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hapter 171 - Chapter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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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1화

최수빈은 고개를 들어 주민혁의 냉정한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그녀는 줄곧 그를 붙잡고 이혼을 요구해 왔고 수차례 서류를 내밀었지만 늘 무시했다.재혼한 첫날부터 최수빈이 말했던 이혼은 그저 감정적인 투정이라 여긴 탓이었다.하지만 오늘, 박하린과 관련된 일이 그의 마지막 선을 넘어버린 것 같았다.결국 주민혁이 먼저 입을 열어 이혼을 말했고 이번에는 단호했다.최수빈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월요일 오전, 구청에서 뵙겠습니다.”소송 절차를 밟는다면 시간이 지체된다.그러나 주민혁이 먼저 이혼을 요구한다면 오히려 간단하게 끝낼 수 있었다.최수빈 역시 불필요한 소모 없이 깔끔하게 관계를 정리하는 쪽이 훨씬 좋았다.이제 진정한 의미의 해방이 눈앞에 있었다.그러자 주민혁은 냉랭한 말투로 대답했다.“늦지 마.”최수빈은 대꾸하지 않고 곧장 몸을 돌려 떠났다.그는 곁눈질로 의자에 흩어져 있던 서류를 바라보았다.주민혁은 그걸 무심히 집어 들고 봉투조차 뜯지 않은 채 그대로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마침 그 순간, 얼음 찜질팩을 들고 나온 박하린이 그 모습을 발견했다.“뭘 버린 거야?”“쓸모없는 거.”주민혁의 목소리는 담담했다.박하린은 더 묻지 않았지만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예린이에 대한 일은...”“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자.”병실 안, 최수빈은 딸 곁에 앉아 깊게 숨을 내쉬었고 긴장이 풀리자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듯했다.이제야 비로소 진짜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주예린을 쓰다듬었다.그때, 서둘러 도착한 할머니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수빈아, 이게 다 내 잘못이야.”할머니는 손까지 덜덜 떨며 속상해했다.“하린이랑 민혁이가 시후를 데리고 놀러 나가겠다고 하길래 동의했어. 나는 예린이가 집에서 나랑 둘이 있으면 심심할까 싶어 같이 가라고 했는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최수빈은 고개를 들어 할머니를 바라보며 대답했다.“할머니, 이렇게 늦은 시간에 왜 여기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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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2화

할머니는 못마땅하다는 듯 주민혁을 흘겨보았다.“예린이가 널 부르는 거 안 들리니?”“들었습니다.”그는 짧게 대답했다.“제가 먼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수빈아, 내일 다시 오마.”“괜찮아요, 할머니. 예린이는 크게 다친 게 아니에요. 괜히 힘들게 움직이지 마세요.”최수빈이 정중히 말했지만 할머니는 그런 그녀의 태도에 더욱 마음이 짠해졌다.늘 상황을 헤아리고 다투지도 않는 성격, 그렇기에 더더욱 걱정스러웠다.혹시 이 아이가 속으로만 삼키고 있진 않은지, 혼자 상처받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됐다.할머니는 직접 운전기사를 불러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어차피 주민혁은 아직 부상 중이라 완전히 회복되지도 못한 상태였다.떠나기 전, 그녀는 다시 한번 손자를 노려보았다.“네 아내 좀 아끼고 살펴라. 너희 둘, 대체 무슨 일이야?”“별일 없습니다. 저희 잘 지내고 있습니다.”주민혁은 변함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아무 일 없다면 다행이고.”할머니는 의심을 감추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이제 수빈이가 나한테 예린이를 맡기진 않겠지. 