것이다.온 소실은 가슴이 턱 막힌 듯 답답했지만 마땅히 반박할 말도 없어 결국 억지로 화제를 돌렸다.“아까 홍달 대사께서 다녀갔다고 들었는데?”서안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단 한마디 정보도 흘릴 생각이 없었다.그러자 온 소실이 다시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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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천요국에는 사람이 죽은 뒤 사흘째 되는 날, 승려가 경을 외우며 혼백을 달래고 망자의 넋을 천도하는 풍습이 있었다.서안하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어젯밤 저는 호국공부의 이름으로 홍달 대사를 후작부에 모셔와 오라버니의 천도 의식을 부탁드렸습니다. 헌데 홍달 대사께서는 오라버니의 생년월일을 살펴보시더니 연신 고개만 저으시고는, 천도할 수 없는 명이라 말씀하시곤 그대로 떠나셨습니다. 이후 저는 다시 양현 선생을 모셔왔습니다. 선생께서는 오라버니의 시신을 살펴보신 뒤, 본래 이렇게 일찍 죽을 운명이 아니었으나 감당할 수 없는 부귀를 억지로 떠안아 명줄이 뒤틀린 탓에 이런 횡액을 당했다고 하셨습니다.”순간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릴 듯한 정적이었다.서안하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노부인을 바라봤다.“할머니, 양현 선생의 말씀은 대체 무슨 뜻인가요? 명줄을 억지로 바꿨다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노부인은 어색한 기색으로 이마의 머리띠를 매만지며 손녀의 시선을 피했다.“풍수쟁이들 말은 반만 믿으면 되는 법이다. 어찌 그 말을 전부 다 믿겠느냐.”서안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할머니 말씀도 맞습니다. 헌데 이런 일은 차라리 믿고 조심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수명은 물론, 후작부의 운세까지 걸린 일이라 저도 결국 양현 선생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그때 당 마님이 또다시 흐느끼며 울음을 터뜨렸다.“난 인정 못 한다! 절대 그렇게는 못 한다!”서안하는 얼른 무릎을 꿇고 몸을 노부인 쪽으로 기울인 채, 붉어진 눈으로 애써 설득했다.“할머니, 대의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오라버니도 중요하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건강 역시 가볍게 여길 수는 없습니다. 후작부의 앞날 또한 마찬가지고요.”노부인은 아직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어째서 갑자기 자신과 노후작의 수명, 후작부의 운세 이야기까지 나온단 말인가.그녀는 곧장 서안하를 제 곁으로 끌어당기며 물었다.“양현 선생이 정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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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전생의 서안하는 물에 빠진 뒤 크게 앓아누웠고, 며칠이나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겨우 깨어났다.당 마님은 성정이 강한 사람이었다. 친정 오라버니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홀로 서운민의 장례를 치러냈지만, 돌아온 건 원망뿐이었다.노부인과 온 소실은 하나같이 호국공부가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며, 장례가 성대하지 못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당 마님. 그녀의 본명은 당초령이었다.그녀는 건안후부에 시집온 뒤로 줄곧 말수가 적었고, 마음은 이미 죽은 사람처럼 메말라 있었다. 거기에 아들을 잃은 충격까지 겹치자 결국 병을 얻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하지만 서안하는 줄곧 어머니의 죽음에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고 의심해 왔다.분명 온 소실이 손을 썼으리라 의심했지만, 끝내 증거를 찾지 못했을 뿐이었다.서안하는 조심스레 어머니를 부축해 자리에 앉힌 뒤 남연에게 보양탕을 가져오라 시켰다. 그러고는 직접 숟가락을 들어 어머니에게 먹여주었다.당초령은 아이가 바뀌었다는 진실을 안 뒤로 줄곧 가슴을 짓누르던 울분이 조금은 풀린 상태였다.이제야 한숨 돌리고 나니 정말 허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딸에게서 그릇을 건네받아 조금씩 떠먹으며 물었다.“안하야, 네 오라버니는 잘 안치했느냐? 의원은 불러 상처를 보게 했고?”서안하는 웃으며 답했다.“어머니, 큰아버님께서 알아서 하실 텐데 뭐가 걱정이세요?”당초령의 눈에 순간 짙은 쓸쓸함이 스쳤다가 금세 사라졌다.“네 큰아버지는… 원래 믿을 만한 분이시지.”서안하는 큰아버지 서성일의 너그럽고 따뜻한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와 비교하자니, 둘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전생의 그녀는 깊은 궁궐 안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냉궁에만도 몇 번이나 드나들었는지 모른다.