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구주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자 윤창현은 재빨리 나서서 분위기를 풀려고 했다.“구주야, 형님도 좋은 마음에 온 거지. 그러니까 그냥 참아줘.”“맞아, 구주야!”옆에 있던 윤정석이 거들었다.그러나 윤구주는 여전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전 분명 말했어요. 제가 떠나는 그날부터 전 윤씨 일가와 아무와 관련도 없다고요.”“그건...”윤창현은 순간 머리털이 쭈뼛 섰다.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16년 전, 윤신우가 윤구주 모자를 윤씨 일가에서 쫓아낸 것이 어린 윤구주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었는지를 말이다.특히 윤구주의 어머니는 섣달그믐날에 병 때문에 돌아가셨다.그리고 그전까지 아버지인 윤신우는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그래서 윤구주는 윤신우가, 윤씨 일가가 미웠다.그는 윤씨 일가 때문에 어머니가 죽은 거로 생각했다.윤창현이 뭐라고 더 말하려는데 윤신우가 갑자기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둘째야, 셋째야, 너희는 일단 물러나. 우리 부자 단둘이 얘기를 나눠야겠다.”윤창현과 윤정석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윤신우와 윤구주를 바라보았다.결국 두 사람은 한숨을 쉰 뒤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렇게 두 사람은 떠났다.조용한 숲속, 그곳에는 윤신우 부자만 남았다.윤구주는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그러나 반대로 윤신우는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윤구주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동안 네가 날 미워한 거, 다 이해한다. 난 확실히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어. 너희 모자에게 잘못한 게 너무 많지.”윤신우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더니 시선을 들어 먼 곳을 바라보면서 유유히 말했다.윤구주가 말했다.“저한테 그런 말 할 필요 없어요. 당신이 아무리 후회해도 이미 일어난 일은 바뀌지 않으니까요.”“나도 알아.”윤신우는 한숨을 쉬었다.“그래서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아버지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뿐이야.”윤신우는 그렇게 말한 뒤 윤구주를 바라보았다.‘하, 책임?’윤구주는 갑자기 코웃음을 쳤다.“
윤구주는 그를 보지 않았다.그리고 그와 인사를 나누지도 않았다.그는 마치 바위처럼 그곳에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산속에서 바람이 불어와 윤구주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흩날렸다.그는 고개를 숙여 싸늘한 시선으로 제4나사염군의 시체를 보았다.그리고 곧 그의 눈동자에서 금빛 불꽃 화염이 뿜어졌다.쿵!귀신 가면을 쓴 나사염군의 시체는 곧 불에 타서 재가 되었다.유명전 제4염군의 시체가 재가 돼버린 뒤 윤구주는 차갑게 등을 돌려 자리를 떴다....노룡산 대전이 끝났다.유명한 관광지였는데 이제 산꼭대기는 안타깝게도 폐허가 되어버렸다.천 년 가까이 자리를 지켰던 적성루조차 완전히 무너져 내려서 처참한 몰골이었다.폐허 속에서 윤구주의 형제들은 웃는 얼굴로 대화를 나누며 그곳에 서 있었다.공주인 이홍연은 옆에 서서 묵묵히 윤구주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오늘 사실 그녀는 아주 모순적이었다.그녀는 사실 화풀이를 하려고 윤구주를 상대할 생각이었는데 윤구주가 정말 위험해질 것 같자 곧바로 후회되었다.그런데 지금 윤구주가 무사한 걸 보니 또 저도 모르게 망설였다.그녀는 윤구주를 십여 년 동안 힘겹게 기다렸는데, 윤구주는 정작 여자 연예인과 서로 끌어안고 있었으니 그걸 생각하면 속이 뒤집혔다.