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눈의 아이를 낳았다

은빛 눈의 아이를 낳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6
By:  서이화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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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아들을 낳은 시녀 마리안. 왕비에게 아들은 수장당하고 그녀는 반역자로 몰려 단두대에서 죽는다. 눈을 뜬 순간, 과거로 회귀한 그녀. 이번 생의 목적은 명확하다. 나를 죽인 왕비의 심장을 짓밟고 방관했던 왕을 추락시키는 것. 그리고 半神半人 내 아들을 왕좌에 세우는 것. “울지 말아라, 어미가 너에게 온 세상을 으깨어 바칠 테니.”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된 가장 고귀한 복수와 찬탈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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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화. 나는 오늘 단두대에서 죽는다

‘...아아!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차가운 바람이 광장을 날카롭게 스쳤다.

겨울의 끝자락 지독하게 시린 한기였다.

단두대 위에 선 내 얇은 치맛자락이 갈기갈기 찢긴 깃발처럼 맥없이 펄럭였다.

이상할 정도로 정돈된 광장.

죽음을 앞둔 죄수의 사형장이라기엔 지나치게 질서정연했고, 군중의 눈빛엔 동정이나 슬픔 따위는 없었다.

그저 광대의 유희를 구경하러 온 관객처럼 생소한 흥분만이 가득했다.

분명 처음 겪는 죽음일진대, 이 장면이 지독하게 낯익은 건 왜일까?

심장을 찌르는 듯한 누군가의 기억이 파편이 되어 뇌리를 스쳤다.

검푸른 빛으로 문드러진 낮달이 걸린 하늘.

사람들은 저 빛을 불길한 징조라며 수군거렸지만, 사형집행인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그저 오래전부터 정해진 절차를 반복하듯 무표정했다.

무거운 사슬에 묶인 채 오르는 단두대 계단.

차가운 돌바닥의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들고 살갗을 파고드는 쇠사슬에 붉은 피가 배어 나왔지만,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죽여라! 저 요망한 마녀를 당장 죽여라!”

“자식을 죽인 악귀다.”

군중의 함성은 독이 묻은 비수였다.

내가 아이를 죽였다고?

내 전부였던 아이, 나를 지탱해 준 소중한 생명을 내가 죽였다니.

저들의 입에서 쏟아지는 포악한 단어들이 내 심장을 갈기갈기 난도질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피비린내 나는 산청(産廳)에 있었다.

갓 태어난 아이의 온기가 아직도 손끝에 남아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죄인이 되어 단두대에 서 있었다.

누구도 내 사연을 묻지 않았다.

누구도 내 진실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저 내 목이 어서 빨리 떨어지길 바라는 눈빛.

그래서 이 불길한 징조가 사라지기만을 갈구하며 괴성을 질러댈 뿐이었다.

‘악몽일 거야.’

부모도 성씨도 없이 왕비 발을 닦던 미천한 시녀.

나의 불행이 시작된 그날.

달빛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일과를 마치고 숙소로 향하던 중 술에 취한 왕과 마주쳤다.

앙리 7세.

그는 짐승 같은 눈빛으로 내 손목을 낚아챘다.

“이름이 무엇이냐.”

“...마, 마리안이라고 합니다. 폐하.”

그것이 내 나락의 시작.

그날 이후, 나는 왕의 간택 받은 시녀라는 이름으로 별궁에 유폐되었다.

선택권 따위는 없었다.

왕의 명은 일개 시녀가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억압이었으며, 왕비는 나를 말려 죽일 듯한 독기를 뿜어댔다.

그가 나를 찾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나는 화려한 감옥 속에 박제되었다.

그곳엔 나 외에도 젊고 예쁘장한 시녀들로 가득했다.

별궁은 기만적일 만큼 아름다웠다.

“마리안, 네가 운이 좋다고 생각하느냐? 아니, 너는 그저 왕의 쓰레기통일 뿐이야.”

수발하는 늙은 시녀들이 질투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우리의 유일한 임무는 왕의 욕정을 받아내는 것.