넌 대체 어떻게 아이를 본 거냐.”“예린이는 증손녀니까 뵙고 싶으실 때 언제든 보실 수 있습니다.”한숨을 내쉬던 할머니는 결국 차에 올라 떠났다.최수빈은 주민혁이 언제 병원을 나갔는지도 알지 못했다.그는 어디를 가든 언제나 그녀에게 일절 알리지 않았다.더구나 이제 곧 이혼을 앞둔 상황에서 그런 걸 알려줄 이유는 더더욱 없을 터였다.딸이 다쳤음에도 무심한 주민혁의 태도에 최수빈은 한없이 씁쓸해졌다.그러나 이번만큼은 박하린에게 고마워해야 할지도 몰랐다.그녀가 아니었다면 이혼은 여전히 먼일로만 남아 있었을 테니.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고 중요한 건, 곧 자유로워진다는 사실이었다.주말 아침.주민혁은 법무 부서에서 온 전화를 받았다.“주 대표님, 개인 명의의 상소 서류가 있습니다. 회사 건은 아니고요.”“언제 접수된 겁니까?”“보름 전입니다. 업무량 때문에 순서대로 처리하다 보니 이제야 확인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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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3화

“안녕하세요. 저는 주 대표님이 고용한 변호사, 하유준입니다.”주민혁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공손하게 최수빈에게 인사를 건넸다.“서류 먼저 보시고 다른 의견이 없으시면 서명하시면 됩니다. 내일 구청에 가서 정식으로 등록하시면 되고요.”하유준은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변호사이자 진승우가 직접 소개한 인물이다.어제 병원에서 벌어진 일을 알게 된 주민혁은 곧장 가장 능력 있는 변호사를 불러들였다.최수빈이 드디어 이혼이라는 벽 앞에 섰으니 모두가 속으로는 기뻐했을 것이다.그동안 박하린의 자리를 차지해 온 여자가 이제는 물러나야 하니까.이혼하면서조차 무엇 하나 얻지 못하게 만들 생각들이 분명했을 터였다.그래서 그녀는 고개를 숙여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바라보았다.사실 주민혁이 먼저 조건을 내세울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조용히 앉아 서류를 펼친 순간, 최수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조건은 생각보다 가혹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서류에는 은산 중심가 황금 상권의 대지, 크고 작은 부동산 열 채, 그리고 무려 1800억에 달하는 위자료가 명시되어 있었다.그 안에는 두 사람의 신혼집도 포함되어 있었고 심지어 실버라인 고급 아파트 두 채까지 적혀 있었다.실버라인은 돈이 있어도 쉽게 손에 넣지 못하는 곳.얼마 전 박하린이 입주를 원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결국 주민혁이 새로 사주었던 바로 그곳이었다.“아직도 서명하지 않으셨나요?”화장실에 다녀온 진승우가 돌아와 두 사람을 보며 비아냥거렸다.“괜히 욕심부리지 마세요.”그의 시선은 서류로 향했고 얼핏 본 한 줄에 표정이 바로 굳어버렸다.분명 처음에 논의했던 것과는 달랐다.‘언제 이런 새 조건이 마련된 거지?’“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라도 있는 거야?”주민혁이 무표정하게 묻자 하유준도 말을 보탰다.“혹시 추가하고 싶은 조항이 있으시면 말씀하셔도 됩니다. 두 분의 합의에 따라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습니다.”최수빈은 서류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조건은 분명 후할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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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4화

