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지는 개처럼 한지훈의 바지가랑이를 붙잡고 울고불고 애원했다.굳이 한지훈이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벤츠 점장이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다가가서 서예지의 머리를 발로 걷어찼다."이런 멍청한 년이 네 주제에 손님을 무시해? 너 정말 답이 없는 애로구나? 당장 나가서 죽어! 죽으라고, 이년아! 너 오늘 내 손에 죽을 줄 알아!"분노에 이성을 잃은 점장은 인정사정 없이 발길질을 해댔다. 바닥에 쓰러진 서예지는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이가 부서져 나갔고 입가에도 피멍이 들었다.점장은 다시 한지훈에게 다가가서 고개 숙여 연신 사과했다."한 선생님,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저 년이 혼자 저지른 일이고 제가 엄하게 처벌했으니 제발 우리 매장 살려주세요!"듣다못한 정도현이 다가가서 그 점장을 발로 걷어차며 말했다."네가 무슨 자격으로 한 선생 대신 분풀이를 한다는 거지?""아… 아닙니다! 그런 뜻 아니에요!"점장은 바닥에 다시 무릎을 꿇고 부들부들 떨었다.한지훈은 싸늘하게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아랫사람 관리 못한 것도 잘못이라면 잘못이죠! 사죄의 의미로 오늘부터 10일간 할인 이벤트를 진행하고 찾아오는 손님들을 정성껏 대하세요. 고객은 왕이라는 신념을 직원들에게 확고히 각인시키란 말입니다!"솔직히 점장 입장에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처벌이었다."네! 꼭 그렇게 할게요! 지켜봐 주세요!"점장은 연신 고개를 조아리고는 일어서서 직원들에게 지시했다."한 선생님 말씀 잘 들었지? 앞으로 우리 매장을 방문하는 고객은 신분 막론하고 최선을 다해 대접한다! 조항을 어기는 인간은 바로 해고야! 다시는 이 업계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하겠어!"말을 마친 그는 다시 한지훈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이렇게 하면 되나요?"한지훈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이 새로 구매한 BMW로 다가갔다. 정도현을 지나치던 그가 무심하게 말했다."벤츠 디자인이 정말 구리네요. BMW로 바꿔요. 나도 오늘 샀는데 정말 승차감이 괜찮더라고요. 여기 매장
한지훈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무슨 문제 있어?"그 말을 들은 강신이 더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이거 네가 산 거 맞아? 이 차 최소 2억은 하지 않아? 가문에서 쫓겨난 주제에 무슨 돈이 있어서 이런 비싼 외제차를 샀어? 설마 렌트한 건 아니지?"그 말을 들은 서경히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아들, 네가 잘못 본 거 아니야? 이 차가 2억이나 한다고?"강학주에게 시집와서 강운의 며느리가 되었지만 서경희는 시댁에서 뭐 하나 건진 게 없었다. 평소에 생활비도 넉넉하지 않아서 강학주의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차 한 대에 2억이라는 소리를 들은 그녀는 큰 충격을 받음과 동시에 의심의 눈초리로 한지훈을 쏘아봤다."엄마, 이 차 나도 봤었어. 최신형 BMW 5시리즈야. 시중 가격이 2억이나 한다고! 확실해!"강신은 질투로 시뻘게진 눈으로 한지훈을 바라보며 말했다.‘한지훈 이 자식이 좋은 타를 타고 다니다니! 분명 뭔가 문제가 있는데!’"구경은 다 했어? 난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고운이와 함께 차에서 내린 한지훈은 곧장 집 안으로 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서경희가 다가와서 그의 팔목을 낚아채더니 사나운 표정으로 물었다."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 이 차 자네가 산 거 맞아? 자네가 무슨 돈이 있어서 이렇게 좋은 차를 샀어? 아, 우연이 고년한테서 용돈 받았어? 그 멍청한 년은 프로젝트 맡은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뒷돈을 챙겨? 이거 공금횡령이야!"자신의 생각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서경희는 당당했다.강신 역시 해답을 찾은 것처럼 한지훈의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맞아! 한지훈 너 이 자식 처음 봤을 때부터 인상이 좋지 않았어! 가문에서 버려진 놈은 역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어! 한씨 핏줄이 다 그렇지 뭐. 비열한 자식! 네가 강우연 꼬셔서 회삿돈에 손을 댔지? 큰 프로젝트 맡은 게 이제 며칠이라고 벌써 외제차부터 뽑아? 이러다가 나중에 별장도 사겠다?"강신은 지금 당장이라도 회사로 찾아가 강우연에게
