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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가면을 쓴 남편: Chapter 501 - Chapter 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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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1화

박재용이 문을 열고 들어오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내가 그림 그리느라 고생한 건 알아서 밥 사주러 온 거예요?”이것이 송남지가 말한 서프라이즈인 걸까? 놀라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기분이 조금 좋아진 건 사실이었다. 송남지는 여전히 신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박재용의 의자를 빼주었다.“여기 앉아요. 풍경이 좋거든요. 근사한 경치를 보면서 섬세한 요리를 즐기다 보면 기분도 훨씬 좋아질 거예요.”박재용은 흔쾌히 자리에 앉았다. 그가 아는 송남지라면 분명 무언가 부탁할 게 있어서 금쪽같은 시간을 내주었을 터였다.평소의 송 관장님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든 사람이니까.“말해 봐요, 무슨 일로 나 찾은 건지.”그때 송남지에게 오지훈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엄가을이 5분 뒤면 도착한다는 내용이었다.그녀는 엄가을이 도착한 뒤에 예능 프로그램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지금 맨입으로 말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일 거라 생각했다.“천천히 일단 주문부터 하죠. 이따가 올 사람이 한 명 더 있거든요.”누군가 더 온다는 소리에 박재용이 즉시 미간을 찌푸렸다.“하정훈인 건 아니겠죠? 그 사람 오면 나 안 먹어요.”그는 남의 데이트에 들러리 서는 취미는 없었다.송남지는 고개를 저으며 코트를 걸어둔 뒤 대답했다.“아니에요, 깜짝 놀랄 만한 인물이라니까요!”박재용은 이 넓은 서경에서 자기를 놀라게 할 사람이 누가 있겠냐며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그의 관심은 온통 메뉴판에 쏠려 있었다.디저트를 여러 개 주문하고도 정작 식사 메뉴는 고를 생각이 없어 보였다.송남지가 조심스레 조언했다.“재용 씨, 디저트가 이미 너무 많아요.”박재용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주문을 이어갔다.“누가같이 먹는대요? 이건 다 내가 먹고 싶은 것들이라고요. 송 관장님, 설마 밥 한 끼 사주면서 이렇게 쩨쩨하게 구는 건 아니죠?”송남지는 내심 놀랐다. 디저트를 이렇게나 좋아하는 남자는 처음 봤기 때문이다.“아니에요, 먹고 싶은 거 다 시켜요. 남기지만 마시고요.”박재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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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2화

엄가을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그 말을 들어야 했다. 민망함과 분노가 치밀었지만 지금은 어떻게든 감정을 억눌러야만 했다.소속사 대표가 직접 부탁한 자리인 만큼, 여기서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간 대표의 체면을 깎아 먹는 셈이었기 때문이다.엄가을은 지금 이 상황이 영화 촬영보다 수천 배는 더 고달프다고 느꼈다.송남지는 크게 숨을 들이켜며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썼다.‘최보라가 박재용의 부계정을 찾아냈을 때 분명 엄가을의 흔적이 있지 않았나? 거기 엄가을의 사인이 있었던 걸 똑똑히 기억하는데. 사인을 소장할 정도면 팬인 게 정상 아닌가? 그런데 대체 왜 지금은 팬이 아니라는 거지? 심지어 아예 모르는 눈치잖아.’송남지는 진땀이 났다. 도대체 얼마나 높은 눈치와 센스가 있어야 지금 이 상황을 수습할 수 있단 말인가.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이미 벌어진 일이었으니 여기서 박재용을 계속 추궁해 봤자 분위기만 더 어색해질 뿐이고 엄가을만 무안해질 게 뻔했다.송남지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엄가을 씨 팬이 아니라니, 그럼 제가 다시 정식으로 소개해 드릴게요. 이쪽은 엄가을 씨고 이쪽은 재스민 갤러리의 신예 작가 박재용 씨예요.”박재용은 눈을 가늘게 뜨고 송남지를 훑어보며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려 했다. 다만 2초도 채 지나지 않아 결론이 났다.송남지가 자신을 엄가을의 팬이라 착각했고 그래서 준비한 ‘서프라이즈’가 바로 엄가을이었던 것이다.그리고 이런 자리를 만든 건 분명 업무 외적으로 부탁할 일이 있어서일 터였다.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박재용은 기분이 불쾌해졌다. 그럼에도 그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송남지가 대체 무슨 부탁을 하려는 건지 끝까지 지켜보기 위해서였다.박재용은 엄가을이 인사를 건넬 때조차 눈을 가늘게 뜬 채 냉담한 태도를 유지했다.“박 작가님,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엄가을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살짝 굳어졌다.박재용이 대놓고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는 게 느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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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3화

