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사실이라면 저하 조심하시는 게 좋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마가에서 이미 사람을 서울에 보냈다고 합니다. 마가의 사람만 온 게 아니고 제자백가의 예가, 배씨 가문, 그리고 다른 가문에서도 사람을 보내온다고 합니다. 아마도 저하를 찾아와 복수를 하려는 것 같습니다.”장풍혁은 드디어 상황을 다 말했다.하지만 윤구주는 이 말을 듣고 헛웃음을 흘렸다.“날 찾아 복수를 한다고요? 그래요, 오라고 하세요.”윤구주는 이미 화진 3대 서열의 문벌을 정돈했는데 지금 또 다른 세가가 나왔다 한들 다 함께 처리해버리면 그만이었다.그렇게 하지 않으면 곤륜에서 왕위에 오를 때 윤구주가 한 맹세는 그냥 거짓이 되어버리는 것이기에 윤구주는 어차피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었다.눈앞에 있는 장풍혁은 윤구주가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을 보고 말했다.“그럼 전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말을 마친 장풍혁은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졌다.장풍혁이 사라지고 난 후 윤구주는 다시 눈을 감고 명상을 시작했다.윤구주가 문벌, 세가를 두려워할 사람인가?당시, 윤구주가 천하의 무술을 통치하고 화진의 3대 무술의 서열을 거의 붕괴시켜 화진 무술의 대일통을 성공시켰다.근데 지금 제자백가 따위가?윤구주는 마음에 담지도 않았다.다음날 윤구주가 방에서 나가자 정원 안에서는 남궁서준이 칼을 안은 자세로 검심을 단련하고 있었고 용민, 철영, 재이 등 사람은 정원 밖을 지키고 있었다.정원을 한번 쳐다본 윤구주는 이내 공수이의 방으로 갔다.어제 술을 많이 마신 공수이는 아직도 침대 위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술 냄새가 심했고 얼굴에는 키스 마크로 가득했으며 전혀 스님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공수이를 쳐다보던 윤구주가 손가락을 들어 기운을 조금 움직여 공수이의 미간에 넣었다.“누구야?”그에 공수이가 깜짝 놀라며 일어났다.“형님? 왜 여기 계세요?”공수이는 윤구주가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을 보고 눈을 비비며 물었다.“어젯밤에는 재밌게 놀았어?”윤구주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공수이는
공수이가 잔뜩 억울한 얼굴로 말하는 것을 듣고 윤구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난 그저 은스타님을 우연히 만났을 뿐이지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그럼 지금 형님의 말대로라면 예쁜 누나의 일방적인 생각이란 말입니까?”공수이가 얼굴을 들고 말했다.윤구주는 대답하지 않았다.제자백가의 공씨 가문 세자인 공수이가 총명하다는 사실은 더 말하면 입 아플 정도이다. 윤구주가 대답이 없는 것을 본 공수이는 곧바로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공수이는 손을 내밀어 윤구주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역시 우리 형님! 대단하십니다!”“미친 스님이 말하길 이 시대에 형님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만났다는 건 그야말로 천하의 재수 없는 일이라고 했죠!”꼬마 스님은 입으로 욕을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윤구주는 하하 큰 소리를 내며 미친 듯이 웃었다.이 말은 애초에 곤륜 구역에서 미친 스님 한 사람만이 한 말이 아니었다.왜냐하면 이곳에서는 아무리 재주가 빼어난 하늘의 총애를 받은 이들이 오더라도 윤구주의 앞에서는 초라하기 그지없어지기 때문이다.이것은 그들의 비애인 동시에 공수이의 비애이기도 했다.하지만 공수이는 진짜로 화를 내진 않았다.다만 그저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였다.“예쁜 누나가 좋아하는 사람이 형님이라면 저 공수이는 진심으로 탄복합니다!”“그런데 예쁜 누나는 몸매며 얼굴이며 인품까지 모두 완벽한데 형님은 왜 받아들이지 못하십니까? 만약 저라면 당장 예쁜 누나를 제 사람으로 만들고도 남았을 겁니다!”공수이는 잔뜩 옹졸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네가 알긴 뭘 알아!”“난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윤구주의 머릿속에는 소채은의 아름다운 자태가 떠올랐다.“부인이 생긴 겁니까? 누굽니까? 누군데 이렇게 행운인 겁니까?”공수이는 얼른 물었다.“그 사람은 소채은이라고 해.”윤구주가 대답했다.“소채은? 듣기에는 아주 평범한 이름 같습니다. 하지만 형님의 눈에 들었다면 절대 흔치 않은 절세미인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헤헤, 형님,