"악! 이 인간이 사람을 죽여요! 한지훈, 너 미쳤어? 당장 내 아들 내려놔! 그거 안 놔?"정신을 차린 서경희가 앙칼진 비명을 지르며 한지훈에게 달려들었다.하지만 한지훈은 꿈쩍도 않고 싸늘한 시선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아빠, 아빠… 나 무서워. 고운이 무서워! 싸우지 마!"옆에 있던 고운이가 울음을 터뜨리며 그의 바지가랑이를 잡아당겼다.아이의 울음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한지훈은 싸늘한 표정으로 서경희를 노려보고는 손에서 힘을 풀었다. 강신은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토해내며 이를 갈았다."한지훈 네가 감히 나를… 네가 감히 나한테! 당장 할아버지한테 가서 이를 거야! 아빠한테 말할 거야! 두고 봐!""그렇게 해."차갑게 대꾸한 한지훈은 고운이를 품에 안고 집 안으로 향했다.강신은 기다시피 해서 겨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서경희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아들, 괜찮아? 엄마 봐봐. 어디 다쳤어?""엄마, 한지훈 저 미친놈이 날 죽이려고 했어! 목 졸라 죽이려고 했다고!"강신은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며 고래고래 소리질렀다."정말 주제를 몰라도 분수가 있지! 아들, 가자! 지금 당장 회사로 가서 한지훈 저놈이랑 강우연이 공금횡령한 사실을 아버님께 전할 거야! 아버님도 사실을 아시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우리가 사실보다 조금 더 과장되게 말하면 당장 강우연 해고하고 널 총책임자 자리에 앉힐지도 몰라!"서경희는 자신의 추측이 정확하다고 확신했다.강신 역시 간사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지금 당장 할아버지한테 가자!"말을 마친 그는 휴대폰으로 차량을 촬영해 증거로 저장한 뒤, 서경희와 함께 강준상의 별장으로 달려갔다.강준상의 별장으로 온 강신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할아버지, 저 정말 억울해서 못살겠어요! 조금 전 한지훈 그 놈이 저를 목 졸라 살해하려고 했어요! 이거 봐요! 목에 자국도 있잖아요!""네, 아버님! 한지훈 그 인간 정말 미친놈이에요
강준상은 경호원들을 거느리고 기세등등하게 강우연과 한지훈의 집으로 찾아갔다.강신과 서경희도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뒤따라갔다.이러한 움직임은 가문의 다른 친인척들에게도 포착되었다. 한지훈이 강우연을 이용해서 회사 공금을 횡령했다는 소문이 급격히 퍼져나갔다. 물론 여기에는 강신과 서경희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가문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룹의 말단 직원들까지 이 소문을 접하게 되었다."설마, 강 부장님이 공금을 횡령해서 남편에게 BMW를 선물했다고?""그게 뭐 이상한 일이야? 강 부장 회사에 처음 왔을 때부터 여우 같다고 했잖아!""프로젝트를 맡은지 이제 며칠이라고 그 많은 돈을 횡령해? 설마 한지훈한테 사기 당한 거 아니야?"그룹 내부에는 이 사건에 대해 술렁이는 소리가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가장 먼저 소식을 접한 강희연은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아빠, 들었어? 강우연이 회사 공금을 횡령해서 한지훈에게 2억짜리 BMW를 사줬대. 지금 할아버지가 노발대발하며 집에 찾아가셨다는데?"신문을 보고 있던 강문복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벌떡 일어났다."정말? 그럼 너무 잘됐잖아! 하늘이 나를 돕는다니까! 빨리, 우리도 구경 가보자! 이번에는 어떻게든 강우연 고년이랑 한지훈을 끌어내려야 해!"잠시 후, 강문복 일가는 부랴부랴 강우연의 집으로 향했다.한편, 강우연은 마당에 무릎을 꿇고 강준상의 분노를 상대하고 있었다. 강준상은 지팡이로 위협적으로 바닥을 치며 호통쳤다."강우연! 사실대로 말해! 저기 저 차, 어떻게 된 거야? 거짓말이 단 한마디라도 섞이면 큰일 날 줄 알아!"강우연은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얼얼한 볼을 만지며 말했다."할아버지, 그 차는 지훈 씨가 산 거 맞아요.""그래서? 가문에서 쫓겨난 백수가 무슨 돈이 있어서 외제차를 사? 그 인간이 너한테 공금 횡령해서 가져다달라고 시켰어? 그 인간이 시킨 거라고 인정만 하면 네 죄는 묻지 않을게. 계속 이렇게 입 다물고 있으면 할아버지도 어쩔 수 없어!"강준상은 음침하게 눈을 부릅뜨며 으
