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여정은 벽에 기대어 일부러 나한테 윙크했다.“나 예뻐?”나는 저도 모르게 그렇다고 말하려다가 정신을 번쩍 차렸다.“소여정 씨, 제발 저 좀 해치지 마세요. 이 미친개가 계속 저를 물려고 하잖아요. 우선 어떻게 할지부터 생각해 봐요.”내가 지금은 강용재를 통제하고 있는 상태이긴 하지만 계속 이러고 이을 수는 없기에 떠날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그때 소여정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네 말대로 그냥 미친개야. 정태곤보다도 더 돌아 있는 놈인데, 내가 어떻게 도와? 정태곤이라면 그래도 내 말을 듣겠지만 이 자식은 내 말도 안 들어 처먹어.”‘뭐야? 미친개인 줄 알면서 나를 건드려서 내가 이런 놈한테 당하게 해?’‘내가 진짜 죽기라도 해야 그만둘 건가?’강용재는 계속 버둥거렸다.“이거 놔라. 안 그러면 네 팔 부러뜨리는 수가 있어.”“내가 놓든 안 놓든 나 죽일 거잖아. 뭐 담보라도 있어야 놔줄 거 아니야.”“담보는 얼어 죽을. 당장 놓으라고!”강용재는 또다시 나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그 순간 나는 욱해서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강용재 입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가 흘러나왔다.“임천호 개 주제에 어디서 개겨? 나 오늘 강북시 부시장과 함께 식사하러 왔거든. 내 털끝 하나라도 건드려 봐. 임천호도 너 못 구해줘.”나는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강용재만 나를 풀어준다면 나도 이 자식을 풀어줄 생각이 있었다.하지만 이 미친개는 내 말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너... 죽고 싶어?”강용재는 어딘가 나사가 풀린 것처럼 도저히 사람 말을 듣지 않았다.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고통마저 참으며 그 와중에 내 팔을 꽉 잡고 있다는 거였다.‘이거. 이런 상태만 아니었으면 내 팔 정말 부러졌겠는데?’나는 다급히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그러자 강용재가 버럭 소리 지르며 또 나에게러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의 동작은 전보다 좀 더뎌졌고 걷는 자세도 어딘가 이상했다.나는 원래 도망가려 했는데 강용재의 이런 모습을 보니 갑자기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임 회장님,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소여정은 임천호 앞으로 다가가 생글생글 웃으며 그의 팔짱을 꼈다.“임 회장님, 사실 두 사람 실력 겨뤄본 것뿐이라 이기고 지고 그딴 거 없어요.”나는 소여정의 행동이 갑자기 이해가 되지 않았다.강용재는 소여정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는데 쫓아낼 좋은 기회에 왜 도와주는지도 알 수 없었다.소여정은 자기만의 생각이 따로 있었다. 강용재는 원래부터 임천호 말에만 복종했다.하지만 이대로 쫓겨난다면 분명 나를 원망할 거다. 때문에 소여정은 나를 돕는 거였다.임천호는 허허 웃으며 소여정의 허리를 끌어안았다.“실력을 겨룬 거라면 전력을 다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용재야, 내가 기회 한 번 더 주마. 네가 네 실력을 증명한다면 내 곁에 남겨두도록 하지.”그 말에 소여정의 안색은 단번에 창백해졌다.임천호가 기회를 한 번 더 줬으니 강용재는 남기 위해서라도 분명 최선을 다할 거다. 그러면 나는 정말 위험해진다.어쨌든 이건 강용재가 남느냐 쫓겨나느냐 하는 문제가 달려 있었기에 그의 심기라도 건드렸다가는 칼을 꺼내 들 수도 있었다.소여정은 다급히 말했다.“여긴 호텔이에요. 게다가 이태웅 부시장님도 와 계신다던데 여기서 싸우면 안 좋지 않을까요?”나는 이제야 소여정이 지금껏 나를 도와주고 있었다는 걸 눈치챘다. 게다가 이태웅 부시장을 데려오라고 나를 일깨워주고 있었다.나도 강용재 눈에 드리운 살기를 보아낼 수 있었다. 만약 내가 더 대단한 뒷배를 내세우지 않는다면 이 둘은 분명 그만두지 않을 거다.때문에 나는 다급히 말했다.“겨루는 건 문제없지만 제가 너무 오래 나와 있어서 얼른 돌아가 부시자님께 인사해야 하거든요.”“오호? 이태웅 부시장과 함께 왔단 말인가?이태웅을 언급하니 임천호은 역시나 살짝 꺼리는 눈치였다.나는 얼른 말을 이었다.“네. 제가 오늘 이태웅 부시장님과 함께 왔거든요. LC그룹 윤해철 회장님도 와 계시는데 바로 저 룸안에 있어요.”임천호는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눈에
