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화. 탈출숨죽이고 한참을 서 있을 때였다.“자네 거기서 뭐 하나?”“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아서…. 분명 이 근처였는데….”“교대 시간이네. 어서 오게.”“알겠네.”우리를 발견하지 못한 그는 가던 길을 재촉했다.‘휴…! 감사합니다.’새벽 어둠이 우리를 살렸다.멀어진 그들 모습을 끝까지 확인한 후.벽에 몸을 바짝 붙인 채 익숙한 길을 따라 숨죽이고 달렸다.별궁에 들어가기 전.또래 시녀들과 몰래 바깥 공기를 마시러 들락거리던 뒷길.설움을 토해내던 그곳이 지금의 생존 통로였다.비밀 통로를 향해 급히 달려갔다.바로 그때.번쩍이는 불더미가 뒤쪽에서 치솟으며 검붉은 빛이 궁을 물들였다.불길이 마치 우릴 찾고 있기라도 한 듯 섬뜩함이 온몸을 감쌌다.‘누가 불을 놓은 것인가?’궁 사람들의 요란함이 뒤엉켜 내 발길을 재촉했다.검붉은 기운이 궁을 휘모는 동안, 아이를 품에 더 깊이 끌어안고 어둠 속을 파고들었다.지하통로 입구는 궁 서편 장막 뒤쪽에 있었다.관리들조차 모르는 숨겨진 문.장막을 조심스럽게 밀자, 나지막한 철문이 모습을 드러냈다.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고리에 맞물렸다.‘제발 빨리 열려라.’고철 덩어리 자물쇠는 부식되어 변형돼 있었다.덜커덩…!자물쇠가 입을 벌리자, 부패한 녹 덩이가 부서졌다.작고 납작한 걸쇠를 밀어 올리는 소리가 통로를 가득 메웠다.‘설마…. 누가 있는 건 아니겠지?’나는 숨을 죽인 채 잠시 얼어붙었다.다행히 주위는 조용했다.문이 열리며 드러난 검은 틈.빛이 닿지 않는 궁의 바닥 아래로 이어지는 어둠이었다.그 어둠을 바라보다 아이를 품은 팔에 힘을 주며 또 한 발 내디뎠다.습기와 차가움이 뒤섞여 버려진 공간.궁의 돌바닥과는 다른 감촉이 발끝에 전해졌다.아직 위쪽에선 궁의 소리가 남아있었다.멀리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움직임과 웅성거림.이 문 하나를 경계로 나와 분리된 궁의 울림이었다.아이를 조금 더 끌어당겼다.강보 속에서 전해지는 아이의 온기.나와 아이가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문이 닫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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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화. 회귀살아온 모든 시간이 차례로 떠올랐다.태어나 보니 난 부모 없는 고아였다.10살이 될 무렵 초동들과 함께 궁정에 팔려 왔다.궁정 문 앞에서 내 할머니란 분은 나를 판 은화 세 푼을 갖고 도망치듯 달아났다.울고 매달리는 나를 뿌리치며 달려가던 뒷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궁정에서 시녀들의 심부름꾼이 되어 그녀들을 보조하는 일부터 시작했다.천한 신분이지만 우리는 서로 따뜻한 한마디를 나누며 그것에 기대어 살았다.왕이 나를 품지 않았다면 내 아이는 귀한 누군가의 집에 태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나 또한 단두대 앞에 서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억울한 죽음에 마음이 무너져 내릴 뿐.죽음 앞에서 떨어진 눈물 한 방울.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그 한 방울이 떨어지는 순간.푸른빛이 폭우처럼 쏟아졌다.시리도록 아름다운 빛.날 위로하는 듯했다.어디선가 내 억울함을 대변하는 울부짖음이 들려왔다.누구의 소리일까?죽음을 앞둔 이들에게 들리는 외침인가?그런데….칼날이 떨어질 시간이 훨씬 지났다.이미 죽었을 지금.생각이 멈추지 않고 계속됐다.‘사후에도 생각할 순 있구나.’단두대 상판 칼날이 움직이지 않고 머리 위에 그대로 서 있었다.죽은 게 아니었다.시간이 멈췄다.휘둥그레질 틈도 없이 광장을 덮친 빛줄기에 눈이 희미해졌다.감싸듯 끌어올리는 손길.내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며 빛 한가운데로 빨려 들어갔다.