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럽게 나타난 공주 앞에서 여섯 명의 하녀는 공포에 질려 몸을 떨기 시작했다.“방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말해 봐.”이홍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하녀들을 향해 추궁했다.“공주님. 저희는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공주에 관해 말한 소녀는 두려움에 떨며 대답했다.“방금 너희가 무슨 얘기하는지 똑똑히 들었는데도, 아직도 잡아떼겠다는 거냐? 나를 화나게 해서 모두 벌받고 싶다는 거야?” 이홍연은 목소리를 높이며 날카롭게 말했다.그 말에 하녀들은 즉시 겁에 질렸다.“공주님, 제발 용서해 주세요! 제 입이 방정이었어요. 제가 잘못 말했습니다. 공주님, 제발 살려 주세요!” 동그란 얼굴의 소녀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이홍연에게 빌었다.“잘못 말했다고? 무슨 말을 잘못했는지 말해 봐.” 이홍연이 물었다.하녀는 겁에 질려 입을 우물쭈물하며 도무지 말을 꺼내지 못했다.“걱정 하지마. 네가 솔직히 말하면 절대 너를 나무라지 않을 거야.”이홍연은 겁먹은 소녀를 달래듯 말했다.이홍연의 말에 용기를 얻은 하녀는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제 입이 방정이었습니다. 공주님을 연애에 푹 빠진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뭐? 내가 연애에 빠진 사람이라고?”그 말을 듣고 이홍연은 갑자기 배를 잡고 크게 웃기 시작했다.하녀들은 공주가 화내기는커녕 웃음을 참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어리둥절했다.공주는 눈물을 흘릴 정도로 웃으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뒤로 젖혔다.한참을 웃고 난 후 이홍연이 말했다. “세상에, 내가 연애에 빠졌다고 들은 건 이번이 처음이야!”그 말에 하녀들은 몸을 움찔했다.“하지만 너희 말이 맞아. 난 정말 사랑에 빠진 사람이 맞아.”이홍연은 다시 한 마디 덧붙였다.하녀들은 공주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그저 긴장한 채 서 있었다.하지만 이홍연은 전혀 화내는 기색 없이 말했다.“인제 그만 무릎 꿇고 일어나. 너희에게 화내지 않을 거야. 너희 말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확실히 사
이홍연은 기분 좋게 차에서 주도와 함께 윤구주를 찾아가고 있었다. 앞좌석에 앉은 택시 기사는 나이가 사십 대쯤 되어 보이는 기름진 중년 남자였다.한 손으로는 운전하고, 다른 손으로는 휴대폰을 들고 짧은 동영상을 보고 있었다.“와, 이게 뭐야? 저 유명한 여자 연예인이 남자친구 스캔들 때문에 연예계를 떠났다고? 정말 웃기네”그 중년 기사는 혼잣말하며 비꼬듯 말했다.“두 분, 요즘 연예계 소식 좀 보고 계시는가요?”중년 남자가 갑자기 뒤를 돌아 이홍연과 주도에게 물었다.“저희와 한 말인가요?"이홍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렇습니다. 손님. 요즘 연예계는 정말 말도 안 되는 뉴스로 가득해요. 국제적인 대스타 은설아가 어떤 남자랑 공개적으로 포옹한 사진이 찍혔어요. 지금은 은설아가 그 평범한 남자 때문에 연예계를 떠났다는 소식까지 나온 걸 보셨어요?”그 말을 들은 이홍연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이홍연은 화진의 여섯 번째 공주였기에, 여자 연예인과 배우 같은 사람들은 그의 눈에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게다가, 이홍연은 애초에 연예계 같은 혼란스러운 세계에는 관심조차 없었다.“생각해 보세요. 돈도 많고 얼굴도 예쁜 국제적인 스타가 어떻게 평범한 남자 하나 때문에 연예계를 떠나겠어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 남자가 그렇게 대단한가? 그렇게 가치 있는 사람일까요? 두 분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중년 기사는 계속 혼잣말을 늘어놓았다.원래 연예계 얘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이홍연은 기사가 점점 열을 올리는 말을 듣고 나서 궁금해졌다.“그 은설아라는 여자가 그렇게 유명한가요?”“그럼요, 당연히 유명하죠! 작년에만 해도 영화 세 편을 찍었고, 올해는 전국에서 60번 넘는 공연을 열었어요! 지금 아마도 연예계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스타일 거에요.”중년 남자는 은설아에 대해 말할 때, 눈에 띄게 설레는 기색을 보였다.이홍연은 그저 무심하게 듣고 다시 질문하였다.“그 미녀 스타 사진 좀 보여줄 수 있나요?” “손님 휴대폰으로