이때 한 목소리가 그녀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안녕하세요, 누나!”이홍연은 처음 누나라고 불려서 살짝 놀라 고개를 돌려 보았다. 곧 대머리인 스님이 뒤에 서 있는 게 보였다.“넌 누구야? 아까 날 뭐라고 부른 거야?”이홍연은 놀란 표정으로 뒤에 있던 스님에게 물었다.“전 공수이라고 해요. 법명은 나최고예요!”“풉!”이홍연은 그 말을 듣더니 곧바로 공수이의 얼굴에 대고 웃음을 터뜨렸다.“하하하하, 나최고라고? 날 웃겨 죽일 생각인 거야? 세상에 그렇게 웃긴 법명이 어디 있어?”이홍연은 배를 잡고 깔깔 웃었지만 그 모습은 요정처럼 아주 아름다웠다.“진짜예요! 전 정말 공수이예요!”꼬마 스님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이홍연은 억지로 웃음을 참으
공수이는 아주 똑똑했다.이홍연의 말을 들은 그는 곧바로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알아냈다.그는 반질반질한 머리를 긁적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이 공주님 진심으로 우리 형님을 좋아하는 것 같네. 날 통해서 뭔가 알아내려는 게 분명해. 안 돼! 나 공수이는 절대 형님에게 미안할 짓을 할 수 없어. 난 꼭 형님에게 도움이 돼서 가장 훌륭한 동생이 될 거야!’그런 생각들을 한 뒤 공수이는 곧바로 똑똑하게 말했다.“공주님, 틀리셨어요. 우리 형님 곁에는 비록 미녀들이 아주 많지만 우리 형님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공주님인 것 같아요!”‘뭐라고?’“윤구주가 날 가장 좋아한다고?”이홍연의 아름다운 눈이 커졌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네, 맞아요! 공주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우리 형님은 공주님을 굉장히 신경 쓰세요. 저번에 잠을 잘 때 공주님의 이름을 중얼거리기도 했거든요. 심지어 저희에게 앞으로 공주님이 형수님이 될 거라고 말했어요!”공수이는 계속해서 거짓말을 지어냈다.형수님이라는 호칭을 처음 듣게 된 이홍연은 순간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동시에 꿀을 잔뜩 먹은 것처럼 달콤한 느낌이 마음속을 꽉 채웠다.“진짜? 윤구주가 그런 말을 했었다고?”이홍연은 아주 기쁜 얼굴로 물었다.“네!”공수이는 아주 적극적으로 대답했다.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계속해 말했다.“그 외에도 형님은 공주님이 자기 소꿉친구라고, 둘도 없는 존재라고 했어요! 참, 그리고 형님은 공주님에게 사랑의 증표를 전달하라고 했어요!”이홍연은 그 순간 깜짝 놀랐다.그녀는 아름다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흥분해서 말했다.“사랑의 증표도 있다고?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공주님, 전 출가한 사람이에요. 절대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는 제가 왜 공주님을 속이겠어요? 잠시만요. 지금 당장 사랑의 증표를 건네줄게요!”공수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서둘러 자신의 백보 가방을 뒤졌다.그는 안에 손을 넣고 한참을 휘적였고 잠시 뒤 수정 반지 하나를 안에서 꺼냈다.“공주님, 받
황실의 여섯째 공주는 공수이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뒤 마음속 그늘이 전부 사라졌다.그녀는 아주 기쁘고 또 행복했다.윤구주가 자신을 무척 신경 쓰고 있었다는 것에 기뻤고, 윤구주가 자신에게 사랑의 증표까지 주었다는 사실에 행복했다.공수이가 이홍연을 속이고 있을 때 정태웅이 엉덩이를 씰룩거리면서 달려왔다.“수이 동생, 공주님과 무슨 얘기를 나눈 거야?”공수이는 즐거움 가득한 얼굴의 이홍연을 바라보면서 깊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저 우리 형님을 살짝 도와준 것뿐이에요.”“도와줬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정태웅은 아리송했고 공수이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응? 수이 동생, 공주님이 들고 있는 반지, 전에 수이 동생이 말했던 그 물건을 저장할 수 있는 수납 반지 아냐? 