왕의 아이를 출산한 시녀들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그 빈자리는 더 어린 시녀들로 채워졌다.

그 지옥 같은 순환 속에서 나는 그저 시체처럼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사랑?

연민?

그런 고귀한 감정 따위는 내 것이 아니었다.

오직 끈적한 욕망과 서늘한 감시만이 주위를 채우고 있었다.

매일 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신에게 기도를 드렸다.

차라리 오늘 밤 내 숨이 끊어지게 해달라고.

그러던 어느 날.

내 몸 안에 생명이 찾아왔다.

왕은 변화된 내 모습에 급격히 흥미를 잃었다.

“배가 불러오니 보기 흉하구나. 아이를 낳을 때까지는 내 눈에 띄지 마라.”

그게 끝이었다.

궁의의 진찰이 끝난 후, 나는 차가운 독방으로 옮겨졌다.

아무 의미도 찾지 못하고 죽음만을 갈구하던 내 삶.

기이하게도 태동이 느껴지는 순간 나는 처음으로 기쁨을 느꼈다.

처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나를 흔들었다.

이제 더는 이 차가운 궁궐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

아주 작지만 분명하게 느껴지는 생명체.

아이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너만은 살릴게. 어미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하지만.

먹는 것, 마시는 것, 심지어 숨 쉬는 순간까지 누군가의 허락이 필요한 날들의 이어짐.

아이가 자라며 내 몸이 변할수록 기쁨은 거대한 두려움으로 탈바꿈했다.

당시 왕국은 기괴한 예언 하나에 사로잡혀 있었다.

[앙리 재위 7년, 은빛 눈의 반신반인 ‘루미엘’이 태어나 인간의 왕좌를 무너뜨릴 것이다.]

신과 인간의 경계를 허무는 통치자의 재림.

불안에 미쳐버린 왕비는 그해 태어난 모든 남아를 죽이라 명령했다.

왕은 아무것도 막지 않았다.

왕비 광기 뒤에 숨어 책임을 회피했고, 날마다 아들을 잃은 부모의 통곡이 나라를 뒤덮었다.

별궁에서 태어난 남아는 가장 먼저 사라져야 할 첫 번째 제거 대상이었다.

어느 날 저녁.

식은 수프를 가져온 찬모가 주변을 살피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마리안, 딸을 낳아야 한다. 무조건 딸이어야 해. 그래야 네가 살아. 만약 아들을 낳으면…. 너와 아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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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s

