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Chapter 961 - Chapter 970

992 Chapters

제961화

시연은 이 병원이 낯설었다.결국 수간호사가 같이 동행해 경비팀으로 향했다.문을 열고 들어서자, 먼저 들려온 건 경비원의 거친 목소리였다.“거기, 지금 당신한테 말하는 거 안 보여요? 핸드폰 내놓으세요!”유건은 의자에 느긋하게 기대앉아 있었다. 긴 팔을 테이블 위에 걸치고, 손가락으로 리듬을 타듯 탁, 탁, 책상을 두드리고 있었다.그리고 입은 굳게 다문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지금 뭐 하는 겁니까? 말 안 들려요?”경비원은 점점 언성이 높아졌다.그러자 유건은 느긋하게 고개를 들어 경비원을 힐끗 보더니, 다시 시선을 돌렸다.무시... 완벽한 무시였다.“이 사람 뭐야, 지금?”쾅!경비원은 결국 책상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이게 무슨 태도입니까?!”다른 경비원이 나섰다.“됐어, 이런 사람은 말 섞지 마. 경찰 불러! 우리 기록도 다 있어, 수상하게 배회한 데다 협조도 안 한다니!”“지금 경찰 부릅니다? 들려요, 안 들려요?!”그러자 그제야 유건이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치켜 올린 입술 끝, 뾰족한 웃음.“좋죠. 얼른 불러요. 이거... 진짜 무서워서 어쩌나?”그 순간, 문 앞에 들어선 시연은 머리가 지끈거렸다.‘대체... 이 사람 뭐 하는 건데...’‘유치해, 진짜 유치해.’‘이런 꼴 보기 싫어서라도 들어오기 싫었는데...’하지만 이미 늦었다.“시연!”유건이 고개를 홱 돌려 그녀를 보더니, 순식간에 의자에서 일어나 섰다.“앉으세요!”경비원이 팔을 올려 막으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비켜요.”유건은 그 손을 가볍게 밀어내며, 시연 쪽을 가리켰다.“보이죠? 제 아내 왔잖아요!”두 경비원은 동시에 시연 쪽을 돌아봤다.물론 시연 얼굴은 몰랐지만,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라는 건 한눈에 알 수 있었다.더군다나, 옆에 선 수간호사는 병원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아, 저... 진짜였네?”“진짜 부인이었네...”‘그러니까.’유건은 코웃음을 치며 천천히 시연에게 걸어왔다.“날 데리러 왔어? 혹시 방해
Read more

제962화

“고 대표님, 사모님 오셨으니까 더 이상 두 분 시간 방해하지 않겠습니다.”‘사모님’이라는 말이 유건의 신경을 간질였다. 순식간에 기분이 풀리며 경비원들이 한결 곱게 보였다.유건은 더 이상 따지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고는 수간호사에게서 신분증을 받아서 들며 말했다.“우리 아내 피곤하니까, 먼저 가보겠습니다.”“네, 편히 가세요.”경비원 둘은 안도한 듯 허리를 폈다.“여보.”유건은 자연스럽게 시연의 손을 잡았다. 주위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가자.”시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경비팀을 나섰다. 먼저 병동에 들러 가운을 갈아입고서야, 유건과 함께 호텔로 향했다.그런데, 호텔로 오는 길 내내 유건은 마음이 불편했다.경비실을 나설 때부터 지금까지, 시연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방에 들어서자, 시연은 가방을 내려놓았다.“시연.”유건은 조심스레 시연의 손을 붙잡았다.“내가 와서... 기분 나쁜 거야?”“아니에요.”시연은 고개를 저었지만, 화난 얼굴도 기쁜 얼굴도 아니었다.“시연...”유건은 두 팔을 벌려 시연을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이 냄새야... 네 냄새. 며칠 못 봤더니 미치는 줄 알았어.”“그래요?”시연은 얼굴 반쯤을 유건 어깨에 파묻은 채, 낮고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응, 그래.”유건은 여전히 그 순간에 취해 있었다.그런데, 시연이 품 안에서 살짝 몸을 움직였다. 밀어내는 것 같지 않은, 부드러운 몸짓이었다.유건은 의아해하며 팔에 힘을 조금 뺐다.그제야 시연이 셔츠 단추를 풀고 있는 게 보였다.유건이 바라보자, 시연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멍하니 뭐해요? 얼른 해요.”‘뭐... 뭐를?’유건은 눈을 깜빡였다.그리고 시연이 셔츠를 벗어 내리는 걸 보았다.순간, 유건은 깨닫고는 시연의 손을 꽉 잡았다.“이거... 뭐 하는 거야?”“뭐긴 뭐예요?”시연은 피식 웃으며 유건을 바라봤다.“알면서 묻네요? 당신 왜 온 건지,
Read more