윤해철 역시 웃으며 맞장구쳤다.“마침 나도 임 회장을 환영하지 않으니 편히 가시게.”이태웅과 윤해철은 이 일에서 의견이 맞았다.하지만 임천호는 여전히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누가 뱃속에 더러운 물 가득한 너구리 아니랄까 봐 이런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단.룸 안은 순간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나는 심지어 숨소리도 내지 못한 채 당황한 표정으로 뻣뻣하게 서 있었다.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렇게 대단한 분들이 기싸움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하지만 나는 무시당하기 싫어 겁먹은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한참 뒤, 임천호는 하하 웃으며 정적을 깼다.“이태웅 부시장님과 윤해철 회장님이 모두 저를 환영하지 않을 줄은 몰랐네요. 좋아요. 저는 이만 가보죠.”임천호가 이대로 떠나려 한다는 게 나로서는 너무 놀라웠다. 나는 임천호가 이렇게 순순히 떠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모했다.나는 이 순간 더할 나위 없이 놀랐다.그동안 임천호는 법도 마음대로 뭇하고 아무도 안중에 두지 않으며 살아가는 존대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내가 간과한 게 있었다. 현재는 법치 사회라 임천호가 아무리 대단할지라도 법을 지켜야 한다.이 순간 나는 임태웅과 윤해철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 심지어 두 사람 주위에서 막 빛이 나는 것 같았다.그때 윤해철이 갑자기 허허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수호 군 대단하네. 이런 상황에서 그런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다니.”나는 그 칭찬에 몸 둘 바를 몰랐다. 내가 비록 겉보기에는 덤덤해 보일지 몰라도 속은 이미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다. 하지만 윤해철이 그런 오해를 했다니 굳이 풀어줄 필요도 없었다.나는 윤해철을 따라 웃으며 말했다.“두 분이 계시는 한 임천호가 함부로 못 할 테니까요.”“방금 혹시 무슨 일 있었나? 임천호 경호원이 자네를 아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데.”나는 방금 전 밖에서 벌어진 상황을 간단히 설명했다. 물론 소여정에 관한 일은 통째로 삭제한 채로 말이다. 나는 단지 강용재와 마찰이 생겨 그가 계속 나를 괴롭힌다고만 했다.“임천호가
이태웅은 계속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치 누가 그에게 돈이라도 빚진 것처럼.하지만 이태웅을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그는 평소에도 늘 이토록 엄숙한 모습이다. 이건 아마도 그의 신분과 관련이 있을 거다. 어쨌든 부시장이라는 직업은 워낙 위엄 있고 진중해야 하니까.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문득 공무원이 되는 게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높은 관직은 더더욱.매일 마음껏 웃지도 못하고 평소에도 엄숙해야 하니까. 이런 생활이 대체 무슨 재미가 있다는 건지?역시 사업을 하는 게 좋다. 사업은 작게 해도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고 크게 하면 기업가가 될 수 있다. 게다가 돈이 있으면 권력을 가지게 되고 권력이 있으면 모든 걸 얻는 셈이니 다른 걸 크게 신경 쓸 것도 없이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할 수 있다.마치 윤해철처럼 말이다. 윤해철은 내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다.“시간 없어. 나 바빠.”이태웅의 대답은 역시나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하지만 윤헤철은 계속해서 농담조로 말했다.“자네가 시간 없어도 형수님은 시간 있을 거 아니야. 형수님더러 가라고 해. 우리 거기 호스트 많으니까...”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태웅이 서릿발 같은 눈빛으로 윤해철을 쏘아봤다.“죽고 싶나? 감히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해?”“자네야말로 사상이 너무 불건전한 거 아니야? 우리 용천 호텔은 정직한 사업장이야. 호스트도 모두 정직한 사업을 하는 것뿐이고. 자네가 너무 재미없고 고지식해서 내가 형수님께 재미를 드리고 싶어서 이러는 거잖아.”이태웅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볼멘소리로 말했다.“식사도 이쯤 하지. 이제 둘 다 가 봐.”“에이. 농담을 왜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여? 듣기 싫으면 말 안 하면 되잖아. 왜 사람을 내쫓고 그래?”“나가. 둘 다 나가!”나와 윤해철은 결국 함께 쫓겨났다.윤해철은 나오자마자 바로 다른 태도가 돌변했다.“하. 겨우 나왔네. 저 고지식한 양반과 대화하는 거 참 재미없다니까. 수호 군, 우리끼리 다른 데 가서