Michael John
Michael John
너무 재미가 있으며 글 내용이 마치 영화를 보는듯 상상이 된다.
2026-06-03 11:11:53
2
0
권명화
권명화
작가님 넘넘재밌어요!!앞으로도 기대할께요^^
2026-06-02 10:32:51
5
0
정구자
정구자
슬픔으로. 시작하지만. 뒤에있을. 사이다들을. 기대하게 하네요 매우. 기다림요
2026-05-22 09:00:18
5
0
권명화
권명화
우리집엔 어린아기가 있어서 단한글자도 안놓치고 봤읍니다..넘 재미있네요!!온몸에 전율도 느껴지고..괘감까지..작가님 대박나세요!!넘 재미있어요^^.
2026-05-22 08:52:26
4
0
107 Chapters
1화. 나는 오늘 단두대에서 죽는다
‘...아아!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차가운 바람이 광장을 날카롭게 스쳤다.겨울의 끝자락 지독하게 시린 한기였다.단두대 위에 선 내 얇은 치맛자락이 갈기갈기 찢긴 깃발처럼 맥없이 펄럭였다.이상할 정도로 정돈된 광장.죽음을 앞둔 죄수의 사형장이라기엔 지나치게 질서정연했고, 군중의 눈빛엔 동정이나 슬픔 따위는 없었다.그저 광대의 유희를 구경하러 온 관객처럼 생소한 흥분만이 가득했다.분명 처음 겪는 죽음일진대, 이 장면이 지독하게 낯익은 건 왜일까?심장을 찌르는 듯한 누군가의 기억이 파편이 되어 뇌리를 스쳤다.검푸른 빛으로 문드러진 낮달이 걸린 하늘.사람들은 저 빛을 불길한 징조라며 수군거렸지만, 사형집행인은 개의치 않았다.그는 그저 오래전부터 정해진 절차를 반복하듯 무표정했다.무거운 사슬에 묶인 채 오르는 단두대 계단.차가운 돌바닥의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들고 살갗을 파고드는 쇠사슬에 붉은 피가 배어 나왔지만,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죽여라! 저 요망한 마녀를 당장 죽여라!”“자식을 죽인 악귀다.”군중의 함성은 독이 묻은 비수였다.내가 아이를 죽였다고?내 전부였던 아이, 나를 지탱해 준 소중한 생명을 내가 죽였다니.저들의 입에서 쏟아지는 포악한 단어들이 내 심장을 갈기갈기 난도질하고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피비린내 나는 산청(産廳)에 있었다.갓 태어난 아이의 온기가 아직도 손끝에 남아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죄인이 되어 단두대에 서 있었다.누구도 내 사연을 묻지 않았다.누구도 내 진실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그저 내 목이 어서 빨리 떨어지길 바라는 눈빛.그래서 이 불길한 징조가 사라지기만을 갈구하며 괴성을 질러댈 뿐이었다.‘악몽일 거야.’부모도 성씨도 없이 왕비 발을 닦던 미천한 시녀.나의 불행이 시작된 그날.달빛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일과를 마치고 숙소로 향하던 중 술에 취한 왕과 마주쳤다.앙리 7세.그는 짐승 같은 눈빛으로 내 손목을 낚아챘다.“이름이 무엇이냐.”“...마, 마리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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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은빛 눈의 아이를 낳았다
이미 알고 있었다.별궁의 침묵은 곧 죽음의 예고인 것을.그날부터 나는 밤마다 신께 빌었다.제발, 제발 내 아이가 아들이 아니길.이름도 없이 사라진 수많은 아이처럼 되지 않기를.바라고 또 바랐다.하지만 신은 끝내 내 기도를 외면했다.새벽녘, 찢어지는 통증과 함께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산파는 내게 아이의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은 채, 핏덩이를 강보에 싸서 자그마한 바구니에 구겨 넣었다.이름조차 갖지 못한 아이는 세상에서 조용히 지워지고 있었다.“제발 부탁이에요. 얼굴 한 번만이라도 보여주세요.”“뭣 하러. 괜히 슬픔만 더해질 뿐이야. 이 아이는 아무 죄가 없으니 좋은 곳으로 갈 거다.”“못난 어미의 소원입니다. 제발 한 번만 젖이라도 물리게 해주세요.”끈질긴 애원에 체념한 듯 산파가 아이를 건넸다.곧 죽을 운명을 모르는 아이는 해맑게 나를 향해 웃어 보였다.그리고 그 작은 눈동자를 본 순간.숨이 멎었다.달빛을 머금은 듯 시리게 빛나는 은빛.