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준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해리스는 지금처럼 긴장하지 않았을 것이다.혈귀 백작 두 명이 따라온다 해도 자기 실력으로 충분히 대처할 수 있었다.하지만 이제 실력이 자기와 비슷한 진서준이라는 변수가 생겼다.만약 그 혈귀 백작 두 명이 쫓아오고 진서준이 틈타 엘리사 공주를 해치려고 한다면 자기 실력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내일 아침에 돌아갈 수는 있지만 오늘 밤의 방문은 더 이상 간섭하지 마시죠.”엘리사도 해리스의 단호한 태도를 보고 한발 물러섰다.원래는 강남에서 며칠 더 머무르며 천천히 구경하다가 무도 교류회가 시작될 때쯤에나 경성으로 돌아가려던 계획이었다.“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반드시 공주님 옆을 지키겠습니다.”해리스가 단호하게 말했다.“그건 안 되죠. 해리스 씨는 분위기만 망칠 거예요. 게다가 진서준 씨는 나에게 아무런 악의도 없어요.”엘리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저 녀석이 악의가 없다는 걸 어떻게 아시죠?”해리스는 혀를 차며 물었다.“눈은 마음의 창이잖아죠. 진서준 씨가 날 볼 때 눈빛은 아주 맑았어요. 여기까지만 해두죠. 나도 더 이상 얘기하려니 피곤해요. 나 가볼게요.”엘리사는 곧바로 진서준을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엘리사가 혼자 따라오는 것을 본 진서준은 조금 놀랐다.“경호원은 안 데리고 오는 건가요?”“해리스 씨가 오면 분위기만 망칠 테니까요. 난 당신의 가족들이 해리스 씨 때문에 기분 좋은 하루를 망치길 원하지 않아요.”엘리사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진서준은 그 말에 가볍게 웃었다.“그럼 내가 엘리사 씨에게 무례하게 굴면 어쩌려고요? 당신은 외국의 공주잖아요. 내가 당신을 납치하면 앞으로 평생 먹고사는 걱정은 없겠네요.”물론 그럴 용기가 있느냐가 문제겠지만 돈을 손에 넣는다고 해도 미처 쓰지도 못하고 죽을 가능성이 높았다.용란은 국제적으로 강대한 국가였고 군사력과 경제력이 막강한 나라였다.지구에서 살 마음이 없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감히 엘리사 공주를 납치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진서준 씨
엘리사는 공주라는 신분이 있지만, 그 또한 평범한 여성이었다.아까 진서준이 여러 번 핑계를 대며 엘리사의 방문을 거절했을 때, 엘리사의 마음속에는 자연스럽게 불만이 쌓였다.그래서 진서준의 친구가 이름을 잘못 부른 것을 빌미로 진서준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역시나 엘리사의 말을 들은 진서준의 얼굴에는 약간의 당혹스러움이 스쳤다.“그래요, 내 이름은 김평안이에요. 진서준은 어릴 때 불리던 별명이고요... 당신은 대한민국 사람이 아니니까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이 어릴 적 별명을 짓는 전통을 모를 수 있죠.”하지만 진서준은 짧은 순간에 머리를 굴려 재빨리 변명했다.“그래요? 그런데 당신 성씨가 좀 특이한 것 같은데요.”엘리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진서준을 조용히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난 대한민국 문화에 대해 깊게 아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성씨를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어요. 이 점은 우리 용란 국가와 비슷한 것 같네요.”엘리사의 쉬지 않고 들이대는 공격적인 태도에 허윤진이 재빨리 진서준을 변호했다.“당신이 뭔데 참견이죠? 이 사람이 진서준이든 김평안이든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에요?”“물론 상관있죠. 난 진서준 씨 친한 친구거든요.”엘리사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난 형부한테 외국인 친구가 있다는 거 처음 듣는데요?”허윤진은 그 말에 즉시 머리를 돌려 진서준을 쳐다보며 따졌다.허윤진은 절대로 낯선 외국 여자가 진서준을 넘보게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이분은 옆집에 살아. 아까 그 중년 남자가 이분 경호원이야. 나도 이분을 방금 알게 됐어.”진서준은 옆집 별장을 가리키며 말했다.“무슨 일이야?”그때, 허사연과 다른 가족들도 별장에서 나왔고 마당에 서 있는 서양 여성을 보자 모두가 순간 멍해졌다.“이분들이 다 진서준 씨 가족인가요? 대한민국은 일부다처제가 금지된 걸로 알고 있는데요?”엘리사는 또다시 진서준을 난감한 처지에 놓일 질문을 던졌다.진서준의 얼굴은 순간 붉으락푸르락해졌다.‘이게 한 나라 공주라는