“좋아.”주민혁은 망설임 하나 없이 대답했다.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감정의 여지도 없었다.이혼 이야기를 주고받는 내내 마치 비즈니스 계약서를 검토하듯 차갑고 형식적인 태도뿐이었다.정말로 남남이 되어 단순히 절차만 밟으러 나온 것처럼.최수빈은 그의 태도가 전혀 의외가 아니었다.어차피 주민혁은 주예린을 좋아한 적이 없으니까.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서류 뒷장을 넘겼다.거기에는 추가 조항이 몇 개 더 있었다.[첫째, 1년 동안은 주가 집안은 물론 외부에 이혼 사실을 밝힐 수 없다.][둘째, 남편의 동의 없이 결혼 사실과 구체적인 이혼 시점 역시 공개할 수 없다.][이를 어길 경우, 남편은 명예와 이미지를 보호할 권리를 가지며 상대에게 지급한 모든 재산과 보상금을 회수할 수 있고 합리적인 손해배상까지 청구할 수 있다.]최수빈은 그 조항들을 읽으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결국 이 모든 건 박하린을 지켜내기 위한 장치였다.혹여 언젠가 다른 사람이 박하린을 남의 가정을 깨뜨린 여자라고 손가락질할까 두려운 것이다.사실 누구도 박하린의 정체를 의심하지 않았다.어릴 적부터 함께한 소꿉친구, 언제나 곁에 있는 당연한 존재.그렇게 치밀하게 숨겨왔기에 전생의 최수빈조차도 끝내 알아채지 못했었다.그런데도 그는 박하린의 이미지를 위해 단 한 점의 흠조차 생기지 않도록 모든 가능성을 미리 막아두고 있었다.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면 그만큼 앞뒤 가리지 않고 다 막아주는 법인가 보다.하지만 그 조항은 곧 그녀를 옥죄는 족쇄이기도 했다.최수빈은 서류를 탁자에 내려놓고 냉랭하게 물었다.“제가 만약 이 조항들에 동의하지 않으면요?”주민혁은 천천히 커피잔을 들어 올려 한 모금 마신 뒤, 담담히 말했다.“그럼 예린이 양육권을 내가 가져가야겠지.”순간, 최수빈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버렸고 정말 아이를 뺏길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다.그는 이미 계산해 둔 것이었다.모든 보상과 재산은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한 미끼일 뿐, 진짜 칼날은 ‘아이의 양육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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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5화

진승우는 최수빈이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사인을 끝내는 모습을 바라봤다.그 순간, 머릿속에서 무너지는 것들이 있었다.하지만 곧 스스로를 합리화했다.어차피 지금은 단순한 절차일 뿐, 아직 구청에서 정식으로 증서를 발급받은 것도 아니지 않은가.그녀가 이렇게 선뜻 서명하는 건, 단지 밀고 당기는 수라는 생각이 들었다.“흥.”진승우는 비웃듯 코웃음을 치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진짜 그날이 오면 그녀가 과연 지금처럼 태연할 수 있을까.하유준은 최수빈이 사인한 서류를 받아 다시 한 부를 내밀었다.“이건 백업본입니다.”최수빈은 말없이 서명을 끝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고 시선을 곧장 주민혁에게 돌렸다.“내일 오전 열 시, 구청에서 뵙겠습니다.”차갑게 내뱉은 목소리는 얼음처럼 싸늘했다.그 말과 동시에 그녀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곧장 걸음을 옮겼다.진승우는 최수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오늘은 제법 깔끔하네요.”하유준은 펜을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상대의 이혼 의지가 확실해 보입니다.”그는 주민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주 대표님, 이후의 절차는 전화로 연락드리겠습니다.”그러자 주민혁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최수빈은 서명을 끝낸 뒤 곧장 병원으로 돌아왔다.병실에 들어서자 주예린의 상태는 점차 호전되고 있었다.그녀는 침대 곁에 앉아 흩어진 딸아이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쓸어내렸다.“엄마.”“응?”“아까 그 아저씨가 그러는데... 엄마랑 아빠 이혼해?”어린 주예린의 눈에는 이혼이 어떤 의미인지 아직 명확하지 않았다.다만 좋은 말은 아니라는 것쯤은 느낀 듯했다.