예언 속의 루미엘.반신반인의 눈.내 아이가 바로 그 예언의 통치자였다.마치 내게만 은빛을 보여주고 싶은 듯 곧 눈을 꽉 감아버린 아이.작은 생명체의 온기가 손을 타고 심장으로 번졌다.아이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겠다고 다짐했다.“이제 이리 다오. 시간이 다 됐다.”“안 돼요. 아직 아이가 젖을 떼지 않았어요.”산파와 옥신각신하던 순간.산청 문이 거칠게 열리며 무장한 기사들이 들이닥쳤다.“왕비 마마의 명이다. 반항하면 아이를 즉시 처단하라.”피범벅이 된 몸을 일으켜 더욱 강하게 아이를 품에 안았다.그때, 문가에서 이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는 왕과 눈이 마주쳤다.‘폐하! 살려주세요! 폐하의 아이잖아요.’마지막 희망을 걸고 외쳤다.하지만 왕은 눈을 피하며 말없이 등을 돌렸다.“폐하! 당신은 왕이잖아요. 한마디만 하면 살릴 수 있잖아요.”아이를 안고 산청 밖으로 뛰쳐나가 그의 옷자락을 붙들었다.하지만 냉혹한 무사들이 나를 걷어찼고 아이를 내 품에서 강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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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수장당한 내 아들
이 거지 같은 현실.꿈이었으면 좋겠다.아이를 살리고 싶다.왕과 왕비가 나란히 앉은 모습.왕은 표정 없는 얼굴로 바라봤고 화려하게 치장한 왕비는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산해진미로 가득 찬 생일상 앞.왕족과 귀족 몇몇이 취한 모습으로 죽음을 종용했다.내 목숨은 왕이 왕비에게 주는 생일선물이었다.손목을 억누르던 사슬이 더욱 조여왔지만 아픔보단 절망이 밀려왔다.죽이라는 군중의 함성이 거세졌다.내가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인가….사형집행인의 검고 두꺼운 장갑이 목을 억세게 잡고 고정대에 묶었다.상판엔 날카로운 칼날이 번뜩였다.검은 두건이 머리 위에 씌워지자, 밖으로 삐져나올 듯 요동치는 심장.아이 얼굴이 떠올랐다.품에 안겼을 때의 따듯한 체온.힘없이 감기던 작은 손가락.생명을 움켜쥐려던 미약한 울음이 나를 짓눌렀다.‘아가, 못난 어미를 만난 것 미안해. 날 용서해 줘.’모든 걸 포기한 순간.죄책감과 맹세가 동시에 입을 통해 뿜어져 나왔다.‘다시 기회를 준다면…. 반드시 아이를 살리고 저들에게 복수할 것이다.’삶의 끝에서 부르짖는 오기였다.갑자기 불어온 돌풍이 머리 위 두건을 벗겨 찬 공기가 목덜미를 스쳤다.사형집행인이 단두대 상판을 높이 들었다.거칠게 갈린 나무판이 마치 오래전부터 나를 기다린 듯 피비린내를 뿜어냈다.군중은 일제히 숨죽여 바라봤다.마치 나의 죽음을 기대라도 하는 듯….왕비의 생일, 잔악한 죄수 하나를 처형하는 것은 군중에게 축제가 된 지 오래였다.왕비의 생일을 축하하러 모인 이 자리는 잔치이자 처형장이었다.저들은 타인의 비극을 술안주 삼아 웃고 떠드는 데 익숙한 이들이었다.누군가 다가와 거친 손길로 재갈을 풀었다.머리가 아플 정도로 진한 향료 냄새.왕비였다.“마리안. 너무 억울해하지 마라. 너 따위가 감히 왕의 아들을 낳은 죗값이라 생각해라.”도도한 걸음으로 자리로 돌아가던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다시 다가왔다.“아…! 잊을 뻔했구나. 저승 문턱에서 네 아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외롭지 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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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회귀
