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이 지유에게 200억이 담긴 카드를 줬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승아는 다 조사해 봤다. 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이현이 지유를 별로 챙기지 않는다고 말이다.이현의 비서로 7년이나 있었는데 이현은 여전히 지유를 거들떠보지 않고 있다.만약 이현이 정말 지유를 좋아하는 거라면 결혼한 사실을 숨기지 않고 떳떳하게 두 사람의 관계를 공개했겠지.승아는 지유가 이현 몰래 스폰서를 찾은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이유를 믿더라도 이현이 돈을 줬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내 조카가 조카며느리한테 돈 좀 쓰는 게 어때서? 다른 설명이 필요한가? 승아 씨가 갖지 못한다고 다른 사람도 갖지 못하는 건 아닌데 말이죠?”순간 두 사람의 대화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비녀로 머리를 얹은 여희영이 검은 드레스를 입고 매혹적인 자태를 뽐내며 걸어오고 있었다. 거의 오십이 되는 나이었지만 몸매는 여전히 잘 관리되어 있었고 세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작은 고모님.”여희영을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던 지유가 웃으며 불렀다.여희영이 웃으며 말했다.“옷 좀 사러 나왔다가 너를 만날 줄은 몰랐네.”여희영은 이현의 하나뿐인 고모였다.할아버지가 제일 아끼는 막내딸이었다.자유로움을 좋아하는 여희영은 여씨 본가에서 지내지 않고 여행 다니기 좋아했다.만나려면 정말 인연이 닿아야만 했다.저번에 본 건 작년이었다.그것도 스치며 한번 만났다.“언제 들어오셨어요? 소식 못 들었는데.”지유는 여진숙과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고모인 여희영과는 잘 맞았다.여희영의 사상이 오픈 마인드라 젊은이들과 비슷했다.하여 지유는 그를 선배가 아니라 친구로 대했다.“들어온 지 얼마 안 됐어. 이게 인연 아니겠어?”여희영도 열정적으로 지유에게 인사를 건넸다.승아는 이런 곳에서 여희영을 만날 줄은 몰랐다.여희영은 이현과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승아도 여진숙보다 여희영과 더 잘 지내고 싶었다. 여씨 집안 사람들과 잘 지내야 여씨 집안에
승아는 거기 멈춰 선 채 억지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고모님, 혹시 다른 일 있어요?”여희영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옷 사러 온 것 같은데, 그 옷 본인이 입을 거 아니죠?”노승아의 얼굴이 굳었다.“네, 선물하려고 산 거예요.”여희영은 다 알고 있었지만 톡 까놓고 얘기하기는 싫어 앞으로 팔짱을 끼며 차갑게 쏘아붙였다.“노승아 씨, 공인으로서 어떤 일은 해도 되고, 어떤 일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 알아야죠. 어떤 일은 말하지 않는 게 아니라 노씨 집안 체면을 생각해서 눈감아주는 거지 내가 동의한 건 아니에요. 뭐든 다 까밝혀지고 나서 후회하지 말라는 말이죠. 나는 여진숙이 아니니까 허튼수작 부릴 생각 마요.”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던 승아는 여희영의 말에 눈시울이 빨개지더니 주먹을 꼭 쥔 채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잘 알겠습니다. 고모님.”여희영은 그런 승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코웃음을 쳤다.승아는 모욕받았다는 생각에 다리에 힘이 풀렸고 매니저의 부축을 받으며 매장을 나섰다.“지유야, 오랜만에 만났는데 뭐 좀 마시자.”여희영이 웃으며 말했다.“좋죠. 옆에 카페가 하나 있는데 거기로 가요.”둘은 카페로 향했다.여희영은 여씨 본가에서 지내진 않았지만 늘 이현과 지유를 걱정했다.“현이랑 결혼한지도 3년이 되어가는데 아이 가질 생각 없어?”지유가 멈칫하더니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여희영은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지유야, 나는 슬하에 아이가 없잖니. 현이가 내 아들이나 마찬가지야. 나는 너희들이 빨리 손주 안겨줬으면 싶은데. 내 친구 중에 나보다 나이가 어린 애들도 벌써 손주 있더라.”지유는 커피만 홀짝거렸다.이현은 여희영과 사이가 좋았고 친모인 여진숙보다 고모 여희영을 더 잘 따랐다.여씨 집안은 사실 관계가 조금 복잡했다.이현도 어릴 때 여씨 집안에서 자란 게 아니었다.이현이 여씨 집안으로 오게 된 것도 여희영 덕분이었다.여진숙은 이현을 별로 상관하지 않았고 그에게 오히려 차가웠다.