“아까 그 여자는 용란의 공주야.”허윤진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그 여자가 공주라고요?”“아까 그 여자한테서 풍기는 분위기만 봐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고 느꼈어요.”허사연이 담담하게 말했다.“그 이국 공주가 왜 당신을 찾아왔죠?”김연아가 진서준을 바라보며 물었다.“설마 그 여자와 하룻밤 보내놓고 책임지기 싫다고 하는 건 아니죠?”진서준은 그 말에 깜짝 놀랐다.“김연아 씨, 그런 농담은 하지 마세요. 오늘 오후에 처음 만난 사이예요.”김연아는 장난으로 한 말이었지만 진서준의 당황한 모습에 손으로 입을 가리며 키득키득 웃었다.허윤진은 진서준의 해명을 듣자 질투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처음 만났으면 어때요? 외국 여자들은 대개 자유분방하잖아요. 그 여자가 먼저 형부를 찾은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예요.”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찾아왔다면 분명 뭔가 목적이나 이유가 있을 것이다.하지만 진서준은 엘리사가 왜 자기를 찾아왔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엘리사라는 이름조차도 진짜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진서준이 가명을 사용할 수 있듯, 엘리사도 충분히 가명을 사용할 가능성이 있었다.“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야. 하늘에 대고 맹세할 수 있어.”진서준은 오른손을 머리 위로 들며 말했다.“알았어요, 우린 농담한 거예요. 진서준 씨가 그 여자랑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거 다 알아요.”허사연이 진서준의 높게 쳐든 손을 잡아 내리며 웃었다.“하지만 공주를 진서준 씨 여자로 만든다면, 진서준 씨 실력을 인정할게요.”허사연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진서준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이 이국 공주와 얽히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다들 얘기를 좀 더 나눈 후,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조희선이 여기서 지내고 있어 허사연은 진서준과 한 침대를 쓰는 게 부끄러웠다.조희선에게 자기 행동이 안 좋게 비쳐 자기에 대한 평가가 낙하산을 탈까 봐 신경이 쓰였다....밤은 쌀쌀했다.운대산 별장 밖, 어둠 속을 가로지르는 박쥐 같은 그림자
해리스는 별장에 들어선 브래드를 보자마자 입고 있던 정장이 터질 정도로 온몸의 근육이 순식간에 팽팽하게 팽창되었다.해리스와 브래드는 오랜 앙숙이었다.용란에 있을 때부터 해리스는 브래드를 끈질기게 추적했었다.단순한 실력만 놓고 보면 브래드가 해리스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다만 브래드는 혈수사였기 때문에 그 속도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박쥐처럼 어마어마하게 빨랐다.특히 밤이 되면 브래드의 붉은 눈동자는 어떤 어둠에도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해리스는 항상 브래드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이번에 브래드가 직접 별장에 찾아왔다. 해리스가 굳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브래드의 목적이 뭔지 알 수 있었다.“브래드, 공주님을 깨우기 전에 여기서 썩 물러나는 게 좋을 거야.”해리스는 살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브래드를 노려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협했다.“내가 여기 온 건 바로 그 공주님을 위해서야.”브래드는 탐욕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엘리사 공주의 피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진미라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지 궁금하네...”“네놈이 공주님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면 네놈이 어디로 도망치든 세상 끝까지 쫓아가서 널 갈기갈기 찢어버릴 거야.”해리스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위협했지만 주동적으로 공격을 개시하지는 않았다.그 이유도 간단했다. 브래드 혼자서 온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혈수사도 함께 있다는 걸 해리스는 잘 알고 있었다.해리스가 먼저 선제공격을 개시하면 이 두 혈수사는 분명 호랑이를 산에서 유인하는 계략을 쓸 것이다.브래드는 해리스가 제자리에서 가만히 있는 것을 보고 비웃듯 미소 지었다.“해리스, 예전엔 나만 보면 죽일 듯이 쫓아오더니 오늘은 왜 거북이처럼 움츠리고 있는 거야? 네가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내가 마음껏 즐기도록 할까?”브래드는 해리스에게 공격하지 않고 대신 거실의 가구를 부수기 시작했다.쿵쾅, 쿵쾅!연이어 들려오는 소음은 심지어 잠을 자던 진서준까지 잠에서 깨게 했다.“저 여자가 이 밤중에 왜 저