“재용 씨, 최근 방송국에서 제안 온 예능 프로그램이 있는데 재용 씨가 출연해 줬으면 해요. 첫 방송 시기가 마침 겨울 전시회 직전이라 그렇게만 되면...”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재용이 벌떡 일어났다.그는 창백해진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며 송남지를 노려보았다.“고작 방송 하나 시키겠다고 엄가을 씨까지 이용한 거 거예요? 송 관장님, 갤러리 사업을 위해서라면 정말 못 할 짓이 없으시네요! 계약서에 명시했잖아요. 난 재스민을 빛내줄 들러리 노릇 따위 안 한다고. 내 일은 오직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에요!”이것은 화가로서 그가 지키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었다.그림 외의 다른 일에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박재용의 언성이 높아졌고 평소 농담을 즐기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눈빛엔 살기마저 감돌았다.송남지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엄가을은 이 상황이 흥미롭다는 듯 박재용과 송남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이에 송남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박재용은 숨을 크게 들이켜고 송남지 옆으로 다가와 차갑게 내뱉었다.“비켜요.”송남지는 물러서지 않고 박재용의 엄한 시선을 받아내며 설득을 시도했다.“재용 씨가 오직 작업에만 몰두하고 싶어 하는 건 잘 알아요. 하지만 이번 방송은 우리 갤러리를 위한 특별한 프로젝트라고 생각해주면 안 될까요? 출연료나 보상은 재용 씨가 원하는 대로 최대한 맞춰 드릴게요. 얼마든지 협의 가능해요...”박재용이 콧방귀를 뀌며 실소를 터뜨렸다.“출연료나 보상? 송남지 씨, 당신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아니면 뇌를 좀비한테 파먹히기라도 했어요? 내가 돈이 아쉬운 사람으로 보여요?”그는 라인국의 대부호의 아들로 송남지 역시 그가 돈에 전혀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가 엄가을의 팬일 것이라는 기대가 완전히 빗나간 이상, 이제 남은 카드는 역설적이게도 물질적인 보상뿐이었다.“비키라고.”박재용이 앞서 했던 말을 무겁게 되풀이했다.송남지는 입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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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4화

송남지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룸을 빠져나왔다. 계산하려고 하자 직원이 웃으며 말했다.“손님, 조금 전 같이 계셨던 남성분께서 이미 계산을 마치셨습니다.”카드를 든 송남지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지만 억지로 눌러 참았다.식당을 나서자마자 송남지의 감정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하루 만에 중요한 일 두 가지를 모두 망쳐버렸다는 좌절감과 무력감이 그녀를 완전히 짓눌렀던 것이다.그녀는 플라타너스 가로수길을 정처 없이 걸었다.바람에 흔들리는 앙상한 가지들이 바닥 위로 음울한 그림자를 드리웠고 송남지는 그 그림자들을 밟으며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나아갔다.가방 안의 휴대폰이 지치지도 않고 울려댔지만 그녀는 받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차들로 가득 찬 도로와 높게 솟은 빌딩들 사이에서 그녀는 한참 동안 길을 잃은 사람처럼 헤맸다.고개를 들자 서경 명주가 눈에 들어왔고 그 맞은편에는 서경 명주보다 더 유명한 성은 그룹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송남지는 성은 그룹 건물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저 건물의 가장 높은 곳이야말로 지금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정신적 안식처였다.성은 그룹 전체는 건물의 분위기만큼이나 차갑고 거리감이 느껴졌다.하지만 건물 안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송남지는 이내 후회가 밀려왔다.이곳의 모든 것은 지나치게 차가웠기 때문이다.하정훈 특유의 담담하고 냉막한 표정이 떠오르자 그녀는 그만 위축되고 말았다.안내 데스크 앞에 선 송남지는 하정훈이 무척 바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겼다.하긴, 그는 언제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사람이었으니까.게다가 그에게도 그만의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을 터였다.자신도 어엿한 성인인데 기분이 안 좋다고 해서 무작정 안식처부터 찾으려 해선 안 될 일이었다.하정훈이 단 한 번도 업무상의 불쾌함을 내색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송남지가 막 발길을 돌리려던 찰나, 누군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사모님?”송남지가 돌아보니 하정훈의 비서가 서 있었다.평소 늘 여유롭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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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5화