공가는 제자백가 중에서 유명한 제일이다.이른바 유교 천하가 있다면 공가는 바로 제자백가의 하늘이었다.“됐어!”윤구주는 손을 내저었다.“그래봤자 아주 작은 마가일 뿐이야. 애초에 내 안중에도 없었어.”“내가 신경 쓰이는 건 다른 거야.”윤구주의 말을 들은 공수이는 냉큼 물었다.“또 누가 형님의 심기를 건드렸습니까? 저한테 말해보십시오!”“그들은 바로 유명전이야!”윤구주는 차갑게 유명전의 이름을 뱉었다.“유명전? 백여 년 전에 우리 곤륜 구역에서 쫓기다가 사라진 지 백 년이 다 돼가는 그 신비 조직 말입니까?”꼬마 스님이 바로 물었다.“맞아!”“유명전은 백 년간 자취를 감췄으니 오늘날 갑자기 다시 나타난다면 반드시 화진 대란을 일으킬 거야!”공수이가 맞장구를 쳤다.“빌어먹을 것들! 그럼 제가 저번에 죽인 사람 몇이 유명전의 사람일 수도 있겠습니다.”“응?”“네가 유명전의 사람을 마주친 적이 있다는 말이냐?”윤구주는 눈썹을 꿈틀거렸다.“그렇습니다 형님. 저번에 이 유명전의 사람들이 예쁜 누나를 납치하려고 했지만, 결국엔 저 때문에 저승으로 갔습니다!”꼬마 스님은 작게 웃으며 말했다.“은설아?”유명전이 은설아를 납치하려고 했다는 말을 들은 윤구주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형님도 그 누나가 극히 드문 수련한 성체라는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그래서 그 인간들도 예쁜 누나를 납치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꼬마 스님이 말했다.공수이의 말을 들은 윤구주는 마침내 깨달았다.윤구주는 그 누구보다도 은설아가 영음성체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다만 도법을 함부로 전수해서는 안 되었다.그래서 윤구주는 은설아가 영음성체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에게도 말해준 적이 없었다.하지만 지금 은설아가 유명전이 눈독을 들인 표적이 되었다는 것을 들은 윤구주는 자신의 마음속에 늘어난 걱정을 무시할 수 없었다.유명전.아홉 대전의 염라이자 사대 명부이다.그뿐만 아니라 명부에는 고수들이 셀 수 없이 많다.만약 그들이 정말
“술 좀 줘... 술 좀 가져다줘!”취할 대로 취한 은설아는 미친 사람처럼 밖을 향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순식간에 경호원 몇 명이 달려왔고 인사불성으로 취한 은설아를 발견하자 걱정 어린 말을 건넸다.“설아 씨 괜찮으십니까?”온몸이 술기운에 사로잡힌 은설아는 술기운 가득 섞인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술 좀 줘... 나 술 마실 거야!”“설아 씨는 이미 충분히 취했습니다. 더 마시면 안 됩니다. 아직 콘서트가 세 개나 더 남아있단 말입니다!”한 경호원이 걱정했다.“참견하지 마! 술이나 달라고!”지금의 은설아에게 콘서트가 무슨 대수란 말인가.은설아는 오로지 술만 마시고 싶어 했다. 더 취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취하고 싶었다.이렇게 해야만 자신이 더는 윤구주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경호원들은 자신이 결코 은설아를 막을 수 없음을 깨닫고는 한숨을 쉬며 하는 수 없이 은설아에게 계속 술을 가져다줬다.두 명의 경호원이 막 방을 나섰을 때였다. 돌연 한 줄기 핏발이 번쩍였다. 지익! 두 사람은 반응할 틈도 없이 목에서 선혈을 쏟아내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두 경호원이 죽고 난 후에야 피부는 검게 그을리고 얼굴에는 붉은 반점이 가득한 추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입은 툭 튀어나오고 볼은 원숭이 볼 같았다.정말이지 추함의 극치였다.하지만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숨길 수 없는 아우라는 사람을 섬뜩하게 만들었다.그는 붉은 혓바닥을 내어 손에 들고 있던 피로 흥건한 칼을 핥았다. 사악하고 음침한 그 기운은 결국 방안의 술에 잔뜩 취한 은설아에게로 닿았다.“이 여자가 바로 그 여자야?”“나쁘지 않군! 역시 유일무이한 수련한 성체야!”그는 괴상하게 웃으며 사악한 눈길로 은설아의 굴곡이 선명한 육감적인 몸매를 훑었다.“그 세 멍청한 놈들은 영음지체도 똑바로 못 지키다니, 하찮은 나부랭이들이구나! 오늘 이 영음지체는 바로 내 것이 될 것이다! 킬킬킬!”괴상하게 웃은 추한 노인은 순식간에 은설아의 곁으로 갔다.술에 절어
