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후는 두 번 죽지 않는다

황후는 두 번 죽지 않는다

By:  설이안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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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요국의 전설로 이름을 떨쳤던 혜정황태후, 서안하가 후작부 시절로 다시 돌아왔다. 전생의 서안하는 사람보는 눈이 없었다. 무능하고 이기적이며 냉혹하기까지 한 진왕에게 첫눈에 반한 그녀는 기어이 그를 황위에 올리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러나 그 대가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고, 그가 죽은 뒤에도 서안하는 끝내 남겨진 폐단과 혼란을 홀로 수습해야 했다. 이번 생에서 그녀의 바람은 단 하나뿐이었다. 어머니와 다시 되찾은 오라버니를 지키며, 그저 조용하고 평온한 삶을 살아가는 것. 하지만 황후의 운명을 타고난 그녀는 끝내 평범한 삶을 허락받지 못했다. 우연히 거둬들인 데릴사위가 알고 보니 서량국에서 십 년 전 죽었다 알려진 어린 황제였던 것이다. 서안하는 기구한 운명을 한탄하며 마음을 독하게 먹고 그에게 화리서를 내밀었다. 이제는 그를 놓아주려 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화리서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며 싸늘하게 말했다. “짐을 뭐로 여긴 것이냐. 네 마음대로 내치고 버릴 수 있는 존재로 여겼느냐?” 버릴 수도 없다면 어쩌겠는가. 결국 서안하는 다시 그의 곁에 서서 황위를 되찾는 길에 함께 나설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이번 생의 부군은 전생의 그 인간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스스로를 엄격히 단속했고, 다른 여인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서안하는 후궁까지 들이라며 나섰지만, 그는 되레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유능한 부군은 조정을 빈틈없이 다스렸고, 서안하는 그런 삶에 꽤 만족했다. 그렇게 그녀는 다시 한번, 조용하고도 평온한 행복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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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서안하가 눈을 떴을 때, 자신이 열네 살이 되던 해로 돌아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침 후작부에서는 오라버니 서운민의 장례가 치러지고 있었다.

새하얀 여우털 망토를 걸친 그녀는 후작부의 회랑을 천천히 걸었다. 처마 아래 걸린 흰 초롱이 그녀의 손끝에 스치자 가볍게 흔들렸다.

그때, 시녀 남연이 황급히 손난로를 그녀 손에 쥐여주며 나직이 말했다.

“아가씨,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우선 몸부터 돌보셔야지요.”

상심?

서안하는 잿빛으로 가라앉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는 조금도 슬프지 않았다. 죽은 그 사람은 애초에 그녀의 친오라버니가 아니었으니까.

당시 온 소실은 서안하의 어머니인 당 마님과 같은 날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제 아들을 몰래 바꿔치기해 후작부의 적자로 둔갑시켰다. 반면, 서안하의 친오라버니인 서운기는 졸지에 서자가 되어, 어린 시절 내내 온 소실의 학대를 받으며 자라야 했다.

서안하는 곧장 빈소로 향했다.

당 마님은 두 눈이 퉁퉁 부은 채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통곡하는 모습이었다.

“어머니, 며칠째 한숨도 못 주무셨다 들었습니다. 우선 방으로 돌아가 조금 쉬세요.”

서안하는 시녀에게 눈짓했고, 그대로 당 마님을 부축해 억지로 빈소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내내 울부짖으며 몸부림쳤다.

“민아! 내 아들아! 난 안 돌아간다! 우리 민이 곁을 지켜야 해!”

서안하는 당 마님을 침상에 눕히고 이불을 여며준 뒤, 시녀들을 모두 물렸다. 그러고는 그녀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어머니, 이제 그만 우세요. 서운민은 어머니 아들이 아닙니다. 제 친오라버니도 아니고요.”

당 마님은 흐느끼다 말고 그대로 숨이 턱 막힌 듯 굳어버렸다.

“너…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게냐?”

서안하는 침상 곁에 앉아 당 마님의 손을 꼭 감싸 쥐었다. 깊은 우물처럼 차분한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제 말은, 서운민은 애초에 어머니 아들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그 사람은 온 소실의 아들이에요.”

당 마님은 눈물 맺힌 얼굴로 한참 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서안하는 재촉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이 충격적인 사실을 받아들일 시간을 조용히 기다리며, 야윈 등을 가만히 쓸어줄 뿐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당 마님은 붉게 부은 눈을 들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물었다.