제963화

여기까지 말이 나온 걸 보면, 유건의 마음은 다 드러난 셈이었다.더는 숨길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그래, 이제 숨기지도 않네.’시연은 심장이 조여오는 걸 느끼며,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있잖아요, 이건 당신이 거부한 거예요. 나중에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마요.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느니 뭐니...”‘의무? 일부러 저러는 건가?’‘매번 딱 급소를 찔러대네.’유건은 쓴웃음을 삼키며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안 할게.”“그래야죠.”시연은 웃으며 유건을 살짝 밀었다.“씻고 올게요. 당신이 갑자기 오는 바람에... 방금 수술 끝나고 아직 땀도 못 닦았어요. 잠깐만 기다려요.”“응.”유건은 시연을 놓아주고, 그녀가 욕실로 향하는 걸 바라봤다.“옷 챙겨줄까?”“네, 고마워요...”그는 막 옷을 가지러 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시연이 남자의 팔을 잡아당겼다.여자의 힘이 꽤 세서 유건도 놀랐다.“시연?”그는 고개를 돌려보니, 시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심지어 콧등에 맺힌 식은땀까지 선명했다.‘이런 모습... 처음이 아니잖아.’순간, 유건은 숨을 고르며 시연을 번쩍 안아 올렸다. 그녀를 조심히 소파에 눕히며 숨이 거칠어졌다.“저혈당이지? 맞지?”“네...”시연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녀의 저혈당 체질을 유건은 잘 알고 있었다. 3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습관이었다.시연은 미약하게 손을 들어 가방을 가리켰다. 주머니에 항상 넣어 다니는 사탕이 있었으니까.“그거... 좀...”하지만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유건은 이미 재킷 주머니에서 작은 사탕 통을 꺼내고 있었다.익숙한 손길로 포장을 벗기고, 사탕을 시연 입 앞으로 가져갔다.“자, 입 벌려.”시연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하니 유건을 바라봤다.“왜? 뭐해?”유건은 다급하게 미간을 찌푸렸다.“빨리.”유건은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짐작할 수밖에.“이 사탕 싫어해? 그럴 리가 없는데... 예전엔 좋아했잖아.”그건 시연이 임신했을 때였다.그
Read more

