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끝, 후회는 사절입니다

결혼 끝, 후회는 사절입니다

By:  손발 땀쟁이Ongoing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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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주예가 한진후와 결혼하기 전부터 사람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떠돌았다. 진후에게는 오랫동안 잊지 못한 첫사랑이 있다고. 그런데도 주예의 손을 직접 잡고 구청에 가 혼인신고를 했고, 첫사랑은 이미 끝난 과거라고 말한 사람도 진후였다. 결혼한 지 3년. 주예는 자신이 충분히 다정하고 참으며 온순하게 행동하면 언젠가는 진후의 마음도 자신을 향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처참하게 무너졌다. 진후는 첫사랑을 위해서라면 주예 아버지의 목숨까지도 외면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내연녀를 데리고 주예 아버지의 장례식장까지 나타났다. 그날 주예는 더는 미련을 두지 않기로 했다. 남편도, 시댁도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이유가 없었다. 주예는 바로 이혼을 요구했다. 이혼 소식이 퍼지자 모두가 주예가 망가지는 꼴을 기다렸다. 버림받은 여자. 갈 곳 없는 여자. 한진후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여자. 다들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이 뒤집혔다. 국제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화가 '로즈'가 주예였다. 재벌가에서 오랫동안 찾던 귀한 딸 역시 주예였다. 국가 핵심 예술 프로젝트를 이끄는 책임자도 주예였다. 주예는 누구의 곁에 붙어 있어야만 빛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혼자서도 눈부시게 빛나는 사람이었다. 재능과 실력을 드러낼수록 주예는 진후가 다시는 닿을 수 없는 별이 되어갔다. 그제야 진후는 뒤늦게 후회했다. 한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남자가 무릎까지 꿇고 매달렸다. “여보, 내가 잘못했어. 다시 돌아와 줘. 당신과 아이에게 정말 잘할게.” 하지만 다음 순간 길고 단단한 손이 임주예의 가는 허리를 끌어안았다. 고개를 숙여 주예의 귓불을 붉힐 듯 입을 맞춘 남자는 집요한 소유욕이 배어 있는 표정으로 낮게 웃었다. “주예 옆에 설 수 있는 사람이, 나 말고 또 누가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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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장례식장은 온기가 완전히 걷힌 듯 차가웠다.

빈소에는 정적만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고, 영정 사진 앞에는 하얀 국화들만 가득 놓여 있었다.

임주예는 아버지의 영정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무릎은 이미 감각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손끝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손바닥 안을 파고들 정도로 손가락을 세게 쥐고 있었다.

'지금 손을 놓아 버리면, 나까지 그대로 무너질 것 같아.'

옆에서는 누군가가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한 대표는 어디 갔대? 아직도 안 왔어?"

"아직도 몰라? 공항에 마중 나갔다더라. 기사도 떴잖아."

"공항? 누구 마중이 그렇게 중요해? 오늘이 한 대표 장인어른 장례식인데."

"오래전에 헤어진 첫사랑이라던데. 어릴 때 사랑은 원래 오래 남는 법이잖아."

"에이, 남자들 사생활 좀 있는 거야. 이해해야지."

"..."

한마디 한마디가 주예의 귓속을 짓밟았다.

지잉—

핸드폰이 한 번 떨렸고 화면이 켜졌다.

알림으로 뜬 헤드라인이 주예의 눈을 정통으로 찔렀다.

[해신그룹 후계자 한진후 대표, 심야 공항 포착... 백합 꽃다발 안고 의문의 여인과 밀착]

주예는 그 문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끝에 힘을 주며 화면을 눌렀다.

고화질 사진 속 한진후는 재단이 완벽한 검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다.

한 손에는 커다란 백합 꽃다발을 들고 있었고, 다른 손은 옆에 선 여자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카메라 각도까지 교묘해서 얼핏 보면 키스하는 것처럼 보였다.

여자의 옆모습은 맑고 차분했다.

화장도 옅고 단정했다.