“안하야… 그걸 대체 어디서 들은 것이냐?”

서안하는 이미 변명을 준비해둔 상태였다.

“아까 할머니께 문안드리러 가던 길에 우연히 할머니와 온 소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게 됐습니다.”

“어머님께서도 알고 계셨단 말이냐?”

당 마님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알고 계신 정도가 아니에요. 온 소실은 원래 할머니의 친조카 아닙니까. 당시 어머니와 온 소실이 같은 날 아이를 낳았는데, 할머니께서 손을 쓰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아이를 바꿔치기할 수 있었겠습니까?”

한 번 삶을 다시 살아본 서안하는 이제 분노조차 들지 않았다. 오히려 아직 모든 것이 늦지 않았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울 뿐이었다.

당 마님은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억울함만은 도저히 삼킬 수 없었다. 그녀는 곧장 이불을 걷어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가서 따져 물어야겠다! 반드시 진실을 밝혀내고야 말겠어!”

목이 쉰 채 떨리는 음성이었다.

그러자 서안하는 급히 그녀를 붙들며 말했다.

“어머니, 우선 진정하세요. 공정은 천천히 되찾아도 늦지 않습니다. 할머니께서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떼면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겠어요?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운기 오라버니를 정당하게 되찾아오는 겁니다. 들으니 운기 오라버니께서는 온 소실에게 채찍으로 맞아 거의 반죽음이 된 채 아직도 장작방에 갇혀 계시다더군요.”

당 마님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그녀는 후작부 이방의 정실부인이었지만, 단 한 번도 첩실이나 그 자식들을 박대하지 않았다. 특히 서운기라는 아이에게는 남몰래 여러 번 선의를 베푼 적도 있었다.

그 아이는 보는 사람 마음을 저리게 만들 정도로 야위고 연약했으며, 늘 말수가 적고 위축돼 있었다.

예전에 당 마님은 직접 온 소실이 아들을 꾸짖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너는 고작 천한 서자에 불과하다. 훗날 사람답게 살고 싶거든 모든 일에서 운민 도련님을 우선으로 모셔야 해! 설령 그분이 네 목숨을 원한다 해도 얌전히 받아들여야 한단 말이다!”

그때의 당 마님은 그 말을 듣고 크게 마음이 움직였었다. 소실이 저 정도로 자신을 낮추고 적자를 위한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진실은 전혀 달랐다.

그 ‘천한 서자’야말로, 바로 그녀의 친아들이었던 것이다.

당 마님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서운민의 죽음을 들었을 때보다도 훨씬 더 아팠고 눈물은 아무리 닦아도 멈추지 않았다.

“안하야… 그럼 이제 어찌해야 한단 말이냐?”

서안하는 손을 뻗어 당 마님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어머니, 절 믿으신다면 이번 일은 제게 맡겨주세요. 반드시 말끔히 처리해 보이겠습니다.”

당 마님은 눈앞의 딸이 예전과 어딘가 달라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깊고도 담담한 눈빛은 오래된 고요한 우물 같았다. 아무런 파문도 없건만, 이상할 만큼 사람을 안심시키는 힘이 있었다.

당 마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는 순간 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서안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지금 장례는 누가 맡고 있나요?”

“네 할머니께서 호국공부의 체면을 빌려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길 바라셔서 전부 내게 맡기셨단다.”

그렇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서안하의 눈빛이 은은하게 흔들렸다.

“어머니, 종 어멈을 제게 잠시 빌려주실 수 있나요?”

“해당원 사람들은 네 마음대로 부리거라.”

당 마님은 다급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물었다.

“네 친오라버니를… 조금이라도 빨리 데려올 수는 없겠느냐?”

“어머니, 조급해하지 마세요. 제가 다 방법을 마련해둘 테니, 부디 티 내지 마십시오.”

서안하는 목소리를 낮춰 거듭 당부했다.

“지금 온 소실의 눈과 귀가 후작부 곳곳에 깔려 있습니다. 단 한 걸음도 잘못 내디뎌선 안 돼요.”

당 마님은 애써 조바심을 눌러 삼키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하야, 어미는 네 말대로 하마.”

서안하는 곧장 종 어멈을 호국공부로 보내 외숙모에게 서신을 전하게 했다.

