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시작일 뿐이라는 말에 세나미는 완전히 절망에 빠졌다.그녀는 화진을 건드린 대가가 이렇게 클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녀는 절대 화진을 건드릴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이젠 내가 물어볼 테니 넌 대답만 해. 날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윤구주는 설국의 절정 강자 길든을 죽인 뒤 차가운 얼굴로 고개를 돌려 세나미를 바라보았다.안타깝게도 설국의 군신 세나미는 감히 반항할 수가 없었다.“말해. 여기서 설국 수도까지 얼마나 걸려?”윤구주가 설국 수도에 관해 묻자 세나미는 화들짝 놀랐다.“뭘 하려는 거야?”“쓸데없는 얘기는 하지 말고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해.”윤구주는 그녀와 쓸데없는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윤구주의 말에 세나미는 전전긍긍한 채로 대답했다.“이곳은 낙일성이란 곳이야. 수도까지는 300여 킬로미터 남아있어.”“300여 킬로미터? 별로 멀지 않네.”윤구주는 그렇게 얘기한 뒤 낙일성으로 시선을 돌렸다.눈앞의 이 성은 설국의 큰 성으로 이곳에서 사는 주민들이 수백만 명에 달했다.비록 수백만 명의 인구를 가진 큰 성은 화진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아주 추운 지역에 있는 설국을 놓고 봤을 때는 인구가 가장 많은 성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윤구주는 낙일성을 쭉 둘러보다가 갑자기 두 눈을 번뜩이며 신념술을 사용했다.신념술을 사용하자 그의 신념들이 마치 그물처럼 사방을 향해 퍼져갔다.신념술을 쓰면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그러나 윤구주가 신념술을 사용한 이유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천지의 원기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오직 순수한 원기만이 윤구주가 구음만상결을 수련하는 것에 도움을 줄 수 있었다.화진은 공업 대국이다 보니 설국과 달리 원기의 오염이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었다.반대로 설국은 워낙 추운 지역인 데다가 공업도 그다지 발전하지 않았다. 그래서 윤구주는 이번에 단순히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서 설국에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도 있었다.신념술이 낙일
윤구주의 옷이 하나둘 벗겨지기 시작하면서 그의 다부진 몸이 겉으로 드러났다.그러나 세나미는 바짝 긴장해서 눈을 감고 있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감히 눈을 뜨지 못했다.그럼에도 그녀는 호기심 때문에 몰래 실눈을 뜨고 윤구주를 바라보았다.그리고 곧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윤구주의 몸은 건장하고 완벽했다. 그의 근육들은 매우 선명했고 더욱 무시무시한 것은 그의 등 뒤에 그려진 섬뜩한 용 머리였다.그 용 머리는 강력한 시각적 충격을 안겨주었다. 세나미는 윤구주의 등 뒤에 그려진 용을 본 순간 지레 겁을 먹고 저도 모르게 몸을 살짝 떨었다.“다 봤어?”윤구주가 갑자기 물었다.몰래 훔쳐보고 있던 걸 들킨 세나미는 순간 수치스러움을 느껴 목까지 벌게졌다.그녀는 서둘러 몸을 돌리더니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내, 내가 언제 봤다고 그래?”윤구주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세나미를 더 난처하게 하지 않고 훌쩍 뛰어올라 온천 안으로 들어갔다.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온천은 최고였다.윤구주는 온천 안으로 들어간 뒤 세나미를 향해 말했다.“넌 온천욕 안 할 거야?”‘뭐라고?’“난... 싫어!”세나미는 서둘러 거절했다.그녀는 설국의 군신이며 앞으로 황후가 될 사람인데 어떻게 적과 함께 온천욕을 즐긴단 말인가?게다가 옷도 다 벗어야 하지 않는가?“싫으면 그냥 그 위에 있든지.”윤구주는 귀찮아서 그녀를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그는 눈을 감고 온천욕을 즐겼다.반대로 세나미는 심란한 마음으로 온천 옆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감히 움직이지도 못하고 다른 곳에 갈 수도 없었다.어쩔 수가 없었다.생사인에 당한 이상 도망칠 기회는 없었다.