이영미도 노는 걸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남편과 댄스 플로어에 뛰어들어 함께 즐기기 시작했다.하지만 윤지은은 두 사람과 정반대였다. 그녀는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로 댄스 플로어 밖에 서 있었다.무심코 윤지은과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에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나는 더 이상 춤출 엄두가 나지 않아 전전긍긍하며 윤지은 곁으로 다가갔다.“왜요? 왜 또 오만상을 하고 있는데요?”윤지은은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쏘아봤다.“네가 우리 아빠 여기로 불러냈어?”윤지은이 나를 탓하는 거였다. 그걸 눈치채자마자 나는 다급히 설명했다.“이건 하늘이 알고 땅이 알아요. 제가 아니라 회장님이 오겠다고 한 거예요.”“흥! 그래도 네가 우리 아빠 꼬셨겠지.”나는 순간 억울해서 울고 싶었다.윤지은은 내가 나쁜 놈이라는 전제를 깔고 묻는 것이었기에 내가 어떻게 설명하든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그래요. 지은 씨가 맞다면 맞는 거죠.”“이렇게 순순히 인정하는 거야? 좋아. 말해 봐. 어떻게 혼내줄까?”“제가 회장님을 데려온 게 맞다고 해도 즐기러 온 것뿐이지 다른 짓은 안 했어요. 그런데 왜 혼낸다는 거예요?”나는 윤지은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그러자 윤지은은 내 귀를 세게 잡아당겼다.“감히 내 말에 토를 달아?”“아. 아파요. 이거 놔요.”윤지은은 바로 손을 놨지만 나를 째려봤다.“우리 아빠는 널 알기 전에 이런 곳 한 번도 안 왔어. 너를 알고 난 뒤 다른 사람이 됐다고. 우리 아빠가 벌써 사흘째 회사에 안 간 거 알아?”나는 억울한 나머지 귀를 만지며 말했다.“회장님이 회사 출근하지 않은 게 왜 내 탓이에요? 그건 지은 씨네 회사지 내 회사도 아닌데 나랑 뭔 상관이에요?”“네가 우리 아빠한테 이상한 처방을 내려준 바람에 아빠가 맨날 엄마와 집에서...”윤지은은 결국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 뜻을 바로 이해하고 호탕하게 웃었다.그러자 윤지은은 또다시 나를 째려봤다.“이 상황에 웃음이 나와?”나는 너무 웃어
윤지은은 나를 하루라도 괴롭히지 않으면 마음에 가시가 돋는지 모르겠다.“말이 너무 많아. 시끄러워.”“내가 아무리 말이 많아도 여기 음악보다 시끄럽겠어요? 이럴 거면 왜 음악을 끄라고 하지 않아요?”이건 내가 눈에 거슬려서 생트집 잡는 게 틀림없다.윤지은은 여전히 나를 째려봤다.“계속 지껄여 봐. 또 혀를 놀리면 네 귀를 잘라버릴 거야.”나는 얼른 윤지은의 새하얀 손을 붙잡았다.“됐어요. 화 그만 내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갱년기인 줄 알겠어요. 사람은 기쁘게 살아야 해요. 지은 씨 부모님께 좀 배워요. 가요. 우리도 춤춰요.”윤지은은 싫다고 계속 버텼지만 나는 그녀를 억지로 끌고 댄스 플로어로 향했다.그러자 윤지은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가운데 서 있었다.“나 춤출 줄 모르는데 나는 왜 끌고 왔어?”“지은 씨도 참. 이제 갓 20대면서 왜 지은 씨 어머니보다 자유롭지 못해요? 이리 와요. 내가 가르쳐 줄게요. 턴 돌고...”나는 윤지은의 손을 잡고 춤을 가르쳐 주었다.애초에 저항하던 윤지은도 점차 내 가르침을 받아들였다.무엇보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춤을 추고 있었기에 윤지은도 자연스럽게 분위기에 녹아들었다.윤지은은 춤출 줄 모르고 동작도 뻣뻣했지만 몸매가 좋았기에 대충 춰도 너무 예뻤다.그 모습을 보며 나는 옆에서 아부했다.“너무 잘 추는데요. 예뻐요. 계속해요...”윤지은은 점점 분위기에 심취했다.얼마 뒤 윤해철과 이영미도 다가왔다. 우리는 함께 댄스 플로어에서 몸을 흔들며 자유로움을 만끽했다.우리는 춤을 추다가 잠깐 쉴 때면 술을 마시고 술기운이 오를까 하면 또 댄스 플로어에 가서 춤을 췄다.그렇게 몇 시까지 놀았을까?나는 술에 취해 윤지은네 가족과 함께 차를 타고 윤씨 저택으로 갔다.그 뒤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나는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깨어나 보니 내 옆에는 윤지은이 누워 있었다.게다가 방 인테리어를 보니 윤지은의 방 같았다.얼른 내 몸부터 살폈더니 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는 그 순간 망부석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머리가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하지만 윤해철과 이영미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나를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일어났어?”나는 두 사람의 미소에 흠칫 놀라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쳤다.일반적으로 이런 상황이라면 부모님들은 제 딸을 건드린 남자를 죽도록 욕하는 게 정상 아닌가?하지만 두 사람은 나를 욕하기는커녕 오히려 이상한 미소를 지었다.나는 너무 무서워 무의식적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두 분, 이러지 마세요.”