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준의 영기가 본인의 몸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낀 순간, 신용수는 있는 힘을 다해 진서준의 손을 밀어냈다.“날 위해 힘을 낭비하지 마...”신용수의 목소리는 힘없이 떨렸다.“진군님, 제가 진군님을 살릴 수 있어요...”진서준은 눈가가 붉어졌다.아까 지현진이 진서준을 배수정과 함께 밖으로 내보냈을 때, 진서준은 신용수가 지현진과 함께 전장으로 갈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호텔로 돌아와 바이올렛에게 신용수와 지현진이 이미 떠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뒤늦게 모든 걸 깨달았다.신용수는 이번 전투가 목숨을 잃을 만큼 위험하다는 걸 알았기에 일부러 진서준을 멀리 보낸 것이 분명했다.나이가 많아 죽음이 두렵지 않은 자신과 달리 진서준은 아직 젊고 대한민국 무도계의 미래를 책임져야 할 젊은 인물 중 한 명이었다.“아니야... 내 오장육부가 이미 파열돼 얼마 못 버틸 거야.”신용수의 동공이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진서준...”“진군님, 전 여기에 있어요!”진서준은 신용수의 손을 꼭 잡으며 대답했다.“대한민국 무도는 이제 너희 젊은이들에게 맡기마...”그 말과 함께 진서준의 손에 있던 그 말랐지만 힘센 손은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신용수는 그렇게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진서준의 눈은 핏발이 서고 그의 가슴속에서 엄청난 분노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올림푸스! 멸용 조직! 이 빚은 반드시 피로 갚게 할 거야!”진서준과 거기를 두고 따라온 바이올렛은 그제야 전장에 도착했다.바이올렛은 이미 숨을 거둔 신용수를 보자 충격을 금치 못했다.이 사람은 대한민국에서 신처럼 떠받드는 어엿한 호국장군이었다.그런 사람이 서북 전장에서 이렇게 허무하게 목숨을 잃다니...바이올렛은 아무 말 없이 진서준의 뒤에 조용히 서서 그의 분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숨죽이고 있었다.오랜 시간이 흐른 후, 진서준은 천천히 일어섰다.“이 사람들 중에 네가 말한 올림푸스 신전 신왕이 있는지 확인해 봐.”진서준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바이올렛의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
게다가 호국장군뿐 아니라 삭발한 노인도 있었다.그 노인은 강하지 않았지만 헬라스의 부하들을 두부 베듯 가볍게 베어내며 차례로 쓰러뜨렸다.어제 멸용 조직에서 칠급 절정 강자 두 명을 보내주지 않았다면 헬라스는 대한민국을 무사히 빠져나올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두 시간 가까이 달린 끝에 헬라스는 어느 한적한 공항에 도착했다.그곳에는 오직 한 대의 헬리콥터만이 대기 중이었다.“신왕님, 어쩐 일로 이렇게 빨리 돌아오셨습니까?”헬라스를 맞이하려고 기다리고 있던 신전 사람은 헬라스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당장 이륙해.”헬라스는 분노에 차서 소리쳤고 지원 인원도 더 이상 물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의 명령에 바로 응하며 헬리콥터를 이륙시켰다.하지만 헬리콥터가 막 공중으로 떠오르는 순간, 헬라스의 가슴속에 강렬한 위기감이 스쳐 지나갔다.헬라스는 고개를 내밀어 지면을 내려다보았다.방금 그들이 떠난 자리에서 누군가의 빈약해 보이는 실루엣이 서 있었다.그 인물은 천천히 청색 장검을 들어 올리더니 아래에서 위로 검을 휘둘렀다.곧이어 하늘을 가릴 정도로 거대한 청색 검광이 나타나 헬리콥터를 향해 날아왔다.“젠장, 뒤에 추격자가 있었단 말인가? 아까 아무런 기운도 느끼지 못했는데?”헬라스는 얼굴이 창백해졌고 검광이 헬리콥터에 닿기 직전에 황급히 뛰어내렸다.쾅!둔탁한 폭발음과 함께 미사일로도 쉽게 파괴되지 않는 전투용 헬리콥터가 두 동강 나며 화려한 불꽃을 피워 올렸다.헬라스는 중상을 입은 채로 헬리콥터에서 뛰어내려 착지에 실패해 바닥에 곤두박질쳤다.헬라스가 간신히 머리를 들기도 전에 방금 검을 휘둘렀던 인물이 그의 앞에 다가왔다.달빛이 그 인물의 얼굴을 가려 헬라스 위에 악마처럼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진서준은 얼음같이 차가운 눈빛으로 금발에 푸른 눈의 중년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청년이야?”헬라스는 진서준의 젊은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헬라스는 이곳까지 쫓아온 사람이 대한민국의 호국장군 중 한 명일 거라 생