“맞아요, 저희 두목이 공주님을 만나서 잠시 얘기를 나누고 싶다는군요.”브래드는 엘리사와 오래된 친구인 것처럼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난 볼 일이 많아 그럴 시간 없어요. 당신 두목이 날 보고 싶으면 직접 오라고 하세요.”가식적인 브래드의 태도에 엘리사는 한치의 여지도 없이 냉랭하게 대꾸했다.이 혈수사들이 무슨 속셈인지 엘리사는 이미 꿰뚫어 보고 있었다.용란에 있을 때, 혈수사들은 이미 엘리사의 아버지를 찾아와 용란 황실 호위대를 대한민국의 용멸 계획에 끌어들이려고 했으나, 엘리사의 아버지가 이를 거부했던 적이 있었다.그 이후로 이 혈수사들은 엘리사를 인질로 삼아 용란 국왕을 협박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미안하지만, 공주님에겐 지금 선택지가 없어요. 저와 함께 가셔야만 해요.”브래드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우리 공주님 말씀 못 들었어? 당장 꺼지지 않으면 널 갈기갈기 찢어버릴 거야.”해리스는 겉으론 위협적인 모습으로 브래드에게 소리쳤다.지금 해리스가 할 수 있는 건 위협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만약 싸움이 진짜 벌어진다면 브래드는 어떻게든 해리스를 붙잡아 두고, 그 사이에 브래드의 동료가 엘리사를 납치하려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엘리사가 납치당하면 용란 국왕은 결국 혈수사들에게 굴복하고 용란 황실 호위대도 용멸 계획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용란과 대한민국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란 국왕은 그의 친위대를 용멸 계획에 포함하고 싶지 않았다.만약 이 계획이 대한민국에 발각된다면 두 나라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질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었다.전면전으로 치닫는다면 다른 나라들은 분명히 강 건너 불구경할 것이고 용란을 도와줄 국가는 없을 것이다.브래드와 해리스가 대치하는 사이, 지엔은 이미 몰래 2층 창문 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브래드는 지엔이 준비를 마친 것을 확인하고 돌연 해리스에게 달려들었다.“잘 됐군.”해리스는 체내의 모든 힘을 주먹에 집중했다.해리스는 한 방에 브래드를 쓰러뜨리고 브래드의 목
브래드는 온몸을 감싸는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을 느꼈다.그 쌀쌀한 기운의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린 브래드는 해리스가 빠른 걸음으로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브래드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그는 해리스가 당연히 자기를 무시한 채 지엔을 쫓아갈 거라고 여겼다.“당장 아까 그 녀석에게 공주님을 무사히 돌려보내라고 전해. 그렇지 않으면 네 뼈를 하나하나씩 부러뜨려 줄 테니.”해리스는 한 손으로 브래드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그의 머리를 벽에 처박았다.브래드의 심장은 밀려오는 긴장감에 맹렬하게 뛰었고 가까스로 진정한 브래드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맘대로 날 고문해 봐. 내 목숨은 어차피 별 가치 없으니까.”브래드는 해리스가 엘리사에게 얼마나 충성스러운지 잘 알고 있었다.엘리사가 혈수사들의 손에 있는 한, 해리스는 절대 자기를 해치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우리가 공주님을 죽일 수는 없겠지만 팔 하나나 다리 하나 정도는 어떻게든 부러뜨릴 수 있지.”“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해리스는 브래드의 복부에 주먹을 내리꽂았다.푸흡...순간, 브래드의 입에서 시뻘건 피가 솟구쳤다.혈수사의 피는 일반인보다 훨씬 더 강렬한 비린내가 나서 이내 거실 전체에 짙은 피비린내가 퍼졌다.“공주님이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다치면 우리 용란은 너희 혈수사들을 전부 쫓아낼 거야.”해리스는 분노에 차서 외쳤다.“그럼 용란은 모든 혈수사들의 적이 되겠네.”브래드는 피를 뱉어내며 해리스에게 비웃음을 날렸다.“내가 구라를 치는 것 같아? 진짜 한 번 우리 용란과 전면전을 벌여 볼래?”브래드의 오만한 태도에 해리스는 그의 목을 당장이라도 비틀고 싶었다.하지만 지금 그럴 수는 없었다. 오직 브래드만이 엘리사가 어디로 끌려갔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해리스는 굳은 표정으로 잠시 고민한 뒤, 결국 주먹을 한 번 더 휘둘러 브래드를 기절시켰다.그리고 그 길로 급히 별장을 나서 곧장 진서준이 머무는 별장으로 향했다.해리스는 깊게 숨을 들이쉬
“진 선생님, 공주님을 반드시 구해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는 결과가 올 겁니다.”진서준은 그 말에 콧방귀를 끼며 물었다.“감당할 수 없는 결과라고? 그게 뭔데? 설마 우리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라도 일어난다는 건가?”공주를 납치한 자가 누구인지는 진서준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하지만 진서준은 그자가 대한민국 사람은 아닐 것이라고 짐작했다.엘리사는 줄곧 용란에서 살아왔고 심지어 공개적으로 대중 앞에 나온 적도 없었다.엘리사의 정체를 아는 이는 분명 용란 본국 사람일 것이다.게다가 엘리사와 해리스가 몰래 금운에 왔으니 두 사람의 정체를 아는 자는 더더욱 적었을 터였다.해리스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맞습니다. 서양의 혈수사들이 공주님을 납치했습니다. 