다만 눈가에 걸린 만족감만큼은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

주예는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다시 떴다.

눈앞은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강규나.

주예는 규나를 알고 있었다.

규나는 어릴 때부터 온갖 사람에게 떠받들리며 자랐고, 성격은 제멋대로에 사치스럽고 버릇없었다.

진후는 그런 규나에게 기꺼이 맞춰 주었고, 무슨 일이든 받아 주며 끝도 없이 감쌌다.

예전에 규나가 클럽 직원에게 음료를 조금 뒤집어쓴 적이 있었다.

규나는 그 자리에서 술잔을 깨 버렸고, 직원에게 깨진 유리 조각 위에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감히 한마디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도 진후만 나서서 수습했다.

주예는 그런 소문을 들었을 때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주예와 진후가 혼인신고를 하던 날, 주예의 손을 잡고 직접 구청까지 데려간 건 진후였다.

그런데 지금 이 사진을 보고 있으니 우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장례식장 입구 쪽이 갑자기 술렁였다.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장례식장 앞에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차 문이 안에서 밀리듯 열렸고, 계단을 밟는 발소리가 이어졌다.

곧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규나가 앞에 서 있었다.

새하얀 원피스에 옅은 색 숄을 걸친 차림이었다.

안색은 창백했고, 눈가까지 붉게 젖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연약해 보였다.

진후는 바로 뒤를 따라 들어왔다.

검은색 정장은 흐트러짐이 없었고, 넥타이도 빈틈 하나 없이 정리돼 있었다.

키 큰 몸은 꼿꼿했고, 서 있기만 해도 서늘한 기운이 번졌다.

진후는 장례식장 안쪽으로 걸어왔다.

시선은 사람들 사이를 훑고 지나가다 주예의 아버지 임필수의 흑백 영정 사진 앞에서 잠깐 멈췄다.

남자가 입술을 천천히 다물었다.

"어르신, 편히 가세요."

진후가 허리를 숙이며 앞으로 나섰다.

목소리는 끝까지 흔들림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늦게 왔습니다."

흠잡을 데 없는 태도였다.

그런데 주예는 그 한마디가 우스웠다.

아내의 아버지인데도 장인어른이나 아버님이 아니라 '어르신'이라고 불렀다.

주예는 굳이 진후의 말을 바로잡지 않았다.

입가에는 비웃음만 가볍게 걸렸다.

'이제 와서 남처럼 구는 거야?'

규나는 진후보다 반걸음 뒤에 선 채 입을 열었다.

"언니, 진후 오빠 탓하지 마세요. 다 제 잘못이에요... 제 비행기가 갑자기 지연돼서 한밤중에야 도착했거든요."

"오빠는 제가 혼자 오면 위험할까 봐 마중 나갔어요. 언니 아버님 일은 너무 갑작스럽게 들었고, 여기까지 달려오는 것도 그게 한계였어요..."

장례식장 안쪽의 수군거림이 더 짙어졌다.

"저분이 강규나 씨야? 기사에 나온..."

"붙어 있는 꼴 보니까, 보통 사이가 아닌데."

"장례식장까지 같이 들어오는 거면 대놓고 선 넘는 거지."

"..."

그제야 주예가 고개를 들었다.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들어 올려 두 사람을 한 번 훑었다.

"누구야?"

목소리는 차갑다 못해 오히려 평온했다.

규나가 잠깐 멈칫했다.

"언니, 저는 강규..."

"난 내 남편한테 물어보고 있어."

주예는 규나의 말을 잘라 내고 진후를 바라봤다.

진후가 미간을 좁혔다.

"여보, 이쪽은 규나야. 규나, 이쪽은 내 와이프고."

"여보?"

주예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규나?"

주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릿해진 다리 때문에 당장이라도 휘청일 것 같았지만 끝내 버텨냈다.

"참 다정하게 부르네?"

주예는 시선을 규나 쪽으로 돌렸다.

"한 가지 더 말해 둘게. 내 아버지 장례식 소식을 강규나 씨한테 전한 적은 없을 것 같은데..."

