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Chapter 141 - Chapter 150

338 Chapters

제141화

하지만 고이한의 눈엔 그녀가 없었고 설령 가슴을 열어 심장을 꺼내 바친다 한들, 그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을 사람이었다.“올라가자. 오늘은 내가 쏠게.”소예지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사양하지 않을게.”두 사람은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들어섰다.마침 그때, 지하 주차장에서 올라오던 엘리베이터가 열렸고 순간, 안에 있던 두 사람은 화들짝 몸을 떼며 거리를 두었다.그리고 그 안에는, 하필이면 고이한과 심유빈이 나란히 서 있었다.심유빈은 얼떨결에 입술을 손으로 가볍게 가렸고 조명 탓인지 고이한의 입술은 유난히 붉어 보였다.마치 방금 전까지 그 안에서 격렬한 키스를 나눈 것 같은 그 낯 뜨거운 광경에 소예지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그때 박시온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고 대표님, 먼저 올라가세요. 우린 아직 일행을 기다려야 해서요.”고이한은 말없이 소예지를 바라보았다.잠시 눈길을 주고는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고 이내 문은 닫히며 그들을 위층으로 데려갔다.엘리베이터가 사라진 뒤에야 박시온은 씩씩대며 툴툴거렸다.“그렇게 좋아 죽겠으면 그냥 방 잡고 들어가지, 꼭 사람 많은 데서 저 난리를 떨어야 속이 시원한가? 우리 딴 데 가자.”소예지는 팔짱을 낀 채 아무렇지 않은 듯 대꾸했다.“그래.”두 사람은 근처 다른 레스토랑으로 향했다.소예지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 식욕도 왕성했고 오히려 박시온과 함께 웃고 떠들며 유쾌하게 식사를 즐겼다.대화는 어느새 양정화 교수와의 ‘내기' 이야기로 흘러갔다.박시온은 눈을 반짝이며 감탄했다.“넌 진짜 멋져! 그런 내기를 할 생각을 하다니. 근데 나는 백 퍼센트 네가 이길 거라고 믿어. 그 잘난 척하는 인간들, 다 입도 뻥긋 못 하게 만들어줘야지.”사실 박시온은 소예지의 실력을 정확히 알진 못했다.하지만 친구로서 늘 그녀의 편에 서 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밤이 깊어졌고 소예지는 집으로 돌아와 복습할 책을 펼쳤다.그녀가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을 무렵, 고이한이 집에 들
Read more

제142화

주말 동안 소예지는 집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냈고 고이한은 고씨 가문의 별장으로 가 딸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그리고 월요일 아침.소예지는 딸 고하슬을 등교시킨 뒤 곧장 의과대학 시험장으로 향했다. 그녀의 전공은 내과학이었지만 이번 시험에는 전공과목 여덟 개가 포함된 대형 평가였다.사흘간의 시험 일정을 마친 날, 소예지는 강준석과 함께 의대 구내식당으로 향했다.시험이 막 끝난 날이었기에 원래라면 피곤해할 법도 했지만 소예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담담했고 식사도 잘했다.강준석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웃으며 물었다.“3일 연속 시험 치른 거잖아. 하나도 안 피곤해?”소예지는 목덜미를 주무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피곤하진 않은데 목이랑 손이 좀 뻐근하네.”그러고는 강준석을 바라보며 말했다.“며칠 동안 실험실 좀 쓸게. 마무리해야 할 연구가 하나 있어서.”“뭐야? 이것도 시험 평가에 포함된 거야?”“이번 졸업 논문 주제 중 하나야. 빨리 끝내고 싶어서.”소예지가 싱긋 웃자 강준석은 그 미소에 잠시 넋을 잃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좋아. 또 어떤 식으로 사람을 놀라게 할지 기대되네.”소예지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같았으면 굳이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양 교수의 연구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더는 몸을 사릴 여유가 없었다.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결정적인 성과였다.마침 고하슬도 이번 주부터 방학에 들어갔고 소예지는 연구만 마무리되면 딸과 제대로 된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한편, 원래 만나기로 했던 심 변호사는 갑작스러운 사정으로 귀국을 미뤘고 소예지는 할 수 없이 연구를 계속하며 그를 기다릴 작정이었다.며칠 뒤, 연구소의 여자 화장실 안.소예지가 칸 안에 막 들어섰을 무렵,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실험실에서 일하는 두 명의 조교였다.“소예지 시험 다 끝났다며? 근데 왜 아직 성적 발표가 안 나는 거야? 혹시 너무 형편없어서 공개 못 하는 건 아니지?”“그러게 말이야. 들은 얘
Read more

