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결혼 생활 6년 동안 그들 사이에 사랑은 없었다. 주민혁을 사랑했던 최수빈은 한때 그를 위해 기꺼이 헌신했다. 최수빈의 친딸은 주민혁을 아빠라고 부를 수 없었으나 주민혁의 첫사랑인 박하린의 아들은 주민혁의 다리 위에 앉아 그에게 안긴 채로 그를 아빠라고 불렀다. 주씨 가문 사람들은 양아들 주시후를 귀한 후계자로 여기며 그를 끔찍이 아끼면서 정작 주민혁의 친딸인 주예린은 냉대했다. 그러다 최수빈과 주예린은 죽게 되었고 주민혁은 딸과 아내의 화장 동의서에 직접 사인한 뒤 아들을 데리고 박하린의 귀국 축하 파티에 참석했다. 최수빈은 그제야 본인이 아무리 헌신해도 주민혁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매정한 주민혁에게는 마음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다. 새로운 삶을 얻게 된 최수빈은 굴욕과 수모만이 존재하는 결혼 생활을 끝내려고 했다. 지난 생에 최수빈은 한심하게도 학업을 포기하고 가정주부가 되어 가정을 위해 헌신했다. 이번 생에 그녀는 주민혁에게 주저 없이 이혼 합의서를 건넨 뒤 딸을 데리고 진흙탕 같은 삶을 벗어나 커리어를 쌓으며 새로운 삶을 꾸려가려고 했다. 최수빈이 떠난 지 일주일째, 주민혁은 최수빈이 심술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최수빈이 떠난 지 한 달째, 주민혁은 그녀가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최수빈이 떠나고 한참이 지난 뒤, 주민혁은 업계 최정상 엘리트 모임에서 그녀를 보았다. 최수빈은 커리어에만 집중했고 주예린은 새로운 아빠를 찾는 데 열중했다. 최수빈과 주예린이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에 주민혁은 결국 이성을 잃고 말았다. 늘 냉정하고 오만하던 그가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두 모녀를 붙잡고 애원했다. “수빈아, 내가 이렇게 무릎 꿇을게. 그러니까 다시 날 사랑해 주면 안 돼?”
View More정부 관계자의 연설이 엄숙한 박수 속에 끝나자 회의장 안의 분위기는 조금 누그러졌다.하지만 공기 속에 감도는 팽팽한 긴장감만은 여전했다.이어서 각 기업 대표들의 입장 발표가 진행됐다.차례로 단상에 오른 몇몇 기업 책임자들은 하나같이 진정성 어린 태도를 내세우며 발언했고, 07 전투기 프로젝트 추진과 정부의 과학기술 발전 계획에 전폭적으로 협조하겠다고 거듭 밝혔다. 자세도 한껏 낮춘 채였다.최수빈은 아래에 앉아 손끝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며 회의장에 모인 사람들을 하나하나 훑어봤다.이 자리에 있는 기업들 대부분은 제노 테크와 어느 정도든 사업적으로 얽혀 있었다.지금 저들의 발언은 겉보기에는 성의 있어 보였지만 속으로는 다들 각자의 계산을 하고 있다는 게 뻔했다.그러다 그녀는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는 심종연과 임하은도 눈여겨봤다.두 사람은 가끔씩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고 표정도 좀처럼 읽히지 않았다.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게 분명해 보였다.역시나, 몇몇 기업 대표들의 발언이 끝난 뒤 회색 정장을 입고 약삭빠른 인상을 한 중년 남자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최수빈은 그가 남양 테크의 장형운 대표라는 걸 알아봤다.원래부터 강한 쪽에 붙고 분란 만들기를 좋아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으니 분명 심종연이나 임하은의 사주를 받은 게 틀림없었다.“귀한 말씀 주신 여러 지도부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저희 남양 테크 역시 반드시 전력을 다해 협조하겠습니다.”장형운은 먼저 형식적인 인사말을 늘어놓더니 곧바로 화제를 돌려 주민혁을 정면으로 바라봤다.“다만 프로젝트 추진 이야기에 앞서, 주 대표님께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순간 회의장 안의 시선이 일제히 주민혁에게 쏠렸다. 장내는 숨소리마저 들릴 만큼 조용해졌다.주민혁은 여전히 꼿꼿하게 앉은 채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말씀하시죠.”“듣자 하니 오늘 은산시 청하구에서 막 투자 유치 정책을 발표했다고 하더군요.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과학기술 기업