규나의 낯이 하얗게 질렸다. 눈에는 금세 물기가 찼다.

"언니, 저는... 그냥 진후 오빠가 너무 걱정돼서 같이 오고 싶었어요. 언니 아버님께 조문이라도 드리고 싶었고요. 언니가 불편하시면 정말 바로 나갈게요..."

규나는 정말 나가겠다는 듯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발끝은 힘이 풀린 듯 휘청거렸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사람처럼 보였다.

진후가 반사적으로 규나를 붙잡았다.

"규나야, 조심해."

"나도 묻고 싶은 게 있어."

주예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주예는 진후를 똑바로 바라봤다.

눈빛은 고요했고, 그 고요함이 더 서늘했다.

"신규 항암제 임상시험 대상자 자리는... 마지막에 누구한테 갔어?"

진후의 표정이 굳었다.

규나도 멈췄고, 경직된 기운이 순식간에 몸을 타고 흘렀다.

빈소 구석에서 누군가가 작게 웅얼거렸다.

"신규 항암제? 얼마 전에 나온 그 약 말하는 거야?"

"임상시험 대상자 자리 엄청 빡빡하다던데. 하나 받으려면 진짜 줄을 잘 대야 한다더라."

"우리 사촌언니가 그러던데, 여기 있는 강규나 씨 친척 한 명이 명단에 올랐대. 한 대표 쪽에서 손을 썼다고."

"그래서 그랬구나..."

"..."

시선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주예의 손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당신은 그때 나한테 분명히 말했어.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끝까지 자리 하나라도 잡아 보겠다고. 난 그 말을 믿었어."

"나중에 병원에서 자리가 다 찼다고 연락했을 때도 난 그냥 당신이 할 수 있는 만큼 한 줄 알았어."

주예는 한 글자씩 잘라 말하듯 내뱉었다.

"마지막으로 물을게."

"내 아버지의 그 자리... 정말 강씨 집안 사람한테 준 거야?"

진후의 목젖이 천천히 움직였다.

얇은 입술은 굳게 다물린 채 한참 동안 열리지 않았다.

규나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언니, 진후 오빠를 그렇게 몰아붙이지 마세요. 다 저 때문이에요. 제가 부탁했어요. 제 형부한테는 그게 마지막 희망이었어요. 그러니까 진후 오빠도..."

"난 강규나 씨한테 묻지 않았어."

주예가 다시 말을 끊었다.

시선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오랜 침묵 끝에 진후가 겨우 한마디를 꺼냈다.

"당신 아버지는 그때 이미 말기였어. 임상을 쓰더라도 생존 가능성은 거의 없었어. 나는..."

"그래서 당신이 우리 아버지 대신 결정했어?"

주예가 진후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이어받았다.

주예는 웃었다.

그 웃음에는 온기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당신 눈에는 우리 아버지 목숨이 그렇게 계산 가능한 숫자였구나."

규나의 눈가가 붉어졌다.

"언니,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너무하시잖아요. 그때 진후 오빠도 어쩔 수 없었어요. 오빠도 정말 괴로워했어요. 오빠는 그냥..."

주예는 담담하게 규나를 바라봤다.

"강규나 씨는 여기 들어와서 내 남편 때문에 걱정이 된다는 말을 많이 했어. 우리 아버지 얘기는 한 번도 안 했고."

주예의 목소리는 잔잔했다.

그 잔잔함이 더 깊게 파고들었다.

"오늘 여기 온 이유가 정말 조문이야?"

"아니면 자기 자리 확인하러 온 거야?"

규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진후가 미간을 더 깊게 찌푸렸다.

"여보, 지금 당신 감정이 너무 올라와 있어. 할 말 있으면 집에 가서 하자."

주예는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울분도, 분노도, 몸 안에서 뒤집히는 불편함도 전부 눌러 삼켰다.

'아버지 앞에서만큼은 무너지지 말자.'