혈수사들이 공주님을 잡아간 이유는 바로 우리 국왕을 협박해 황실 친위대를 용멸 계획에 참여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귀국의 무인들이 이번 대한민국 무도계 공격에 용란의 공식 인력이 관여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그때는 상황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진서준의 얼굴이 굳어졌다.이런 사실은 진서준도 금시초문이었다.만약 해리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엘리사 공주를 구하는 건 필수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잠깐 기다려. 내가 전화를 좀 걸어 확인해 볼 테니.”진서준은 휴대폰을 꺼내 들어 진서훈에 전화를 걸었다.이런 고위급 기밀은 진서훈 같은 호국장군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전화가 몇 번 울리자 진서훈이 전화를 받으며 농담 섞인 목소리로 꾸짖었다.“이 녀석이 자기는 안 자고 왜 이 노인을 괴롭혀? 조금만 날 배려해 주면 안 되겠냐?”진서준은 헛기침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할아버지, 중요한 일이 있어서 여쭤보려고 전화했어요.”“그래, 말해봐.”“이번 용멸 계획에 용란의 황실 친위대가 참여하지 않은 게 맞나요?”진서훈은 그 말에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진서준이 이 질문을 한다는 건, 분명 용란 사람들과 접촉했음을 의미했다.게다가 이번에 당당히 대한민국에 들
슉!어둠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그 그림자는 한적한 외곽의 무인 별장 앞에서 멈춰 섰다.붉게 타오르는 눈동자 속에 기묘한 광택이 번졌다. 지엔은 기절한 엘리사를 어깨에 메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문을 밀고 들어서자 지엔은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공주님, 이제 우리 둘만 남았으니 공주님의 유혹적인 피를 실컷 맛보도록 하지.”지엔은 엘리사를 거실의 소파 위에 조심스럽게 눕혔다.엘리사 특유의 체질 때문에 그녀의 몸에서는 혈수사들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향기가 뿜어져 나왔다.그 향기는 혈수사들에게는 마치 마약과도 같아, 결코 쉽게 뿌리칠 수 없는 강렬한 유혹이었다.지엔의 두목은 엘리사에게 상처를 입히지 말라고 지시했을 뿐 아니라 엘리사의 피를 빨아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었다.하지만 지금 이곳에는 지엔과 엘리사밖에 없었다.지엔은 이 기회를 틈타 몰래 조금만 마신다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혈수사가 피를 빨 때는 상대방이 그다지 큰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다만 병원에서 주사를 맞는 정도로 이빨이 피부를 무는 순간만 조금 따끔할 뿐이다.창문을 통해 들어온 은은한 달빛이 엘리사의 몸 위로 쏟아져 내렸다.달빛에 은빛 망토를 두른 듯한 엘리사의 모습은 책 속에서 튀어나온 공주처럼 아름다웠다.지엔은 엘리사를 바라보며 억누를 수 없는 욕망에 휩싸여 굶주린 늑대처럼 엘리사에게 덮쳤다.하지만 엘리사는 여전히 죽은 사람처럼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지엔은 그녀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다.지엔은 엘리사의 몸에는 관심이 없었다.그저 엘리사의 피를 마시는 것만이 지엔의 목적이었다.엘리사의 하얀 목덜미가 고스란히 드러나자 지엔은 입을 벌려 천천히 다가갔다.쾅!이 긴급한 순간, 누군가가 문을 발로 차며 열어젖혔다.문이 부서지는 소리에 지엔은 깜짝 놀란 박쥐처럼 재빨리 엘리사에게서 떨어져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들이닥친 이를 쏘아보았다.잘록한 허리에 풍만한 곡선을 자랑하고 은빛 물결 같은 머리카락
“뭐라고? 불법적인 일이 우리 가게에서 일어난다고? 말도 안 돼.”성현도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넌 전신전 소속이잖아. 그런데 네 오빠인 내가 어떻게 법률을 어기는 일을 하겠어?”“그럼 이 사람들은 왜 부른 거야? 집단 폭력도 불법이거든.”성미영은 차가운 시선을 보이며 성현도와 따졌다.“미영아, 이건 내가 싸우려던 게 아니야. 저 녀석이 일부러 시비 걸러 온 거라고.”성현도는 진서준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이놈이 일부러 우리 찻집에 난입해 행패를 부리고 상철을 두들겨 패서 머리에 혹이 다 나버렸어. 난 단순히 정당방위를 위해 부른 거라고.”성미영이 등장하자 성현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솔직히 실력만 놓고 보면 성현도는 성미영보다 한참 부족했다.게다가 성미영은 전신전 소속인지라 저 남녀가 군부 조직인 전신전을 적으로 돌릴 리 없었다.군대를 건드리는 순간, 무조건 좋은 결과는 있을 수 없었다.“진서준, 도대체 무슨 일이야?”성미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라? 너희 둘이 아는 사이야?”