그냥 사랑하지 않을 뿐이다.여희영은 그녀와 이현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할지는 몰라도 이현이 지유와 있으면 행복한지가 중요했다.하지만 여희영은 지유의 의도를 오해했다.“나 고작 두 마디 했는데 그래도 남편이라고 편드는 거야? 지유야, 너 현이 많이 사랑하는구나. 그것도 현이 복이라면 복이지.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찾아봐도 어디서 너처럼 좋은 색시를 얻겠어. 어릴 때 고생을 많이 했으니 커서라도 복 좀 받아야지.”지유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어릴 때 잘 못 지냈나요?”우월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일반인보다 행복해야 맞다.여희영의 표정이 살짝 변하더니 이내 다시 웃으며 말했다.“그 일은 넘어가자. 현이도 그때 얘기하는 거 싫어할 거야. 난 그냥 너희들이 빨리 손주나 안겨줬으면 좋겠다.”여희영은 은퇴하면 집에서 손주를 볼 생각이었다. 지금은 그저 친구들을 부러워하고 있지만 그녀에게도 손주가 생기면 데리고 나가 실컷 자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승아는 광고 촬영 중이었지만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여희영에게 한 소리 들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거기다 저혈당 증상까지 보이고 있었다.이현은 마침 순찰하다가 승아가 한편에 앉아 많은 사람의 보살핌을 받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는 시간관념이 강한 사람이었기에 시간을 한번 확인하더니 무슨 문제가 생긴 걸 발견하고 그쪽으로 다가갔다.“무슨 일이죠?”승아의 매니저가 이현을 발견하고는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승아 언니 몸이 안 좋아요.”이현의 목소리가 차가웠다.“어제까지 괜찮았잖아요.”매니저가 승아를 힐끔 보더니 투덜거렸다.“오전에 언니 데리고 쇼핑하러 갔었거든요. 대표님께 고맙기도 하고 날씨도 추워져서 코트 한 벌 선물하려고 갔는데 온지유 씨를 만났어요...”승아가 매니저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허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만해. 나 괜찮아.”이현은 승아의 창백한 얼굴과 빨개진 눈시울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매니저가 말을 이어갔다.“아까
이를 들은 이현이 깜짝 놀라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디에요? 지금 거기로 갈게요.”“대표님, 혹시 무슨 일 있어요?”승아는 어딘가 많이 다급해보이는 이현에게 물었다.“지유한테 사고가 났대요.”이현은 승아를 거들떠볼 새도 없이 바로 뛰어갔다.승아는 그렇게 허둥지둥 달려가는 이현의 뒷모습을 보며 그가 지유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승아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아까 만났을 땐 멀쩡하던 지유가 마침 사고가 났다고?선물한 쇼핑백이 그 자리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걸 보고 승아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옆에 선 매니저가 이렇게 말했다.“몇 시간 전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사고는 무슨? 그냥 대표님이 여기 있는 거 알고 일부러 방해하려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승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그래도 체면을 지키려 이렇게 말했다.“그렇게까지야 하겠어? 지유 씨 그렇게 속 좁은 사람 아니야. 진짜 무슨 사고가 났을 수도 있어. 내가 가서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언니, 언니는 너무 착해요. 나는 온지유 씨가 만만치 않아 보이던데.”매니저가 말을 이어갔다.“그러니 언니도 참고만 있지 마요. 대표님은 옆자리는 원래 언니였어요. 온지유 씨가 그 자리를 빼앗은 거고. 온지유 씨만 아니었어도 진작에 대표님과 다시 이어졌을 텐데.”매니저는 지유를 깎아내리며 승아 편을 들고 있었다.소식을 듣고 온 곳은 한 호텔이었다. 허둥지둥 위로 올라가 스위트룸에 쳐들어간 이현이 큰 소리로 외쳤다.“온지유!”들어가 보니 지유가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주변을 빙 둘러봐도 위험한 구석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이현은 방 구석구석 열심히 검사했다. 그러더니 침대맡으로 걸어가 이렇게 소리쳤다.“온지유!”잠에서 깬 지유가 이현을 보고는 일어나 앉았다.“이현 씨가 왜 여기 있어요?”아까 여희영과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는데 여희영이 갑자기 앉아 있는 게 힘들다며 근처에 있는 호텔로 가자고 했다.지유는 여
