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2화. 다시, 열 여섯
만약 이것이 정말로 회귀라면, 지금은 전생에서 성력이 처음 발현되었던 바로 그 시기였다.
그렇다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자신은 이미 알고 있었다.
며칠 후 성력 각성.
그로부터 몇 년간의 성녀 수업.
그리고 그 곧 시작될 세계수의 오염,
이 모든 것을 지키기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갈아 넣어야 했던 그 길고 긴 정화의 여정—
그리고 그 끝에서 기다리는 화형대.
셀레스티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나는 안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부 알고 있어.
입꼬리가 저절로 비틀렸다.
웃음이라기보다는 스스로에 대한 비웃음 그리고 자조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대가가 그런 비참함이라니…
전생의 마지막 순간, 그녀는 다짐했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아무도 구하지 않겠다고.
그래. 이번엔 다르게 할 거야.
이제 내 자신만 지키는거야
세계수의 오염이 시작되어도, 나서지 않는다.
성력을 숨긴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그저 평범한 신전 사제 정도로 살아간다.
이 모든 것을 구할 성력을 숨기고 산다.
이런 세상을 구하겠다고 나서서
스스로를 제물로 던져지듯,
모든 인생을 바치는
그 따위 멍청한 짓 따위,
두 번 다시 하지 않는다.
다시 주어진 인생,
셀레스티아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살아남는다. 이번엔 반드시.
한참을 그렇게 다짐하던 그녀는, 문득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신전 마당에서 어린 견습 사제들이 아침 기도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낯익은 풍경이었다.
전생에도 매일 아침 저 자리에서, 그저 같은 기도문을 외웠었다.
저 아이들 중 누군가는, 나처럼 되겠지.
성력을 각성한 아이들 중 극히 일부는, 그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무거운 대가를 짊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셀레스티아는 알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축복인지 저주인지는,
결국 그 힘을 가진 사람이 어떤 세상에서 살아가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그 힘을 필요로 할 때는 축복이라 부르고,
필요하지 않게 되면 저주라 부르는….
셀레스티아는 그 인간의 잔인한 이중성을, 이제는 뼈저리게 사무치게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녀의 성력이 유독 강력한 이유가,
이제
단순한 축복이 아니라 정화할수록 자신의 생명력을 갉아먹는 저주와 다름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저주가, 회귀한 지금도 여전히 그녀의 몸속에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그날 오전,
셀레스티아는 오랜만에 신전 도서관에 들렀다.
딱히 목적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회귀 이후로 뒤숭숭한 마음을 가라앉힐 곳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전생에서도 그녀는 혼자 있을 시간에는 자주 신전 도서관을 들렸었다.
서가 사이를 거닐던 중,
나이 든 사서 수녀와 젊은 견습 수녀 둘이 나누는 대화가 귓가에 스쳤다.
"그나저나 요 며칠 제국 쪽 소문 들으셨어요? 황실에 숨겨진 핏줄이 있다는 이야기요."
"쉿, 그런 소문을 어디서 함부로 입에 담느냐."
"에이, 여기밖에 없는데 어때요. 선대 황제의 사생아가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이야기, 대륙 어디를 가도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걸요."
"뜬소문이다. 황가의 핏줄이 그리 쉽게 밖으로 새어 나갈 리가 있느냐."
"그래도 신기하잖아요. 만약 진짜라면, 그 핏줄은 대체 어떻게 살고 있을지."
셀레스티아는 그 대화를 무심코 흘려들으며 서가를 지나쳤다.
당장은 그 대화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짧은 대화 한 조각이,
훗날 그녀의 기억 속에서 전혀 다른 무게로 다시 떠오르게 되리라는 것을,
지금의 그녀는 알지 못했다.
며칠 뒤, 셀레스티아의 성력이 정식으로 각성했다.
레벨은 그다지 높게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성력을 조절하면서 성력 테스트에 임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녀는 처음으로 손끝에서 시작된 낯선 통증에 애써 잠든 잠이 깨었다.
·····뭐야, 이건.
성력을 아주 살짝 사용해본 것뿐인데도, 손끝이 저릿하게 떨리며 바로 미열이 올랐다.
전생에는 느끼지 못했던, 아니면 혹은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감각이었다.
느끼지 못했던 이유는 이 세계를, 이 세계수를 구해야한다는 사명감으
셀레스티아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설마…… 이번 생에도, 이 저주는 그대로인 거야?"
