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ching Jane

[서류 아직 안 왔어?]

전화기 너머 남자의 목소리가 점점 날카로워졌다.

“거의 다 왔어요.”

FH그룹 빌딩까지 고작 2킬로 남았지만, 앞 도로 공사 때문에 차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심지설은 창밖에 퍼붓는 장대비를 바라보다, 결국 이를 악물고 돈을 내고 차에서 내렸다.

외투를 벗어 서류봉투를 감싸 쥔 채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달렸다.

비는 지설의 얇은 옷을 무참히 적셨다.

‘내 꼴이 어떤지는 상관없어. 제발 일찍 도착하기만 하자.’

지금은 그 생각뿐이었다.

겨우 FH그룹 사옥 앞에 도착했지만, 경비가 지설을 막아섰다.

그녀가 온몸이 흠뻑 젖은 상태로 들어오면 바닥이 젖는다는 이유였다.

하는 수 없이 지설은 1층 데스크 여직원에게 부탁해 서류를 위로 올려보냈다.

그리고 부영민과 그의 비서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이미 도착했어요.]

하지만 아무런 답이 오지 않았다.

다른 한 명의 데스크 여직원이 지설을 훑어보았다.

평범한 옷차림을 본 그녀는 지설을 택배 기사쯤으로 생각한 듯 중얼거리며 따뜻한 물 한 컵을 건넸다.

“고생 많으세요.”

“감사합니다.”

물을 다 마신 지설은 조용히 자리를 뜨려 했다.

그때, 로비 중앙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FH그룹 대표, 그리고 지설의 남편, 부영민이었다.

그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순간, 지설은 무의식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대표님, 주유연 씨 차가 도로에서 고장 났다고 합니다. 이미 기사 보내드렸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영민은 핸드폰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유연이 전화 계속 안 받아. 다시 연락해 봐.”

“네.”

지설은 구석에서 그 대화를 들었다.

‘주유연? 돌아왔구나.’

영민은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지설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긴급회의’라며 서류를 당장 가져오라던 남자.

이제는 그 회의를 포기하고, 단숨에 첫사랑을 찾아가고 있었다.

‘난 뭐야... 이런 비까지 맞으면서 뛰어왔는데...’

영민은 끝내 자신을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지설은 얼굴에 흐르는 빗물을 거칠게 훔쳤다.

‘내가 참... 바보지.’

...

집으로 돌아온 지설은 젖은 옷을 갈아입고, 따뜻한 물을 한 잔 마신 뒤 시어머니 장경은 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왜, 지설아? 목소리가 좀 안 좋네. 감기 걸렸니?]

“아니에요.”

지설은 전화기를 꼭 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저... 영민 씨와 이혼하고 싶어요.”

짧지만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처음 어머니와 합의서에 사인했을 때, 기간이 3년이었죠. 이제 그 3년도 끝났고... 주유연 씨도 돌아왔잖아요.”

장 여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어. 변호사에게 이혼 서류 준비하라고 하마. 그리고 약속했던 전원주택도 곧 네 명의로 넘겨주마.]

지설은 장 여사가 제안한 경제적 보상을 거절하지 않았다.

“네. 감사합니다.”

...

3년 전, 지설은 막 대학을 졸업하고 한 악단과 계약해 음악의 꿈을 펼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집안 회사가 하루아침에 부도났다.

아버지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충격을 견디지 못한 어머니는 정신 질환이 재발했다.

높은 요양원 비용을 감당할 길이 없던 지설은 완전히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었다.

그때, 장경은 여사가 나타났다.

장 여사는 지설이 들어가려던 악단의 투자자 중 한 명이었고, 지설의 사정을 들은 뒤 도와줄 수 있다고 말했다.

단,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 부탁은...

FH그룹의 후계자이자 장경은 여사의 아들, 부영민과의 계약 결혼이었다.

영민은 교통사고로 두 다리를 다쳐 걸을 수 없었고, 그 충격 속에서 첫사랑 주유연마저 해외로 떠나버리자 집 안에 틀어박혀 스스로를 방치하고 있었다.

장 여사는 지설에게 영민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곁에서 도와달라고 했다.

“왜 하필 저예요?”

그때 장 여사는 웃으며 말했다.