“세상에, 정말로 윤구주네요? 왜 사진 속에 있는 거죠?”주도도 그를 알아보았다.심상치 않음을 느낀 이홍연은 서둘러 스크린을 내렸고 사진 아래에 영상 링크가 있는 걸 보았다.링크를 클릭하자 은설아가 은퇴를 선언한 뒤 팬들과 기자들 앞에서 윤구주의 팔에 팔짱을 끼고 돈킹 호텔을 떠나는 모습이 보였다.그 광경을 본 순간 이홍연은 마음이 차게 식었다.바보라도 눈치챌 수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팔짱을 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이다.아래 댓글들을 본 이홍연은 넋이 나갔다.[은설아 씨 남자 친구가 사실은 저 사람이었군요!][얼굴은 꽤 잘생겼네요. 설마 제비는 아니겠죠?][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은설아 씨가 저 녀석에게 푹 빠졌을 리가 없죠!][정말 화가 나네요. 저 남자 대체 누구길래 우리에게서 은설아 씨를 빼앗아 간 거죠?]댓글들을 본 이홍연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해졌다.옆에 있던 주도는 이홍연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순간 어떻게 그녀를 위로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그는 화진의 여섯째 공주인 이홍연이 줄곧 윤구주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태화루에서 윤구주가 공공연히 거절했는데도 이홍연은 여전히 그를 사랑했다.그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막북에서 10년간 윤구주를 기다렸을 리도 없었다.그런데 윤구주가 여자 연예인과 만나고 있었다니, 누구라도 견딜 수 없을 것이다.이홍연은 애써 분노를 다스렸다.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계속해 다른 기사를 확인해 보았다.그중 한 기사에는 윤구주와 은설아가 돈킹 호텔 앞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사진 속 은설아는 윤구주의 품에 폭 안겨 있었고 윤구주는 두 팔을 벌리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그 사진을 본 이홍연은 더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윤구주! 이 망할 놈!”이홍연이 사납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그 목소리에 앞에서 운전을 하고 있던 중년 남성은 깜짝 놀라서 서둘러 고개를 돌려 물었다.“손님, 왜 그러세요?”“세워요! 당장
황성 공주저.수십 명의 하녀들이 전전긍긍한 상태로 문밖에 서서 안쪽에서 들려오는 물건이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몸을 흠칫 떨면서도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화를 내는 사람은 다름 아닌 화진의 여섯째 공주 이홍연이었기 때문이다.윤구주가 대스타 은설아와 만난다는 걸 알게 된 뒤로 이홍연은 완전히 폭발했다.그녀 입장에서는 오랫동안 진심을 다해 사랑했던 남자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된 건 배신과 다름없었다.이홍연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그녀는 오늘 윤구주를 찾아가서 그에게 자신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얘기해 줄 생각이었다.그러나 지금 그 모든 사랑이 증오로 변했다.“죽여버릴 거야! 반드시 죽여서 내게 진 빚을 모조리 갚게 할 거야!”분노에 찬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이때 이홍연은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공주님 왜 저러시지? 오늘 외출하실 때까지만 해도 괜찮지 않았어? 왜 갑자기 저렇게 돌변한 거지?”