안내 데스크 직원은 송남지의 당혹스러운 감정을 눈치채고 서둘러 자리를 비워주었다.사무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직원은 마침 그곳에서 내리던 하정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하정훈의 짙은 눈썹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고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얼마나 초조했는지 직원을 불러 세워 묻기까지 했다.“사모님은 괜찮아 보였어요?”직원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대표님, 사모님 기분이 아주 안 좋아 보이세요. 기운도 없으시고 금방이라도 우실 것처럼 눈가가 젖어 있으셨거든요.”그 말을 듣는 순간 하정훈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는 간신히 평정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알겠어요. 먼저 내려가 보세요.”하정훈이 대표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찻잔을 든 송남지가 보였다.찻물은 거의 줄지 않은 채 그대로였고, 그녀는 초점이 흐릿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하정훈은 발소리를 죽여 송남지 곁으로 다가갔다. 소파 옆자리가 비어 있었지만 그는 앉지 않고 대신 그녀의 발치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그녀의 손을 감싸 쥐며 애틋하게 올려다보았다.익숙한 온기가 곁에 닿자 송남지는 그제야 현실로 돌아왔다.하정훈의 두툼하고 따뜻한 손바닥이 그녀의 손을 꽉 잡아주자 비로소 기운이 조금 나는 것 같았다.하정훈은 그녀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남지야, 왜 내 전화 안 받았어?”송남지는 입술을 굳게 깨물었지만 붉어진 눈시울은 감출 수 없었다.그녀의 목소리에 서러운 울음 섞인 기운이 묻어났다.“난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나 봐요. 스스로는 똑똑하다고 믿고 살았는데 남들 눈에는 그저 우스꽝스러운 광대에 불과했나 봐요...”애써 억눌러왔던 감정이 하정훈 앞에서 결국 둑이 터지듯 무너져 내렸다.하정훈은 가슴 아파하며 몸을 일으켜 그녀를 제 품속으로 끌어당겼다.“너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 남지야.”송남지는 하정훈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고 눈물이 뺨을 타고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울고 싶으면 마음껏 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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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6화

하정훈은 짙은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놀림을 받은 게 조금 언짢은 기색이었지만, 그는 대꾸하는 대신 조용히 하라는 듯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송남지가 자고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오지훈도 눈치껏 입을 다물고는 최보라에게 작게 속삭였다.“별일 없는 것 같으니 우린 이만 가자.”최보라도 그제야 안심한 듯 송남지를 잘 돌봐달라는 말을 남기고 오지훈과 함께 자리를 떴다.송남지는 그 뒤로 몇 시간이나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감정의 폭발에 몇 시간 동안 정처 없이 걷기까지 했으니 몸이 버텨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눈을 떴을 때, 서경의 도심은 이미 화려한 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창밖으로 보이는 서경 명주 타워가 화려한 아우라를 뽐내고 있었다.그녀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어스름한 사무실 안에 하정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러다 문이 열리고 역광 속에서 하정훈의 근사한 실루엣이 나타났다.송남지는 잠긴 목소리로 입을 뗐다.“내가 너무 오래 잤나 봐요...”하정훈은 방금까지 회의실에서 중요한 손님을 맞이하던 중이었다. 그녀가 깰 시간이 된 것 같아 뒷일은 비서에게 맡기고 서둘러 돌아온 참이었다.그가 다가오자 따뜻한 공기 사이로 짙은 우드 향이 섞인 체취가 더욱 향긋하게 감돌았다.“얼마 안 잤어, 고작 몇 시간인걸. 어때? 발은 좀 괜찮아? 눈이 퉁퉁 부었네.”송남지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신발은 이미 하정훈이 벗겨놓은 뒤였고 발에는 곰돌이 양말이 신겨져 있어 이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그녀는 쑥스러운 마음에 슬쩍 발을 뒤로 감추었다.그 무심한 동작에 하정훈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그게 그녀를 좋아해서 귀여워 보이는 건지, 아니면 그녀 자체가 그냥 귀여운 건지 그로서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발은 아무렇지 않은데, 눈이 정말 퉁퉁 부은 것 같아요.”거울을 보지 않아도 자신의 눈이 지금 얼마나 엉망일지 짐작이 갔다.발은 괜찮다는 말에 하정훈은 묘한 뿌듯함을 느꼈다.그는 웃음기를 거두고 송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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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7화

