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임주예가 한진후와 결혼하기 전부터 사람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떠돌았다. 진후에게는 오랫동안 잊지 못한 첫사랑이 있다고. 그런데도 주예의 손을 직접 잡고 구청에 가 혼인신고를 했고, 첫사랑은 이미 끝난 과거라고 말한 사람도 진후였다. 결혼한 지 3년. 주예는 자신이 충분히 다정하고 참으며 온순하게 행동하면 언젠가는 진후의 마음도 자신을 향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처참하게 무너졌다. 진후는 첫사랑을 위해서라면 주예 아버지의 목숨까지도 외면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내연녀를 데리고 주예 아버지의 장례식장까지 나타났다. 그날 주예는 더는 미련을 두지 않기로 했다. 남편도, 시댁도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이유가 없었다. 주예는 바로 이혼을 요구했다. 이혼 소식이 퍼지자 모두가 주예가 망가지는 꼴을 기다렸다. 버림받은 여자. 갈 곳 없는 여자. 한진후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여자. 다들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이 뒤집혔다. 국제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화가 '로즈'가 주예였다. 재벌가에서 오랫동안 찾던 귀한 딸 역시 주예였다. 국가 핵심 예술 프로젝트를 이끄는 책임자도 주예였다. 주예는 누구의 곁에 붙어 있어야만 빛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혼자서도 눈부시게 빛나는 사람이었다. 재능과 실력을 드러낼수록 주예는 진후가 다시는 닿을 수 없는 별이 되어갔다. 그제야 진후는 뒤늦게 후회했다. 한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남자가 무릎까지 꿇고 매달렸다. “여보, 내가 잘못했어. 다시 돌아와 줘. 당신과 아이에게 정말 잘할게.” 하지만 다음 순간 길고 단단한 손이 임주예의 가는 허리를 끌어안았다. 고개를 숙여 주예의 귓불을 붉힐 듯 입을 맞춘 남자는 집요한 소유욕이 배어 있는 표정으로 낮게 웃었다. “주예 옆에 설 수 있는 사람이, 나 말고 또 누가 있겠어?”
View More권수영은 말을 이어 갔다. “돌이킬 수 있을 때는 바로잡고, 이미 늦었으면 앞으로 가. 너는 해신그룹을 이어받을 사람이야.”“여자 한 명 붙잡겠다고 매일 이러는 꼴이 뭐냐? 이혼합의서 건도 내가 동의한 일이니, 전부 네 엄마 탓으로 돌리지는 마.”“할머니까지요?” 진후는 예상하지 못한 말에 굳었다.“주예는 괜찮은 아이야. 다만 우리 집과 인연이 여기까지였던 거지. 네가 만든 결과를 주예 탓으로 돌리지 마. 또 하나.” 권수영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한씨 가문 대를 끊을 수는 없어. 준비해. 맞선 자리를 알아볼 테니까.”...다음 날 아침, 하늘은 평소보다 훨씬 일찍 일어났다.하늘은 주방으로 내려가 할아버지 아침 간식을 준비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따로 있었고, 하늘은 옆에서 지시만 했다.평소 본가 요리사가 만든 맛과 다르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유명 특급 호텔의 디저트 셰프까지 따로 불렀다. 고씨 가문의 가사도우미들에게 맡기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고홍근은 평소 집에서 먹는 음식에 익숙해서 한입만 먹어도 누가 만들었는지 알아차릴 사람이었다.오전 7시 반쯤, 하늘은 고홍근의 아침 운동이 끝날 때가 됐다고 생각해 정갈한 푸드 박스를 들고 식당으로 향했다.하늘은 여섯 시부터 일어나서 움직였다. 주예의 방 앞을 지날 때 일부러 걸음을 멈추고 안쪽 소리를 들어 봤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서 주예가 아직 자고 있다고 확신했다.그런데 식당에서 간식을 하나씩 꺼내 놓고 있는데, 고홍근과 주예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면서 함께 들어왔다.“주예야, 아까 네가 알려 준 동작 정말 괜찮더라. 하하, 몸이 한결 가벼워졌어!”고홍근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운동하는 습관도 아주 좋아. 요즘 젊은 애들은 건강하다고 밤새고 늦잠 자는 경우가 많은데 넌 다르구나.”“외할아버지는 기본 체력은 좋으세요. 다만 근육이 조금 뭉쳐 있고 순환도 원활하지 않은 편이에요.” “단 음식이랑 튀긴 음식만 줄이시고, 제가