제964화

“더는 말 없기.”혹시라도 시연이 또 고집부릴까 봐, 유건은 단호히 못을 박았다.“아니면... 그냥 내가 안고 간다?”‘하... 됐다.’시연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호텔에서 안겨 나가는 꼴은 절대 피하고 싶었다.대낮에, 그것도 시내 한복판에서 그러면 내일 바로 실시간 검색어에 오를 게 뻔했다.다행히 병원이 시내 중심에 있어서 근처 식당은 많았다.유건은 중식당을 골랐다. 시연은 쌀밥을 좋아하니까.음식이 나오자, 유건이 먼저 시연 그릇에 따뜻한 국을 떠줬다.“국부터 먹어. 이렇게까지 굶었으면 속에 불이 났을 거야. 처음엔 가볍게.”“네.”시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국을 한 숟갈씩 떠먹었다.“탕수육도 먹어봐.”유건은 젓가락으로 접시에 있는 걸 집어 얹어줬다.“아까 직원이 그러던데, 여기 시그니처래. 맛 좀 보자.”“네.”시연은 시키는 대로 조용히 밥을 먹었다. 말없이 받아들이는 여자의 모습에 유건은 속으로 작은 안도감을 내쉬었다.‘다행이다... 아픈 게 안쓰럽긴 한데, 솔직히 이렇게라도 끝나서 다행이야.’‘아니었으면 오늘 정말 답 없었을 텐데.’그렇게 저녁 한 끼를 무사히 마쳤다.두 사람은 더 이상 불편한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그게 서로에게 최선이었다.호텔로 돌아오자, 시연은 곧바로 쉬겠다고 했고, 유건은 다음 날 아침 일정 때문에 먼저 가야 했다.출발하기 전, 유건이 물었다.“여기서 얼마나 더 있어야 해?”“아직 몰라요.”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솔직히 말했다.“환자 상태를 봐야 해요. 안정되면...”보통은 수술 후 최소 24시간을 봐야 했다.“그래.”유건은 더 묻지 않았다.“다 끝나면 연락해. 내가 데리러 올게. 내가 바쁘면 정기환을 보낼 거고.”그러면서 두 손으로 시연의 뺨을 감싸 안았다.그리고 깊게 입을 맞췄다.“푹 쉬어. 나 간다.”유건은 시연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주머니에서 남은 사탕을 꺼내 시연 손에 쥐여줬다.“항상 챙기고 있어. 내가 맛있는 걸로 다시 사 올게.
Read more

제965화

유건은 바로 지한에게 지시를 내렸다.“기환이를 지금 당장 L시로 보내.”“네, 형님.”“지환이한텐 조용히 움직이라고 해. 시연이 모르게.”유건은 다시 한번 강조했다.‘아직 상황이 확실하지 않으니까.’‘괜히 시연이를 걱정시키면 하루하루 불안에 떨 거야.’“알겠습니다, 형님.”지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속으로 감탄했다.‘형님, 진짜 시연 씨한텐 말도 못하게 다 퍼주네.’‘어휴, 아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사는구먼.’...그날 밤, 시연에게 맹방동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어떻게 됐어요?”[죄송합니다.]맹방동은 솔직히 말했다.[못 잡았습니다.]시연은 담담히 숨을 내쉬었다. 사실 예상은 하고 있었다.‘해외 비밀 계좌고, 거래도 단 두 건뿐인데...’‘이건 탐정 사무소 능력 문제가 아니라 권한 자체의 문제야.’[방법이 전혀 없진 않아요.]맹방동의 말에 시연은 살짝 고개를 들었다.“어떤 방법인데요?”[그게요.]전화기 너머로 맹방동은 준비해 온 생각을 차근히 설명했다.복잡하진 않았다.[이렇게 하면, 경찰이 개입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럼 좀 더 본격적으로 추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음...”시연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방법은 있네. 문제는... 어떻게 굴리냐는 거지.’[다만, 시연 씨 이름으로 하면 안 됩니다.]맹방동이 덧붙였다.[장소미 씨 쪽이 시연 씨랑 아는 사이니까, 제일 좋은 건 기업 계좌로 하는 겁니다.]“알겠어요.”시연은 짧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복잡했다.‘기업 계좌라니... 그걸 내가 어디서 구하냐고.’물론 진아네 집이 사업하는 집안이긴 했다.하지만 시연은 이 일에 진아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이건 내 일이야. 진아랑은 아무 상관 없어.’‘게다가, 위험할 수도 있잖아...’‘은범이가 아직도 침대에 누워 있는데...’‘진아나 진아네까지 위험에 빠뜨릴 순 없어.’또한, 위험이 따르는 만큼, 진아네 집 사정으로 과연 버틸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결론은 하나였다
Read more