해가 저물 무렵, 호국공부에서 서른 명이 넘는 사람들이 대거 후작부를 찾았다. 노복과 시녀, 시위와 집사들까지 모두 흰 상복 차림으로 빈소에 들어와 분주히 움직였다.

짙은 밤이 완전히 내려앉자, 빈소는 더 이상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곳이 되었다.

*

장미원 안.

온 소실은 슬픔이 가득 밴 얼굴로 연신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유 어멈, 알아봤느냐? 당 마님이 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것이냐?”

그러자 유 어멈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마님,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당 마님은 슬픔에 몇 번이나 정신을 잃었다가 지금은 자기 처소로 돌아가 쉬고 계신다고 합니다. 듣자 하니 지금 장례는 안하 아가씨께서 맡고 있다더군요. 방금 호국공부에서 사람들을 보내왔다는데, 아무래도 홍달 대사를 맞이하려는 듯합니다.”

그제야 온 소실의 안색이 조금 누그러졌다.

“진작 저랬어야지. 운민이는 본디 호국공부의 외손자인데 어찌 나 몰라라 할 수 있겠느냐. 홍달 대사까지 불러 혼백을 달래려는 걸 보니 이제야 제대로 마음을 쓰는구나.”

유 어멈도 곧장 맞장구쳤다.

“마님, 너무 비통해하지 마십시오. 도련님께서 홍달 대사의 공덕까지 더해졌으니 다음 생에는 분명 좋은 집안에 태어나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실 겁니다.”

그 말을 듣자 온 소실은 오히려 더 서러워졌다.

무려 십육 년을 공들여 계획해왔다. 이제 막 결실을 맺으려던 참이었건만, 정작 사람은 죽어버렸으니 모든 게 한순간에 허사가 된 것이다.

잠시 뒤, 유 어멈이 다시 들어와 보고했다.

홍달 대사가 오긴 왔지만 반 주향도 채 지나지 않아 승려들을 이끌고 떠나버렸다는 소식이었다.

온 소실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혼백을 달래는 천도재만 해도 적어도 한 시진은 걸릴 텐데, 어찌 이리 빨리 끝난단 말이냐?”

유 어멈은 고개를 저었다.

“그 이상은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밖을 지키는 이들이 전부 호국공부 사람들인지라 저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온 소실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보자.”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고 두터운 겉옷을 걸친 채 눈보라를 맞으며 빈소로 향했다.

하지만 낯선 유모 하나가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

“멈추십시오. 안하 아가씨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빈소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온 소실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녀는 수년째 후작부의 안주인 노릇을 해오며 집안 살림을 틀어쥐고 있었기에 후작부 안에서 그녀를 두려워하지 않는 시종은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 고작 노비 하나가 감히 제 앞길을 막다니.

온 소실은 분을 참지 못하고 차갑게 내뱉었다.

“당장 서안하를 불러와라! 그 아이가 정말 날 막을 수 있는지 어디 두고 보자!”

그러나 유모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실례지만, 당신은 이 집안에서 어떤 분이십니까? 차림새를 보아하니 소실인 듯한데, 적녀 아가씨 앞에서 소실은 결국 저희와 다를 바 없는 노비입니다. 어느 집안 규율이기에 감히 아가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십니까?”

온 소실은 분노에 눈앞이 새파래졌다.

호국공부의 개 같은 시녀 따위가 감히 자신을 노비라고 부르다니! 이렇게 비단옷을 걸친 사람이 어디 소실처럼 보인단 말인가?

분노가 극에 달한 그녀는 습관처럼 손을 들어 뺨을 내리치려 했다.

