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노인이 떠난 뒤 정태웅은 그제야 서둘러 입을 열었다.“창현 어르신, 저희 형님들께서 이곳에 계신 걸까요?”“그래. 내가 안내해 주마.”윤창현은 말을 마친 뒤 곧바로 그들을 안내해 주었다.이내 두 사람은 윤창현을 뒤따라서 안마당에 도착하게 되었다. 안마당에 도착하자마자 천현수가 보였다.“천현수, 내가 돌아왔어!”정태웅은 기쁘게 말하면서 천현수를 향해 달려갔다.그런데 천현수는 정태웅의 뚱뚱한 엉덩이를 발로 걷어찼다.천현수에게 걷어차인 천현수는 엉덩이를 잡고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젠장, 왜 날 걷어차는 거야?”“왜? 안 돼? 얘기해 봐. 그동안 어딜 갔었던 거야?”천현수는 노기등등해서 물었다.정태웅은 당연히 할 말이 없었다.그에게 잘못이 있었으니 말이다.정태웅은 중얼대며 말했다.“난... 나는... 밖에 나가서 좀 놀았어. 그래도 제때 돌아왔잖아...”“제때 돌아오긴! 두 사람이 떠난 뒤 우리 아군이 하마터면 전멸될 뻔한 거 알아?”천현수는 계속해 그를 욕했다.“그래,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 화 풀어. 형님은 괜찮으셔?”정태웅은 뻔뻔한 사림이었기에 천현수에게 욕을 먹고 서둘러 그의 팔을 잡으며 물었다.천현수는 당연히 진심으로 정태웅을 원망하지 않았다.그는 화를 낸 뒤 말했다.“형님은 괜찮으셔.”민규현 등 사람들이 괜찮다는 걸 알게 된 정태웅과 공수이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천현수, 화내지 마. 나랑 수이 동생이 어젯밤 그 빌어먹을 놈들을 단단히 혼쭐내줬어. 우리가 대신 화풀이를 한 거로 생각해 줘.”정태웅은 어젯밤 공수이와 둘이 문벌, 세가 사람들을 죽인 사실을 자랑스럽게 얘기했다.두 사람의 얘기를 들은 윤창현은 흠칫했다.“어젯밤 서쪽, 북쪽에서 무인들을 죽인 사람들이 너희 둘이었어?”“헤헤, 맞습니다!”정태웅은 웃으며 대답했다.두 사람의 대답을 들은 윤창현은 다시 한번 공수이를 힐끔 보았다.어젯밤 전투에서 천여 명의 무인들이 죽었다. 심지어 그들 중 대부분이 세가와 문벌 출신의 절정 강자였
지금 종문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의 문벌, 세가까지 전부 서울로 모여들었다.“잘 왔네! 감히 우리 구주를 해치려고 한다면 전부 죽여버릴 거야!”윤창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그래도 어찌 됐든 이번에 서울에 무인들이 굉장히 많이 모였습니다. 혹시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일이 크게 번질까 봐 걱정됩니다!”윤정석이 이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뭘 두려워해? 그 빌어먹을 놈들이 우리 구주를 노리는데 죽이지 못할 이유라도 있어?”윤창현이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전 창현 어르신 말씀에 동의합니다. 젠장, 우리 저하에게 불경을 저지르다니, 다들 죽어 마땅해요!”정태웅이 이때 맞장구를 치면서 말했다.“맞아요. 전부 죽이자고요!”공수이가 이때 끼어들었다.다들 한마디씩 주고받았고 마지막엔 윤신우가 천천히 말했다.“화진의 무인들이 전부 서울에 모인 이유는 그들이 경외하는 종문에서 나섰기 때문이야. 그들의 기를 죽이려면 우선 종문부터 상대해야 해.”윤신우가 말했다.이번에 3대 서열은 전국 각지에서 서울로 모여들었는데 그 이유는 종문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무인들 사이에서 종문의 지위가 가장 높았다.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종문부터 제압해야 했다.“가주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종문을 상대하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민규현이 이때 입을 열었다.종문은 아주 강했고 거의 모든 종문에 엄청난 지위를 가진 조상들이 있었다.게다가 그 늙은 괴물들은 마치 살아있는 화석 같았다. 그들은 실력도 엄청났지만 소문에 따르면 무도 성지인 곤륜과도 아주 밀접한 관계라고 한다.그런 생각이 들자 다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종문을 상대하는 일은 다들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한테 맡겨. 비록 종문의 실력이 대단한 건 사실이지만 우리 윤씨 일가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거든.”이때 윤신우가 패기 넘치게 입을 열었다.“가주님, 대단하십니다!”“가주님, 위엄이 넘치십니다!”정태웅이 옆에서 떠들어댔다.옆에 있
