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아이와 뒤늦은 고백》全部章節:第 1 章 - 第 9 章

9 章節

제1화

“환자분, 정말 이 아이를 지우실 건가요? 남편분 상황은 본인도 잘 알고 계시잖아요. 이번 기회를 놓치면 그 사람은 앞으로 다시는 아이를 갖기 힘들어집니다. 수술하고 나서는 후회해도 늦었어요!”의사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서재휘의 건강검진 보고서를 내밀었다.“이번에 임신하는 데 성공한 것만으로도 이미 의학적 기적이나 다름없습니다.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아니요, 지워주세요.”나는 평온한 안색으로 의사의 말을 잘라냈다.어차피 이 아이의 존재를 기뻐하고 걱정해 줄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그런데 왜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기어코 아이를 낳아 이 험한 세상에서 고생시켜야 한단 말인가?중절 수술 예약을 잡은 뒤, 나는 곧장 서재휘의 별장으로 돌아왔다.그는 마침 도시락통을 든 채 주방에서 걸어 나오는 중이었다.초췌한 모습으로 들어오는 나를 보고도 지체 없이 스쳐 지나갔다.그저 의무적인 말 한마디를 툭 던질 뿐이었다.“냄비에 닭곰탕 남겨뒀으니까 저녁에 챙겨 먹어. 방금 수혈하느라 피를 많이 뽑았으니 몸조리 잘해야지.”서재휘는 어느새 밖으로 나갈 채비를 마쳤다.나는 무의식중에 물었다.“어디 가?”그는 대번에 미간을 찌푸리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당연히 병원이지. 청아한테 그렇게 큰일이 터졌는데 옆에 사람 하나는 있어야 할 거 아냐. 너만 무슨 남 일 보듯 구경하고 앉았네!”말을 마치고는 혐오감이 가득 찬 눈빛으로 나를 훑어보았다.“피 좀 뽑아달라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미루는지 모르겠네. 너 진짜 사람 맞아? 하나뿐인 친동생 살리는 일조차 싫어?”그 순간, 심장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만 같았다.나는 입안의 여린 살을 짓씹으며 서재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내가 사람 맞냐고? 대체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지 정녕 몰라서 그래? 임신만 안 했어도 진작에 피 다 줬어!”아이 이야기를 꺼내자, 서재휘가 내 앞으로 돌진해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아직도 그놈의 애 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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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서재휘가 떠난 후, 집안은 한동안 정적이 찾아왔다.낮부터 깜깜한 밤이 될 때까지 줄곧 기다렸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더는 허기를 참을 수 없었던 나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겨우 주방으로 향했다.가스레인지 위에 올려진 압력솥을 무심코 열어보았다.역시나, 아까 말한 닭곰탕이었다.그마저도 살점이라곤 거의 없는 자잘한 뼈다귀와 목, 꽁지 부위뿐이었다.가장 알짜배기인 살코기는 단 한 점도 안 남기고 싹 다 긁어간 뒤였다.나는 멍하니 쳐다보다가 어이없어 실소를 터뜨렸다.아직도 그 인간에게 무슨 기대를 하고 있었던 걸까.눈물조차 아까워 대충 맹물에 소면을 삶아 대접에 담아냈다.서재휘가 돌아온 건 바로 그때였다.위태롭게 흔들리는 몸으로 국수 대접을 들고나오는 나를 보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임산부가 그런 걸 먹으면 어떡해? 영양가도 없구먼.”그는 다가와 나를 붙잡아 식탁에 앉히더니, 의자까지 살뜰하게 빼주었다.서재휘를 올려다보는 내 눈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일단 의자에 앉아 면을 두어 젓가락 깨작거리다 다시 내려놓았다.“남이 차려주는 밥 얻어먹을 팔자는 못 돼서 그냥 대충 국수로 때우려고.”서재휘의 얼굴에 찰나의 민망함이 스쳤다.그는 헛기침을 가볍게 두어 번 하더니 나를 슬쩍 흘겨보았다.“오늘 내 속을 뒤집어놓는 소리만 안 했어도 내가 화가 나서 깜빡했겠어? 그리고 냄비에 닭고기 좀 남겨놨잖아. 임신했으면 반찬 투정하지 마. 고기면 다 똑같은 고기지, 뭐.”그리고 혼잣말로 계속 투덜거렸다.짜증이 치밀어 오른 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었다.안색은 아까보다 훨씬 더 창백하게 질려 가고 있었다.“그만 좀 조잘거리면 안 돼? 