[호국장군 무양진군이 서북 사막에서 전사하다!]대한민국 무도계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용멸 계획이 시작된 지 고작 사흘 만에 신과 같은 존재인 호국장군이 전사했다. 앞으로의 전쟁은 더욱 잔혹해질 것이 분명했다.한편, 허사연도 무도 포럼의 게시글을 주시하고 있었다.서북에서 호국장군이 전사했다는 게시글을 보자마자 허사연의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지금 진서준도 서북에 있다는 사실을 허사연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밤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허사연은 진서준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한참 동안 울리기만 할 뿐, 진서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진서준이 설마 호국장군처럼...”얼굴이 창백해진 허사연은 즉시 옷을 챙겨 입고 비행기를 타고 서북으로 가서 진서준을 찾으려고 결심했다.집을 나서기 전, 허사연은 메모를 남기고 허성태가 구입한 비행기를 타고 안성으로 향했다.비행기가 착륙할 때쯤, 태양은 이미 수평선 위로 떠올라 따뜻한 햇살이 대지를 비추고 있었다.허사연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진서준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이번에는 전화가 연결되었지만 진서준이 아닌 낯선 여자가 받았다.“진서준을 찾으시나요?”허사연은 깜짝 놀라 서둘러 물었다.“맞아요, 진서준은 어디에 있나요?”“진서준은 지금 장례식장에 있어요.”전화 너머에서 바이올렛이 대답했다.“어느 장례식장이죠?”허사연이 다시 바이올렛에게 물었다.안성 같은 큰 도시에는 장례식장이 여러 곳이 있을 터였다. 그러니 특정 위치를 말하지 않으면 허사연이 찾기 어려울 것이었다.“사막 근처에 있는 장례식장이에요.”말을 마친 바이올렛은 전화를 끊었다.허사연은 즉시 휴대폰으로 사막에 가장 가까운 장례식장을 찾아낸 뒤, 택시를 잡아타고 바이올렛이 말한 곳으로 급히 향했다.장례식장 안에서 진서준은 냉정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진서준의 눈에는 슬픔도 기쁨도 없는 듯했다.진서준의 곁에는 배수정이 조용히 서 있었다.신용수와 지현진의 유해는 이미 정돈된 상태였다.두 사람의 피부색은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
배수정은 그저 억지로 강한 척, 이별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척, 생사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신용수와 지현진의 시신은 오래 타올랐다.한 시간이 지난 후, 직원이 정교한 작은 나무 상자 두 개를 들고나왔다.배수정은 지현진의 유골을 안고 진서준은 신용수의 유골을 품에 안았다.“소림까지 데려다줄까요?”진서준이 배수정에게 질문을 건넸다.“괜찮아요, 소림 가는 길은 기억하고 있어요.”배수정은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진서준 씨, 이제 이만 헤어지죠.”“그래요. 나중에 시간 나면 소림에 찾아갈게요.”배수정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본 뒤, 진서준은 허사연과 함께 호텔로 돌아갔다.“서준아, 너와 무양진군은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였어?”허사연은 진서준의 눈에 서린 슬픔을 알아챌 수 있었다.진서준의 이런 고통스러운 표정을 처음 본 허사연의 마음도 덩달아 아팠다.“아니야, 무양진군과 만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어.”진서준이 솔직하게 말했다.“어젯밤, 무양진군은 일부러 나와 배수정을 다른 곳으로 보냈어. 그리고 지현진 마스터와 유씨 가문 4대 금강과 함께 사막으로 향했어...”진서준은 어젯밤 있었던 일을 허사연에게 대략 설명해 주었다.허사연은 신용수가 진서준을 보호하려고 일부러 그를 딴 곳으로 보냈다는 얘기를 듣고 마음속 깊이 이 얼굴도 모르는 진군에게 경의를 표했다.이렇게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할 줄 아는 사람은 대한민국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밤새 고생했어. 얼른 푹 쉬어.”허사연은 진서준의 머리를 자기 가슴에 끌어안으며 부드럽게 말했다.그리고 동시에 진서준의 관자놀이를 손으로 부드럽게 마사지해 주었다.그 편안한 느낌에 진서준은 금세 잠들고 말았다.진서준은 지금 확실히 지쳐 있었다.어젯밤, 헬라스가 도망칠까 봐 두려웠던 진서준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두 시간 동안 전속력으로 헬라스를 추격했다.헬라스를 처치한 뒤에도 진서준은 바로 대한민국으로 돌아와 신용수의 시신을 장례식장에 모셨다.허사연은 잠든 진서준을 보며
듣기만 해도 긴박한 문 두드리는 소리에 진서준은 몸이 순간적으로 경직되었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채 빠르게 문 쪽으로 걸어갔다.“서준아, 무슨 일이야?”허사연은 진서준의 긴장한 모습을 보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내 뒤에 조용히 있어.”진서준은 허사연에게 자기 뒤로 숨으라고 했다.만약 문밖의 사람이 적이라면 허사연을 어떤 피해도 입지 않도록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허사연이 조용히 뒤로 물러나자 진서준은 문손잡이를 가볍게 돌려 문을 열었다.문이 열리자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본 진서준의 눈빛은 차가운 기운이 스쳤다.