그 속에서 단 하나의 바람만 품었다.나와 내 아들을 살려 달라고.무고한 피를 쏟게 한 저들에게 기필코 복수하겠노라고.빛이 시야를 덮은 사이.광장의 칼날과 군중.왕과 왕비.단두대가 모두 사라졌다.두리번대며 주위를 살피던 순간, 어디선가 익숙한 울음이 들려왔다.작고 미약하지만, 생명을 움켜쥔 희미한 울음….소리 나는 쪽으로 몸이 순식간에 휘리릭 옮겨졌다.아이를 낳았던 산청에 서 있는 나.방은 여전히 피 냄새가 진동했고, 바닥은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강보 속 작은 떨림이 보였다.“아들…?”어미에게만 보여주고 감추었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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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화. 수장당한 내 아들이 거지 같은 현실.꿈이었으면 좋겠다.아이를 살리고 싶다.왕과 왕비가 나란히 앉은 모습.왕은 표정 없는 얼굴로 바라봤고 화려하게 치장한 왕비는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산해진미로 가득 찬 생일상 앞.왕족과 귀족 몇몇이 취한 모습으로 죽음을 종용했다.내 목숨은 왕이 왕비에게 주는 생일선물이었다.손목을 억누르던 사슬이 더욱 조여왔지만 아픔보단 절망이 밀려왔다.죽이라는 군중의 함성이 거세졌다.내가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인가….사형집행인의 검고 두꺼운 장갑이 목을 억세게 잡고 고정대에 묶었다.상판엔 날카로운 칼날이 번뜩였다.검은 두건이 머리 위에 씌워지자, 밖으로 삐져나올 듯 요동치는 심장.아이 얼굴이 떠올랐다.품에 안겼을 때의 따듯한 체온.힘없이 감기던 작은 손가락.생명을 움켜쥐려던 미약한 울음이 나를 짓눌렀다.‘아가, 못난 어미를 만난 것 미안해. 날 용서해 줘.’모든 걸 포기한 순간.죄책감과 맹세가 동시에 입을 통해 뿜어져 나왔다.‘다시 기회를 준다면…. 반드시 아이를 살리고 저들에게 복수할 것이다.’삶의 끝에서 부르짖는 오기였다.갑자기 불어온 돌풍이 머리 위 두건을 벗겨 찬 공기가 목덜미를 스쳤다.사형집행인이 단두대 상판을 높이 들었다.거칠게 갈린 나무판이 마치 오래전부터 나를 기다린 듯 피비린내를 뿜어냈다.군중은 일제히 숨죽여 바라봤다.마치 나의 죽음을 기대라도 하는 듯….왕비의 생일, 잔악한 죄수 하나를 처형하는 것은 군중에게 축제가 된 지 오래였다.왕비의 생일을 축하하러 모인 이 자리는 잔치이자 처형장이었다.저들은 타인의 비극을 술안주 삼아 웃고 떠드는 데 익숙한 이들이었다.누군가 다가와 거친 손길로 재갈을 풀었다.머리가 아플 정도로 진한 향료 냄새.왕비였다.“마리안. 너무 억울해하지 마라. 너 따위가 감히 왕의 아들을 낳은 죗값이라 생각해라.”도도한 걸음으로 자리로 돌아가던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다시 다가왔다.“아…! 잊을 뻔했구나. 저승 문턱에서 네 아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외롭지 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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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화. 은빛 눈의 아이를 낳았다이미 알고 있었다.별궁의 침묵은 곧 죽음의 예고인 것을.그날부터 나는 밤마다 신께 빌었다.제발, 제발 내 아이가 아들이 아니길.이름도 없이 사라진 수많은 아이처럼 되지 않기를.바라고 또 바랐다.하지만 신은 끝내 내 기도를 외면했다.새벽녘, 찢어지는 통증과 함께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산파는 내게 아이의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은 채, 핏덩이를 강보에 싸서 자그마한 바구니에 구겨 넣었다.이름조차 갖지 못한 아이는 세상에서 조용히 지워지고 있었다.“제발 부탁이에요. 얼굴 한 번만이라도 보여주세요.”“뭣 하러. 괜히 슬픔만 더해질 뿐이야. 이 아이는 아무 죄가 없으니 좋은 곳으로 갈 거다.”“못난 어미의 소원입니다. 