“수호 군, 어젯밤 어땠나?”윤해철이 먼저 물었다.그 질문에 나는 심장이 벌렁거렸다. 내가 자기 딸과 자버렸는데 어떠냐고 묻는다니?‘이건 죽기 전의 기분을 묻는 건가?’어떻게 답해야 할지 생각하기도 전에 이영미가 다가와 친근하게 내 손을 잡았다.“어젯밤 기척이 엄청 크던데. 꽤 오래 했나 봐?”나는 하마터면 두 사람에게 무릎 꿇을 뻔했다.“죄송합니다.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기억이 안 나요. 제발 살려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나는 다리가 후들거려 그대로 힘이 풀렸다.그러자 윤해철이 허허 웃으며 나를 부축했다.“수호 군, 왜 이러나? 우리는 수호 군을 탓하려는 게 아니야.”“네? 정말요?”‘세상에 이렇게 개방적인 부모님이 있다고? 이게 정말 유교 국가의 부모님이 맞나?’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그러자 이영미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그렇고 말고. 우리는 오히려 기뻐해도 모자랄 판이야.”이영미가 이렇게 말하니 그나마 신빙성이 있었다. 어쨌든 그녀는 예전에도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으니까.그제야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던 내 심장은 점점 차분해졌다.하지만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찰나 윤해철이 내뱉은 말에 나는 다시 불안해졌다.“난 수호 군이 우리 지은이와 이런 사이인 줄 몰랐지 뭔가. 수호 군이 우리 지은이랑 부부의 결실도 맺었으니 이참에 결혼하는 건 어떤가?”나는 그 말에 그대로 굳어 어떻게
이영미는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지은이 의견을 물어봐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어제 우리도 지은이 소리를 들었어. 수호 씨한테 엄청 만족하는 모양이던데 뭐. 하하하...”말을 마친 이영미는 호탕하게 웃었다.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바로 뒤돌아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큰일 났어요. 지은 씨 부모님이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어젯밤 일을 다 알아버린 것 같아요.”“그래서?”윤지은은 덤덤한 표정으로 물었다.그에 반해 나는 마음이 조급해서 타들어 갈 것만 같았다.“그래서 두 분이 저더러 데릴사위로 윤씨 가문에 들어오라고 해요.”“그래서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윤지은은 여전히 덤덤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윤지은의 눈빛은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날카로웠다.그 눈빛이 너무 무서워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지은 씨도 같은 생각인 건 아니죠?”“난 상관없어. 결혼은 누구랑 하든 해야 하니까.”‘뭐야? 내 질문에 정면으로 대답하지 않았잖아.’‘망했네. 그렇다는 건 지은 씨도 같은 생각이라는 거잖아.’‘어떡하지?’“나랑 결혼하기 싫은가 보네?”윤지은은 마침내 다시 물어봤다.나는 얼른 기회를 잡아 다급히 설명했다.“싫은 게 아니라 지은 씨도 알다시피 나 여자 친구 있잖아요.”“그 여자 친구와 아직 관계를 확정 지은 것도 아니라며?”윤지은의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있었다.나는 그 물음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머리를 쥐어 짜내며 생각했다.그때 윤지은이 갑자기 내 멱살을 잡아당겼다.“내가 생각해 봤는데 너 같은 바람둥이를 내 옆에 붙잡아 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내 옆에 두고 단속하고 감시하면 다른 여자를 해치지 않을 거잖아.”“설, 설마 정말 나한테 시집오고 싶어요?”나는 내 귀를 믿을 수 없었다.윤지은은 싱긋 웃으며 내 얼굴을 톡톡 쳤다.“내가 너한테 시집가는 게 아니라 네가 우리 집에 데릴사위로 오는 거야.”“안 돼요. 싫어요.”나는 윤지은의 손을 쳐냈다.“저 외동이에요. 제가 데릴사위로 윤씨 가문
요즘 겪은 일이 너무 많은 탓인지 나도 가끔 감회가 새로울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다.특히 사장님처럼 좋은 분이 유골이 된 걸 보니 마음이 무거웠다.우리는 한동안 돌아갈 수 없기에 사모님은 부모님을 불러 사장님의 유골함을 강북으로 가져가 매장했다.두 어르신은 충격이 너무 컸는지 순식간에 더 늙어진 것 같았다. 항상 친아들처럼 생각했던 사위가 그렇게 됐으니. 간암인 줄 알았을 때도 그렇게 믿기 어려웠는데 또 이런 불상사를 겪었으니 당연히 충격이 컸을 거다.하지만 임민수는 딸이 더 걱정됐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유미야, 너 정말 강북에 안 돌아갈 거니?”사모님은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진실을 파헤치기 전에 절대 안 돌아가요. 