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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다시, 열 여섯

Author: 시아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10 13:34:26

2화. 다시, 열 여섯

만약 이것이 정말로 회귀라면, 지금은 전생에서 성력이 처음 발현되었던 바로 그 시기였다.

그렇다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자신은 이미 알고 있었다.

며칠 후 성력 각성.

그로부터 몇 년간의 성녀 수업.

그리고 그 곧 시작될 세계수의 오염,

이 모든 것을 지키기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갈아 넣어야 했던 그 길고 긴 정화의 여정—

그리고 그 끝에서 기다리는 화형대.

셀레스티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나는 안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부 알고 있어.

입꼬리가 저절로 비틀렸다.

웃음이라기보다는 스스로에 대한 비웃음 그리고 자조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대가가 그런 비참함이라니…

전생의 마지막 순간, 그녀는 다짐했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아무도 구하지 않겠다고.

그래. 이번엔 다르게 할 거야.

이제 내 자신만 지키는거야

세계수의 오염이 시작되어도, 나서지 않는다.

성력을 숨긴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그저 평범한 신전 사제 정도로 살아간다.

이 모든 것을 구할 성력을 숨기고 산다.

이런 세상을 구하겠다고 나서서

스스로를 제물로 던져지듯,

모든 인생을 바치는

그 따위 멍청한 짓 따위,

두 번 다시 하지 않는다.

다시 주어진 인생,

셀레스티아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살아남는다. 이번엔 반드시.

한참을 그렇게 다짐하던 그녀는, 문득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신전 마당에서 어린 견습 사제들이 아침 기도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낯익은 풍경이었다.

전생에도 매일 아침 저 자리에서, 그저 같은 기도문을 외웠었다.

저 아이들 중 누군가는, 나처럼 되겠지.

성력을 각성한 아이들 중 극히 일부는, 그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무거운 대가를 짊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셀레스티아는 알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축복인지 저주인지는,

결국 그 힘을 가진 사람이 어떤 세상에서 살아가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그 힘을 필요로 할 때는 축복이라 부르고,

필요하지 않게 되면 저주라 부르는….

셀레스티아는 그 인간의 잔인한 이중성을, 이제는 뼈저리게 사무치게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녀의 성력이 유독 강력한 이유가,

이제

단순한 축복이 아니라 정화할수록 자신의 생명력을 갉아먹는 저주와 다름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저주가, 회귀한 지금도 여전히 그녀의 몸속에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그날 오전,

셀레스티아는 오랜만에 신전 도서관에 들렀다.

딱히 목적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회귀 이후로 뒤숭숭한 마음을 가라앉힐 곳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전생에서도 그녀는 혼자 있을 시간에는 자주 신전 도서관을 들렸었다.

서가 사이를 거닐던 중,

나이 든 사서 수녀와 젊은 견습 수녀 둘이 나누는 대화가 귓가에 스쳤다.

"그나저나 요 며칠 제국 쪽 소문 들으셨어요? 황실에 숨겨진 핏줄이 있다는 이야기요."

"쉿, 그런 소문을 어디서 함부로 입에 담느냐."

"에이, 여기밖에 없는데 어때요. 선대 황제의 사생아가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이야기, 대륙 어디를 가도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걸요."

"뜬소문이다. 황가의 핏줄이 그리 쉽게 밖으로 새어 나갈 리가 있느냐."

"그래도 신기하잖아요. 만약 진짜라면, 그 핏줄은 대체 어떻게 살고 있을지."

셀레스티아는 그 대화를 무심코 흘려들으며 서가를 지나쳤다.

당장은 그 대화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짧은 대화 한 조각이,

훗날 그녀의 기억 속에서 전혀 다른 무게로 다시 떠오르게 되리라는 것을,

지금의 그녀는 알지 못했다.

며칠 뒤, 셀레스티아의 성력이 정식으로 각성했다.