제966화

[귀찮긴 뭐가?]유건은 낮게 웃음을 흘렸다.[이런 기회면, 나야 고마운걸.]그리고 시계를 슬쩍 봤다. 점심이 가까운 시간, 생각보다 꽤 늦었다.[기다려, 지금 출발할게. 병원으로 갈까, 호텔로 갈까?]“호텔로 와요.”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그러고는 전화를 끊기 전, 덧붙였다.“운전 조심해요. 시간 넉넉하니까, 서두르지 말고요.”[응, 알아.]전화가 끊긴 뒤, 유건의 입가엔 저절로 웃음기가 번졌다.‘이거... 나 걱정해 주는 건가?’뭐든 상관없다.그 한마디면 아주 기뻤다.그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서랍을 열어 차 키를 꺼냈다.“지한아!”“형님!”지한이 곧장 안으로 들어왔다.“나 L시에 다녀올 거야. 오후 일정은 네가 알아서 정리해.”“네? 아, 네! 알겠습니다, 형님.”유건은 차에 올라 신나게 L시로 향했고, 도착하니 생각보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그래서 호텔로 가지 않고 병원으로 먼저 갔다.2시가 되자, 시연을 데리러 나섰다.“호텔에서 기다린다면서요...”병원 앞에서 마주친 시연의 손을 자연스레 잡으며 웃었다.“조금 일찍 왔어. 그럼 네가 덜 걸어도 되잖아?”시연은 특별한 반응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두 사람은 호텔로 가 짐을 챙겨 G시로 향했다.차가 상업지구를 지나칠 즈음, 시연이 잠깐 내려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 왔다.유건은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이렇게 찬 걸... 몸에 안 좋은데.’아직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었다.조이를 낳을 때의 과다출혈, 그리고 얼마 전 생리통으로 작은 시술까지 받았던 시연.‘설마 잊은 거야? 아니면 일부러 무시하는 거야...’하지만 정면으로 말하긴 어려웠다.시연은 아직 한참 어린애 같아서, 곧장 뭐라고 하면 되레 반발할 게 뻔했다.유건은 빙 돌아서 말했다.“맛있어 보인다.”“네?”시연이 살짝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맛있어요. 먹어볼래요?”“좋지.”유건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가 먹여줘야지. 아...” 어차피 운전 중이라
Read more

제967화

‘웃다 울 일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딱 지금 유건 꼴이 그랬다.시연이 화가 단단히 나선, 오는 길 내내 입 꾹 다물고 말 한마디 안 했다.유건이 온갖 말을 걸어봐도 전부 묵묵부답.SKY 전원주택단지에 도착하자, 시연은 말없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유건은 머리를 긁적였다.‘망했다... 이거 완전히 크게 삐졌다.’하는 수 없이 뒤따라가며, 낮은 목소리로 시연을 달래기 시작했다.“화 풀어, 내 잘못이야.”그리고 시연의 손을 잡아보며 말했다.“아님... 한 대 때려. 기분 좀 풀리게.”시연은 여전히 반응 없이 손을 빼고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나올 때 보니, 유건은 화장실 문 앞에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그래도 시연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시연...”유건은 껌딱지처럼 따라붙으며 말했다.“아까 ‘가을’에서 아몬드 푸딩 시켰어. 맛있대. 사과의 의미로 같이 먹자, 응?”‘흥.’시연은 여전히 묵묵부답.그때 현관에서 인기척이 났다.조이가 깔깔 웃으며 들어왔다.도경미가 조이를 데리고 돌아온 참이었다.“조이야!”결국 시연은 남자를 등지고, 아이에게로 달려갔다.“엄마!”며칠 만에 본 엄마에 신난 조이는 팔짝 뛰어 안겼다.“엄마 돌아왔다! 조이 엄마 보고 싶었어요...”‘누가 이런 조이의 애교에 안 녹겠어.’시연은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며 아이에게 볼 뽀뽀를 했다.“엄마도 조이 너무 보고 싶었어.”띵동.초인종 소리에 마수경이 문을 열러 나갔다.잠시 후, 유건이 들어왔다. 손에는 ‘가을’ 로고가 찍힌 테이크아웃 봉투가 들려 있었다.“대표님, 이건 뭐예요?”마수경이 물었고, 유건은 시연과 조이를 힐끔 보고 웃었다.“디저트. 식탁에 좀 놔줘.”그러고는 다가와 조이를 바라보며 웃었다.“조이야, 달콤한 거 사 왔어! 먹을래?”“네!!”조이는 눈을 반짝이며 작은 혀로 입술을 핥았다. 군침이 고이는 게 눈에 보였다.아이가 시연에게 말했다.“엄마랑 손 씻을래요!”시연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이
Read more