나 닭곰탕 냄새만 맡아도 속이 울렁거려 입에도 못 대는 거, 진짜 몰라서 그래?”막 화를 내려던 서재휘가 별안간 입을 꾹 다물었다.그 꼴이 참으로 우스꽝스러웠다.정말로 이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내가... 내가 뭐 일부러 그랬어? 오늘 청아 간호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깜빡한 거지. 청아가 닭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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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하지만 내 귀에 똑똑히 박혔다.저녁이 되어 침대에 누워 거친 숨을 몰아쉬는데, 어느샌가 눈시울이 붉게 달아올랐다.서재휘를 처음 만난 건 한 뮤지컬 공연장이었다.나는 무대 위의 무용수였고, 그는 음악 감독이었다.스승님의 주선으로 처음 안면을 텄던 날, 나는 서재휘가 음악에 몰두할 때 풍기는 특유의 진중하고 압도적인 분위기에 단숨에 매료되었다.문제는 리허설 중에 터졌다.한순간의 방심으로 내가 무대 아래로 추락할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그때 서재휘가 지체 없이 뛰어와 온몸으로 충격을 받아내 준 덕분에 나는 다치지 않을 수 있었다.대신 그의 오른발이 골절상을 입었다.사고 직후, 나는 너무 무섭고 죄송해서 사시나무 떨듯 울고만 있었다.서재휘는 그런 나를 와락 끌어안았었다.“왜 이렇게 떨어요? 아린 씨한테 책임지라고 안 해요. 나야 다리 좀 부러져도 별 타격 없지만, 아린 씨는 다르잖아요. 무용수한테 오른 다리 골절이 얼마나 치명적인데.”단 한마디에 나는 그의 다정함 속으로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었다.하지만 이제야 뼈저리게 깨달았다. 음악에 미쳤다고 해서, 사랑에도 일편단심은 아니라는 걸.나비처럼 춤을 추던 내게 반했던 인간이라면, 파릇파릇한 젊음을 무기로 다가오는 온청아에게도 똑같이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왜 그때는 몰랐을까.정신이 몽롱해져 막 잠에 빠져들 무렵, 서재휘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심지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란죽을 들고 있었다.“여보, 일어나 봐. 아무것도 안 먹고 그냥 자면 어떡해. 속 버려.”그가 다정하게 말을 건넸지만, 나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평소 같으면 진작 짜증을 냈을 텐데 웬일인지 조용했다.심지어 조심스러운 손길로 나를 침대에서 일으켜 세우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나한테 화나서 밥 먹기 싫은 건 알겠는데, 배 속의 아이도 생각해야지. 아직 자라나는 시기라 한창 영양분이 필요할 때잖아. 일단 이 죽부터 먹어. 그러고 나서 화풀이 마음껏 해, 다 받아줄 테니까.”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었다.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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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나는 코끝이 시려 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아 내며 차오르는 눈물을 밀어 넣으려 고개를 치켜들었다.그리고 서재휘를 향해 쏘아붙였다.“내가 임신한 거 몰라서 이래? 겨우 몇 시간 전에 피를 왕창 뽑고 왔다고. 그런 사람한테 지금 갈비찜에 해물탕까지 차려 내라는 게 말이 돼?”순간, 그의 입가에 걸려 있던 가식적인 미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서재휘는 대뜸 짜증을 내며 받아쳤다.“징징대기는. 밥 한 끼 차려주는 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그래? 겨우 피 400ml 뽑아놓고 엄살 좀 부리지 마. 의사가 말리지만 않았어도 더 뽑았어야 했는데!”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마침내 억눌렀던 눈물이 둑이 터진 듯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네 눈엔 내가 그냥 움직이는 피 주머니로밖에 안 보였던 거지? 그럴 거면 나랑 결혼은 도대체 왜 한 거야?”서슬 퍼런 질문에 서재휘의 눈동자가 찰나의 불안으로 흔들렸다.그가 다급히 입을 열어 나를 달래려던 순간,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곧이어 온청아의 가냘프고 연약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형부, 나 너무 힘들어요... 