그걸 왜 공주님에게 준 거야? 젠장, 나한테 주겠다고 약속했었잖아!”정태웅은 이때 갑자기 이홍연이 들고 있는 반지를 보았다.“쉿! 어서 조용히 해요!”정태웅의 말을 들은 공수이는 서둘러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왜? 아니야?”정태웅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상태였다.공수이는 서둘러 정태웅을 한쪽으로 끌고 가서 말했다.“형님은 몰라요. 제가 저 수납 반지를 공주님에게 드린 건 전부 구주 형님을 위해서예요!”“응? 그게 무슨 뜻이야?”정태웅은 계속 물었다.공수이는 조금 전 이홍연에게 거짓말을 한 사실을 전부 털어놓았고 정태웅은 공수이의 말을 듣더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앞에 있는 천진난만해 보이는 꼬마 스님을 보더니 그의 어깨를 힘껏 두드렸다.“세상에, 수이 동생. 수이 동생 정말 엄청난 인재였네! 그런 방법이 있을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어. 대단해! 진짜 대단해!”공수이는 칭찬을 받게 되자 헤실헤실 웃었다.“수이 동생 덕분에 앞으로 공주님은 우리 저하를 귀찮게 하지 않겠어!”정태웅은 고개를 돌려 다른 쪽에서 기뻐하고 있는 이홍연을 바라보며 말했다.먼 곳, 이홍연은 기쁜 얼굴로 수납 반지를 들고 있다가 그것을 왼손
윤구주가 돌아왔다.윤구주가 돌아오자 윤구주의 형제들은 곧바로 그에게 다가가서 외쳤다.“저하!”윤구주는 주위를 쭉 둘러보더니 염수천에게 물었다.“다 처리했어?”“저하, 세가의 잔당들을 모조리 죽였습니다!”염수천이 말했다.“그래.”윤구주는 덤덤히 말했다.“저하, 이 세가들은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염수천은 갑자기 배씨 일가, 반씨 일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옆에 있던 배씨 일가, 반씨 일가 사람들은 처리라는 말을 듣고 하나같이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려서는 두려움에 찬 얼굴로 윤구주를 바라보았다.윤구주가 죽이라고 할까 봐 두려운 듯했다. 윤구주가 죽이라고 한다면 그들 모두 오늘 이곳에서 목숨을 잃게 될 테니 말이다.윤구주는 배씨 일가, 반씨 일가 사람들을 싸늘한 시선을 바라보더니 그들에게로 걸음을 옮겼다.배씨 일가, 반씨 일가 사람들은 윤구주가 다가오자 다들 겁을 먹고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저하, 살려주십시오! 저희 배씨 일가는 저하의 심기를 건드린 적이 없습니다!”배도찬은 윤구주가 조금씩 다가오자 겁먹은 얼굴로 저도 모르게 말했다.“맞습니다, 저하! 저희 반씨 일가도 저하의 심기를 거스른 적이 없습니다!”반씨 일가의 노인 한 명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윤구주는 두 가문 사람들에게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멈춰 서더니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당신들 말대로 당신들은 오늘 내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어. 만약 내 심기를 건드렸다면 당신들은 이미 시체가 되었겠지.”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오늘 당신들을 한 번 살려줄 수는 있어. 하지만 다음번에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내가 직접 당신들을 죽여서 배씨 일가와 반씨 일가를 멸문시킬 거야!”윤구주는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차갑게 말했다.“저하, 살려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오늘 이후로 저희 두 가문은 저하께 충성을 바칠 것이고 절대 후회하지 않겠습니다!”배씨 일가, 반씨 일가 사람들은 입장을