대답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어둠 속에서 홀로, 자신의 몸에 새겨진 낯선 이질감을 곱씹을 뿐이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신전 복도 저편에서 들려온 한마디가 그녀의 평온한 계획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제국에서 사자가 왔다고 합니다. 황제 폐하께서…… 성녀의 힘을 청하신다는군요."
셀레스티아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 황제 ]
전생의 그녀와는 단 한 번도 얽힌 적 없던 이름이었다.
적어도, 자신이 이제 기억하는 한에서는
성국과 제국은 늘 냉랭한 거리를 유지해왔다.
성국은 제국의 황가를 "저주받은 드래곤의 핏줄" 이라 항상 경계했고,
제국은 성국의 성녀를 "다루기 까다로운 강력한 무기" 쯤으로 취급했다.
두 나라가 먼저 손을 내미는 일 같은 건,
적어도 그녀가 기억하는 전생에는 절대로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황제" 라는 그 한 글자에 마음 한구석이 울렁이듯 기이한 느낌과 감정이 번저가며 미세하게 술렁였다.
마치 아주 오래전, 먼지 쌓인 서랍 속에 넣어두고 잊어버린 무언가를 스치듯 건드린 느낌.
셀레스티아는 그 낯선 감각의 정체를 짚어내려 했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뭐지, 방금 그 느낌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지만, 그 미묘한 위화감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 왜 지금.
셀레스티아는 서둘러 신전 본당으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문틈으로 안을 살피자, 낯선 남자 셋이 대신관 앞에 정중히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은빛 갑주 위에 걸친 제국의 문장 망토.
그 위압적인 분위기가 신전 안까지 스물스물 스며들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최근 제국 변경의 오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심각하게 보고 계십니다."
사자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는 절제된 긴장이 배어 있었다.
"세계수의 균열이 예년보다 빠르게 확산되고 있으며, 이대로라면 조만간 대규모 마물 발호가 우려되는 상황입니다. 폐하께서는 성국의 협조를 청하고자 하십니다."
대신관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제국의 사정은 유감이나…… 성국의 성녀들은 이 나라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찹니다. 게다가 아직 정식으로 각성을 마친 성녀도 몇 없는 상황에서……"
"폐하께서는 특별히, 최근 각성한 젊은 성녀 한 명을 지목하셨습니다."
사자의 말에 대신관의 미간이 좁아졌다.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셀레스티아. 그 이름으로 각성 보고서가 올라온 것으로 압니다."
문틈 너머로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셀레스티아는 숨을 멈췄다.
내 이름을 어떻게……
전생에는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그녀는 성국 안에서도 그다지 주목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성력이 유독 강하다는 건 각성 당시 신관들 사이에서만 조용히 오갔던 이야기였을 뿐, 제국까지 소문이 퍼질 만한 일은 아니었다.
적어도 전생의 이 시점에는.
뭐지? 뭔가 달라지고 있어.
대신관은 잠시 침묵하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다만 최종 결정은 본인의 의사도 고려해야 할 문제이니, 성녀를 불러 직접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겠군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신관 한 명이 문 쪽으로 다가왔다. 셀레스티아는 황급히 몸을 물렸지만, 이미 늦었다.
"셀레스티아 님. 거기 계셨습니까. 마침 잘되었군요, 들어오시지요."
숨을 곳도 없이, 그녀는 결국 본당 안으로 들어섰다.
사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향했다. 그중 우두머리인 남자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예상외라는 듯 옅게 눈을 크게 떴다.
아마도 열여섯 소녀치고는 지나치게 작은 몸에 현자처럼 차분하고 침착한 눈빛 때문이었을 것이다.
"셀레스티아 성녀님이시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남자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제국 황실 근위기사단 소속, 레이먼드라 합니다. 폐하의 명을 받들어 이곳까지 왔습니다."
셀레스티아는 겉으로는 침착하게, 그러나 속으로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래, 계약. 이건 내가 유리한 대로 생각하면 계약의 시작일 수도 있어.
전생에는 없던 변수.
원작에 없던 사건.
어쩌면 이것이 재앙을 피해갈 기회일 수도, 혹은 더 큰 위험으로 끌려들어가는 시작일 수도 있었다.
셀레스티아는 판단을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무슨 용건이신지요."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손끝은 옷자락을 슬며시 움켜쥐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성녀님의 힘을 빌리고자 하십니다. 제국의 오염 확산 문제, 그리고……"
레이먼드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폐하 개인의 사정과도 관련이 있는 문제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황궁에서 성녀님께 직접 말씀드리는 것이 예의일 것 같다는 전언입니다."