“이혼이 뭐예요?”최수빈은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천천히 대답했다.“이혼이라는 건, 앞으로 엄마랑 아빠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뜻이야. 더 이상 한 가족이 아니게 되는 거지.”그 말에 주예린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그럼... 이제 예린이도 아빠랑 한 가족이 아닌 거예요?”“그래.”최수빈은 거짓말 대신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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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6화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고, 오래 끌며 괴로워하느니 이 순간 단칼에 끝내는 게 나았다....송미연은 그들이 이미 서류에 서명했고 내일 동사무소에 가서 이혼 신고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하여 곧장 대형 룸을 예약했다.“내일 동사무소에서 나오면 꼭 한잔해야지. 네가 드디어 지옥에서 벗어났잖아!”“그런데 그 사람은 왜 갑자기 이혼 합의서에 사인한 거야?”원래라면 항소 절차로 이어져야 했고 최수빈은 오랫동안 소송을 치를 각오까지 한 상태였다.그녀는 복도에 서서 사건의 앞뒤를 간단히 설명했다.“젠장!”송미연은 분노로 가슴이 답답해졌다.“진짜 제정신 맞아?! 그딴 식으로 당당하게 그 여자를 감싼다고?”육민성은 굳은 얼굴로 침묵했다.5, 6년을 함께한 결혼 생활이 결국 원만하게 끝맺지도 못했다.사인까지 했으면서도 최수빈의 자유를 어느 정도 제약하는 조건이었다.이혼조차 시원하게 끝내주지 않았다.“그냥 참고 넘어가겠다고?”송미연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발끈했다.“내가 못 참겠어!”“왜 꼭 그 사람이 이혼하자면 이혼해야 해?”송미연은 씩씩대며 말했다.“네가 진짜 이혼하면 그 사람은 그 여우랑 당당하게 붙어 다닐 거 아냐!”“이혼하자고 먼저 얘기한 건 너였잖아. 네가 피해자인데 널 괴롭힌 것도 모자라서 이혼을 제안했다고? 자기가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송미연은 분개했다.“내 말은 어떻게든 억울하게 만들라고! 그냥 난 못 해, 이혼 안 해라고 버텨! 그러면 그 애인이라는 여자는 평생 그림자 신세로 살게 되잖아! 그냥 질질 끌어봐, 누가 먼저 무릎 꿇는지 보자고. 바람피운 건 그 사람 쪽인데 뭐가 급해서 이혼해줘?”최수빈은 묵묵히 송미연의 말 하나하나를 들었다.그녀는 병원 밖 차들이 쉴 새 없이 오가는 풍경을 바라봤다.사실 주민혁 얼굴에 이혼 항소장을 내던졌을 때부터 그녀는 이미 이혼할 각오를 하고 있었다.그런데 주민혁은 박하린의 편을 들며 그녀가 따귀를 맞은 일을 계기로 오히려 먼저 이혼 얘기를 꺼냈다.송미연의 말이 틀린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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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7화

다음 날 아침.여덟 시에 최수빈은 주예린을 퇴원시켰다.원금영이 전화를 걸어 주예린과 함께 저택에 와서 밥을 먹으라고 했다.주예린에게 몸보신을 해주려 특별히 보양탕을 준비해뒀다면서 말이다.최수빈은 휴대폰을 들고 담담하게 거절했다.“괜찮아요, 할머니. 예린이 지금은 조용히 쉬어야 해요.”상대방은 한동안 조용했다.“수빈아... 아직도 나를 원망하지?”“내가 못나서 예린이를 제대로 못 지켰구나.”최수빈은 입술을 꼭 다물고 잠시 침묵했다.고개를 숙이고 짐을 정리하다가 천천히 말했다.“할머니, 이미 벌어진 일이에요. 누구 탓인지 따질 필요 없어요.”“연세가 많으셔서 아이 보는 게 힘들죠. 애들은 다 장난꾸러기니까요. 다음에 제가 예린이 데리고 다시 찾아뵐게요.”말뜻은 분명했다.그 ‘다음’이란 사실상 기약 없는 ‘언젠가’라는 뜻이었다.앞으로는 주예린을 주씨 가문의 누구에게도 혼자 맡기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그녀는 정말로 원금영을 믿었다. 원금영은 예린이를 아끼고 자신도 아껴주니까.