뭇 형제는 윤구주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금위군 통령인 염수천은 이해하였다! 윤구주는 화진 제일 인왕이자 화진의 구주 전신으로 불리고 있다! 이 칭호에 걸맞게 그는 나라를 지켜야 하는 책임이 있다! 그러하기에 그는 자신이 이용당하는 한 자루의 칼이 될지라도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필경 그는 화진에서 태어나고 자란 화진사람이기에! “슬기로운 왕이시여! 의리 있는 왕이시여!” 염수천은 공경스럽게 윤구주를 향해 큰절하였다. 이건 염수천이 윤구주를 향한 경의뿐만 아니라, 화진 국주의 윤구주에 대한 감정을 담은 절이었다. “구주야, 무슨 얘기 하고 있어?” 분위기가 점점 엄숙해지고 있을 무렵 이홍연이 갑자기 다가왔다. 윤구주 앞으로 다가온 그녀는 얼굴에 기쁨의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아무것도! 그저 염수천 통령과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지.” 윤구주는 이홍연이 조정의 싸움에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대충 얼버무렸다. “그렇구나!” “구주야! 나 이제 화 풀렸어! 그리고 너의 선물 고마워!” 이홍연이 살짝 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화? 선물?” 윤구주는 살짝 어안이 벙벙했다. 이홍연은 가늘고 곧은 손을 뻗어 윤구주한테 이리저리 흔들어 보였다. “솔직히 말하면 이 선물 무척 마음에 들어! 그래서 인제 그만 널 용서해 주려고!” 말을 마친 뒤 이홍연은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하지만 남겨진 윤구주는 얼빠진 얼굴로 서 있었다! 방금 이홍연이 말하며 흔들던 손위의 반짝이던 물건은 아무리 봐도 반지였다! 윤구주는 미간을 찌푸리며 어이없어하였다. (헐? 쟤가 방금 뭐라 한 거야? 내가 언제 선물을 했다고 그러지? 게다가 그 선물이 반지라고?) 머릿속은 의혹함으로 가득하였지만, 이홍연이 기뻐하는 모습에 윤구주는 더는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노룡산에서의 전쟁이 이로써 끝났다. 윤구주는 앞으로의 뒤처리를 염수천한테 맡겼다. 금위군 통령으로서 이런 뒤처리는 식은 죽 먹기였기에 그도 긴말 안 하고
우뚝 솟은 황성 중 금란 대전 내에 9마리의 용이 수놓아져 있는 용포를 입은 늠름한 자태의 남자가 옥좌에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빨간색 관복 차림에 사모를 쓴 노인이 서 있었다. 하얀 피부에 수염 한 올 없는 이 노인이 바로 황성 제일 내시 총관 한진모이다! 용포를 입고 있는 남자는 바로 화진의 국주이다. “진모야, 노룡산의 일은 일단락되었느냐?” 국주의 목소리는 몹시 우렁찼다. 황성 내 제일 절정으로 불리는 내시 총관 한진모가 몸을 굽힌 채 웃으며 대답했다. “국주님께 아룁니다! 노룡산의 일은 이미 마무리되었습니다!” “국주님의 예상대로 제자백가는 배씨, 반씨 이 두 가문을 제외한 모든 가문이 저하에 의해 멸문당하였습니다.” “게다가 생각지도 못한 윤신우님도 노룡산에 계셨습니다!” “유명전의 제4명군도 해치웠습니다!” 늙은 내시는 모든 소식을 조금의 숨김도 없이 국주한테 일렀다! 하하하! 이 소식들을 들은 국주는 벌떡 일어서선 크게 웃었다! “좋구나! 좋아!” “역시 내 화진의 제일 전신이야, 나를 실망하게 하는 법이 없어!” 호탕하게 웃으며 이 말은 한 국주는 다시 말하였다. “전쟁이 이미 시작되었으니, 앞으로 모든 것을 윤구주한테 맡겨야겠지!” “진모야, 그 어린놈이 앞으로 뭘 할 것 같으냐?” 국주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한진모가 황급히 머리를 절레절레 돌리며 말했다. “저는 아둔하여 잘 모르겠습니다!” 국주는 손을 등 뒤에 진채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예상한 것이 틀리지 않았다면 윤구주는 나를 찾으러 올 것이다!” “국주님을요?” “그래!” “내 예상대로라면 윤구주는 이미 나를 찾으러 오는 길에 있을 것이다!” 국주는 유유히 답했다. 한진모는 잠깐 멈칫하다 다시 말문을 열었다. “국주 님의 뜻은 이 모든 게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겁니까?”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끝이 웬 말이냐?” 국주의 말은 패기로 가득 차 넘쳤다. “내가 왜 헌원하우검을 윤구주한테 하사했는지 아느냐?” 한진모는 얼
