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결혼 6년 동안 아내와 엄마의 역할을 묵묵히 해온 소예지. 나중에서야 남편 고이한이 해외에서 첫사랑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무리 차가운 심장이라도 정성을 다하면 언젠가는 따뜻하게 녹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고이한의 첫사랑이 국제적인 대상을 수상하고 축하파티를 열던 날, 소예지는 딸이 차가운 수술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정신을 차렸다. 더 이상 의미 없는 사랑에 매달리지 않기로 한 소예지는 이혼 합의서를 건네고 딸과 함께 미련 없이 돌아선다. ... 과거의 전공을 되살린 후 한때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소예지는 의학계가 탐내는 인재로 거듭난다. 그녀의 논문은 세계적인 권위의 학술지에 실렸고 연구 성과는 의학계의 각종 대상을 휩쓴다. 모두의 앞에서 눈부시게 빛나며 새로운 행복을 찾으려던 그때 줄곧 고고하고 오만하던 남자는 마침내 무너져 내린다. 미친 듯이 절규하며 소예지에게 무릎을 꿇은 고이한. “예지야, 제발 날 버리지 마...”
View More그 뒤로 고이한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소예지도 괜히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의 집에는 가지 않았다.밤 열 시쯤 고이한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오늘은 별장에 안 들어가. 본가에 있을게.]소예지는 한동안 그 메시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마음이 복잡했다.고하슬은 이미 잠들었지만 소예지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내일은 최현숙의 장례식이었다.눈을 감으면 생전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최현숙은 늘 인자하고 너그러웠다. 소예지에게 단 한 번도 모질게 굴거나 불만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그래도 한편으로는 큰 고통 없이 편안하게 세상을 떠났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그것 역시 고이한이 내린 결정이었다.억지로 생명을 연장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마지막을 맞도록 한 것이다. 덕분에 최현숙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품위를 지킨 채 떠날 수 있었다.그러다 문득 최현숙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다시 떠올랐다.어둠 속에서 소예지의 눈빛이 흔들렸다.마음속에는 어느새 또렷한 생각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고이한 같은 사람이라면 아들을 낳아 줄 여자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의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 여자도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그러니 최현숙의 마지막 바람을 이루어 주는 편이 맞았다.다음 날 아침.소예지는 고하슬에게 검은색 원피스를 입혀 주었다.처음으로 온몸을 검게 차려입은 고하슬이 조금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엄마. 우리 오늘 어디 가요?”소예지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애써 삼키며 딸의 옷깃을 정리해 주었다.“하슬아. 오늘은 엄마랑 왕할머니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갈 거야. 잘 보내 드리고 오자. 괜찮지?”고하슬이 잠시 소예지를 바라보다 물었다.“외할아버지랑 외할머니처럼 돌아가신 거예요? 이제 앞으로는 영원히 못 만나요?”소예지는 순간 멈칫하며 딸을 바라봤다.고하슬의 눈에도 슬픔이 어려 있었다.“저 왕할머니 영원히 기억할 거예요. 앞으로도 계속 생각할 거예요.”옆에서 듣고 있던 양희순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고이한은 몸을 낮춰 딸과 눈을 맞췄다.눈빛은 한없이 부드러웠고 딸을 향한 깊은 사랑이 고스란히 묻어났다.“학교 공부는 어때? 숙제는 있어?”“네! 저 다 할 수 있어요.”고하슬이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한층 더 의젓해진 모습이었다.그때 양희순이 다가와 물었다.“대표님. 제가 국수 한 그릇 끓여 드릴까요?”고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부탁드릴게요.”소예지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고이한이 딸과 조금 더 함께 있기를 바랐고 고하슬도 지금은 아빠 곁에 있어 주었으면 했다.지금 고이한에게는 마음을 붙들어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딸은 앞으로 고이한에게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 터였다.양희순이 국수를 끓여 가져오자 고이한은 딸과 함께 조금씩 먹었다.밤 열 시가 되자 고이한은 딸의 손을 잡고 위층으로 올라가 침대에 눕혀 주었다.“아빠. 저한테 이야기 하나 해 주시면 안 돼요?”고하슬이 부탁하자 고이한이 소예지를 바라봤다.소예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하슬이랑 조금 더 있어 줘.”소예지는 고이한이 안방에서 딸과 함께 시간을 보내도록 두고 서재로 나와 잠시 앉아 있었다.어느덧 열 시 이십 분이었다. 내일도 학교에 가야 하니 이제는 고하슬을 재울 시간이었다.고이한은 집을 나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한 찻집 2층 VIP실에는 하종호와 윤하준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세 사람이 이곳에 모인 건 차를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하종호와 윤하준은 그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친구의 곁을 지켜 주러 온 것이었다.이럴 때는 어떤 위로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오랜 친구 사이에 굳이 많은 말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고이한이 필요로 할 때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룸 안에는 은은한 조명만 켜져 있었다.고이한은 창가 소파에 앉아 있었고 윤하준은 말없이 차를 우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고요한 침묵만 이어졌다.하종호와 윤하준의 시선이 이따금 마