그러나 허공으로 치켜든 손은 한참이 지나도록 내려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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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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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천요국에는 사람이 죽은 뒤 사흘째 되는 날, 승려가 경을 외우며 혼백을 달래고 망자의 넋을 천도하는 풍습이 있었다.서안하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어젯밤 저는 호국공부의 이름으로 홍달 대사를 후작부에 모셔와 오라버니의 천도 의식을 부탁드렸습니다. 헌데 홍달 대사께서는 오라버니의 생년월일을 살펴보시더니 연신 고개만 저으시고는, 천도할 수 없는 명이라 말씀하시곤 그대로 떠나셨습니다. 이후 저는 다시 양현 선생을 모셔왔습니다. 선생께서는 오라버니의 시신을 살펴보신 뒤, 본래 이렇게 일찍 죽을 운명이 아니었으나 감당할 수 없는 부귀를 억지로 떠안아 명줄이 뒤틀린 탓에 이런 횡액을 당했다고 하셨습니다.”순간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릴 듯한 정적이었다.서안하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노부인을 바라봤다.“할머니, 양현 선생의 말씀은 대체 무슨 뜻인가요? 명줄을 억지로 바꿨다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노부인은 어색한 기색으로 이마의 머리띠를 매만지며 손녀의 시선을 피했다.“풍수쟁이들 말은 반만 믿으면 되는 법이다. 어찌 그 말을 전부 다 믿겠느냐.”서안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할머니 말씀도 맞습니다. 헌데 이런 일은 차라리 믿고 조심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수명은 물론, 후작부의 운세까지 걸린 일이라 저도 결국 양현 선생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그때 당 마님이 또다시 흐느끼며 울음을 터뜨렸다.“난 인정 못 한다! 절대 그렇게는 못 한다!”서안하는 얼른 무릎을 꿇고 몸을 노부인 쪽으로 기울인 채, 붉어진 눈으로 애써 설득했다.“할머니, 대의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오라버니도 중요하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건강 역시 가볍게 여길 수는 없습니다. 후작부의 앞날 또한 마찬가지고요.”노부인은 아직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어째서 갑자기 자신과 노후작의 수명, 후작부의 운세 이야기까지 나온단 말인가.그녀는 곧장 서안하를 제 곁으로 끌어당기며 물었다.“양현 선생이 정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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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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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온 소실이 홱 고개를 돌렸다. 문가에는 서안하가 단정히 서 있었다. 가녀린 자태는 고왔으나, 입가에 걸린 웃음만큼은 어딘가 장난스럽고도 서늘했다.온 소실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지금 나와 사람을 두고 다투겠다는 것이냐?”서안하가 되레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온 소실께서 계씨댁을 팔아버리시려는 것 아니었나요? 마침 제 처소엔 사람이 부족하니 번거롭게 인신매매상까지 부르실 필요 없습니다. 몸값 문서만 제게 넘겨주시면 됩니다.”그제야 온 소실의 입가에 음습한 웃음이 천천히 번졌다.“이제야 집안에서 누가 주인 노릇을 하는지 깨달았다는 거구나.”서안하는 진심 어린 얼굴로 웃었다.“곧 그럴 수 없게 될 텐데요.”온 소실의 표정이 굳었다.“그게 무슨 뜻이냐?”“말 그대로예요.”붉은 입술과 흰 치아가 어우러진 서안하의 얼굴은 마치 눈보라 속에 피어난 붉은 매화 같았다.온 소실은 이유 모를 불안감에 가슴이 서늘해졌다.서안하가 느긋한 미소를 머금은 채 다시 입을 열었다.“그럼… 제 시녀 하나와 바꾸시는 건 어떨까요?”온 소실은 생각할 틈도 없이 잘라 말했다.“안 바꾼다!”후작부 안 노비의 몸값 문서는 모두 그녀 손에 들려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저 어린 계집아이와 거래를 해야 한단 말인가.서안하는 눈을 내리깔았다.“바꾸지 않으신다면 어쩔 수 없네요.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그 말을 남긴 채 그녀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뒤따르던 시녀들과 어멈들도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그런데 낯선 얼굴의 한 어멈만은 미간을 찌푸린 채 몇 번이고 방 안을 돌아보았다.날카롭다가도 의심스러운 눈빛이 잠시 스쳤고, 이윽고 시선이 온 소실 얼굴에 머물렀다. 그 눈빛 끝에는 희미한 경멸까지 어려 있었다.