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어르신, 우리 중에서 어르신 실력이 가장 강하니 이따가 기회를 노려 얼른 도망치세요. 반드시 이곳 실상을 호국장군에게 전해야 합니다.”“안 돼, 다 같이 빠져나가야지.”외모가 약간 노쇠해 보이고 나이가 칠순을 넘긴 듯한 노인이 단호하게 말했다.노인의 등에는 여러 군데 칼자국이 나 있었고 피가 옷을 흥건히 적셨다.류재훈은 자연스레 쓴웃음을 지었다.류재훈 일행은 고한수 등과 겨우 열 수도 되지 않는 대결을 벌인 후 이미 이 정도로 상처를 입었다.고한수 일행은 류재훈 일행을 죽이는 데 급해하는 것 같지 않았고 고양이가 쥐를 농락하듯이 여유 있게 몸을 놀렸다.이런 상황에서 류재훈 일행 누군가 앞장서서 자폭하려는 각오하고 도망칠 길을 뚫지 않는 이상, 여기서 무사히 살아남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류재훈과 한 노인의 대화는 고한수 일행의 귀에도 들어갔다.“도망치려고? 너희가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피처럼 붉게 물든 눈빛을 발산하는 고한수는 냉랭하게 웃으며 류재훈을 비웃었다.고한수의 눈에는 이 여섯 명의 대한민국 호국사가 이미 항아리 속의 물고기처럼 도망갈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고한수, 처음 약속했듯이 이놈들은 내 독충 먹이로 줄 거야.”하얀 두건을 두른 섬나라 노인이 대화에 끼어들었다.고한수는 그 노인을 힐끗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약속은 지키지. 이놈들은 네 독충 먹이로 주마.”그 말이 끝나자마자 섬나라 노인의 몸에서 검은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이 검은 안개는 여러 개의 대형 촉수처럼 류재훈 여섯 명을 향해 뻗어갔다.이 안개는 수많은 독충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독충들은 날개를 퍼덕이며 윙윙 소리를 내며 류재훈 일행에게 달려들었다.“큰일이야!”독충이 날아오는 것을 본 류재훈 일행의 얼굴이 일제히 굳어졌다.다들 즉시 체내의 선천강기를 끌어모아 독충을 향해 날렸다.여섯 사람의 선천강기는 어떤 것은 칼과 검으로, 어떤 것은 야수의 형상으로 변해 밤하늘을 가르며 날아갔다.“너희의 그 공격은 대한민국에 널리 전해진
한 노인은 눈이 벌겋게 충혈되고 눈가가 촉촉이 젖었다.사실 한 노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한 노인은 이제 거의 여든에 가까운 고령으로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하지만 류재훈과 다른 대종사들은 달랐다.대다수 대종사가 예순 언저리의 나이였고 앞으로도 살날이 많이 남아 있었다.만약 이곳에서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다면 정말 아쉬울 따름이었다.류재훈은 씩 웃으며 말했다.“한 어르신, 어르신이 목숨을 걸고 우리를 구하려고 하시는데 우리가 어찌 어르신 혼자 죽게 할 수 있겠습니까? 국안부에서는 그런 걸 가르치지 않았습니다.”“맞습니다, 국안부는 동포를 버리는 법이 없습니다.”“이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나머지 사람들도 힘차게 외쳤다.류재훈 일행의 말을 들은 한 노인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맺혔다.“좋아, 오늘 우리 모두 국안부를 위해,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자. 이놈들에게 우리 대한민국 남자의 기개를 보여주자.”“목숨을 걸고 싸우자!”“목숨을 걸고 싸우자!”쿵!폭원단을 삼킨 여섯 사람의 실력이 순식간에 크게 상승했다.하늘을 뒤덮는 기세가 여섯 사람의 몸에서 폭발해 나왔다.“어리석기 짝이 없군. 너희들이 그 작은 약 하나로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죽음을 각오한 여섯 사람을 보며 오다 신유는 눈에 경멸이 가득했다.두 세력 사이의 실력 차이는 그 작은 약 하나로 메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뒤에서 지켜보던 고한수의 눈에는 경외감이 스쳤다.“이제야 알겠어. 왜 대한민국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지...”“됐어, 위선 떨지 마. 우린 이놈들 죽이러 온 거야, 어서 함께 덤비자.”오다 신유도 더 이상 무모하게 혼자서 류재훈 일행 여섯 명을 상대하려 하지 않고 다른 섬나라 무인들을 재촉했다.“다들 함께 달려들어 저놈들을 지옥으로 떨어뜨리자.”그 말과 함께 고한수를 비롯한 열한 명이 일제히 류재훈을 포함한 여섯 명을 향해 돌진했다.대한민국 대종사보다 수도 많고 실력도 우세한 섬나라 강자들을