이때, 잠옷차림을 한 고운이가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왔다. 소란에 깬 것 같았다.아이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엄마를 보자 다급히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작은 몸으로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우리 엄마 괴롭히지 마! 이 나쁜 사람들! 당신들 다 나쁜 사람이야!""고운아!"강우연은 딸을 품에 꼭 끌어안고 두려운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하! 하나는 미친년이고 하나는 더러운 핏줄이네? 이 인간들을 우리 가문에 들이는 게 아니었어!""강우연, 이제 그만하고 솔직하게 털어놔! 안 그러면 저 꼬마랑 같이 짐 싸서 쫓겨날 줄알아!"고운이는 침착하게 손을 뻗어 엄마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엄마, 울지 마. 아빠가 우리 지켜준다고 약속했어.""야, 꼬마야! 너 지금 꿈 꾸니? 무능한 네 아빠가 무슨 수로 너희를 지켜줘? 그래서 너희 아빠 지금 어디 있는데? 혼자 도망갔을걸?"설해연이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아니야! 우리 아빠 고운이랑 엄마를 두고 도망갔을 리 없어! 아빠가 꼭 돌아와서 지켜준다고 약속했단 말이야!"강우연의 품을 벗어난 한고운은 설해연에게 달려가서 작은 손으로 힘껏 그녀를 밀치며 반박했다. 놀란 설해연은 다급히 뒤로 물러서다가 중심을 잃고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이 잡것이 어디서! 어쩐지 멍청한 네 아빠를 꼭 닮았네! 넌 오늘 내 손에 혼날 줄 알아!"분노한 설해연은 일어서자마자 손을 들어 고운이의 뺨을 때렸다.묵직한 힘에 고운이는 바닥을 구르며 쓰러졌고 입가에 피가 스며나왔다. 아이의 하얀 볼에는 뻘건 손자국이 찍혔다."아… 아파…."고운이가 울음을 터뜨렸다."고운아!"그 모습을 본 강우연은 바로 달려가서 아이를 품에 안았다."고운아, 괜찮아? 어디 안 다쳤어?"아이의 입가에 배어난 피를 보자 강우연은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설해연을 쏘아보았다."당신이 뭔데 내 딸을 때려요!"설해연은 잠깐 당황하나 싶었지만 이내 팔짱을 끼고 거만하게 말했다."애가 예의 없이 굴면 맞아야지! 이래
그 사나운 기세에 강씨 가문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한지훈이 한 걸음씩 가까워질 때마다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를 마주한 듯 그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전혀 숨길 생각도 없는 날카로운 살기에 짓눌린 사람들은 행여 자신에게 불똥이라도 튈까 봐 저마다 몸을 사렸다.모녀는 땅에 엎드린 채 서로를 감싸 안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한지훈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제 아버지를 발견한 아이는 한걸음에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아이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아빠, 저 사람들이 엄마랑 고운이를 괴롭혔어. 흑흑..."한고운을 안아 든 한지훈은 아이의 뺨에 난 커다란 손자국을 발견하고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싸늘한 시선으로 주위를 훑어본 그가 소리쳤다."누가 감히!"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강씨 가문 사람들은 혼비백산하며 숨을 자리를 찾기 바빴다. 겁을 잔뜩 먹은 설해연도 마찬가지였다.한지훈의 기세에 모두 몸을 벌벌 떨었다. 그와 눈조차 제대로 마주칠 수 없었거니와 변변찮은 저항도 할 수 없었다."다시 묻겠습니다. 누가 고운이를 이 꼴로 만들었습니까!"한지훈의 두 눈은 분노로 번들거리고 있었다.자그마치 오 년이다. 그동안 강우연과 딸 고운이는 너무도 많은 상처를 받았다. 두 사람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한 주제에 지금, 이 꼴은 다 뭐란 말인가, 딸아이가 뺨을 얻어맞다니! 한지훈은 가슴이 미어지는 동시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북양구 총사령관의 딸이었다. 용국의 공주님과 마찬가지인 아이가 누군가에게 이런 폭력을 당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이곳이 아니었다면 한고운에게 손을 댄 이는 진즉 사지가 찢겼을 터였다.한지훈의 사나운 고함에 사람들은 일제히 설해연에게 눈길을 던졌다. 더는 숨을 곳이 없다고 판단한 설해연은 뻔뻔하게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녀가 오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맞아, 내가 그랬어.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설마
