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6년 동안 아내와 엄마의 역할을 묵묵히 해온 소예지. 나중에서야 남편 고이한이 해외에서 첫사랑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무리 차가운 심장이라도 정성을 다하면 언젠가는 따뜻하게 녹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고이한의 첫사랑이 국제적인 대상을 수상하고 축하파티를 열던 날, 소예지는 딸이 차가운 수술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정신을 차렸다. 더 이상 의미 없는 사랑에 매달리지 않기로 한 소예지는 이혼 합의서를 건네고 딸과 함께 미련 없이 돌아선다. ... 과거의 전공을 되살린 후 한때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소예지는 의학계가 탐내는 인재로 거듭난다. 그녀의 논문은 세계적인 권위의 학술지에 실렸고 연구 성과는 의학계의 각종 대상을 휩쓴다. 모두의 앞에서 눈부시게 빛나며 새로운 행복을 찾으려던 그때 줄곧 고고하고 오만하던 남자는 마침내 무너져 내린다. 미친 듯이 절규하며 소예지에게 무릎을 꿇은 고이한. “예지야, 제발 날 버리지 마...”
View More소예지가 그를 흘끗 쳐다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그래서?”“너무 무리하지 마. 몸이 더 중요하니까.”고이한은 그녀가 해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조기 졸업 시험 같은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하지만 소예지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쌓여 있는 책 더미에 파묻힌 소예지의 가녀린 어깨는 마치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운 듯 위태롭게 보였다. 그러나 고이한은 정작 그녀가 더 야윈 사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그는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채 문틀에 기대서서 무심하게 말했다.“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네가 원하는 거, 내가 다 들어줄 수 있는데.”“이한 씨가 줄 수 있는 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내가 원하는 건 당신이 절대 줄 수 없어.”소예지는 고개조차 들지 않고 단호하게 받아쳤다.고이한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시계를 흘끗 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자정은 넘기지 마.”저게 걱정하는 걸까? 아니, 그저 고이한 특유의 지배적인 태도일 뿐이었다.소예지는 그를 무시한 채 책장을 넘겼다.한편, 집으로 돌아온 심유빈은 가정부에게 약을 발라달라고 했다. 그때 그녀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고수경이 보낸 메시지였다.[유빈 언니, 자? 나 언니한테 할 말이 있어.][아직 안 잤어. 무슨 일이야?]곧 영상 통화 요청이 들어왔고 심유빈은 가정부를 내보낸 뒤 통화를 수락했다.“어, 수경아.”“언니, 나 하준 오빠 차에 있던 그 머리끈이 누구 건지 알아냈어.”“그게 누구 건데?”심유빈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새언니 거야.”고수경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 말에 심유빈은 놀랐다.“그게 어떻게 예지 씨 거야?”“맞다니까! 저번에 새언니를 축하해 주던 날에 봤는데 새언니가 그거랑 똑같은 머리끈을 하고 있었어.”고수경은 확신에 차 있었다.심유빈은 지난번에 윤하준이 소예지를 몰래 도와줬던 일이 떠올라 애써 고수경을 달래 주었다.“수경아, 그게 진짜 예지 씨 거라고 해도 별거 아닐 거야. 혹시 하슬이가 실수로 차에 두고 간 걸
심유빈은 턱을 괴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응, 알았어.”그러더니 무심하게 말했다.“아까 내 동생한테서 들었는데 예지 씨가 이번에 조기졸업 시험을 본다면서? 학부를 빨리 끝내고 싶다던데, 오빠도 알았어?”고이한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그래?”“그리고 양 박사님이 이번에 팀을 새로 꾸리면서 예지 씨의 이름을 명단에서 뺐대. 오빠, 혹시 예지 씨를 다시 넣어줄 생각 없어? 그래도 오빠 아내잖아.”고이한은 단호하게 대답했다.“내가 양 박사님께 넣지 말라고 부탁했어.”심유빈은 그 말을 듣고 멈칫했다.“그럼 예지 씨가 화내지 않아?”“이번 연구에 예지 어머니의 샘플을 사용해서 날 많이 원망하고 있어.”심유빈은 미소를 지은 채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럴 만도 하지. 아무래도 그건...”“무슨 얘기 하고 있어?”이때 하종호가 다가오며 말을 끊었다.고이한은 그와 간단히 인사했고 하종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심유빈을 바라봤다.“괜찮아요? 아까 뉴스를 봤는데 진짜 아찔하더라고요.”“괜찮아요. 저도 팬이 그렇게까지 과격할 줄은 몰랐어요. 그냥 손목이 좀 부은 정도예요.”