언니는 내가 이렇게 아픈데도 밥 한 끼 해다 주기가 싫대요? 알아요, 언니 나 미워하는 거. 차라리 내가 죽어버리면 속이 후련하려나...”수화기 너머로 온청아를 달래는 부모님의 목소리와 함께 나를 향한 저주 섞인 폭언이 쏟아졌다.“청아야, 울지 마. 온아린 그년이 안 하고 배길 것 같아? 끝까지 고집부리면 내일 당장 호적에서 파버릴 거야.”“그래, 밥 한 끼 차리는 게 뭐가 어렵다고. 당장 죽으라는 것도 아닌데!”서재휘는 눈이 뒤집혔는지, 내 머리채를 거칠게 움켜쥐고 휴대폰 액정 앞으로 끌고 갔다.그러고는 핏대를 세운 채 악에 받쳐 으르렁거렸다.“빨리 대답 안 해? 당장 청아한테 만들어 주겠다고 말해!”두피가 통째로 뜯겨 나가는 것 같은 통증에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려 왔다.한때 내 삶의 유일한 구원이라 믿었던 남자가, 이제는 악마가 되어 나를 끝없는 심연 속으로 끌어내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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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죄송합니다. 이게 환자의 프라이버시이기 때문에, 병원 측에선 비밀을 보장할 의무가 있습니다.”간호사의 원칙적인 답변은 서재휘를 진정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다.그는 집요하게 몰아붙였고, 이마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내가 이 사람 남편이라고! 보호자인데 도대체 무슨 수술을 받는지 알 권리도 없습니까?”“보호자라면 당연히 무슨 수술인지 알고 계셔야지, 저희한테 왜 캐물으시는 거죠?”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자, 서재휘의 마음속을 잠식한 공포는 점점 커져만 갔다.급기야 굳게 닫혀버린 수술실 문을 향해 달려들어 미친 듯이 두들겨 댔다.“문 열어! 당장 열라고!”어느샌가 그의 눈가가 핏발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머릿속에서는 조금 전 찰나의 순간에 보았던 여자의 얼굴이 끊임없이 맴돌았다.하지만 이미 수술은 시작되었고, 닫힌 문이 다시 열릴 리 만무했다.결국 서재휘는 달려온 보안요원들에게 붙잡혀 복도 밖으로 끌려 나갔다.차가운 수술대 위, 마취제로 인해 아득해져 가던 의식 속으로 서재휘의 악에 받친 울부짖음이 희미하게 흘러들었다.그 비참한 절규를 들으며, 내 입꼬리는 아주 오랜만에 편안하고 유쾌한 호선을 그렸다.이윽고 나는 깊은 수면 속으로 기분 좋게 빠져들었다.다시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내 병상 곁을 지키고 있는 서재휘였다.얼마나 오래 나를 기다린 건지, 그의 눈동자는 실핏줄로 가득했다.내가 깨어난 것을 본 서재휘는 얼른 침대 옆 의자에 앉으며 손을 뻗어 이마를 짚으려 했다.본능적인 거부감에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그와 거리를 두었다.서재휘가 멍하니 굳어버렸다.허공에 멈춰 선 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목소리마저 흔들렸다.“지금... 나를 피하는 거야? 대체 왜...?”어처구니가 없었다.감히 내게 ‘왜냐고’ 물을 염치가 남아 있을 줄이야.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침묵이 길어지자 서재휘의 얼굴 위로 낯선 공포와 두려움이 스치고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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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서재휘는 연신 고개를 저었다.초점 없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꼴이 어떻게든 반박할 거리를 찾으려 애쓰는 듯했다.하지만 내가 던진 차가운 한마디는 그의 입을 단박에 틀어막았다.“내가 정말 너한테 유일무이한 존재였다면 어떻게 이 아이를 못 본 척 할 수 있겠어? 나를 피 뽑는 기계 취급하며 악착같이 내몰지도 않았겠지. 온청아 줄 닭곰탕을 끓일 정성으로 우리를 한 번이라도 더 들여다봤을 거야.”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병실 문이 열렸다.온청아가 흐느끼며 들어서더니, 이내 가련한 척 훌쩍였다.“언니가 나 미워하는 거 진작 알고 있었어. 이렇게 싫어하면서 대체 수혈은 왜 해 줬어?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어차피 살아 봤자 언니 눈총이나 받을 텐데...”말하는 내내 그녀의 시선은 넋이 나간 서재휘에게 향해 있었다.