이번 회의의 목적은 결국 모두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고 위기감과 사명감을 분명히 심어주려는 데 더 가까웠다.그 순간 최수빈은 문득 예전에 주민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기술도 중요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연구자야. 인재라고.”맞는 말이었다.아무리 좋은 프로젝트가 있어도, 아무리 뛰어난 기술이 있어도 결국 그걸 실현하는 건 사람이었다.국가의 힘 역시, 결국은 몇 세대를 이어 묵묵히 버텨 온 연구자들의 노력 위에서 완성되는 것이었다.최수빈은 옆에 앉은 주민혁을 돌아봤다.그는 그저 조용히 자리에 앉은 채 집중한 표정으로 발표자의 발언을 듣고 있었다. 온몸에 무겁고도 담담한 기운이 가득했다.그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발언대에 고정돼 있으며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주민혁은 원래 태산이 눈앞에 무너져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최수빈의 마음도 이상하리만치 차분해졌다.이런 사람과 나란히 서 있다면 무엇이 와도 두렵지 않을 것 같았다.반면 회의장 한쪽에 앉아 있던 임하은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민혁을 향해 있었다.붉은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침체된 분위기의 회의장 안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었지만, 그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짙게 얽혀 있었다.“걱정하지 마요. 우리가 07 전투기 프로젝트에서 확실한 성과만 내고 국가의 인정을 받게 되면, 임씨 가문은 무너지지 않을 테니까.”심종연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는 임하은이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걸 눈치채고 가볍게 그녀의 팔을 건드렸다.그제야 임하은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심종연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지금 임씨 가문의 상황은 벼랑 끝에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아버지 임명규는 연금 상태에 놓여 있었고 가문이 운영하는 기업 역시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07 전투기 프로젝트에서 성과를 내고 국가의 지원을 끌어내야만 임씨 가문에도 다시 뒤집을 기회가 생길 수 있었다.그런데도 주민혁만 떠올리면 가슴이
“난 그냥 저 꼴이 보기 싫은 거예요.”임하은은 목소리를 낮춘 채 이를 갈듯 말했다.“이혼까지 해놓고 여기 와서 또 다정한 척하는 거, 진짜 역겨워 죽겠어요.”심종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선은 최수빈에게 머물러 있었고 눈빛 깊은 곳에는 복잡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그는 늘 이해할 수 없었다.최수빈이 왜 주민혁 같은 남자를 놓아버렸는지, 그리고 더욱더 이해할 수 없는 건, 두 사람이 이혼하고도 어째서 저런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지였다.옆에 있던 조윤미도 이쪽의 미묘한 분위기를 눈치챘다.그녀는 서류철을 안은 채 심종연의 옆에 서서 최수빈과 주민혁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회의장 안의 공기는 점점 묘해졌다.각자의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협력도 있었고 경쟁도 있었으며 오래된 앙금도 있었고 새로 쌓인 원한도 있었다.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프로젝트 분석 회의였지만 이 자리가 순탄하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건 이미 분명했다.최수빈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다잡았다.이제부터 시작될 몇 시간은 총성 없는 전쟁이 될 터였다. 그리고 그녀와 주민혁은 다가올 거센 파도를 버텨내기 위해 반드시 함께 서 있어야 했다.주민혁은 그녀가 긴장했다는 걸 눈치챈 듯, 가볍게 그녀의 손목을 건드렸다.“괜찮아.”최수빈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 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잠시 후, 회의의 시작을 알리는 벨이 울리자 사람들은 모두 대화를 멈추고 차례로 회의장 안으로 들어갔다....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가득 찬 회의장에는 무겁고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앞쪽 발언대에는 정장을 갖춰 입은 정부 관계자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곧 마이크를 타고 울려 퍼지는 또렷하고 단호한 목소리가 회의장 전체를 채웠다.“07 전투기 프로젝트는 우리나라 항공우주 과학기술 분야의 중대한 돌파구가 될 핵심 과제입니다. 국가 차원에서도 매우 중시하고 있으며 제노 테크를 중심으로 프로젝트 상용화를 더욱 서둘러 추진해
