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5년 연애와 3년 결혼 생활. 송남지는 평생 윤해진과 함께할 거라 믿었다. 비행기 추락 사고 소식이 들려왔을 때 죽음조차 둘을 갈라놓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진실은 너무도 잔인했다. 윤해진은 죽은 게 아니라 이미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되어 있었다. 송남지가 믿어온 사랑은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송남지는 끝내 모든 감정을 내려놓고 스스로 이 어리석은 사랑의 막을 내렸다. 그리고 집안에서 정해준 결혼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서경 상류 사회의 중심, 하씨 가문의 장남 하정훈이 이혼녀를 아내로 맞았다는 소식은 곧 세간의 입방아에 올랐다. 송남지조차도 생각했다. 하정훈이 자신을 택한 건 단지 몸에 병이 있어 어쩔 수 없이 결혼을 치른 것이라고 말이다. 하씨 가문에서 원하는 걸 얻은 만큼 송남지는 아내로서 최소한의 체면은 지켜줘야 한다고 다짐했다. “당신 몸이 허락하지 않으면... 우리 아이 하나 입양하죠. 제가 당분간 몸을 숨기고 지내다가 세상에는 제 친자식이라고 하면 되잖아요.” 그 말에 하정훈은 송남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낮게 웃었다. “그렇게 원하면 그냥 솔직히 말해. 자기가 원하는 걸 내가 못 들어줄 이유가 없잖아.” 주변 사람들은 잘나가는 재벌 도련님이 왜 굳이 아내에게 매달리며 자신을 낮추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수군거렸다. 하지만 하정훈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고 오히려 입꼬리를 비웃듯 올리며 말했다. “아내한테 매달려서 뭐가 나빠? 결국 내가 원하는 건 다 얻을 수 있는데.” 사람들은 하정훈을 조롱했지만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가슴속에 묻어온 짝사랑이 얼마나 쓰라린 기다림이었는지 그리고 그 끝에 마침내 손에 넣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길이었는지.
View More그날 저녁, 송남지는 하종현 부부와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다.낯선 타국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것은 세 사람 모두 마찬가지였다.“남지야, 우린 내일 서경으로 돌아가기로 했단다. 전용기 항로 신청도 다 해두었으니 너도 같이 가자.”오가은의 말에 하종현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받았다.“그래. 너도 며칠 사이에 눈에 띄게 수척해졌더구나. 여기 더 있다가는 정말 뼈만 남을까 봐 걱정이다.”오가은이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맞아. 이제 재스민도 다시 맡아서 관리해야 하는데, 그렇게 기운이 없어서야 그 많은 일을 어떻게 감당하겠니?”송남지가 버터 빵을 한 입 베어 물자 진한 기름기가 입안 가득 퍼졌다.딱 한 입이었건만 금세 느끼했다. 결국 먹다 남은 빵을 내려놓은 송남지는 생긋 웃으며 입을 뗐다.“아저씨, 아주머니. 두 분은 처리하실 업무가 많으시잖아요. 재스민은 당장 제가 없어도 괜찮으니, 전 정훈 씨가 완쾌되면 그때 같이 들어갈게요.”기쁨이 서린 송남지의 얼굴을 마주하자 오가은의 표정에는 오히려 걱정의 그림자가 짙게 깔렸다.무어라 말이라도 더 건네며 만류하고 싶었지만, 끝내 수많은 말이 목구멍에 걸려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결국 하종현과 오가은의 가라앉은 분위기와 송남지의 활기찬 모습이 극명한 대조를 이룬 채 식사가 끝났다.이튿날, 송남지는 기어이 하종현과 오가은을 공항까지 배웅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큼직한 밴의 뒷좌석에 하종현과 오가은이 앉고 송남지가 그 뒤편에 앉았다.오가은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너도 좀 쉬지. 굳이 배웅까지 나올 것 없는데.”하지만 송남지는 웃으며 말했다.“병원에만 있기 답답했는데, 이 기회에 바람도 쐬고 좋죠.”하종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운전석의 성은 그룹 직원에게 지시를 내렸다.“우리를 공항에 내려준 뒤에 남지를 데리고 시내에 가서 쇼핑도 하고 구경도 좀 시켜줘라. 이 카드 가져가고.”말을 마친 하종현은 운전석 옆 사물함에 검은색 카드를 쓱 밀어 넣었다.오늘의 수리스는 여전히 화창한 날씨