“저하, 이 대답에 만족하십니까?” 황성 제일 절정인 한진모가 미소를 띠고 윤구주한테 물었다. 윤구주는 그 성지를 돌돌 말린 다음 품에 안고 머리를 들어 답했다. “만족한다!” “저하께서 만족하시다니 다행입니다!” “아 국주님께서 말씀하시길 아무런 걱정하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실컷 하라고 하셨습니다. 뒷감당은 국주님께서 맡으시겠다고!” 한진모는 말을 마친 뒤 항상 그래왔듯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윤구주는 머리를 들어 금란 대전을 바라보고는 큰 소리로 말했다. “국주님께 대신 감사함을 전해주거라!” 말을 마친 뒤 윤구주는 몸을 돌려 떠났다. 한진모는 멀어지는 윤구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하 가시는 길이 무탈하기를 빕니다!” 그는 금란 대전 앞에서 윤구주의 뒷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천천히 몸을 돌려 떠났다. 윤구주는 드디어 국주의 성지를 받았다. 성지는 간단했다. 그 안에 쓰여 있는 죽을 사자가 모든 것을 대표했다. 지금 이 순간 윤구주는 드디어 그가 하고 싶은 것을 맘껏 할 수 있게 되었다.......황성 내 오른쪽은 내각 요지이다. 바로 내각의 여덟 장로가 머물고 있는 곳이다. 조정에서 내각 여덟 장로의 지위는 화진 우상 육도진과 맞먹었다. 화진에서 고관 귀족부터 노비 백성까지 내각의 여덟 장로의 손이 안 닿는 곳이 없었다. 그러하기에 이 여덟의 장로 모두 태사와 동급이었다. 은씨 저택 내엔 내각 여덟 장로의 우두머리인 은성구가 눈을 감은 채 폭신한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그의 옆엔 야한 옷차림의 두 미인 궁녀가 있었다. 그중 한 명은 그의 다리에 앉은 채 여지를 그의 입에 넣어주었고 다른 한 명은 그의 머리를 마사지해 주고 있었다! 은성구는 올해로 70여 세의 고령이다. 하지만 그의 기력은 몹시 좋았다! 매일 밤 그는 2, 3명의 미녀와 함께 잠자리에 들곤 하였다! 그의 이런 습관은 이미 30년간 지속되었다! 은성구가 나른해져서 풍월을 즐기고 있을 때 갑자기 신급 호위 한 명이 달려 들어왔다. “어르신,
“저하,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그를 죽여야 합니까? 저자의 기운이 이토록 흉악한데 성수의 혈기로 진압할 순 없습니까?” 백호는 이미 싸우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안 된다. 너희 네 명이 함께라면 잠시나마 억누를 수는 있겠지만, 너희는 그저 성수의 정혈을 가졌을 뿐이니 마인을 완전히 없애려면 성수가 직접 나타나야 한다. 지금 이 세상에 성수가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스럽다.”윤구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말을 마친 윤구주는 곧장 진요탑 쪽으로 향했다.백호와 임정설, 청해가 함께 가서 돕고자 했으나 장인 대진인이 그들을 가로막았다.“이 마인은 오직 구주만이 상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중요한 임무가 있습니다. 국주님, 곧 전투가 시작될 터인데 서요산의 진법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이 호법의 중임을 몇 분께 맡기겠습니다.”장인 대진인이 임정설에게 경건하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좋다. 오늘 이 자리에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저 마인을 죽이고야 말겠다.” 임정설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황자의 위엄을 한껏 드높였다.화진의 존망이 걸린 일이라면 임정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하지만 마기가 몰려와 서요산 전체를 뒤덮고 세상이 오직 흑백 두 가지 색깔만으로 변해버리며 그 끔찍한 살기가 강림했을 때 임정설마저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떨렸다.“이 마인의 기운이 이렇게까지 무서울 줄이야.” 임정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마기로 가득 찼고 윤구주마저 그 기세에 눌리고 있었다.진요탑에서 흘러나온 마기는 실체가 되어 넘쳐흘렀다. 마기가 나타나자 서요산을 지키는 모든 검종 제자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어떤 제자는 순간적으로 십여 년을 늙어버렸다.수련이 부족하면 수명으로라도 채워야 하는 참혹한 상황이었다.웅웅.하늘에는 먹구름이 밀집했고 그 안에서 요괴의 번개가 끊임없이 터졌다.“이젠 영기조차 요기로 변하고 있다. 풍수 비술로 보건대 머지않아 이곳에서 요마가 출현하겠구나.” 임정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요산 외부에서 짙은 요기