한 하녀가 두려움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분명 공주님이 좋아했던 그 남자 때문일 거야!”“그래?”“당연하지! 소문에 따르면 그 남자가 우리 화진 제일의 왕 구주왕이라고 해. 공주님이 막북에서 10년간 지내셨던 것도 그 남자 때문이라고 들었어. 그런데 그 남자가 지금 다른 여자랑 만나고 있다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공주님이 화가 나셨지!”“휴, 공주님이 슬퍼하실 만하네. 구주왕 사실은 나쁜 놈이었잖아?”하녀들은 작은 목소리로 의논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서 이홍연을 위로하거나 설득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공주저 안.이홍연은 마치 화가 난 암사자처럼 난폭해졌다.그녀는 두 눈이 벌겠는데 너무 오래 울어서 눈가가 퉁퉁 부어있었다.그러나 그것보다 더욱 무시무시한 것은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증오심이었다.그 증오심으로 인해 이홍연은 이성을 잃었다.“죽여버릴 거야. 윤구주 그 빌어먹을 놈을 죽여서 내게 진 빚을 갚게 할 거야!”이홍연은 악랄한 표정으로 또박또박 말했다.“주도! 지금 당장 가서 윤구주를 죽여버려
내각대학사 은성구의 곁에는 위풍당당한 젊은 청년이 무릎 꿇고 있었다.남자는 검은색 비단옷을 입고 있었고 허리춤에는 옥패를 하나 달고 있었는데 남다른 분위기 때문에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내각의 여덟 장로 중 수장인 은성구가 데려온 비단옷을 입은 소년이 대체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금란 대전 아래 무릎을 꿇고 있는 건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이때 이홍연이 빨개진 눈으로 씩씩거리면서 다가왔다.오늘 그녀는 단단히 화가 났다.그것은 전부 윤구주 때문이었다.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이홍연은 아버지를 찾아가서 대신 복수해달라고 할 생각이었다.이홍연이 금란 대전 아래에 도착하자마자 내각의 여덟 장로 중 한 명인 은성구가 이홍연을 발견했다.“공주님을 뵙습니다!”은성구는 서둘러 예를 갖추었다.은성구가 외치자 그의 곁에 있던 청년의 시선 또한 이홍연에게로 향했다.이홍연의 아름다운 모습을 본 순간 청년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는 깜짝 놀라서 저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했다.‘이분이 바로 공주님이셨군!’이홍연은 은성구의 목소리를 듣고는 차가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은성구 대학사, 왜 여기서 무릎 꿇고 있는 거죠?”“공주님, 저희는 국주님을 뵈러 왔습니다.”“어머, 여러분도 우리 아버지를 보러 오신 건가요?”“네!”“그렇다면 저와 함께 들어가요.”내각대학사 은성구는 그 말을 듣고 살짝 당황했다. 그가 입을 열려는데 금란 대전 안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나왔다.그 사람은 환관 옷을 입고 있었고 흰 수염이 있었다.그는 아주 활력 넘치는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쉽게 나이를 추측할 수가 없었다.그가 바로 황성 최고의 고수라고 불리는 내시 총관 한진모였다.한진모는 모습을 드러내더니 싱긋 웃으면서 먼저 이홍연을 바라보았다.“공주님께서 오셨군요. 공주님을 뵙습니다!”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살짝 숙였다.이홍연은 싸늘한 눈빛으로 한진모를 힐끗 보았다.“우리 아버지는요? 전 아버지를 뵈어야겠어요!”이홍연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한진모가 대답했다.“공주님,