다들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고한수 쪽 역시 크게 이득을 보지는 못했다.아까의 격전에서 그들 중 네 명이 목숨을 잃었다.하지만 다행히 이 전투는 결판이 난 상황이었다.류재훈 일행은 더는 반격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아쉽군, 더 이상 나라를 위해 힘쓸 수 없다니.”한 노인은 한숨을 내쉬며 눈에 깊은 슬픔이 가득했다.류재훈 일행의 죽음은 세상 사람들에게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심지어 대다수 대한민국 사람은 류재훈 일행이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보이지 않는 배후에서 싸우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것이다.그러나 다들 일말의 후회도 없었다.대한민국 사람으로 태어난 것, 그리고 호국사로서 살았던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지금 이 순간은 모두의 인생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싶구나.”고한수는 깊은숨을 들이쉬며 말했다.“너희는 존경할 만한 상대야. 입장이 다르지만 않았다면 오늘 밤 너희와 함께 술을 나눴을 텐데, 안타깝구나...”“흥. 너희 섬나라는 우리 대한민국에 지울 수 없는 피의 빚이 있어. 대한민국 사람은 그 역사를 절대 잊지 않을 거야.”눈에 깊은 증오가 가득한 한 노인은 고한수 일행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며 대응했다.백 년 전 대한민국의 대재난 사건에서 섬나라는 수천만 대한민국 사람을 학살했다.기개가 있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이토록 엄청난 죄악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죽여!”오다 신유가 차갑게 외쳤다.“너희가 우리 대한민국 땅에서 멋대로 날뛰는 걸 누가 허락했어?”바로 그 순간, 차가운 목소리가 멀리서부터 점점 가까워지며 울려 퍼졌다.고한수 일행은 순간 움찔하며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곳에는 평범한 얼굴의 중년 남자가 손을 주머니에 넣고 서 있었다.그 남자의 옆에는 금빛 머리와 푸른 눈동자의 여자가 함께하고 있었는데, 여자의 눈부시게 섹시한 몸매를 본 섬나라 남성 몇몇 눈에 탐욕스러운 빛이 스쳤다.“얼씨구? 국안
바이올렛은 본래 고한수 일행이 진서준을 죽여 본인의 자유 되찾기를 기대하고 있었다.그런데 진서준이 바이올렛을 위협해 이 섬나라 무인들을 적으로 돌리게 할 줄은 몰랐다.바이올렛도 어쩔 수 없었다.진서준이 바이올렛의 몸에 이상한 표식을 심어 두었기 때문이다.그 표식이 있는 한, 바이올렛의 생사는 진서준의 마음먹기에 달려 있었다.바이올렛의 주먹에는 붉은 선천강기가 감싸여 있었다.주먹이 고한수의 칼날에 부딪힐 때, 금속끼리 부딪치는 듯한 쟁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바이올렛의 강력한 주먹에 밀려 고한수는 연신 뒤로 물러났다.고한수의 검을 쥐고 있던 손아귀에서 피가 흐르고 검신에는 맨눈으로도 선명하게 보이는 균열이 생겼다.낯선 여자에게 밀려 연달아 후퇴하는 고한수를 보고 섬나라 무인들은 전부 충격에 빠졌다.한 노인과 류재훈 일행도 입을 떡 벌리고 믿기지 않는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셋이 힘을 합쳐야 간신히 억제할 수 있는 고한수가 한낱 여자에게 밀리다니, 이건 너무도 놀라운 일이었다...고한수는 분노에 찬 외침과 함께 온 힘을 다해 검을 휘둘러 바이올렛을 반 발짝 물러나게 했다.그 틈을 타 고한수도 재빨리 후퇴했다.“너, 도대체 누구야?”고한수는 바이올렛을 보며 공포에 찬 눈으로 물었다.“이 여자는 내 하인이야.”진서준이 바이올렛 대신 느릿느릿 대답했다.자기가 진서준의 하인이라는 말에 바이올렛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하지만 반항할 수 없기에 바이올렛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뭐라고? 이 여자가 네 하인이라고?”하인이 이 정도라면 주인은 얼마나 강하단 말인가?고한수는 곧바로 진서준을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넌 국안부 소속이 아닌 것 같은데?”“난 너희를 죽이러 온 사람이야. 그것만 알아두면 돼.”진서준은 가볍게 웃으며 여기 온 목적을 밝혔다.“말투를 보니까 너희는 섬나라에서 온 것 같은데, 고필두 그 녀석은 어디 갔어? 왜 안 보이지?”진서준이 고필두의 이름을 언급하자 고한수의 눈빛이 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지 사이로 검의 울림소리가 퍼져 나갔다.고씨 가문의 세 사람이 잡고 있던 검도 미세하게 떨리며 그 검의 부름에 응답하는 듯했다.“너희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아직도 백 년 전처럼 억압받고 유린당하던 나라라고 생각해?”진서준은 손에 잡은 참선검을 옆으로 들며 차가운 눈빛을 내뿜었다.“용멸 계획이라고? 대한민국 천재를 모조리 죽이겠다고? 망상도 정도껏 해. 우리 대한민국 천재가 너희 같은 이족의 손에 살해될 것이라 생각해? 우리 대한민국 등뼈가 너희 손에 꺾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야.”진서준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쿵!주변의 물방울들이 하늘로 솟아올라 일곱 명의 섬나라 무인들을 가운데로 가둬버렸다.진서준의 몸에서 퍼져 나오는 엄청난 기세를 감지한 고한수와 오다 신유 일행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이 무인들이 전성기에 있었다면 진서준과 일전을 벌일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류재훈과 목숨을 걸고 싸운 직후라 체내 강기가 거의 소진된 상태였다.