여희영은 문을 막아선 채 이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이현은 여희영을 보고 걸음을 멈춘 채 표정을 정리하더니 이렇게 말했다.“고모.”“내가 네 고모긴 하니?”여희영은 이현이 내뱉은 말을 들어줄 수가 없어 이렇게 나무랐다.“지유를 혼자 버려두고 그 노승아라는 세컨드를 찾으러 가는 거야?”이현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렇게 반박했다.“들리는 소문이 다 사실은 아니에요. 그런 말은 앞으로 하지 마세요.”지유는 이를 듣고 씁쓸하게 웃었다.언제 어디서나 이현은 승아를 감싸고 돌았다.여희영은 믿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내가 너를 몰라? 그 여자 말고 네가 지유를 버리고 갈 이유가 뭐가 있어? 뭐래? 당장 죽기라도 한대? 오늘은 절대 못 나가. 남아서 지유 보살펴 줘.”여희영의 태도는 꽤 딱딱했다.이현은 그래도 여희영은 존중하는 편이었기에 인내심 있게 대답했다.“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요.”“회사가 망한다 해도 못 가.”여희영이 경고했다.“지유보다 더 급한 일이 어디 있어. 지금 일 처리 안 한다 해서 회사가 망할까? 잘 생각해. 지유야말로 너의 와이프야. 다른 여자는 죽든 말든 너랑 아무 상관이 없다고.”이현이 이대로 계속 막 나갔다가 지유가 마음을 접기라도 하면 더는 손 쓸 수가 없는 지경이 되고 만다.여희영은 이현이 자기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고 별 볼 일 없는 여자에게 정신이 팔렸다가 진짜 소중한 사람을 잃을까 봐 걱정이었다.지유처럼 좋은 여자를 누군가에게 뺏기는 날엔 이현이 통곡할 일만 남을 것이다. 그때는 아무리 고모라 해도 도울 수가 없게 된다.하여 조금이라도 능력이 있을 때 무엇이라도 해서 이현이 자기 마음을 알아채게 해주고 싶었다.지유를 힐끔 돌아본 이현이 그제야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발견했다. 그를 쳐다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손에 옷을 든 채 어디에 놓아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여희영의 성격이라면 이현이 오늘 이 문을 나갈 방법은 없을 것이다.이현이 말했다.“지유 제 와이프예요. 저도 어떻게 할지
술을 먹고 알레르기가 돋아 몸이 간지러웠지만 이현이 옆에서 보살핀 덕에 몸에 상처가 나지는 않았다.그녀와 이현 사이에 사랑이 없다고 해도, 그녀가 여씨 집안에서 행복하지 않다고 해도 가끔은 그의 연민을 받을 수 있었다.지유는 손을 뺐다. 입안이 씁쓸했지만 그래도 이현에게 맞춰주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천천히 좋아질 거예요. 알레르기 약을 먹는다 해도 효과가 백 퍼센트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요. 처리할 일이 남아 있다면서요. 고모님 말 신경 쓰지 말고 가요. 간다고 해도 고모님한테는 뭐라 말하지 않을 테니까.”문을 열러 갔지만 바깥에서 단단히 잠겨 안에서는 열리지 않았다.“오늘은 일단 여기서 자자. 내일 아침이면 문 열어줄 거야. 그때 집에 가면 되지.”이현은 여희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오늘 여기서 나간다는 건 불가능했다.지유도 별수 없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그래요.”이현은 외투를 벗고 셔츠만 입은 채 그녀를 바라봤다.“배고파?”지유는 오늘 아침만 먹은 상태였다. 여희영과 있을 때도 거의 커피만 몇 모금 마셨다.“조금요.”이현이 옆에 놓인 전화기를 들더니 어디론가 전화했다.“여이현, 잔머리 그만 굴려. 넌 오늘 호텔에서 절대 나갈 수 없어.”여희영은 이미 계획을 마친 상태였다.오늘 그 누구도 그들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빨리 손주를 볼 수 있다.누가 감히 방해를 한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거기엔 이현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이현이 이렇게 말했다.“고모, 지유가 배고프대요. 먹을 것 좀 올려줘요.”여희영은 그제야 말투가 열정적으로 변하더니 이렇게 말했다.“아, 지유가 배고프대? 그럼 바로 올려줘야지. 잠깐만 기다려.”여희영은 이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이현은 말을 붙일 새도 없이 뚝 끊긴 전화에 고개를 젓더니 지유를 돌아보며 장난쳤다.“가끔 고모는 도대체 누구 고모인지 헷갈리게 만든다니까. 나보다 너한테 더 잘해줘. 전화 받자마자 일단 잔소