“유경풍, 여기서 뭐 하는 거야?”진서준을 바라보는 유경풍의 마음도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예전에 많은 사람 앞에서 진서준에게 따귀를 맞은 그 억울함을 아직도 풀지 못한 상태인 데다 소중한 딸 유연비가 진서준의 칼에 두 팔이 잘려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상황이었다.그리고 어젯밤, 유씨 가문의 4대 금강이 전부 사막에서 전사해 유씨 가문의 전투력이 크게 약해졌다.하나하나가 마치 칼날처럼 유경풍의 마음을 아프게 도려냈고 유경풍이 진서준에 대한 분노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해졌다.하지만 지금, 유경풍은 진서준과 정면으로 맞붙으려는 생각은 없었다.4대 금강이 모두 죽었고 유씨 가문에서 진서준을 처치할 수 있는 사람은 유씨 가문의 어르신밖에 남지 않았다.하지만 그 유씨 가문의 어르신은 지금 거의 은둔 상태였고 유씨 가문이 생사의 갈림길에 처하지 않는 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유경풍이 유씨 가문의 어르신을 불러 진서준을 처치해 달라고 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래서 유경풍은 이번에 진서준과 화해하려고 여기에 온 것이었다.유경풍은 깊이 숨을 들이켜고 말문을 열었다.“진서준, 난 오늘 유씨 가문을 대표해서 너와 화해하러 온 거야.”“화해라고?”진서준은 그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유씨 가문이 이렇게 빨리 고개를 숙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진서준은 유씨 가문 같은 명문대가가 자기와 진지한 태도로 화해하려면 어느 정도 큰
그때가 되면 진서준은 오히려 죽음을 자초하는 위험에 처할 것이다.차라리 지금 유경풍에게 체면을 회복하고 좋게 좋게 넘어갈 기회를 주는 게 나을 것이다.게다가 진서라에게 꼭 필요한 약재도 얻을 수 있고 진서준도 이 시간을 이용해 수련에 집중할 수 있으니 절대 나쁜 제안이 아니었다.“우리 유씨 가문은 더 이상 널 적으로 돌리지 않을 거야.”유경풍이 진지한 태도로 진서준과 약속했다.하지만 진서준은 마음속으로 콧방귀를 끼며 유경풍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유경풍은 단지 시간을 끌고 있을 뿐이었다.하지만 진서준도 지금 이 시간이 수련하기 적절한 시간이기도 했다.유씨 가문의 유자성과 유천효가 수련을 마친 뒤에 세상에 나올 때쯤, 진서준의 실력도 지금과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그럼 난 이만 돌아갈게.”유경풍은 말을 마친 후, 부하들과 함께 호텔을 떠났다.유경풍 일행이 떠난 뒤 허사연이 그제야 조심스럽게 물었다.“아까 그 유경풍은 누구야?”“유지수와 유연비 친아버지이자 유씨 가문 가주야.”진서준이 유경풍을 소개했다.유경풍이 유지수의 아버지라는 사실에 허사연은 깜짝 놀랐다.허사연은 유지수가 이런 신분도 있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유연비가 직접 말해주지 않았다면 진서준도 유지수와 서북의 유씨 가문가 관련이 있다는 걸 쉽게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하지만 그런 관계가 있다고 해도 소용없었다. 유지수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었다.“보해로 가자.”진서준은 허사연의 손을 잡고 함께 떠났다.문 앞에서 진서준을 기다리고 있던 바이올렛은 그가 나오자 입을 열었다.“진서준, 보해는 네 마지막 목적지야. 약속대로 이제 날 보내야 하지 않겠어?”“넌 지금 바로 떠날 수 있어.”진서준이 뜻밖에도 통쾌하게 말했다.“내 몸에 네가 남긴 주술이 아직 남아있어. 먼저 풀어줘야 할 게 아니야?”바이올렛이 진지하게 말했다.사실 진서준이 바이올렛에게 남긴 건 주술이 아니라 영결이었다.하지만 서양 사람들은 이런 힘을 주술이라고 불렀다.“안 돼, 내가
갑자기 성도에 나타난 허윤진을 본 진서준은 놀란 표정으로 허사연을 쳐다보았다.진서준이 의아해하는 것을 예상한 듯, 허사연은 웃으며 설명했다.“어제 네가 잠든 사이에 윤진이 내게 어디 갔냐고 전화했어. 그래서 우리가 곧 여기 올 거라는 소식을 전해줬지.”진서준의 의문은 즉시 풀렸지만 그의 눈빛에는 여전히 우려가 묻어났다.여기는 보해와 매우 가까운 곳이었다.만약 해외의 이족들이 진짜 국안부의 방어선을 뚫고 온다면 이족들이 일반인들에게 손을 대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그 가능성이 작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해외의 이족들이 방어선을 뚫고 들어와 우연히 허사연 자매와 마주친다면 그건 정말 골치 아픈 문제였다.“진서준, 너 뭐야? 왜 날 보자마자 그렇게 걱정이 가득한 표정을 보여?”진서준이 눈살을 찌푸린 걸 보자 허윤진은 진서준이 자기를 보고 싶지 않아서 그런 줄 알아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사실 허윤진은 진서준을 걱정하느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진서준은 허윤진이 오해한 것을 보고 급히 솔직한 우려를 털어놓았다.그제야 진서준이 자기를 걱정한 사실을 알게 된 허윤진은 마음이 달콤해졌다.“흥, 그래도 좀 양심이 있구나. 