지금 상태로 진서준과 싸운다면 승산은 삼 할도 되지 않을 것이다.“약을 써!”오다 신유가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다들 철저히 준비하고 왔기에 폭원단 같은 단약도 충분히 지참하고 있었다.오다 신유의 말에 모두가 단약을 꺼내 한 알씩 삼켰다.쿵쿵!단약을 복용한 고한수 일행의 기세는 진서준에게 밀리지 않았고 막상막하의 수준이었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서준은 이들을 바라보며 전혀 두려움 없이 평온한 눈빛을 유지했다.“그날 내가 네 아들을 한 칼에 베였듯, 오늘도 널 한 칼에 베여주마.”말이 끝나자 진서준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참선검을 거센 기세로 휘둘렀다.푸른 빛의 검광이 하늘에서 바다로 쏟아지는 폭포처럼 고한수 일행 일곱 명에게 쏟아졌다.칼날이 지나가는 곳마다 바닷물이 양쪽으로 들끓으며 깊이 백 미터에 달하는 해구가 형성되었다.푸른 칼날이 점점 길어지고 넓어져 마침내 천지와 맞닿을 정도로 커지자, 고한수는 움직일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그 광경을 넋 놓고
류재훈 일행은 진서준이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보며 오랜 충격에서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이, 이분이 정말 사급 대종사 경지 김 검선이란 말인가? 어떻게 사급 대종사 경지로 고한수 같은 해외 강자들을 일격에 제압한 거지?”모두의 눈에는 놀라움이 흘러넘칠 정도로 가득 찼다.믿음직한 정보에 따르면 김평안의 실력은 사급 정점에 불과했고 오급에는 이르지 못했다.그러나 지금 김평안의 실력은 칠급 대종사급의 위력을 드러내고 있었다.이건 사급 대종사에 어울리지 않는 무시무시한 실력이었다.심지어 대한민국의 검존이라 불리는 조기강조차 이토록 놀라운 실력을 갖추지 못했을 것이다.“대한민국 인재가 끊이지 않으니 기쁜 일일세.”류재훈 옆의 노인이 말문을 열었다.“이는 우리 대한민국 무도가 쇠락하기는커녕 더욱 강대해졌다는 증거야. 해외 이족들이 우리 대한민국 무도를 꺾으려는 것은 망상에 불과하지.”류재훈 일행도 고개를 끄덕이며 노인의 말에 동의했다.“동남 지역은 이제 걱정 없겠지만 경성과 서북, 그리고 동북과 서남 방향의 상황은 아직 알 수가 없네...”이번 용멸 계획을 위해 초아국의 멸용 조직이 오랜 준비를 해온 만큼, 동남 방어선을 지켰다고 해서 대한민국의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았다.오히려 동남에서의 전투만 보아도 이번 전쟁이 얼마나 혹독할지 예감할 수 있었다.만약 진서준이 제때 도착해 구해주지 않았다면 류재훈과 같은 호국사들 모두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그렇게 되면 동남 지역의 천재들도 자연스레 해외 강자들에게 전부 살해당했을 것이다.“근데 에이미 가문의 바이올렛은 어떻게 김 검선의 하인이 된 거지?”누군가 호기심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아마 김 검선이 바이올렛을 이겼고 바이올렛이 죽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인이 된 걸 거야.”그 추측을 듣자 또 누군가가 혀를 끌끌 찼다.에이미 가문의 바이올렛은 서방 혈수사 중에서도 소문이 자자한 인물이었다.불과 마흔일곱의 나이에 칠급 대종사에 오르고 지의방 랭킹에서 스물여섯 번째 자리에 있었다.대
바이올렛을 모르는 이들이야 어쩌겠냐만, 가문 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사실이 바이올렛은 내심 두려웠다.용란 귀족들은 자존심이 높고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그 귀족들의 눈에는 오직 귀족과 왕족만이 높은 지위에 자리 잡을 수 있고 평민들은 자기를 섬기기 위해 존재하는 천한 존재일 뿐이었다.만약 에이미 가문에게 바이올렛이 천민의 하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녀는 틀림없이 처형당할 것이다.에이미 가문의 얼굴에 먹칠한 바이올렛을 그들이 가만둘 수 없을 것이다.진서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대꾸했다.“아직도 네 신분을 제대로 파악 못 한 모양이구나. 지금 넌 내 포로야. 널 죽이는 건 내 한순간 결정이면 충분해.”바이올렛은 그 말에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너와 내 입장이 같을 것 같아? 네가 날 붙잡아 놓은 것도 다른 해외 세력의 침략 일정을 내게서 얻어내려고 그런 거 아니야? 다시 말하지만 우리 관계는 협력일 뿐이야!”진서준은 더 이상 이 여자와 쓸데없는 말을 주고받기 싫어서 바이올렛을 지나쳐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이 벼락 맞아 죽을 놈!”닫힌 문을 바라보며 바이올렛은 지금이라도 뛰어 들어가 진서준과 밤새도록 결투를 벌이고 싶었다.하지만 이 생각은 머릿속으로만 가능한 일일 뿐, 실제로 행동으로 옮길 순 없었다.그렇게 했다간 바로 다음 순간, 바이올렛은 차라리 죽는 게 나을 만큼 생지옥 같은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방으로 돌아온 진서준은 내일 서북 지역으로 가기 위해 오늘 밤 충분히 쉬어두기로 했다.동남쪽 위기는 무사히 해결됐고 해외 세력의 다음 공격이 시작될 곳은 서북 사막이 될 예정이었다.진서준이 불을 끄고 취침하려던 순간,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전화 건 사람이 허사연이라는 걸 보고 진서준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혹시 집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하는 생각에 진서준은 급히 전화를 받았다.“사연아, 무슨 일이야? 집에 무슨 일 생겼어?!”진서준의 걱정이 섞인 다급한 질문을 듣자 허사연은 마음이 따뜻해졌다.“아니야, 여긴 아무