레벨은 그다지 높게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성력을 조절하면서 성력 테스트에 임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녀는 처음으로 손끝에서 시작된 낯선 통증에 애써 잠든 잠이 깨었다.

·····뭐야, 이건.

성력을 아주 살짝 사용해본 것뿐인데도, 손끝이 저릿하게 떨리며 바로 미열이 올랐다.

전생에는 느끼지 못했던, 아니면 혹은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감각이었다.

느끼지 못했던 이유는 이 세계를, 이 세계수를 구해야한다는 사명감으

셀레스티아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설마…… 이번 생에도, 이 저주는 그대로인 거야?"

대답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어둠 속에서 홀로, 자신의 몸에 새겨진 낯선 이질감을 곱씹을 뿐이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신전 복도 저편에서 들려온 한마디가 그녀의 평온한 계획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제국에서 사자가 왔다고 합니다. 황제 폐하께서…… 성녀의 힘을 청하신다는군요."

셀레스티아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 황제 ]

전생의 그녀와는 단 한 번도 얽힌 적 없던 이름이었다.

적어도, 자신이 이제 기억하는 한에서는

성국과 제국은 늘 냉랭한 거리를 유지해왔다.

성국은 제국의 황가를 "저주받은 드래곤의 핏줄" 이라 항상 경계했고,

제국은 성국의 성녀를 "다루기 까다로운 강력한 무기" 쯤으로 취급했다.

두 나라가 먼저 손을 내미는 일 같은 건,

적어도 그녀가 기억하는 전생에는 절대로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황제" 라는 그 한 글자에 마음 한구석이 울렁이듯 기이한 느낌과 감정이 번저가며 미세하게 술렁였다.

마치 아주 오래전, 먼지 쌓인 서랍 속에 넣어두고 잊어버린 무언가를 스치듯 건드린 느낌.

셀레스티아는 그 낯선 감각의 정체를 짚어내려 했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뭐지, 방금 그 느낌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지만, 그 미묘한 위화감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 왜 지금.

셀레스티아는 서둘러 신전 본당으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문틈으로 안을 살피자, 낯선 남자 셋이 대신관 앞에 정중히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은빛 갑주 위에 걸친 제국의 문장 망토.

그 위압적인 분위기가 신전 안까지 스물스물 스며들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최근 제국 변경의 오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심각하게 보고 계십니다."

사자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는 절제된 긴장이 배어 있었다.

"세계수의 균열이 예년보다 빠르게 확산되고 있으며, 이대로라면 조만간 대규모 마물 발호가 우려되는 상황입니다. 폐하께서는 성국의 협조를 청하고자 하십니다."

대신관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제국의 사정은 유감이나…… 성국의 성녀들은 이 나라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찹니다. 게다가 아직 정식으로 각성을 마친 성녀도 몇 없는 상황에서……"

"폐하께서는 특별히, 최근 각성한 젊은 성녀 한 명을 지목하셨습니다."

사자의 말에 대신관의 미간이 좁아졌다.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셀레스티아. 그 이름으로 각성 보고서가 올라온 것으로 압니다."

문틈 너머로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셀레스티아는 숨을 멈췄다.

내 이름을 어떻게……

전생에는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그녀는 성국 안에서도 그다지 주목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성력이 유독 강하다는 건 각성 당시 신관들 사이에서만 조용히 오갔던 이야기였을 뿐, 제국까지 소문이 퍼질 만한 일은 아니었다.

적어도 전생의 이 시점에는.

뭐지? 뭔가 달라지고 있어.

대신관은 잠시 침묵하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다만 최종 결정은 본인의 의사도 고려해야 할 문제이니, 성녀를 불러 직접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겠군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신관 한 명이 문 쪽으로 다가왔다. 셀레스티아는 황급히 몸을 물렸지만, 이미 늦었다.

"셀레스티아 님. 거기 계셨습니까. 마침 잘되었군요, 들어오시지요."

숨을 곳도 없이, 그녀는 결국 본당 안으로 들어섰다.