예전 같았으면 이런 말을 꺼내기 무섭게 가장 먼저 나서서 그녀를 싸고돌았을 사람이었다.하지만 지금의 서재휘는 절망에 빠져 그럴 여유가 없었다.머릿속에는 이명만 가득할 뿐이었다.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온청아를 향한 혐오를 굳이 숨기지 않았다.태어나서 지금까지, 철이 든 순간부터 늘 그녀에게 양보하며 살아왔다.하지만 온청아는 유독 나를 괴롭히는 걸 즐겼다.내가 무언가 손에 쥐고 있는 꼴을 눈 뜨고 보지 못했다.심지어 남편까지 빼앗으려고 했다.“온청아, 너는 매번 똑같은 소리밖에 못 하니? 말하면서 지치지도 않아? 듣는 내가 다 지겨워 죽겠어. 제발 멘트 좀 바꿔. 수준이 이리 낮아서야, 원. 그리고 내가 너 싫어하는 거 뻔히 알면서 왜 자꾸 눈앞에 알짱거리는 건데?”한마디씩 내뱉을 때마다 온청아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나를 노려보았다. 평생 이런 수모는 당해 본 적이 없었을 터였다.두 눈엔 증오가 이글이글 타올랐고, 이내 가련한 피해자라도 된 양 서재휘에게 달려갔다.눈가에 대롱대롱 매달린 눈물은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했다.“형부, 언니 좀 봐요. 어떻게 나한테 저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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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그럼 그렇지.부모님의 목소리가 병실 밖에 울리자마자 온청아는 밖으로 뛰쳐나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 흐느꼈다.내가 입원해 있는 모습을 보고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던 부모님은 이내 싸늘해진 눈초리로 쏘아붙였다.“겨우 피 몇 방을 뽑아 준 거 가지고 입원까지 하고 자빠졌어? 당장 퇴원 절차 밟고 집구석으로 기어들어 가서 네 동생 먹을 밥이나 해!”나를 향해 한바탕 악담을 퍼붓고도 분이 안 풀린지 씩씩거렸다.그사이 온청아가 고개를 숙이고 몇 마디 속삭이자, 어머니의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하게 일그러졌다.“너 미쳤니? 당장 청아한테 사과 안 해? 어디서 네까짓 게 감히 애 속을 뒤집어놓고 난리야!”그 한심한 꼴들을 보고 있자니 결국 실소가 터져 나왔다.오늘 이 순간을 기점으로, 이 인간들에게 남은 미련은 단 한 조각도 없었다.“내가 사과를 왜 해요? 뭐, 틀린 말이라도 했어요? 꼬리치고 다닌 건 온청아 저 계집애잖아요. 그런데 난 말도 못 해요? 내가 저년 끔찍하게 싫어하는 거 뻔히 알면서, 왜 맨날 눈앞에 나타나서 알짱거리게 놔두는 건데요?”“그리고 서재휘는 아직 내 남편이에요. 이혼 합의서에 도장 찍기 전까지는 처제가 자기 형부한테 이딴 식으로 들러붙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당신들도 그래요. 온청아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예쁘면, 애초에 나를 자식 삼지 말았어야지! 나 싫어했던 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냥 이참에 인연 싹 다 끊고 남남으로 살죠?”다들 넋을 잃고 말았다. 감히 내가 적반하장으로 나올 거라곤 상상조차 못 한 눈치였다.분에 겨워 얼굴이 벌게진 아버지가 주먹을 쥐고 돌진해 왔다.“내 몸에 손대기만 해 봐요. 그 즉시 가정폭력으로 경찰에 신고해 버릴 테니까. 마침 병원이기도 하겠다, 상해진단서 떼기엔 더없이 편하고 좋겠네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버지는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멈춰 섰다.그러자 이번엔 어머니가 악을 쓰며 폭언을 퍼붓기 시작했다.“내가 어쩌다 저런 독종을 낳았을까! 우리랑 인연을 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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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보름 동안 유산 조리를 마치고 퇴원하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용 선생님께 연락해서 대회에 참가하고 싶다고 말씀드린 것이었다.“하지만 참가자 명단은 이미 확정됐어. 원래 네 몫이었던 출전권도 온청아한테 넘어갔고.”아쉬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선생님, 정말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있긴 해. 마지막 딱 하나 남은 방법, 그건 바로 배틀이야.”연습실에 도착했을 때, 선생님은 한창 훈련을 지도하고 계셨다.