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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다시, 열 여섯

2화. 다시, 열 여섯만약 이것이 정말로 회귀라면, 지금은 전생에서 성력이 처음 발현되었던 바로 그 시기였다.그렇다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자신은 이미 알고 있었다.며칠 후 성력 각성. 그로부터 몇 년간의 성녀 수업. 그리고 그 곧 시작될 세계수의 오염, 이 모든 것을 지키기위해,자신의 모든 것을 갈아 넣어야 했던 그 길고 긴 정화의 여정—그리고 그 끝에서 기다리는 화형대.셀레스티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나는 안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부 알고 있어.입꼬리가 저절로 비틀렸다. 웃음이라기보다는 스스로에 대한 비웃음 그리고 자조에 가까운 표정이었다.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대가가 그런 비참함이라니… 전생의 마지막 순간, 그녀는 다짐했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아무도 구하지 않겠다고.그래. 이번엔 다르게 할 거야. 이제 내 자신만 지키는거야세계수의 오염이 시작되어도, 나서지 않는다. 성력을 숨긴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그저 평범한 신전 사제 정도로 살아간다. 이 모든 것을 구할 성력을 숨기고 산다.이런 세상을 구하겠다고 나서서 스스로를 제물로 던져지듯, 모든 인생을 바치는 그 따위 멍청한 짓 따위, 두 번 다시 하지 않는다.다시 주어진 인생,셀레스티아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살아남는다. 이번엔 반드시.한참을 그렇게 다짐하던 그녀는, 문득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신전 마당에서 어린 견습 사제들이 아침 기도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낯익은 풍경이었다. 전생에도 매일 아침 저 자리에서, 그저 같은 기도문을 외웠었다.저 아이들 중 누군가는, 나처럼 되겠지.성력을 각성한 아이들 중 극히 일부는, 그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무거운 대가를 짊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셀레스티아는 알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축복인지 저주인지는, 결국 그 힘을 가진 사람이 어떤 세상에서 살아가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그 힘을 필요로 할 때는 축복이라 부르고,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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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제국으로 가는 길

3화. 제국으로 가는 길마음을 먹자, 다음 날 바로 제국에서 준비된 마차가 성국을 떠났다.제국으로 가는 마차가 성국의 경계를 넘어서자,셀레스티아는 커튼을 살짝 걷고 창밖을 내다보았다.성국에서 쓰던 것들과는 다르게, 마차 안의 모든 것이 호화스러웠다.모든 게 자신을 위해 준비된 듯 보였다.⁃ 먼 길인데도 마차는 지나치게 푹신했고, 향도 은은하게 포근했다.⁃ 꽃도, 과일도— 어째서인지 전부 그녀의 취향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성국 사람들조차 몰랐던 것을, 처음 보는 제국 사람들이 어떻게 알았을까.⁃ 계약을 앞두고 좋은 인상을 주려는 것이겠지. 아니면, 내 착각이거나…이 모든 것이 너무나도 낯선 풍경이었다.전생에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길,단 한 번도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세상이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맞은편 좌석에는 레이먼드가 앉아 있었다.그는 가끔 창밖을 살피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지만,그녀를 향한 시선만큼은 늘 정중했다."불편하신 점은 없으십니까?""괜찮습니다."셀레스티아는 짧게 답하며 다시 시선을 돌렸다.속으로는 다른 생각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황제 개인의 사정이라…… 광기의 저주.정말로 내가 짐작하는 그것일까.드래곤 혈통의 저주?며칠 전 성력을 사용했을 때 느꼈던 그 낯선 통증이,손끝에 아직도 남아 있는 듯했다.능력에 대한 저주라면 여전히 그녀의 몸 안에 잠들어 있었다.그렇다면 황제의 저주라는 것도,어쩌면 자신의 것과 무관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뭐 어찌 됐든 간에, 이용할 수 있다면 이용한다. 그게 다시 가진 이번 생의 규칙이야.마차의 흔들림 속에서, 셀레스티아는 잠시 눈을 감았다.전생이었다면, 지금쯤 신전 마당에서 견습 사제들과 함께 기도문을 외우고 있었을 시간이었다.정해진 하루, 정해진 자리, 정해진 삶.그러나 지금 그녀는 그 좁은 세계를 완전히 벗어나, 낯선 나라의 심장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이제 와서 물러설 곳도 없어.마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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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황제 아드리안