제143화

그가 들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소예지의 성적표였고 여덟 개 전공과목의 평균 점수는 무려 98점이었다.“이게 진짜 소예지 성적이 맞는 거야?”이성열 박사는 한동안 멍하니 서서 안경을 고쳐 썼다. 도무지 믿기 힘든 결과였기에 그는 곧장 수화기를 들었다.“소예지 시험지, 지금 당장 내 사무실로 가져오게. 직접 확인해야겠어.”그날 오후, 소예지의 시험지가 이성열의 책상 위에 올라왔다.그는 찻잔을 들어 천천히 한 모금 마신 뒤, 시험지를 손에 들어 한 장씩 꼼꼼히 넘겨보기 시작했다.분명 그녀의 필체였다.그리고 그 안에 적힌 답안 하나하나는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웠다.“이 아이 참... 소영욱, 당신은 도대체 딸을 어떻게 키운 거야...”감탄을 흘리던 이성열은 곧 다시 수화기를 들어 조수에게 지시했다.“양 교수 좀 불러와. 지금 당장.”“네, 알겠습니다!”십여 분쯤 지났을까, 문이 열리며 양정화가 들어섰다.“무슨 일인데 그렇게 급해?”“이거 좀 봐봐. 아마 깜짝 놀랄걸.”“뭐가?”양정화는 의아한 듯 물었고 이성열은 들뜬 목소리로 시험지를 건넸다.“이번에 소예지가 본 시험지 말이야.”그의 말투에 심상치 않은 기색이 서려 있자 양정화도 순간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벌써 채점이 끝난 거야?”“직접 봐. 이 아이, 자네가 꼭 데려가야 할 인재일지도 몰라.”반신반의한 양정화는 시험지를 한 장 들어 옆 의자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그런데 몇 장을 넘기기도 전에 그녀의 눈이 점점 커졌고 심장은 눈에 띄게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이게 정말 그 애가 쓴 시험지라고?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어떻게 이런 완벽한 답안을...”“설마, 커닝이라도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이성열이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자네랑 나, 지금 가서 똑같은 시험 봐도 저 점수는 못 나와. 그럼 어디서 베껴 쓰겠나?”양정화도 곧 고개를 저으며 그런 의심을 털어냈다.시험 문제 대부분이 최근 1~2년 내 발표된 최신 연구 주제들이었고 소예지의 아버지 소영욱은 이미 5년
Read more