성현도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방금 내려놨던 마음이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난 사람을 찾으러 왔어. 하씨 가문 하경범이 이 위층에 있다고 들었는데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어.”진서준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그리고 또 하나, 저 위에서 불법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도 하더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어.”이 말에 성현도의 표정이 단숨에 험악해졌고 즉시 반박에 나섰다.“헛소리 마. 우리 가게는 단순한 찻집이야. 불법적인 일 따윈 없어. 근거없는 소문을 왜 털어놓고 난리야?”“미영아, 저 녀석한테 속지 마. 난 네 사촌 오빠야. 내가 그런 불법적인 짓을 할 사람이겠어?”성미영이 곧바로 진서준에게 물었다.“진서준, 너 증거 있어?”“직접 올라가 보면 다 알게 될 거잖아?”진서준이 가볍게 말했다.“오빠, 위층으로 가자.”성미영이 단호하게 말했다.“그, 그건 좀 곤란해. 위층엔 귀
순간, 장내는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모든 시선이 진서준에게 쏠렸고 사람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다들 진서준을 그냥 얼굴만 반반한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짜 고수였다.성현도의 부하 중 최고 실력자조차 상대가 되지 않았다.성현도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렸고 상철을 향해서 욕설을 날렸다.“쓰레기 자식, 이런 애송이 하나도 못 이겨?”부하가 지면 망신당하는 건 결국 성현도 자신이었다.이대로 체면을 구긴 채 끝낼 수는 없었다.이대로 넘어가면 앞으로 르벨 재벌 2세들 사이에서 조롱거리가 될 게 뻔했다.“이봐, 네 실력이 괜찮은 건 인정할게.”성현도가 싸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근데 너 혼자서 백 명을 상대할 수 있어? 천 명은? 잘 들어. 내 부하는 수도 없이 많아. 너 같은 놈 하나 처리하는 데 전화 한 통이면 충분해.”진서준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다시 말하지만 난 그냥 하경범을 찾으러 온 거야. 그 녀석만 넘기면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해주지.”“없던 걸로 한다고?”성현도가 그 말에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너 지금 누굴 상대로 협상하려 드는 거야? 난 성씨 가문의 직계야. 날 건드리면 상대해야 할 건 나 하나가 아니라 우리 가문 전체라고.”그때,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곧이어 검은색 전투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이 남자들은 전부 성씨 가문의 경호원이었고 실력도 만만하지 않았다.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무려 50명 이상이었다.한순간에 텅 비어 있던 로비가 사람들로 꽉 찼다.“저 자식 끝났네. 이 정도 성씨 가문 인원이라면 아무리 강해도 버틸 수가 없지.”“그러게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없잖아.”“왜 쓸데없이 성현도를 건드린 거지? 스스로 무덤을 판 거잖아.”구경꾼들은 이 광경에 각자 다른 감정을 보였다.누군가는 동정을, 누군가는 아쉬움을, 또 누군가는 짙은 흥미를 보였다.“사연아, 넌 좀 쉬어. 이놈들은 내가 처리할게.”진서준이 앞으로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가 거의 2미터에 달하는 거구의 사내가 찻집 안으로 들어왔다.남자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상철아, 저놈 다리 하나 부러뜨려서 내던져.”성현도가 진서준을 가리키며 명령했다.“알겠습니다.”상철은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진서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서준아, 내가 할게.”허사연의 눈에는 불꽃 같은 전투욕이 타올랐다.“조심해. 저 녀석은 횡련 종사야.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진서준이 조용히 귀띔했다.“알았어. 설령 못 이긴다고 해도 어차피 네가 있잖아?”허사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진서준이 곁에 있는 한, 허사연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이봐, 사내자식이 여자 뒤에 숨는 게 말이 돼?”상철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이봐, 껑충이. 여자를 얕보지 마. 일단 이기고 나서 말해.”허사연이 상철을 도발했다.“아가씨, 그런 기생오라비 말고 날 따르지 그래? 밤마다 널 천국으로 보내줄 수 있는데?”상철이 음흉하게 웃었다.“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얼굴이 싸늘해진 허사연이 주먹을 날렸다.