4화. 황제 아드리안성국에서도 소문으로는 정말 화려하다고 들어왔던 황궁의 회랑은 정말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었다.그리고 화려하기로는 정말로 끝이 없었다. 역대 황제들의 초상화와 예술품들이 회랑을 따라 늘어서 모두 그 빛을 잃지 않고 화려함을 뽐내고 있었다.성국과는 대비되는 모양새였다.보기엔 오히려 좋았다.음습하게 뒤에서 체스판을 조종하며, 앞에서는 깨끗한 척하는 성국보다는 낫다는 소리였다.여기는 이러한 문화를 자랑하는 것이, 제국이라는 나라의 상징인 듯했다.- 그렇다면 이 나라 룰에 적응을 해보도록 해볼까…셀레스티아는 레이먼드의 뒤를 따라 걸으며, 문 하나를 지날 때마다 늘어서 있는 근위기사들이 성녀를 향해 보내는 시선을 온몸으로 느꼈다.경계와 호기심이 뒤섞인, 그 모두의 눈빛이었다.⁃ 이미 성국의 성녀가 왔다는 소식이, 궁 전체에 퍼진 모양이구나. 입소문은 어디에서나 빠른 모양이군.마침내 회랑의 끝, 이 황궁에서 가장 화려한 황금빛 문 앞에 다다랐다.레이먼드가 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이 안에 폐하께서 계십니다."성녀가 왔음을 아뢰자, 이윽고 문이 열렸다.넓은 집무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벽을 가득 채운 서가와, 그 앞에 놓인 커다란 책상.그리고 그 책상 너머에 그가 있었다.금빛 머리카락. 그보다 더 짙은, 태양빛보다도 눈부신 금빛 눈동자.서류를 내려다보던 그 눈이, 천천히 그녀를 향해 들어 올려졌다.순간, 셀레스티아는 심장과 숨이 동시에 멎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뭐지.전혀 이유 모를 감정이 아니었다.이번엔 분명한 감각이었다.마치 아주 오래전에 이 얼굴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설명할 수 없는 기시감."성국의 성녀, 셀레스티아입니다."그녀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황제에게 인사하며 예를 갖췄다.아드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오랫동안 말없이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그 시선이 무례하다고 느껴질 만큼 길었으나, 동시에 신중했다.그리고 얼마쯤 지나서야,"앉아라."짧은 한마디였다. 감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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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결혼 계약

5화. 결혼 계약"이렇게 먼 길 오느라 고생했겠군. 갑작스럽겠지만, 본론부터 말하지."아드리안이 서류 한 장을 그녀 앞으로 밀었다."그대에게 명목상의 황후 자리를 제안한다. 실질적인 부부 관계는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정기적으로 그대의 성력을 빌리고 싶다."셀레스티아는 서류를 내려다보며 침착하게 물었다."그 대가로, 폐하께서는 제게 무엇을 주실 수 있으십니까."그 물음에, 아드리안의 눈매가 미세하게 좁아졌다. 마치 예상보다 흥미로운 답을 들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가 당황하지 않고 당차게 요구했기 때문이다."원하는 게 있나.""제 능력…… 그러니까 몸에 대한 대가입니다. 성력을 쓸 때마다, 제 생명력이 갉아먹힙니다. 그것을 완화할 방법이 있다면—""이미 알고 있는 바이다."아드리안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그대의 저주. 아마도 그것을 완화할 수 있는 방법이, 짐에게 있다. 그것을 이번 계약의 대가로 교환하도록 하지."셀레스티아의 눈이 커졌다.⁃ 짐작이 맞았어. 황제의 저주와 내 저주는, 전혀 무관하지 않았어."어떻게, 그것을 알고 계신 겁니까……""짐의 몸에 흐르는 것도, 대가를 요구하는 힘이니까."아드리안이 처음으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차갑지만, 어딘가 지나치리만치 씁쓸함이 짙게 묻어나는 미소였다."그러니 계약을 하도록 하지. 서로의 저주를 나누어 짊어지는 걸로."셀레스티아는 잠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태양처럼 빛나는 그 금빛 눈동자 안에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낯익음이 다시 한번 스쳐 지나갔다. 그 씁쓸함이 어쩐지, 누군가와 닮은 것 같았다.⁃ 이 사람을, 나는 정말 처음 보는 걸까."……좋습니다."셀레스티아는 그렇게 답하며, 서류가 아닌 자신의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계약하겠습니다."아드리안의 시선이 잠시 그녀의 손에 머물렀다. 태양빛 눈동자가 흔들리듯 스쳤다. 예상치 못한 행동이었는지, 그의 눈매에 옅은 당혹감이 스쳤다."……서류의 서명이 아니라?""성력의 계약이라면, 이쪽이 더 정확하지 않겠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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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황후궁 입성