사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향했다. 그중 우두머리인 남자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예상외라는 듯 옅게 눈을 크게 떴다.

아마도 열여섯 소녀치고는 지나치게 작은 몸에 현자처럼 차분하고 침착한 눈빛 때문이었을 것이다.

"셀레스티아 성녀님이시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남자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제국 황실 근위기사단 소속, 레이먼드라 합니다. 폐하의 명을 받들어 이곳까지 왔습니다."

셀레스티아는 겉으로는 침착하게, 그러나 속으로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래, 계약. 이건 내가 유리한 대로 생각하면 계약의 시작일 수도 있어.

전생에는 없던 변수.

원작에 없던 사건.

어쩌면 이것이 재앙을 피해갈 기회일 수도, 혹은 더 큰 위험으로 끌려들어가는 시작일 수도 있었다.

셀레스티아는 판단을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무슨 용건이신지요."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손끝은 옷자락을 슬며시 움켜쥐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성녀님의 힘을 빌리고자 하십니다. 제국의 오염 확산 문제, 그리고……"

레이먼드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폐하 개인의 사정과도 관련이 있는 문제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황궁에서 성녀님께 직접 말씀드리는 것이 예의일 것 같다는 전언입니다."

개인의 사정.

셀레스티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제국 황가에 흐른다는 강력한 드래곤의 피, 그리고 그 대가로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다는 황제가 미쳐버린다는 광기의 저주.

대륙 어디를 가도 떠도는 이야기였지만, 성국에서는 유독 그 소문을 경계하며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렸다.

설마.

머릿속으로 하나의 가능성이 스쳐 지나갔지만,

셀레스티아는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아직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시겠습니까."

그녀의 말에 대신관이 먼저 반응했다.

"셀레스티아, 이건 제국과 성국 사이의 중요한 사안이다. 함부로……"

"괜찮습니다."

레이먼드가 손을 들어 대신관의 말을 단호하게 그리고 셀레스티아 성녀를 향해 예의를 갖추듯 인사를 다시 하면서 천천히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끊었다.

황제의 기사들은 성녀에게는 예의를 갖췄으나 대신관의 의견이 끼어드는 것이 불만족스럽다는 듯의 흉흉한 기운이 감돌았다.

"성녀님의 뜻을 존중하는 것이 저희 폐하의 방침이기도 합니다. 다만, 오래 기다릴 여유가 많지는 않다는 점은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사흘 안에 답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셀레스티아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본당을 빠져나왔다.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문을 닫자마자 깊은 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번엔 두려움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예감 때문이었다.

성녀의 예감은 예언이나 강력한 직감과 같았다.

전생에 없던 일이 일어나고 있어.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아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전생의 그녀는 성국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가본 적이 없었다.

신전 안에서 태어나, 신전 안에서 자라, 결국 신전 앞 광장에서 죽었다.

좁디좁은 세계 안에서 성녀라는 이름으로 가둬진 작은 소녀에게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 생은 달랐다.

벌써 첫걸음부터, 그녀가 알던 길이 아닌 낯선 갈래로 접어들고 있었다.

만약, 제국행을 받아들인다면…..

셀레스티아는 조용히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성력을 살짝 사용했을 때 느껴졌던 그 낯선 통증이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했다.

저주는 이번 생에도 여전히 그녀의 몸 안에 잠들어 있었다.

성국에 남아 숨죽이고 지낸다 해도, 언젠가 세계수의 오염은 다시 시작될 것이다.

그날이 오면,

저주받은 성력을 지닌 그녀는 또다시 같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터였다.

그래, 차라리.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셀레스티아의 입가에 냉소적이며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성국 밖으로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제국이라는 새로운 판.

그녀를 마녀로 몰아세울 대신관도,

자신에게 등을 돌렸던 그 얼굴들도 없는 곳.