강렬한 펀치가 공기를 가르며 폭발음을 일으켰고 그 위력은 철판도 뚫을 수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상철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내가 가만히 서 있어도 넌 날 어쩔 수 없어.”“닥쳐!”허사연이 분노에 차 주먹을 그대로 상철의 얼굴로 내리꽂았다.상철은 일부러 머리를 숙이며 대머리 정수리로 받아냈다.쿵!둔탁한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주먹이 상철의 머리를 강타했으나 대머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허사연이 몇 걸음 물러섰다.순간 손에 뜨거운 통증이 밀려왔고 뼈가 부서질 것 같았다.손을 확인하자 하얀 피부였던 손등이 새빨갛게 부어올랐다.상철은 자기 머리를 한번 쓸어내리더니 빙그레 웃었다.“아가씨, 이제 내 실력을 알겠지?”그 모습에 허사연의 승부욕이 다시 불타올랐고 콧방귀를 뀌며 다시 달려들었다.이번에는 다리를 높이 들어 올려 상철의 머리를 내려찍었다.‘머리가 단단하다고 자랑하
이렇게 예쁘고 섹시한 여자가 싸움 실력이 이렇게 대단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완전 여성판 이소룡이었다.“너, 너희들 정말 너무 대담한 거 아니야? 여기가 어디인지 알기나 해? 어디서 대놓고 싸움질이야?”종업원은 순간 놀란 뒤 분노에 찬 얼굴로 진서준와 허사연을 가리켰다.찻집이 문을 연 이후로 이렇게 난동을 부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진서준과 허사연이 첫 사례였다.주변의 구경꾼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싸움 좀 하면 뭐해? 여긴 성씨 가문의 구역이야. 성씨 가문에서 한마디만 하면 저 남녀는 오늘 밤중으로 사라지겠지.”“어휴, 저 여자 너무 아까워. 저렇게 예쁜데 왜 죽지 못해서 안달이지?”“여자는 살 수도 있겠지만 남자는 무조건 죽을걸.”사람들은 저마다 수군거리며 이미 진서준과 허사연의 결말을 예상하는 듯했다.“그럼 네 말대로라면 내가 널 때린다 해도 얌전히 맞고 있어야 한다는 거야?”허사연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종업원에게 다가갔다.“오지 마!”종업원은 겁에 질려 연신 뒷걸음질 쳤다.“어떤 미친놈이 내 구역에서 소란을 피우는 거야?”그 순간, 2층에서 한 사람이 내려왔다.모두가 일제히 시선을 돌려 그 사람을 확인하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성현도가 오늘 여기 있었네?”누군가 그 청년을 알아보았다.“저 둘 끝장났네. 성현도는 악명 높은 냉혈한이야.”그 청년은 바로 찻집의 사장인 성현도였다.성현도는 르벨 재벌 2세 사이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친구에게는 무조건 의리를 지키지만 적에게는 무자비했다.성현도의 고문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았고 게다가 무인으로서 무공 실력도 상당했다.“사장님, 저 남녀가 와서 난동을 부렸어요.”종업원은 성현도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장이 나온 걸 확인한 허사연은 주먹 한 방에 종업원을 기절시켜 버렸다.“뭐야?”성현도의 눈이 가늘어졌고 표정이 험악해졌다.자기 앞에서 대놓고 부하를 때리다니, 이건 너무나도 명백한 도발이었다.“아가씨, 우리 처음 보는 사이 맞지? 우리
그리고 오후 2시가 되자 진서준은 허사연을 데리고 조호가 말한 천국찻집으로 향했다.겉모습만 보면 이 찻집은 진짜 전통찻집 같았고 규모도 꽤 컸다.하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 보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1층과 2층까지는 정말 평범한 찻집처럼 꾸며져 있었고 누가 봐도 이상한 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하지만 3층으로 올라가려면 회원권이 있어야 하거나 사장이 직접 허락한 사람만 출입할 수 있었다.“손님, 아가씨,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진서준과 허사연이 차를 마시러 온 줄 안 종업원이 빠르게 달려와 안내하려 했다.“그럴 필요 없어. 난 하경범을 찾으러 왔거든.”진서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네?”종업원이 순간 얼어붙었다.“혹시 하씨 가문의 하 도련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맞아.”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손님은 누구신지...”종업원이 신중하게 물었다.진서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냥 복수하러 왔다고 전해.”그놈 아버지라고 하는 건 자기를 모욕하는 것과 같았고 친구라고 하기도 기분이 더러웠다.그 말에 종업원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손님, 여기서 장난치지 마세요.”하경범은 르벨에서 유명한 재벌 2세였다.이 찻집의 사장과도 막역한 사이였고 여기서 일하는 직원이라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왜? 못 믿겠어?”진서준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손님, 하 도련님에게 복수하려던 사람은 단 하루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종업원이 경고하듯 말했다.“그런 농담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그 말을 듣자 진서준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이렇게 전해. 그 하경범이 두들겨 맞고 나자빠지게 했던 진서준이 왔으니 당장 기어 나오라고 말이야.”진서준의 뻔뻔한 태도에 종업원은 어이가 없었다.“좋습니다. 손님이 그렇게 죽고 싶다면 제가 기꺼이 도와드리죠.”종업원은 바로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문제 발생했습니다. 난동자가 있습니다.”쿵! 쿵!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건장한 남자 스무 명이 들이닥쳤다.전부 검은