주예는 다시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의 영정 앞에 몸을 낮춘 채,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왔으면 국화 한 송이 놓고 가."

"그거면 되니까... 한 대표랑 강규나 씨는 돌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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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s

임영준
임영준
재밌네요 여주 홧팅. 무료보기 좀 많이 열어주세요
2026-05-28 08:58:59
1
0
김문숙
김문숙
여러 소설 다 똑같은 내용이지만 재미있어요. 끝까지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작가님 중간에 보지 않게 하지 마시고 독자들에게 고구마 먹이지 말고 이번 소설은 남주와 내연녀 골탕 먹여주세요. 이 소설은 여지껏 소설과 다르게 여주 시원하게 해주세요. 불륜 남녀 숨 막히게 해주세요.
2026-04-28 09:15:09
11
0
정기효
정기효
너무너무 재미있네요 빠른 연재 부탁 드립니다
2026-04-21 18:56:50
6
0
김대영
김대영
재미있어요 다음편은 빠르면 한달뒤 연재 임가요?
2026-04-14 05:14:42
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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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장례식장은 온기가 완전히 걷힌 듯 차가웠다.빈소에는 정적만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고, 영정 사진 앞에는 하얀 국화들만 가득 놓여 있었다.임주예는 아버지의 영정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무릎은 이미 감각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손끝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손바닥 안을 파고들 정도로 손가락을 세게 쥐고 있었다.'지금 손을 놓아 버리면, 나까지 그대로 무너질 것 같아.'옆에서는 누군가가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렸다."한 대표는 어디 갔대? 아직도 안 왔어?""아직도 몰라? 공항에 마중 나갔다더라. 기사도 떴잖아.""공항? 누구 마중이 그렇게 중요해? 오늘이 한 대표 장인어른 장례식인데.""오래전에 헤어진 첫사랑이라던데. 어릴 때 사랑은 원래 오래 남는 법이잖아.""에이, 남자들 사생활 좀 있는 거야. 이해해야지.""..."한마디 한마디가 주예의 귓속을 짓밟았다.지잉—핸드폰이 한 번 떨렸고 화면이 켜졌다.알림으로 뜬 헤드라인이 주예의 눈을 정통으로 찔렀다.[해신그룹 후계자 한진후 대표, 심야 공항 포착... 백합 꽃다발 안고 의문의 여인과 밀착]주예는 그 문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끝에 힘을 주며 화면을 눌렀다.고화질 사진 속 한진후는 재단이 완벽한 검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다.한 손에는 커다란 백합 꽃다발을 들고 있었고, 다른 손은 옆에 선 여자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카메라 각도까지 교묘해서 얼핏 보면 키스하는 것처럼 보였다.여자의 옆모습은 맑고 차분했다.화장도 옅고 단정했다.다만 눈가에 걸린 만족감만큼은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주예는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다시 떴다.눈앞은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강규나.주예는 규나를 알고 있었다.규나는 어릴 때부터 온갖 사람에게 떠받들리며 자랐고, 성격은 제멋대로에 사치스럽고 버릇없었다.진후는 그런 규나에게 기꺼이 맞춰 주었고, 무슨 일이든 받아 주며 끝도 없이 감쌌다.예전에 규나가 클럽 직원에게 음료를 조금 뒤집어쓴 적이 있었다.규나는 그 자리에서 술잔을 깨 버렸고, 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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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밤, 7시 반.