내가 이렇게 널 걱정한 보람이 있네.”허윤진은 팔짱을 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근데 연아는 안 왔어?”진서준은 김연아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연아는 어머님이랑 서라랑 함께 집에 있겠다고 해서 오지 않았어.”허윤진이 해명했다.집에 누군가는 있어야 했다.최근 대한민국 무도계가 뒤숭숭하고 혼란스러워서 김연아가 진서라와 조희선의 안전을 염려해서 오지 않은 것이다.진서준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김연아의 사랑은 봄비처럼 조용하게 진서준의 마음을 적시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자,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얼른 내가 예약한 바다가 보이는 별장으로 가자.”허윤진은 진서준의 손목을 잡고 새로 산 아우디 차로 태웠다.사실 허윤진은 바다가 잘 보이는 별장을 직접 사려고 했지만 이미 다 팔린 상
택시 기사가 미안한 말투로 진서준에게 말했다.차 안에서 진서준은 멀리서 총을 든 군인들이 줄지어 서 있는 걸 봤다.돈을 지불한 후, 진서준은 택시에서 내려 호텔을 향해 걸어갔다.“여기는 전면 통제 구역입니다. 아무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군인 한 명이 진서준이 다가오는 걸 보고는 곧장 큰 소리로 외쳤다.진서준은 그 말에 평온하게 대응했다.“국안부에서 저를 초청했습니다.”지금 진서준은 여전히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다. 김평안은 국안부 사람이 아니었고 초대받아서 온 사람이었다.“이름이 뭐죠? 확인하러 가겠습니다...”군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흰 트레이닝복을 입은 노인이 그의 말을 끊었다.“저 사람 들어가게 해.”흰옷의 노인이 말하자 문을 지키던 군인들은 진서준을 들어가게 했다.“네가 바로 김평안인가?”흰옷의 노인이 진서준을 자세히 살펴보며 물었다.이 노인이 이렇게 큰 호기심을 보이는 건 당연했다.최근 대한민국 무도계에서 김평안은 너무나도 눈부신 존재였다.경성에서 열린 국제 무도 교류회에서 단 일격에 고필두가 겁에 질려 항복한 사람이 바로 김평안이었다.그리고 그 후, 동부에서 해외 이족들을 여러 명 처치하며 전설을 만들었다.지금의 김평안은 무도계에서 반짝이는 샛별과도 같았고 모든 무인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네, 제 이름은 김평안입니다.”진서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스승은 누구지? 전에 왜 너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을까?”흰옷의 노인이 궁금해하며 물었다.“전 오랫동안 스승님과 함께 깊은 산골과 황야에서 수련해서 세상과는 소통하지 않았습니다. 스승님은 소극적인 성격인지라 밖에선 스승님 이름을 함부로 꺼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진서준이 유창하게 대답했다.진서준이 스승의 이름을 밝히지 않자 흰옷 노인의 얼굴에는 살짝 실망한 기색이 스쳤다.노인은 진서준 같은 천재를 가르친 스승이 어떤 인물일지 내심 궁금했던 것이다.“현천진군님은 어디 계시죠?”진서준이 흰옷의 노인에게 물었다.“저기 홀에 있어.”진서준은 노인
“뭐라고? 불법적인 일이 우리 가게에서 일어난다고? 말도 안 돼.”성현도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넌 전신전 소속이잖아. 그런데 네 오빠인 내가 어떻게 법률을 어기는 일을 하겠어?”“그럼 이 사람들은 왜 부른 거야? 집단 폭력도 불법이거든.”성미영은 차가운 시선을 보이며 성현도와 따졌다.“미영아, 이건 내가 싸우려던 게 아니야. 저 녀석이 일부러 시비 걸러 온 거라고.”성현도는 진서준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이놈이 일부러 우리 찻집에 난입해 행패를 부리고 상철을 두들겨 패서 머리에 혹이 다 나버렸어. 난 단순히 정당방위를 위해 부른 거라고.”성미영이 등장하자 성현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솔직히 실력만 놓고 보면 성현도는 성미영보다 한참 부족했다.게다가 성미영은 전신전 소속인지라 저 남녀가 군부 조직인 전신전을 적으로 돌릴 리 없었다.군대를 건드리는 순간, 무조건 좋은 결과는 있을 수 없었다.“진서준, 도대체 무슨 일이야?”성미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라? 너희 둘이 아는 사이야?”성현도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방금 내려놨던 마음이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난 사람을 찾으러 왔어. 하씨 가문 하경범이 이 위층에 있다고 들었는데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어.”진서준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그리고 또 하나, 저 위에서 불법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도 하더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어.”이 말에 성현도의 표정이 단숨에 험악해졌고 즉시 반박에 나섰다.“헛소리 마. 우리 가게는 단순한 찻집이야. 불법적인 일 따윈 없어. 근거없는 소문을 왜 털어놓고 난리야?”“미영아, 저 녀석한테 속지 마. 난 네 사촌 오빠야. 내가 그런 불법적인 짓을 할 사람이겠어?”성미영이 곧바로 진서준에게 물었다.“진서준, 너 증거 있어?”“직접 올라가 보면 다 알게 될 거잖아?”진서준이 가볍게 말했다.“오빠, 위층으로 가자.”성미영이 단호하게 말했다.“그, 그건 좀 곤란해. 위층엔 귀