살아온 모든 시간이 차례로 떠올랐다.태어나 보니 난 부모 없는 고아였다.10살이 될 무렵 초동들과 함께 궁정에 팔려 왔다.궁정 문 앞에서 내 할머니란 분은 나를 판 은화 세 푼을 갖고 도망치듯 달아났다.울고 매달리는 나를 뿌리치며 달려가던 뒷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궁정에서 시녀들의 심부름꾼이 되어 그녀들을 보조하는 일부터 시작했다.천한 신분이지만 우리는 서로 따뜻한 한마디를 나누며 그것에 기대어 살았다.왕이 나를 품지 않았다면 내 아이는 귀한 누군가의 집에 태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나 또한 단두대 앞에 서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억울한 죽음에 마음이 무너져 내릴 뿐.죽음 앞에서 떨어진 눈물 한 방울.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그 한 방울이 떨어지는 순간.푸른빛이 폭우처럼 쏟아졌다.시리도록 아름다운 빛.날 위로하는 듯했다.어디선가 내 억울함을 대변하는 울부짖음이 들려왔다.누구의 소리일까?죽음을 앞둔 이들에게 들리는 외침인가?그런데….칼날이 떨어질 시간이 훨씬 지났다.이미 죽었을 지금.생각이 멈추지 않고 계속됐다.‘사후에도 생각할 순 있구나.’단두대 상판 칼날이 움직이지 않고 머리 위에 그대로 서 있었다.죽은 게 아니었다.시간이 멈췄다.휘둥그레질 틈도 없이 광장을 덮친 빛줄기에 눈이 희미해졌다.감싸듯 끌어올리는 손길.내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며 빛 한가운데로 빨려 들어갔다.그 속에서 단 하나의 바람만 품었다.나와 내 아들을 살려 달라고.무고한 피를 쏟게 한 저들에게 기필코 복수하겠노라고.빛이 시야를 덮은 사이.광장의 칼날과 군중.왕과 왕비.단두대가 모두 사라졌다.두리번대며 주위를 살피던 순간, 어디선가 익숙한 울음이 들려왔다.작고 미약하지만, 생명을 움켜쥔 희미한 울음….소리 나는 쪽으로 몸이 순식간에 휘리릭 옮겨졌다.아이를 낳았던 산청에 서 있는 나.방은 여전히 피 냄새가 진동했고, 바닥은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강보 속 작은 떨림이 보였다.“아들…?”어미에게만 보여주고 감추었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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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탈출
숨죽이고 한참을 서 있을 때였다.“자네 거기서 뭐 하나?”“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아서…. 분명 이 근처였는데….”“교대 시간이네. 어서 오게.”“알겠네.”우리를 발견하지 못한 그는 가던 길을 재촉했다.‘휴…! 감사합니다.’새벽 어둠이 우리를 살렸다.멀어진 그들 모습을 끝까지 확인한 후.벽에 몸을 바짝 붙인 채 익숙한 길을 따라 숨죽이고 달렸다.별궁에 들어가기 전.또래 시녀들과 몰래 바깥 공기를 마시러 들락거리던 뒷길.설움을 토해내던 그곳이 지금의 생존 통로였다.비밀 통로를 향해 급히 달려갔다.바로 그때.번쩍이는 불더미가 뒤쪽에서 치솟으며 검붉은 빛이 궁을 물들였다.불길이 마치 우릴 찾고 있기라도 한 듯 섬뜩함이 온몸을 감쌌다.‘누가 불을 놓은 것인가?’궁 사람들의 요란함이 뒤엉켜 내 발길을 재촉했다.검붉은 기운이 궁을 휘모는 동안, 아이를 품에 더 깊이 끌어안고 어둠 속을 파고들었다.지하통로 입구는 궁 서편 장막 뒤쪽에 있었다.관리들조차 모르는 숨겨진 문.장막을 조심스럽게 밀자, 나지막한 철문이 모습을 드러냈다.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고리에 맞물렸다.‘제발 빨리 열려라.’고철 덩어리 자물쇠는 부식되어 변형돼 있었다.덜커덩…!자물쇠가 입을 벌리자, 부패한 녹 덩이가 부서졌다.작고 납작한 걸쇠를 밀어 올리는 소리가 통로를 가득 메웠다.‘설마…. 누가 있는 건 아니겠지?’나는 숨을 죽인 채 잠시 얼어붙었다.다행히 주위는 조용했다.문이 열리며 드러난 검은 틈.빛이 닿지 않는 궁의 바닥 아래로 이어지는 어둠이었다.그 어둠을 바라보다 아이를 품은 팔에 힘을 주며 또 한 발 내디뎠다.습기와 차가움이 뒤섞여 버려진 공간.궁의 돌바닥과는 다른 감촉이 발끝에 전해졌다.아직 위쪽에선 궁의 소리가 남아있었다.멀리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움직임과 웅성거림.이 문 하나를 경계로 나와 분리된 궁의 울림이었다.아이를 조금 더 끌어당겼다.강보 속에서 전해지는 아이의 온기.나와 아이가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문이 닫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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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추격자들