집에 도착했지만 아직 고하슬을 데리러 갈 시간은 아니었다.소예지는 서재로 들어가 소파에 앉은 채 한동안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예전 일들이 자꾸 떠올랐고 고씨 집안 사람들도 계속 마음에 걸렸다.오후가 되어 딸을 데려온 뒤에는 최대한 감정을 추슬렀다.아직 고하슬은 너무 어렸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은 아빠가 돌아오면 직접 이야기해 주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다음 날 아침, 소예지는 고하슬을 학교에 데려다준 뒤 연구소에도 가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소예지는 고이한에게 전화를 걸까 잠시 고민했다. 혹시 자신이 도울 일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곧 생각을 접었다.그래도 고이한이 있으니 자신이 따로 나서지 않아도 잘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오후 두 시 반쯤, 소예지는 양희순과 고씨 집안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양희순도 갑작스러운 소식에 적잖이 놀란 듯했다.그때 밖에서 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양희순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차고 쪽을 바라봤다.“사모님. 대표님이 오신 것 같아요.”소예지도 몸을 일으켜 현관 밖으로 나갔다.이지가 운전해 온 차가 앞에 멈춰 있었고 뒷좌석 문이 열리며 고이한이 내렸다. 젤리는 그를 보자마자 먼저 달려가 반갑게 맞았다.양희순이 소예지를 향해 말했다.“사모님도 가서 좀 부축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소예지는 고이한이 몹시 지쳐 있다는 걸 한눈에 알아보고 망설임 없이 그에게 다가갔다.이문혁이 소예지에게 말했다.“소 박사님. 고 대표님 좀 부탁드립니다. 밤새 한숨도 못 주무셨어요.”마침 고이한의 몸이 살짝 휘청이자 소예지는 한 걸음 더 다가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생각해 보면 어제 아침 휴게실에서 한 시간 정도 눈을 붙인 게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 지금까지 제대로 잠들지 못한 셈이었다.고이한이 고개를 돌려 소예지를 바라봤다.핏발이 잔뜩 선 눈에는 피로와 고통이 짙게 배어 있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소예지를 안심시키려는 듯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나 괜
소예지는 순간 온몸이 굳었다.평소에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처럼 든든하고 강해 보이던 고이한이 지금은 기댈 곳 하나 없는 아이처럼 느껴졌다.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소예지의 마음도 저릿하게 아파 왔다.자신 역시 슬펐지만 삶과 죽음만큼은 누구의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고이한이 필요로 할 때 잠시 기댈 수 있는 어깨가 되어 주는 것뿐이었다.소예지는 어깨 부분의 옷이 고이한의 뜨거운 눈물에 조금씩 젖어 드는 걸 느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손을 들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길 바라며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할머니가... 가시려나 봐.”고이한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그 안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이 가득했다.그 한마디에 애써 억누르고 있던 소예지의 슬픔도 함께 터져 나와 눈물이 소리 없이 뺨을 타고 흘렀다.그때 병실 문이 열리고 눈가가 붉게 젖은 진가영이 나왔다.“다들 들어와.”두 사람은 함께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안에서는 고수경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침대 위의 최현숙은 마치 잠든 것처럼 아주 평온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하지만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마치 깊이 잠든 것처럼 고요하기만 했다.그 모습을 보는 순간 소예지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버렸고 눈물이 저절로 뺨을 타고 흘렀다.진가영을 따라 고이한과 고수경이 침대 곁에 무릎을 꿇었다. 뒤에서는 급히 들어온 의사들이 최현숙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소예지도 천천히 고이한의 곁에 무릎을 꿇었다.눈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사이 문득 오래전 기억들이 떠올랐다.장거리 비행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 산후조리를 도와주던 최현숙의 모습과 늘 따뜻하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봐 주던 눈빛, 다정한 목소리가 하나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목이 꽉 막혀 왔다.소예지에게 최현숙은 친할머니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소예지는 무릎을 꿇은 채 곁에 있는 고이한을 바라봤다.고이한은 최현숙의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정리해 준 뒤 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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