순간, 장내는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모든 시선이 진서준에게 쏠렸고 사람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다들 진서준을 그냥 얼굴만 반반한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짜 고수였다.성현도의 부하 중 최고 실력자조차 상대가 되지 않았다.성현도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렸고 상철을 향해서 욕설을 날렸다.“쓰레기 자식, 이런 애송이 하나도 못 이겨?”부하가 지면 망신당하는 건 결국 성현도 자신이었다.이대로 체면을 구긴 채 끝낼 수는 없었다.이대로 넘어가면 앞으로 르벨 재벌 2세들 사이에서 조롱거리가 될 게 뻔했다.“이봐, 네 실력이 괜찮은 건 인정할게.”성현도가 싸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근데 너 혼자서 백 명을 상대할 수 있어? 천 명은? 잘 들어. 내 부하는 수도 없이 많아. 너 같은 놈 하나 처리하는 데 전화 한 통이면 충분해.”진서준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다시 말하지만 난 그냥 하경범을 찾으러 온 거야. 그 녀석만 넘기면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해주지.”“없던 걸로 한다고?”성현도가 그 말에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너 지금 누굴 상대로 협상하려 드는 거야? 난 성씨 가문의 직계야. 날 건드리면 상대해야 할 건 나 하나가 아니라 우리 가문 전체라고.”그때,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곧이어 검은색 전투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이 남자들은 전부 성씨 가문의 경호원이었고 실력도 만만하지 않았다.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무려 50명 이상이었다.한순간에 텅 비어 있던 로비가 사람들로 꽉 찼다.“저 자식 끝났네. 이 정도 성씨 가문 인원이라면 아무리 강해도 버틸 수가 없지.”“그러게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없잖아.”“왜 쓸데없이 성현도를 건드린 거지? 스스로 무덤을 판 거잖아.”구경꾼들은 이 광경에 각자 다른 감정을 보였다.누군가는 동정을, 누군가는 아쉬움을, 또 누군가는 짙은 흥미를 보였다.“사연아, 넌 좀 쉬어. 이놈들은 내가 처리할게.”진서준이 앞으로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가 거의 2미터에 달하는 거구의 사내가 찻집 안으로 들어왔다.남자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상철아, 저놈 다리 하나 부러뜨려서 내던져.”성현도가 진서준을 가리키며 명령했다.“알겠습니다.”상철은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진서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서준아, 내가 할게.”허사연의 눈에는 불꽃 같은 전투욕이 타올랐다.“조심해. 저 녀석은 횡련 종사야.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진서준이 조용히 귀띔했다.“알았어. 설령 못 이긴다고 해도 어차피 네가 있잖아?”허사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진서준이 곁에 있는 한, 허사연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이봐, 사내자식이 여자 뒤에 숨는 게 말이 돼?”상철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이봐, 껑충이. 여자를 얕보지 마. 일단 이기고 나서 말해.”허사연이 상철을 도발했다.“아가씨, 그런 기생오라비 말고 날 따르지 그래? 밤마다 널 천국으로 보내줄 수 있는데?”상철이 음흉하게 웃었다.“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얼굴이 싸늘해진 허사연이 주먹을 날렸다.강렬한 펀치가 공기를 가르며 폭발음을 일으켰고 그 위력은 철판도 뚫을 수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상철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내가 가만히 서 있어도 넌 날 어쩔 수 없어.”“닥쳐!”허사연이 분노에 차 주먹을 그대로 상철의 얼굴로 내리꽂았다.상철은 일부러 머리를 숙이며 대머리 정수리로 받아냈다.쿵!둔탁한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주먹이 상철의 머리를 강타했으나 대머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허사연이 몇 걸음 물러섰다.순간 손에 뜨거운 통증이 밀려왔고 뼈가 부서질 것 같았다.손을 확인하자 하얀 피부였던 손등이 새빨갛게 부어올랐다.상철은 자기 머리를 한번 쓸어내리더니 빙그레 웃었다.“아가씨, 이제 내 실력을 알겠지?”그 모습에 허사연의 승부욕이 다시 불타올랐고 콧방귀를 뀌며 다시 달려들었다.이번에는 다리를 높이 들어 올려 상철의 머리를 내려찍었다.‘머리가 단단하다고 자랑하