철컥.철컥…!찌이익.쇳덩이 부딪히는 소리였다.여러 명이었다.이렇게 많은 사람이…?으그르르…!사냥개의 짖음이 점점 크게 다가왔다.몸이 굳었다.피 냄새와 젖 냄새.둘 중 하나라도 맡으면 끝이었다.돌바닥 위로 가죽 부츠 부딪히는 소리로 보아 왕비 친위대가 맞았다.그들의 둔탁한 걸음으로 바닥이 미세하게 떨렸다.친위대 상의에 부착된 쇠사슬 소리가 요란해서 그들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이쪽이다! 개를 끌고 와!”눈앞이 캄캄해지자, 축축한 벽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도 크게 들렸다.아이는 다시 울음을 터뜨릴 듯 떨고 있었다.내 긴장이 아이에게 전염될 것 같아 억지로 침착을 유지했다.“괜찮아. 조금만…. 조금만 참아.”바닥에 몸을 웅크렸다.사냥개의 거친 호흡이 조금씩 가까이 다가왔다.냄새를 쫓는 짐승의 소리.왕비 친위병들의 중얼거림이 발을 묶는 듯했다.“문을 확인해!”“빨리 뛰어!”그들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며 지하통로를 뒤흔들었다.추격자의 움직임이 바로 앞에서 멈췄다.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압박이 밀려왔다.“이쪽이다.”크고 거친 남자의 목소리.아이를 더 깊게 품에 감싸 안고 핏기 없는 손으로 벽을 짚으며 숨을 죽였다.어둠에서 낯선 그림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본능적으로 뒤로 조금씩 물러섰다.등골이 오싹해지며 심장이 떨어질 듯 몸이 흔들렸다.그가 천천히 다가오자, 가냘픈 수정 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잘 다듬어진 근육, 전장에서 얻은 것 같은 상흔, 그리고 깊게 팬 칼자국.낯선 얼굴이었다.어둠 속에서 사내의 실루엣이 드러나자, 본능적으로 품 안의 아이를 더 깊이 끌어안고 은빛 눈동자를 가렸다.“살…. 려….”“쉿!”습한 돌벽 사이, 울려 퍼진 목소리는 날카로웠다.손끝에는 식은땀과 피가 엉겨 있었다.망설임 없이 품에서 은화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가진 전부였지만 아들을 살리기 위해선 아깝지 않았다.“왕비가 쫓으라 했습니까? 제발 한 번만 눈감아 주십시오. 저는 죄가 없습니다. 제발 이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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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시린 새벽
칠흑의 어둠을 지나고 보석이 가득한 공간에 다다랐을 때.톱니바퀴 사이로 속삭임이 새어 나왔다.인간의 언어와 닮았지만, 뜻을 알 수 없는 소리였다.그 음성을 듣는 순간.이곳이 말로만 듣던 신들의 길.선택받은 자만이 통과할 수 있다는 차원 회랑임을 알 수 있었다.갑자기 나타난 검은 실루엣.흠칫 놀라 숨을 멈췄다.주위를 빙빙 돌던 그와 함께 차원 회랑이 사라지며 불길에 휩싸인 통로가 보였다.인간 영역으로 돌아온 우리를 기다린 건.불덩이였다.‘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야 한다. 끝까지….’내 마음을 누군가 읽은 듯 갑자기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고, 허벅지까지 불어난 물로 불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짙은 음영을 띈 하늘.나무둥치 사이로 차오른 새벽이 빛을 퍼뜨렸다.출구 위로 들리는 인기척.최대한 조심스럽게 기어 그 지점을 무사히 통과했다.얕아진 수로를 따라 내려가면 궁 외곽.해가 떠오르면 수문 인근 경비가 두 배로 늘어나기 때문에 탈출을 위한 시간은 많지 않았다.드디어 눈앞에 보이는 수문.돌 구조물 아래로 쇠창살이 내려와 있었다.'바깥쪽 나무뿌리 위, 저 틈만 통과하면 된다.'반쯤 부식된 쇠창살을 잡고, 있는 힘껏 벌렸다.“으윽…!”엄청난 힘이 내 몸에서 분출되며 쇠창살이 벌어졌다.'이제 자유다. 아가 우리 이제 살았다.'환한 웃음으로 어미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부신 은빛과 마주친 순간.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그래, 어미가 널 예언대로 왕국을 다스리게 해 줄게.’