진서준과 허사연은 차를 타고 조호의 회사로 향했다.이 회사는 그냥 겉치레일 뿐, 진짜 돈이 들어오는 곳은 유흥업소들이었다.유흥업소를 얕잡아보면 안 된다.운 좋게 돈 많은 도련님들이라도 걸리면 하룻밤에 수억 원이 순식간에 손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진서준 씨!”진서준이 들어서자 조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조호는 진서준 옆에 있는 허사연을 힐끗 쳐다본 뒤 고개를 숙이고 감히 더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잡담은 그만하고 하경범을 잡아가는 제일 좋은 타이밍만 말해.”진서준이 직설적으로 물었다.이 말에 조호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매일 오후마다 하경범은 천국찻집이라는 곳에 갑니다.”조호는 재빨리 대답했다.“보통은 경호원 몇 명만 데리고 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얼씨구? 저런 인간이 매일 차나 마시러 간다고?”진서준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그게... 진서준 씨, 사실 그곳은 이름만 찻집이지 실제로는...”조호는 옆에 여성이 있다는 걸 의식해서 말을 흐렸지만 진서준은 그 뜻을 단번에 알아챘다.“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차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그냥 인기 많은 인터넷 셀럽이 가득한 고급 유흥업소일 것이다.“진서준 씨, 듣자 하니 그 찻집의 주인은 성씨 가문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진짜로 움직이실 거라면 하경범이 이동 중일 때를 노리는 게 좋을 겁니다.”조호가 조심스럽게 조언했다.“응? 성씨 가문이 이런 사업도 해?”진서준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진서준은 오영수에게서 성미영에 대한 정보를 들은 적이 있었다.정의로운 성격의 성미영이 자기 가문에서 이런 유흥업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네, 듣기로는 성씨 가문의 한 직계 후손이 운영한다고 합니다. 여자에 미쳐 있는 놈이라 르벨의 돈 많은 도련님들과 꽤 친분이 깊다고 하더군요.”조호는 본인이 아는 정보를 전부 쏟아냈다.“좋아, 대충 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조호의 회사를 나온
진서준이 허사연의 캐리어를 들어주며 옆방으로 걸어갔다.그 뒷모습을 보며 도지아는 부러움이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인간은 원래 모여서 사는 걸 선호하는 동물이다.사회를 벗어나서 혼자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가족도 친구도 없이 너무 오래 지내다 보면 결국 감정 없는 시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그렇게 되면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없어질 것이다.“어제 전화할 때 그랬었지? 이번에 너 자기 출신을 찾으러 온 거라고.”호텔 방으로 돌아온 후, 허사연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너 원래 경성 진씨 가문 사람이잖아?”“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어. 그런데 할아버지가 예전에 말해주셨어. 사실 우리 아버지는 어릴 때 길에서 주워 온 아이였다고.”진서준은 허사연에게 숨길 생각이 없었다.허사연은 진서준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허사연이라면 이 비밀을 절대 밖으로 흘리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뭐라고? 아버님이 주워 온 아이라고?”허사연이 깜짝 놀랐다.“그래.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건 나뿐이야. 가족 중에서도 할아버지가 나한테만 알려주셨지.”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전, 오영수가 내 등에 있는 용을 보고는 내가 용맥의 일족이라고 했어. 그래서 오영수를 따라 여기 와서 오영수 셋째 삼촌에게 내 출신에 관해 알아보려 했던 거야.”“네 등에 용이 있다고? 난 한 번도 본 적 없는데?”허사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동안 둘이 알몸으로 함께한 시간도 적지 않은데 허사연은 한 번도 본 기억이 없었다.“내가 체내 혈기를 모을 때만 그 용이 나타나거든.”진서준이 설명을 이어갔다.“그런데 오영수 삼촌이 아직 돌아오질 않아서 일단은 여기서 며칠 기다려야 해.”“아니, 그럼 오씨 가문에서 널 안 재워줬어?”허사연이 의아해했다.명문대가인 오씨 가문에 빈방이 없을 리가 없었다.“그날 오영수를 찾아갔는데 마침 오영수 할아버지가 위중했어. 그리고 그 집안엔 그 어르신을 그냥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지.”진서준이 담담하게