제144화

“채린아, 괜찮아?”이서연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사실 그녀 역시 속이 뒤집힐 만큼 불쾌했지만 이 순간 가장 괴로운 사람은 따로 있었다.안채린은 그 누구보다 소예지가 시험에 통과하지 않길 바랐던 바로 그 당사자였다.“시험 성적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중요한 건 결국 실무야. 이 점수는 그저 준비를 좀 열심히 했다는 증거일 뿐이잖아.”도윤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며 안채린을 위로하려 했고 이서연 역시 빠르게 맞장구쳤다.“맞아, 점수야 뭐... 별거 아냐. 우리도 결국 다 졸업했는걸?”물론, 그녀 자신은 모든 과목을 간신히 턱걸이로 통과했던 기억뿐이었지만 그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그 순간, 안채린은 아무 말 없이 아이패드를 내려놓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녀의 표정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회의실 문을 나서는 걸음엔 묘한 기운이 실려 있었다.“빨리 따라가 봐. 이번엔 진짜 꽤 충격이 큰 모양이야.”도윤재가 눈짓을 주며 이서연을 재촉했고 이서연은 재빨리 그 뒤를 따랐다.안채린이 향한 곳은 소예지의 연구실이었다.요즘 그녀가 거의 연구실에 틀어박혀 실험에 몰두하고 있었기에 그곳에 있을 가능성은 높았다.하지만 연구실 문 앞에 다다르기도 전에, 안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안채린의 발걸음을 단숨에 얼어붙게 만들었다.“예지야, 아까 양 교수님한테 전화 왔어. 너, 우리 팀 정식 팀원으로 확정됐대.”강준석의 목소리엔 감출 수 없는 들뜸이 묻어 있었고 그 말에 안채린의 안색은 한층 더 새하얘졌다.그녀의 손이 떨리듯 주먹을 움켜쥐었다.‘정말로, 우리 팀에 들어온다고?’“축하할 겸 오늘 점심 내가 살게.”강준석의 목소리가 이어졌고 그 뒤를 따라 소예지의 밝고 환한 웃음소리가 문밖까지 새어 나왔다.“좋아. 윤 선배도 불러!”그 웃음소리에 안채린은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 따지고 싶었고 도대체 어떤 수를 써서 시험을 통과했는지 낱낱이 캐묻고 싶었다.하지만 현재의 시험 체계는 누구도 부정행위를 할 수 없을 만큼 철저하다는 사
Read more

제145화

소예지는 논문을 한번 훑어보더니 오히려 양정화를 향해 조용히 되물었다.“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만약 이번 조기 졸업에 실패했다면 양정화는 이 논문을 소영욱이 남긴 유작이라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소예지는 모두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성적으로 졸업에 성공했고 이 논문이 그녀 스스로 써낸 결과물이라는 사실 또한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양정화는 눈앞에 선 이 젊고도 당찬 소녀를 바라보다, 문득 오래전의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소영욱의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어린 소예지는 늘 아버지를 따라 실험실에 드나들었고 그녀는 몇 번이고 그 아이가 조용히 숙제를 하거나, 한편에서 고단한 듯 잠든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한때, 양정화는 소예지의 새어머니가 될 생각까지 했지만 결국 소영욱에게 단칼에 거절당했다. 그 일로 그녀는 분노했고 한참을 괴로워했다.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양정화는 지난날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연구에 전념하며 조용히 마음을 다잡았다.그리고 지금, 그때의 그 아이가 눈부시도록 성장한 모습으로 다시 그녀 앞에 서 있었다.곧고 당당한 눈빛, 반듯하게 가다듬어진 자태, 넘치는 생기와 더불어 누구도 함부로 넘볼 수 없는 깊은 학문적 내공까지 소유한 소예지는 더 이상 ‘소영욱 교수의 딸’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으로 존중받아야 할 어엿한 어른이었다.“이번 시험 정말 잘했어.”양정화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나랑 이 교수 생각이긴 한데, 널 그냥 대학원 진학으로 바로 연계시키는 게 어떨까 싶더라. 너는 어떻게 생각해?”예상치 못한 제안에 소예지는 잠시 놀란 듯 망설였지만 곧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 교수님. 사실 저도 대학원 진학을 고려하고 있었어요.”“잘됐네. 강준석도 너한테 우리 팀 얘기했지?”“네, 강 선배님께 들었습니다. 저한테 이런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양정화는 안경을 살짝 밀어 올리며 담담하게 말했다.“그건 네가 스스로 쟁취한 거야. 나한테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잠시 정적이 흐른 뒤, 그녀
Read more