이렇게 예쁘고 섹시한 여자가 싸움 실력이 이렇게 대단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완전 여성판 이소룡이었다.“너, 너희들 정말 너무 대담한 거 아니야? 여기가 어디인지 알기나 해? 어디서 대놓고 싸움질이야?”종업원은 순간 놀란 뒤 분노에 찬 얼굴로 진서준와 허사연을 가리켰다.찻집이 문을 연 이후로 이렇게 난동을 부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진서준과 허사연이 첫 사례였다.주변의 구경꾼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싸움 좀 하면 뭐해? 여긴 성씨 가문의 구역이야. 성씨 가문에서 한마디만 하면 저 남녀는 오늘 밤중으로 사라지겠지.”“어휴, 저 여자 너무 아까워. 저렇게 예쁜데 왜 죽지 못해서 안달이지?”“여자는 살 수도 있겠지만 남자는 무조건 죽을걸.”사람들은 저마다 수군거리며 이미 진서준과 허사연의 결말을 예상하는 듯했다.“그럼 네 말대로라면 내가 널 때린다 해도 얌전히 맞고 있어야 한다는 거야?”허사연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종업원에게 다가갔다.“오지 마!”종업원은 겁에 질려 연신 뒷걸음질 쳤다.“어떤 미친놈이 내 구역에서 소란을 피우는 거야?”그 순간, 2층에서 한 사람이 내려왔다.모두가 일제히 시선을 돌려 그 사람을 확인하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성현도가 오늘 여기 있었네?”누군가 그 청년을 알아보았다.“저 둘 끝장났네. 성현도는 악명 높은 냉혈한이야.”그 청년은 바로 찻집의 사장인 성현도였다.성현도는 르벨 재벌 2세 사이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친구에게는 무조건 의리를 지키지만 적에게는 무자비했다.성현도의 고문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았고 게다가 무인으로서 무공 실력도 상당했다.“사장님, 저 남녀가 와서 난동을 부렸어요.”종업원은 성현도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장이 나온 걸 확인한 허사연은 주먹 한 방에 종업원을 기절시켜 버렸다.“뭐야?”성현도의 눈이 가늘어졌고 표정이 험악해졌다.자기 앞에서 대놓고 부하를 때리다니, 이건 너무나도 명백한 도발이었다.“아가씨, 우리 처음 보는 사이 맞지? 우리
그리고 오후 2시가 되자 진서준은 허사연을 데리고 조호가 말한 천국찻집으로 향했다.겉모습만 보면 이 찻집은 진짜 전통찻집 같았고 규모도 꽤 컸다.하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 보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1층과 2층까지는 정말 평범한 찻집처럼 꾸며져 있었고 누가 봐도 이상한 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하지만 3층으로 올라가려면 회원권이 있어야 하거나 사장이 직접 허락한 사람만 출입할 수 있었다.“손님, 아가씨,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진서준과 허사연이 차를 마시러 온 줄 안 종업원이 빠르게 달려와 안내하려 했다.“그럴 필요 없어. 난 하경범을 찾으러 왔거든.”진서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네?”종업원이 순간 얼어붙었다.“혹시 하씨 가문의 하 도련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맞아.”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손님은 누구신지...”종업원이 신중하게 물었다.진서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냥 복수하러 왔다고 전해.”그놈 아버지라고 하는 건 자기를 모욕하는 것과 같았고 친구라고 하기도 기분이 더러웠다.그 말에 종업원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손님, 여기서 장난치지 마세요.”하경범은 르벨에서 유명한 재벌 2세였다.이 찻집의 사장과도 막역한 사이였고 여기서 일하는 직원이라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왜? 못 믿겠어?”진서준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손님, 하 도련님에게 복수하려던 사람은 단 하루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종업원이 경고하듯 말했다.“그런 농담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그 말을 듣자 진서준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이렇게 전해. 그 하경범이 두들겨 맞고 나자빠지게 했던 진서준이 왔으니 당장 기어 나오라고 말이야.”진서준의 뻔뻔한 태도에 종업원은 어이가 없었다.“좋습니다. 손님이 그렇게 죽고 싶다면 제가 기꺼이 도와드리죠.”종업원은 바로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문제 발생했습니다. 난동자가 있습니다.”쿵! 쿵!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건장한 남자 스무 명이 들이닥쳤다.전부 검은