주방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 차 있었다.도미찜은 찜기 위에서 김을 올리고 있었고, 갈비찜은 자작하게 졸아들고 있었으며, 두부는 반듯한 모양으로 가지런히 썰려 있었다. 냄비에 담긴 육수는 불 위에서 천천히 끓고 있었다.진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짙은 색 코트 안에는 날렵하게 재단한 수트를 받쳐 입고 있었고, 넥타이는 느슨하게 조금 풀어져 있었다.주예가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 진후의 매서운 눈매가 조금 누그러졌다.주예는 주방에서 분주히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기척이 들렸는데도 주예는 돌아보지 않았다. 하고 있던 일을 멈추지도 않았다.예전의 주예라면 가장 먼저 현관으로 나가, 진후가 제시간에 돌아와 함께 저녁을 먹는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쁘게 웃었을 터였다.이제 주예는 곁눈질조차 주지 않았다.진후의 시선이 문가에 놓인 가방을 한 번 훑고 지나갔다. 진후가 먼저 말을 붙였다.“오늘... 밖에 나갔다 왔어?”“응.”주예는 국 그릇을 식탁으로 옮겨 놓으며 담담하게 답했다.“친구 좀 만나고 왔어. 겸사겸사 스승님께도 연락드렸고.”“스승님?”진후는 코트를 벗고 소맷단 단추를 풀었다.“예전에 그림 하시던 그 스승님?”“응.”주예가 고개를 끄덕였다.“나 다시 스승님 곁에서 일하려고.”진후의 손길이 멈췄다. 진후가 눈을 들어 주예를 봤다.“갑자기 왜?”“집에만 있으려니까 답답해서.”주예는 가볍게 웃었다. 말투는 아주 담백했다.진후는 듣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이상하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뭐가 걸리는지 정확히 짚을 수는 없었다.“집에서 편하게 지내는 게 더 낫지 않아?”진후가 미간을 조금 좁혔다.“나는 와이프가 밖에 나가서 일하면 난 마음이 안 놓여. 누가 당신 함부로 대하면 어떡해?”말은 다정했다. 주예를 세심하게 생각해 주는 사람처럼 들릴 만큼 부드러웠다.하지만 주예는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 속이 메스꺼워졌다.겉으로는 걱정하는 척하는 저 말을 주예는 거의 매번 들어야 했다.예전의 주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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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사모님?”여주댁이 문을 살짝 열고 안을 들여다봤다.“아직 안 주무셨어요?”“응...”주예는 대답하려 했지만 목이 잔뜩 잠겨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겨우 숨 섞인 소리만 흘러나왔다.여주댁은 급히 안으로 들어와 주예의 이마에 손을 대 보더니 화들짝 놀랐다.“어머, 이게 무슨 일이에요? 열이 너무 심하잖아요.”“비를 좀 맞아서 그런가 봐요.”주예는 힘겹게 웃어 보였다.“약은 먹었어요.”“이렇게 있으면 안 되죠.”여주댁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다.“이대로 열이 더 오르면 큰일 나요.”여주댁은 곧장 핸드폰을 꺼냈다.“제가 대표님께 전화해서 얼른 들어오시라고 할게요.”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다시 한번 걸어 봐도 마찬가지였다.“됐어요.”주예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차만 한 대 불러 주세요.”“저 혼자 병원으로 가면 돼요.”“어떻게 병원에 혼자 가세요?”여주댁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제가 같이 갈게요.”“괜찮아요.”주예는 고개를 저으며 작게 웃었다.“저 혼자 움직이는 게 더 빨라요. 이모님은 집에서 쉬세요. 괜히 같이 고생하지 말고요.”주예는 침대 가장자리를 짚고 천천히 내려왔다. 코트를 걸친 뒤,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묶고 굽 낮은 신발로 갈아 신었다.응급실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한밤중이어도 병원 로비에는 사람들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주예는 마스크를 쓴 채 힘이 풀린 다리를 끌고 접수 창구로 갔다. 접수를 마친 뒤 수액실 앞 대기 구역으로 안내를 받았다.