동북, 조씨 가문 저택에는 불빛이 가득했다.조기강과 조태희 두 사람은 거실에 앉아 국안부가 올린 게시물을 보고 있었다.휴대폰을 내려놓은 후, 조태희는 조기강을 바라보며 말했다.“진서준과 김평안이라는 두 사람, 네 검존 명성을 완전히 가로챈 셈이구나.”조기강은 무덤덤한 표정만 지을 뿐, 전혀 화내지 않았다.“명성은 그저 허울일 뿐이야. 중요한 건 무엇을 이루었느냐지. 이 둘 중 한 명은 강남에서 악명이 자자한 두 악인을 처단했고 다른 한 명은 국안부의 대종사들을 구한 것도 모자라 섬나라 강자 7명을 단번에 베어 버렸어. 이 정도면 충분히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만해.”동생이 이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자 조태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조태희는 혹시나 조기강이 질투심에 사로잡혀 진서준이나 김평안과 겨루려 할까 봐 걱정했었다.만약 진짜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국안부는 분명 김평안과 진서준 편에 설 것이다.지금 조씨 가문의 위상은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동북의 심씨 가문과 변씨 가문이 서서히 조씨 가문을 넘어설 기세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동북은 세 가문이 세력을 나누는 삼국지 양상이 될지도 모른다.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조민영은 가문의 앞날을 위한 정치적 혼인의 운명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하지만 내 검도 무디진 않았어.”조기강은 천천히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북쪽 변방에 외국 이족이 출몰한다 들었는데 내일 아침에 직접 가서 한번 살펴봐야겠어.”조태희는 그 말에 멈칫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좋은 생각이야. 검존의 실력이 그 둘에 뒤지지 않는다는 걸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좋은 기회야.”진서준과 김평안이 최근에 벌인 일들이 조기강의 자존심을 강력하게 자극한 모양이었다.조기강은 진서준과 김평안을 질투하는 건 아니었지만 자기 검존 봉호가 헛되이 주어진 것이 아님을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했다.다음 날 아침, 조기강은 동북에서 북쪽 변방 초원으로 향했다.같은 시간, 진서준도 바이올렛을 데리고 서북의 안성에 도착했다
“뭐라고? 불법적인 일이 우리 가게에서 일어난다고? 말도 안 돼.”성현도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넌 전신전 소속이잖아. 그런데 네 오빠인 내가 어떻게 법률을 어기는 일을 하겠어?”“그럼 이 사람들은 왜 부른 거야? 집단 폭력도 불법이거든.”성미영은 차가운 시선을 보이며 성현도와 따졌다.“미영아, 이건 내가 싸우려던 게 아니야. 저 녀석이 일부러 시비 걸러 온 거라고.”성현도는 진서준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이놈이 일부러 우리 찻집에 난입해 행패를 부리고 상철을 두들겨 패서 머리에 혹이 다 나버렸어. 난 단순히 정당방위를 위해 부른 거라고.”성미영이 등장하자 성현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솔직히 실력만 놓고 보면 성현도는 성미영보다 한참 부족했다.게다가 성미영은 전신전 소속인지라 저 남녀가 군부 조직인 전신전을 적으로 돌릴 리 없었다.군대를 건드리는 순간, 무조건 좋은 결과는 있을 수 없었다.“진서준, 도대체 무슨 일이야?”성미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라? 너희 둘이 아는 사이야?”성현도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방금 내려놨던 마음이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난 사람을 찾으러 왔어. 하씨 가문 하경범이 이 위층에 있다고 들었는데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어.”진서준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그리고 또 하나, 저 위에서 불법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도 하더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어.”이 말에 성현도의 표정이 단숨에 험악해졌고 즉시 반박에 나섰다.“헛소리 마. 우리 가게는 단순한 찻집이야. 불법적인 일 따윈 없어. 근거없는 소문을 왜 털어놓고 난리야?”“미영아, 저 녀석한테 속지 마. 난 네 사촌 오빠야. 내가 그런 불법적인 짓을 할 사람이겠어?”성미영이 곧바로 진서준에게 물었다.“진서준, 너 증거 있어?”“직접 올라가 보면 다 알게 될 거잖아?”진서준이 가볍게 말했다.“오빠, 위층으로 가자.”성미영이 단호하게 말했다.“그, 그건 좀 곤란해. 위층엔 귀