자신을 모르는 미지의 곳

무엇보다, 황제 개인의 사정이라는 것이 정말로 그녀가 짐작하는 그것이라면—

내 저주를 억누를 방법이, 그쪽에 있을지도 몰라.

머리속으로 계산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성국에 남아 얌전히 숨어 지내는 것보다, 차라리 이 뜻밖의 기회를 붙잡아 스스로 판을 짜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위험하지만, 동시에 가능성이었다.

셀레스티아는 결심이 선 듯 사흘을 채 기다리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대신관을 찾아가 담담히 고했다.

"제국으로 가겠습니다."

대신관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럽구나. 이유를 물어도 되겠느냐."

셀레스티아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답했다.

"성국에 남아 있어도, 제국으로 가도, 어차피 제 앞날은 순탄치 않을 것 같아서요."

그 말에 담긴 진짜 의미를, 대신관은 알지 못했다. 셀레스티아 역시 굳이 설명할 생각이 없었다.

[ 이번 생은 내가 인생의 체스 판을 짠다 ]

그녀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너머 저 멀리,

제국으로 향하는 길이 항상 아침 햇살 아래 뻗어 있었다.

전생에는 단, 한 번도 걸어본 적 없는 길였고 단, 한 번도 허락되지 않은 길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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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화. 제국으로 가는 길마음을 먹자, 다음 날 바로 제국에서 준비된 마차가 성국을 떠났다.제국으로 가는 마차가 성국의 경계를 넘어서자,셀레스티아는 커튼을 살짝 걷고 창밖을 내다보았다.성국에서 쓰던 것들과는 다르게, 마차 안의 모든 것이 호화스러웠다.모든 게 자신을 위해 준비된 듯 보였다.⁃ 먼 길인데도 마차는 지나치게 푹신했고, 향도 은은하게 포근했다.⁃ 꽃도, 과일도— 어째서인지 전부 그녀의 취향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성국 사람들조차 몰랐던 것을, 처음 보는 제국 사람들이 어떻게 알았을까.⁃ 계약을 앞두고 좋은 인상을 주려는 것이겠지. 아니면, 내 착각이거나…이 모든 것이 너무나도 낯선 풍경이었다.전생에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길,단 한 번도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세상이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맞은편 좌석에는 레이먼드가 앉아 있었다.그는 가끔 창밖을 살피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지만,그녀를 향한 시선만큼은 늘 정중했다."불편하신 점은 없으십니까?""괜찮습니다."셀레스티아는 짧게 답하며 다시 시선을 돌렸다.속으로는 다른 생각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황제 개인의 사정이라…… 광기의 저주.정말로 내가 짐작하는 그것일까.드래곤 혈통의 저주?며칠 전 성력을 사용했을 때 느꼈던 그 낯선 통증이,손끝에 아직도 남아 있는 듯했다.능력에 대한 저주라면 여전히 그녀의 몸 안에 잠들어 있었다.그렇다면 황제의 저주라는 것도,어쩌면 자신의 것과 무관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뭐 어찌 됐든 간에, 이용할 수 있다면 이용한다. 그게 다시 가진 이번 생의 규칙이야.마차의 흔들림 속에서, 셀레스티아는 잠시 눈을 감았다.전생이었다면, 지금쯤 신전 마당에서 견습 사제들과 함께 기도문을 외우고 있었을 시간이었다.정해진 하루, 정해진 자리, 정해진 삶.그러나 지금 그녀는 그 좁은 세계를 완전히 벗어나, 낯선 나라의 심장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이제 와서 물러설 곳도 없어.마차가