“오지 마!”“제발 살려주세요!”은설아는 울면서 살려달라고 빌었다.하지만 구마가 어떻게 은설아를 이대로 놓아주겠는가.“얘야, 무서워하지 말아라. 이 노부의 로정이 되어 나에게 너의 음기를 나눠주고 나와 함께 이중 수련을 한다면 그건 너의 이번 생에 엄청난 영광이 될 것이다. 껄껄!”구마는 괴상하게 웃으며 검은 손을 뻗어 은설아의 아리따운 얼굴을 매만졌다.은설아는 그 순간 죽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은설아는 이런 끔찍한 상황을 맞닥뜨릴 거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은설아는 만약 오늘 자신의 순결한 몸이 더럽혀진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구마의 더러운 손이 은설아의 몸을 탐하려던 찰나에 돌연 한 줄기 황금빛이 나타났다.그 찬란한 황금빛은 삽시에 주변의 공기를 압도했다.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절망의 기운이 순식간에 구마를 덮쳤다.구마로 말할 것 같으면, 수련을 통하여 사상 절정에 도달한 몸을 가진 자였다. 한 줄기 황금빛이 나타난 것을 감지한 구마가 무의식적으로 온몸의 기를 모으자 바로 사방으로 구마의 진역 결계가 나타났다.이 진역 결계는 검은색이다.구마는 이 진역 결계가 나타난 틈을 타 손뼉을 쳐 그 금빛 줄기를 가리려는 속셈인 것이다.하지만 가려질 리가 만무했다.쿵!폭탄 터지는 듯한 엄청난 굉음이 구마의 장법에 닿았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기세등등하던 사상 절정의 육체는 엄청난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날아가 버렸다.구마는 피를 토하며 눈을 부릅뜨고는 황금빛이 비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누구야!”황금빛이 걷히자 흰옷을 입은 채 오만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문 앞에 서 있는 윤구주가 구마의 눈에 들어왔다.윤구주를 본 순간 넋이 나가버린 것은 이 노마뿐만이 아니었다. 저 멀리 떨어져 있던 은설아도 어안이 벙벙해졌다.자신이 좋아하는 남자가 이곳에 나타날 줄은 은설아도 예상치 못한 것 같았다.“너, 너, 너 대체 누구야? 누군데 내 진역 결계도 파괴할 수 있는 거지?”구마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갑자기 나타난
윤구주는 구마를 깨끗하게 처리한 후 오른손으로 묶여있는 대스타 은설아를 짚었다. 그러자 은설아를 휘감고 있던 검고 사악한 기운이 빠르게 흩어져 사라졌다.“은스타님 괜찮으세요?”윤구주는 은설아의 금제를 풀어주고 나서 은설아를 걱정했다.은설아는 몸이 자유로워지자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윤구주의 품에 안겼다.그녀의 옷은 갈기갈기 찢겼다.오직 검은 속옷만이 그녀의 몸에 남아 간신히 가슴을 가려주고 있었다.하지만 은설아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윤구주의 품으로 뛰어들었다.그런 미인이 자신의 품에 뛰어들자 윤구주는 어쩔 바를 몰랐지만 그렇다고 밀어낼 수도 없었기에 그저 은설아가 자신의 품에서 울게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었다.한참을 울고 난 후에야 은설아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었다.“구주 씨가 왜 여기에 있어요?”윤구주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전 특별히 설아 씨를 보호하러 왔어요!”“절 보호해준다고요?”“네!”“수이가 예전에 설아 씨에게 말해줬다시피 설아 씨는 귀하디귀한 수련한 몸이에요. 그래서 설아 씨의 안전을 생각해서 일부러 왔어요.”윤구주는 천천히 은설아에게 사실을 알려주었다.온몸에 술 냄새가 진동했던 은설아는 당연히 이미 정신이 맑아진 지 오래였다.은설아는 붉게 부어오른 눈에 감사한 마음을 가득 담아 말했다.“또 한 번 절 구해주셔서 고마워요 구주씨!”이번에는 다행히도 윤구주가 타이밍 좋게 나타나 줬다.그러지 않았더라면 이 미모의 스타는 정말로 악랄한 수법에 참혹하게 당했을 것이다.“그래요, 일단 제가 설아 씨가 걸칠 수 있는 옷 좀 찾아올게요...”윤구주가 말했다.은설아는 그제야 자신의 옷은 모두 찢어졌고 지금 몸에 걸친 거라고는 브래지어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은설아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아니요, 괜찮아요. 안에 제 옷이 있어요!”말을 하며 은설아는 후다닥 방 안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윤구주는 로비에 서 있었다.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빈 와인병들을 바라보다가 은설아의 몸에서 진