제146화

“장사하는 사람들한테 고급 차야 그냥 체면치레일 뿐이지. 뭐, 그렇게 대단할 것도 없잖아.”안채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그 옆에서 가정 형편이 그리 넉넉지 않은 이서연이 부러운 눈빛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그래도 너희 집은 걔네보다 훨씬 잘살지? 네 언니도 미래에는 재벌가 며느리 될 사람이잖아.”하지만 안채린의 가슴은 여전히 꽉 막힌 듯 답답했다.설령 소예지에게 남편이 있다고 해도 그녀가 강준석을 유혹하는 데는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을 터였다.차 안은 고요했다.소예지는 고이한의 안정적인 운전 덕분에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며칠 밤을 꼬박 새워 공부한 데다 방금 전 와인 두 잔까지 곁들였으니 피로가 쏟아지는 것도 당연했다.신호등 앞에 다다른 고이한은 급제동으로 그녀를 깨우지 않으려 조심스레 브레이크를 밟았다.가로등 불빛이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가운데 그는 옆자리에 조용히 잠든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창밖 먼 어둠 속으로 던졌다.그리고는 조용히 방향을 틀자 집으로 향하던 길에서 벗어나 차는 서서히 해안도로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얼마쯤 지났을까.비몽사몽 눈을 뜬 소예지는 습관적으로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올렸다.이제 곧 집에 도착했겠거니 생각하며 고개를 들던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그만 숨을 삼켰다.그곳은 다름 아닌, 바닷가 절벽 위에 자리한 일곱 성급 고급 호텔이었다.소예지는 곧장 고이한을 향해 따져 물었다.“여긴 왜 온 거야?”“하슬이는 할머니 댁에 있으니까.”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눈빛만큼은 감출 수 없는 욕망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오늘 밤은 우리 둘이 여기서 묵자.”그 말에 소예지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둘만의 시간을 보내자고 이 호텔까지 데려온 건가?'웃기지도 않았다.이 호텔은 그녀에게 낯선 장소가 아니었다.과거, 고이한이 최고급 펜트하우스를 장기 임대해 주말마다 세 식구가 함께 시간을 보내던 그곳이었다.그 기억이 스쳐 지나간 순간, 소예지의 표정
Read more

제147화

양희순은 고이한이 조용히 뒤따라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곤 눈치껏 방문을 닫았다.또 부부싸움이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욕실에서 막 씻고 나온 소예지는 잠시 전 차에 치일 뻔했던 상황이 떠올라 가슴을 쓸어내렸다.“이젠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게 위험하게 행동하진 말아야겠어.”하지만 오늘만큼은 고이한의 행동이 그녀를 참을 수 없을 만큼 분노하게 만들었다.한밤중.윤하준은 직접 운전대를 잡고 명인대학병원으로 향했다.지유선은 오래된 지병이 재발해 병실에 입원해 있었고 그가 도착했을 땐 마침 간병인이 그녀에게 죽을 떠먹여 주고 있었다.창백한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나이도 있는 데다 일까지 혼자 도맡아 해오다 보니 몸이 버티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들어서는 조카를 바라보며 지유선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녀에게도 한때 자랑스러운 아들이 있었다.하지만 철없던 그는 극한 스포츠에 빠져 있었고 결국 바다에서 변을 당해 시신조차 찾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지유선은 윤하준과 짧은 안부를 나누다 말고 문득 아쉬운 듯 입을 열었다.“소예지 씨를 내 연구팀에 들이고 싶었는데 결국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네.”윤하준의 눈빛이 조용히 흔들렸다.“아마 소예지 씨도 나름의 계획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이번에 조기 졸업에도 성공했다며? 듣자 하니 전 과목이 거의 만점이었다더라. 정말 흔치 않은 인재야.”지유선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아쉬움이 묻어 있었고 그렇게 뛰어난 인재를 품에 안지 못했다는 사실이 못내 안타까웠다.윤하준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담담하게 말했다.“네, 분명 대단한 인재죠.”그녀는 조카를 다시 한번 바라보며 슬쩍 물었다.“저번에 소개해 준 아가씨, 어땠니? 결혼 생각은 좀 들었어?”윤하준은 순간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저었다.“이모, 전 아직 결혼 생각이 없어요.”“이 나이에 그게 할 소리냐? 벌써 나이가 몇인데.”지유선은 못마땅하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내가 물려줄 자산이 얼만데... 빨리 가정을 꾸려야 할 텐데.’
Read more