“남지야, 만약 재스민의 운영 업무를 계속하고 싶지 않다면 내가 전문 팀을 구해줄게. 예전에 민지현 팀을 불렀던 것처럼 말이야. 앞으로 넌 오직 그림에만 전념해. 넌 내가 지켜줄 테니 네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면 돼.”송남지는 입술을 가볍게 떨며 고민에 빠졌다.‘이대로 익숙하고 편안한 곳에만 머물러야 하는 걸까, 아니면 이 벽을 넘지 못해 영영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 되고 마는 걸까.’잠시 후, 송남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눈가를 덮고 있던 따뜻한 수건을 걷어냈다. 그리고 눈동자를 반짝이며 하정훈을 돌아보았다.“정훈 씨, 나 조금만 더 도전해 볼래요.”‘결국 일은 사람이 하기 나름이야. 남들도 다 해내는 일을, 나라고 못 해낼 이유가 어디 있겠어?’하정훈은 순간 멍해졌다. 그는 송남지가 그림 외의 일에 계속 매달리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망설이고 있었다.오늘 같은 좌절을 그녀가 또 겪게 되지는 않을지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한참을 고민하던 하정훈이 신중하게 입을 뗐다.“남지야, 사실 나는 지금 네가 그림에만 집중했으면 좋겠어.”송남지는 의아한 듯 조금 낙담한 기색으로 물었다.“왜요? 내 실력으로는 무리라고 생각하는 거예요?”하정훈은 송남지가 오해할까 봐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의 목소리는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빛처럼 한없이 부드러웠다.“네 실력을 믿어. 다만 네가 상처받는 걸 더는 보고 싶지 않을 뿐이야.”하정훈의 눈에 송남지는 한 송이 순백의 치자꽃 같았다.그는 그녀가 티 없이 피어날 수 있도록 영원한 여름을 만들어주고 싶었다.그래서 이 하얀 치자꽃이 추운 겨울 속에서 떨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못내 마음 아팠다.송남지는 입술을 깨물며 숨을 크게 내뱉더니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사실 저 어릴 때 성적은 평범했거든요. 이웃들은 여자애가 예쁘기면 하면 됐지, 공부는 그저 덤일 뿐이라고 입을 모았죠. 그땐 어려서 그 말이 정답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엄마가 그러시더라고요. 여자는 예쁘기만 하면 된다고 속삭이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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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8화

하정훈은 송남지의 귓가에 내려앉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넘겨주었다.하정훈은 얇은 입술을 송남지의 부드러운 귓가에 대고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로 나지막이 속삭였다.“남지야, 네가 뭘 하든 다 괜찮아. 하지만 딱 하나만 약속해줘. 앞으로는 내 전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받아야 해.”아까 엄가을을 통해 오지훈에게 전해진 소식은 충격적이었다.재스민의 관장이 계약 작가에게 사람들 앞에서 험한 말을 들으며 망신을 당했다는 이야기에 그는 앞뒤 가릴 것 없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었다.하지만 신호음만 갈 뿐 연락이 닿지 않자 그의 머릿속은 온통 하얗게 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송남지는 그의 간지러운 숨결에 목을 움츠리며 투정을 부렸다.“정훈 씨, 너무 간지러워요.”그녀의 청아한 웃음소리가 고층 빌딩의 어둠 속에서 마치 요정처럼 울려 퍼졌다.하정훈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제 아래에 있는 그녀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다.“남지야, 내 눈을 좀 봐봐.”송남지가 눈을 들어 그의 시선을 마주하자 그의 눈동자 속에는 수많은 별 가루가 박힌 듯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그 깊은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송남지는 세상 그 어디보다도 포근한 안도감을 느끼곤 했다.마주 본 두 사람의 눈길 사이로 무수한 불꽃이 튀어 올랐다.송남지는 붉은 입술을 살짝 위로 말아 올린 채 그의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기분이 아주 좋았다.마치 그를 완전히 소유한 듯한 느낌이었다.그녀의 손가락은 마치 피아노를 치듯 장난스럽게 움직였고 그 리듬은 하정훈을 자극하는 은밀한 신호가 되었다.“당신 눈은 왜 봐요?”그녀가 맑은 목소리로 물으며 눈동자에 보일 듯 말 듯 한 유혹을 담아냈다.하정훈의 목울대가 크게 꿈틀거렸고 목소리는 한층 더 낮게 가라앉았다.“내 눈을 보고 약속해줘. 앞으로는 다시는 내 전화 안 받는 일 없을 거라고.”진지하게 매달리는 그의 모습에 송남지가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뭐라고 그렇게 정색까지 하고 그래요?”꼭 눈까지 맞춰가며 말해야 하느냐는 투였다.하지만 하정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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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9화