제멋대로인 이홍연은 곧장 금란 대전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이홍연이 억지로 금란 대전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홍연아, 누가 여기서 그렇게 말썽을 부리래?”그 목소리와 함께 경국지색의 전통 복식 차림의 여성이 갑자기 금란 대전 위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그녀의 양쪽에는 두 명의 남다른 분위기를 띤 궁녀가 있었다.“어머니!”이홍연은 아름다운 여성을 본 순간 서둘러 그녀를 불렀다.“희빈마마를 뵙습니다!”“희빈마마를 뵙습니다!”아름다운 여성이 걸어 나오자 내각의 여덟 장로의 수장인 은성구를 포함한 모든 이들이 서둘러 그녀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그 여성은 화진의 희빈마마이자 이홍연의 친어머니였다.희빈은 모습을 드러낸 뒤 손을 살짝 저었다.“다들 일어나세요.”“감사합니다, 희빈마마!”사람들이 일어났다.“홍연아, 누가 여기서 소란을 일으키래? 국주님께서 요 며칠 정양 중이시라는 걸 모르는 거니?”희빈은 쌀쌀맞은 목소리로 이홍연을 혼냈다.혼이 난 이홍연은 눈이 빨개져서 말했다.“어머니, 전 그저 아버지를 뵙고 싶은 것뿐이에요. 아버지가 제 화풀이를 해줬으면...”“그만! 너희 아버지가 그렇게 한가한 분이신 줄 아니?”희빈이 또 혼을 내자 이홍연은 그제야 풀이 죽어서 말했다.“죄송해요. 잘못했어요.”“잘못한 걸 알았으면 여기서 소란 일으키지 말고 얼른 돌아가. 너희 아버지께서 이 일을 아신다면 또 외출을 금지당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자, 이만 다들 돌아가시죠.”희빈은 싸늘하게 말한 뒤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희빈이 떠난 뒤 이홍연은 다시금 눈시울을 붉혔다.어쩔 수 없었다.어머니의 말은 반드시 들어야 했다.눈물을 닦은 뒤 이홍연은 슬퍼하면서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윤구주, 이 빌어먹을 자식. 두고 봐.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홍연은 그렇게 말한 뒤 그곳을 떠났다.이홍연이 금란 대전을 떠난 뒤 은성구의 곁에 서 있던 검은색 비단옷을 입은 청년이 참지 못하고 질문을 했다.“어르신, 저분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정말 기대가 되네요! 저희 마씨 일가는 화진에서 수천 년간 존재해 왔죠. 그런데 감히 우리 마씨 일가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 나타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마동한은 그렇게 말하면서 눈빛이 섬뜩해졌다.“어르신, 이번에 제자백가에서 회의를 할 겁니다. 현재 배씨 가문, 반씨 일가, 그리고 다른 몇몇 가문에서는 이미 노룡산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어르신께서도 함께 가시죠! 세가가 궐기하기 위해서는 내각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니까요. 그래야만 대업을 이룰 수 있지 않겠습니까?”마동한은 미소 띤 얼굴로 품 안에서 비단 주머니를 하나 꺼내서 은성구에게 건넸다.“이건 저희 마씨 일가의 조상님께서 어르신에게 감사의 의미로 전하는 물건입니다. 부디 받아주셨으면 합니다!”은성구는 비단 주머니를 건네받았고 안을 들여다보니 몹시 반짝이는 야명주가 있었다.야명주들은 모두 엄지손톱만큼 컸고 총 십여 개가 들어있었다.엄청난 값어치를 자랑하는 야명주를 본 은성구는 웃으며 말했다.“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서둘러 주머니를 품 안에 넣었다.“저희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죠. 하지만 어르신, 조금 전에 여섯째 공주님께서 윤구주의 이름을 되뇌던 것 같은데 설마 두 사람 사이에 모종의 연관이 있는 겁니까?”마동한은 갑자기 이홍연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면서 물었다.“맞아요. 솔직히 얘기하자면 저 제멋대로인 공주님은 윤구주와 소꿉친구였어요. 게다가 어렸을 때 공주님께서는 줄곧 윤씨 일가에서 지내셨죠.”은성구가 말했다.“그래요?”그 말을 듣자 마동한의 표정이 살짝 달라졌다.“그렇다면 여섯째 공주님은 윤구주와 연인 관계인 건가요?”마동한이 다시 물었다.“예전에는 그랬지만... 태화루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공주님은 윤구주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렸어요.”은성구는 계속해 말했다.“태화루요?”“네. 그때 태화루에서 마씨 일가 사람이 죽임당했죠. 그날은...”은성구는 윤구주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이홍연을 거절한 사실을 전부 얘기했다.