윤구주가 그녀를 죽이려고 한다면 그저 생각 한번 하면 끝이었다.온천에 몸을 담근 윤구주를 본 세나미는 그가 밉기도 하고 또 놀랍기도 했다.그녀는 윤구주가 많은 설국인들을 죽여서 미웠고 또 동시에 그의 엄청난 실력이 놀라웠다. 윤구주의 실력이라면 그녀의 아버지가 군대를 이끌고 온다고 해도 그를 상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윤구주는 가부좌를 틀고 있었고 적선의 기운이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그 기운은 아주 성스러웠다. 절정 강자인 세나미는 그 기운이 나타나는 순간 몸이 큰 산에 짓눌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적선의 기운이 나타나자 온천 위쪽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천지 원기가 사방에서 모여들었다.천지 원기는 엄청난 기세로 모여들더니 곧바로 윤구주의 체내로 흡수되었다.‘젠장, 이 악마는 단순히 온천욕을 하는 게 아니라 수련을 하고 있는 거였어!’세나미는 그 순간 그 점을 인지했다.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난 세나미의 푸른색 눈동자에 놀라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세나미는 윤구주가 정말로 단순히 설국에서 온천욕을 즐기려고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에게 속은 것이 분명했다.사실 윤구주가 한 모든 일은 낙일성의 천지 원기를 흡수하기 위해서였다.흡수는 계속됐다.파도와도 같은 천지 원기가 윤구주의 체내로 끝없이 흡수되었고, 윤구주의 체내에서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그 소리는 고대 코끼리의 울음소리였다.그 소리가 한 번 날 때마다 윤구주의 기세는 더욱 강해졌다.무한한 천지 원기를 흡수하면서 윤구주의 몸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기괴한 검푸른색의 문양이 윤구주의 피부에 생기기 시작하더니 그 순간 피부가 강철이 되었다.그것이 바로 윤구주가 수련하던 구음만상결이었다.구양은 기운이고 구음은 힘이다.윤구주는 두 개의 구주령을 얻었고 마침 두 개를 결합할 수 있었다.쿠구궁!천지 원기를 끊임없이 흡수하자 온천 안의 위압 또한 점점 강해졌다.마지막이 되자 세나미는 더 버티기가 힘들어서 서둘러 온천을 벗어났다.밖으로 달려 나오자마자 그녀는 꺅 소리를 질렀다.고개를 드니 온천 상공에 무시무시한 검은색 먹구름들이 사방에서 몰려와 윤구주의 머리 위에 떠 있었다.심상치 않은 징조를 본 세나미는 완전히 넋이 나갔다.“세상에, 저 악마가 대체 무슨 수련을 하고 있길래 이렇게 날씨가 급변하는 거야?”...윤구주가 미친 듯이 낙일성의 천지 원기를
“군신 각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길든 씨가 계시니 그 화진인은 분명 죽었을 겁니다.”한 설국 장수가 말했다.길든은 절정 강자로서 설국 부대에서 신화 같은 존재였고 줄곧 설국 전사들의 선망을 한 몸에 받았다.이번에 세나스는 딸을 구하기 위해 오랫동안 폐관하던 절정 강자 길든을 모셔 왔다. 윤구주를 상대하기 위해서 말이다.그런데 길든이 딸을 찾았다는 말을 들으니 세나스는 그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세나스는 웃어 보였다.“너희 말이 맞아. 화진인이 아무리 강해 봤자 길든이 있는 한 걱정할 건 없지.”애꾸눈인 세나스가 말했다.그는 말을 마친 뒤 고개를 들어 말했다.“내 명령을 전해. 모두 속도를 높여서 최대한 빨리 낙일성에 도착한다.”“네!”세나스가 명령을 내리자 위풍당당한 병사들은 박차를 가해서 낙일성으로 향했다.낙일성 성벽은 아주 높아서 웅장하고 장엄했다.그곳은 한때 낙일성에서 가장 번화한 곳으로 매일 수만 명의 설국 백성들이 성문에서 그곳을 지나갔다.그러나 오늘 거대한 성문 아래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이러한 상황에 초조한 마음으로 낙일성에 도착하기만을 바라왔던 세나스는 안색이 좋지 않았다.“다들 멈춰.”세나의 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은 모두 낙일성의 성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군신 각하, 왜 그러십니까?”이때 여러 명의 장수가 달려와서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세나스에게 물었다.애꾸눈인 세나스는 손을 들어 낙일성 성문을 가리켰다.“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 거야?”“이상한 점이요?”장수들은 그 말을 듣고 성문 쪽을 바라보았다.그들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 세나스가 계속해 말했다.“낙일성은 우리 설국에서 수입이 활발히 진행되는 대형 도시야. 매일 수만 명의 상인들이 이곳을 드나들지. 그런데 오늘 좀 봐. 이곳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 그런데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 거야?”세나스의 말에 사람들은 그제야 깨달았다.“그러네요.”’“오늘 어떻게 된 걸까요? 왜 성문에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걸까요?”모든 장수가 의아
