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세계수가 오염되고 마물이 창궐하는 대륙. 마물의 오염을 전부 해결한 대가로 돌아온 것은, 화형대에서 처형당한 저주받은 성녀 셀레스티아. 회귀 후 배후를 알아채고 복수를 다짐한다. 드래곤의 혈통, 저주로 휩싸인 제국의 황제 아드리안 발티미르. 점차 광기에 잠식되어가는 미친 황제와의 계약 결혼. 처음엔 서로 이용하려던 관계가, 점차 로맨스로 변해가고, 이 세계의 우아한 가면극 뒤에 숨은 진짜 재앙이 다가온다. 냉철한 복수극과 애틋한 로맨스, 그 경계에서 성녀 셀레스티아는 자신의 운명을 다시 쓴다.
Lihat lebih banyak장작 타는 냄새가 먼저였다.
그다음이 밧줄이었다. 손목을 파고드는 거친 밧줄이 살을 쓸려서 피마디로 지나갈 때마다, 셀레스티아는 자신의 몸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몸이 아프다는 것. 아직 이 몸이, 이 삶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
끝나지 않았을 뿐이지, 이제 끝나가고 있어.
광장을 가득 메운 얼굴들이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눈동자, 셀 수 없이 많은 입. 그 모든 것이 그저 하나의 짐승처럼 같은 소리를 기염없이 토해내고 있었다.
"마녀다! 저 마녀를 태워라!"
목소리가 파도처럼 부딪쳐왔다.
마녀. 마녀. 마녀. 그 단어가 반복될 때마다
셀레스티아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어이가 없어서였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저 입들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 성녀님께서 세계수를 구하셨다! ‘
’ 오염이, 정말로 멈췄어!‘
’ 더이상 마물이 나오지않아! ‘
몇 년에 걸쳐 대륙 전역으로 번져가던 세계수의 오염. 그 근원을 찾아, 셀레스티아는 자신의 성력을 남김없이 쏟아부었다.
처음 오염 정화에 나섰던 그날을, 셀레스티아는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변경의 작은 마을, 검게 죽어버린 논밭 사이로 마물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던 그곳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힘이 세상에 쓸모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손끝에서 흘러나온 빛이 죽어가던 땅을 되살리던 순간, 마을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그녀의 발밑에 무릎을 꿇었다.
그 후로 몇 년, 그녀는 대륙 각지를 떠돌았다.
오염이 짙은 곳이라면 어디든 갔다. 북쪽의 얼어붙은 변경부터, 남쪽의 습지대까지. 정화할 때마다 몸이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처음엔 손끝의 저릿함이었던 것이, 나중엔 온몸을 갉아먹는 듯한 통증으로 번졌다. 머리카락이 뿌리부터 하얗게 물들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뭐, 이 정도쯤이야.
그녀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계속해서 나아갔다.
사람들의 감사가, 살아난 땅의 초록빛이, 그 모든 것이 그녀를 버티게 하는 힘이었다.
세계수의 뿌리 깊숙한 곳까지 파고든 오염의 근원을 찾아냈을 때, 그녀는 이미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백발이 절반 넘게 진행되어 있었다.
그러나 내 몸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 정화가 끝나면, 대륙 전체가 다시 살아날 것이었으므로.
그리고 마침내, 대륙을 뒤덮던 그 검은 균열이 완전히 잦아들던 순간을 그녀는 아직도 기억했다.
세계수의 뿌리에 마지막 정화의 빛을 흘려보내던 그 밤, 그녀는 온몸의 힘이 완전히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쓰러졌다. 그러나 눈을 떴을 때, 세상은 달라져 있었다. 죽어가던 나무들에 새싹이 돋고, 탁하던 하늘이 다시 맑아졌다.
사람들은 환호했다. 종이 울리고, 거리마다 축제가 벌어졌다. 성국의 대신전 앞 광장에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녀의 이름을 연호했다.
"셀레스티아! 셀레스티아!"
그날의 함성을, 그녀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같은 광장에서 같은 사람들이 전혀 다른 말을 외치고 있다는 사실이, 그 무엇보다 그녀를 절망케 했다.