황성, 금란 대전.이홍연과 은성구, 그리고 제자백가 중 마씨 일가의 마동한이 떠난 뒤 한진모가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인 채 휘황찬란한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그곳은 화진의 대웅전으로 국주가 대신들과 함께 정무를 논하는 곳이었다.이 순간 대웅전의 가장 안쪽에는 용포를 입은 건장한 남자가 있었다.그는 뒷짐을 지고 서 있었는데 엄청난 권력을 거머쥔 제왕의 기개가 그에게서 느껴졌다.그의 앞에는 세계 지도 한 장이 있었다.그 지도는 10국의 전략적 지도였다.“국주님을 뵙습니다!”한진모는 안으로 들어간 뒤 눈앞의 용포를 입은 국주를 향해 정중히 예를 갖췄다.뒷짐을 지고 있던 국주는 몸을 돌리지 않았다.그는 10국을 빤히 바라보면서 말했다.“다들 간 것이냐?”“국주님, 전부 돌려보냈습니다.”한진모가 대답했다.그를 등지고 있던 국주는 몇 초간 침묵을 이어가다가 입을 열었다.“세가와 내각은 이미 연맹을 맺었겠지?”국주의 목소리는 두꺼우면서도 거칠었다.“제가 아는 바에 의하면 이미 연맹을 맺었습니다.”한진모가 대답했다.“우리 화진의 무도를 청소할 때가 왔구나.”국주는 천천히 말했다.그러나 그 말을 할 때 모든 걸 쓸어버릴 듯한 어마어마한 살기가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6년 전, 그 어린놈은 곤륜에서 무력으로 천하를 제압하고, 화진 무도의 3대 서열을 제압했었지. 마침내 올 게 왔구나.”국주의 목소리는 평온하면서도 위엄 넘쳤다.“진모 너는 그놈이 이번에도 혼자서 육합을 휩쓸고 문벌, 세가, 종문, 3대 전통 무술 서열을 제압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하느냐?”국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무게감 있는 얼굴에 짙은 이목구비, 위엄 넘치는 제왕의 기운을 띤 그가 바로 화진의 국주였다.황성 내 최고 실력자라 불리는 한진모는 허리를 숙인 채 대답했다.“제 추측을 말씀드려도 될지...”“괜찮다. 오늘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네게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편히 말해보거라.”국주는 천천히 말했다.그 말에 한진모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면서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
백호는 아직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어느덧 이백오십 계단까지 올라왔다. 이 단계부터는 실체화된 술법이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람, 불 번개와 같은 속성의 영기가 점점 강해졌다. 여기서부터는 육신 횡련의 수련자는 강력한 체질로 버티고 술도 재능이 뛰어난 수련자는 천지 영기를 다루는 능력으로 버텨야 했다. 한마디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갈리는 구간이었다. 어느 한 분야라도 특출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백호는 술도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강인한 육체 하나로 견디고 있었다.웅!성수의 피가 진동하며 백호의 몸을 지탱했다. 각종 속성의 영기가 몰아쳤지만 백호는 성수혈의 힘을 빌려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수련자에게 있어서 성수의 혈맥이나 법보 등은 모두 신체 외적인 재능으로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꼼수나 편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천 가지 변화와 만 가지 신통력이 있어도 결국 만법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법기든 혈맥이든 이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천지 영기를 이용한 술법도 결국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반작용을 맞게 된다. 따라서 수련의 길에는 애초에 편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성수 혈맥 같은 천지의 보물은 보통 사람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윤구주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이를 감당하는 건 백호 자신이었다. 성수 혈맥의 힘을 온전히 감당하며 백호는 결국 삼백 계단까지 올라섰다.계단의 꼭대기 근처에는 이미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이 여럿 서 있었다. 서요산 검종은 근대에 들어 삼백 계단을 넘는 인재가 드물었다. 최근 백 년 동안 삼백 계단을 넘은 사람이 고작 열 명 남짓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삼백여 계단에서 멈췄다. 그런데 지금 백호는 삼백이십 계단까지 올라선 것이다. 이 정도면 서요산 검종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한 성과였다.이런 제자가 나타난다면 종문 전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서요산의 진인들까