순간, 장내는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모든 시선이 진서준에게 쏠렸고 사람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다들 진서준을 그냥 얼굴만 반반한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짜 고수였다.성현도의 부하 중 최고 실력자조차 상대가 되지 않았다.성현도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렸고 상철을 향해서 욕설을 날렸다.“쓰레기 자식, 이런 애송이 하나도 못 이겨?”부하가 지면 망신당하는 건 결국 성현도 자신이었다.이대로 체면을 구긴 채 끝낼 수는 없었다.이대로 넘어가면 앞으로 르벨 재벌 2세들 사이에서 조롱거리가 될 게 뻔했다.“이봐, 네 실력이 괜찮은 건 인정할게.”성현도가 싸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근데 너 혼자서 백 명을 상대할 수 있어? 천 명은? 잘 들어. 내 부하는 수도 없이 많아. 너 같은 놈 하나 처리하는 데 전화 한 통이면 충분해.”진서준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다시 말하지만 난 그냥 하경범을 찾으러 온 거야. 그 녀석만 넘기면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해주지.”“없던 걸로 한다고?”성현도가 그 말에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너 지금 누굴 상대로 협상하려 드는 거야? 난 성씨 가문의 직계야. 날 건드리면 상대해야 할 건 나 하나가 아니라 우리 가문 전체라고.”그때,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곧이어 검은색 전투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이 남자들은 전부 성씨 가문의 경호원이었고 실력도 만만하지 않았다.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무려 50명 이상이었다.한순간에 텅 비어 있던 로비가 사람들로 꽉 찼다.“저 자식 끝났네. 이 정도 성씨 가문 인원이라면 아무리 강해도 버틸 수가 없지.”“그러게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없잖아.”“왜 쓸데없이 성현도를 건드린 거지? 스스로 무덤을 판 거잖아.”구경꾼들은 이 광경에 각자 다른 감정을 보였다.누군가는 동정을, 누군가는 아쉬움을, 또 누군가는 짙은 흥미를 보였다.“사연아, 넌 좀 쉬어. 이놈들은 내가 처리할게.”진서준이 앞으로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가 거의 2미터에 달하는 거구의 사내가 찻집 안으로 들어왔다.남자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상철아, 저놈 다리 하나 부러뜨려서 내던져.”성현도가 진서준을 가리키며 명령했다.“알겠습니다.”상철은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진서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서준아, 내가 할게.”허사연의 눈에는 불꽃 같은 전투욕이 타올랐다.“조심해. 저 녀석은 횡련 종사야.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진서준이 조용히 귀띔했다.“알았어. 설령 못 이긴다고 해도 어차피 네가 있잖아?”허사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진서준이 곁에 있는 한, 허사연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이봐, 사내자식이 여자 뒤에 숨는 게 말이 돼?”상철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이봐, 껑충이. 여자를 얕보지 마. 일단 이기고 나서 말해.”허사연이 상철을 도발했다.“아가씨, 그런 기생오라비 말고 날 따르지 그래? 밤마다 널 천국으로 보내줄 수 있는데?”상철이 음흉하게 웃었다.“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얼굴이 싸늘해진 허사연이 주먹을 날렸다.강렬한 펀치가 공기를 가르며 폭발음을 일으켰고 그 위력은 철판도 뚫을 수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상철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내가 가만히 서 있어도 넌 날 어쩔 수 없어.”“닥쳐!”허사연이 분노에 차 주먹을 그대로 상철의 얼굴로 내리꽂았다.상철은 일부러 머리를 숙이며 대머리 정수리로 받아냈다.쿵!둔탁한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주먹이 상철의 머리를 강타했으나 대머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허사연이 몇 걸음 물러섰다.순간 손에 뜨거운 통증이 밀려왔고 뼈가 부서질 것 같았다.손을 확인하자 하얀 피부였던 손등이 새빨갛게 부어올랐다.상철은 자기 머리를 한번 쓸어내리더니 빙그레 웃었다.“아가씨, 이제 내 실력을 알겠지?”그 모습에 허사연의 승부욕이 다시 불타올랐고 콧방귀를 뀌며 다시 달려들었다.이번에는 다리를 높이 들어 올려 상철의 머리를 내려찍었다.‘머리가 단단하다고 자랑하