엄마, 아빠, 호섭 씨는 두 분께 맡길게요.”사모님은 무척 아쉬워하며 사장님의 유골함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그 순간 사모님의 눈빛은 매우 복잡했다. 아쉬움과 슬픔, 괴로움 그리고 아름다운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도 한데 섞여 있었다.나는 절친한 사람을 잃어본 적 없어 사모님의 심정을 깊이 공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족을 잃은 고통이 얼마나 괴로운지는 알고 있었다.나와 윤지은은 사모님을 위로하려고 했지만, 사모님은 우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아무 말도 하지 마.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아니까.”사모님은 매우 침착했고 엉엉 울지도 않았다.그런 사모님의 모습이 나와 윤지은은 모두 걱정되었다.하지만 사모님이 말했다.“걱정할 거 없어. 내 상태는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비록 슬프고 안타깝지만 이대로 주저앉아 있지 않을 거야. 호섭 씨도 내가 이러는 모습 원하지 않을 거야.”“유미야,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야.”윤지은은 감개무량하듯 말했다. 하지만 내가 앞으로 다가가려 하자 이내 나를 째려봤다.‘벌써 하루가 지났는데 아직도 화가 안 풀렸나?’무엇보다 난 아직도 내가 대체 언제 무엇 때문에 윤지은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결국 나는 할 수 없이 묵묵히 두 사람을 따라 호텔로 돌아갔다.윤지은
우리는 희망을 이연화에게 거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때문에 그 백수들이 소식을 전하기 전에 우리는 호텔에서 기다리기만 했다.하지만 윤지은은 호텔에 갇혀만 있으면 사모님이 답답해할까 봐 한가할 때면 사모님과 함께 산책하곤 했다.사모님이 자기 컨디션을 끌어 올리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우리는 알 수 있었다.하지만 동력과 희망이 없는 탓에 사모님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Y시에 온 지 사흘 만에 강한나는 다시 강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떠나기 전 우리와 함께 시사 자리를 가졌다.“정말 여기 남아서 조사할 거야?”나와 윤지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강한나가 말했다.“알았어. 나도 도와줄 건 없으니 성공하길 빌게.”나와 윤지은은 곧바로 강한나가 우리에게 할 말이 있다는 걸 눈치챘다. 아니나 다를까, 사모님이 화장실 간 틈에 강한나는 얼른 우리에게 말했다.“호섭 씨 시신 어느 때 화장할 거야?”나와 윤지은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몰라. 유미가 아직 동의하지 않았어.”그 말에 강한나가 말했다.“시체를 화장하지 않아도 시체에서 단서를 찾는 건 어려울 거야. 난 고인 편히 쉬게 해주는 게 좋다고 봐.”“하. 그런데 문제는 유미가...”사모님이 아쉬워하는 게 문제다.화장하지 않으면 그래도 보러 갈 수 있지만 화장하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사실 나도 강한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우리도 그 말 이해해요. 사모님은 저희가 설득해 볼게요.”식사를 마친 뒤 강한나는 그 길로 떠났다.나와 윤지은은 호텔로 돌아가는 내내 어떻게 말을 꺼낼지 고민했다.“두 사람 먼저 돌아가. 난 장례식장에 가볼 거니까.”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우리는 사모님이 또 사장님 보러 간다는 걸 알았다.하지만 장례식장도 규정이 있는데, 아무 때나 들여보낼 수 있을 리가 없다.그건 다른 것도 아닌 시신이니까.그때 윤지은이 입을 열었다.“유미야, 이번에 보고 난 뒤 호섭 씨 편히 자게 해주자.”“안 돼!”사모
“왕정민 이 파렴치한 놈. 어떻게 이럴 수 있지?”분명 자기가 잘못했으면서 뻔뻔하게 애교 누나한테 집착하다니.“애교 누나는 그럼 어떻게 처리했어요? 신고는 했어요?”[애교가 예전보다 많이 강해졌더라고요. 그걸 다시 왕정민한테 보냈어요. 심지어 안에 뭔갈 더 추가해서.]“네? 하하. 애교 누나가 정말 변했네요.”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그러니까요. 그것도 다 왕정민 때문에 할 수 없이 변한 거긴 하지만요. 애교가 만만한 줄 알고 애교만 괴롭히다니. 그렇게 대단하면 그 여자를 그렇게 괴롭히지...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는 못 할 걸요.][그런 사람들은 원래 그래요. 여자들은 뭐 드세고 화를 자주 내는 여자가 되고 싶어서 되겠어요? 다 남자들이 행복한 줄 모르고 기어오르니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변한 거죠.][특히 우리 여자들은 가끔 독해질 필요가 있어요. 독하지 않으면 남들이 괴롭혀도 되는 줄 알아요...]나는 형수의 말에 백 번 동의한다.