개인의 사정.
셀레스티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제국 황가에 흐른다는 강력한 드래곤의 피, 그리고 그 대가로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다는 황제가 미쳐버린다는 광기의 저주.
대륙 어디를 가도 떠도는 이야기였지만, 성국에서는 유독 그 소문을 경계하며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렸다.
설마.
머릿속으로 하나의 가능성이 스쳐 지나갔지만,
셀레스티아는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아직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시겠습니까."
그녀의 말에 대신관이 먼저 반응했다.
"셀레스티아, 이건 제국과 성국 사이의 중요한 사안이다. 함부로……"
"괜찮습니다."
레이먼드가 손을 들어 대신관의 말을 단호하게 그리고 셀레스티아 성녀를 향해 예의를 갖추듯 인사를 다시 하면서 천천히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끊었다.
황제의 기사들은 성녀에게는 예의를 갖췄으나 대신관의 의견이 끼어드는 것이 불만족스럽다는 듯의 흉흉한 기운이 감돌았다.
"성녀님의 뜻을 존중하는 것이 저희 폐하의 방침이기도 합니다. 다만, 오래 기다릴 여유가 많지는 않다는 점은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사흘 안에 답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셀레스티아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본당을 빠져나왔다.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문을 닫자마자 깊은 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번엔 두려움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예감 때문이었다.
성녀의 예감은 예언이나 강력한 직감과 같았다.
전생에 없던 일이 일어나고 있어.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아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전생의 그녀는 성국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가본 적이 없었다.
신전 안에서 태어나, 신전 안에서 자라, 결국 신전 앞 광장에서 죽었다.
좁디좁은 세계 안에서 성녀라는 이름으로 가둬진 작은 소녀에게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 생은 달랐다.
벌써 첫걸음부터, 그녀가 알던 길이 아닌 낯선 갈래로 접어들고 있었다.
만약, 제국행을 받아들인다면…..
셀레스티아는 조용히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성력을 살짝 사용했을 때 느껴졌던 그 낯선 통증이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했다.
저주는 이번 생에도 여전히 그녀의 몸 안에 잠들어 있었다.
성국에 남아 숨죽이고 지낸다 해도, 언젠가 세계수의 오염은 다시 시작될 것이다.
그날이 오면,
저주받은 성력을 지닌 그녀는 또다시 같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터였다.
그래, 차라리.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셀레스티아의 입가에 냉소적이며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성국 밖으로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제국이라는 새로운 판.
그녀를 마녀로 몰아세울 대신관도,
자신에게 등을 돌렸던 그 얼굴들도 없는 곳.
자신을 모르는 미지의 곳
무엇보다, 황제 개인의 사정이라는 것이 정말로 그녀가 짐작하는 그것이라면—
내 저주를 억누를 방법이, 그쪽에 있을지도 몰라.
머리속으로 계산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성국에 남아 얌전히 숨어 지내는 것보다, 차라리 이 뜻밖의 기회를 붙잡아 스스로 판을 짜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위험하지만, 동시에 가능성이었다.
셀레스티아는 결심이 선 듯 사흘을 채 기다리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대신관을 찾아가 담담히 고했다.
"제국으로 가겠습니다."
대신관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럽구나. 이유를 물어도 되겠느냐."
셀레스티아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답했다.
"성국에 남아 있어도, 제국으로 가도, 어차피 제 앞날은 순탄치 않을 것 같아서요."
그 말에 담긴 진짜 의미를, 대신관은 알지 못했다. 셀레스티아 역시 굳이 설명할 생각이 없었다.
[ 이번 생은 내가 인생의 체스 판을 짠다 ]
그녀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너머 저 멀리,
제국으로 향하는 길이 항상 아침 햇살 아래 뻗어 있었다.