은설아의 얼굴은 순식간에 확 달아올라 새빨개졌다.“구주씨... 영음성체니 뭐니 저는 하나도 모르겠어요! 저는 제 몸이 특별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는데요...”은설아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상했다.지극히 평범한 일반인인 그녀가 자신의 몸이 그토록 희귀한 수련의 성체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냐는 말이다.“그건 설아 씨의 몸이 아직 영험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윤구주가 말했다.“영험을 발휘해요?”“네!”윤구주는 그 말을 끝으로 오른손을 들었다. 한 줄기 옅은 황금빛이 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왔다.그 기운은 마치 가느다란 실 같았다. 윤구주는 뿜어져 나온 빛으로 허공에 부적을 하나 그렸다.허공에 나타난 그 부적은 눈 깜짝할 사이에 휙 은설아의 아랫배로 날아 들어갔다.그 뜨거운 에너지는 순식간에 은설아의 아랫배에서부터 퍼져나갔다. 몇 초 후, 그 에너지는 점점 더 강해져 그녀의 복부에서 불길이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너무 뜨겁고... 너무 아파요...”복부에 주입된 부적 때문에 은설아는 곧바로 자신의 아랫배를 부여잡고 고통을 호소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윤구주는 손바닥으로 천천히 은설아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겁먹지 마세요. 저는 지금 설아 씨를 위해 영험을 발휘하는 중이에요. 설아 씨는 눈을 감고 천천히 적응만 해주면 돼요!”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강력한 현기가 그의 손바닥에서 쏟아져 나와 은설아의 기경팔맥으로 들어갔다.아까까지 불에 데고 칼로 에는 것처럼 따끔거리던 느낌은 윤구주가 현기를 주입함에 따라 점차 편안해졌다.마침내 은설아는 아랫배가 타들어 가는 것 같은 느낌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알아챘다. 그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는 알 수 없는 에너지가 자리 잡았다.그 에너지는 움직이는 것처럼 은설아의 아랫배에 저장되었다.“지금은 좀 어때요?”윤구주가 물었다.“아랫배는 뜨겁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아요. 하지만 안에 뭔가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은설아는 재빨리 대답했다.“그게 맞는 거예요! 설아 씨의 영음성체는 이미 깨어났고 앞
“세상에!”은설아는 자신의 한방에 단단한 벽에 뻥 뚫린 구멍을 바라보며 작은 앵두 같은 입술이 대문자 O의 모양으로 벌어졌다.이건 현실성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휘둥그레진 눈으로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는 은설아는 순간 사고회로가 멈춰버렸다.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나 강해진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 않았다.“구주씨...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10초 동안 멍하니 서 있던 은설아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넋이 나간 얼굴로 윤구주를 바라보았다.윤구주는 그저 웃었다.“지금 이 순간부터 설아 씨는 무술인입니다!”“무술이요?”이 단어를 들은 은설아는 여전히 멍하니 눈만 껌뻑였다.“그래요!”“제가 말했죠. 설아 씨의 몸은 귀하디귀한 영음성체인 동시에 최고 수련의 몸이라고요. 제가 곤륜 구역에 있을 때 구오 지존의 마녀를 본 적이 있는데 그도 영음성체를 지녔었어요. 설아 씨는 지금까지 두 번째에요!”“제가 아까 설아 씨를 위해 영험을 발휘시킨 것도 설아 씨의 영음성체를 완전히 끌어내어 이후에 수련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어요!”윤구주가 해석했다.윤구주가 자신의 영음성체에 대해 해석해주는 것을 들은 은설아는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여태 은설아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고 그저 대스타에 불과했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갑자기 무술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몸에는 수많은 노마가 이중 수련을 위해 눈독을 들이는 영음성체까지 지니게 되었다.이 몸을 얻는 것은 높은 단계의 공법과 절세의 무기를 얻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이었다.은설아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구주씨 그럼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요?”은설아는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아마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될 거예요!”윤구주는 고개를 들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은설아를 바라보았다.“새로운 삶이요? 전 구주씨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어요!”은설아가 대답했다.“제 말은 아주 간단해요. 지금 이 순간부터 설아 씨가 여태 살아왔던 반짝이는 스타로 사는 삶을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