하정훈은 비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때 남지를 붙잡지 못한 건 뼈저리게 후회해요. 하지만 남지와 이혼하기로 한 결정은 후회하지 않아요.”그 말에 오가은의 눈썹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며 경악과 충격에 휩싸였다.“그럼 남지와 재결합할 생각이 없다는 거니? 대체 왜? 너 정말 미쳤구나!”하정훈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든 말들이 목구멍에 걸려 있었기에, 그는 자신을 변호하는 대신 오가은의 매서운 질타를 묵묵히 받아낼 뿐이었다.병실 안의 기류가 지나치게 무거워지자 하정훈은 짐짓 농담조로 분위기를 띄우려 애썼다.“엄마, 남지가 그렇게 좋으시면 차라리 수양딸로 삼으시는 건 어때요?”오가은은 이를 악물며 대꾸했다.“네가 방금 수술을 마친 게 아니었으면, 내 손에 죽었을 게다!”하정훈은 천연덕스럽게 미소 지었다.“저를 때려눕히면 성은 그룹의 그 산더미 같은 일들은 누가 처리하겠어요?”오가은은 화가 머리끝까지 난 채 하정훈을 쳐다보다가 밖으로 나갔다.“관두자, 나도 너랑은 말 안 섞으련다! 갈게!”병실 안에는 하정훈만이 홀로 남겨졌다. 창밖의 햇살은 눈부시게 찬란했지만, 하정훈을 감싼 짙은 우울함은 좀처럼 가실 줄 몰랐다.일행이 모두 떠난 뒤, 바그너 교수와 수지가 병실로 들어섰다.수지는 바그너 교수의 말을 진지하게 통역했다.“하정훈 씨는 재발과 전이 여부를 장기적으로 관찰하셔야 합니다. 수술 후 전이 확률이 결코 낮지 않거든요. 또한 수술 중 발생한 심정지 때문에 심장 기능이 완전히 회복되려면 약 석 달은 걸릴 거예요. 그동안은 격렬한 운동을 절대 피하셔야 하고, 호르몬 수치 변화로 인해 혈압이 안정되는 데도 몇 달이 소요될 수 있습니다.”사실 하정훈은 교수가 처음 말할 때 이미 내용을 다 알아들었지만,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네.”침착한 그와 달리 수지는 무척 고무된 표정으로 덧붙였다.“하정훈 씨, 이번 수술의 성공은 그야말로 기적이에요. 교수님 말씀으로는 그렇게 오랫동안 심정지가 왔다가
“내가 그렇게 매력적인 사람인데도, 당신은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 가장 먼저 날 버릴 생각부터 했네요.”송남지의 눈동자에 옅은 슬픔과 함께 차마 숨기지 못한 원망이 배어 나왔다.송남지는 지금 하정훈을 탓하고 있었다.사랑에는 언제나 용기가 필요한 법이었지만, 하정훈의 사랑에는 늘 그 한 발짝의 용기가 부족했다.하정훈은 창백한 입술을 달싹이며 짙은 눈썹을 찌푸렸다.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에겐 늘 그놈의 용기가 부족했다는 사실을.어린 시절 조금만 더 용기를 냈더라면 송남지를 윤씨 가문에 보내 고생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에도 조금만 더 용기를 내어 병을 고백했더라면 그녀에게 버림받았다는 비참한 고통을 두 번씩이나 겪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세상에 후회 약이란 없기에, 아무리 자책한들 하정훈은 흐르는 시간을 되돌릴 수 없었다.“미안해.”하정훈은 한참을 망설이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낮은 목소리로 겨우 사과의 말을 뱉어냈다.송남지는 콧방귀를 뀌며 서운함을 드러냈지만, 그 한마디에 이미 마음속 응어리는 녹아내리고 있었다.“앞으론 절대 나를 얕보지 마요!”송남지가 고개를 살짝 들며 단호한 표정을 짓자, 하정훈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다시는 안 그럴게.”면회 시간이 끝나가자 송남지는 미안한 마음에 자리를 비켜주며 하종현과 오가은을 안으로 불렀다.“두 분이 하실 말씀이 더 많으실 거예요. 남은 시간은 두 분께서 정훈 씨와 함께 보내세요.”오가은은 이토록 속이 깊은 송남지를 보며 보면 볼수록 마음에 쏙 들었다. 하지만 병상에 누워 있는 하정훈을 슬쩍 살피니, 어째 분위기가 영 싸했다.송남지가 나간 뒤, 오가은이 아들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왜 그래? 남지가 이 정도로 지극정성인데 감동을 받아도 모자랄 판에! 넌 도대체 무슨 심장이 돌덩이로 만들어졌니?”송남지가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정훈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오히려 그늘진 얼굴엔 짙은 우울감이 드리웠는데 수리스의 오월이 선사하는 그
그 스위치가 얼마나 오랫동안 꺼져 있었는지 하정훈은 알지 못했다.아득한 혼돈 속에서 누군가 길을 안내하듯 그를 어디론가 끝없이 데려가는 것만 같았다.정처 없이 칠흑 같은 허무 속을 떠돌던 그때, 문득 강렬한 빛 한 줄기가 그의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멈췄던 통증이 일제히 되살아났다.가장 먼저 깨어난 것은 청각이었다.바그너 교수의 차분한 지시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고 가슴 부위를 조여오는 생생한 봉합의 감각이 느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누군가의 뜨거운 시선이 선명하게 와닿았다.곧이어 격렬한 통증이 밀려왔다.