전생에는 단, 한 번도 걸어본 적 없는 길였고 단, 한 번도 허락되지 않은 길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
61화. 심장을 멈추는 대가 뿌리를 끊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그리고 그 대가는, 이미 한 사람의 가슴에서 뛰고 있었다.공간 전체가 울렸다. 뿌리가 발목을 휘감기 직전, 아드리안이 검을 뽑아 바닥을 갈랐다."물러서라!"붉은 불꽃이 뿌리를 태우며 길을 열었다. 셀레스티아는 그의 손을 붙잡은 채 뒤로 물러났지만, 시선은 여인의 가슴에서 떼지 못했다.⁃ 저 금빛 심장.⁃ 폐하의 것과 같은 박동이야."어머니."아드리안이 낮게 불렀다. 검을 쥔 손이 떨리고 있었다.『겁내지 마, 아가. 이 아이들은 나를 해치지 못해. 나를 지키고 있을 뿐이니까.』뿌리가 한 박자 늦게 물러났다. 마치 주인의 명령을 따르는 것처럼."지키다니요."셀레스티아가 물었다."그 뿌리가 사람들을 마물로 만들고 있어요. 아이들까지."『그래. 내 심장이 뛸 때마다 이 검은 뿌리가 뻗고, 사람들의 나쁜 욕망을 먹고 자란 뿌리는 사람의 숨을 빨아들이지. 나는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어. 그런데 막을수록, 더 깊이 뿌리가 되어 버렸단다.』여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세계수가 새겨진 이 심장이 뿌리의 핵이야. 멈추면 오염은 끊겨. 하지만.』"하지만."『멈추는 순간, 나도 죽는단다.』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드리안의 검이 천천히 내려갔다."이제 알겠지?"뒤에서 키리안이 낮게 말했다."내가 왜 너희를 여기로 끌어들였는지. 이 뿌리를 끊을 사람은 두 종류야. 심장을 멈출 만큼 강한 정화의 힘을 가진 자, 그리고 그 대가를 치를 각오가 된 자."그의 시선이 셀레스티아에게 닿았다."전생에서 너는 그 힘으로 세상을 구하고 불에 탔지. 이번에도 같은 길이야.""그만해라."아드리안이 앞을 막았다."그녀는 하지 않는다.""그럼 네 어머니가 죽는 걸 지켜볼 거야? 아니면 이 아이들이 전부 마물이 되는 걸?"키리안의 웃음은 없었다. 오히려 목소리가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이 사람, 정말로 두려워하고 있어.⁃ 적의 얼굴로 서 있는데, 눈은 도움을 구하는 눈이야.셀레스티아는 숨을 고
60화. 세계수 뿌리의 문세계수의 뿌리는 땅속이 아니라, 사람의 기억 속에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문은 이름이 아니라, 지워지지 않은 단 하나의 기억으로만 열렸다.검은 숲의 끝에서 길이 사라졌다.눈앞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거대한 나무의 밑동이 솟아 있었다. 줄기 하나가 성벽만큼 굵었고, 껍질 사이로 검붉은 균열이 심장처럼 뛰고 있었다. 균열의 박동은 셀레스티아의 손목 문양과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다."이게…… 세계수의 뿌리."레이먼드가 검을 쥔 채 숨을 삼켰다."입구가 없습니다. 어디로 들어가란 말입니까."아드리안이 줄기에 손을 대었다. 순간 균열이 일제히 붉게 번쩍였다."……열리지 않는다.""폐하의 피로도 안 열리나요?""황가의 피에는 반응한다. 하지만 문이 되기엔 부족해."그가 이를 악무는 사이, 셀레스티아의 손목 문양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무심코 줄기에 다가서자, 균열이 물처럼 갈라지며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증명하렴.』"무엇을요."『내가 네 어미라는 것을. 내 이름은 지워졌으니, 이름 말고 네가 기억하는 나를.』아드리안의 어깨가 굳었다."어머니.""저는 당신의 이름도 얼굴도 모릅니다. 먹으로 지워져 있었습니다."『알아. 그래서 더 아프단다, 아가.』목소리가 떨렸다.『그래도 네 몸은 기억할 거야.』셀레스티아는 아드리안의 손을 꼭 쥐었다.⁃ 이게 정말 생모의 목소리일까.⁃ 키리안이 만든 함정일 수도 있어. 하지만 확인할 방법은 하나뿐이야."폐하. 눈을 감고, 가장 오래된 기억을 떠올려 보세요. 이름이 아니어도 괜찮아요."아드리안이 눈을 감았다. 한참의 침묵 끝에, 그의 입술에서 아주 낮은 노래가 흘러나왔다.달이 떠도 무섭지 않아, 내 아가는 별이 지켜주니까.균열이 숨을 멈춘 듯 고요해졌다.