아들이 도무지 눈치를 못 채자, 조혜는 결국 자신이 직접 말을 꺼내려고 했다.하지만 고홍근은 조혜가 입을 열 기회조차 주지 않고 먼저 말을 잘랐다.“됐다. 식사 중에는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밥이나 먹어.”식사가 끝난 뒤 다른 가족들은 하나둘 돌아갔다. 하늘은 끝까지 우아한 걸음을 유지하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본가에는 가족마다 전용으로 쓰는 방이 하나씩 있었고, 그 방은 하늘을 위해 따로 마련된 곳이었다.가구와 장식품도 전부 하늘의 취향에 맞춰 배치돼 있었다. 1년에 며칠 머물지도 않지만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평소에도 누군가 세심하게 관리하고 있다는 뜻이었다.하늘이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자, 밖에서 유지하던 온화한 미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하늘은 비싸고 정교한 장식품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팔을 거칠게 휘둘렀다. 선반 위 물건들이 한꺼번에 바닥으로 쏟아졌다. 눈가의 작은 점은 일그러진 표정을 더 차갑고 독하게 보이게 만들었다.하늘은 주먹을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보석을 촘촘히 붙인 네일 끝이 손바닥 살을 깊이 파고들었다.‘임주예를 두 번이나 조사했는데, 왜 일찍 죽은 엄마 쪽은 확인할 생각을 못 했지!’‘재수 없는 여자. 진짜 재수 없어.’‘임주예 엄마 고경란도 똑같아. 임주예도 똑같고. 그 집안은 전부 마음에 안 들어!’아무도 볼 수 없는 방 안에서, 하늘은 속에 눌러 두었던 악의와 분노를 남김없이 쏟아냈다....같은 시각, 한씨 저택.“진후야, 손이 이게 뭐야. 빨리 치료부터 받아.”진후의 손바닥이 피투성이가 된 걸 보고 놀란 박효주가 곧장 주치의를 불렀다.“임주예 같은 애가 네 마음을 몰라주는 거야. 애초에 둘이 결혼할 때부터 엄마는 반대했어.”“그 집안 배경으로는 우리 집과 맞지도 않았고. 이혼했으면 끝이 난 거지. 주예 마음은 이미 오래전부터 너한테 없었던 것 같아.”박효주는 진후를 달래려는 듯 계속 말을 이어 갔다.조금 전 진후가 잔뜩 화가 난 채 집으로 들이닥쳤을 때부터 박효주는 이유를 알아차렸
그 두 가지 표현이 나오자, 양수민과 조혜의 표정이 동시에 일그러졌다.양수민은 원래 내세울 만한 집안 출신이 아니었다. 고기성의 아이를 가진 뒤에야 온갖 수를 써서 고씨 가문에 들어왔다.결혼 전 양수민의 집안 형편은 몹시 어려웠다. 고씨 가문에 들어온 뒤에는 매일 예절과 교양을 익히며, 누가 봐도 상류층 사모님처럼 보이도록 자신을 다듬었다.그렇게 오랜 세월 감추고 꾸며 온 과거가 주예의 몇 마디 때문에 다시 드러난 듯했다. 양수민은 애써 덮어 둔 흔적이 사람들 앞에 그대로 펼쳐진 기분이었다.조혜의 사정은 더했다. 고천운에게 원래 배우자가 있었을 때 관계를 시작했고, 결국 그 자리를 차지했다.주예가 말한 ‘유명한 피아노 재원’은 조혜가 아니라 고천운의 전 배우자를 가리킨 표현이었다.오래 묻혀 있던 이런 사정을 하늘과 우빈은 전혀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양수민은 늘 하늘에게 부모 모두 이름난 집안에서 자랐다고 말해 왔다. 하늘은 그 말을 철석같이 믿으며 자신의 배경을 자랑스러워했다.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니, 어머니 양수민의 출신은 하늘이 들어왔던 이야기와는 전혀 다를 가능성이 컸다.하늘은 양수민을 한 번 바라봤다. 평소라면 맹목적인 믿음만 담겨 있었을 눈빛에 처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의심이 섞였다.이내 하늘의 시선이 주예에게 박히더니 질투가 속에서 뒤틀렸다. ‘왜? 왜 저 여자 엄마만 그렇게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거야?’반대편에서는 우빈이 하필 건드리면 안 될 부분을 정확히 건드렸다. “어머니, 피아노도 치실 줄 아셨어요? 전 왜 한 번도 못 들었죠?”그 말에 조혜의 인내심이 완전히 끊어졌다. 조혜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하늘아, 네 엄마라고 뭐 그렇게 대단한 줄 알아? 양수민도 예전에...”“그만해!”“입 다물어!”고홍근과 고천운이 거의 동시에 호통쳤다.두 사람의 고함에 조혜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불쾌한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주예는 차가운 눈으로 눈앞의 소동을 바라봤다. 확실해진 것은 하나였다. 자신