자신 때문에 무릎을 꿇은 강우연을 보며 한지훈은 가슴이 아팠다. 그녀는 한결같이 착하고 가냘팠다. 마치 강씨 가문 사람들의 악마와 같은 본성은 전혀 알지 못한다는 듯이."우연아, 일어나. 나 때문에 이 사람들에게 무릎 꿇을 필요 없어."한지훈은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 손을 뻗었다.짝!그러나 몸을 일으킨 강우연은 한지훈의 뺨을 때리며 고통스럽게 절규했다. 두 볼엔 눈물 자국이 흥건했다."지훈 씨, 제발 좀 그만 해요! 언제까지 이럴 건데요? 당신 때문에 5년 동안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데... 내가 다시 돌아오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제발 더는 일을 키우지 말란 말이에요!"눈시울을 잔뜩 붉힌 강우연이 한고운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지훈 씨, 고운이는 내 딸이에요. 내 아이라고요. 그러니 지훈 씨가 뭔가를 해줄 필요는 없어요. 우리가 대체 무슨 사이라고요! 물론 그날 나를 위해 나서주고, 그동안 고운이를 아껴준 건 고맙게 생각해요.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건 다 당신 때문이잖아요!"강우연은 아예 목 놓아 울어버렸다. 5년 동안 겪었던 수모들, 요 며칠 사이 강씨 가문에서 당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마침내 감정이 둑 터지듯 쏟아졌다.그녀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5년 사이, 강우연은 주변 사람들의 싸늘한 시선과 비웃음, 욕설을 홀로 견뎌야 했다. 강씨 가문에 돌아가면 상황이 좀 나아지려나 싶었으나 그녀의 헛된 바람일 뿐이었다.한지훈의 한쪽 볼에 선명한 손자국이 나 있었다. 그는 멍하니 서서 엉엉 울음을 터뜨리는 강우연을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심장이 날카로운 칼에 베인 것처럼 고통스러웠다.단지 강우연을 아껴주고 지켜주며 그녀에게 모든 걸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니, 무언가 잘못된 것만 같았다."우연아, 내가 미안해."사과를 내뱉는 한지훈의 눈에 자책의 감정이 가득 서렸다.강준상이 차갑게 코웃음 치며 말했다."대답해 보거라. 저 차는 대체 어떻게 된 거야!"의심
한지훈은 입을 다물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 망설이는 기색이 서렸다.마음 같아서는 강우연에게 모든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에겐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걸핏하면 목숨을 걸어야 하거나 누군가의 원한을 살 만한 몹시도 위험한 일들이었다.물론 한지훈은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매 순간 강우연과 한고운의 곁에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지금으로선 사사로이 북양구 삼십만의 사병들을 움직일 수도 없었고, 삼천 명의 신룡전 인재들을 귀국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리스크가 너무 크기 때문이었다.용각 원로들은 용일을 통해 지난 사건을 주시하고 있다는 의사를 넌지시 표명했다. 비록 책망하진 않았으나 그들은 은근히 경고를 보냈었다.북양구 총사령관이 삼십만 사병을 움직였으니 용국에서 충분히 경계할만했다. 높으신 분들에게 불안을 조성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으니.여전히 침묵을 지키는 한지훈을 바라보는 강우연의 눈시울이 또다시 젖어 들기 시작했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떨어지는 눈물을 감춘 그녀는 크게 심호흡했다."됐어요. 말하기 싫다면 강요하지 않을게요. 지훈 씨, 난 혼자서도 충분히 잘 지낼 수 있고 고운이를 잘 키울 수도 있어요. 만약 지훈 씨가 정말 고운이의 아빠가 되고 싶은 거라면, 더 많은 시간을 아이에게 투자하고 나랑 아이에게 정말로 필요한 게 뭔지 고민해 봐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그리고 내게 필요한 건 저런 차가 아니라..."차마 그다음 말을 내뱉지 못한 강우연은 아이를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쾅, 거친 소리와 함께 방문이 굳게 닫혔다. 좁은 거실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한숨을 내쉰 한지훈은 정원에서 쓸쓸하게 담배를 피웠다.강우연의 마음을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모녀에게 필요한 건 물질적인 보상이 아니라 진정으로 두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해 주는 마음이었다.십 분 사이에 한지훈은 담배를 다섯 대나 태웠다. 불현듯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풀메이크업에 클러치백을 멘 강우연이 걸어 나왔다.