최수빈이 딤섬을 먹으며 말하자 주민혁은 옅게 웃었다.“하긴, 애들도 참 힘들지.”그러다 그가 차문을 열었다.“타. 늦겠다.”그렇게 최수빈은 고개를 끄덕인 뒤, 조수석에 올라탔고 차는 조용히 단지를 빠져나갔다.주민혁의 표정은 평소처럼 담담했다. 그리고 그가 말없이 운전에만 집중하고 있었지만 최수빈은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무언가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걸.예전의 그들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함께 있어도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마주하는 일은 드물었다.하지만 지금은 짧은 인사 한마디와 따뜻한 아침 식사 한 끼만으로도 마음이 이상하리만치 편안해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은산시 과학기술센터에 도착했다.멀리서 보기만 해도 회의장 건물은 엄숙하고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고 입구 앞에는 이미 온갖 고급 차량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드나드는 사람들 대부분은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었는데 표정도 하나같이 진지했다. 업계에서 내로라하는 인물들이라는 게 한눈에 보였다.주민혁이 차를 세우자 두 사람은 함께 내렸다.입구 쪽으로 막 걸어가려던 순간, 최수빈의 눈에 익숙한 두 사람이 들어왔다.송미연과 육민성이 로비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그들을 보자마자 곧바로 손을 흔들었다.“이제야 왔네. 조금만 늦었어도 바로 입장할 뻔했어.”송미연은 웃으며 다가와 최수빈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했다.“오늘 진짜 너무 예쁘다. 분위기가 완전 다르네.”“너도 괜찮은데?”이내 최수빈이 싱긋 웃으며 송미연의 옆에 있는 육민성에게 시선을 돌렸다.“선배.”“응.”육민성은 부드럽게 웃으며 최수빈과 주민혁을 한 번 번갈아 바라봤지만, 굳이 무슨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네 사람이 함께 회의장 안으로 들어서자 곧바로 여기저기서 시선이 쏠렸다.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업계 거물들이거나 정부 관계자들이었다. 다들 정보가 빠른 만큼, 사소한 소문 하나도 쉽게 지나치지 않았다.최수빈과 주민혁의 결혼 소식은 워낙 조용히
송미연의 말은 잔잔하던 최수빈의 마음에 작은 돌멩이처럼 떨어져 파문을 일으켰다.최수빈은 고개를 숙여 잔 속의 샴페인을 바라보며 무의식적으로 잔의 표면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그러고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머릿속에서는 자연스레 지난번 심종연, 주선웅과 함께 식사했던 장면이 떠올랐다.그날, 그녀는 와인을 몇 잔 마신 뒤 온몸에 힘이 빠졌고 그다음에는 주민혁과 그런 일이 벌어졌다.그때는 단순한 사고라고 여겼다.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심종연과 주선웅은 애초에 이해관계로 엮인 사이였다.때문에 그 ‘단순한 사고’ 역시
밤바람이 아파트 단지의 나무를 스치며 가는 잎사귀를 최수빈의 어깨 위에 살짝 떨어뜨렸다. 그녀는 건물 입구 가로등 아래 서서 강지안의 말을 듣고 있었고 손끝으로 무의식중에 겉옷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그녀는 원래 강지안이 주민혁의 편을 들러 왔을 거라고 생각했고 어쩌면 지난날의 옛정을 들먹이며 그녀에게 기회를 다시 한번 주라고 권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전혀 달랐다.“정말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동의합니다.”최수빈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다.“난 그가 있는 그대로 살길 바랄 뿐이에요. 예전의 주민혁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네요. 우리는 이
주민혁은 주기훈이 올 거라는 걸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다만 문을 열고 들어와서조차 단 한마디의 안부도 없이, 곧장 주선웅을 대신해 따져 들 줄은 몰랐다.“아버지는 참 직설적이시네요.”주민혁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분명한 거리감이 느껴졌다.“들어오시자마자 제 상태가 어떤지, 사고가 어떻게 난 건지는 묻지도 않으시고 바로 형 몫부터 챙기시네요. 참 공평하신 분이에요.”주기훈의 얼굴이 굳어졌다.“나는 중요한 이야기를 하러 온 거야. 네 몸 상태는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네 형이 추진하는 사업이 시 전체 경제 지표와도 연결돼 있
“이제 너는 마음 편히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어. 더 이상 위험을 걱정할 필요도 없고 주 대표님도 어떤 이유로든 너에게 귀찮게 굴지 않을 거야.”최수빈은 베란다 난간에 기대어 섰고 갑자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몇 년간, 그녀는 이 연구 프로젝트를 위해 너무나 많은 고생을 했고, 수많은 억울함을 겪었다. 그녀가 이토록 애쓴 것은 다름 아닌 딸의 버팀목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심사가 통과됐고, 앞으로는 더 이상 불안해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걱정했던 마음을 드디어 놓을 수 있었다.“고마워요, 선배. 한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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