“또 사람이 없네요?”“어떻게 된 거죠? 낙일성에 무슨 일이 있던 걸까요? 시민들과 낙일성을 지키는 병사들이 왜 보이지 않죠?”이때 한 장수가 의문을 얘기했다.다른 장수들과 병사들도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바로 이때, 갑자기 짙은 피비린내가 정수리 위에서 풍겨왔다.“아주 짙은 피 냄새야.”“무슨 상황이지?”한 장수는 냄새를 맡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피비린내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그리고 그는 곧 깜짝 놀라 새된 소리를 질렀다.“군신 각하... 저기를 보세요...”그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며 손을 들어 성벽 쪽을 가리켰다.소리를 들은 세나스와 다른 장수, 병사들은 모두 고개를 들었다.곧이어 피 칠갑을 한 채로 얼어붙은 시체가 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그 시체는 이미 얼음덩어리가 된 채 성벽에 걸려 있었다.시체는 얼음과 눈으로 뒤덮여서 누군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세상에, 성벽 위에 왜 시체가 걸려 있는 거죠?”“저건 누구 시체일까요?”병사들과 장수들은 의문을 제기했다.오직 세나스만이 왠지 모르게 성벽에 걸린 시체를 본 순간 강렬한 불안감이 느껴졌다.“여봐라, 저 시체를 내려서 가져와 봐.”세나스가 명령을 내렸다.이때 한 장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훌쩍 날아올라서 성벽 위에 걸려 있던 시체를 가져왔다.시체가 내려오자 세나스는 곧바로 부하들을 데리고 달려갔다.시체는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한 장수가 손을 움직여서 시체를 뒤덮은 얼음을 깨버렸다.그리고 곧 시체의 얼굴이 세나스와 다른 사람들의 눈앞에 드러났다.그는 절정 강자 길든이었다.“어? 길든 선배님이...”한 장수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그의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서둘러 고개를 숙여 시체를 보았다.예상대로 성벽에 걸려 있던 시체는 설국 절정 강자 길든의 시체였다.길든은 죽기 전 겁을 먹은 건지, 억울한 건지 눈을 부릅뜨고 있었던 던 것 같다.그리고 그의 심장 쪽에는 구멍이 크게 뚫려 있었다.다만 그의 피가 완전히 얼
“군식 각하, 이제 어떡합니까?”한 장수가 세나스에게 물었다.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세나스는 낙일성 중심을 빤히 바라보면서 말했다.“모두 경계 태세를 취한다. 내 딸을 납치한 화진인은 분명 성안에 있을 거다. 오늘 그 어떤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어도 난 반드시 그 화진인을 죽이고 내 딸을 구출할 것이다.”세나스가 분노에 찬 고함을 질렀다.“알겠습니다!”장수들은 이내 대답했고 거의 만 명 정도 되는 설국 부대는 단단히 준비하기 시작했다.세나스가 군대를 이끌고 성 안에 들어섰을 때, 낙일성의 중심에는 붉은 머리의 세나미가 온천 옆에 서서 고개를 들어 윤구주에게 흡수되고 있는 하늘 위 천지 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윤구주가 무슨 공법을 수련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그리고 무엇 때문에 주위의 천지 원기가 전부 흡수되는 건지도 몰랐다.그녀는 그저 멍하니 하늘 위 천지 원기를 바라보며 바위처럼 그곳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바로 이때 겁에 질린 설국인들이 먼 곳에 있는 거리에서 뛰어왔다.그들은 달리면서 외쳤다.“큰일이에요. 군대가 왔어요!”겁에 질린 백성들의 목소리에 온천 옆에 있던 세나미는 흠칫했다.“군대?”그녀는 빠르게 걸어가서 겁에 질린 채 달리고 있는 노인을 붙잡았다.“안녕하세요, 아저씨. 조금 전에 군대가 왔다고 하셨나요? 대체 무슨 상황인지 얘기해주실 수 있나요?”세나미에게 붙잡힌 설국 노인은 서둘러 말했다.“아가씨, 얼른 숨어요. 우리 낙일성에서 곧 전쟁이 일어날 것 같아요.”“전쟁이요?”그 말을 들은 세나미는 더더욱 의아해했다.“맞아요. 조금 전에 우리 설국 군대가 낙일성에 왔어요. 게다가 탱크랑 대포도 있었어요.”노인이 말했다.그 말을 들은 세나미는 의아했다.낙일성은 설국의 도시였다.군대가 낙일성에 진입했다는 것은 윤구주를 노린 것이 틀림없었다.설마 설국 군대에서 윤구주가 낙일성에 왔다는 걸 아는 걸까?“아저씨, 그들을 이끄는 장수가 누군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세나미는 황급히 물었다.“우리 설국