누군가는 링거를 맞으며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누군가는 복도에 놓인 간이침대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주예는 구석 의자에 앉아 벽에 몸을 기댔다. 주변에서 오가는 말소리가 전부 멀게 느껴졌다.바로 그때였다.한 남자가 휠체어를 밀고 지나갔다. 휠체어에는 헐렁한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강규나 님, 이쪽으로 오세요. 산부인과 쪽에서 먼저 봐 드리기로 했어요. 초음파로 한 번 확인해 보시면 됩니다.”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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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진후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마치 어디까지나 주예를 배려하는 사람처럼 들렸다.하지만 주예는 진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말들은 결국 진후 자신이 품고 있는 보잘것없는 죄책감을 덜어 내기 위한 것이었다. 진후는 주예가 늘 그랬듯 알아서 사양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그래.” 주예가 받아들였다.“응? 뭐라고 했어?” 진후가 멈칫했다. 뜻밖이라는 기색이 스쳤다.“좋다고. 이제 몸도 거의 다 나았고, 당신 친구들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주예는 가볍게 웃었다.‘어차피 앞으로는 만날 일도 없을 테니까.’...다음 날 밤, 프라이빗 멤버십 라운지.넓고 세련되게 꾸며진 메인 홀은 전 회원에게 열려 있었다. 조도는 낮았고, 벽에 줄지어 놓인 술병들이 금빛을 받아 잔잔하게 빛나고 있었다.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VVIP 전용 룸이 이어졌다.주예는 진후의 옆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그녀는 아주 단정한 베이지색 니트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화장도 옅었다.룸 문이 열리자 안은 떠들썩한 웃음소리로 가득했다.“한 대표 왔네? 어, 오늘은 웬일로 여자까지 데리고 왔어?”주예를 알아본 사람이 있었다.“이분이 사모님이세요?”주예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안녕하세요.”“실물이 사진보다 훨씬 예쁘시네요.” 누군가 주예를 훑어보듯 바라봤다. “근데 진짜 좀 닮긴 했네요.”그 말이 끝나자 공기가 잠깐 가라앉았다.진후가 미간을 가볍게 찌푸리면서 그 말을 한 사람을 바라봤다.술이 조금 들어간 탓인지 뒤늦게 분위기를 알아차린 그 사람이 멋쩍게 웃었다.“형수님 칭찬한 거예요. 진후 형, 보는 눈은 진짜 좋으시네요.”다른 사람이 능청스럽게 말을 받았다.“그러고 보니 예전에 규나가 떠나자마자 형이 갑자기 결혼했잖아. 그 뒤로 3년 내내 형수님을 얼마나 꽁꽁 숨겨 뒀는지, 다들 형이...”말끝이 거기서 한번 끊기더니 의미심장한 웃음이 따라붙었다.“됐어요, 여기까지만 할게.”다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이번에는 은근한 호기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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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주예의 생일은 늦가을이었다.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면, 아버지는 생일마다 주예에게 미역국을 끓여 주었고, 아버지로서의 축복을 가득 눌러 담은 긴 편지도 꼭 써 주었다.결혼한 뒤 진후는 해마다 주예의 생일을 놓쳤다.진후의 일정표는 회의와 출장, 각종 약속으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생일 당일 아침, 주예는 평소처럼 작업실에 나갔다.도해산이 주예 쪽으로 자료 뭉치를 한가득 던져 놓았다.“요즘 전국 미술관 순회전시 준비하는 거 알지. 첫 일정이 바로 옆 가원시야. 다음 주에 종수랑 같이 가서 현장 좀 살펴봐.”주예는 전시 이미지들을 한 장씩 넘겨보며 대답했다.“네.”도해산은 길쭉한 비단 상자 하나도 툭 던져 주었다.“생일 선물.”말을 마친 뒤 도해산은 곧장 고개를 숙이고 손에 든 그림을 다시 들여다봤다.주예는 마음이 뭉클해졌다.“감사합니다, 스승님.”상자를 열자 작고 고풍스러운 벼루 하나가 들어 있었다.