그리고 그 대가가, 지금 이 화형대였다.
"성력을 그렇게까지 다뤄놓고, 몸이 멀쩡할 리가 없지."
"저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카락 좀 봐. 저게 사람이야?"
"신의 축복이 아니라, 애초에 저주받은 힘이었다는 거잖아."
우스운 이야기였다. 세계수를 구하기 위해 그녀가 짊어졌던 대가, 소진될수록 하얗게 물들어가던 머리카락과 파라이바빛으로 변해가던 눈동자가, 어느새 그녀가 "저주받은 존재"라는 증거로 둔갑해 있었다. 오염을 없앤 힘이 아니라, 오염 그 자체로 취급받고 있었다.
이제 완전히 해결했는데.
이제 드디어
단 하나의 마물도, 단 한 뼘의 오염된 땅도 남기지 않았는데.
성국의 대신관이 그녀 앞에 섰다.
세계수가 정화되던 그날, 누구보다 먼저 무릎을 꿇고 감사를 표했던 바로 그 손으로, 이제는 사형을 선고하고 있었다.
"셀레스티아. 그대는 금지된 힘으로 세상을 어지럽히고, 신의 영역을 침범한 죄로 화형에 처한다."
뭐? 신의 영역을 침범해? 세계수를 살린 게, 이제는 죄가 됐다고?
목이 메었다.
억울함이 목구멍을 틀어막아서, 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셀레스티아는 대신관의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그 안에는 죄책감도, 의심도, 하다못해 흔들림조차 없었다. 오직 그 대신관의 눈에는 안도뿐이었다.
그렇구나…
오염이 사라진 후, 성국은 곧 다른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신의 축복이라 부르기엔 지나치게 압도적인 힘, 그리고 그 힘을 온전히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그 편협스러운 자들음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을, 이 성국에는 절대 곁에 두고 싶어 하지 않았다.
구원자가 필요 없어지자, 나는 위협이 되었을 뿐이야.
불이 붙었다.
뜨거움 같은 건 이상하리만치 뒷전이었다.
셀레스티아의 눈에 들어온 건 고통이 아니라, 그 광장에 서 있는 얼굴들이었다.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세계수가 무너지기 직전, 그녀가 마지막 힘까지 짜내어 살려낸 변경 마을의 촌장이었다. 그가 지금, 다른 이들과 함께 목청껏 외치고 있었다.
"마녀를 태워라!"
······당신도.
셀레스티아는 웃고 싶었다. 정말로 웃고 싶었다.
진심으로 헛웃음이 났다.
세계수를 살린 대가로 그녀의 몸이 부서져가는 걸 직접 지켜봤던 사람이, 지금은 저 함성 속에 아무렇지 않게 섞여 있었다.
내가 살려낸 세상 값이, 겨우 저 미천한 함성 한 줄이었구나.
또 다른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앳된 티가 채 가시지 않은 젊은 근위기사였다.
남쪽 습지대에서 마물 무리에 포위당했을 때, 그녀가 목숨을 걸고 구해준 소년병이었다.
그때 그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몇 번이고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었다.
지금 그는, 화형대를 둘러싼 경비병들 틈에 섞여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당황한 그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그래. 차라리 저렇게라도, 눈을 피해주는 게 나은 걸까.
셀레스티아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적어도 저 소년은, 아직 그녀를 향해 돌을 던질 용기까지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침묵도, 결국은 다르지 않았다. 침묵으로 이렇게 동조하는 것과, 목청껏 외치는 것 사이에 그리 큰 차이는 없었다.
인간이라는 게 한낯 이런 거였나.
셀레스티아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위기의 순간엔 손을 붙잡고 눈물로 감사를 표하다가도, 그 위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면 가장 먼저 그 힘을 두려워하는 존재.
그게 인간이었다.
적어도 그녀가 목숨 바쳐 지켜낸 이 대륙의 인간들은.
대신관의 얼굴에도 슬픔이나 죄책감 같은 건 없었다.
세계수가 정화되던 순간 두 손 모아 감사를 표했던 것도, 이제 와서 사형을 선고하는 것도, 그에게는 그저 순서가 바뀐 절차일 뿐이었다.