“다들 왔나?”윤구주는 번뜩이는 두 눈으로 낙일성 성문 쪽을 바라보았다.“좋아. 드디어 왔네.”말을 마친 뒤 윤구주는 훌쩍 뛰어올라 온천에서 나왔다.그의 완벽한 몸매는 근육이 잡혀 탄탄했다. 그의 몸은 마치 가장 위대한 조각가가 조각한 조각상 같았다.손을 움직이자 바닥에 벗어두었던 옷이 그의 손에 잡혔다.윤구주는 빠르게 옷을 입은 뒤 순식간에 낙일성 성문 쪽으로 나아갔다.윤구주가 계속 낙일성에 남아있던 이유는 세나스의 대군을 기다리기 위해서였다.세나스는 설국의 군신으로 과거 설국 병사들을 이끌고 전투에 수십 차례 참여했었다. 그는 설국 병사들에게 영웅이자 군신이었다.그러다 그는 6년 전 윤구주에게 패배하였고 심지어 오른쪽 눈은 윤구주에 찔려서 실명되었다.비록 세나스는 눈 한쪽이 실명되었지만 설국 군인들 마음속 그의 지위는 여전히 확고부동했다.그는 여전히 군신이자 설국 병사들이 가장 존경하는 존재였다.윤구주가 그를 죽여야만 설국 군대를 완전히 패닉에 빠뜨릴 수 있었다.그래서 윤구주가 떠나지 않고 계속 낙일성에 남아있었던 것이다....낙일 성, 성문 쪽.얼어붙은 시체가 가장 앞에 놓여 있었다.그것은 설국의 절정 강자 길든의 시체였다.시체 앞에 서 있는 것은 세나스였고 그의 뒤에는 장수들이 뒤따르고 있었다.초극 절정인 길든은 생전에 세나스와 사이가 굉장히 좋았다.매번 전투가 있을 때마다 세나스는 길든을 초대했었다.그런데 이번에 오래된 친구가 낙일성에 오자마자 죽을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길든의 시체를 바라보던 애꾸눈 세나스는 주먹을 꽉 쥔 채로 비분에 찬 표정을 해 보였다.“군신 각하, 우리 부대는 각하의 명령에 따라 성문을 완전히 막아두었습니다. 파리 한 마리도 뚫지 못할 겁니다. 지금부터 수색을 시작하라고 명령을 내리면 될까요?”이때 한 장수가 세나스의 곁으로 다가가서 물었다.군복을 입은 세나스는 눈을 부릅뜬 채 차갑게 손을 움직였다.“시작해.”“네!”설국 장수는 명령을 받은 뒤 곧바로 몸을 돌려 뒤에 있는 병
그들을 향해 달려오던 사람은 다름 아닌 세나미였다.세나미는 달려가서 세나스의 품에 안기더니 흐느끼며 아버지를 불렀다.세나스는 당황했다.그는 서둘러 딸을 안고 기쁜 얼굴로 말했다.“나미야, 이거 꿈 아니지? 정말 너 맞니?”“그럼요, 아버지!”세나미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말했다.“너 화진인에게 납치된 거 아니었니? 왜 여기 있는 거야? 얼른 아빠한테 얘기해 봐. 어디 다친 데는 없어?”세나스는 서둘러 딸을 걱정하며 물었다.세나미는 웃으며 말했다.“아버지, 저 괜찮아요. 안 다쳤어요.”“하지만... 네가 화진인에게 납치당했다는 보고가 올라왔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멀쩡히 이곳에 있는 거야?”세나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다른 장수들 또한 의아한 얼굴로 갑자기 나타난 세나미를 바라봤다. 아무도 어떤 상황인지 몰랐다.세나미는 지금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그녀는 서둘러 말했다.“아버지, 그건 설명할 수 없어요. 지금은 제 말대로 하세요. 당장 병사들을 이끌고 이곳을 떠나요. 그리고 당분간은 절 찾지 마세요.”세나미의 말에 세나스뿐만 아니라 그의 뒤에 있던 설국 병사들 또한 얼이 빠졌다.“나미야, 그게 무슨 말이야? 이곳을 떠나라니? 널 찾지 말라니?”세나미가 말했다.“아버지, 제 말대로 하세요. 지금은 설명할 방법이 없어요.”세나스는 이상함을 느꼈다.딸의 겁먹은 표정을 본 세나스는 뭔가 수상쩍음을 감지했다.“나미야, 너 혹시 협박당했니? 뭘 두려워하는 거야?”세나미는 긴장한 얼굴로 뒤를 바라보면서 서둘러 말했다.“아버지, 제발요. 어서 군대를 이끌고 이곳을 떠나세요. 그 악마가 온다면 떠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을 거예요.”세나미가 악마라고 하자 세나스는 더욱 의아해졌다.“딸아, 그게 무슨 말이니? 악마라니?”“우리 설국 병사들을 죽이고 절 잡아간 그 화진인 말이에요!”세나미는 설명해도 소용없자 그냥 솔직히 털어놓았다.“네 말은 우리 설국 병사들 수천 명을 죽인 화진인이 이 낙일성에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