59화. 뿌리로 가는 길세계수의 뿌리로 가는 길은 그 어떤 지도에 없었다. 기록으로 있는 것은 오직, 먼저 다녀온 자들이 돌아오지 못했다는 기록뿐이었다.북부로 향하는 마차 안은 조용했다.창밖으로 낯익은 검은 숲이 스쳐 갔다. 셀레스티아는 무릎 위에 『태초의 계약사』를 올려놓고 손끝으로 표지를 쓸었다. 백지가 된 마지막 장은 여전히 아무 글자도 보여주지 않았다."자라."맞은편에서 아드리안이 낮게 말했다."안 졸려요.""눈이 반쯤 감겨 있다.""폐하는요. 이틀째 못 주무셨잖아요.""나는 원래 그렇다.""그 말, 이제 안 믿는다고 하시던 분이 누구였죠?"아드리안이 입을 다물었다. 귀끝이 옅게 붉어졌다. 셀레스티아는 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이런 사소한 농담이, 그들의 지금은 유일한 숨구멍이었다.그때, 마차가 크게 흔들리며 덜컹 멈췄다. 창밖에서 레이먼드의 목소리가 들렸다."폐하, 전방에 아이들이 있습니다."문을 열자, 길 한가운데 열 명 남짓한 아이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후송했다던 그 아이들이었다. 눈은 뜨고 있었지만 초점이 없었고, 목덜미에는 검붉은 균열이 가느다랗게 번지고 있었다."이 아이들만 마물로 변하다 말았군요."레이먼드가 검자루를 쥐었다."베어야 합니까.""안 돼요."셀레스티아가 마차에서 내렸다."아직 사람이에요. 의식이 남아 있어요."아이들의 입술이 동시에 움직였다."세계수의……뿌리로…… 오세요……""……엄마가…… 기다려요……"아드리안의 몸이 굳었다."엄마라고 했나.""폐하.""저 아이들의 어머니는 모두 죽었거나 실종됐을 텐데."셀레스티아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아이들의 목소리는 하나였다. 여러 입이 아니라, 한 사람이 아이들을 빌려 말하고 있었다."……셀레스티아…… 아드리안……아가…… 드디어…… 왔구나……"그 목소리에, 아드리안의 눈동자가 크게 떨렸다."……어머니."연회장의 영상 속, 눈물짓던 여인의 목소리였다.그리고 또 오랜 어머니가 들려주는 자장가가 들려왔다"폐하, 정신 차리세
58화. 대답하지 못한 밤 그가 묻지 않은 것은, 다정함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답을 듣는 순간 무엇이 사라질지, 그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니까.침묵이 길어질수록, 방 안의 공기는 무거워졌다.셀레스티아는 시트를 움켜쥔 손에 더 힘을 주었다. 말해 보려고 입술이 열릴 때마다 목구멍이 막혔다. 숨을 가두는 느낌이었다.⁃ 말하면 이 사람의 기억이 사라져.⁃ 하지만 이대로 침묵하면, 이 사람은 현실의 벽에 부딪혀 영원히 의심 속에 살아야 해."……셀레스티아."아드리안이 침대 앞으로 천천히 다가와 무릎을 굽혔다. 서로의 눈높이가 맞춰졌다. 방금까지 쏟아내던 질문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아 있었다."미안하다.""……네?""그대를 몰아붙였군."그가 무언가 결심한 듯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다. 갈라져 있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그대가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키리안의 말 때문이 아니라, 그대의 얼굴을 보면 안다. 지금 그대는 내게 거짓말을 하려는 얼굴이 아니라, 거짓도 진실도 고를 수 없는 얼굴이다."셀레스티아의 눈이 흔들렸다."그러니 대답하지 마라.""폐하.""대신 하나만 묻겠다. 예 아니면 아니요로만 답해라. 말이 아니라 고개로."그녀는 숨을 죽였다. 아드리안이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그대는, 나를 해치려는 사람인가."셀레스티아는 즉시 고개를 저었다. 세차게, 애써 참았던 눈물이 떨어질 듯이."나를 속이려는 사람인가."그녀는 잠깐 망설였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작게 고개를 저었다. 숨겨 왔지만 속이려던 건 아니었으니까."……나를 위해서, 말하지 않는 건가."이번엔 대답이 늦었다. 이내 눈물이 또르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아주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아드리안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웃음이라기엔 너무나도 아팠다."됐다.""……""그거면 충분하다."그가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댔다."규칙이 무엇이든, 대가가 무엇이든. 나는