“한 사람의 품성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그렇게 많은 수련자를 키워낸다면 결국 천하의 마인을 직접 만들어 내는 꼴이 아니겠어?”청현이 바로 그 실패한 예다. 서요산 검종 종주가 청현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나머지 그의 인성을 무시하고 양성한 끝에 결국 역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그럼 저하 서요산에 입문한 무술 무인들은 평균적으로 몇 계단까지 오르는지 아십니까?” 백호가 호기심에 물었다. 윤구주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무술 무인의 정확한 데이터는 모르지만 검종 종주와 잡담할 때 들어보니 검종 제자들의 수준이 갈수록 떨어져서 천 년 전만 해도 평균 삼백 계단 정도였는데 요즘엔 백 계단도 못 오른다고 하더구나. 가끔 삼백 계단을 오르는 자라도 나오면 검종 전체가 몇 년은 떠들썩할 정도라고 했어.”“구백구십구 계단까지 있는 시험인데 천 년 전 전성기에도 겨우 삼백 계단이요?” 백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요산 검종의 수준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때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야?” 윤구주는 흥미롭게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는 당장이라도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윤구주의 허락을 구한 뒤 바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계단 두 계단... 오십 계단까지는 아무 어려움도 없었다. 백호는 오십 계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서요산 검종이 별것 아니라며 놀려댔다. 하지만 육십 계단쯤 올랐을 때 처음으로 압력을 느꼈다. 마치 몸 위에 작은 차 한 대가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백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백 계단에 도달하자 압력이 갑자기 커졌다. 등에 작은 승용차 대신 소형 트럭이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백호의 한계에도 가지 못했다.“근래 사람들의 평균이 백 계단도 못 넘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예전의 무인 횡련은 황제도 오를 수 있었지만 요즘 무인 횡련은 죽어라 노력해도 소형 트럭 하나 못 버티는 수준이니 말입니다.”백호는 농담을 던지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
전에 임정설은 구오 지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힘쓰며 수모를 견뎌내고 살아남으려 했다.하지만 이제 황제가 된 그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그 탓에 이번 관문 앞에서 그는 망설였다.살아 있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었다.죽음을 마음에 품은 자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관문이었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청해만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황제가 되면 곤륜 구역에서 최고 경지에 도달하는 건데.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왜 죽음을 택하려는 거지?’“저하, 국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합니다. 저하도 사랑하던 이에게 배신당했어도 결국 극복해 나갔잖습니까.”백호도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여전히 국주보다는 왕이 더 낫다고 여겼다.“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느냐.” 윤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백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는 어리숙하고 말솜씨도 없기에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내가 문아름에게 배신당한 건 억울한 일이지만 나는 그녀에게 잘못한 게 없다. 오히려 그녀가 날 배신한 거다. 하지만 국주는 그 반대였지. 그가 그녀를 저버린 거야. 정이 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지혜가 지나치면 오히려 상처를 입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쓰라린 후회는 가진 뒤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생사를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윤구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소채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도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느꼈다.