백호는 아직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어느덧 이백오십 계단까지 올라왔다. 이 단계부터는 실체화된 술법이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람, 불 번개와 같은 속성의 영기가 점점 강해졌다. 여기서부터는 육신 횡련의 수련자는 강력한 체질로 버티고 술도 재능이 뛰어난 수련자는 천지 영기를 다루는 능력으로 버텨야 했다. 한마디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갈리는 구간이었다. 어느 한 분야라도 특출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백호는 술도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강인한 육체 하나로 견디고 있었다.웅!성수의 피가 진동하며 백호의 몸을 지탱했다. 각종 속성의 영기가 몰아쳤지만 백호는 성수혈의 힘을 빌려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수련자에게 있어서 성수의 혈맥이나 법보 등은 모두 신체 외적인 재능으로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꼼수나 편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천 가지 변화와 만 가지 신통력이 있어도 결국 만법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법기든 혈맥이든 이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천지 영기를 이용한 술법도 결국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반작용을 맞게 된다. 따라서 수련의 길에는 애초에 편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성수 혈맥 같은 천지의 보물은 보통 사람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윤구주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이를 감당하는 건 백호 자신이었다. 성수 혈맥의 힘을 온전히 감당하며 백호는 결국 삼백 계단까지 올라섰다.계단의 꼭대기 근처에는 이미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이 여럿 서 있었다. 서요산 검종은 근대에 들어 삼백 계단을 넘는 인재가 드물었다. 최근 백 년 동안 삼백 계단을 넘은 사람이 고작 열 명 남짓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삼백여 계단에서 멈췄다. 그런데 지금 백호는 삼백이십 계단까지 올라선 것이다. 이 정도면 서요산 검종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한 성과였다.이런 제자가 나타난다면 종문 전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서요산의 진인들까
“한 사람의 품성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그렇게 많은 수련자를 키워낸다면 결국 천하의 마인을 직접 만들어 내는 꼴이 아니겠어?”청현이 바로 그 실패한 예다. 서요산 검종 종주가 청현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나머지 그의 인성을 무시하고 양성한 끝에 결국 역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그럼 저하 서요산에 입문한 무술 무인들은 평균적으로 몇 계단까지 오르는지 아십니까?” 백호가 호기심에 물었다. 윤구주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무술 무인의 정확한 데이터는 모르지만 검종 종주와 잡담할 때 들어보니 검종 제자들의 수준이 갈수록 떨어져서 천 년 전만 해도 평균 삼백 계단 정도였는데 요즘엔 백 계단도 못 오른다고 하더구나. 가끔 삼백 계단을 오르는 자라도 나오면 검종 전체가 몇 년은 떠들썩할 정도라고 했어.”“구백구십구 계단까지 있는 시험인데 천 년 전 전성기에도 겨우 삼백 계단이요?” 백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요산 검종의 수준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때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야?” 윤구주는 흥미롭게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는 당장이라도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윤구주의 허락을 구한 뒤 바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계단 두 계단... 