도해산이 아끼는 물건이었다. 어릴 적 주예가 오래도록 졸랐는데도 끝내 주지 않았던 벼루였다.저녁이 되자 주예는 평소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주예는 여주댁에게 이것저것 많이 준비하지 말라고 했고, 직접 마트에 들러 생크림과 작은 팩에 담긴 딸기를 사 왔다.주방 안에서 케이크가 구워지는 달콤한 냄새가 퍼져 있었다.주예는 오븐에서 케이크 시트를 조심스럽게 꺼내서 식힘 망 위에 올려 두었다.충분히 식힌 뒤 크림을 부드럽게 올린 다음 표면을 둥글게 펴 발랐고, 마지막으로 딸기를 얹었다.핸드폰 화면이 켜졌다.[여보, 생일 축하해. 오늘 약속이 하나 있어서. 기다리지 마. 선물은 들어가서 줄게.][네.]주예는 답장을 보낸 뒤 핸드폰을 뒤집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밤 9시.주예는 무료한 손길로 핸드폰을 한 번 넘겨봤다.첫 화면에 새 게시물이 떠올랐다.규나가 올린 글이었다.[별거 아닌 하루!]그리고 문장 끝에는 하트 이모티콘까지 붙어 있었다.사진에는 고급 레스토랑의 원형 접시가 담겨 있었다.사진 구석에는 남자의 길고 매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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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주예가 진후의 첫사랑 이야기를 못 들어 본 건 아니었다.다만 첫사랑은 외국에 있었고, 진후는 분명히 자신의 입으로 주예에게 청혼했다. 주예에게 잘해 주겠다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주겠다고 말했다.주예는 그 말을 믿었다.결혼한 뒤 주예는 꽃꽂이, 다도도 배웠고, 음식도 만들면서 살았다. 시부모가 정해 놓은 기준에 맞춰 하나씩 적응하며 진후를 챙겼고, 진후의 가족까지 챙겼다. 주예는 스스로를 가장 순하고 가장 세심한 모습으로 깎아 냈다.그녀는 그렇게 정성을 다하면 언젠가는 진후에게서 아주 조금이라도 진심을 돌려받을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진후는 주예의 표정에 붙들린 듯 굳어졌다.“내 말은 그게 아니야.”진후의 말투에는 지친 기색이 섞여 있었다. 그래도 어딘가 달래 주는 듯한 태도는 남아 있었다.“그만 화내고, 우리 다시 차분하게 얘기하자.”진후가 손을 뻗어 주예를 만지려고 했다.“이혼 얘기는 하지 마.”주예는 가볍게 한 걸음 물러나면서 진후의 손을 피했다.주예는 서류를 다시 봉투 안에 넣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동의하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소송할 거니까. 우리 법원에서 보자.”그 말을 마친 주예는 몸을 돌려 위층으로 올라갔다.진후는 더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급하게 손을 뻗어 주예의 손목을 붙잡았다.“여보, 난 동의 못 해.”단단하게 조여 온 손가락에 진후가 꾹 눌러 참고 있는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주예는 고개를 내려 진후에게 잡힌 자리를 봤다. 붉게 올라온 피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주예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동의하지 않아도 돼. 법원은 당신 동의까지 필요하지 않으니까.”주예는 손을 빼냈다.걸음은 흔들림 없이 계단 쪽으로 이어졌다.첫 번째 계단에 발을 올린 뒤, 주예는 뒤를 돌아봤다.“오늘부터 당신은 서재에서 자.”말을 끝낸 주예는 침실로 들어간 뒤 문을 잠갔다.침실 문 앞에 한참을 서 있던 진후는 손을 들어 문을 두드리려고 했다.그러다 결국 손을 내렸다.‘됐어. 실컷 화내고 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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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어제 벌써 그 쓰레기한테 이혼하자고 했어? 한진후는 뭐래?”“내가 괜히 또 심술 부리는 줄 알더라.” 주예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느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생일 선물 때문에 이러는 거냐고도 물었어.”“와, 진짜 어이없다!”성아는 열이 뻗쳐서 액셀을 끝까지 밟아 버릴 뻔했다.“아내랑 상간녀도 구분 못 해? 