이렇게 예쁘고 섹시한 여자가 싸움 실력이 이렇게 대단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완전 여성판 이소룡이었다.“너, 너희들 정말 너무 대담한 거 아니야? 여기가 어디인지 알기나 해? 어디서 대놓고 싸움질이야?”종업원은 순간 놀란 뒤 분노에 찬 얼굴로 진서준와 허사연을 가리켰다.찻집이 문을 연 이후로 이렇게 난동을 부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진서준과 허사연이 첫 사례였다.주변의 구경꾼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싸움 좀 하면 뭐해? 여긴 성씨 가문의 구역이야. 성씨 가문에서 한마디만 하면 저 남녀는 오늘 밤중으로 사라지겠지.”“어휴, 저 여자 너무 아까워. 저렇게 예쁜데 왜 죽지 못해서 안달이지?”“여자는 살 수도 있겠지만 남자는 무조건 죽을걸.”사람들은 저마다 수군거리며 이미 진서준과 허사연의 결말을 예상하는 듯했다.“그럼 네 말대로라면 내가 널 때린다 해도 얌전히 맞고 있어야 한다는 거야?”허사연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종업원에게 다가갔다.“오지 마!”종업원은 겁에 질려 연신 뒷걸음질 쳤다.“어떤 미친놈이 내 구역에서 소란을 피우는 거야?”그 순간, 2층에서 한 사람이 내려왔다.모두가 일제히 시선을 돌려 그 사람을 확인하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성현도가 오늘 여기 있었네?”누군가 그 청년을 알아보았다.“저 둘 끝장났네. 성현도는 악명 높은 냉혈한이야.”그 청년은 바로 찻집의 사장인 성현도였다.성현도는 르벨 재벌 2세 사이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친구에게는 무조건 의리를 지키지만 적에게는 무자비했다.성현도의 고문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았고 게다가 무인으로서 무공 실력도 상당했다.“사장님, 저 남녀가 와서 난동을 부렸어요.”종업원은 성현도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장이 나온 걸 확인한 허사연은 주먹 한 방에 종업원을 기절시켜 버렸다.“뭐야?”성현도의 눈이 가늘어졌고 표정이 험악해졌다.자기 앞에서 대놓고 부하를 때리다니, 이건 너무나도 명백한 도발이었다.“아가씨, 우리 처음 보는 사이 맞지? 우리
그리고 오후 2시가 되자 진서준은 허사연을 데리고 조호가 말한 천국찻집으로 향했다.겉모습만 보면 이 찻집은 진짜 전통찻집 같았고 규모도 꽤 컸다.하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 보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1층과 2층까지는 정말 평범한 찻집처럼 꾸며져 있었고 누가 봐도 이상한 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하지만 3층으로 올라가려면 회원권이 있어야 하거나 사장이 직접 허락한 사람만 출입할 수 있었다.“손님, 아가씨,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진서준과 허사연이 차를 마시러 온 줄 안 종업원이 빠르게 달려와 안내하려 했다.“그럴 필요 없어. 난 하경범을 찾으러 왔거든.”진서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네?”종업원이 순간 얼어붙었다.“혹시 하씨 가문의 하 도련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맞아.”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손님은 누구신지...”종업원이 신중하게 물었다.진서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냥 복수하러 왔다고 전해.”그놈 아버지라고 하는 건 자기를 모욕하는 것과 같았고 친구라고 하기도 기분이 더러웠다.그 말에 종업원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손님, 여기서 장난치지 마세요.”하경범은 르벨에서 유명한 재벌 2세였다.이 찻집의 사장과도 막역한 사이였고 여기서 일하는 직원이라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왜? 못 믿겠어?”진서준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손님, 하 도련님에게 복수하려던 사람은 단 하루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종업원이 경고하듯 말했다.“그런 농담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그 말을 듣자 진서준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이렇게 전해. 그 하경범이 두들겨 맞고 나자빠지게 했던 진서준이 왔으니 당장 기어 나오라고 말이야.”진서준의 뻔뻔한 태도에 종업원은 어이가 없었다.“좋습니다. 손님이 그렇게 죽고 싶다면 제가 기꺼이 도와드리죠.”종업원은 바로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문제 발생했습니다. 난동자가 있습니다.”쿵! 쿵!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건장한 남자 스무 명이 들이닥쳤다.전부 검은