심연의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고통은, 마치 거대한 손 하나가 그의 심장을 으스러지도록 쥐어짜다 놓아주기를 반복하는 것만 같았다.그 찰나의 순간 하정훈은 자신이 살아있음을 실감했다.송남지의 머리카락이 콧등을 스치며 간지럽혔지만 하정훈은 그 미세한 촉감이 좋았다.이 사소한 감각이야말로 자신이 살아있다는 가장 확실하고 진실한 증거였기 때문이다.“성루이야 병원까지는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서윤이가 말해줬어? 아니면 부모님이?”하정훈은 꽤 긴 질문을 던지느라 짙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송남지는 침대 옆에 앉아 헝클어진 머리를 다시 묶으며 대답했다.“김 비서님한테 당신 상태 다 알고 있다고 했더니 여기가 성루이야 병원이라고 말해주더라고요.”하정훈은 의아한 듯 되물었다.“어떻게 안 거야? 설마... 그날 밤에 내가 실수라도 했나?”하정훈은 사실 자신의 연기에 꽤 만족하고 있었다.송남지는 샐쭉하게 웃으며 짐짓 그를 놀렸다.“네, 다 들켰어요. 그날 밤 당신 정말 형편없었거든요. 그래서 분명 무슨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죠!”하정훈의 얼굴에 순식간에 먹구름이 끼었다.송남지는 참지 못하고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잘하고 못하고가 죽고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해요?”하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패기 서린 목소리로 농담 섞인 조소를 던졌다.“죽는 건 상관없지만 네 앞에서 실력 발
박재용은 캐리어를 들고 송남지의 뒤를 따라가 그녀의 사무실까지 배웅했다.갤러리 자체는 웅장했지만 대부분이 전시 공간이라 사무실 면적은 그리 넓지 않았다.박재용은 사무실 문가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말을 건넸다.“송 여사님, 여기가 사람이 먹고 자기에 적당한 곳은 아닌 것 같은데요.”송남지는 자신의 사무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아주 좁은 건 아니었지만 작품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고 커다란 책상에 인체공학용 의자까지 자리 잡고 있어 여유 공간이 별로 없었다.침대 하나를 더 들여놓기엔 확실히 무리가 있어 보였다.송남지는 박재용의
송남지는 당황했다. 하정훈의 목소리에서 이토록 절절한 슬픔과 상처받은 진심을 느껴본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그의 말은 추궁이라기보다 서글픈 혼잣말에 가까웠다.송남지는 순간 말문이 막혔고 몇 초가 지나서야 간신히 대답을 찾아냈다.“요즘 갤러리에 일이 너무 많아서요. 겨울 전시회 준비가 생각보다 늦어져서...”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아도 의미는 충분히 전달되었다.하정훈은 30초가량 깊은 침묵에 빠졌다.송남지는 통신 상태가 좋지 않은가 싶어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여보세요? 제 목소리 들려요?”그러자 수화기 너머로 즉각 대답
“재용 씨, 최근 방송국에서 제안 온 예능 프로그램이 있는데 재용 씨가 출연해 줬으면 해요. 첫 방송 시기가 마침 겨울 전시회 직전이라 그렇게만 되면...”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재용이 벌떡 일어났다.그는 창백해진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며 송남지를 노려보았다.“고작 방송 하나 시키겠다고 엄가을 씨까지 이용한 거 거예요? 송 관장님, 갤러리 사업을 위해서라면 정말 못 할 짓이 없으시네요! 계약서에 명시했잖아요. 난 재스민을 빛내줄 들러리 노릇 따위 안 한다고. 내 일은 오직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에요!”이것은 화가로서 그가 지키
어젯밤 기력을 너무 소진한 탓인지 송남지는 우유 한 잔을 가득 비워냈고 아침 식사도 평소보다 훨씬 많이 먹었다.하정훈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송남지가 햄스터처럼 만두를 입안 가득 밀어 넣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작은 얼굴에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모습이 무척이나 귀여웠다.송남지는 입을 다물고 오물오물 씹다가 고개를 들자마자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하정훈의 시선과 마주쳤다.그녀는 웃으며 입안의 음식을 다 삼킨 뒤에야 입을 열었다.“그 눈빛 보니까 어릴 때 생각나네요. 우리 엄마가 딱 그런 눈으로 내가 밥 먹는 걸 지켜보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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