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아버지의 방치와 계모의 학대 속에서 벼랑 끝에 내몰린 지시연은, 결국 G시 최고 권력자인 고유건과의 결혼을 강요받는다. 그러나 결혼식 당일, 남편 유건은 시연이 혼전순결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녀의 사생활과 도덕성을 신랄하게 비난하며 갈등의 불씨를 지핀다. 결국, 시연은 열 달 동안 품었던 아이를 세상에 내놓은 후,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기로 결심한다. 몇 년 후, 지시연이 다시 G시로 돌아왔을 때, 그녀의 곁에는 한 어린아이가 함께였다. “고 대표님, 전담의가 필요하시다면서요?” 유건은 시연이 놓은 덫에 스스로 걸려들었다. “오늘부터 당신을 내 전담의로 채용할게.” 그 후, 세상 사람들은 부인도 애인도 필요 없다는 유건이 전담의에게만은 온 마음을 다해 사랑을 쏟고, 심지어 그녀의 아들이 누구의 아들인지도 모른 채, 마치 자기 자식처럼 아낀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는데...
View More주말.시연은 조이를 잘 챙겨 두고 외출 준비를 했다.“엄마.”조이는 아쉬운 얼굴로 엄마를 붙잡았다.“오늘 언제 와요? 오늘은 조이랑 같이 자기로 한 날이잖아요.”어릴 때부터 시연은 조이가 혼자 잘 수 있도록 습관을 들여왔다.하지만 아이는 여전히 엄마 품을 찾았다. 그래서 시연은 늘 주말엔 함께 자 주겠다고 약속하곤 했다.“엄마 잊지 않았어.”시연은 마음이 짠해 딸아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엄마 다녀오면 바로 옆에 있을 거야. 조이가 눈 뜨면 엄마가 꼭 곁에 있을 거야.”“정말요?”“그럼.”안심한 조이는 얌전히 엄마를 현관까지 배웅했다.“엄마, 기다릴 거예요.”“그래, 알았어.”문을 닫자, 시연의 가슴은 알 수 없는 시림으로 저렸다.‘조이가 요즘 더 나한테 의지하는 게 느껴져...’‘아저씨가 없으니까 이제 엄마밖에 없는 거겠지.’예전처럼 조이가 아저씨를 찾으며 떼쓰진 않았다. 어린 나이지만, 아이 나름대로 어렴풋이 느낀 것이다. 엄마가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아직 이렇게 어린데... 이런 눈치까지 봐야 한다니... 시연은 조이가 너무 안쓰러웠다. ...시연은 차를 몰고 은수에 도착했다. 초대장을 내밀자 안내 직원이 곧장 그녀를 홀 안으로 인도했다.벌써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고, 화려한 분위기로 북적였다.시연은 난감해졌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이준과 아현뿐인데, 두 사람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어디 가서 뭘 하고 있어야 하지...?’“시연 언니!”익숙한 목소리가 등을 쳤다.돌아보니, 공주 드레스를 입은 아현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아현은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린 채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시연의 손을 꼭 잡았다.“언니, 진짜 왔네요? 사실 언니 안 올까 봐 걱정했어요.”“왜 안 와?”시연은 핸드백에서 정성스레 포장한 상자를 꺼냈다.“생일 축하해.”“고마워요.”아현은 선물을 받아 들며 코끝을 씰룩였다.“말했어야 했는데... 비싼 건 준비 안 해도 됐어요.”“안 비싸.”시연은 장난스
“정말요?”시연은 놀라 눈을 크게 뜨더니, 이준을 노골적으로 훑어보았다.“근데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요. 아현이가 성숙해 보이는 게 아니라... 선배가 너무 젊어 보여요.”남자는 원래 노화에서 여자보다 유리했다.게다가 이준은 워낙 자기 관리가 철저한 편이었다. 식습관과 생활 리듬을 지키고, 아무리 바빠도 운동을 거르지 않는 사람이었다.“아부는 그만.”이준이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카드를 내밀었다.“이거, 아현이가 너한테 꼭 전해 달라고 했어.”“저한테요? 뭐죠?”시연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받아 들고 열어 보았다.이준이 옆에서 설명을 덧붙였다.“아현이가 이번 주에 스무 살 되거든. 집에서 생일 파티를 열 건데, 꼭 언니를 초대하라고 당부하더라.”“그래요?”시연은 눈썹을 살짝 올렸다.“이거 영광인데요? 저도 나름 아이들한테 인기가 있나 보네요.”이준은 피식 웃었다.“넌 나랑 동년배지만, 사실 아현이랑 나이 차이도 몇 살 안 나잖아. 그런데도 ‘아이’라고 부르는 게 웃기지 않냐? 내 눈엔 너희 둘 다 그냥 애들이야.”“에?”시연이 초대장을 확인하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장소가... ‘은수’?”은수... 한동안 잊고 있던 이름이었다.‘예전에... 유건이 한강우한테서 ‘은수’ 그 부지를 따냈을 때, 나도 한몫했었지.’그곳은 시연이 알기로 모두 고급 시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생일 파티를 한다고 쉽게 빌릴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이준은 그녀의 눈빛을 읽고 미리 말을 덧붙였다.“아현이 성이 ‘최’잖아. G시 최씨 가문의 딸이야. ‘은수’ 그곳에서 파티 여는 거, 당연한 거지.”G시의 최씨 가문.도시 상류층 사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집안이었다.‘아현이가... 그런 집안 딸이었다니.’시연은 새삼 놀랐다.아현은 어디까지나 이준을 따라다니는 귀여운 동생쯤으로만 보였으니까.늘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있는 모습은... 마치 주인 없는 강아지 같았다.“그러니 꼭 와야 해.”이준은 더 말하지 않고, 두어 번 당부만 남긴