애교 누나가 이토록 강해졌다니 나는 많은 걱정을 덜 수 있었다. 형수도 마찬가지고.두 사람이 다른 사람의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내가 마음 놓고 할 일을 할 수 있다.형수와 한참 얘기한 뒤 나는 곧바로 애교 누나에게 전화했다.“누나, 왕정민 일은 왜 말 안 했어요?”애교 누나 목소리는 여전히 간질거리고 듣기 좋았다.[수호 씨가 Y시에 있는데 얘기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어요? 수호 씨 가 나 때문에 와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나 이제 많이 변했어요. 다른 사람의 보호만 받으면서 살 수는 없어요.][그동안 아빠한테 반항하면서 독립적인 여자가 될 거라고 큰소리쳤는데, 지금껏 한 번도 그렇게 산 적이 없어요.][예전에 결혼에 묶여 나를 잃었고, 행복한 결혼만 있으면 모두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알았어요. 여자는 자기 마음이 강해져야 진짜 강한 거예요.]애교 누나의 말을 들으니 나는 순간 누나를 다시 알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이 사람이 아직도 내가 알던 나약하기만 하고, 무
“내가 방 하나 더 잡을게요.”나는 말하면서 방을 나가려고 했다. 그때 뒤에서 갑자기 사모님 목소리가 들렸다.“수호 씨, 먼저 내 침대에서 눈 붙여요.”고개를 돌아보니 사모님은 안쪽으로 자리를 옮겨 내가 누울 공간을 내주었다.나는 속으로 거절했다.비록 사모님이 다른 마음 없이 그저 나를 휴식하라고 호의를 베푸는 거라는 걸 알지만, 사장님이 그런 일을 당했는데 내가 사모님과 같은 침대에 누워 있는 건 말도 안 됐다.게다가 윤지은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는데, 내가 동의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나는 결국 거절했다.“아니에요. 가서 다른 방 구하면 돼요.”나는 다급히 방을 나가 프런트 데스크로 달려갔다.처음 온 날 우리는 사실 싱글룸 세 개를 잡았다. 하지만 나중에 사모님 상태가 걱정되어 나와 윤지은이 사모님 방에 들어와 지내게 되면서 나머지 싱글룸 두 개를 취소했다.확인 결과 더블룸 하나가 나왔다는 말에 나는 얼른 그 방을 잡았다. 그러면 사모님과 윤지은이 더블룸에서 함께 지내고 내가 싱글룸에서 지내면 되니까.나는 카드키를 챙겨 방으로 들어갔다. 이 방은 조용한 데다 환경도 좋아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내가 침대에 눕기 바쁘게 핸드폰이 징징 울렸다. 전화한 사람은 다름 아닌 형수였다.요즘 사장님 일 때문에 여기저기 달려 다니느라 형수와 오랫동안 얘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때문에 마침 조용한 틈을 타 나는 형수와 얘기하려고 여상 통화를 받았다.형수는 사모님 상태를 걱정하며 일의 진전을 물어봤다.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쉽지 않아요. 조사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어 한동안 여기서 지내야 할 것 같아요.”[수호 씨 사장님 내외가 수호 씨한테 그렇게 잘해줬는데, 이번 기회에 유미 씨 옆에서 많이 도와줘요.]형수가 말했다.그 말에 나는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네, 저도 알아요. 형수는 요즘 어때요?”[좋아요. 잘 먹고 잘 자고 이제 천천히 걸을 수도 있어요.]“진짜예요? 사진 찍어 보내 봐요.”나는 너무 기뻐 흥
내가 노랑머리한테 준 것도 적은 돈이 아니었다. 족히 10만 원 가까이는 됐으니까. 백수들한테는 이것도 큰돈이나 다름없다.노랑머리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결국 입을 다물었다.아직 대답을 못한 사람들은 얼른 다른 질문을 하라고 나를 재촉했다.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두 번째 질문을 했다.“그럼 혹시 이연화 혹은 조금희가 요즘 낯선 사람과 만난 걸 본 사람이 있어요?”그 물음에 모든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나는 실망했다.“세 번째 질문, 혹시 누가 나 대신 이연화를 감시할래요?”모든 사람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그럼 다 같이 해요.”“그럼 돈은 어떻게 계산하는 거예요?”노랑머리가 물었다.나는 가방에서 또 돈 두 뭉치를 꺼냈다.“세 명이 감시해요. 한 사람당 200씩 줄게요.”세 사람의 눈은 커다래지더니 급기야 반짝반짝 빛이 났다.나는 세 사람에게 귀띔했다.“이 돈은 수고비예요. 누가 만약 유용한 단서를 제공하면 이 외에도 큰 보상을 받게 될 거예요.”‘역시 돈이 있으니 뭐든 쉽게 되네.’이 사람들이 나를 위해 성실하게 일하게 하려면 이 사람들 마음을 매수하는 게 우선이다.몇백만 원은 지금의 나한테 큰돈이 아니다. 무엇보다 사장님과 사모님을 도울 수 있다면 나는 뭐든 할 수 있다.모든 일을 마친 뒤 나는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윤지은의 말을 들어보니 사모님은 이미 잠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모님 정서가 여전히 불안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기분이 다운된 사람은 쉽게 졸리고 무기력해지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나는 방금 전 일을 윤지은에게 말했다.“이번 일 조사하기 엄청 어려울 거예요. 언제 진실이 밝혀질지도 모르겠고. 장기전을 할 준비는 됐어요?나는 윤지은을 보며 말했다.그러자 윤지은이 나를 째려봤다.“그걸 말이라고 해? 유미는 내 베스트 프렌드야. 유미한테 이런 일이 생겼는데 내가 같이 있어 주지 않으면 누가 같이 있어 줘? 그러는 너야말로,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데? 설마