아이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약속했다.궁정을 빠져나왔다는 안도에 코끝을 스치는 물비린내도 꽃보다 향기롭게 다가왔다.강바닥에는 조개껍데기와 부러진 창끝이 널려 있었다.신발이 찢어져 발바닥을 베였지만 내겐 아픔도 벅찬 환희였다.무사히 강어귀에 다다르자, 한적한 길이 모습을 드러냈다.인적 없는 길.물살이 부서지는 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의 고요함.푸드덕 날아가는 새들뿐 아무도 없었다.수문을 빠져나온 뒤.물은 발목 높이로 줄어들었다.고요로 가득 찬 세상.풀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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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루마레스 숲
푸슁ㅡ 슁ㅡ그자가 날 향해 칼을 휘두른 바로 그때.갑자기 화살이 쏟아졌다.왕비 친위대는 우수수 말에서 떨어졌고 말들은 재빨리 어디론가 도망쳤다.검이 부딪히는 소리, 욕설, 짐승의 포효가 뒤엉켰다.켜켜이 쌓여 작은 더미를 이룬 친위대 시체.호위병 몇몇은 이미 달아나고 없었다.“미안합니다. 우리가 너무 늦었나 봅니다.”지하통로 사내였다.같은 무리로 보이는 여러 명과 함께였다.포박 줄을 끊는 사내의 손.피로 얼룩져 있었고 매캐한 냄새까지 났다.“감…. 사합니다.”사내는 우리를 말에 올린 후, 뒤에서 감싸 안았다.이상한 느낌이 날 사로잡았다.억센 손의 보호를 받으며 이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겠단 생각이 스쳤다.사내에게 느낀 처음 감정이었다.왕비 친위대를 전멸시킨 사내와 부족들은 우릴 데리고 숲으로 향했다.‘이 사내는 누구이며, 그의 부족은 왜 우리 목숨을 구하려는 걸까?’여러 생각이 머물렀다.숲으로 들어가는 순간,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마리안 님.”‘잘 못 들었겠지. 이 낯선 곳에 나를 아는 이가 있을 리 없지.’바람이 부드럽게 뺨을 스쳤다.뒤돌아보니 말발굽 자국이 흔적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빽빽한 나무들이 아침 빛을 베어내며 이슬 품은 솔 향기가 코끝에 닿았다.“휴! 이제 살았다.”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을 때 누군가 또 한 번 나를 불렀다.“마리안 님!”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이 소리는 왕궁 산청, 해산의 고통이 몰려올 때 들었던 음성이었다.‘환청을 두 번씩이나 듣다니….’정신을 가다듬었다.잔뜩 긴장한 나를 사내가 안심시켜 주었다.“마리안 님, 이곳은 우리 루마레스 부족이 지키는 숲입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루마레스? 오래전 왕국을 통치했다는 그 부족 말입니까?”“그렇습니다. 흑마법사들 공격받기 전 우리 부족이 루미엘님을 도와 왕국을 통치했지요.”“모두 멸족된 게 아니었습니까?”“숲을 지키며 루미엘님 환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루미엘.신의 피를 가진 완벽한 통치자.예언대로라면 은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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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흑마법사의 습격
누군가의 손이 아이 목덜미를 슬쩍 훑고 지나갔다.인간의 형체가 아닌 괴물.차원 회랑에서 본 그자였다.희귀한 물체로부터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웅크려 앉았다.“저리 가거라. 신의 법에 따라 루미엘님과 어머니를 이제부터 보호할 것이다.”그자는 숲의 경계를 맡은 소금쟁이 요정이라 했다.엘레나의 손짓 하나로 그는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다.채찍 맞은 상처에서 흐른 피가 옷을 적시며 아이의 강보까지 흥건했다.“루미엘님을 제게 주시지요.”“네?”“안심하십시오. 이분은 의원이십니다.”깊은 숲에 들어서며 더욱 짙어진 약초 냄새.나무를 엮어 만든 의원의 집은 생각보다 단출했다.말린 약초가 차곡히 채워진 선반.