만약 큰아버지와 그 집안 사람들이 한결같이 자신을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궁 밖에서 발 벗고 나서 대신 움직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끝내 태후의 자리에 올라 마지막 승자가 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그 시절 그녀는 늘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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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당초령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민이가 죽던 날, 네 할머니와 온 소실은 위씨 집안 이야기를 꺼냈었다. 그때는 정신이 너무 없어서 제대로 듣질 못했어. 무슨 일을 꾸미려는 건지도 몰랐고…”서안하가 차갑게 말을 받았다.“할머니와 온 소실이 노린 건 결국 위 아가씨의 명예를 짓밟는 일이었겠죠.”전생의 서안하는 강물 속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뒤 크게 앓아누웠고 당초령 역시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넋이 나간 채 하루하루 무너져 내렸다. 그러는 사이 노부인과 온 소실은 서운민을 따라다니던 시종들의 입을 통해 사건의 전말을 모두 알아냈다. 하지만 그들은 위씨 집안에 사과하기는커녕, 되레 사람들을 시켜 대대적으로 위씨 저택 앞에 몰려가 소란을 피웠다.후작부의 적손자 서운민이 위 아가씨를 구하려다 목숨을 잃었고, 위채린은 이미 서운민과 정을 통했던 사이라는 말을 떠들고 다닌 것이다.위채린은 끝없이 퍼지는 유언비어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어 결백을 증명했다.하지만 그것으로도 후작부의 악행은 끝나지 않았다.노부인과 온 소실은 위씨 가문이 장례를 치르는 와중에도 중매쟁이를 앞세워 요란하게 혼수를 보내며, 서운민과 위채린의 사혼을 치르겠다고 나섰다.딸이 죽고 나서까지 후작부의 모욕을 피하지 못하게 되자, 위 부인은 분노가 치밀어 오르다 끝내 피를 토했다. 그녀는 관 위에 핏자국을 남긴 채 그 자리에서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훗날 서안하가 병에서 회복한 뒤, 뒤늦게라도 수습하려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위 대인은 온 가족을 이끌고 경성을 떠난 뒤였다.*십 년 후.위씨 집안의 막내딸 위다빈이 절색의 미모로 선발되어 입궁했다.그녀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 후작부와 서안하를 몰아세웠고, 결국 서로 깊은 상처만 남긴 채 공멸에 가까운 결말을 맞이했다.서안하는 냉궁에 갇혔고, 위다빈 역시 뱃속 황자를 이용해 복수하려 한 죄로 황제의 총애를 잃은 뒤 끝내 독주 한 잔을 하사받아 죽었다.겉으로 보면 마지막에 살아남은 건 서안하였지만, 사실은 누구 하나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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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온 소실이 홱 고개를 돌렸다. 문가에는 서안하가 단정히 서 있었다. 가녀린 자태는 고왔으나, 입가에 걸린 웃음만큼은 어딘가 장난스럽고도 서늘했다.온 소실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지금 나와 사람을 두고 다투겠다는 것이냐?”서안하가 되레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온 소실께서 계씨댁을 팔아버리시려는 것 아니었나요? 마침 제 처소엔 사람이 부족하니 번거롭게 인신매매상까지 부르실 필요 없습니다. 몸값 문서만 제게 넘겨주시면 됩니다.”그제야 온 소실의 입가에 음습한 웃음이 천천히 번졌다.“이제야 집안에서 누가 주인 노릇을 하는지 깨달았다는 거구나.”서안하는 진심 어린 얼굴로 웃었다.“곧 그럴 수 없게 될 텐데요.”온 소실의 표정이 굳었다.“그게 무슨 뜻이냐?”“말 그대로예요.”붉은 입술과 흰 치아가 어우러진 서안하의 얼굴은 마치 눈보라 속에 피어난 붉은 매화 같았다.온 소실은 이유 모를 불안감에 가슴이 서늘해졌다.서안하가 느긋한 미소를 머금은 채 다시 입을 열었다.“그럼… 제 시녀 하나와 바꾸시는 건 어떨까요?”온 소실은 생각할 틈도 없이 잘라 말했다.“안 바꾼다!”후작부 안 노비의 몸값 문서는 모두 그녀 손에 들려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저 어린 계집아이와 거래를 해야 한단 말인가.서안하는 눈을 내리깔았다.“바꾸지 않으신다면 어쩔 수 없네요.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그 말을 남긴 채 그녀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뒤따르던 시녀들과 어멈들도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그런데 낯선 얼굴의 한 어멈만은 미간을 찌푸린 채 몇 번이고 방 안을 돌아보았다.날카롭다가도 의심스러운 눈빛이 잠시 스쳤고, 이윽고 시선이 온 소실 얼굴에 머물렀다. 그 눈빛 끝에는 희미한 경멸까지 어려 있었다.