하지만 원금영이 주민혁에게 주예린을 바로 맡긴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그때는 너무 정신이 없어 깊게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거절당한 원금영은 어쩔 수 없이 물러섰다.“그럼 예린이 잘 쉬게 해라. 내가 저택 사람 시켜서 음식 보낼게.”“할머니, 괜찮아요. 예린이가 뭘 좋아하는지 제가 제일 잘 알아요.”그 말에 할머니는 순간 멍해졌다.‘이건 아예 나와 예린이 사이를 끊어놓겠다는 거 아닌가?’시선을 툭 떨군 채 원금영은 마음 한켠에 죄책감과 무력감이 뒤섞였다.결국 더는 뭐라 하지 못하고 몇 마디 당부만 남긴 뒤, 전화를 끊었다.최수빈은 끊긴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일부러 원금영을 곤란하게 하려는 게 아니었다.그저 이제는 딸을 위험에 맡길 수 없다는 걸 안 것이다.어릴 적부터 최수빈을 키워준 사람이니 원금영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하지만 그녀는 또 주씨 가문의 그 누구에게든 다 잘해주는 사람이었다.최수빈은 주예린을 집에 데려다주고 송미연에게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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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8화

직원이 두 사람에게 정말로 이혼할 건지 재차 물었다.최수빈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네, 이혼할 겁니다.”직원은 다시 주민혁을 보았다.그도 고개를 끄덕였다.“저도요.”서류가 건네졌다. 서명 후 정식으로 접수되는 절차였다.최수빈은 서류를 받아 한 줄 한 줄 확인했다.거기에는 ‘등록일로부터 30일간은 이혼 숙려 기간이며 이 기간 내 한쪽이 마음을 바꾸면 신청을 철회할 수 있다’라고 적혀 있었다.그녀는 시선을 떨구고 주저 없이 펜을 들어 이름을 적었다.반면 주민혁은 손이 예전 같지 않아 서명이 더뎠다.얼마 전 주예린을 수영장에서 안아 올릴 때 예전 상처가 다시 당겨진 듯했다.서명을 하는 내내 손이 살짝 떨리는 게 눈에 띄었다.최수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렸다.모두 사인을 마치고 두 사람은 그 서류를 직원에게 건넸다.절차는 끝났다.“이건 이혼 신청 접수 확인증입니다. 잘 보관하세요.”최수빈은 확인증을 받아들고 눈길을 떼지 못했다.마음 한쪽에서 길게 숨이 흘러나왔다.이 종잇장을 움켜쥐니 이제야 비로소 단단한 땅을 밟은 듯한 안정감이 찾아왔다.주민혁은 그녀를 곁눈질로 보고는 이내 무심히 시선을 거둬들였다....동사무소에서 나오는 길, 주민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어디 가? 태워다 줄게.”어색하지만 예의는 갖춘 말투였다.“주 대표님, 그럴 필요 있나요?”최수빈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이혼할 사람끼리 괜히 가식 떨 필요 없잖아요.”남자는 그녀의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얼굴에 아무런 기색이 없었다.최수빈이 거절하자 억지로 고집하지도 않았다.그녀는 알았다.그의 물음은 그저 형식적인 인사치레일 뿐이라는 걸.그렇게 두 사람은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사실 동사무소 직원은 따로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이들이 정말 이혼할 건지 아닌지.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냉기만 봐도 충분했다.수많은 부부를 봐온 그들에게는 진심과 망설임을 구분하는 눈이 있었다.최수빈은 곧장 택시를 잡아탔다.차에 올라서자마자 마치 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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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9화