6화. 황후궁 입성"마마님, 황후궁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결혼 계약이 끝나자마자, 어느새 전달을 받았는지, 레이먼드는 이제 또 황후 마마를 대하는 태도로 돌아와 있었다.⁃ 방금 전까지 황제 폐하 앞이라 그런지 다들 얼음장 같더니. 하긴, 황제가 무섭긴 하더라.셀레스티아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를 따라 걸었다.황후궁 문 앞에 다다르자, 나이 지긋한 시녀장과 시녀들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 나와 인사했다."어머, 어머! 이렇게 조그맣고 귀엽고 요정 같은 분이 오실 줄이야!"시녀 중 한 명은 셀레스티아의 손을 덥석 붙잡더니, 위아래로 흔들며 눈을 반짝였다."저는 마사라고 합니다! 황후궁 시녀장이지요! 잘 부탁드립니다, 마마님!""아, 네…… 잘 부탁드립니다.""마마님, 열여섯이라고 들었는데 성국에서는 더 작은 아이를 보내오신 줄 알았어요. 너무 작으시고 귀여우셔요!""얘! 마마님께 실례야!"시녀들의 왁자지껄함과 갑작스러운 분위기에, 셀레스티아의 사파이어 눈동자는 갈 곳을 잃고 도르르 굴러갔다.셀레스티아는 얼떨결에 손을 맞잡으며 답했다.전생을 통틀어, 이렇게 다짜고짜 반가움을 표현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뭐지, 이 열렬한 환영은."드디어, 드디어 이 궁에 사람이 사는구나 싶어요! 지난 3년 동안 이 넓디넓은 궁에 저 혼자 먼지만 닦았다니까요?"마사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감격에 겨워했다."찌르면 피도 안 나오실 것 같은, 그 차갑디차가운 폐하께서는 황후궁에 발도 안 들이시고, 손님도 절대 안 부르시고! 저는 그냥 꽃병 물이나 갈아주는 게 일이었어요!"⁃ ……생각보다 훨씬 적막한 궁이었나 보군.셀레스티아는 마사를 따라 궁 안으로 들어서며, 화려하지만 사람의 온기가 없는 복도를 둘러보았다. 곳곳에 놓인 값비싼 장식품들은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었지만, 그 정돈됨이 오히려 쓸쓸함을 더했다."자, 여기가 황후님 침실이에요!"마사가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 순간, 셀레스티아는 말문이 턱 막혔다.방 안 가득, 그녀가 좋아할 법한 것들이 즐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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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저녁 식사