57화. 정화의 대가거울 속에서 낯선 눈이 그녀를 마주 보고 있었다. 전생에 그녀를 불태운 바로 그 색이었다. • 빛이 잦아들자, 숲에는 기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쓰러진 아이들은 숨을 쉬고 있었다. 레이먼드가 한 아이의 맥을 짚고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살아 있습니다. 전부요. 다만……"그는 숲 안쪽을 돌아보았다. 정화의 빛이 닿은 곳은 반경 백 보 남짓이었다. 그 너머의 나무들은 여전히 검었고, 안개 속에서 낮은 울음이 이어지고 있었다."절반도 안 됩니다. 아직 저 안쪽에 수백이 남았을 겁니다.""……부분 정화."셀레스티아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아직 아드리안의 손을 잡고 있었다. 놓으면 쓰러질 것 같아서였다. 다리에 힘이 들어오지 않았다."셀레스티아.""괜찮아요. 잠깐 어지러울 뿐이에요.""……그 말, 이제 안 믿는다고 했다."아드리안이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숨을 멈췄다."……눈이.""네?""그대의 눈이."셀레스티아는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였다. 마침 기사 하나가 방패를 내밀었다. 닦인 쇠 표면에 낯선 얼굴이 비쳤다.짙은 사파이어빛이던 눈동자가, 옅은 바다를 닮은 청록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파라이바빛. 전생의 마지막 몇 해 동안, 성력을 소진할수록 변해 가던 바로 그 색이었다.사람들이 손가락질하던 눈…⁃ 이 색.⁃ 화형대에서, 마녀의 증거라고 불리던 색이야.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손끝이 점점 떨렸다. 숨이 가빠 오고, 가슴이 조여들었다.⁃ 안 돼. 이번엔 이 색이, 또 나를."……보지 마세요."그녀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왜.""이건, 좋은 게 아니에요. 사람들이 이 색을 보면……"당황하듯 눈을 가리면서 말했다."셀레스티아."그가 단단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돌려 눈을 마주 보게 했다. 금빛 눈동자가 그녀의 청록빛을 오래, 천천히 들여다보았다."아름답다.""……네?""옅은 푸른 바다 같군.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이상하게 오래 알던 색이다."셀레스티아는 숨을 삼켰
56화. 나무 가지가 심장을 겨누기 전에키리안이 말한 선택의 순간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왔다. 침묵의 대가를 치르기도 전에, 두 사람의 심장을 겨눈 검은 가지가 먼저 닿으려 하고 있었다.가지 끝이 가슴에 닿기까지, 숨 한 번이 남아 있었다."——셀레스티아!"아드리안이 그녀를 끌어안아 몸을 돌렸다. 검은 가지가 그의 어깨를 스치며 외투를 갈랐다. 천이 찢기는 소리와 함께 붉은 선이 번졌다."폐하!""괜찮다. 움직여라!"레이먼드가 검을 휘두르며 달려왔다. 기사들이 방패를 세우고 두 사람 앞에 벽을 만들었다. 가지들이 방패를 두들길 때마다 쇠가 비명을 질렀다. 방패 하나가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기사 한 명이 뒤로 나가떨어졌다."방패가 못 버팁니다! 후퇴 신호를! 황제 폐하를 모셔라!""안 된다."아드리안이 레이먼드의 팔을 붙잡았다. 어깨의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소매를 적시고 있었다."여기서 물러나면 저 나무는 더 자란다. 저게 퍼지면 제국이 위험해져. 지금 끊어야 한다.""하지만 폐하의 눈이……!"그의 눈동자는 다시 붉게 일렁이고 있었다. 발밑의 땅이 열기에 갈라졌다. 셀레스티아는 그것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폭주가 오기 전에, 내가 먼저 해야 해.⁃ 그런데 내 성력은 저 나무를 키우고 있어. 정화할수록 번져.⁃ 한 번만 더 틀리면, 이 사람도, 기사들도 전부.그 순간, 아까 숲에서 본 장면이 머릿속을 스쳤다. 재가 되어야 할 마물이 다시 솟아오르던 모습. 그때 그녀의 빛에는 검붉은 줄기가 섞여 있었다.⁃ 빛이 오염과 섞였어. 그렇다면 섞이지 않는 방법이 있어야 해.가지 하나가 채찍처럼 휘어 기사들의 방패 틈을 파고들었다. 레이먼드가 간신히 쳐냈지만 검날이 부러져 나갔다."마마님, 서두르셔야 합니다!""폐하.""말해라.""제 손을 잡아 주세요.""……뭐라고.""성력을 혼자 쓰면 오염이 섞여요. 하지만 폐하가 손을 잡았을 때는 분명 빛이 가라앉았습니다. 같은 근원의 힘이라면, 둘이 함께 쓰면 어쩌면 길이 있을지 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