“미안하지만, 정말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한지훈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건 의도적으로 체면을 구기려는 것도 아니었고, 정말로 진천국이라는 인물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한지훈이 귀담아들을 만한 사람이라면, 최소한 오대명산의 각 원장 정도는 되어야 했다.그 외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름조차 들을 필요가 없었다.국제적으로 유명한 인물이라 해도, 한지훈 앞에 오면 누구 하나 예를 갖추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심지어 국가 원수들조차도 한지훈은 이름을 외울지 말지 고민할 정도였다.전 세계에 백여 개국이 있는데, 한지훈이 언제 그들 이름을 다 외우겠는가?한지훈의 경지에 이르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덧없게 느껴지며, 신분이나 지위 따위는 그저 덧없는 한때일 뿐이었다.“당신이 지금 누구와 얘기하는 줄 아는 거요?!”옆에 있던 소 씨 노인은 즉시 분노에 차서 책상을 치며 차갑게 소리쳤다.진천국은 산성에서 손꼽히는 인물인데, 한지훈이 그런 인물을 모른다고 하다니?이건 노골적으로 진천국의 체면을 짓밟는 행위였다!하지만 소 씨 노인이 말끝을 맺기도 전에, 진천국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젊은이, 나도 젊었을 땐 거만하긴 마찬가지였지. 하지만 세상을 우습게 보면 안 돼.”진천국은 상위자의 태도로 차갑게 훈계했다.“용건이 뭡니까?”한지훈은 진천국을 전혀 상대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한지훈이 이렇게 직설적으로 나오자, 진천국은 속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한지훈이 거만하긴 했지만, 그만큼 기개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그럼 나도 본론부터 말하지. 처음엔 당신이 그냥 작은 가게 주인인 줄만 알았는데, 아까 당신의 태도에서 뭔가 좀 특별함을 느꼈소.”“하지만 나씨 가문에서 어떤 이득을 줬든 간에, 당신 따위가 우리 진씨 가문의 일을 망칠 순 없소. 내 딸도 당신 같은 사람이 넘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오!”“그러니 우리 서로 체면 구기지 않으려면, 하나의 제안을 제시하지. 지금 당장 가능한 한 멀리 떠나시오, 그리고 다시는
온갖 옥기들이 진열된 이 옥기 상점은, 얼핏 보기엔 평범한 옥들뿐이었고 그 흔한 최상급 옥도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이렇게 별 볼 일 없는 가게를 지키며 겨우 연명하고 있는 사람이 대체 무슨 대단한 배경이 있겠는가?한눈에 보기에도 이 가게의 주인은 겨우 입에 풀칠하며 살아가는 밑바닥 인생일 터였다!어차피 영기가 되돌아온 이후, 조금이라도 배경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각 대종문에 의탁했고, 일부는 오대 명산의 외부 제자가 되기도 했다.장사를 한다 해도 영기 회복 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게 됐다.그런데 지금까지도 이런 이름 없는 작은 가게를 지키고 있다는 건, 딱 하나를 의미했다. 이 가게 주인은 아무런 배경도 의지도 없는 인물이라는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한지훈이 뒷마당에서 현관으로 나왔다.한지훈이 소박한 옷차림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진천국의 미간은 더 깊이 찌푸려졌다.한지훈의 옷차림만 보고도, 진천국은 그에 대한 인상이 한두 단계 더 추락했다.“휴, 저 사람은 너무 평범해 보이지 않소! 요즘엔 병왕계에 오른 사람도 널렸는데, 저런 사람은 정말 보기 드문 케이스지요!”진천국은 한숨을 쉬며 소 씨 노인에게 말했고, 소 씨 노인도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물론 영기 회복 이후에도 세계 각국에는 여전히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존재하긴 했지만, 용국은 유독 달랐다. 용국은 기운을 품은 나라였기에, 용국 대지 전체가 거대한 변화를 겪은 것이다!심지어 일반 백성이라도 체력이 조금만 받쳐주면, 저절로 병왕계로 돌파하는 것이 가능해졌다.즉, 용국의 거리에서 젊은이 하나를 아무나 붙잡는다 해도, 무종에 입문했든 아니든 최소한 병왕계의 실력은 가지고 있었다!그런데 한지훈은 어쩐지, 완전한 일반인인 것 아닌가?그때, 한 젊은 여자 직원이 조심스레 진천국 쪽을 흘끗 바라보았다.진천국이 처음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부터 그녀는 이 두 사람이 결코 선량한 손님이 아니라고 느꼈다.이 사람들이 한지훈에게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려 한다면, 그녀는 분
진천국은 바로 이러한 고려 끝에, 갑작스럽게 이 일에 진지하게 대응하게 된 것이었다.“음, 진 씨 형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진씨 가문이 부흥한다면 손해를 보는 건 나씨 가문일 테니까요. 하지만 제 생각엔 그 옥기점 사장은 나계홍 손에 놀아나는 한낱 졸개에 불과할 겁니다!”“만약 진 씨 형님께서 부적절하다고 느끼시면, 저는 형님과 함께 그놈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소 씨 노인이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가 보기엔, 그 작은 옥기점 사장은 분명 나씨 가문 쪽에서 무언가를 받아먹고, 나씨 가문 사람들과 짜고 이 한바탕 연극을 벌이고 있는 것뿐이었다. 단지, 진씨 가문과 장씨 가문의 혼인을 방해하기 위해서 말이다!“좋습니다. 