밑에는 사진이 하나 더 있었다.주민혁은 사람들 한가운데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술을 마시고 있었다.어두운 조명 속 그의 표정은 도무지 읽을 수 없었다.늘 그랬듯이 차갑고 무심해 기쁨도 분노도 드러내지 않았다.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부부로 지낸 지난 5, 6년 동안조차 최수빈은 단 한 번도 그를 헤아린 적이 없었다.이제 이혼 절차까지 끝났으니 그가 기뻐하는 게 당연할지도 몰랐다.“쳇! 역겨워!”송미연은 사진을 보더니 이를 갈았다.“대체 뭘 축하하는 거래요? 오래된 불륜녀가 마침내 제 자리 찾은 걸 자축하는 건가?”“대체 낯짝이 얼마나 두꺼운 건지...”육민성이 휴대폰을 거둬들이며 깊은 눈빛으로 최수빈을 바라봤다.“두 사람... 넌 예린이만 원하는 거야?”눈치를 챈 송미연도 고개를 홱 돌려 최수빈을 보며 말했다.“그러네. 그래도 시후 네 친자식이잖아.”최수빈의 축 늘어진 두 손이 순간 움찔하며 움켜쥐어졌다.온몸을 휘감는 감정이 차츰 번져 뼛속까지 밴 원망이 한순간에 터져 나올 듯했다.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응, 시후는 아빠를 더 좋아해.”아무도 몰랐다.주시후는 그녀의 친아들이 아니며 사실은 박하린의 아들이라는 걸.이 진실을 아는 건 단 세 사람뿐이다.가끔은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혹시 그 둘이 처음부터 짜고 있었던 건 아닐까? 박하린이 해외에서 공부하며 자리를 비운 사이, 날 이용해 아들을 대신 키우게 한 건 아닌가?’왜냐하면 돌아와서 박하린은 주민혁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가정과 일 모두를 거머쥐었으니 말이다.그날 이혼 합의서에도 그 조항이 있었다.‘주시후의 정체는 비밀로 한다.’이것이 드러난다면 주시후는 곧장 사생아가 되는 것이었다.송미연은 애잔한 눈길로 최수빈을 바라봤다.“괜찮아. 어차피 그 아들 자식이 더 좋다잖아. 예린이만 네 곁에 있으면 돼.”...클럽.최수빈 일행이 예약한 방으로 향하던 길, 문이 열려 있는 다른 방을 지나쳤다.“수빈 씨, 수빈 씨네도 술 마시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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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0화

진승우는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말했다.“예린이만 원하더라고요. 시후는 어차피 못 데려온다고 생각한 모양이겠죠. 자기 처지도 알고... 아예 입 밖에 안 꺼냈어요.”“안 꺼냈다고?”남이준은 입술을 가볍게 다물었다.“꽤 단호하네.”“그러게요. 시후도 친아들인데 그렇게 쉽게 포기하다니... 진짜 피도 눈물도 없어요.”상대방은 잠시 침묵했다.오랜 정적 끝에 그가 낮게 말했다.“아마 최수빈 씨는 오래전부터 이혼을 생각했던 거겠지.”진승우는 피식 웃었다.“헛소리 하지 마요. 그럴 리가 있어요? 내가 뭐랬어요, 애써서 민혁이 형한테 시집가 놓고 이제 와서 싫다? 글쎄요, 난 밀당으로밖에 안 보이는데요? 끝까지 가봐야 알죠, 속마음이 뭔지.”그러다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물었다.“그런데 형은 왜 자꾸 최수빈 편을 드는 거예요?”그러다 곧바로 말을 돌렸다.“됐고, 얼른 넘어와요.”“안 가. 아직 일 처리할 게 남았어.”남이준은 단호히 잘라 말했다....클럽 안.주민혁의 휴대폰이 진동했다.그는 술잔을 내려놓고 화면을 내려다봤다.주예린의 입원 기록을 그가 처리해뒀는데 검진 결과가 막 도착한 것이다.그는 화면을 열어 대충 훑어본 뒤 닫았다.박하린이 옆에서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오빠, 뭐 봐?”그는 휴대폰을 치우고 술잔을 들었다.“뉴스 좀 봤어.”“술 좀 줄여. 비록 이혼해서 속이 시원할지 몰라도 오빠 손에 있는 상처 예린이 구하려다 다시 터졌잖아. 아직 회복도 덜 됐는데 몸 생각 좀 해.”주민혁은 한참 동안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불현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고는 자연스레 술잔을 내려놓았다.진승우가 그걸 보고는 농담을 던졌다.“형, 나 형 이렇게 말 잘 듣는 거 처음 봐요.”박하린은 빙그레 웃으며 맞받았다.“손이 아직 다 낫지 않았으니까, 오빠 본인도 잘 알 거예요.”술자리는 계속 이어졌다.최수빈은 잔을 몇 번이나 비우더니 답답한 기운을 느꼈다.그래서 잠시 바람 쐬러 나가며 과일 접시를 가져올 참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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