진서준과 허사연은 차를 타고 조호의 회사로 향했다.이 회사는 그냥 겉치레일 뿐, 진짜 돈이 들어오는 곳은 유흥업소들이었다.유흥업소를 얕잡아보면 안 된다.운 좋게 돈 많은 도련님들이라도 걸리면 하룻밤에 수억 원이 순식간에 손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진서준 씨!”진서준이 들어서자 조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조호는 진서준 옆에 있는 허사연을 힐끗 쳐다본 뒤 고개를 숙이고 감히 더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잡담은 그만하고 하경범을 잡아가는 제일 좋은 타이밍만 말해.”진서준이 직설적으로 물었다.이 말에 조호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매일 오후마다 하경범은 천국찻집이라는 곳에 갑니다.”조호는 재빨리 대답했다.“보통은 경호원 몇 명만 데리고 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얼씨구? 저런 인간이 매일 차나 마시러 간다고?”진서준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그게... 진서준 씨, 사실 그곳은 이름만 찻집이지 실제로는...”조호는 옆에 여성이 있다는 걸 의식해서 말을 흐렸지만 진서준은 그 뜻을 단번에 알아챘다.“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차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그냥 인기 많은 인터넷 셀럽이 가득한 고급 유흥업소일 것이다.“진서준 씨, 듣자 하니 그 찻집의 주인은 성씨 가문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진짜로 움직이실 거라면 하경범이 이동 중일 때를 노리는 게 좋을 겁니다.”조호가 조심스럽게 조언했다.“응? 성씨 가문이 이런 사업도 해?”진서준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진서준은 오영수에게서 성미영에 대한 정보를 들은 적이 있었다.정의로운 성격의 성미영이 자기 가문에서 이런 유흥업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네, 듣기로는 성씨 가문의 한 직계 후손이 운영한다고 합니다. 여자에 미쳐 있는 놈이라 르벨의 돈 많은 도련님들과 꽤 친분이 깊다고 하더군요.”조호는 본인이 아는 정보를 전부 쏟아냈다.“좋아, 대충 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조호의 회사를 나온
진서준이 허사연의 캐리어를 들어주며 옆방으로 걸어갔다.그 뒷모습을 보며 도지아는 부러움이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인간은 원래 모여서 사는 걸 선호하는 동물이다.사회를 벗어나서 혼자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가족도 친구도 없이 너무 오래 지내다 보면 결국 감정 없는 시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그렇게 되면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없어질 것이다.“어제 전화할 때 그랬었지? 이번에 너 자기 출신을 찾으러 온 거라고.”호텔 방으로 돌아온 후, 허사연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너 원래 경성 진씨 가문 사람이잖아?”“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어. 그런데 할아버지가 예전에 말해주셨어. 사실 우리 아버지는 어릴 때 길에서 주워 온 아이였다고.”진서준은 허사연에게 숨길 생각이 없었다.허사연은 진서준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허사연이라면 이 비밀을 절대 밖으로 흘리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뭐라고? 아버님이 주워 온 아이라고?”허사연이 깜짝 놀랐다.“그래.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건 나뿐이야. 가족 중에서도 할아버지가 나한테만 알려주셨지.”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전, 오영수가 내 등에 있는 용을 보고는 내가 용맥의 일족이라고 했어. 그래서 오영수를 따라 여기 와서 오영수 셋째 삼촌에게 내 출신에 관해 알아보려 했던 거야.”“네 등에 용이 있다고? 난 한 번도 본 적 없는데?”허사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동안 둘이 알몸으로 함께한 시간도 적지 않은데 허사연은 한 번도 본 기억이 없었다.“내가 체내 혈기를 모을 때만 그 용이 나타나거든.”진서준이 설명을 이어갔다.“그런데 오영수 삼촌이 아직 돌아오질 않아서 일단은 여기서 며칠 기다려야 해.”“아니, 그럼 오씨 가문에서 널 안 재워줬어?”허사연이 의아해했다.명문대가인 오씨 가문에 빈방이 없을 리가 없었다.“그날 오영수를 찾아갔는데 마침 오영수 할아버지가 위중했어. 그리고 그 집안엔 그 어르신을 그냥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지.”진서준이 담담하게