장씨 가문 쪽에서도 이미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해왔고, 장 도련님이 선이를 꽤 마음에 들어 한다더군요. 지금 모든 준비는 끝났고, 이제 바람만 불어주면 됩니다. 이 중요한 시점에 절대로 어떤 변수도 생기게 해선 안 돼요!”진천국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나계홍이란 자는, 워낙 생각이 치밀해서 아무나 선택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설령 위장이라 해도, 나계홍이 그렇게 쉽게 누군가에게 예를 갖추는 성격은 아니잖습니까.”“그러니 저희가 만일을 대비해서 준비를 또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소 씨 노인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고, 이에 진천국은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말했다.“그럴 필요 없습니다. 저는 줄곧 그 사람을 몰래 감시하게 해왔고, 지금까지의 결과를 보면 적어도 그가 오대명산과는 전혀 연관이 없다는 건 확실합니다.”“설령 자잘한 종문들과 조금 교류가 있다 해도, 우리 진씨 가문은 그런 것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요.”“더군다나, 장씨 가문을 감히 거스를 수 있는 종문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장령풍은 단순히 장씨 가문의 재능 있는 젊은이일 뿐만 아니라, 믿을 만한 정보에 따르면 장령풍은 반보 인왕계 강자의 자손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장도령이 사망한 뒤, 장씨 가문이 장령풍을 온 힘을 다해 양성하고
진선은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들어선 이가 소 씨 노인임을 확인했다. 그녀는 이어질 상황을 짐작하며 아버지와 소 씨 노인이 또다시 자신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끝없는 잔소리를 늘어놓을 것을 예감했다.그래서 그녀는 황급히 말을 꺼냈다. “아빠, 옥기점에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많아요. 전 먼저 갈게요!”진선은 말을 마치고는 바로 뒤돌아 나가 버렸고, 진천국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지난 반년 동안 그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진선과 장령풍의 혼인을 성사시키려 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진선은 장씨 가문의 이 절세 천재에게 전혀 호감을 보이지 않았다.진천국이 아무리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설득해도, 진선은 전혀 꿈쩍하지 않았다.사실 진씨 가문 역시 무도 세가였다.수십 년 전, 용국의 무종이 조정의 억압을 받으면서 진씨 가문은 무도를 버리고 상업으로 전환한 것이다.그러나 영기가 부활하고, 역외의 강자들이 속속 돌아오면서 세상은 다시 수백 년 전 무종이 독주하던 시대로 회귀하는 듯한 기세였다.이에 진천국은 다시 무종 문파에 의지해보려는 생각을 품었다.하지만 오대 명산이나 장씨 가문 외의 다른 무종 문파들은 그에 비해 전혀 쓸모가 없었다.게다가 진씨 가문 조상 대에 이미 장씨 가문과 인연이 있었기에, 장씨 가문에 기대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선택이었다!진선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해도, 진씨 가문은 장씨 가문의 위세를 빌어 재기할 수 있다.그때가 되면 진씨 가문은 틀림없이 비상하여, 더는 이 산성 같은 촌구석에서 연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소 씨 어르신, 사실 지난 1년 동안 선이는 한 옥기점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제가 알기로는 그 옥기점의 주인에게 약간의 감정이 있는 듯합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진천국은 평소 소 씨 노인과 허물없이 대화하곤 했기에, 이 일 역시 숨김없이 털어놓았다.사실 이 일이 장씨 가문과 관련이 없더라도, 그는 체면이 깎여 몹시 불쾌했다.무엇보다 그 옥기점의 사장은 이미 아내와
이 둘과 비교하면, 기자인 그녀는 마치 한 줌 모래처럼 미미한 존재였다.임설의 얼굴에 두려움이 떠오르자, 유 씨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아, 사실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지금의 용국은 이미 몇 년 전의 용국이 아니야. 너도 알겠지만, 내 뒤에는 오대 명산이 있단 말이지.”“우리 오대 명산이 널 지지하는데, 뭐가 두려운 것이냐? 설령 용국 조정이라도 감히 우리를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그리고, 그날의 대화는 줄곧 내가 한 말이었으니 잡으려면 나를 잡는 거지, 널 잡을 일은 없다.”임설은 그 말을 듣고 다소 안심한 듯 보였으나, 여전히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렇지만…… 유 씨 어르신, 그건 전부 어르신의 추측일 뿐이에요. 우리 손엔 아무 증거도 없잖아요!”“증거? 증거가 그렇게 중요해?”유 씨 노인은 냉소하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무종 전체가 내 말에 동의한다면, 그게 바로 증거지!”비록 천릉자가 대량산에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지만, 한지훈의 명예를 실추시키기만 한다면 국왕은 가장 중요한 의지를 잃게 된다.바로 이때, 국왕의 자리를 노린다면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이때, 산성시.산중에 위치한 호화로운 별장에서, 검은색 양복을 입은 중년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젊은 여인에게 말했다.“선아, 며칠 전 장 도령께서 놀란 일이 있었단다.”“우리 천산 장씨 가문과는 대대로 교류가 깊었지. 어떤 의미에서든, 넌 가서 한 번은 그를 봐야 하지 않겠니?”“그리고 네 신분도 좀 자각해야 해. 진씨 가문의 큰 아가씨가 어찌 그리 속된 백성들처럼 옥기점 같은 데서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냐!”이 중년 남자의 이름은 진천국, 산성 진씨 가문의 가주였다!진천국이라는 이름은 산성 전체에서 거의 군왕이나 다름없는 존재다.특히 영기가 되돌아온 이후, 진천국의 사문은 현재 산성 최대의 종문인 천앙종이었다!게다가 진씨 가문은 지금 천산 장씨 가문과 우호 관계를 다져가며, 혼인을 추진하려 하고 있다.만일 혼인이 성사된다면, 진씨 가문은