“그럼 복수하면 되지 않나요?” 백호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이때 청해가 눈치를 채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상대가 너무 강해서 못 이기는 거지. 황제에 오르기 전까진 제대로 맞붙을 힘도 안 돼. 오르고 나서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하고.”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 말이 맞았다.“그럼 우리가 국주님 대신 복수해 드리면 되잖아요? 국주님은 제 왕이기도 하지만 제 윗사람이기도 하잖아요.”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하하! 만약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솔직하다면 이런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
네 사람은 비석을 지나자마자 환각의 전법에 부딪혔다. 이 전법은 우연히 들어오거나 경고를 무시한 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결국 서요산 밖으로 나가게 만드는 것이었다.의지력으로 환각의 전법을 통과하면 다음 전법이 기다리고 있었다.당연히 네 사람에게 환각의 전법은 통하지 않았다. 윤구주와 임정설은 물론, 백호와 청해도 곤륜에서 강자로 존경받는 존재들이었다.다음은 섭혼 전법이었다.전법에 들어가기 전부터 하늘을 찌를듯한 원한의 기운이 밀려왔다.그 기운을 느낀 임정설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수년간 왕궁에서 비술을 연구해서 알아본 건데. 이곳은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진 거야. 반경 수천 리 이내의 원한의 기운이 모두 이곳에 모여있어. 내 치하에서도 억울하게 죽은 자들이 이렇게나 많았구나. 그걸 내가 몰랐다니.”그는 깊은 자책에 빠졌다.“국주님, 인간이 있는 곳에는 분쟁은 끝나지 않습니다. 근대에 들어 큰 전쟁은 사라졌지만 소규모 충돌은 끊이지 않았죠.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게다가 이곳에 모여진 원한의 기운은 억울한 죽음뿐만 아니라 극형을 받은 흉악범들의 원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은 죽어도 사라지지 않죠. 사랑 때문에 미워하고, 미움 때문에 미쳐버리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윤구주의 말을 듣고 임정설이 한마디 물었다.“구주야, 너는 문아름을 미워하지 않느냐?”문아름의 이름을 들은 윤구주의 눈에서 짙은 살기가 번뜩였다.“당연히 미워하죠. 저 윤구주는 순수하게 사랑하고 미워하는 인간입니다. 사랑은 사랑, 증오는 증오에요. 그녀를 위해 변명 같은 건 하지 않겠습니다. 문아름이 저를 배신했으니 저에게 당연히 미워할 권리가 있죠. 하지만 문아름을 사랑한 걸 후회하지는 않아요. 문아름이 제게 사랑이 무엇인지, 인심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었으니깐요. 가려는 길이 다르면 미래를 함께할 수 없죠. 저희는 처음부터 다른 길을 걸었어요. 저희의 만남 자체가 잘못이었지만 문아름이 저를 구주왕으로 만든 것도 사실이죠. 그리고 제가 문아름을
“저하와 생사를 함께할 수 있다니. 그건 제 영광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만약 전하와 제가 정말로 서요산에서 죽게 되면 청룡이 돌아온다 해도 성수가 한자리 비게 되는 건데 그분을 어떻게 소환하시렵니까?”백호가 의혹이 담긴 표정으로 물었다.윤구주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그걸 설명하려면 너를 실험체로 삶고 실험을 진행할 때부터 얘기해야 해. 정확히 말하면 청룡, 현모, 주작의 몸속에는 네 피가 흐르고 있어. 네가 성수의 피를 융합한 첫 번째 수련자야. 예로부터 지금까지 오직 너만이 진정한 융합에 성공했지. 네 피를 빌려 그들에게 성수의 정수를 주입했던 거야.”“백호,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든 거다. 네가 이런 괴물 같은 모습이 된 건 전부 내 탓이야. 그러니 나를 원망해도 좋아.”백호는 웃으며 대답했다.“제가 어떻게 저하를 원망하겠습니까? 게다가 당시 저하께서는 제 목숨을 구하려고 그러신 거였잖아요. 제가 고마워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첫 번째로 융합에 성공한 수련자는 제가 아닐건데요? 저하께서도 성수의 피를 다루시지 않았습니까?”그 말을 들은 윤구주가 고개를 저었다.“아니. 달라. 그건 그냥 성수의 피를 통제하는 것 뿐이야. 진짜 융합했으면 나도 네 꼴이 됐을 거야.”백호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됐다. 옛날얘기는 그만하고 얼른 서요산으로 떠날 준비나 해.”며칠 후, 윤구주는 임정설 국주, 청해, 백호와 함께 서요산으로 향했다.비 오는 밤, 연기를 뿜는 수송기가 짙은 구름을 뚫고 산을 향해 돌진했다.비행기가 산에 충돌하기 직전, 수많은 바람의 부적이 나타나 비행기를 강제로 선회시켜 간신히 산기슭에 착륙했다.