7화. 저녁 식사"……폐하께서 저녁을, 함께 말씀이신가요?"셀레스티아는 방금 전까지 마사와 함께 먹기로 했던 저녁상을 떠올리며 되물었다."예. 갑작스러운 결정이라 저도 놀랐습니다만."레이먼드의 목소리에도 옅은 당혹감이 묻어 있었다.옆에서 듣고 있던 마사가 눈을 크게 뜨며 셀레스티아의 팔을 붙잡았다."마마님! 이거 큰일이에요! 폐하께서 누군가와 겸상을 청하신 건 제가 이 궁에서 일한 지 3년 만에 처음 듣는 일이라고요!""……그렇게까지요?""당연하죠! 대신들도 폐하와 겸상 한번 해보는 게 소원이라고 할 정도인데!"마사는 순식간에 시녀들을 불러 모으더니, 셀레스티아를 이리저리 돌려세우며 드레스를 갈아입히기 시작했다."이 색이 좋겠어요! 아니, 저 색이! 머리는 이렇게—""저, 마사님. 그냥 편하게 가도……""안 됩니다, 마마님! 폐하의 첫 겸상인데요!"⁃ 서로 계약 관계라고 분명히 말씀드렸는데.셀레스티아는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도, 시녀들의 분주한 손길에 몸을 맡겼다.그렇게 얼마 뒤, 그녀는 황제의 개인 식당으로 안내되었다.꽤나 작고 아늑한 방이었다. 화려한 대연회장을 상상했던 것과 달리, 식탁 위에는 단출한 음식 몇 가지와 촛불만이 놓여 있었다.아드리안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를 보자, 그는 살짝 눈썹을 들어 올렸다."……그 옷은, 마사가 골랐나 보군.""어떻게 아셨습니까?""과하게 화려하니까."셀레스티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 사람,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네."보시기에 불편하시면 갈아입고 오겠습니다.""됐다. 앉아라."그녀는 조용히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서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만 작게 울렸다."……저기, 폐하.""말해라.""겸상은 관례상 안 하신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갑자기……"아드리안은 잠시 포크를 내려놓았다."내 계약자의 컨디션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성력을 나누는 사이니, 상태를 살피는 게 당연하다는 뜻이었다.""……그게 답니까?""그 외에 다른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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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낯선 여운

8화. 낯선 여운저녁 식사가 끝난 뒤, 셀레스티아는 황후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썼다.전생에서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 일렁거려 낯설었다.⁃ 별일 아니야. 손끝이 스친 것뿐이잖아."마마님, 저녁은 어떠셨어요?"마사가 신이 나서 물었다."그냥…… 평범했습니다.""에이, 그게 다예요? 폐하와 무슨 얘기 나누셨는지 하나도 안 궁금해하시는 척하시면서 저 사실 완전 궁금한데!""별다른 얘기는 없었어요. 식사만 하고 왔습니다."셀레스티아는 그렇게 답하며 대수롭지 않게 침실로 들어갔다. 사실이었다. 정말로 별일 아니었다. 그녀는 그 밤, 평소와 다름없이 잠자리에 들었고, 다음 날 아침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눈을 떴다.⁃ 거봐, 아무렇지도 않잖아. 아무 일도 없잖아.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전생과 회귀를 겪은 그녀에게, 손끝이 잠깐 스친 감촉 따위는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한편, 같은 시각. 아드리안은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 있었지만, 눈앞의 서류는 좀처럼 읽히지 않고 있었다."폐하."레이먼드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같은 문서를 벌써 삼십 분째 보고 계십니다."아드리안은 그제야 서류에서 시선을 뗐다."……그런가.""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아드리안은 대답 대신, 자신의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녀의 손끝이 스쳤을 때 느껴졌던 그 낯선 감촉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했다.⁃ 단순한 성력의 반응이겠지.그렇게 되뇌었지만, 어쩐지 그 생각에 스스로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레이먼드.""예, 폐하.""황후궁에…… 별다른 문제는 없나."레이먼드가 눈을 크게 떴다. 늘 사무적인 보고만 요구하던 주군이, 처음으로 사적인 안부를 물은 순간이었다."딱히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만, 왜 갑자기……""그냥 물어본 것이다."아드리안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글자는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레이먼드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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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첫 아침, 첫 소란