나와 윤지은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우리는 사모님 마음이 편치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사모님, 비록 어렵지만 아무 희망도 없는 건 아니에요. 우리가 끝까지 견지하면 분명 수확이 있을 거예요. 게다가 사장님이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줄 거예요.”사장님을 언급하자 사모님의 정서는 드디어 조금 안정되었다. 사모님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호섭 씨, 정말 우리를 지켜줄 거야?”“당연하지.”윤지은도 사모님을 위로했다.그때 내가 분석했다.“제가 볼 때 이연화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요. 그 여자가 한 말 진짜 아니에요.”“너도 그래?”보아하니 윤지은도 똑같은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넌 어떻게 보아냈는데?”“느낌이 그래요. 이연화가 그렇게 드센데 남편 일을 물어보지 않았다는 게 말이 안 돼요. 게다가 조금희 카드에 입금된 2억이 이연화랑도 연관된 것 같아요.”이건 내 직감이다.나는 왠지 이연화 같은 신분과 배경에 성깔 있는 여자라면 통제욕이 엄청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여자가 자신을 배신했던 남자를 나 몰라라 방치할 수 있을 리가 있을까?그건 그 여자 성격에 부합되지 않는다. 윤지은의 관점 역시 나와 어느 정도 비슷했다. 윤지은은 내 말에 일리가 있다며 맞장구치면서 보충했다.“그리고 또 이연화가 2억을 얘기할 때 자꾸 눈빛을 피했어. 그건 거짓말한다는 표현이야.”“문제는 그 여자가 진실을 말하지 않으려 한다는 거예요.”이건 가장 골치 아픈 부분이다.그때 윤지은이 말했다.“그건 간단해. 내가 사람을 시켜 그 여자를 감시하라고 할 거야. 그러면 분명 허점을 보일 거야.”이런 건 역시 돈이 많아야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다.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진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 있다.나는 얼른 맞장구쳤다.“만약 그곳 주민을 감시자로 붙여두면 더 좋을 거예요. 그 사람들이 이연화 행적을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윤지은은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봤다.“그건
사모님의 기세에 눌린 이연화는 오만하고 안하무인이던 태도가 싹 사라지고 다급히 대답했다.“말할게, 말한다고. 이거 먼저 놔.”사모님은 그제야 이연화 머리채를 놔주었다.이연화는 머리를 마구 문질러댔다. 심지어 얼굴까지 시뻘게진 걸 봐서는 사모님의 공격에 적지 않게 다쳤음을 알 수 있었다.이연화는 한참 동안 머리를 쓰다듬은 뒤 그제야 입을 열었다.“그 2억은 나도 어떻게 된 건지 몰라요. 그 인간이 우리 모자한테 주는 보상이라면서 줬어요.”“당신은 그 사람 아내인데 모른다는 게 말이 돼?”우리는 여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자 이연화가 조급히 말했다.“내 말 다 사실이에요. 난 정말 어떻게 된 건지 몰라요. 우리가 부부인 건 맞지만 명의상 부부나 다름없었어요. 그 인간이 나 몰래 불여우를 만나다가 잡힌 적도 있어요.”“그때 그 인간이 이혼만 하지 말자고 싹싹 빌지 않았으면 진작 헤어졌을 거예요.”여자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 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그 2억이 어디서 났는지 몰랐다면, 조금희 씨가 불치병이라는 건 알았겠죠?”이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알아요. 그 인간이 오래전에 내 앞으로 보험을 들어 놓을 걸 줬었거든요. 자기가 가면 보험사에서 돈이 나올 거라면서.”이건 모두 일가 조사했던 내용이었다. 다만 이연화가 말한 사실이 모두 진짜인가 하는 게 문제였다.나는 이연화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그날 장례식장에서 화장을 미뤄달라고 했는데 왜 안 들었어요?”“나 할 일 많아요. 당신들과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 인간이 당한 사고가 단순 사고든 인위적인 사고든 난 관심 없어요. 그 인간이 내 앞으로 돈을 남겼으니 난 그 돈을 얼른 받아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어요.”이연화는 조금희와 더 이상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아 조금희 일에 일말의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하지만 2억의 존재를 모른다는 게 진짜일지 의문이었다.만약 진짜라면 사건의 실마리는 또 끊기게 된다.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질