도가는 인연이라는 두 글자를 대단히 중히 여긴다.그의 한 번의 인연, 한 번의 생각은 곧 만백성의 생사를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윤구주가 정상에 오르자 앞서 온 다른 이들과는 달리 서요산 검종의 모든 이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깊은 존경을 표했다. 그들이 경배한 대상은 단순한 한 인간이 아니라 구주의 저하, 화진의 인황, 오방 천지의 주재자였다.“모두 일어나십시오. 제가 오늘 서요산에 온 이유는 오직 진요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진요탑 안의 마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문 씨 세가의 역심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마인을 죽여야만 문 씨 세가의 야심도 함께 근절할 수 있습니다.”윤구주는 서요산 검종의 모든 제자를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이번 서요산 행차의 목적은 바로 문 씨 세가의 역심을 뿌리째 뽑는 것이었다.검종 제자들이 앞장서 일행을 이끌었고 모두가 금정을 지나 뒷산으로 향했다.뒷산에 막 들어서자마자 음산한 기운이 얼굴을 스쳤다.후산 중앙에는 높이 오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산이 서 있었는데 그 산은 무려 구백구십구 개의 쇠사슬로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다.이 쇠사슬은 그저 평범한 사슬이 아니었다. 절반은 땅속의 지맥과 연결되어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하늘 높이 떠올라 천지의 영기를 끌어모으고 있었다.이런 수준의 봉인이라면 설령 윤구주 자신이 여기에 갇혀 있다고 해도 빠져나가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처럼 견고한 고진마저 지금은 마인의 사기로 조금씩 부식되어 가고 있었다. 본래는 영기가 흘러넘치는 명산이었으나 지금은 온 서요산이 마인의 기운에 물들어 음침하고 괴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이 강렬한 악기운을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모두 얼굴을 찌푸렸다.솟구치는 사기를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찌푸렸다.최근 몇 대에 걸쳐 입종한 서요산의 제자들은 이런 마인의 사기와 요마의 위협 속에서 수련해야 했다.천지의 영기조차 마인의 기운에 오염되어 수련에 큰 지장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남은 현
이 말을 듣자 모든 이들은 천 년 전 마지막으로 나타난 그 성인이 바로 서요산 검종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짐은 서요산 검종의 선대 종주께서 우화등선하셨다고만 들었는데 그저 떠도는 신화 속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더니 은 성인의 경지에 이르신 것이었군.” 임정설이 깊은 감탄과 함께 말했다.구백 계단 윤구주는 이미 전설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하지만 그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구백삼십 계단 사십 계단을 오르면서 윤구주의 발걸음은 오히려 더욱 가벼워졌고 그가 세우는 기록은 사람들의 상식을 계속해서 뒤흔들었다.구백팔십 계단을 지나 정상까지 겨우 십여 계단만 남은 그 순간 윤구주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구백구십구 계단에 이르러 결국 완전히 멈추었다.