9화. 첫 아침, 첫 소란다음 날 아침, 셀레스티아는 낯선 새소리에 눈을 떴다.성국의 기숙사와는 비교도 안 되게 푹신한 침대, 그리고 천장을 수놓은 화려한 프레스코화. 잠시 여기가 어디인지 헷갈릴 정도였다."마마님! 일어나셨어요?"문밖에서 마사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대답도 듣지 않고 문이 벌컥 열렸다."오늘부터 정식으로 황후 수업을 시작하셔야 해요!""……수업이요?"셀레스티아는 눈을 비비며 되물었다."네! 궁정 예법, 제국의 역사, 그리고 사교계 인맥까지! 배우실 게 산더미예요!"마사가 커다란 책 더미를 안고 들어왔다."알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사실 이런 쪽으론 아는 게 거의 없어서요."셀레스티아는 짐짓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성국에서는 이런 걸 배울 기회가 별로 없었거든요.""어머, 그러시겠죠! 성녀님이셨으니 이런 세속적인 건 잘 모르시겠어요!"마사가 안쓰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성국에서도, 성녀는 각국 사절을 맞이할 일이 종종 있었다. 그때마다 어깨너머로 익힌 인사법이며 화법 정도는, 이미 몸에 배어 있었다.⁃ 게다가 전생에서도 스무 살 가까이 살아본 몸이었다. 신전 안에 갇혀 지낸 세월이었지만, 그동안 오간 사람들과 스쳐 지난 이야기들만으로도 세상 돌아가는 이치 정도는 자연히 눈에 익어 있었다.⁃ ……미안합니다, 마사님. 그러니 절반은, 사실 이미 알고 있습니다.셀레스티아는 속으로 조용히 사과하며, 겉으로는 순진한 얼굴을 유지했다.⁃ 하지만 지금 아는 척해봐야,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 모른다고 해야, 사람들이 방심하고 더 많은 걸 알려주는 법이니까."그럼 처음부터 차근차근 알려드릴게요!"마사가 신이 나서 책을 펼치려는데, 몇 장 넘기기도 전에 그녀의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어…… 마마님. 이거, 저도 사실 잘 모르는 부분이 많아서……""그럼 아는 만큼만 알려주세요. 대신—"셀레스티아는 살짝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책에 없는 것부터 듣고 싶습니다. 예를 들면, 이 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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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정원에서

10화. 정원에서정원으로 향하는 길, 셀레스티아는 걸으면서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목적이 뭘까. 단순한 변덕은 아닐 텐데.그녀는 걸음을 옮기며 빠르게 경우의 수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정치적 시위용— 아니다, 굳이 자신과 단둘이 있을 이유가 없다. 첩자를 통한 정보 유출을 노린 함정— 그것도 아니다, 그런 목적이라면 좀 더 공개적인 자리를 택했을 것이다. 황태후파를 견제하기 위한 명분 쌓기— 이것도 어딘가 석연치 않다.⁃ 어느 쪽으로 계산해도, 앞뒤가 맞질 않아.전생에서 대신관의 표정 하나, 귀족들의 눈빛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읽어내던 그녀였다. 궁정이란 판 위에서, 모든 말과 행동에는 반드시 의도가 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 그녀가 살아온 세계에서는 그랬다.⁃ 그런데 왜, 이 사람만큼은 읽히지가 않지.정원 입구에 다다르자, 아드리안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의 집무복 대신, 한결 편한 차림이었다."오셨습니까, 폐하.""기다렸다."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말투에 미묘하게 서두르는 기색이 묻어 있었다.⁃ ……기다렸다고?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셀레스티아의 머릿속에서 수십 갈래로 뻗어나가던 계산이 일제히 멈췄다. 마치 잘 짜여 있던 회로 하나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유로 순간 끊겨버린 것처럼.⁃ 지금 이건— 대체 뭘 분석해야 하는 감정이지.궁중의 암투라면, 상대의 숨소리 하나까지도 정보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그 어떤 정보도 손에 쥐지 못한 채, 그저 그 말 한마디에 붙들려 있었다.⁃ 이상해. 정말 이상해.두 사람은 나란히 정원을 걷기 시작했다. 화창한 아침 햇살 아래, 이국적인 꽃들이 만개해 있었다."이곳 정원은, 성국에는 없는 꽃들이 많군요."셀레스티아가 먼저 말을 꺼냈다. 침묵이 어색해서였다.⁃ 침묵을 못 견디는 것도, 낯선 일이네.궁정의 어떤 노회한 정치가와 마주 앉아 있어도, 그녀는 침묵을 먼저 깨는 법이 없었다. 침묵은 무기였다. 먼저 입을 여는 쪽이 언제나 불리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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