필요할 땐 성녀, 필요 없어지면 마녀.
그 편리한 재정의가 전부였다.
그래…… 그렇구나.
셀레스티아는 타오르는 연기 사이로 광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눈물을 흘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시선을 피하는 이조차 드물었다.
대부분은 무언가 흥미로운 구경거리라도 보듯, 그녀의 마지막을 눈에 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저들 하나하나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는데.
저들은 세상을 구한 이름을, 마녀라는 두 글자로 바꿔 부르는구나.
목이 메었다.
고통보다 더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건, 뜨거운 화상이 아니라 서늘한 환멸이었다.
사람을 믿었던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자각. 세상 전부를 걸고 지켜낸 것들이, 결국 자신을 지켜주지 않으리라는 걸 진작 알았어야 했다는 후회.
"할 말은 없느냐."
대신관이 물었다. 형식적인 물음이었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셀레스티아는 광장을 가득 메운 얼굴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은혜를 잊은 얼굴들, 침묵으로 동조하는 얼굴들, 그리고 아무 감정도 없이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얼굴들.
이게, 내가 세상을 구하고 돌려 받은 얼굴들이구나.
그리고 아주 작게, 자신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중얼거렸다.
"……다음에 태어난다면."
[ 다음에 태어난다면, 절대로. ]
세상 따위, 구하지 않을 거야. 그 누구도, 믿지 않을 거야.
이제 연기가 시야를 뒤덮었다.
광장의 함성은 끝까지 잦아들지 않았다.
그 소리를 죽기 직전에 가장 마지막으로 들으며, 셀레스티아는 생각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마물도, 오염도 아니었다.
구원자를 두려워하는 데
마녀로 돌리는 것까지
반나절도 걸리지 않는,
모든 인간의 얼굴이었다.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경멸스러워. 이 모든 게, 전부.
그녀의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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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열여섯
눈을 떴을 때, 셀레스티아는 낯익은 천장을 보고 있었다.
성국 신전 부속 기숙사, 좁은 방, 삐걱거리는 나무 침대. 그리고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
……어?
셀레스티아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멀쩡했다. 화상도, 고통도 없었다.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불에 타지 않은, 매끄러운 열여섯 살 소녀의 손.
그리고 거울에 다가갔다. 성력을 다 쓰기 전, 열여섯 살 시절의 푸른빛이 감돌던 검은 머리와 사파이어색 눈동자가 자신을 마주 보고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꿈……꿈이었나."
중얼거려보았지만,
그러기엔 모든 기억이 너무나 선명했다. 화형대의 열기, 광장의 함성, 대신관의 무표정한 얼굴, 그리고 그 환멸까지.
그것이 단순한 악몽이라기엔 지나치게 생생했다.
셀레스티아는 침대에서 내려와 방 안을 둘러보았다.
낡은 책상 위에 놓인 것은 아직 그녀가 정식으로 성력을 각성하기 전, 신전 견습생 시절 쓰던 교본이었다.
열여섯…… 성력 완전한 각성 직전.