구석엔 물을 데우는 화로가 있었다.조심스레 아이를 둘러싼 천을 풀었다.아들도 온몸으로 탈출을 도운 듯 땀이 흥건했다.“루미엘님은 건강하십니다. 잘 보호하셨습니다.”의원 한마디에 긴장이 풀리며 주저앉았다.“감사합니다.”참았던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며 죽음의 끝에서 살았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의원은 아이를 깨끗한 흰옷으로 입힌 후 푹신한 침상에 올려놓았다.엘레나는 아이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이번엔 의원이 내게 다가왔다.그의 얼굴이 심각함으로 물들었다.“마리안 님, 상처가 아주 깊네요.”의원은 피에 젖은 옷을 벗기고 천으로 상처를 누른 후 약초를 붙였다.피가 멎어 가는 것을 확인하자 작은 사발을 내밀었다.“드세요.”따듯한 사발 속 달인 약은 씁쓸했지만, 어떤 꿀보다 달콤하게 느껴졌다.고개를 들자, 카일이 문에 기대 서 있었다.그의 손등에 굳은살과 겹겹이 얽혀 있던 상처는 신기하게도 깨끗해져 있었다.“덕분입니다. 당신이 나와 아이를 살려 주셨습니다.”카일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여기까지 온 건 신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난 그저 그분의 명령대로 루미엘님과 당신의 탈출을 도왔을 뿐입니다.”바깥에서 요란한 휘파람 소리가 울렸다.타는 냄새와 함께 연기가 밀려오자, 카일이 황급히 밖으로 나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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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지하 신전
제단 주위 돌에 새겨진 고대 문양이 하나둘 빛을 잃었다.“왕의 피를 이어받은 남아와 그 어미를 내어주면 조용히 가겠다.”“당장 나가거라. 그들은 신께 보호받는 자들이다.”모르가나는 커다란 검은 천을 펼쳐 나를 향해 돌진했다.뛰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아이 눈을 가리고 전속력으로 뛰었다.그가 불타는 나무를 내게 던졌다.불길이 내 앞에 떨어졌지만, 그 불을 밟고 미친 듯이 달렸다.발밑에서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옷자락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났다.“겨우 도망친 게 여기더냐? 더 멀리 내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갔어야지.”뒤따르는 그를 피해 달리다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졌다.“안돼! 또 내 아들을 잃을 수 없어.”다시 일어서자, 불길이 에워싸며 그 앞을 모르가나가 막아섰다.검은 천이 하늘을 가리며 우리를 덮쳤다.“마리안 님!”카일의 외침이었다.날아오른 그가 검은 천을 자른 후 모르가나를 공격했다.초인적인 힘을 다해 그곳을 빠져나올 때, 누군가 팔을 잡아당겼다.엘레나였다.“숲을 닫아라.”그녀의 마지막 외침과 함께 땅이 요동치며 숲의 문이 닫혔다.“카일! 카일과 전사들이 아직 저기 있어요.”카일과 루마레스 전사들은 숲의 문이 닫히는 순간에도 흑마법사들과 혈투를 벌였다.하지만.문이 닫히며 그들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보랏빛 연기가 나무 사이로 번지며 검은 재가 흩날렸다.“카일!”목이 찢어질 듯 외쳤지만,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이대로 그를 보내선 안 된다. 아직 은혜도 갚지 못했는데….’엘레나가 팔을 다시 세게 잡아끌었다.“지금은 그를 찾을 때가 아닙니다. 루미엘님을 지켜야 합니다. 숲의 문을 닫기 전 흑마법의 불길이 들어왔습니다.”그녀의 손끝은 놀랍도록 힘이 강했다.잔가지와 덩굴을 헤치며 숲의 깊숙한 심장부로 향했다.폭발음은 점점 더 가까워졌다.불길은 숲의 살점을 태우며 바람을 타고 번져왔다.“신의 제단으로 가야 해요. 그곳만이 안전합니다.”엘레나의 목소리는 급박했다.모두 엘레나를 따라 긴박하게 이동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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