심유빈은 말하며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하종호는 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했다.“다음부턴 조심해요. 외출할 땐 경호원을 꼭 데리고 다니고요.”잠시 후, 윤하준도 도착했다.“이안이 오늘은 떼 안 썼어?”하종호가 농담하듯 묻자 윤하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새 장난감 하나 사주겠다고 약속했지, 뭐.”심유빈은 곁눈질하며 말했다.“하준 씨도 이제 슬슬 여자 친구 만들어야겠어요. 그래야 이안이를 돌봐줄 사람이 생기죠.”하종호는 윤하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농담을 보탰다.“그런데 너, 너희 외숙모의 자선 사업에 투자한다면서?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조용히 의학 쪽까지 손을 뻗은 거야?”윤하준은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앞으로는 이쪽이 큰 흐름일 거야.”그 말에 잔을 들고 있던 고이한은 멈칫했고 심유빈도 눈빛이 흔들렸다.윤하준이 정말 단순히 사업적 이유로 의학계에 투자한
고이한은 고하슬에게 다가가지 않고 곧장 돌아서 버렸다. 이제 그의 마음속에서 연인이 딸보다 더 큰 자리를 차지한 게 아닐까 싶었다.몇 분 뒤, 윤하준이 허겁지겁 도착했다.“미안해요. 길이 너무 막혀서 늦었네요.”그가 난처해하며 말하자 소예지는 가볍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괜찮아요. 아이들은 재밌게 잘 놀았어요.”“이한이는 안 왔어요?”“일이 있어서 먼저 갔어요.”소예지가 담담하게 말했다.그녀를 바라보는 윤하준의 눈빛에 안쓰러움이 번졌다.오후 다섯 시 반, 소예지는 딸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고하슬이 해맑게 물었다.“엄마, 아빠는 어디 갔어요?”소예지는 고하슬의 작은 손을 꼭 잡으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하슬아, 엄마가 너한테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그녀의 진지한 표정에 고하슬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네, 물어보세요.”소예지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만약에 언젠가 엄마랑 아빠가 따로 살게 된다면 너는 아빠랑 같이 살고 싶어, 아니면 엄마랑 같이 살고 싶어?”딸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아 최대한 부드럽게 물어 본 소예지는 마음속으로 고하슬이 자신을 선택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고하슬은 순간 멈칫했지만 거의 고민하지도 않고 바로 대답했다.“저는 엄마랑 같이 살 거예요!”그러곤 눈알을 또르르 굴리며 되레 물었다.“그런데 아빠는 왜 우리랑 같이 안 살아요?”소예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결국 이 문제에서 아이가 가질 수 있는 선택지는 둘 중 하나뿐이라는 걸 알기에 그녀는 더욱 마음이 아팠다.“아빠랑 엄마는 각자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같이 못 살아.”소예지는 애써 웃으며 설명했다.고하슬은 다 이해한 건 아니었지만 엄마의 목을 껴안으며 말했다.“전 엄마가 좋아요.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좋아요. 앞으로도 절대 엄마랑 떨어지기 싫어요.”소예지는 고하슬을 꼭 끌어안으며 비로소 안도에 찬 미소를 지었다.몇 분 뒤, 박시온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심유빈이 남자 팬에게 집착에 가까운 추
소예지가 막 복도를 돌았을 때 이서연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채린아, 정말 부럽다. 네가 양 박사님의 제자가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이제 앞길이 창창하겠네.”“교수님이 나한테 거는 기대가 커. 하지만 교수님이 잘 이끌어주시면 내가 훨씬 빨리 성장할 수 있을 거야.”안채린의 목소리는 자신감으로 가득했다.이서연이 맞장구치듯 말했다.“이번에 양 박사님이 직접 나서셨으니, 소예지는 더 이상 끼어들 방법이 없을 거야. 보나 마나 바로 탈락이야.”“능력 없는 사람은 살아남을 수 없어. 이 바닥에 약자는 필요 없거든.”안채린의 조롱 섞인 말소리가 복도에 울렸다.그들이 멀리 사라지고 나서야 소예지는 걸음을 내디뎠다. 그녀는 마음이 쓰렸지만 티내지 않고 곧장 사무실로 들어가 책상을 정리했다.그때 강준석이 찾아왔는데 그는 벌써 해외 인맥을 총동원해 전 세계의 유전자 은행에서 기증자 샘플을 찾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매칭되는 게 나오면 소예지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겠다고 했다.“선배, 고마워.”소예지의 목소리에 진심이 묻어났다.“고맙긴. 네 실력이 어떤지 우리 다 알아. 이번 일로 기죽을 필요 없어.”강준석은 담담하게 그녀를 위로했다.그러자 소예지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아. 나도 끝까지 해볼 거야.”그 사이 윤혁은 그녀의 조기졸업 시험 절차를 진행하고 있었고 잠시 후 평가용 시험지를 보내왔다.“예지야, 시험을 신청하기 전에 먼저 평가를 봐야 해. 결과가 좋아야 학교에서 정식으로 조기졸업 시험을 신청해 줄 수 있어.”“네, 선배. 최대한 빨리 해서 내일 아침까지 보내 드릴게요.”“급하지 않으니까 꼼꼼히 풀어. 완성도 높게.”그런데 마침 이서연이 윤혁에게 자료를 전해주러 왔다가 프린터에서 뽑히는 신청서를 보고 물었다.“선배, 저건 뭐예요?”“아, 예지가 조기졸업 시험을 신청하려고 해서 평가 서류를 출력해 주려고.”“뭐라고요? 예지는 아직 대학교 2학년인데요?”이서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윤혁은 가볍게 웃으며 설명했다.“일