“진짜 예쁜 새색시 숨겨놓고 있었네?”허사연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누구라도 자기 남자 방에 예쁘고 몸매가 완벽한 여자 하나가 같이 있는 걸 보면 의심 안 할 수가 없었다.게다가 지금은 아침이었다.설마 이 여자가 아침에 막 찾아온 건 아니겠지?“사연아, 오해야. 내가 제대로 설명할게.”진서준은 머리가 띵해졌고 뇌가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아가씨, 오해하지 마세요. 어제 저랑 진서준이 같은 방에서 잔 건 맞지만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저 밤새 한숨도 못 잤다니까요?”도지아가 황급히 해명에 나섰다.“네? 밤새 안 자고도 아무 일 없었다고요?”허사연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설마 밤새 불태우느라 못 잔 건 아니겠죠?”허사연의 농담과 진담이 뒤섞인 말에 진서준은 헛웃음만 나왔다.“사연아, 이쪽은 도지아야. 우리 진짜 그냥 친구야. 일단 들어와. 천천히 설명할게.”허사연이 방에 들어오자 진서준은 서로에게 소개했다.그러고는 이 방에서 일어난 상황을 설명했다.“도지아는 황예은이 소개해 준 환자야. 다리 치료를 부탁받았거든. 종아리를 봐봐. 이틀 전에 내가 직접 발라준 연고가 있어.”허사연이 내려다보자 확실히 연고가 발라져 있었다.“그리고 도지아가 밤새 안 잔 건 원기를 수련하느라 그랬던 거야. 너도 예전에 수련한다고 며칠씩 안 잔 적 있잖아?”허사연은 오해가 풀리자 그제야 빙그레 웃었다.“내가 뭐 어쨌다고 그렇게 호들갑이야?”“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그러는 거잖아.”진서준이 빠르게 대답했다.“뭐야? 내가 그렇게 의심 많고 질투 많은 여자로 보여?”허사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아, 아니지. 우리 사연은 누구보다 속이 넓은 부드러운 여자지.”진서준이 급히 정정했다.“됐어, 너 겁먹은 거 너무 귀엽다.”허사연이 피식 웃었다.“넌 여기 좀 쉬고 있어. 내가 방 하나 잡고 올게.”진서준은 더 머뭇거릴 틈도 없이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다.진서준의 뒷모습을 보며 허사연은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도지아 씨, 진서준이
“내가 가면 안 돼?”사실 진서준은 거절하려 했었다.르벨은 안개가 짙게 깔린 늪지대 같은 곳이라 진서준조차도 어디에 함정이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그러니 허사연이 온다면 다칠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거절하면 허사연이 상처받을 게 뻔했다.“당연히 되지. 지금 위치 보낼게.”진서준은 단호하게 말하며 위치를 보냈다.자기 여자를 지킬 자신도 없으면서 강자들을 상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자기야, 잘 자.”허사연이 애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너도 일찍 자.”진서준이 다정하게 답했다.전화를 끊고 나니 진서준의 졸음이 싹 가셨다.진서준은 창가로 다가가 이 화려한 도시를 내려다봤다.“오씨 가문, 안씨 가문, 하씨 가문... 너희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든 난 전부 박살 낼 거야. 이번엔 반드시 나와 아버지의 정체를 밝혀내고 말겠어.”진서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그렇게 별다른 사건 없이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진서준이 막 눈을 뜨자마자 도지아의 흥분한 외침이 들려왔다.“진서준, 됐어. 나 생겼어!”도지아는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는데 밤새 잠을 자지 않은 게 분명했다.진서준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너 아직 처녀 아니었어? 대체 어떻게 임신한 거야?”“미친놈아, 임신은 개뿔, 무슨 헛소리야?”도지아는 얼굴이 빨개지며 진서준을 노려봤다.“그럼 왜 아침부터 난리야?”진서준이 되물었다.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아침부터 흥분해 날뛰지 않을 것이다.“어제 네가 준 수련법 기억나지? 나 벌써 원기를 형성할 수 있게 됐어.”자기가 대단하다고 여긴 도지아는 자랑스럽게 선언했다.고작 하룻밤 만에 원기를 형성한 건 확실히 대단한 일이었다.“뭐? 그렇게 빠르다고? 너 타고난 천재 맞네?”진서준이 다소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보통 무인은 원기를 익히는 데만 최소 1년이 걸리는데 그것도 매일 꾸준히 수련할 경우에만 발생하는 일이었다.심지어 재능 있는 자들도 한두 달은 족히 걸린다.그런데 도지아는 단 하룻밤에 이 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