드디어 한계에 도달한 것인가?모두가 숨을 죽이고 윤구주를 지켜봤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분명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시험일 터였다.윤구주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십여 분을 견뎌냈다. 사람들은 그가 언제 다시 계단을 오를지 초조하게 기다렸다.마침내 윤구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됐습니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시험을 포기하지요.”말을 마치고 계단에서 내려서는 순간 청석 계단 아래에서 강력한 영기가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쳤고 곧바로 서요산을 감싸던 어둠의 기운을 깨끗이 몰아냈다.오랫동안 음울했던 서요산 상공은 순식간에 환해졌고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맑은 하늘이 펼쳐졌다.서요산의 모든 이들은 충격에 빠져 넋을 잃었다.그제야 그들은 윤구주가 왜 그토록 여유롭게 올라올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서요산의 청석 계단이 가진 진법의 힘을 계속해서 억누르고 있었다.“참으로 대단하신 신위군요! 우리 서요산의 청석 진법마저 제압하셨다니! 마지막 한 걸음을 분명 넘으실 수 있었을 텐데 혹시 강제로 넘었다가 진법이 견디지 못해 영기가 새 나가고 진법이 무너져 진요탑까지 영향을 미칠지 걱정하신 건 아닌가요?” 장인 대진인이
도법의 깊이는 워낙 심오해서 임정설조차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다.“쉽게 말씀드리자면 구주는 천지의 운기를 완전히 장악한 데다가 하늘이 직접 영광을 내리신 거죠.” 장인 대진인이 말했다.임정설은 이 말을 듣고 비로소 이해한 듯 말했다.“대진인의 말은 윤구주가 바로 하늘이 점지한 사람이라는 뜻인가?”“맞습니다. 우리 화진 사람들은 운명의 갈림길에 서면 본심에 따라 도법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깁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사는 다하고 하늘의 뜻을 따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윤구주는 분명 큰 복을 타고났지만 그 엄청난 복을 감당할 힘도 필요합니다.”대진인이 설명했다.말이 끝날 무렵 윤구주는 이미 육백삼십 계단을 거뜬히 올라와 있었다.한 걸음도 멈추지 않고 더욱 확고한 걸음으로 계속 전진했다.그의 발걸음마다 천지의 기운이 응축되었다.어느 순간 서요산의 계단조차 윤구주의 기세를 가두지 못했다. 그는 마치 천지를 밟으며 오르는 듯했다.곧이어 그는 칠백 계단마저 돌파했다.칠백 계단이란 천 년 전 서요산의 전성기에도 극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경지였다. 지금 만약 윤구주가 구주왕이 아니라 일반 수련자였다면 이 기록만으로 서요산 전체가 들썩였을 것이다. 만일 윤구주가 서요산에 입문을 원했다면 서요산은 모든 자원을 쏟아부어 그를 키웠을 것이며 서요산 검종의 다음 종주 자리는 당연히 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그러나 이미 칠백 계단에 이르렀음에도 윤구주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칠백오십 계단 팔백 계단 팔백오십 계단!그는 끊임없이 정상의 기록을 깨며 전설을 써 내려갔다.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윤구주 앞에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 같았다. 이쯤 되자 장인 대진인조차 감히 그를 함부로 평가할 수 없었다.왜냐하면 자신도 과거에 겨우 칠백 계단에 그쳤으니 팔백 계단을 오른 사람을 감히 평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윤구주는 멈추지 않고 계속 올라갔다. 마치 천지를 흔들어 이 강산을 뒤엎어버리겠다는 기세였다.그리고 마침내 구백 계단에 이르렀다.“구백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