“이한 씨가 나한테 한 달 시간을 줬어. 그 안에 맞는 골수 기증자를 찾아내라는 거야. 준석 선배, 선배 인맥 좀 빌려줄 수 있을까?”소예지는 간절하게 부탁했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강준석의 인맥이라면 분명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강준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 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수락했다.그날 오후, 실험동 회의실에서 중요한 회의가 열렸다. 이성열이 직접 와서 새로 연구팀을 이끌게 될 양정화를 소개했다.“제가 이번 프로젝트의 연구팀을 새로 꾸릴 겁니다.”양정화의 차가운 시선이 회의실을 훑었다.순간 소예지는 호흡이 멎는 듯했다.“강준석, 안채린, 도윤재. 우선 이 세 사람은 확정입니다. 나머지는 추후 심사를 거쳐 결정하겠습니다.”안채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녀는 일부러 고개를 돌려 소예지를 흘겨보며 비웃는 시선을 던졌다. 예상대로 소예지는 명단에서 탈락이었다.“이번 연구는 고신 그룹이 전폭적으로 투자하는 사업입니다. 그만큼 철저히 검증된 인력만 필요하니 최소 학부 졸업 이상이어야 자격이 주어집니다.”말을 마친 양정화의 시선은 유독 소예지에게 오래 머물렀다.회의장 안을 둘러보니 학력이 가장 낮은 건 소예지였다. 아직 대학교 2학년을 다니는 중이었으니 양정화의 기준에선 애초에 자격조차 없는 셈이었다.회의가 끝난 뒤 소예지는 직접 이성열을 찾아갔다.“박사님, 저도 이번 연구에 참여할 수 없을까요?”이성열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예지야, 이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사실 양 박사를 데려온 사람이 이한이야. 게다가 이번 연구는 우리 연구소와 별개로 진행되는 독립 프로젝트라 내 권한 밖이거든.”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나한테 부탁하기보단 네 남편한테 말하는 게 더 빠를 거야. 이한이가 부부 사이의 체면을 봐서라도 너를 끼워줄 수 있지 않겠니?”하지만 소예지는 속으로 냉소를 흘렸다. 자신을 프로젝트에서 쫓아내려 한 장본인이 바로 고이한인데 그가 받아줄 리가 있나.“양 박사가 일부러 널 겨
소예지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왜?”“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고이한의 말투는 담담했다.그제야 소예지는 그가 원하는 게 자신을 연구팀에서 빼내는 것이란 걸 깨달았다. 그래야 그녀가 어머니의 공여 샘플과 접촉하지 못하고 연구 진행에 차질이 생기지 않을 테니까.소예지는 숨을 들이쉬고 곧장 물었다.“당신이 구하려는 사람이 심유빈 씨 맞지?”고이한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끝내 부정하지는 않았다.그러자 소예지의 심장이 칼날에 베인 듯 아팠다.“웃기네.”소예지는 씁쓸하게 웃었다.“내 엄마의 골수를 가지고 실험하는 거 절대 동의 못 해.”고이한은 차갑게 말했다.“한 달 시간을 줄게. 네가 그 안에 다른 적합한 골수 샘플을 찾아오면 어머님의 샘플을 돌려주고, 못 찾으면 이번 연구에 끼어들지 마.”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돌아서서 나가버렸다.소예지는 몸을 휘청거렸고 이내 손으로 벽을 짚고서야 겨우 버텼다. 가슴 한가운데서부터 뼈를 파고드는 고통이 퍼져나갔다.그날 밤, 소예지는 고하슬을 품에 안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녀의 따뜻한 체온 속에서 조용히 잠든 아이를 보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고이한이 심유빈을 위해 자신을 실험에서 밀어내려 한다니, 우습고도 비참했다....다음 날 아침, 소예지는 딸을 유치원에 보내고 곧장 박시온의 사무실로 향했다.박시온은 미리 작성해둔 이혼 합의서를 건네주며 말했다.“정말 이대로 할 거야? 재산분할 하나도 없이? 내가 기사를 봤는데 올해만 해도 고 대표의 재산이 두 배는 불었더라.”소예지는 이혼 합의서에 적힌 조항을 차분히 훑어본 뒤 고개를 들었다.“돈은 중요하지 않아.”“그래. 뭐 더 추가하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다시 써줄게.”소예지는 꼼꼼히 확인했지만 딱히 고칠 부분은 없었다. 그러자 박시온이 말했다.“내가 제일 믿는 선배 변호사가 있는데 그 선배한테 맡기는 게 좋겠어. 이혼 소송은 그 선배가 제일 잘해.”“알겠어.”소예지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건 강력한 변호사였다.박시온은 그 선배의 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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