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임신 몇 개월 차, 여동생이 교통사고를 당했다. 수혈이 급박한 상황에서 가족 중 혈액형이 맞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그러나 극심한 입덧으로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뼈만 남은 몸으로는 도저히 수혈을 감당할 수 없어 거절했지만, 가족들은 나를 강제로 수혈실로 끌고 갔다. 남산만 한 배를 이끌고 저항할 힘조차 없었던 나는 남편 서재휘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잔인한 방관뿐이었다. “너 몸 튼튼하잖아. 피 좀 나눠 준다고 안 죽어. 하지만 청아는 달라. 이제 막 빛 보려던 애인데, 앞길 막히게 놔둘 순 없어.” 결국 나는 수혈실 바닥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차가운 병실에서 다시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중절 수술을 예약하는 것이었다.
더 보기나는 무용 대회에 출전해 은상을 거머쥐었다.선생님은 못내 아쉽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네가 임신만 안 했어도... 공백기 동안 훈련 제대로 했으면 분명 금상 땄을 텐데.”하지만 나는 충분히 만족했다.은상을 받은 것만으로도 내 실력은 이미 증명된 셈이니까.입국장 게이트를 걸어 나오는 순간, 윤지강이 꽃다발을 들고 다가왔다.“축하한다, 꼬맹이. 진짜로 상까지 받을 줄은 몰랐는데?”나는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배틀에서 온청아의 심사위원 매수 사건을 폭로해 주지 않았더라면, 대회 출전 자격조차 없었을 것이다.“내가 고맙다고 해야지. 오빠 아니었으면 난 대회에 나가지도 못했을 텐데.”윤지강의 눈매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말로만 때우지 말고, 밥이라도 한 끼 사든가.”“당연하지! 한 끼가 아니라 열 끼도 살 수 있어. 어릴 때 오빠가 나한테 밥 챙겨준 게 몇 번인데, 이제 내가 은혜 갚을 차례야.”그저 예의상 던진 말이었는데, 윤지강은 기다렸다는 듯 기회를 낚아챘다.공항 로비를 빠져나오자, 똑같이 꽃다발을 들고 서 있는 서재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허겁지겁 달려왔다.얼마나 서둘렀는지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아린아, 수상 축하해!”그리고 꽃다발을 내밀었지만, 나는 가뿐히 무시했다.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아무 말 없이 스쳐 지나갔다.그 모습을 보던 윤지강이 뻔히 알면서도 능청스럽게 물었다.“가서 얘기라도 좀 나누지?”“모르는 사람이랑 굳이 말을 섞을 필요가 있나.”등 뒤에 서 있던 서재휘가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주저앉았다.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고, 손가락 틈새로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이제 아이는 물론, 사랑하는 사람도 잃었다.자신이 정말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빈털터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뼈저리게 깨달았다.윤지강은 나를 자취방까지 데려다주었다.그런데 뜻밖에도 온청아와 부모님이 집 앞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심지어 도어락을 반쯤 부수고 강제로
보름 동안 유산 조리를 마치고 퇴원하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용 선생님께 연락해서 대회에 참가하고 싶다고 말씀드린 것이었다.“하지만 참가자 명단은 이미 확정됐어. 원래 네 몫이었던 출전권도 온청아한테 넘어갔고.”아쉬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선생님, 정말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있긴 해. 마지막 딱 하나 남은 방법, 그건 바로 배틀이야.”연습실에 도착했을 때, 선생님은 한창 훈련을 지도하고 계셨다.“나 따라 해 봐. 그동안 쉬면서 기본기까지 다 까먹은 건 아닌지 확인해보게.”재활 훈련을 한 세트 끝내고 나서야, 비로소 배틀에 대해 자세히 물을 수 있었다.“이미 네 이름으로 신청서 제출했어. 일주일 뒤니까, 남은 시간 동안 회복 훈련에만 집중해. 괜히 나가서 내 얼굴에 먹칠하지나 말고.”그리고 배틀 당일, 나는 상대가 온청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역시나 서재휘와 함께 왔다.며칠 사이에 그는 눈에 띄게 초췌해졌다.“아린아!”나를 발견한 서재휘는 눈이 번쩍 뜨였다.이내 손을 빼내려 하자, 온청아가 얼른 그를 꽉 껴안았다.“언니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춤 안 춘 지 몇 달은 됐잖아. 그런데 아직도 참가 자격을 탐내는 거야?”나는 온청아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그저 덤덤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친한 척하지 마. 너 같은 동생 둔 적 없으니까.”온청아가 분해서 어쩔 줄 몰라 하자, 서재휘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아린아, 고집 좀 그만 부려. 우리 화해하고 같이 집으로 가자, 응? 앞으론 진짜 너 화나게 안 할게.”나는 참지 못하고 박장대소했다.비굴하게 꼬리를 내린 서재휘를 마주 보며 조소를 금치 못했다.“너 진짜 뻔뻔하다. 아이까지 지운 마당에 무슨 염치로 화해를 하고 집에 가자는 소리가 나와? 서재휘, 나 죽을 때까지 너만큼은 절대 용서 안 해!”내 인생의 가장 어두운 시절, 실낱같은 희망을 쥐여 주더니 그걸 잔인하게 짓밟아 버린 건 바로 그였다.서재휘는 충격을 받은 듯 연신 뒷걸