어멈은 고개를 한 번 저은 뒤에야 사람들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온 소실은 그 몇 번의 시선만으로도 마음이 어지러워졌다. 서안하가 갑자기 나타났다가 왜 급히 돌아간 건지,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었다.“유 어멈, 저 사람은 누구냐? 방금 그 눈빛은 또 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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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위씨 저택.위채린은 또다시 악몽에서 깨어났다.꿈속에서 건안후부 사람들은 위씨 저택 문 앞에서 곡을 하며 소란을 피웠고, 새하얀 상등을 대문에 걸어 두었다. 문미에는 흰 천이 길게 드리워졌고, 사람들은 거리마다 떠들어댔다.후작부 적손 서운민이 그녀를 구하려다 죽었다고. 그리고 그녀는 진즉 서운민에게 몸을 내준 여자라고.치욕과 분노에 짓눌린 위채린은 결국 몇 자 되는 흰 비단으로 목을 매어 결백을 증명할 수밖에 없었다.그런데 죽고 나서도 후작부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중매쟁이까지 데려와 요란한 혼례 행렬을 꾸미고는, 위씨 가문에 예물을 들이밀며 그녀와 서운민의 사혼을 치르겠다고 했다.결국 어머니는 그녀의 관 앞에서 억울함과 분통을 이기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그 악몽은 숨조차 막힐 만큼 생생했다.위채린은 무릎을 끌어안고 침상 머리맡에 웅크린 채 떨었다. 얼굴은 식은땀과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방문이 열리며 위 부인이 들어왔다. 딸의 모습을 본 순간 가슴이 무너져 내린 그녀는 황급히 위채린을 끌어안았다.“채린아, 내 불쌍한 딸… 괜찮다, 이제 괜찮아. 그 악독한 놈은 죽었잖니. 이제 우린 더 이상 그자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위채린은 어머니의 따뜻한 품에 얼굴을 묻었다.꿈속에서 자신 때문에 어머니가 죽어가던 모습이 떠오르자, 억눌렀던 슬픔이 한순간에 터져 나왔다.“어머니… 어머니… 계셨군요… 계셔서 다행이에요. 흑, 흑… 어머니만 계시면 저는 아무것도 무섭지 않아요…”딸이 횡설수설하며 우는 모습을 보자, 위 부인은 딸이 충격으로 정신을 놓은 줄로만 알고 가슴이 녹아내릴 듯 아팠다.그녀는 차갑게 식은 딸의 뺨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달랬다.“우리 채린아, 어머니는 언제나 네 곁에 있으니 무서워하지 말거라. 네 아버지도 말씀하셨다. 정말 안 되면 경성을 떠나자고. 아무도 우릴 모르는 곳으로 가면 된다고.”“네 어머니 말이 맞다.”사람보다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공부주사 위충재였다.“딸아, 두려워할 것 없다. 천자 폐하 발아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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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들어선 이는 마흔 즈음 되어 보이는 사내였다. 반듯한 턱선에 눈빛은 맑고 곧았으니, 예부원외랑 강우심이었다.그리고 그는 또 다른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바로 위채린과 위다빈 자매의 의부였다.한 시진 전, 그는 위채린의 이름으로 보내온 편지 한 통을 받았다.그런데 펼쳐 본 순간 알게 되었다. 그 편지는 사실 건안후부 적손녀가 쓴 것이었다.편지에는 한 시진 뒤 위씨 가문에 들러 달라는 말과 함께, 위채린의 명예를 지켜 달라는 부탁이 적혀 있었다. 또한 서안하의 아버지인 서성현 역시 그 자리에 올 것이니, 겉으로만이라도 추천을 약속해 승진을 도와주는 척해 달라는 내용도 있었다.특히 ‘겉으로만 응해 달라’는 그 몇 글자는 참으로 의미심장했다.게다가 편지에는 일이 끝난 뒤 절대 강 대인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겠다는 말까지 적혀 있었다.꽤 흥미로운 제안이었다.그래서 강우심은 오지 않을 수 없었다.의녀가 물에 빠진 일이 건안후부 적장손 서운민의 죽음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속이 끓어오를 만큼 분했지만, 그 역시 어쩔 도리가 없었다.무엇보다 의녀의 명예가 걸린 일이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사건이 터지기 전, 건안후작의 아들 서성현은 여러 차례 그를 연회에 초대한 적이 있었지만 그는 번번이 거절했다.오랫동안 되는대로 세월만 보내 온 사람을 추천해 실무가 필요한 자리에 앉히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그러나 며칠 전부터 그의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만약 위씨 가문을 도울 수만 있다면, 어느 정도는 눈감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그런데 바로 그때, 건안후부에서 저 편지가 도착한 것이다.그래서 그는 먼저 직접 와 보고 싶었다. 그 아가씨는 대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일까?