제148화

심유빈은 하종호의 여동생과 마치 오랜 친구라도 되는 듯 환하게 웃으며 정원 대문을 나란히 들어섰다.그 모습을 본 소예지의 눈빛에 잠시 짜증이 스쳤지만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심유빈은 이 모임에서 늘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인물이었다.하종호도 윤하준도 그녀에게 유난히 호의적이었고 중요한 자리에선 언제나 그녀를 먼저 초대하곤 했다.“유빈 이모다!”고하슬이 반갑게 눈을 반짝이며 달려오자 심유빈은 몸을 숙여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말을 건넸다.“이모 보니까 기분 좋지?”“네. 좋아요!”고하슬은 방긋 웃으며 다시 작은 토끼에게 먹이를 주는 일에 열중했다.심유빈도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일어섰다. 오늘을 위해 공들여 차려입은 보헤미안풍 롱드레스는 햇살 아래서 부드럽게 흩날렸고 가슴 앞으로 길게 땋은 머리카락은 그녀를 더욱 여유롭고 사랑스럽게 보이게 했다.“소예지 씨, 또 뵙네요.”심유빈은 다정한 미소로 인사를 건넸지만 소예지는 대꾸 없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그 순간, 심유빈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살짝 굳었다.요즘 들어 소예지의 존재감은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있었다.그녀가 조기 졸업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안채린에게 들었을 때, 심유빈의 마음 깊은 곳엔 묘한 불편함이 일었다.하지만 정작 안채린은 투덜거리듯 말했다.“별거 아니야. 어차피 그건 다 소 교수가 죽기 전에 남긴 유작 같은 거잖아. 진짜 실력은 이제부터 드러나는 거지.”그리고 양정화의 곧 연구팀에는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될 예정이었다.안채린의 말에 따르면, 이번 실험은 최첨단 의학과 AI 산업이 결합한 연구로 소예지의 아버지조차 생전에 손도 대지 못했던 분야였다.“그때 되면 소예지가 진짜인지, 껍데기뿐인 허울인지 금방 드러날 거야.”심유빈은 조용히 고이한과 하종호, 윤하준이 나누는 대화의 방향을 흘끗 살펴보다가 이내 차를 마시고 있는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소예지 씨, 안녕하세요. 전 하지민이에요. 만나 뵙게 되어 반가워요.”밝은 얼굴로 다가온 여성이 인사를 건넸고 소예
Read more