“나 따라 해 봐. 그동안 쉬면서 기본기까지 다 까먹은 건 아닌지 확인해보게.”재활 훈련을 한 세트 끝내고 나서야, 비로소 배틀에 대해 자세히 물을 수 있었다.“이미 네 이름으로 신청서 제출했어. 일주일 뒤니까, 남은 시간 동안 회복 훈련에만 집중해. 괜히 나가서 내 얼굴에 먹칠하지나 말고.”그리고 배틀 당일, 나는 상대가 온청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역시나 서재휘와 함께 왔다.며칠 사이에 그는 눈에 띄게 초췌해졌다.“아린아!”나를 발견한 서재휘는 눈이 번쩍 뜨였다.이내 손을 빼내려 하자, 온청아가 얼른 그를 꽉 껴안았다.“언니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춤 안 춘 지 몇 달은 됐잖아. 그런데 아직도 참가 자격을 탐내는 거야?”나는 온청아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그저 덤덤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친한 척하지 마. 너 같은 동생 둔 적 없으니까.”온청아가 분해서 어쩔 줄 몰라 하자, 서재휘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아린아, 고집 좀 그만 부려. 우리 화해하고 같이 집으로 가자, 응? 앞으론 진짜 너 화나게 안 할게.”나는 참지 못하고 박장대소했다.비굴하게 꼬리를 내린 서재휘를 마주 보며 조소를 금치 못했다.“너 진짜 뻔뻔하다. 아이까지 지운 마당에 무슨 염치로 화해를 하고 집에 가자는 소리가 나와? 서재휘, 나 죽을 때까지 너만큼은 절대 용서 안 해!”내 인생의 가장 어두운 시절, 실낱같은 희망을 쥐여 주더니 그걸 잔인하게 짓밟아 버린 건 바로 그였다.서재휘는 충격을 받은 듯 연신 뒷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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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나는 무용 대회에 출전해 은상을 거머쥐었다.선생님은 못내 아쉽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네가 임신만 안 했어도... 공백기 동안 훈련 제대로 했으면 분명 금상 땄을 텐데.”하지만 나는 충분히 만족했다.은상을 받은 것만으로도 내 실력은 이미 증명된 셈이니까.입국장 게이트를 걸어 나오는 순간, 윤지강이 꽃다발을 들고 다가왔다.“축하한다, 꼬맹이. 진짜로 상까지 받을 줄은 몰랐는데?”나는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배틀에서 온청아의 심사위원 매수 사건을 폭로해 주지 않았더라면, 대회 출전 자격조차 없었을 것이다.“내가 고맙다고 해야지. 오빠 아니었으면 난 대회에 나가지도 못했을 텐데.”윤지강의 눈매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말로만 때우지 말고, 밥이라도 한 끼 사든가.”“당연하지! 한 끼가 아니라 열 끼도 살 수 있어. 어릴 때 오빠가 나한테 밥 챙겨준 게 몇 번인데, 이제 내가 은혜 갚을 차례야.”그저 예의상 던진 말이었는데, 윤지강은 기다렸다는 듯 기회를 낚아챘다.공항 로비를 빠져나오자, 똑같이 꽃다발을 들고 서 있는 서재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허겁지겁 달려왔다.얼마나 서둘렀는지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아린아, 수상 축하해!”그리고 꽃다발을 내밀었지만, 나는 가뿐히 무시했다.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아무 말 없이 스쳐 지나갔다.그 모습을 보던 윤지강이 뻔히 알면서도 능청스럽게 물었다.“가서 얘기라도 좀 나누지?”“모르는 사람이랑 굳이 말을 섞을 필요가 있나.”등 뒤에 서 있던 서재휘가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주저앉았다.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고, 손가락 틈새로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이제 아이는 물론, 사랑하는 사람도 잃었다.자신이 정말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빈털터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뼈저리게 깨달았다.윤지강은 나를 자취방까지 데려다주었다.그런데 뜻밖에도 온청아와 부모님이 집 앞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심지어 도어락을 반쯤 부수고 강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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