사실, 한지훈이 산에 들어서는 길목에서 이미 유 씨 노인의 말을 다 듣고 있었다.오대명산과 무종 사람들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어찌 한지훈이 모를 수 있을까!최근 이 시기 동안 천릉자의 기세가 드높다는 건, 곧 오대명산이 천릉자를 내세워 한지훈이 용국에 세운 공적을 지우려는 의도임을 뜻한다.게다가 이 기회에 국왕의 지위마저 위협하려는 것이었다.개인의 영예나 치욕 따위는 한지훈에게는 이미 중요하지 않았지만, 누구든 국왕의 권위를 흔드는 일만큼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오대명산의 계략을 깰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천릉자의 기세가 가장 드높을 때 정면으로 한방 먹이는 것이었다!그리고, 천릉자가 살해당한 사건은 과연 큰 파장을 일으켰다!그 전에 오대명산은 이 일을 공개적으로 보도하게 하려고 수많은 언론 기자들을 초청했다.하지만 정작 결과는, 제 발등을 찍는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현장에 와 있던 언론사 수가 너무 많았고, 모두가 생중계로 현장을 전국의 시청자들에게 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게다가 수많은 인플루언서들까지 합류하며 정보를 봉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이 사건은 마치 다리가 달린 듯, 하룻밤 사이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흥! 정말 웃기는군. 그 따위가 어찌 한지훈과 견줄 수 있단 말인가? 한지훈보다 깨달음이 뛰어나다고? 타고난 자질이 낫다고? 결국 누가 죽였는지도 모른 채 죽어버렸잖아!”“흥, 내 보기엔 그냥 날뛰는 광대였을 뿐이지!”“날뛰는 광대? 그래도 광대는 멀쩡한 머리를 잃진 않겠지! 하하하…”온라인에서는 조롱이 난무했고, 항산의 사람들은 아예 모습을 드러낼 엄두도 내지 못했다.한순간에 오대명산의 기세는 급격히 꺾이고 말았다.그 뒤 한 달 동안, 모든 이들의 화제는 이 사건에 쏠렸다.오직 한지훈만이 조용히 천생서문에 기록된 내용을 따라 진지하게 약제를 조합하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그에게는 강우연이 천신계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이런 화제들보다 훨씬 더 중요했다.게다가 천하 정세는 이미 크게 변하고 있었고,
그들은 누군가가 도중에 강탈할 거라는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고, 오히려 장령풍이 자소화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는 약속대로 천릉자에게 져주지 않을 가봐 걱정됐다. “여러분, 드디어 가장 관건적인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과연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됐을지 함께 알아봅시다!”한 인터넷 BJ는 생방송을 켜고는 팬들을 향해 말했다. 그렇게 시간은 1분 1초가 흘렀고, 모두들 손꼽아 승패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 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산 길에서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걸어 나왔다. 다만, 천릉자와 장령풍 두 사람의 종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사고라도 난 건 아니겠죠? 장 사부님이랑 천릉자 사부님은 왜 여태까지도 나오지 않는 거죠?”임설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사실 또 다른 가능성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두 사람이 너무 격렬하게 싸운 나머지 모두 중상을 입어 전혀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지는 않을 거야. 필경 모두 동문 사람이기에 두 사람이 한판 붙게 된다 하더라도 반드시 어느 정도 여지를 남겨둘 거야!”유 씨 어르신은 확신에 가득 찬 말투로 말했다. 알다시피 이번 대결은 5대 명산이 함께 손을 잡고 벌인 판이다. 게다가 천산 장 씨 집안도 이 계획에 얽혀있었기에, 절대 어떠한 실수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주위에는 또 수많은 고수들이 지켜보고 있을 텐데, 의외의 사고란 발생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유 씨 어르신의 말이 떨어지기도 바쁘게, 산길에서는 어두운 안색의 항산 제자 4명이 단대 하나를 들고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내려오고 있었다. 이내 카메라들은 일제히 그 단대에 초점을 뒀고, 모든 기자들은 순간 숨을 죽였다. 단대 위에는 머리 없는 시체 한 구가 누워 있었고 옆에는 웬 동그란 물건이 놓여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고 나서야,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바로 천릉자의 머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른 한편, 몇 명의 장 씨 집안 자제들 역시 단대 하나를 들고는 산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장령풍