그녀는 천천히 자신의 기억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61화. 심장을 멈추는 대가 뿌리를 끊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그리고 그 대가는, 이미 한 사람의 가슴에서 뛰고 있었다.공간 전체가 울렸다. 뿌리가 발목을 휘감기 직전, 아드리안이 검을 뽑아 바닥을 갈랐다."물러서라!"붉은 불꽃이 뿌리를 태우며 길을 열었다. 셀레스티아는 그의 손을 붙잡은 채 뒤로 물러났지만, 시선은 여인의 가슴에서 떼지 못했다.⁃ 저 금빛 심장.⁃ 폐하의 것과 같은 박동이야."어머니."아드리안이 낮게 불렀다. 검을 쥔 손이 떨리고 있었다.『겁내지 마, 아가. 이 아이들은 나를 해치지 못해. 나를 지키고 있을 뿐이니까.』뿌리가 한 박자 늦게 물러났다. 마치 주인의 명령을 따르는 것처럼."지키다니요."셀레스티아가 물었다."그 뿌리가 사람들을 마물로 만들고 있어요. 아이들까지."『그래. 내 심장이 뛸 때마다 이 검은 뿌리가 뻗고, 사람들의 나쁜 욕망을 먹고 자란 뿌리는 사람의 숨을 빨아들이지. 나는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어. 그런데 막을수록, 더 깊이 뿌리가 되어 버렸단다.』여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세계수가 새겨진 이 심장이 뿌리의 핵이야. 멈추면 오염은 끊겨. 하지만.』"하지만."『멈추는 순간, 나도 죽는단다.』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드리안의 검이 천천히 내려갔다."이제 알겠지?"뒤에서 키리안이 낮게 말했다."내가 왜 너희를 여기로 끌어들였는지. 이 뿌리를 끊을 사람은 두 종류야. 심장을 멈출 만큼 강한 정화의 힘을 가진 자, 그리고 그 대가를 치를 각오가 된 자."그의 시선이 셀레스티아에게 닿았다."전생에서 너는 그 힘으로 세상을 구하고 불에 탔지. 이번에도 같은 길이야.""그만해라."아드리안이 앞을 막았다."그녀는 하지 않는다.""그럼 네 어머니가 죽는 걸 지켜볼 거야? 아니면 이 아이들이 전부 마물이 되는 걸?"키리안의 웃음은 없었다. 오히려 목소리가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이 사람, 정말로 두려워하고 있어.⁃ 적의 얼굴로 서 있는데, 눈은 도움을 구하는 눈이야.셀레스티아는 숨을 고
60화. 세계수 뿌리의 문세계수의 뿌리는 땅속이 아니라, 사람의 기억 속에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문은 이름이 아니라, 지워지지 않은 단 하나의 기억으로만 열렸다.검은 숲의 끝에서 길이 사라졌다.눈앞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거대한 나무의 밑동이 솟아 있었다. 줄기 하나가 성벽만큼 굵었고, 껍질 사이로 검붉은 균열이 심장처럼 뛰고 있었다. 균열의 박동은 셀레스티아의 손목 문양과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다."이게…… 세계수의 뿌리."레이먼드가 검을 쥔 채 숨을 삼켰다."입구가 없습니다. 어디로 들어가란 말입니까."아드리안이 줄기에 손을 대었다. 순간 균열이 일제히 붉게 번쩍였다."……열리지 않는다.""폐하의 피로도 안 열리나요?""황가의 피에는 반응한다. 하지만 문이 되기엔 부족해."그가 이를 악무는 사이, 셀레스티아의 손목 문양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무심코 줄기에 다가서자, 균열이 물처럼 갈라지며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증명하렴.』"무엇을요."『내가 네 어미라는 것을. 내 이름은 지워졌으니, 이름 말고 네가 기억하는 나를.』아드리안의 어깨가 굳었다."어머니.""저는 당신의 이름도 얼굴도 모릅니다. 먹으로 지워져 있었습니다."『알아. 그래서 더 아프단다, 아가.』목소리가 떨렸다.『그래도 네 몸은 기억할 거야.』셀레스티아는 아드리안의 손을 꼭 쥐었다.⁃ 이게 정말 생모의 목소리일까.⁃ 키리안이 만든 함정일 수도 있어. 하지만 확인할 방법은 하나뿐이야."폐하. 눈을 감고, 가장 오래된 기억을 떠올려 보세요. 이름이 아니어도 괜찮아요."아드리안이 눈을 감았다. 한참의 침묵 끝에, 그의 입술에서 아주 낮은 노래가 흘러나왔다.달이 떠도 무섭지 않아, 내 아가는 별이 지켜주니까.균열이 숨을 멈춘 듯 고요해졌다.