“진짜 예쁜 새색시 숨겨놓고 있었네?”허사연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누구라도 자기 남자 방에 예쁘고 몸매가 완벽한 여자 하나가 같이 있는 걸 보면 의심 안 할 수가 없었다.게다가 지금은 아침이었다.설마 이 여자가 아침에 막 찾아온 건 아니겠지?“사연아, 오해야. 내가 제대로 설명할게.”진서준은 머리가 띵해졌고 뇌가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아가씨, 오해하지 마세요. 어제 저랑 진서준이 같은 방에서 잔 건 맞지만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저 밤새 한숨도 못 잤다니까요?”도지아가 황급히 해명에 나섰다.“네? 밤새 안 자고도 아무 일 없었다고요?”허사연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설마 밤새 불태우느라 못 잔 건 아니겠죠?”허사연의 농담과 진담이 뒤섞인 말에 진서준은 헛웃음만 나왔다.“사연아, 이쪽은 도지아야. 우리 진짜 그냥 친구야. 일단 들어와. 천천히 설명할게.”허사연이 방에 들어오자 진서준은 서로에게 소개했다.그러고는 이 방에서 일어난 상황을 설명했다.“도지아는 황예은이 소개해 준 환자야. 다리 치료를 부탁받았거든. 종아리를 봐봐. 이틀 전에 내가 직접 발라준 연고가 있어.”허사연이 내려다보자 확실히 연고가 발라져 있었다.“그리고 도지아가 밤새 안 잔 건 원기를 수련하느라 그랬던 거야. 너도 예전에 수련한다고 며칠씩 안 잔 적 있잖아?”허사연은 오해가 풀리자 그제야 빙그레 웃었다.“내가 뭐 어쨌다고 그렇게 호들갑이야?”“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그러는 거잖아.”진서준이 빠르게 대답했다.“뭐야? 내가 그렇게 의심 많고 질투 많은 여자로 보여?”허사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아, 아니지. 우리 사연은 누구보다 속이 넓은 부드러운 여자지.”진서준이 급히 정정했다.“됐어, 너 겁먹은 거 너무 귀엽다.”허사연이 피식 웃었다.“넌 여기 좀 쉬고 있어. 내가 방 하나 잡고 올게.”진서준은 더 머뭇거릴 틈도 없이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다.진서준의 뒷모습을 보며 허사연은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도지아 씨, 진서준이
“내가 가면 안 돼?”사실 진서준은 거절하려 했었다.르벨은 안개가 짙게 깔린 늪지대 같은 곳이라 진서준조차도 어디에 함정이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그러니 허사연이 온다면 다칠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거절하면 허사연이 상처받을 게 뻔했다.“당연히 되지. 지금 위치 보낼게.”진서준은 단호하게 말하며 위치를 보냈다.자기 여자를 지킬 자신도 없으면서 강자들을 상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자기야, 잘 자.”허사연이 애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너도 일찍 자.”진서준이 다정하게 답했다.전화를 끊고 나니 진서준의 졸음이 싹 가셨다.진서준은 창가로 다가가 이 화려한 도시를 내려다봤다.“오씨 가문, 안씨 가문, 하씨 가문... 너희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든 난 전부 박살 낼 거야. 이번엔 반드시 나와 아버지의 정체를 밝혀내고 말겠어.”진서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그렇게 별다른 사건 없이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진서준이 막 눈을 뜨자마자 도지아의 흥분한 외침이 들려왔다.“진서준, 됐어. 나 생겼어!”도지아는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는데 밤새 잠을 자지 않은 게 분명했다.진서준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너 아직 처녀 아니었어? 대체 어떻게 임신한 거야?”“미친놈아, 임신은 개뿔, 무슨 헛소리야?”도지아는 얼굴이 빨개지며 진서준을 노려봤다.“그럼 왜 아침부터 난리야?”진서준이 되물었다.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아침부터 흥분해 날뛰지 않을 것이다.“어제 네가 준 수련법 기억나지? 나 벌써 원기를 형성할 수 있게 됐어.”자기가 대단하다고 여긴 도지아는 자랑스럽게 선언했다.고작 하룻밤 만에 원기를 형성한 건 확실히 대단한 일이었다.“뭐? 그렇게 빠르다고? 너 타고난 천재 맞네?”진서준이 다소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보통 무인은 원기를 익히는 데만 최소 1년이 걸리는데 그것도 매일 꾸준히 수련할 경우에만 발생하는 일이었다.심지어 재능 있는 자들도 한두 달은 족히 걸린다.그런데 도지아는 단 하룻밤에 이 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