시간이 흐르면서 이현은 점점 성숙해졌고 차분해졌다.이현은 지유가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자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왜 그렇게 봐? 무슨 생각해?”턱을 괴고 있던 지유가 이현에게 들키자 얼른 시선을 돌렸다.“아무것도 아니에요.”“아까 분명 몰래 훔쳐봤잖아.”지유가 오히려 반박했다.“이현 씨도 나 안 봤으면 내가 보고 있는지 몰랐을 거 아니에요.”“그래, 나도 너 훔쳐보긴 했어.”이현이 바로 인정했다.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행동을 살폈던 건 사실이다.이현의 말에 지유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심장이 요동치고 있는 건 확실했다.이현은 스테이크를 먹기 좋게 썰더니 그녀 앞에 놓아주었다.“자, 먹어.”이현이 그녀를 살뜰하게 챙기자 그녀의 마음도 순간 따듯해졌다.이현이 한 걸음만 다가와도 지유는 이 세상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했을 것이다.지유는 포크와 나이프를 들더니 이렇게 말했다.“아까 이현 씨 보면서 무슨 생각 했는지 알아요?”이현이 와인을 홀짝거리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생각 했는데?”“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참 행운스럽다고 생각했어요. 생활에서도 일에서도 크게 고생한 적이 없거든요.”지유가 웃으며 말했다.“집안이 잘사는 건 아니었지만 부모님은 내가 고생하는 게 싫어서 대학까지 쭉 뒷바라지 해주셨죠. 그러다 이현 씨를 만났고 쭉 잘 풀렸죠. 이현 씨가 우리 아버지 빚도 갚아줬고 당신이랑 결혼까지 했죠. 이겨내지 못할 건 없다고 생각했어요. 죽을 뻔한 고비가 있긴 했지만 무사히 넘겼고요. 나는 사실 충분히 행운스러워요. 많은 사람에 비하면 정말 행운스럽죠.”그래서 지유도 늘 만족했다.이현은 지유의 말을 열심히 들어줬다. 그녀를 만난 지도 꽤 오래된지라 그녀의 집안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죽을 뻔했다고? 전에 나한테 말한 적 없었던 거 같은데?”이현이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지유는 이현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한번 심호흡했다.
사실 지유에게는 뼈에 사무치는 추억이었지만 이현에게는 기억할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사실 지유는 살짝 서글프기도 했다. 도대체 이현에게 기억할 가치가 있는 추억은 무엇일까?“왜 아무 말도 없어?”이현은 기분이 언짢아졌다. 지유가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지키자 이현이 지유의 턱을 들어 올렸다.“내가 정곡을 찌른 건가?”지유는 차가운 이현의 눈동자를 보며 이렇게 물었다.“이현 씨, 제일 기억에 남는 일이 있나요?”이현이 지유를 힐끔 쳐다보더니 눈동자가 살짝 흐려졌다. 머릿속에 한 여자아이가 어렴풋이 떠올랐지만 이내 그 생각을 떨쳐내려고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더니 지유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더 실었다.“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잖아. 우석이라는 사람, 그렇게 좋아?”지유가 말했다.“네, 많이 좋아해요.”이 말에 이현은 화가 치밀어올랐다.“근데... 읍...”지유가 말끝을 맺기도 전에 분노에 휩싸인 이현이 그녀에게 키스했다.약간 의외였기에 지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현은 마치 화풀이하듯 미친 듯이 키스해 왔고 손도 점점 그녀의 허리로 향했다.그는 몸이 점점 뜨거워졌고 그 열기에 지유도 점점 몸이 끓어올랐다.“이현 씨...”지유가 이현의 이름을 부르자 활활 타오르는 불에 장작이라도 더한 듯 이현의 행동이 점점 더 거칠어졌다. 그러더니 아예 지유를 번쩍 안아 침대로 향했다.지유는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는 이현을 보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막았다.“이현 씨...”이현은 지유를 침대에 눕히고는 그 위로 올라탔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더니 하얀 그녀의 목덜미에 키스했다.“음...”지유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했지만 발버둥 치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이현은 지유의 손을 침대 머리에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하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가만히 있어.”이현은 몸을 지유에게 바짝 붙였다. 이현의 몸에 변화가 생긴 걸 느낀 지유는 온몸이 그대로 굳어버렸고 심장도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