비행기가 막 착륙하자 비행기 문이 누군가의 주먹 한 방에 박살 났다. 멀미로 비틀거리던 청해가 나오더니 몸을 움츠린 채 구토를 멈추지 못했다. 뒤이어 내린 임정설도 배를 움켜쥐며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억지로 참는 모습이었다.그들과 달리 윤구주는 멀쩡한 상태로 내려와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백호의 질문에 윤구주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네가 진짜라 믿는다면 그것은 진짜야. 초심을 잃지 않아야 길이 열리는 법이지.”이 말은 백호에게만이 아닌 자신에게도 하는 것이었다.서울의 위기는 해결되었지만 윤구주는 이 모든 것이 문씨 가문의 그 여자의 계획 중 하나임을 알고 있었다.“국주님, 이제 서요산으로 갈 때입니다.”그가 임정설을 바라보며 말했다.“서요산을 지키려는 거니? 마인이 나타날 거란 말이야?”임정설이 눈살을 찌푸렸다. 진요탑 아래에는 천년 동안 갇힌 수많은 마인들이 있었다.“맞아요. 서요산의 지맥 영기가 거의 고갈되었습니다. 만약 진요탑이 무너지면 큰 재앙이 찾아올 것입니다.”윤구주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요탑이 붕괴하여 마인들이 쏟아져 나오면 윤구주라도 그들을 처리하기 힘들 것이다.“좋아. 내가 같이 가주마. 이 늦은 재앙은 언젠가 닥칠 운명이니 우리가 짊어져야 해. 지금의 희생은 후손들을 위한 것이야.”임정설의 눈빛이 강철처럼 단단해졌다. 화진을 위해, 백성들을 위해 그는 언제든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윤구주는 현모에게 연락을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뭐라고요? 저하께서 서요산으로 가신다고요? 그렇다면 저희도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현모와 주작의 목소리에서 초조함이 느껴졌다. 특히 주작은 서요산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천년 동안 축적된 재앙을 겨우 수십 년 수련한 윤구주 혼자서 떠맡기엔 버거웠다.“괜찮아. 너희에게는 따로 시킬 일이 있어. 내가 서요산에 있는 동안 너희는 국경을 지켜줘. 청룡의 행방은 잠시 접어두고 내가 시킨 일에 몰두해. 난 문아름을 그 여자를 잘 알고 있어. 문아름은 일이 내 뜻대로 되게 놔두지 않을 거야.”“추가로 부탁이 있는데 만약 내가 전사한다면 그때쯤 청룡이 모습을 드러낼 거야. 청룡을 불러내는 게 복인지 화인지는 나도 알 수 없지만. 그 상황이 오면 너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거야. 문아름이 결정을 내리겠지. 그러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둬.”유언을 남기는 듯한
‘헐, 대박.’진동왕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윤구주를 신처럼 떠받들었다.‘이게 진짜 신이지. 곤륜에 있는 그 자식들은 모두 가짜 신들이었어. 허위적이기 그지없지.’오늘 밤 그는 여러 강자의 싸움을 직접 목격하고 강자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문경우도 아주 강했지만 윤구주가 나타나자 문경우는 도망조차 제대로 치지 못하고 영혼마저 산산조각이 났다. 윤구주의 술법에 의해 영혼도 남기지 못하고 진정한 죽음을 맞이했다.승리는 결국 화진에게 돌아갔다. 화진을 무너뜨리려는 역적들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윤구주는 자신의 힘으로 화진의 막강한 실력을 전 세계에 알렸다.문경우를 처단한 윤구주는 즉시 임정설의 치료에 돌입했다.“짐은 별일 없으니 먼저 왕숙과 네 친구를 치료해줘라.”임정설이 임성진과 청해를 가리키며 말했다.청해는 이미 정신을 차렸다. 비록 상처가 심해 반쯤 죽은 상태였지만 화진 국주에게 인정받은 첫 순간이었다. 묘한 영예감이 그의 마음을 꽉 채우며 날아갈 듯 기뻤다.“이 두 사람 모두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은 아닙니다. 오히려 국주님이 더 위험하십니다. 경지를 무리하게 넘어서셨고 섭혼번 아래서 정기를 너무 많이 잃으셨습니다. 지금 국주님의 기운이 안정하지 않으니 제 도움이 없다면 폭주 할수도 있어요. 그때가 되면 저도 방법이 없습니다.”윤구주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임정설은 결국 윤구주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도 자신의 몸 상태를 알고 있었다. 윤구주의 치료를 거부한 이유는 목숨을 내던질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황자급 경지에 오르긴 했지만 예전보다 죽음에 대한 집착이 강해져 있었다. 윤구주는 임정설에게 풀지 못한 원한이 있음을 눈치채고 치료를 해주며 화진으로 압박했다.“국주님께서 직접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는 걸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화진에게는 국주님이 필요합니다. 국주님은 30년 동안 화진을 지켜오셨잖아요. 지금 승부가 달린 이 중요한 시점에서 사적인 감정에 휘둘리시면 안 됩니다.”임정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