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결혼한 지 3년이 되는 어느 날, 온채아는 남편 주율천의 가슴속에 영원히 자리 잡은 그녀가 누구인지 마침내 알게 된다. 놀랍게도 바로 그의 형수였다. 큰 형이 세상을 떠난 그날 밤에도 주율천은 조강지처인 온채아는 안중에도 없는 듯 형수를 대신해 뺨을 맞는다. 온채아는 잘 알고 있었다. 주율천이 그녀와 결혼한 이유가 단지 그녀가 사리 분별을 잘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사리 분별을 하도 잘해서 이혼하는 순간까지도 주율천을 조금도 귀찮게 하지 않는다. 주율천은 알지 못했다. 그녀가 이미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곧 다른 남자와 새로운 시작을 하려 한다는 사실도. 암 치료 신약을 성공적으로 개발한 그날, 온 세상이 온채아에게 찬사를 보낸다. 그런데 그 환호성 속에서 무릎을 꿇고 붉어진 눈으로 그녀에게 용서를 비는 주율천. “채아야, 내가 잘못했어. 제발 다시 나한테로 돌아와 줘.” 늘 신사적이던 그가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온채아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가 온채아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단호하게 말한다. “미안하지만 채아 곧 나랑 결혼해.”
view more같은 시각, 금용 그룹 최상층.송시언이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구민호는 통유리창을 등진 채 의자에 기대앉아 손가락으로 펜을 돌리고 있었다.“구 대표님, 본가 쪽에서 소식이 왔어요.”송시언이 책상 앞에 서서 보고했다.“하도연 씨가 구씨 집안 본가에 갔다고 합니다. 식사는 거의 두 시간 가까이했고요. 식사 중에 구 회장님이 몇 번 떠봤는데, 하도연 씨가 확답은 하지 않고 앞으로 지켜보겠다는 정도로만 말했다고 하네요.”“그래도 지금 분위기라면 당분간 이혼 문제는 미뤄진 것 같아요.”구민호가 펜을 돌리던 손을 멈췄다.“말도 안 돼.”송시언이 순간 멈칫했다.“하지만 본가에 있던 사람들이 직접 봤어요. 하도연 씨가 구 대표님의 차를 타고 왔고, 식사가 끝난 뒤에도 같은 차로 돌아갔다고요.”“둘이 같이 밥을 안 먹었다는 게 아니야.”구민호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누나가 마음을 바꿨을 리 없다는 거야.”구민호는 하도연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하도연은 한 번 결심한 일을 가족 식사 한 번 때문에 뒤집는 사람이 아니었다.지금 상황은 오히려 무언가 약점을 잡힌 쪽에 가까웠다.구민호는 몸을 바로 세우고 최근 며칠 동안 벌어진 일을 빠르게 머릿속으로 훑었다.성씨 가문이 갑자기 공격을 멈춘 일.그리고 하도연이 이혼을 갑자기 멈춘 일.둘을 이어 놓으면 답은 분명했다.구정훈이 무언가를 쥐고 있다. 그것도 하도연을 협박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무언가를.“지금까지 구온 그룹 사업이 몇 개나 다시 살아났지?”구민호가 갑자기 화제를 바꿨다.송시언이 바로 답했다.“본사와 지사를 합치면 7, 8개 정도가 복구됐어요. 2개는 아직 절차를 밟고 있고요. 구온 그룹 쪽에서는 이미 다시 사업을 추진하고 있어요.”“7, 8개라.”구민호는 낮게 되풀이한 뒤 펜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느긋하지만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살아난 만큼 그대로 다시 끊어.”송시언은 잘못 들은 줄 알았다.“구 대표님?”“사업이 몇 개 복구되면 금용
구정훈이 정신을 차렸을 때 하도연은 이미 성큼성큼 앞서가고 있었다.구정훈은 이를 악물고 빠르게 따라붙으며 목소리를 낮췄다.“도연아, 할아버지가 안에서 기다리고 계셔. 적어도 밥상 앞에서 내 체면까지 깎지는 마.”“체면?”하도연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옆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평온했고 아무런 파문도 일지 않았다.“구정훈 씨, 채아의 안전을 협상 카드로 쓸 때는 체면이라는 걸 왜 생각하지 않았어?”그 말은 바늘처럼 구정훈의 얼굴에 박혀 안색을 변하게 했다.순간 구정훈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그래. 이런 짓까지 벌였으니, 하도연 같은 사람에게 더 경멸받는 것도 당연하지.’구정훈이 다시 입을 열려던 순간 거실문이 안쪽에서 열렸다.금재은이 환하게 웃으며 마중 나왔다.“왔구나. 어서 들어와. 밖은 추워.”하도연은 얼굴에 서린 냉기를 자연스럽게 거두고 금재은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금 여사님.”아직 이혼도 하지 않았지만 호칭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금재은의 얼굴에 드리워진 미소가 잠시 굳었지만, 경험이 많은 그녀는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고 두 사람을 안으로 안내했다.“아버님께서 오전 내내 너희를 기다리셨어.”구진택은 거실의 상석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자단나무 지팡이를 짚고 있었고, 표정은 너무 담담하여 속내를 알 수 없었다.두 사람이 앞뒤로 들어오는 걸 보자 구진택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하도연을 보며 마침내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도연이 왔구나. 어서 와서 앉아라.”“할아버지.”하도연은 구진택의 오른편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자세는 여유로웠고, 자리에 앉은 뒤 가정부가 건넨 차를 들어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하도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정훈 쪽에는 시선을 한 번도 주지도 않았다.구정훈은 하도연의 옆자리에 앉았으나 속으로는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구진택은 하도연을 바라보며 안부를 묻듯 편하게 말했다.“요즘 바쁘지? 한동안 얼굴을 못 봤구나.”“괜찮아요. 요즘 일이 좀 많아서요.”하도연은 찻잔을 내려놓고 담담하게 답