박명규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뗐다.“그래, 삼촌은 네 결정을 존중한다. 곧바로 사람을 시켜서 서경 별장을 처분하도록 하마.”박재용은 누가 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기세로 재스민 갤러리에 들이닥쳤다.지금쯤이면 송남지가 자리에 없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는 곧장 민지현의 사무실로 향했다.민지현은 마침 팀원들과 짧은 회의를 하던 중이었다.배달된 오후 간식을 막 뜯으려던 찰나, 박재용이 엄청난 화기를 뿜으며 안으로 들어섰다.하지만 팀원들은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젊고 돈 많은 천재 예술가라면 어느 정도 성깔이 있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다들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였다.민지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띄우려 했다.“어머, 박 작가님 오셨네요! 비서 시켜서 작가님 간식도 주문해 줄게요.”하지만 박재용은 눈을 가늘게 뜨며 차갑게 대꾸했다.“민 팀장님, 저랑 계약 해지 건에 대해 이야기 좀 하시죠.”‘계약 해지?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야?’사무실 안에 있던 팀원 모두가 얼어붙었다.탁자 위에 놓인 간식들은 이제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민지현은 들고 있던 커피잔조차 제대로 쥐지 못할 정도로 당황했다.“계약 해지요? 대체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혹시 불편한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최대한 맞춰 드릴게요.” 박재용의 웃음에는 분노와 멸시가 섞여 있었다.“오, 그래요? 맞춰준다고요? 그럼 솔직히 말하죠. 날 불쾌하게 만드는 건 바로 송남지 씨예요. 지금 당장 당신 사장을 해고할 수 있나요? 그게 안 된다면 우리 그냥 본론으로 들어가서 해지 이야기나 하죠.”이 말을 듣는 순간 민지현은 상황이 심각하게 꼬였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팀원들을 밖으로 내보냈다.“다들 잠시 나가서 일들 봐. 박 작가님과 단둘이 할 얘기가 있어.”팀원들은 쥐 죽은 듯 조용히 흩어졌다. 사무실을 나온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입 모양으로 조용히 속삭였다.“망했다. 박재용이 그만두겠대. 재스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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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0화

박재용은 미간을 팍 찌푸린 채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그의 표정에는 민지현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예능에 내보내려던 여자가 브랜드 측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을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녀라면 온갖 방법을 동원해 자신을 설득해야 했을 것이다.박재용은 한참 침묵하다 입을 뗐다.“못 믿겠어요. 민 실장님이랑 송남지 씨는 한패잖아요.”민지현이 피식 웃었다.“나도 관장님과 한패라면 좋겠는데, 그분은 미대 출신이라 특유의 콧대가 있어요. 나처럼 10년 가까이 직장 생활 한 사람은 가질 수 없는 그런 자존심 말이에요.”박재용의 미간이 서서히 풀렸다. 그는 물었다.“그럼 대체 왜 그러는 건데요? 내가 작품에만 전념하길 원하고 브랜드 제안까지 강하게 거절했다면서, 왜 예능에는 출연시키려는 거냐고요.”박재용의 태도가 눈에 띄게 수그러들었다.민지현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박 작가님, 송 관장님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에요. 올해가 재스민의 첫해고 서툰 부분이 있는 건 당연하죠. 게다가 얼마 전까지 입원해 계셨잖아요. 겨울 전시회는 코앞인데 마음은 급하고, 그러다 보니 무리수를 둔 거예요. 조금만 이해해 주면 안 될까요? 오늘 오전만 해도 브랜드 측의 냉대와 비아냥을 견디면서까지 당신의 창작 공간을 지켜주려고 애쓰신 분이에요.”민지현은 입이 닳도록 설득했다. 그녀는 여전히 재스민을 위해 박재용의 마음을 돌리고 싶었다.박재용이 망설이며 흔들리는 기색을 보이자, 민지현은 기세를 몰아 덧붙였다.“작가님을 만나러 가기 직전, 브랜드 측이 다른 갤러리와의 협업을 발표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들이 관장님께 본때를 보여줘서 교훈을 남기고 후회하게 만들려 한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죠. 그런데도 관장님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어요. 사실 작가님 앞에 섰을 때 관장님은 이미 한계치에 가까운 압박을 견디고 계셨던 거예요.”민지현은 박재용의 안색을 살피며 기회를 엿보았다.아니나 다를까, 잠시 뒤 박재용의 표정에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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