막상 마주한 서안하는 나이는 어렸지만 일 처리만큼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얼굴 또한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동그란 얼굴에는 아직 앳된 살집이 조금 남아 있었고, 옥처럼 흰 피부는 가장 귀한 백옥보다도 더 부드럽고 윤기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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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서안하는 아버지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미 모든 말을 완벽히 외워 두었고, 그대로 다시 말할 수 있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아버지, 저는 오늘 채린 아가씨께 감사 인사를 드리려고 예물을 준비해 찾아왔습니다. 헌데 마침 강 대인께서도 이곳에 계시더군요. 평소 아버지께서 강 대인을 자주 칭찬하셨기에, 함께 이야기를 나누시라고 사람을 보내 모셔왔습니다.”맑고 또렷한 목소리였다. 발음 하나 흐트러짐 없이 선명했다.강우심과 서성현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어리둥절해했다. 하지만 곧 하나둘 상황을 깨닫기 시작했다.결국 이 모든 사람들을 불러 모은 건 전부 서안하였던 것이다.위채린의 눈에는 내내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현실은 꿈과 정반대라는 걸.그녀는 조용히 서안하 곁으로 다가갔다.한 손으로는 위다빈의 머리를 쓰다듬고, 다른 손으로는 서안하의 손을 꼭 잡았다.서안하의 눈빛은 담담했지만, 위채린에게만큼은 세상 가장 찬란하고도 안심되는 빛처럼 느껴졌다.한편, 그쪽에서는 서성현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이어받고 있었다.그는 서안하를 두고 철이 들었다느니, 은혜를 알 줄 안다느니, 그런 것이 바로 서가의 가풍이라느니 하며 떠들어댔다.그러자 강우심이 마침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서 대인께선 정말 훌륭한 따님을 두셨군요! 복도 많으십니다, 참으로 복이 많으십니다! 서 대인께서 지금 자리에서 지내신 지도 꽤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슬슬 더 높은 자리로 옮기실 때도 되었지요.”서성현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깊이 허리를 숙였다.“강 대인께서 좋게 봐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강우심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과찬은요. 이렇게 분별력 있고 총명한 딸을 길러 내셨으니, 서 대인께선 집안일과 관직 생활을 모두 훌륭히 조율하고 계신 게 아니겠습니까. 조정엔 바로 그런 인재가 필요한 법이지요.”“과찬이십니다, 과찬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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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일이 이 지경까지 흘러오자 온 소실도 더는 모를 수 없었다.자신은 서안하에게 완전히 당한 것이다.그녀는 문득 떠올렸다. 서운민 곁을 지키던 몇몇 시종들의 몸값 문서는 사실 줄곧 당 마님 손에 있었다는 사실을.사람은 자신이 골랐지만, 당 마님의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몸값 문서를 넘겨주었던 것이다.그리고 지금, 그 문서를 손에 쥔 사람들이 발매를 운운하며 협박한다면, 저 시종들이야 순식간에 입장을 바꾸는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어째서 서성현이 여기에 나타났으며, 또 어째서 이유도 모른 채 서안하와 한편이 되어 움직이고 있느냐는 것이었다.대체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온 소실은 속으로 피가 끓을 만큼 증오했지만,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서안하를 죽일 듯 노려볼 뿐이었다.서안하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가볍게 훔쳐 낸 뒤, 차갑게 몰아붙였다.“사람들은 흔히 망자는 존중받아야 한다고 하지요. 헌데 온 소실께서는 오라버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그분 명예를 더럽히고, 품행이 문란한 난봉꾼처럼 몰아가고 계세요. 대체 무슨 속셈이신가요?”그 한마디에 구경꾼들도 비로소 상황을 깨달았다.오늘 이 소동은 결국 소실이 적자를 깎아내리기 위해 벌인 일이었던 것이다. 그 안에 숨은 속셈이 결코 단순할 리 없었다.“분명 자기 아들을 올리려고 죽은 적자를 밟아대는 거겠지.”“그러니까. 아니면 뭣 하러 저러겠어?”“헌데 위 아가씨까지 끌어들이는 건 너무 뻔뻔하잖아. 사람 죽으라고 몰아붙이는 거나 다름없네!”“그래도 후작부 안에 사리 분별하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지. 직접 나와 위 아가씨 결백을 증명해 주잖아.”“위 아가씨는 마차에서 내린 적도 없다는데 자꾸 물에 빠졌다고 우겨? 사람 명예 망치는 게 입 하나면 다냐?”“위 아가씨는 오히려 의로운 사람이었네. 자기 시녀들까지 보내 사람을 구했잖아. 저 후작부 소실은 속이 썩어 문드러졌어. 천벌 받을 인간이야!”사람들의 시선은 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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