구정훈은 휴대폰을 중간에 있는 팔걸이에 내려놓고 눈을 감고는 마음속에 떠오른 의심을 억지로 눌러 버렸다.적어도 지금은 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지금으로서는 자신이 가진 것들을 지킬 수 있으니까.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그린 빌라 안으로 들어가 철문 앞에 천천히 멈췄다.강준태가 내려 초인종을 눌렀다.가정부가 문을 열어 주자 구정훈은 양복 재킷과 커프스 단추를 정리하며 흐트러진 곳이 없는지 확인한 뒤에야 안으로 들어갔다.이 시간, 하도연은 겨우 점심을 끝낸 참이었다.가정부가 식탁 위 그릇을 치우고 있었다.하도연은 짙은 녹색 벨벳 원피스에 같은 계열의 숄을 걸쳤다. 머리는 낮게 틀어 올렸고, 귓불에 걸린 에메랄드 귀걸이가 조명 아래에서 차갑게 빛났다.여유롭고 단정한 차림으로 온몸에서 흠잡을 데 없는 모습이었지만 눈빛에는 온기 한 점 없었다.구정훈이 다가가도 하도연은 머리조차 들지 않았다.“갈까?”구정훈은 평범한 남편이 아내를 데리러 온 것처럼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응.”그제야 하도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놓인 클러치를 들고 현관으로 향했다.그녀는 구정훈 곁을 지나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고, 단 한 순간도 더 머무르지 않았다.구정훈은 하도연의 뒤를 따라갔다. 그녀의 곧고 가느다란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문득 낯선 기분이 들었다.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함께 구씨 집안 본가에 간 것이 아주 오래전처럼 느껴졌다.그때도 하도연이 살갑게 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일 얘기 몇 마디는 했고, 가끔 날씨가 추우니 옷을 따뜻하게 입으라는 말도 건넸다.그러나 지금은 침묵뿐이었다.차 안은 숨이 막힐 만큼 조용했다.운전기사는 앞만 바라본 채 입을 다물었고, 강준태는 고개조차 뒤로 돌리지 못했다.구정훈은 좌석에 기대어 옆에 앉은 하도연을 바라봤다.하도연은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넘기는 걸 보니 업무 메시지를 확인하는 모양이었다.햇빛이 차창을 통과해 하도연의 옆얼굴에 내려앉았다. 날카로운
가족 식사 날, 오랜만에 날씨가 맑았다.구정훈은 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 회사에서 출발했다. 검은 승용차가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올 때 조수석에 앉은 강준태가 서류 한 부를 내밀었지만, 구정훈은 손을 들어 막았다.“오늘은 일 얘기 그만하자.”그는 뒷좌석에 기대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지만, 무릎 위에 놓인 손가락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가 풀리기를 반복했다.발신 번호는 알아보기 힘든 난수처럼 보였다.구정훈은 저도 모르게 전화를 끊으려다가 이상하게 마음이 바뀌어 전화를 받았다.그러나 그는 먼저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수화기 너머에서 쉰 목소리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진한 차에 오래 담가 둔 나무처럼 거칠고 묵직한 목소리였다.“구 대표, 요 며칠 꽤 편하게 지내셨나 보군.”구정훈은 곧바로 서강진임을 알아차렸다.그는 부정하지 않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서 회장님 덕분이지요. 성 대표 쪽도 확실히 손을 뗐고, 중단됐던 사업들도 하나씩 정상화되고 있어요.”“나와 손잡으면 손해 보지 않을 거라고 했지.”서강진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넘쳤다.구정훈은 빠르게 뒤로 밀려나는 가로수를 바라보며 솔직하게 인정했다.“네. 손해 볼 건 없더군요. 집안일도, 결혼 문제도요.”“그래.”서강진이 담담하게 대답했다.구정훈은 어쩐지 그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그의 일이 잘 풀리고 있다면 서강진 역시 안도해야 맞았다.그래야 구정훈이 그의 계획에 더 적극적으로 협조할 테니까.하지만 서강진의 목소리에는 편안함 대신 오히려 일말의 긴장감이 묻어 있었다.곧 서강진이 화제를 돌렸다.“구 대표, 일이 순조롭더라도 너무 방심하지는 마.”구정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무슨 뜻이에요?”“성유준이라는 사람을 구 대표가 아직 잘 모르는 모양이군.”서강진이 말의 속도를 늦췄다.“그 사람은 절대 손해 보는 장사를 하지 않아. 구 대표가 패 한 장을 들고 협박했다고 바로 손을 뗐다고? 정말 그렇게 쉽게 발목 잡힐 사람이라고 생각해?”구정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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