그러나 한지훈은 장령풍을 투명 인간 취급한 체 눈 깜짝할 사이에 숲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한지훈이 멀어질 때까지, 장령풍은 여전히 깊은 공포 속에 빠져 있었다. 사실 천릉자는 실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방금 그와의 정면승부에서, 그는 천릉자의 털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두 사람의 실력은 그야말로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천릉자의 촘촘한 검망을 깨뜨려 그의 머리를 아작 낸다는 건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최선을 다해봤자 기껏해야 천릉자에게 상처만 입힐 거라 확신했다. 천릉자를 죽이는 건 하늘의 별 따기보다도 더욱 어려웠다. 모두들 알다시피 검망 아래에서는, 수천 갈래의 검의 습격을 마주해야 했다. 그 검망을 피해 사람을 죽이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그 검방을 피하는 것조차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설사 2성 천신계 강자라 하더라도 밀집된 검망을 마주하게 되면,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게 되고 더욱이는 천릉자를 사지로 몰아넣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지훈은? 오직 나뭇잎 하나만으로, 마치 어린애 장난처럼 닥치는 대로 나뭇잎을 던져 천릉자의 머리를 아작 냈다. 지금 이 순간, 산 전체는 비할 데 없이 조용했다. 한지훈이 멀어질 때까지 장령풍은 줄곧 조용히 땅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고 있었다. 그는 심지어 감히 고개 한번 들어 앞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그렇게 30분이 흐르고 나서야 장령풍은 고개를 살짝 들었다. 한지훈의 자취가 더 이상 보이지 않자, 그는 비로소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익숙한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장령풍, 오늘 벌어진 일을 소문내면 장 씨 집안은 멸망하게 되는 줄 알아!”“네... 저는... 아무것도 못 본겁니다!”크게 놀란 장령풍은 벌벌 떨었다. 한지훈의 경고는 그에게 있어서 성지였다. 한지훈은 뱉은 말은 무조건 지키는 사람이라는 걸,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유럽은 용경과는 80리 정도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오직 용국을 위해 복수
게다가 사방에서 한지훈을 헐뜯고 있는 발언들에 대해, 장령풍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한지훈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고, 몇몇 명산 모두가 그의 적이었다. 그렇기에 한지훈이 남의 도움을 받았다는 얘기 자체는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역외 강자조차도 흔들 수 없는 거물을, 누가 감히 건드리려 하겠는가? 그러나 옆에 있던 천릉자는, 장령풍의 표정 변화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한지훈의 정체가 뭐든, 자신이 쟁취해야 할 성과를 이대로 빼앗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내 그는 장령풍과 상의도 하지 않고 바로 손을 들었다. 곧이어 그물처럼 촘촘한 검망이 한지훈의 정수리 위에 펼쳐졌다. 그는 단 한 방에 한지훈을 산산조각 내어,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을 건드리면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줄 작정이었다. 온 하늘을 덮은 검망에도, 한지훈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닥치는 대로 나뭇가지에서 잎사귀 하나를 따냈다. 그러고 나서는 천릉자가 서있는 쪽으로 잎사귀를 가볍게 던졌다, 곧장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잎사귀에, 제대로 화가 난 천릉자는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다. 잎사귀로 사람을 다치게 하는 건, 무종 모든 종사들의 장기였다. 그러나 종사계의 실력은, 그저 전신계와 같을 뿐이었다. 그런데 일성 천신계 고수인 자신이 뜻밖에도 전신계 같은 땅강아지한테 무시당하게 될 줄이야? 생각할수록 더욱 화가 치밀어 오른 천릉자는 곧바로 또 하나의 검망을 휘두르며 사악한 웃음을 보였다. “네 이 녀석, 천신계 강자를 상대로 도전장을 내밀면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지 오늘 내가 제대로 보여주마!”“죽어!”지금 이 순간, 천릉자는 이미 한지훈을 죽은 사람으로 취급했다.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눈 깜짝할 사이에 한지훈은 산산조각 나게 될 것이다. 예상치 못한 눈앞의 상황에 장령풍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전에 이미 한지훈의 전력을 직접 목격했었다. 모든 전투에서, 한지훈은 오릉군 가시를 던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