백호는 아직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어느덧 이백오십 계단까지 올라왔다. 이 단계부터는 실체화된 술법이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람, 불 번개와 같은 속성의 영기가 점점 강해졌다. 여기서부터는 육신 횡련의 수련자는 강력한 체질로 버티고 술도 재능이 뛰어난 수련자는 천지 영기를 다루는 능력으로 버텨야 했다. 한마디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갈리는 구간이었다. 어느 한 분야라도 특출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백호는 술도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강인한 육체 하나로 견디고 있었다.웅!성수의 피가 진동하며 백호의 몸을 지탱했다. 각종 속성의 영기가 몰아쳤지만 백호는 성수혈의 힘을 빌려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수련자에게 있어서 성수의 혈맥이나 법보 등은 모두 신체 외적인 재능으로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꼼수나 편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천 가지 변화와 만 가지 신통력이 있어도 결국 만법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법기든 혈맥이든 이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천지 영기를 이용한 술법도 결국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반작용을 맞게 된다. 따라서 수련의 길에는 애초에 편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성수 혈맥 같은 천지의 보물은 보통 사람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윤구주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이를 감당하는 건 백호 자신이었다. 성수 혈맥의 힘을 온전히 감당하며 백호는 결국 삼백 계단까지 올라섰다.계단의 꼭대기 근처에는 이미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이 여럿 서 있었다. 서요산 검종은 근대에 들어 삼백 계단을 넘는 인재가 드물었다. 최근 백 년 동안 삼백 계단을 넘은 사람이 고작 열 명 남짓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삼백여 계단에서 멈췄다. 그런데 지금 백호는 삼백이십 계단까지 올라선 것이다. 이 정도면 서요산 검종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한 성과였다.이런 제자가 나타난다면 종문 전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서요산의 진인들까
“한 사람의 품성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그렇게 많은 수련자를 키워낸다면 결국 천하의 마인을 직접 만들어 내는 꼴이 아니겠어?”청현이 바로 그 실패한 예다. 서요산 검종 종주가 청현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나머지 그의 인성을 무시하고 양성한 끝에 결국 역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그럼 저하 서요산에 입문한 무술 무인들은 평균적으로 몇 계단까지 오르는지 아십니까?” 백호가 호기심에 물었다. 윤구주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무술 무인의 정확한 데이터는 모르지만 검종 종주와 잡담할 때 들어보니 검종 제자들의 수준이 갈수록 떨어져서 천 년 전만 해도 평균 삼백 계단 정도였는데 요즘엔 백 계단도 못 오른다고 하더구나. 가끔 삼백 계단을 오르는 자라도 나오면 검종 전체가 몇 년은 떠들썩할 정도라고 했어.”“구백구십구 계단까지 있는 시험인데 천 년 전 전성기에도 겨우 삼백 계단이요?” 백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요산 검종의 수준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때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야?” 