결혼한 남자한테 첫사랑이 아무리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아도 그건 결국, 상.간.녀라고!”주예는 조용히 숨을 골랐다. 입술만 살짝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아는 생각할수록 더 화가 치밀었다. 목소리도 자꾸 높아졌다.“네가 결혼하고 얼마 안 됐을 때 너희 아버지가 암 진단받았잖아. 낮에는 학교 다니고 밤에는 병원 뛰어다니던 네가, 한진후 어머니랑 할머니 뒤치다꺼리까지 다 해냈는데!”“성아야...”“한진후 욕 안 하면 내가 답답해서 죽겠어.”성아는 앞만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상간녀도 기가 막히지. 세상 어느 때인데 남의 남편을 뺏어? 강규나가 대체 뭐길래 한진후가 그렇게 넋이 나가?”주예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강규나... 임신했대.”“뭐라고?”성아는 당장이라도 차를 세우고 뛰쳐나갈 기세로 소리쳤다.“그러니까 네가 이를 악물고 이혼하려는 거구나. 내가 말하는데, 다음에 강규나 내 눈에 띄면 가만 안 둬.”“볼 때마다 한 대씩 올려붙일 거야. 그런 여자는 한번 제대로 당해 봐야 정신 차려.”주예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다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강규나 집안이 만만치 않아. 너도 조심해.”“집안이 뭐가 중요한데?” 성아가 차갑게 웃었다. “누구 집 자식이든 지킬 건 지켜야지.”주예는 잠깐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입을 열었다.“강규나가 강빈 여동생이야.”강빈.강민그룹의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부모를 일찍 잃은 남매는 서로만 의지하며 자랐고, 강빈은 여동생에게 지나치게 약했다. 규나가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줄 만큼, 강빈의 애정은 거의 무조건에 가까웠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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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주예는 고개를 저었다.“아니.”목소리는 아주 낮았다. 마치 그 시절의 기억을 조용히 잘라 내기라도 하듯.성아는 주예를 흘끗 보더니, 불쑥 손을 들어 주예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됐다. 옛날 얘긴 그만하고, 이제 새 얘기나 하자.”“새 얘기?”“내가 결심했어.” 성아는 핸들을 탁탁 두드리며 선언했다. “너한테 소개할 후보 스무 명은 내가 직접 골라 줄게.”“장난치지 마.”“걱정 마. 내가 붙여 줄 사람들은 다 엄선된 애들이야. 빵빵한 복근에 넓은 어깨, 다리도 길고 말도 잘 통하면서 정서적으로도 기대도 되는 그런 애들.”성아는 잠깐 숨을 고른 뒤, 일부러 더 세게 덧붙였다.“적어도 네 전남편, 아니 네 예비 전남편 같은 한심한 인간은 절대 없을 테니까.”주예는 결국 웃고 말았다.“아직 이혼한 건 아니니까, 예비 전남편이 맞지.”차는 그제야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단지 안은 조경이 무척 잘되어 있었다. 주변은 조용했고, 오가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공기에는 나무 냄새가 엷게 배어 있었다.성아는 주예 짐을 함께 들고 위층까지 올라가 주면서 말했다.“집주인 부부가 거의 늘 외국에 있거든. 네가 그림 그리는 사람인데, 성격도 차분하고 조용히 지낸다고 얘기해 놨더니 엄청 마음에 들어 하더라.”주예가 현관문을 열어 주었다.집 안은 정갈했고 환했고 바람도 부드럽게 들었다.창밖에는 나무가 보였고, 볕이 고르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 풍경을 마주하자, 주예는 가슴 한가운데가 조금 느슨해지는 기분을 느꼈다.‘이제야 숨이 좀 쉬어지네.’“자기야.”주예가 뒤를 돌아봤다.“왜?”“고생 끝이야, 이제.” 성아가 허리에 손을 얹고 씩 웃었다. “오늘 저녁 나가서 축하라도 할까?”주예도 따라 웃었다.“좋지.”“나 오후에 우리 고객 한 명 만나고 올게. 저녁에 다시 데리러 올게.”“응.”성아가 돌아간 뒤, 주예는 짐을 풀기 시작했다.캐리어를 침대 옆으로 끌어다 놓고, 안에 든 것들을 하나씩 꺼냈다.옷은 옷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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