어멈은 고개를 한 번 저은 뒤에야 사람들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온 소실은 그 몇 번의 시선만으로도 마음이 어지러워졌다. 서안하가 갑자기 나타났다가 왜 급히 돌아간 건지,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었다.“유 어멈, 저 사람은 누구냐? 방금 그 눈빛은 또 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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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위씨 저택.위채린은 또다시 악몽에서 깨어났다.꿈속에서 건안후부 사람들은 위씨 저택 문 앞에서 곡을 하며 소란을 피웠고, 새하얀 상등을 대문에 걸어 두었다. 문미에는 흰 천이 길게 드리워졌고, 사람들은 거리마다 떠들어댔다.후작부 적손 서운민이 그녀를 구하려다 죽었다고. 그리고 그녀는 진즉 서운민에게 몸을 내준 여자라고.치욕과 분노에 짓눌린 위채린은 결국 몇 자 되는 흰 비단으로 목을 매어 결백을 증명할 수밖에 없었다.그런데 죽고 나서도 후작부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중매쟁이까지 데려와 요란한 혼례 행렬을 꾸미고는, 위씨 가문에 예물을 들이밀며 그녀와 서운민의 사혼을 치르겠다고 했다.결국 어머니는 그녀의 관 앞에서 억울함과 분통을 이기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그 악몽은 숨조차 막힐 만큼 생생했다.위채린은 무릎을 끌어안고 침상 머리맡에 웅크린 채 떨었다. 얼굴은 식은땀과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방문이 열리며 위 부인이 들어왔다. 딸의 모습을 본 순간 가슴이 무너져 내린 그녀는 황급히 위채린을 끌어안았다.“채린아, 내 불쌍한 딸… 괜찮다, 이제 괜찮아. 그 악독한 놈은 죽었잖니. 이제 우린 더 이상 그자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위채린은 어머니의 따뜻한 품에 얼굴을 묻었다.꿈속에서 자신 때문에 어머니가 죽어가던 모습이 떠오르자, 억눌렀던 슬픔이 한순간에 터져 나왔다.“어머니… 어머니… 계셨군요… 계셔서 다행이에요. 흑, 흑… 어머니만 계시면 저는 아무것도 무섭지 않아요…”딸이 횡설수설하며 우는 모습을 보자, 위 부인은 딸이 충격으로 정신을 놓은 줄로만 알고 가슴이 녹아내릴 듯 아팠다.그녀는 차갑게 식은 딸의 뺨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달랬다.“우리 채린아, 어머니는 언제나 네 곁에 있으니 무서워하지 말거라. 네 아버지도 말씀하셨다. 정말 안 되면 경성을 떠나자고. 아무도 우릴 모르는 곳으로 가면 된다고.”“네 어머니 말이 맞다.”사람보다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공부주사 위충재였다.“딸아, 두려워할 것 없다. 천자 폐하 발아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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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들어선 이는 마흔 즈음 되어 보이는 사내였다. 반듯한 턱선에 눈빛은 맑고 곧았으니, 예부원외랑 강우심이었다.그리고 그는 또 다른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바로 위채린과 위다빈 자매의 의부였다.한 시진 전, 그는 위채린의 이름으로 보내온 편지 한 통을 받았다.그런데 펼쳐 본 순간 알게 되었다. 그 편지는 사실 건안후부 적손녀가 쓴 것이었다.편지에는 한 시진 뒤 위씨 가문에 들러 달라는 말과 함께, 위채린의 명예를 지켜 달라는 부탁이 적혀 있었다. 또한 서안하의 아버지인 서성현 역시 그 자리에 올 것이니, 겉으로만이라도 추천을 약속해 승진을 도와주는 척해 달라는 내용도 있었다.특히 ‘겉으로만 응해 달라’는 그 몇 글자는 참으로 의미심장했다.게다가 편지에는 일이 끝난 뒤 절대 강 대인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겠다는 말까지 적혀 있었다.꽤 흥미로운 제안이었다.그래서 강우심은 오지 않을 수 없었다.의녀가 물에 빠진 일이 건안후부 적장손 서운민의 죽음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속이 끓어오를 만큼 분했지만, 그 역시 어쩔 도리가 없었다.무엇보다 의녀의 명예가 걸린 일이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사건이 터지기 전, 건안후작의 아들 서성현은 여러 차례 그를 연회에 초대한 적이 있었지만 그는 번번이 거절했다.오랫동안 되는대로 세월만 보내 온 사람을 추천해 실무가 필요한 자리에 앉히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그러나 며칠 전부터 그의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만약 위씨 가문을 도울 수만 있다면, 어느 정도는 눈감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그런데 바로 그때, 건안후부에서 저 편지가 도착한 것이다.그래서 그는 먼저 직접 와 보고 싶었다. 그 아가씨는 대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일까?