제발 한 번만 젖이라도 물리게 해주세요.”끈질긴 애원에 체념한 듯 산파가 아이를 건넸다.곧 죽을 운명을 모르는 아이는 해맑게 나를 향해 웃어 보였다.그리고 그 작은 눈동자를 본 순간.숨이 멎었다.달빛을 머금은 듯 시리게 빛나는 은빛.예언 속의 루미엘.반신반인의 눈.내 아이가 바로 그 예언의 통치자였다.마치 내게만 은빛을 보여주고 싶은 듯 곧 눈을 꽉 감아버린 아이.작은 생명체의 온기가 손을 타고 심장으로 번졌다.아이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겠다고 다짐했다.“이제 이리 다오. 시간이 다 됐다.”“안 돼요. 아직 아이가 젖을 떼지 않았어요.”산파와 옥신각신하던 순간.산청 문이 거칠게 열리며 무장한 기사들이 들이닥쳤다.“왕비 마마의 명이다. 반항하면 아이를 즉시 처단하라.”피범벅이 된 몸을 일으켜 더욱 강하게 아이를 품에 안았다.그때, 문가에서 이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는 왕과 눈이 마주쳤다.‘폐하! 살려주세요! 폐하의 아이잖아요.’마지막 희망을 걸고 외쳤다.하지만 왕은 눈을 피하며 말없이 등을 돌렸다.“폐하! 당신은 왕이잖아요. 한마디만 하면 살릴 수 있잖아요.”아이를 안고 산청 밖으로 뛰쳐나가 그의 옷자락을 붙들었다.하지만 냉혹한 무사들이 나를 걷어찼고 아이를 내 품에서 강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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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화. 나는 오늘 단두대에서 죽는다‘...아아!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차가운 바람이 광장을 날카롭게 스쳤다.겨울의 끝자락 지독하게 시린 한기였다.단두대 위에 선 내 얇은 치맛자락이 갈기갈기 찢긴 깃발처럼 맥없이 펄럭였다.이상할 정도로 정돈된 광장.죽음을 앞둔 죄수의 사형장이라기엔 지나치게 질서정연했고, 군중의 눈빛엔 동정이나 슬픔 따위는 없었다.그저 광대의 유희를 구경하러 온 관객처럼 생소한 흥분만이 가득했다.분명 처음 겪는 죽음일진대, 이 장면이 지독하게 낯익은 건 왜일까?심장을 찌르는 듯한 누군가의 기억이 파편이 되어 뇌리를 스쳤다.검푸른 빛으로 문드러진 낮달이 걸린 하늘.사람들은 저 빛을 불길한 징조라며 수군거렸지만, 사형집행인은 개의치 않았다.그는 그저 오래전부터 정해진 절차를 반복하듯 무표정했다.무거운 사슬에 묶인 채 오르는 단두대 계단.차가운 돌바닥의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들고 살갗을 파고드는 쇠사슬에 붉은 피가 배어 나왔지만,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죽여라! 저 요망한 마녀를 당장 죽여라!”“자식을 죽인 악귀다.”군중의 함성은 독이 묻은 비수였다.내가 아이를 죽였다고?내 전부였던 아이, 나를 지탱해 준 소중한 생명을 내가 죽였다니.저들의 입에서 쏟아지는 포악한 단어들이 내 심장을 갈기갈기 난도질하고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피비린내 나는 산청(産廳)에 있었다.갓 태어난 아이의 온기가 아직도 손끝에 남아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죄인이 되어 단두대에 서 있었다.누구도 내 사연을 묻지 않았다.누구도 내 진실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그저 내 목이 어서 빨리 떨어지길 바라는 눈빛.그래서 이 불길한 징조가 사라지기만을 갈구하며 괴성을 질러댈 뿐이었다.‘악몽일 거야.’부모도 성씨도 없이 왕비 발을 닦던 미천한 시녀.나의 불행이 시작된 그날.달빛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일과를 마치고 숙소로 향하던 중 술에 취한 왕과 마주쳤다.앙리 7세.그는 짐승 같은 눈빛으로 내 손목을 낚아챘다.“이름이 무엇이냐.”“...마, 마리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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