분명, 시연은 흔들렸다.누군가 자신을 위해 모든 걸 내려놓으려 한다는 것... 더구나 그 사람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라면.‘나는... 왜 이 순간 설레는 거지? 이 마음이 너무 부끄럽다.’“아니... 아니에요.”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은범에게 책임이 있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그건 책임만은 아니에요.”“그만!”유건은 더 듣고 싶지 않았다.그는 시연의 어깨를 움켜쥐고 억지로 돌려세웠다. 강하게 마주 보는 시선 속에서 분노와 절망이 뒤엉켰다.“그럼 난? 나한테는 책임 없어? 나한테는 빚지지 않았어?”“유건 씨...”시연은 얼굴을 찌푸렸다. 아무도 알지 못했다. 지금 그녀가 얼마나 마음속으로 갈등하며, 이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 큰 힘을 짜내고 있는지.“내가 잘못했어요.”결국 또 같은 대답.시연은 이렇게까지 지쳐 있으면서도 끝내 고개를 돌려주지 않았다.“하... 하하.”유건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스스로를 비웃었다.“정말... 혼자만 착각하고, 혼자만 난리 친 거였네.”시연은 놀란 듯 유건을 바라보다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잘 생각해.”유건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것은 시연에게 던지는 말이자, 동시에 스스로를 다잡는 경고였다.“오늘 내가 돌아가면... 다시는 네 일에 관여하지 않을 거야. 앞으로 우연히 마주쳐도, 그냥 고개만 끄덕이는 남이 될 거라고.”이별한 연인이 친구로 남는다는 건, 유건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내가 언젠가... 시연을 마음에서 도려낼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오긴 할까?’“네. 생각 정리했어요.”시연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목구멍은 날이 선 톱니가 스치는 듯 아팠다.1초, 2초.유건은 잠잠히 그녀를 응시하다가, 이내 몸을 돌렸다.그는 단호하게 차 문을 열고 올라탔다. 엔진 소리가 울리고, 차는 곧장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단 한마디의 군말도 없이.“유건 씨!”시연은 본능적으로 불러 세우려 했다. 그러나 발은 납덩이처럼 무거웠고, 한발자국도 뗄 수 없었다.그
시연은 멍하니 유건을 바라보았다.‘이 사람이... 여기 온 거야? 언제부터? 왜 온 거지?’“왔어? 왜 이렇게 늦었어.”유건은 시연 앞에 서서 그녀의 지친 얼굴을 보자, 눈빛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음...”시연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일이 좀 많았어요.”“일이 많았다고?”유건의 입꼬리가 비틀렸다.“병원에서 바로 온 거야?”시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유건이 날카롭게 목소리를 높였다.“날 똑바로 봐. 거짓말하지 마.”시연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유건의 눈을 마주쳤다.“나...”그러나 입 안에서 맴도는 거짓말은 도무지 나오지 않았다.“말 못 하겠어?”유건은 냉소적으로 웃었다.“그럼 내가 대신 말하지. 노은범 집에서 돌아온 거지?”시연은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참 기가 막혀!”유건의 분노가 폭발했다.“노은범 집이 그렇게 가난해졌어? 간병인 하나 못 쓰나?”“그게 아니에요...”“그게 아니라면 뭐야?”유건은 한 치의 변명도 허락하지 않았다. 표정은 잔뜩 굳어져 있었다.“넌 의사야. 하루 종일 진료만으로도 이미 지쳐 있잖아. 거기에다 조이까지 돌봐야 하고.”도경미가 집안일을 도와준다 해도, 아이에게 어머니는 대체 불가능한 존재였다.“그런데도 노은범이 밤마다 와서 보살펴 달래?”“나...”“말하지 마!”유건은 더 이상 참지 못한 듯 시연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억눌러도 억눌러지지 않는 분노가 손끝까지 전해졌다.“노은범 부모라는 사람들이 대체 뭔데?”그는 누구보다 시연을 아끼고, 그녀가 조금이라도 고생하는 걸 차마 두고 보지 못했다. 그런데 노은범 집에서는 시연을 당연한 듯 부려 먹는다니!“넌 정말 눈치가 없어? 강수희 여사가 널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생각해? 전부 아들 때문이잖아!”“노은범이 필요하니까, 그래서 널 받아들인 거라고. 진심이 아니니까, 네가 밤마다 고생하는 걸 봐도... 마음 아파하지 않는 거야.”“유건 씨.”시연도 모르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겠