“이런 미인이 있으니 본가가 완전 금의환향이네.”고홍근은 우빈의 꼴도 못마땅한데, ‘금의환향’이라는 말까지 엉뚱하게 갖다 붙이자 속이 쓰릴 지경이었다.고홍근은 지팡이를 번쩍 들어 우빈의 종아리를 내리쳤다. “집에 가서 책이나 더 읽어! 또, 주예는 네 사촌 누나다. 밖에서 하던 가벼운 짓거리 여기서까지 하지 마!”‘사촌 누나?’우빈은 생각할 틈도 없이 입 밖으로 내뱉었다. “고경란 딸?”어머니의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부르는 말을 듣자, 주예의 시선이 곧장 우빈에게 꽂혔다.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상석에 있던 고홍근도 눈을 가늘게 떴다.고경란이 집을 떠났을 때 우빈은 아직 아주 어린아이였다. 고경란을 직접 기억할 리가 없었다.그런데도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불렀고, 게다가 말투에도 존중이라곤 전혀 없었다. 집에서 부모가 고경란을 자주 입에 올렸고, 그 내용이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다는 뜻이었다.고홍근은 그 짧은 몇 마디만으로도 뒤에 숨은 사정을 거의 짐작했다.조혜를 바라보는 고홍근의 눈에 경고가 담겼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조혜가 얼른 우빈의 팔을 한 번 치면서 둘러댔다.“우빈아, 그분은 네 고모야. 내가 평소에 집안 호칭 좀 제대로 외우라고 했지? 넌 귀찮다고 사람 이름만 외우니까 이런 실수를 하잖아. 정말, 얘도 참.”주예가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좋은 방법이네요. 저도 집안 호칭을 잘 몰라서 걱정했거든요.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다른 친척들을 만날 기회도 없었고요.”말을 마친 주예는 고홍근의 표정에 스친 씁쓸함을 알아차렸다.조혜는 주예가 말 잘 듣는 아이인 줄로만 알고 금세 표정이 밝아졌다. 맞장구를 치려던 참이었다.그런데 주예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 갔다. “외할아버지 댁에 처음 왔는데 호칭을 잘못 불러서 실수할까 걱정했어요. 이제 됐네요. 우빈이처럼 저도 이름으로 외우면 되겠어요. 그렇죠, 작은외숙모?”“너...” 제대로 한 방 먹은 조혜는 입술까지 하얗게 질렸다.우빈도 비꼬는 말이라는 걸 알아들었다.
진후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마치 어디까지나 주예를 배려하는 사람처럼 들렸다.하지만 주예는 진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말들은 결국 진후 자신이 품고 있는 보잘것없는 죄책감을 덜어 내기 위한 것이었다. 진후는 주예가 늘 그랬듯 알아서 사양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그래.” 주예가 받아들였다.“응? 뭐라고 했어?” 진후가 멈칫했다. 뜻밖이라는 기색이 스쳤다.“좋다고. 이제 몸도 거의 다 나았고, 당신 친구들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주예는 가볍게 웃었다.‘어차피 앞으로는 만날 일도 없을 테니까.’...다음
“사모님?”여주댁이 문을 살짝 열고 안을 들여다봤다.“아직 안 주무셨어요?”“응...”주예는 대답하려 했지만 목이 잔뜩 잠겨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겨우 숨 섞인 소리만 흘러나왔다.여주댁은 급히 안으로 들어와 주예의 이마에 손을 대 보더니 화들짝 놀랐다.“어머, 이게 무슨 일이에요? 열이 너무 심하잖아요.”“비를 좀 맞아서 그런가 봐요.”주예는 힘겹게 웃어 보였다.“약은 먹었어요.”“이렇게 있으면 안 되죠.”여주댁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다.“이대로 열이 더 오르면 큰일 나요.”여주댁은 곧장 핸드폰을
주예는 가슴이 답답하게 막혀 왔다.그리고 숨을 깊게 들이쉰 뒤, 진후의 SNS 계정을 다시 열었다.화면이 넘어가자 진후가 기록해 둔 일정들이 줄줄이 떠올랐다.[규나 건강검진][규나 항공권, 호텔 예약][규나 생일][규나...]주예와 관련된 기록은 맨 아래까지 내려가서야 하나 나왔다. 3년 전, 혼인신고를 한 날이었다.주예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손끝이 조금씩 식어 갔다.‘정말 끝까지 이랬네.’주예는 올라오려는 감정을 꾹 눌러 삼킨 채 다른 폴더를 열고 나서, 진후가 최근에 사들인 부동산, 주식 거래 내역
밤, 7시 반.주방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 차 있었다.도미찜은 찜기 위에서 김을 올리고 있었고, 갈비찜은 자작하게 졸아들고 있었으며, 두부는 반듯한 모양으로 가지런히 썰려 있었다. 냄비에 담긴 육수는 불 위에서 천천히 끓고 있었다.진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짙은 색 코트 안에는 날렵하게 재단한 수트를 받쳐 입고 있었고, 넥타이는 느슨하게 조금 풀어져 있었다.주예가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 진후의 매서운 눈매가 조금 누그러졌다.주예는 주방에서 분주히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기척이 들렸는데도 주예는 돌아보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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