윤구주는 흥미롭게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는 당장이라도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윤구주의 허락을 구한 뒤 바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계단 두 계단... 오십 계단까지는 아무 어려움도 없었다. 백호는 오십 계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서요산 검종이 별것 아니라며 놀려댔다. 하지만 육십 계단쯤 올랐을 때 처음으로 압력을 느꼈다. 마치 몸 위에 작은 차 한 대가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백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백 계단에 도달하자 압력이 갑자기 커졌다. 등에 작은 승용차 대신 소형 트럭이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백호의 한계에도 가지 못했다.“근래 사람들의 평균이 백 계단도 못 넘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예전의 무인 횡련은 황제도 오를 수 있었지만 요즘 무인 횡련은 죽어라 노력해도 소형 트럭 하나 못 버티는 수준이니 말입니다.”백호는 농담을 던지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
전에 임정설은 구오 지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힘쓰며 수모를 견뎌내고 살아남으려 했다.하지만 이제 황제가 된 그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그 탓에 이번 관문 앞에서 그는 망설였다.살아 있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었다.죽음을 마음에 품은 자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관문이었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청해만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황제가 되면 곤륜 구역에서 최고 경지에 도달하는 건데.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왜 죽음을 택하려는 거지?’“저하, 국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합니다. 저하도 사랑하던 이에게 배신당했어도 결국 극복해 나갔잖습니까.”백호도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여전히 국주보다는 왕이 더 낫다고 여겼다.“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느냐.” 윤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백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는 어리숙하고 말솜씨도 없기에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내가 문아름에게 배신당한 건 억울한 일이지만 나는 그녀에게 잘못한 게 없다. 오히려 그녀가 날 배신한 거다. 하지만 국주는 그 반대였지. 그가 그녀를 저버린 거야. 정이 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지혜가 지나치면 오히려 상처를 입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쓰라린 후회는 가진 뒤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생사를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윤구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소채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도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느꼈다.“그럼 복수하면 되지 않나요?” 백호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이때 청해가 눈치를 채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상대가 너무 강해서 못 이기는 거지. 황제에 오르기 전까진 제대로 맞붙을 힘도 안 돼. 오르고 나서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하고.”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 말이 맞았다.“그럼 우리가 국주님 대신 복수해 드리면 되잖아요? 국주님은 제 왕이기도 하지만 제 윗사람이기도 하잖아요.”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하하! 만약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솔직하다면 이런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