진서준과 허사연은 차를 타고 조호의 회사로 향했다.이 회사는 그냥 겉치레일 뿐, 진짜 돈이 들어오는 곳은 유흥업소들이었다.유흥업소를 얕잡아보면 안 된다.운 좋게 돈 많은 도련님들이라도 걸리면 하룻밤에 수억 원이 순식간에 손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진서준 씨!”진서준이 들어서자 조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조호는 진서준 옆에 있는 허사연을 힐끗 쳐다본 뒤 고개를 숙이고 감히 더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잡담은 그만하고 하경범을 잡아가는 제일 좋은 타이밍만 말해.”진서준이 직설적으로 물었다.이 말에 조호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매일 오후마다 하경범은 천국찻집이라는 곳에 갑니다.”조호는 재빨리 대답했다.“보통은 경호원 몇 명만 데리고 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얼씨구? 저런 인간이 매일 차나 마시러 간다고?”진서준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그게... 진서준 씨, 사실 그곳은 이름만 찻집이지 실제로는...”조호는 옆에 여성이 있다는 걸 의식해서 말을 흐렸지만 진서준은 그 뜻을 단번에 알아챘다.“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차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그냥 인기 많은 인터넷 셀럽이 가득한 고급 유흥업소일 것이다.“진서준 씨, 듣자 하니 그 찻집의 주인은 성씨 가문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진짜로 움직이실 거라면 하경범이 이동 중일 때를 노리는 게 좋을 겁니다.”조호가 조심스럽게 조언했다.“응? 성씨 가문이 이런 사업도 해?”진서준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진서준은 오영수에게서 성미영에 대한 정보를 들은 적이 있었다.정의로운 성격의 성미영이 자기 가문에서 이런 유흥업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네, 듣기로는 성씨 가문의 한 직계 후손이 운영한다고 합니다. 여자에 미쳐 있는 놈이라 르벨의 돈 많은 도련님들과 꽤 친분이 깊다고 하더군요.”조호는 본인이 아는 정보를 전부 쏟아냈다.“좋아, 대충 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조호의 회사를 나온
진서준이 허사연의 캐리어를 들어주며 옆방으로 걸어갔다.그 뒷모습을 보며 도지아는 부러움이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인간은 원래 모여서 사는 걸 선호하는 동물이다.사회를 벗어나서 혼자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가족도 친구도 없이 너무 오래 지내다 보면 결국 감정 없는 시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그렇게 되면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없어질 것이다.“어제 전화할 때 그랬었지? 이번에 너 자기 출신을 찾으러 온 거라고.”호텔 방으로 돌아온 후, 허사연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너 원래 경성 진씨 가문 사람이잖아?”“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어. 그런데 할아버지가 예전에 말해주셨어. 사실 우리 아버지는 어릴 때 길에서 주워 온 아이였다고.”진서준은 허사연에게 숨길 생각이 없었다.허사연은 진서준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허사연이라면 이 비밀을 절대 밖으로 흘리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뭐라고? 아버님이 주워 온 아이라고?”허사연이 깜짝 놀랐다.“그래.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건 나뿐이야. 가족 중에서도 할아버지가 나한테만 알려주셨지.”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전, 오영수가 내 등에 있는 용을 보고는 내가 용맥의 일족이라고 했어. 그래서 오영수를 따라 여기 와서 오영수 셋째 삼촌에게 내 출신에 관해 알아보려 했던 거야.”“네 등에 용이 있다고? 난 한 번도 본 적 없는데?”허사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동안 둘이 알몸으로 함께한 시간도 적지 않은데 허사연은 한 번도 본 기억이 없었다.“내가 체내 혈기를 모을 때만 그 용이 나타나거든.”진서준이 설명을 이어갔다.“그런데 오영수 삼촌이 아직 돌아오질 않아서 일단은 여기서 며칠 기다려야 해.”“아니, 그럼 오씨 가문에서 널 안 재워줬어?”허사연이 의아해했다.명문대가인 오씨 가문에 빈방이 없을 리가 없었다.“그날 오영수를 찾아갔는데 마침 오영수 할아버지가 위중했어. 그리고 그 집안엔 그 어르신을 그냥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지.”진서준이 담담하게