제149화

심유빈은 잔뜩 힘이 들어간 손끝으로 찻잔을 꼭 쥐었고 억지로 미소를 띤 얼굴은 어딘가 어색했다. 고하슬의 첫 피아노 선생은 분명 자신이었는데 그 아이는 지금 단 한마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까만 눈망울을 또렷이 빛내며 귀엽게 턱을 치켜든 채, 소예지를 향해 동경 어린 시선을 보내는 고하슬의 모습을 보자 심유빈의 속에서는 저절로 독설이 튀어나왔다.‘저 배은망덕한 꼬맹이 같으니라고.’점심을 마친 후, 사람들은 농장 옆 초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푸른 잔디 위에 흐드러지게 핀 꽃들과 그 너머 거침없이 떨어지는 폭포가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풍경화처럼 눈부신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모두가 사진을 찍기 위해 분주해졌고 소예지도 예외는 아니었다.그녀는 딸아이의 사진을 여러 장 찍어주었고 셀카도 함께 몇 장 남겼다.“아빠! 우리도 같이 사진 찍어요!”고하슬이 아빠의 손을 꼭 붙잡고 사진을 찍자고 조르기 시작하자 고이한은 딸을 품에 안고 카메라 렌즈를 향해 섰다.하지만 소예지는 그를 단 한 번도 렌즈에 담지 않은 채 오로지 딸만을 찍었다.어차피 이혼 후엔 그의 사진을 전부 지워야 할 테니, 차라리 처음부터 담지 않는 편이 나았다.그때, 심유빈도 슬쩍 휴대폰을 꺼냈다. 소예지가 딸과 함께 자리를 옮긴 틈을 타, 그녀는 곧장 핸드폰을 고이한 쪽으로 내밀며 말했다.“나도 사진 몇 장 찍어줘!”고이한은 말없이 그녀의 휴대폰을 받아들었고 심유빈은 카메라 앞에서 요염한 미소를 머금은 채 아찔한 포즈를 취하며 자신감을 과시했다.그 모습이 눈에 들어온 소예지는 속으로 혀를 찼다. 심유빈은 단순히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고이한을 철저히 의식한 채 교태 어린 자태를 의도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곧이어 심유빈은 하지민에게도 사진 몇 장 부탁했고 마지막으로 같이 사진 찍자며 다가왔다.그러던 중, 갑자기 심유빈이 이마를 짚더니 고개를 푹 숙이며 비틀거렸다. 그리고는 어지러운 듯 천천히 하지민의 어깨에 몸을 기대기 시작했다.“유빈 씨, 괜찮아요?”하지민의 놀란 외침에 하
Read more

제150화

이튿날 아침 일찍, 소예지는 딸 고하슬을 시댁에 맡기기 위해 들렀고 마침 손녀를 오래도록 그리워하던 진가영은 하슬이를 보는 순간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었다.“어머님, 며칠만 부탁드릴게요.”소예지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진가영은 예전보다는 소예지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 누그러졌지만 여전히 살가움 없는 그녀의 성격만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금요일에 내가 해외에 나가야 하니까, 목요일 저녁엔 꼭 데려가.”진가영은 불만이 섞인 말투로 툭 내뱉었다.“할머니도 함께 출국하시나요?”소예지는 개의치 않은 듯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할머니는 집에 계시고 수경이가 대신 보살펴 줄 거야. 너도 시간 나면 와서 좀 도와줘.”“네, 알겠습니다.”오전 10시.소예지는 박시온과 함께 조용한 카페에 앉아 이혼 문제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 그때, 카페 입구로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한 남자가 당당히 들어섰다.스물여덟에서 아홉쯤 되어 보이는 그는 훤칠한 키에 야무지고 단단해 보이는 인상으로 단번에 시선을 끌었다.“여기는 심주원 변호사님이야.”박시온이 일어서며 두 사람을 소개했다.“선배, 여기는 내 친구 소예지 씨야.”두 사람은 가볍게 악수를 나눈 뒤 자리에 앉았다.심주원은 곧장 공적인 분위기로 전환하며 이혼 건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을 이어갔고 침착한 어조로 소예지의 현재 상황을 분석하며 말했다.그러면서 그녀가 지금 재산을 포기하고 소송을 제기하더라도 실제 이혼이 성사되는지는 고이한의 대응 방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했다.“현재 이혼 절차를 밟는 건 소예지 씨에게 유리합니다. 따님이 아직 만 다섯 살이 안 되었기 때문에 법원은 보통 엄마 쪽 친권을 우선 고려하거든요.”소예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중하게 말했다.“네, 그럼 변호사님께 모든 걸 맡기겠습니다.”“시온이 친구분이니 최선을 다해 도와드릴게요.”심주원은 환하게 웃으며 덧붙였다.“소예지 씨 성함은 저도 익히 들었습니다. 특효약 초기 개발자시고 매곡마을 사건의 핵심 증거를 제공하신 분이잖
Read more
PREV
1
...
1314151617
...
34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