그럼 그렇지.부모님의 목소리가 병실 밖에 울리자마자 온청아는 밖으로 뛰쳐나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 흐느꼈다.내가 입원해 있는 모습을 보고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던 부모님은 이내 싸늘해진 눈초리로 쏘아붙였다.“겨우 피 몇 방을 뽑아 준 거 가지고 입원까지 하고 자빠졌어? 당장 퇴원 절차 밟고 집구석으로 기어들어 가서 네 동생 먹을 밥이나 해!”나를 향해 한바탕 악담을 퍼붓고도 분이 안 풀린지 씩씩거렸다.그사이 온청아가 고개를 숙이고 몇 마디 속삭이자, 어머니의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하게 일그러졌다.“너 미쳤니? 당장 청아한테 사과 안 해? 어디서 네까짓 게 감히 애 속을 뒤집어놓고 난리야!”그 한심한 꼴들을 보고 있자니 결국 실소가 터져 나왔다.오늘 이 순간을 기점으로, 이 인간들에게 남은 미련은 단 한 조각도 없었다.“내가 사과를 왜 해요? 뭐, 틀린 말이라도 했어요? 꼬리치고 다닌 건 온청아 저 계집애잖아요. 그런데 난 말도 못 해요? 내가 저년 끔찍하게 싫어하는 거 뻔히 알면서, 왜 맨날 눈앞에 나타나서 알짱거리게 놔두는 건데요?”“그리고 서재휘는 아직 내 남편이에요. 이혼 합의서에 도장 찍기 전까지는 처제가 자기 형부한테 이딴 식으로 들러붙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당신들도 그래요. 온청아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예쁘면, 애초에 나를 자식 삼지 말았어야지! 나 싫어했던 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냥 이참에 인연 싹 다 끊고 남남으로 살죠?”다들 넋을 잃고 말았다. 감히 내가 적반하장으로 나올 거라곤 상상조차 못 한 눈치였다.분에 겨워 얼굴이 벌게진 아버지가 주먹을 쥐고 돌진해 왔다.“내 몸에 손대기만 해 봐요. 그 즉시 가정폭력으로 경찰에 신고해 버릴 테니까. 마침 병원이기도 하겠다, 상해진단서 떼기엔 더없이 편하고 좋겠네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버지는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멈춰 섰다.그러자 이번엔 어머니가 악을 쓰며 폭언을 퍼붓기 시작했다.“내가 어쩌다 저런 독종을 낳았을까! 우리랑 인연을 끊
서재휘는 연신 고개를 저었다.초점 없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꼴이 어떻게든 반박할 거리를 찾으려 애쓰는 듯했다.하지만 내가 던진 차가운 한마디는 그의 입을 단박에 틀어막았다.“내가 정말 너한테 유일무이한 존재였다면 어떻게 이 아이를 못 본 척 할 수 있겠어? 나를 피 뽑는 기계 취급하며 악착같이 내몰지도 않았겠지. 온청아 줄 닭곰탕을 끓일 정성으로 우리를 한 번이라도 더 들여다봤을 거야.”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병실 문이 열렸다.온청아가 흐느끼며 들어서더니, 이내 가련한 척 훌쩍였다.“언니가 나 미워하는 거 진작 알고 있었어. 이렇게 싫어하면서 대체 수혈은 왜 해 줬어?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어차피 살아 봤자 언니 눈총이나 받을 텐데...”말하는 내내 그녀의 시선은 넋이 나간 서재휘에게 향해 있었다.예전 같았으면 이런 말을 꺼내기 무섭게 가장 먼저 나서서 그녀를 싸고돌았을 사람이었다.하지만 지금의 서재휘는 절망에 빠져 그럴 여유가 없었다.머릿속에는 이명만 가득할 뿐이었다.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온청아를 향한 혐오를 굳이 숨기지 않았다.태어나서 지금까지, 철이 든 순간부터 늘 그녀에게 양보하며 살아왔다.하지만 온청아는 유독 나를 괴롭히는 걸 즐겼다.내가 무언가 손에 쥐고 있는 꼴을 눈 뜨고 보지 못했다.심지어 남편까지 빼앗으려고 했다.“온청아, 너는 매번 똑같은 소리밖에 못 하니? 말하면서 지치지도 않아? 듣는 내가 다 지겨워 죽겠어. 제발 멘트 좀 바꿔. 수준이 이리 낮아서야, 원. 그리고 내가 너 싫어하는 거 뻔히 알면서 왜 자꾸 눈앞에 알짱거리는 건데?”한마디씩 내뱉을 때마다 온청아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나를 노려보았다. 평생 이런 수모는 당해 본 적이 없었을 터였다.두 눈엔 증오가 이글이글 타올랐고, 이내 가련한 피해자라도 된 양 서재휘에게 달려갔다.눈가에 대롱대롱 매달린 눈물은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했다.“형부, 언니 좀 봐요. 어떻게 나한테 저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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