“지설 씨가 영민이 첫사랑, 주유연이랑 닮았거든. 그리고... 둘 다 피아노 전공이잖니.”

그렇게 지설은 ‘대역’ 역할을 받아들였다.

악단 계약을 포기하고, 영민과 결혼해 함께 한집에서 생활했다.

그때부터 지설은 가사도우미처럼 영민의 일상과 식사를 챙기고, 영민의 불같은 성격을 참고, 재활 훈련에도 매일 동행했다.

6개월 전, 영민은 마침내 자유롭게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집을 나서자마자 한 일은... 주유연을 만나기 위해 G국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산 것이었다.

그 뒤로 매달 한 번씩, 영민은 G국에 갔다.

그곳에는 영민의 여동생 부라희도 있었다.

라희의 연락처를 가지고 있던 지설은 종종 시누이의 SNS에서 세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았다.

영민은 지설 앞에서는 한 번도 웃지 않았지만, 유연 옆에서는 입가에 미묘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또 그랜드 플로라 장미...’

사진 속, 유연의 손에 들린 꽃을 볼 때마다 눈이 시릴 정도로 아팠다.

매년 발렌타인데이마다 영민은 비서를 시켜 지설에게 그랜드 플로라 장미를 보냈다.

그때는 감동과 의문이 함께였다.

‘왜 하필 그랜드 플로라 장미일까...’

그러다 사진을 보고 알게 됐다. 그것은 유연이 좋아하는 꽃이었다.

영민이 정말로 주고 싶었던 사람은, 지설이 아닌 유연이었다.

지설은 그저 값싼 대역일 뿐이었다.

이제 유연이 돌아왔으니, 그 대역도 물러날 때가 된 것이다.

지설은 핸드폰을 들어 선배 소은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학 졸업 후 은화는 한 음악학원에서 강사로 일했고, 지금은 공동 대표가 되어 있었다.

지난 3년 동안 은화는 꾸준히 지설에게 학원에 오라고 제안했지만, 영민을 돌보느라 매번 거절해야 했다.

이제 떠날 결심을 한 이상, 지설에게도 새로운 직장이 필요했다.

전화를 들은 은화는 기뻐하며 말했다.

[잘됐다, 지설아! 나 진짜 네가 와주길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너 그렇게 젊은 나이에 결혼해서 집에만 있는 거, 솔직히 너무 아까웠어.]

3년 동안 공백이 있었는데도 은화가 선뜻 받아준다는 사실에, 지설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고마워요, 선배님. 곧 밥 살게요.”

[그래, 기다릴게.]

...

지설은 전화를 끊고, 자신의 물건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던 결혼사진을 꺼냈다.

사진 속, 자신과 영민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처음 지설이 장 여사의 소개로 영민을 돌보기 시작했을 무렵, 그는 지설을 대놓고 밀어냈다. 결혼은커녕, 같은 공간에 숨 쉬는 것조차 불편해했다.

결국, 영민은 여러 차례 죽음을 선택하려 했고, 그때마다 지설이 막아섰다.

수없이 잠 못 이루는 밤, 지설은 영민 곁을 지켰다.

수면에 도움 되는 아로마와 음악을 준비해 주기도 했다.

그가 아무리 욕을 하고, 손찌검해도 지설은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영민이 결국 두 사람의 결혼을 받아들였다.

신혼 초, 그는 놀라울 만큼 다정했다.

그 시절의 지설은... 약간이나마 영민을 좋아했다.

‘저 사람이 영원히 이렇게만 대해준다면...’

‘설령 평생 휠체어를 타야 해도, 나는 곁을 지킬 거야.’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라희를 통해 들은 그 진실.

영민이 결혼을 결심한 이유는 유연이 다른 남자와 사귄다는 소식을 듣고 충동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내 마음이... 이렇게 우스운 거였구나.’

이제 계약 결혼 기간도 끝났다.

지설이 떠날 때 온 것이다.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닌 남자... 애초에 계약으로 묶인 결혼...’

‘버리면... 그냥 버리는 거지.’

3년의 청춘을 내어주고 도심 한가운데의 전원주택을 손에 넣었으니... 그 정도면 충분히 값을 치른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