막상 마주한 서안하는 나이는 어렸지만 일 처리만큼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얼굴 또한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동그란 얼굴에는 아직 앳된 살집이 조금 남아 있었고, 옥처럼 흰 피부는 가장 귀한 백옥보다도 더 부드럽고 윤기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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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서안하는 아버지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미 모든 말을 완벽히 외워 두었고, 그대로 다시 말할 수 있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아버지, 저는 오늘 채린 아가씨께 감사 인사를 드리려고 예물을 준비해 찾아왔습니다. 헌데 마침 강 대인께서도 이곳에 계시더군요. 평소 아버지께서 강 대인을 자주 칭찬하셨기에, 함께 이야기를 나누시라고 사람을 보내 모셔왔습니다.”맑고 또렷한 목소리였다. 발음 하나 흐트러짐 없이 선명했다.강우심과 서성현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어리둥절해했다. 하지만 곧 하나둘 상황을 깨닫기 시작했다.결국 이 모든 사람들을 불러 모은 건 전부 서안하였던 것이다.위채린의 눈에는 내내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현실은 꿈과 정반대라는 걸.그녀는 조용히 서안하 곁으로 다가갔다.한 손으로는 위다빈의 머리를 쓰다듬고, 다른 손으로는 서안하의 손을 꼭 잡았다.서안하의 눈빛은 담담했지만, 위채린에게만큼은 세상 가장 찬란하고도 안심되는 빛처럼 느껴졌다.한편, 그쪽에서는 서성현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이어받고 있었다.그는 서안하를 두고 철이 들었다느니, 은혜를 알 줄 안다느니, 그런 것이 바로 서가의 가풍이라느니 하며 떠들어댔다.그러자 강우심이 마침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서 대인께선 정말 훌륭한 따님을 두셨군요! 복도 많으십니다, 참으로 복이 많으십니다! 서 대인께서 지금 자리에서 지내신 지도 꽤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슬슬 더 높은 자리로 옮기실 때도 되었지요.”서성현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깊이 허리를 숙였다.“강 대인께서 좋게 봐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강우심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과찬은요. 이렇게 분별력 있고 총명한 딸을 길러 내셨으니, 서 대인께선 집안일과 관직 생활을 모두 훌륭히 조율하고 계신 게 아니겠습니까. 조정엔 바로 그런 인재가 필요한 법이지요.”“과찬이십니다, 과찬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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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일이 이 지경까지 흘러오자 온 소실도 더는 모를 수 없었다.자신은 서안하에게 완전히 당한 것이다.그녀는 문득 떠올렸다. 서운민 곁을 지키던 몇몇 시종들의 몸값 문서는 사실 줄곧 당 마님 손에 있었다는 사실을.사람은 자신이 골랐지만, 당 마님의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몸값 문서를 넘겨주었던 것이다.그리고 지금, 그 문서를 손에 쥔 사람들이 발매를 운운하며 협박한다면, 저 시종들이야 순식간에 입장을 바꾸는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어째서 서성현이 여기에 나타났으며, 또 어째서 이유도 모른 채 서안하와 한편이 되어 움직이고 있느냐는 것이었다.대체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온 소실은 속으로 피가 끓을 만큼 증오했지만,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서안하를 죽일 듯 노려볼 뿐이었다.서안하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가볍게 훔쳐 낸 뒤, 차갑게 몰아붙였다.“사람들은 흔히 망자는 존중받아야 한다고 하지요. 헌데 온 소실께서는 오라버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그분 명예를 더럽히고, 품행이 문란한 난봉꾼처럼 몰아가고 계세요. 대체 무슨 속셈이신가요?”그 한마디에 구경꾼들도 비로소 상황을 깨달았다.오늘 이 소동은 결국 소실이 적자를 깎아내리기 위해 벌인 일이었던 것이다. 그 안에 숨은 속셈이 결코 단순할 리 없었다.“분명 자기 아들을 올리려고 죽은 적자를 밟아대는 거겠지.”“그러니까. 아니면 뭣 하러 저러겠어?”“헌데 위 아가씨까지 끌어들이는 건 너무 뻔뻔하잖아. 사람 죽으라고 몰아붙이는 거나 다름없네!”“그래도 후작부 안에 사리 분별하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지. 직접 나와 위 아가씨 결백을 증명해 주잖아.”“위 아가씨는 마차에서 내린 적도 없다는데 자꾸 물에 빠졌다고 우겨? 사람 명예 망치는 게 입 하나면 다냐?”“위 아가씨는 오히려 의로운 사람이었네. 자기 시녀들까지 보내 사람을 구했잖아. 저 후작부 소실은 속이 썩어 문드러졌어. 천벌 받을 인간이야!”사람들의 시선은 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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