제968화

조이는 그 말을 듣자마자 울음을 뚝 그쳤다.하지만 금세 달려들지도 못하고, 동그랗게 눈을 뜨고 엄마를 바라보며 물었다.“엄마, 진짜 먹어도 돼요...?”‘어휴, 진짜.’유건은 속으로 감탄했다.‘역시 시연이가 애를 잘 키웠어.’‘이렇게 어른들한테 온갖 귀염을 받으며 컸는데도 저렇게 물어보는구나.’‘저 나이에 흔치 않게 얌전해.’시연은 대답 안 해줄 수가 없었다.한 사람은 눈을 초롱초롱, 한 사람은 슬쩍 기대하는 눈길.“조이, 아저씨한테 고맙다고 해야지.”“네!”조이는 활짝 웃으며 유건을 올려다봤다.“고마워요, 아저씨!”“아니야, 천만에.”이번에는 유건도 조이가 혼자 먹게 두지 않았다.조이를 품에 안고, 직접 숟가락으로 한 입 한 입 조심히 먹여줬다.성격 급한 유건답지 않게, 참을성 있게, 천천히.시연은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혈육이란 게 참 신기하네. 평소엔 그렇게 성질 급한 사람이 조이한텐 세상 다정하네.’‘이런 모습을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그 생각에 시연은 가슴 한편이 살짝 저릿해졌다. 더는 바라보지 않으려 고개를 돌리고, 숟가락을 들어 자기 앞 디저트를 먹었다.‘음, 차갑고, 부드럽고, 달콤해. 이거 꽤 맛있네.’한 입, 두 입.멈추기 힘들 정도였다.유건은 조이를 안고 먹이면서도 슬쩍 시연을 힐끔힐끔 보았다.‘먹네? 꽤 맛있어하네?’...밤.유건이 서재에서 안방으로 돌아오니, 시연은 이미 침실에 있었다.잠옷 차림으로 소파에 엎드려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유건은 성큼성큼 다가가 몸을 숙여 시연을 끌어안았다.“이제 화 풀렸어?”“뭐래요?”시연은 웃으면서 몸을 돌려 유건을 마주 보았다.“내가 그렇게 쪼잔한 사람으로 보여요?”“아니, 그렇게 안 보여.”유건은 태연하게 말했다.“근데 아이스크림 반 개 먹었다고 눈치 주긴 하잖아.”“그럼 보지 마요. 신경도 쓰지 마요.”시연은 유건의 넥타이를 툭 잡아당겨 바싹 눈앞까지 끌어당겼다가, 살짝 투정 부리듯 웃으며 말했다.“당신이
Read more