오십 계단까지는 아무 어려움도 없었다. 백호는 오십 계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서요산 검종이 별것 아니라며 놀려댔다. 하지만 육십 계단쯤 올랐을 때 처음으로 압력을 느꼈다. 마치 몸 위에 작은 차 한 대가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백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백 계단에 도달하자 압력이 갑자기 커졌다. 등에 작은 승용차 대신 소형 트럭이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백호의 한계에도 가지 못했다.“근래 사람들의 평균이 백 계단도 못 넘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예전의 무인 횡련은 황제도 오를 수 있었지만 요즘 무인 횡련은 죽어라 노력해도 소형 트럭 하나 못 버티는 수준이니 말입니다.”백호는 농담을 던지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
전에 임정설은 구오 지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힘쓰며 수모를 견뎌내고 살아남으려 했다.하지만 이제 황제가 된 그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그 탓에 이번 관문 앞에서 그는 망설였다.살아 있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었다.죽음을 마음에 품은 자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관문이었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청해만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황제가 되면 곤륜 구역에서 최고 경지에 도달하는 건데.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왜 죽음을 택하려는 거지?’“저하, 국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합니다. 저하도 사랑하던 이에게 배신당했어도 결국 극복해 나갔잖습니까.”백호도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여전히 국주보다는 왕이 더 낫다고 여겼다.“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느냐.” 윤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백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는 어리숙하고 말솜씨도 없기에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내가 문아름에게 배신당한 건 억울한 일이지만 나는 그녀에게 잘못한 게 없다. 오히려 그녀가 날 배신한 거다. 하지만 국주는 그 반대였지. 그가 그녀를 저버린 거야. 정이 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지혜가 지나치면 오히려 상처를 입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쓰라린 후회는 가진 뒤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생사를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윤구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소채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도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느꼈다.“그럼 복수하면 되지 않나요?” 백호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이때 청해가 눈치를 채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상대가 너무 강해서 못 이기는 거지. 황제에 오르기 전까진 제대로 맞붙을 힘도 안 돼. 오르고 나서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하고.”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 말이 맞았다.“그럼 우리가 국주님 대신 복수해 드리면 되잖아요? 국주님은 제 왕이기도 하지만 제 윗사람이기도 하잖아요.”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하하! 만약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솔직하다면 이런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