“진짜 예쁜 새색시 숨겨놓고 있었네?”허사연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누구라도 자기 남자 방에 예쁘고 몸매가 완벽한 여자 하나가 같이 있는 걸 보면 의심 안 할 수가 없었다.게다가 지금은 아침이었다.설마 이 여자가 아침에 막 찾아온 건 아니겠지?“사연아, 오해야. 내가 제대로 설명할게.”진서준은 머리가 띵해졌고 뇌가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아가씨, 오해하지 마세요. 어제 저랑 진서준이 같은 방에서 잔 건 맞지만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저 밤새 한숨도 못 잤다니까요?”도지아가 황급히 해명에 나섰다.“네? 밤새 안 자고도 아무 일 없었다고요?”허사연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설마 밤새 불태우느라 못 잔 건 아니겠죠?”허사연의 농담과 진담이 뒤섞인 말에 진서준은 헛웃음만 나왔다.“사연아, 이쪽은 도지아야. 우리 진짜 그냥 친구야. 일단 들어와. 천천히 설명할게.”허사연이 방에 들어오자 진서준은 서로에게 소개했다.그러고는 이 방에서 일어난 상황을 설명했다.“도지아는 황예은이 소개해 준 환자야. 다리 치료를 부탁받았거든. 종아리를 봐봐. 이틀 전에 내가 직접 발라준 연고가 있어.”허사연이 내려다보자 확실히 연고가 발라져 있었다.“그리고 도지아가 밤새 안 잔 건 원기를 수련하느라 그랬던 거야. 너도 예전에 수련한다고 며칠씩 안 잔 적 있잖아?”허사연은 오해가 풀리자 그제야 빙그레 웃었다.“내가 뭐 어쨌다고 그렇게 호들갑이야?”“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그러는 거잖아.”진서준이 빠르게 대답했다.“뭐야? 내가 그렇게 의심 많고 질투 많은 여자로 보여?”허사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아, 아니지. 우리 사연은 누구보다 속이 넓은 부드러운 여자지.”진서준이 급히 정정했다.“됐어, 너 겁먹은 거 너무 귀엽다.”허사연이 피식 웃었다.“넌 여기 좀 쉬고 있어. 내가 방 하나 잡고 올게.”진서준은 더 머뭇거릴 틈도 없이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다.진서준의 뒷모습을 보며 허사연은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도지아 씨, 진서준이
“내가 가면 안 돼?”사실 진서준은 거절하려 했었다.르벨은 안개가 짙게 깔린 늪지대 같은 곳이라 진서준조차도 어디에 함정이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그러니 허사연이 온다면 다칠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거절하면 허사연이 상처받을 게 뻔했다.“당연히 되지. 지금 위치 보낼게.”진서준은 단호하게 말하며 위치를 보냈다.자기 여자를 지킬 자신도 없으면서 강자들을 상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자기야, 잘 자.”허사연이 애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너도 일찍 자.”진서준이 다정하게 답했다.전화를 끊고 나니 진서준의 졸음이 싹 가셨다.진서준은 창가로 다가가 이 화려한 도시를 내려다봤다.“오씨 가문, 안씨 가문, 하씨 가문... 너희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든 난 전부 박살 낼 거야. 이번엔 반드시 나와 아버지의 정체를 밝혀내고 말겠어.”진서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그렇게 별다른 사건 없이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진서준이 막 눈을 뜨자마자 도지아의 흥분한 외침이 들려왔다.“진서준, 됐어. 나 생겼어!”도지아는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는데 밤새 잠을 자지 않은 게 분명했다.진서준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너 아직 처녀 아니었어? 대체 어떻게 임신한 거야?”“미친놈아, 임신은 개뿔, 무슨 헛소리야?”도지아는 얼굴이 빨개지며 진서준을 노려봤다.“그럼 왜 아침부터 난리야?”진서준이 되물었다.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아침부터 흥분해 날뛰지 않을 것이다.“어제 네가 준 수련법 기억나지? 나 벌써 원기를 형성할 수 있게 됐어.”자기가 대단하다고 여긴 도지아는 자랑스럽게 선언했다.고작 하룻밤 만에 원기를 형성한 건 확실히 대단한 일이었다.“뭐? 그렇게 빠르다고? 너 타고난 천재 맞네?”진서준이 다소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보통 무인은 원기를 익히는 데만 최소 1년이 걸리는데 그것도 매일 꾸준히 수련할 경우에만 발생하는 일이었다.심지어 재능 있는 자들도 한두 달은 족히 걸린다.그런데 도지아는 단 하룻밤에 이 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