그렇다면 우리의 추측이 거의 맞는 거로 증명이 된 셈이다. 게다가 이연화는 분명 뭔가를 알고 있을 거다.“이러면 이연화 모자만 찾으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칠 수 있겠네요.”우리는 일이 이렇게 순조로울 줄 몰랐다.심지어 사모님은 마음이 급해 벌떡 일어섰다.“더는 못 기다리겠어. 나 지금 당장 이연화 만나러 갈래.”“유미야. 아직 조급해하지 마. 지금 이연화 모자가 어디 있는지 모르잖아. 이렇게 해, 내가 한나한테 조사해 보라고 할게.”윤지은은 강한나에게 전화해 이연화 모자가 사는 곳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직무상 편의를 이용해 강한나는 곧바로 이연화 모자의 거주지를 찾아냈다.[미리 말하는데, 이연화 모자 좋은 사람 아니야. 이연화 아버지는 판자촌 터줏대감이라 되도록 갈등을 만들지 마.]“알았어.”이연화가 만만치 않다는 걸 알지만 우리는 무조건 가봐야 했다. 그건 사모님한테는 더더욱 간절했다.아무리 그곳에 불바다라도 사모님은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이연화 집 주소를 알아낸 우리는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판자촌은 낡은 건물 지역이라 외지고 낡은 곳에 있는 데다 교통도 불편했다. 다만 이연화의 집은 그 판자촌에서 가장 큰 집이었다.우리가 이연화의 집을 찾았을 때 이연화는 집에서 화투를 치고 있었다.남편이 죽은지 얼마 되지 않는 여자가 이곳에서 한가하게 화투나 치고 있다니 침 한심했다.“이연화 씨, 할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어요.”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그러자 이연화는 나를 흘긋 보더니 말했다.“나 지급 바빠서 시간 없어요.”“이건 당신 남편 조금희 씨와 관련된 일이라 이연희 씨가 저희랑 반드시 가주셔야 해요.”기분이 살짝 언짢아진 나는 당연히 다정한 목소리가 나가지 않았다.하지만 이연화는 자기 구역에 있어 무서울 게 없어 심지어는 나에게 소리까지 질렀다.“반드시? 내가 왜? 당신들이 누군데? 경찰이야? 내가 왜 당신들 말을 들어야 해? 당장 꺼져. 화투 치는 거 방해하지 말고.”여자는 말하면서 다시 화투 치는 데
“보아하니 두 사람 모두 조금희 씨 몸에 종양이 퍼지고 있어 곧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네요.”“혹시 조금희 씨가 뒤에서 꼼수 부린 거 아닐까요?”나는 문득 뭔가 떠올라 의문점을 제기했다.현재 상황으로 분석해볼 때 조금희의 혐의가 가장 높았다.그때 윤지은이 말했다.“자세한 건 조사해 봐야 하지만 나도 조금희 씨가 이상한 것 같아.”사모님은 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다음에 조사할 때 나도 끼워줘. 나도 같이 조사하고 싶어. 두 사람 말 맞아. 호섭 씨가 억울한 죽임을 당했는데, 나라도 진실을 밝혀 억울함을 풀어줘야 해. 이게 내가 살아갈 유일한 동력이야.”사모님은 말하면서 또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슬픔 속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와 윤지은은 항상 사모님 곁을 지킬 거다.그날, 우리는 곧장 종양 전문 병원에 가 조금희의 병력을 조사했다.조금희 몸에서 종양이 발견된 건 1년 전인데, 처음에 양성이었다가 악성으로 번지기까지 적지 않은 돈을 들였던 거로 확인되었다.게다가 조금희는 불치병에 걸리기 전에 아내와 갈등을 겪었다.“자세한 건 저도 모르는데, 조금희 씨가 우리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젊은 여자가 항상 와서 돌봐줬어요. 그러다가 부인이 병원에 찾아와 그 아가씨를 때렸고요. 그 일은 병원 사람들 다 알아요.”‘그렇다는 건 조금희가 바람을 피웠다는 거네?’조금희가 이런 사람일 주은 생각지도 못했다.윤지은은 여간호사에게 돈다발을 건넸다. 그러자 간호사는 아주 기뻐하며 떠나갔다.조사를 마친 뒤 우리는 밖에서 식당을 찾았다.식당에 도착한 윤지은은 분석을 시작했다.“조금희 씨가 불치병에 걸렸고, 예전에 아내와 아들한테 잘못을 저질렀다면 혹시 자기가 얼마 못 살 걸 알고 호섭 씨를 배신해 돈을 챙겼던 건 아닐까?”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럴 가능성이 커요. 만약 조금희 씨 계좌에 큰돈이 입금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아쉽지만 이곳은 강북이 아닌 Y시다. 안 그랬다면 윤지은의 인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