제969화

“방금 뭐라고 했어...?”그 순간, 유건은 숨조차 쉴 수 없었다.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온몸이 굳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그런데 심장은 마치 누가 망치로 사정없이 두들기는 듯 터질 것처럼 요동쳤다.쿵, 쿵, 쿵, 쿵...“방금... 좋다고 했어?”“그렇다니까 왜 자꾸 물어요?”시연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고, 미처 가시지 않은 홍조를 띤 얼굴로 웃으며, 맑은 눈빛에 장난기가 어렸다.그리고 코끝을 찡긋하며 말했다.“변태...”‘헉...’유건은 온몸에 전기가 번쩍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피가 혈관을 타고 미친 듯이 돌았고, 바로 시연을 꼭 껴안았다.너무 세게 껴안은 탓에 시연은 투덜댔다.“나... 숨 막혀요.”“미안!”유건은 급히 팔을 조금 풀고,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이 정도는 괜찮아?”시연은 입꼬리를 살짝 비틀며 말했다.“음, 딱 좋아요. 딱... 좋은 정도예요.”유건은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시연의 입술을 살짝 문질렀다.“오늘... 입에 꿀 발랐어? 왜 이렇게 예쁜 말만 해, 응?”“참나, 당신 진짜 귀찮은 사람이네요.”시연은 눈썹을 찌푸리며 웃었다.“못된 말 하면 못됐다고 뭐라 하고, 좋은 말 하면 꿀 발랐다고 뭐라 하네요?” “아니야, 아니야. 나 너무 좋아서 그래.”유건은 시연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한 번, 두 번... 툭툭 입을 맞췄다.꼭 커다란 강아지처럼 자꾸만 들러붙어 애정을 부렸다.“네가 지금처럼만 있으면, 난 평생 기쁠 거야.”남자의 눈동자는 맑고 번들거렸다.마치 눈 안에 물감을 풀어버린 듯... 어두웠던 회색빛이 순간적으로 환해졌다.유건의 행복은, 너무나 대놓고 눈부셨다.“아이구야...”시연은 심장이 쿵 하고 뛰었다. 그래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유건을 밀어냈다.“그만 좀 하고, 물이나 떠줘요.”“목말라?”“네.”“알겠어, 지금 가져올게.”유건은 순순히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시연은 살짝 숨을 고르며 일어나, 테이블 아래쪽에 손을 넣어 약병을 꺼냈다.이어서 조심
Read more

제970화

유건은 조용히 약병 뚜껑을 열었고, 알약 하나를 꺼내 휴지에 감싸더니, 옷방으로 들어가 조심히 보관했다.모든 걸 마치고서야 다시 침실로 돌아와, 시연을 안고 그녀의 뺨을 살짝 쓰다듬었다.‘제발, 아무 일 아니길.’...다음 날, 회사.유건은 지한을 불렀고, 알약이 담긴 휴지를 건네며 말했다.“이거, 좀 맡겨. 분석해서 무슨 약인지 알아봐. 최대한 빨리.”“네, 형님.”지한은 잠시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유건 표정으로 봐선, 쓸데없는 질문은 안 하는 게 낫겠구나 싶었다.사실 알약 하나 검사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지한은 발 빠르게 처리했고, 점심 무렵 결과가 나왔다.“형님.”지한은 전해 받은 전자 보고서를 들고 왔다.“그쪽에서... 형님이랑 통화하고 싶답니다.”그 말에 유건의 눈썹이 무겁게 찌푸려졌다.‘보통 약이면, 굳이 직접 전화할 일은 없겠지.’“그래, 연결해.”“네.”곧 화학 연구소의 전화가 걸려 왔다.“고유건입니다.”유건은 보고서를 훑어보며 물었다.“보고서 보니까, 수면제 성분이라고 돼 있던데요?”‘시연이한테... 불면증이 있었나? 같이 자면서도 내가 몰랐다고?’자신에게 놀란 탓에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네... 그런데,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상대편 목소리가 잠시 머뭇거렸다.“무슨 뜻입니까?”유건은 목소리를 낮게 깔았고, 얼굴빛이 점점 굳어졌다.“확실히 말씀해 주세요.”아마 그래서 연구소 측에서도 굳이 직접 전화를 걸어온 것일 터였다.[고 대표님, 이 약, 수면 보조제로 분류되긴 하지만, 그 안에 진정제와 억제제 성분도 있습니다.]“계속 말씀하세요.”[그러니까... 불면증 치료용으로 쓰는 게 아니라, 과도한 불안, 공황, 혹은 심리적 억제를 목적으로 처방되는 겁니다.]유건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이내 입술 안쪽을 세게 깨물며 생각했다.‘진정... 억제... 대체 무슨 상태길래, 이런 약까지...’[저기...]전화기 너머에서 망설이는 숨소리가 들렸다.[고 대표님, 죄송하지만 제가 더 구체적으
Read more
PREV
1
...
9596979899100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