“당신...”시연은 유건의 시선에 조금은 불편해졌다.“재진 받으러 온 거예요?”‘다리도 이제 거의 다 나은 것 같은데...’하지만 유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못 들은 사람처럼 미간을 좁히더니,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어젯밤, 못 잤지?”‘간호사와 나눈 대화를 들은 건가?’시연은 부정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네.”“왜 못 잤어?”유건이 집요하게 물었다.시연은 잠시 얼떨떨하다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그냥... 꿈을 계속 꿨어요. 자는 것 같으면서도, 제대로 못 자는 것처럼.”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무의식중에 새어 나오는 애교 같은 어투였다.그건 오래 함께할 때만 자연스레 생기는 습관 같은 것이었다.“요즘 계속 그래?”“아니요, 최근 이틀 정도만요.”유건은 아무 말 없이 잠시 침묵하다가 담담히 말했다.“가봐. 일해야지.”“아... 네.”시연은 고개를 숙인 채 유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스치는 순간, 은은한 민트 향 코롱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아직 안 갈아입었구나.’진료실에 들어온 시연은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그런데, 따뜻한 우유를 가져다주겠다던 간호사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무슨 일에 걸린 걸까?잠시 기다린 끝에 진료 시작 직전에서야 간호사가 허겁지겁 들어왔다. 손에는 우유 잔이 들려 있었다.“지 선생님, 죄송해요. 늦었어요!”“뭐가 죄송하다는 거예요?”시연은 웃으며 말했다.“저를 도와주는 건데, 제가 고맙죠.”“여기요.”간호사는 웃으며 잔을 건네더니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했다.“원래는 금방 올 수 있었는데, 어떤 분이 ‘보통 우유는 못 드신다’고 해서요!”“네?”시연은 잠깐 멍해졌다.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아이고.”간호사가 짓궂게 웃었다.“모르는 척은... 그게 누군지 다 아시면서...”굳이 이름을 밝히진 않았지만, 시연과 유건의 관계는 병원은 물론 G시에까지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다.질투도, 부러움도 섞여서.“그분이 굳이 달려가서 사 온 거래요. 지 선생
해야 할 말은 다 끝났다.시연은 몸을 돌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시연!”레오가 다급히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시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아직 할 말이 남으셨나요?”“나...”레오는 말을 잇지 못했다. 얼굴엔 고통이 가득 묻어났다.“미안하다. 내가... 내가 널 망쳐 놨다.”‘허...’시연은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인정하시는 거군요?”레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침묵은 곧 대답이었다.“너무 터무니없잖아요!”시연의 눈에 핏발이 섰다.“당신이 내 삶에 끼어든 탓에... 제 아버지가 이유도 모른 채 죽었어요!”지금도 떠오른다.지동성이 끝내 그녀를 밀쳐내며, 피투성이가 된 채 눈앞에서 쓰러지던 그 순간을.‘그 장면만 생각하면... 숨이 막혀 버려.’그렇다. 그래서 레오가 그토록 많은 도움을 주었던 거다. 죄책감 때문이었다.“미안하다, 시연아.”레오는 몇 번이나 말을 바꾸려 했지만, 끝내 입 밖으로 나온 건 그 말뿐이었다.“필요 없어요.”시연은 깊게 숨을 들이켜며 눈가의 뜨거운 기운을 억눌렀다.차갑게 레오를 바라봤다.“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어요. 아무리 깊은 사과도... 아무 의미 없다는 걸 모르시나요?”하지 말아야 할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시연은 결국 입술을 깨물고 내뱉었다.“레오 선생님, 당신... 그 불륜녀를 정말 사랑하나요?”“뭐라고?”레오의 눈이 커졌다. 그 뜻밖의 질문에 크게 흔들렸다.하지만 시연은 대답 따윈 원하지 않았다.‘내 불행의 시작은... 레오와 그 불륜녀 때문이야.’‘사랑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겠지.’“정말 한심한 일이네요...”시연은 씁쓸히 내뱉었다.“세상 모든 불륜과 불법적인 관계는 끝내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못하거든요.”그건 분명한 저주이자 조롱이었다.말을 마친 시연은 몸을 돌려, 단호하게 대문을 열고 안으로 사라졌다.“시연!”레오의 목소리가 울렸지만, 시연은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다시는 오지 마세요! 전화도 받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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