  • 저주받은 성녀 회귀하다   2화. 다시, 열 여섯

    2화. 다시, 열 여섯만약 이것이 정말로 회귀라면, 지금은 전생에서 성력이 처음 발현되었던 바로 그 시기였다.그렇다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자신은 이미 알고 있었다.며칠 후 성력 각성. 그로부터 몇 년간의 성녀 수업. 그리고 그 곧 시작될 세계수의 오염, 이 모든 것을 지키기위해,자신의 모든 것을 갈아 넣어야 했던 그 길고 긴 정화의 여정—그리고 그 끝에서 기다리는 화형대.셀레스티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나는 안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부 알고 있어.입꼬리가 저절로 비틀렸다. 웃음이라기보다는 스스로에 대한 비웃음 그리고 자조에 가까운 표정이었다.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대가가 그런 비참함이라니… 전생의 마지막 순간, 그녀는 다짐했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아무도 구하지 않겠다고.그래. 이번엔 다르게 할 거야. 이제 내 자신만 지키는거야세계수의 오염이 시작되어도, 나서지 않는다. 성력을 숨긴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그저 평범한 신전 사제 정도로 살아간다. 이 모든 것을 구할 성력을 숨기고 산다.이런 세상을 구하겠다고 나서서 스스로를 제물로 던져지듯, 모든 인생을 바치는 그 따위 멍청한 짓 따위, 두 번 다시 하지 않는다.다시 주어진 인생,셀레스티아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살아남는다. 이번엔 반드시.한참을 그렇게 다짐하던 그녀는, 문득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신전 마당에서 어린 견습 사제들이 아침 기도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낯익은 풍경이었다. 전생에도 매일 아침 저 자리에서, 그저 같은 기도문을 외웠었다.저 아이들 중 누군가는, 나처럼 되겠지.성력을 각성한 아이들 중 극히 일부는, 그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무거운 대가를 짊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셀레스티아는 알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축복인지 저주인지는, 결국 그 힘을 가진 사람이 어떤 세상에서 살아가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그 힘을 필요로 할 때는 축복이라 부르고, 필요

  • 저주받은 성녀 회귀하다   1화. 화형대 위에서

    장작 타는 냄새가 먼저였다.그다음이 밧줄이었다. 손목을 파고드는 거친 밧줄이 살을 쓸려서 피마디로 지나갈 때마다, 셀레스티아는 자신의 몸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몸이 아프다는 것. 아직 이 몸이, 이 삶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끝나지 않았을 뿐이지, 이제 끝나가고 있어. 광장을 가득 메운 얼굴들이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눈동자, 셀 수 없이 많은 입. 그 모든 것이 그저 하나의 짐승처럼 같은 소리를 기염없이 토해내고 있었다."마녀다! 저 마녀를 태워라!"목소리가 파도처럼 부딪쳐왔다. 마녀. 마녀. 마녀. 그 단어가 반복될 때마다 셀레스티아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어이가 없어서였다.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저 입들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성녀님께서 세계수를 구하셨다! ‘’ 오염이, 정말로 멈췄어!‘ ’ 더이상 마물이 나오지않아! ‘ 몇 년에 걸쳐 대륙 전역으로 번져가던 세계수의 오염. 그 근원을 찾아, 셀레스티아는 자신의 성력을 남김없이 쏟아부었다.처음 오염 정화에 나섰던 그날을, 셀레스티아는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변경의 작은 마을, 검게 죽어버린 논밭 사이로 마물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던 그곳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힘이 세상에 쓸모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손끝에서 흘러나온 빛이 죽어가던 땅을 되살리던 순간, 마을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그녀의 발밑에 무릎을 꿇었다.그 후로 몇 년, 그녀는 대륙 각지를 떠돌았다. 오염이 짙은 곳이라면 어디든 갔다. 북쪽의 얼어붙은 변경부터, 남쪽의 습지대까지. 정화할 때마다 몸이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처음엔 손끝의 저릿함이었던 것이, 나중엔 온몸을 갉아먹는 듯한 통증으로 번졌다. 머리카락이 뿌리부터 하얗게 물들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뭐, 이 정도쯤이야.그녀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계속해서 나아갔다. 사람들의 감사가, 살아난 땅의 초록빛이, 그 모든 것이 그녀를 버티게 하는 힘이었다. 세계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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