59화. 뿌리로 가는 길세계수의 뿌리로 가는 길은 그 어떤 지도에 없었다. 기록으로 있는 것은 오직, 먼저 다녀온 자들이 돌아오지 못했다는 기록뿐이었다.북부로 향하는 마차 안은 조용했다.창밖으로 낯익은 검은 숲이 스쳐 갔다. 셀레스티아는 무릎 위에 『태초의 계약사』를 올려놓고 손끝으로 표지를 쓸었다. 백지가 된 마지막 장은 여전히 아무 글자도 보여주지 않았다."자라."맞은편에서 아드리안이 낮게 말했다."안 졸려요.""눈이 반쯤 감겨 있다.""폐하는요. 이틀째 못 주무셨잖아요.""나는 원래 그렇다.""그 말, 이제 안 믿는다고 하시던 분이 누구였죠?"아드리안이 입을 다물었다. 귀끝이 옅게 붉어졌다. 셀레스티아는 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이런 사소한 농담이, 그들의 지금은 유일한 숨구멍이었다.그때, 마차가 크게 흔들리며 덜컹 멈췄다. 창밖에서 레이먼드의 목소리가 들렸다."폐하, 전방에 아이들이 있습니다."문을 열자, 길 한가운데 열 명 남짓한 아이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후송했다던 그 아이들이었다. 눈은 뜨고 있었지만 초점이 없었고, 목덜미에는 검붉은 균열이 가느다랗게 번지고 있었다."이 아이들만 마물로 변하다 말았군요."레이먼드가 검자루를 쥐었다."베어야 합니까.""안 돼요."셀레스티아가 마차에서 내렸다."아직 사람이에요. 의식이 남아 있어요."아이들의 입술이 동시에 움직였다."세계수의……뿌리로…… 오세요……""……엄마가…… 기다려요……"아드리안의 몸이 굳었다."엄마라고 했나.""폐하.""저 아이들의 어머니는 모두 죽었거나 실종됐을 텐데."셀레스티아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아이들의 목소리는 하나였다. 여러 입이 아니라, 한 사람이 아이들을 빌려 말하고 있었다."……셀레스티아…… 아드리안……아가…… 드디어…… 왔구나……"그 목소리에, 아드리안의 눈동자가 크게 떨렸다."……어머니."연회장의 영상 속, 눈물짓던 여인의 목소리였다.그리고 또 오랜 어머니가 들려주는 자장가가 들려왔다"폐하, 정신 차리세
58화. 대답하지 못한 밤 그가 묻지 않은 것은, 다정함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답을 듣는 순간 무엇이 사라질지, 그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니까.침묵이 길어질수록, 방 안의 공기는 무거워졌다.셀레스티아는 시트를 움켜쥔 손에 더 힘을 주었다. 말해 보려고 입술이 열릴 때마다 목구멍이 막혔다. 숨을 가두는 느낌이었다.⁃ 말하면 이 사람의 기억이 사라져.⁃ 하지만 이대로 침묵하면, 이 사람은 현실의 벽에 부딪혀 영원히 의심 속에 살아야 해."……셀레스티아."아드리안이 침대 앞으로 천천히 다가와 무릎을 굽혔다. 서로의 눈높이가 맞춰졌다. 방금까지 쏟아내던 질문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아 있었다."미안하다.""……네?""그대를 몰아붙였군."그가 무언가 결심한 듯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다. 갈라져 있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그대가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키리안의 말 때문이 아니라, 그대의 얼굴을 보면 안다. 지금 그대는 내게 거짓말을 하려는 얼굴이 아니라, 거짓도 진실도 고를 수 없는 얼굴이다."셀레스티아의 눈이 흔들렸다."그러니 대답하지 마라.""폐하.""대신 하나만 묻겠다. 예 아니면 아니요로만 답해라. 말이 아니라 고개로."그녀는 숨을 죽였다. 아드리안이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그대는, 나를 해치려는 사람인가."셀레스티아는 즉시 고개를 저었다. 세차게, 애써 참았던 눈물이 떨어질 듯이."나를 속이려는 사람인가."그녀는 잠깐 망설였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작게 고개를 저었다. 숨겨 왔지만 속이려던 건 아니었으니까."……나를 위해서, 말하지 않는 건가."이번엔 대답이 늦었다. 이내 눈물이 또르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아주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아드리안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웃음이라기엔 너무나도 아팠다."됐다.""……""그거면 충분하다."그가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댔다."규칙이 무엇이든, 대가가 무엇이든.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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