공수이는 상당히 당황스러웠다.그는 서둘러 고개를 돌려 정태웅에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다.“태웅 형님...”정태웅은 마치 공수이가 역병이라도 되는 듯이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나한테 묻지 마. 나는 아무것도 모르니까.”‘뭐?’공수이는 점점 더 이상함을 느꼈다.그는 서둘러 민규현, 천현수 등 사람들을 바라보았다.안타깝게도 그들 역시 공수이가 역병이라도 되는 것처럼 고개를 돌리며 공수이를 무시했다.공수이와 선을 그으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공수이, 얼른 얘기해. 구주의 아내가 대체 누구야? 얘기하지 않는다면 가만두지 않을 줄 알아!”’이홍연은 미친 사람처럼 공수이를 위협했다.어쩔 수 없었다.황실 공주인 이홍연은 진심으로 윤구주를 좋아했고, 흑여산맥에서 자신의 모든 처음을 그에게 주었다.그런데 공수이의 말을 들어 보니 윤구주는 강성에 자기 아내를 찾으러 갔다고 한다.진짜로 아내를 찾으러 간 거라면 그녀는 뭐란 말인가?이홍연의 협박에 공수이는 겁에 질렸다.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말했다.“아름다운 공주님, 조금 전에는 제가 말실수를 한 거예요. 다시 말하면 안 될까요?”“거짓말하지 마! 오늘 나한테 진실을 얘기하지 않는다면 가만두지 않을 줄 알아!”이홍연은 사람을 잡아먹을 듯이 아름다운 눈을 부릅떴다.이홍연이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자 정태웅이 말했다.“저, 저는 배가 좀 아파서 화장실에 가야 할 것 같아요.”말을 마친 뒤 정태웅은 곧바로 도망쳤다.민규현, 천현수 등 사람들도 이홍연이 화를 내면 그 결과가 무시무시하다는 걸 알았기에 서둘러 말했다.“저희도... 볼일이 있어서 먼저 나가보겠습니다.”그렇게 다들 도망쳤다.심지어 마지막엔 윤신우, 윤창현, 윤정석까지 이홍연이 불같이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한숨을 쉬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조금 전까지 사람으로 가득 찼던 거실에는 이제 분노 때문에 눈까지 벌게진 이홍연과 협박을 받는 공수이만 남았다.“공수이, 얘기할 거야? 말 거야? 얘기하지 않는다면 이 칼로 찔러서 죽여버릴
“당연하지. 그러게 왜 쓸데없이 입을 놀려?”정태웅이 원망하듯 말했다.“태웅이 형님, 이건 제 잘못이 아니죠! 태웅이 형님이 그러셨잖아요. 강성에 구주 형님의 예쁜 아내가 있다고요.”공수이는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난 너한테 얘기한 거잖아. 그런데 그걸 왜 공주님께 얘기한 거야?”“왜요? 말하면 안 돼요?”“당연하지! 생각해 봐. 우리 저하와 공주님은 어렸을 때부터 죽마고우로 자랐고 공주님은 저하를 굉장히 좋아했어. 그런데 너는 공주님께 저하께서 아내를 찾으러 갔다고 했잖아. 누구라도 그런 말을 들었다면 널 죽이고 싶었을 거야.”정태웅이 말했다.공수이는 그 말을 듣고 머리를 긁적였다.“일리가 있는 것 같네요. 태웅이 형님, 이제 어떡해요?”공수이는 두려운 얼굴로 정태웅에게 물었다.정태웅은 잠깐 고민한 뒤 말했다.“뭐든 근본을 해결해야 해. 이건 저하의 사적인 문제니까 저하께서 해결하시는 게 가장 좋아. 저하께서는 알고 지내는 여자들이 굉장히 많아. 그리고 저하께서는 그들을 전부 성공적으로 설득했어.”공수이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맞아요. 그러면 구주 형님께서 맡겨야겠어요. 구주 형님께서 자초한 일이니까요. 형님께서는 수많은 미녀 누나들의 마음을 훔쳤잖아요. 저한테는 한 명도 남겨주지 않고요!”공수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불만을 토로했다.이홍연은 온종일 화가 난 상태였다.공수이도 찾을 수 없었고, 강성에 윤구주의 아내가 있다는 것이 사실인지 아무도 그녀에게 진실을 얘기해주려고 하지 않았다. 매번 윤구주의 지인들을 찾아갈 때마다 그들은 모른다고 하거나 바로 도망쳤다.이러한 상황을 겪고 나니 이홍연은 윤구주에게 다른 여자가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빌어먹을 놈! 바람둥이! 돌아오면 가만두지 않겠어!”단단히 화가 난 이홍연은 어쩔 수 없이 하미연을 찾으러 갔다.뒷마당에 도착한 이홍연은 곧바로 하미연 앞에서 울면서 호소하기 시작했다.“할머니, 할머니께서는 제 편을 들어주셔야 해요!”이홍연은 그렇게 말하면서 억울한 얼굴로 울
“홍연아, 진정해. 할머니가 이제 구주한테 물어본 뒤에 자세히 얘기해줄게.”하미연은 이홍연을 설득할 수 없는 것 같자 어쩔 수 없이 시간을 끌기로 했다.그러나 이홍연에게 그런 방법은 먹히지 않았다.이홍연은 울면서 말했다.“상관없어요! 전 구주가 직접 제게 설명해 주길 바라요. 대체 어떤 불여우가 구주의 마음을 빼앗은 건지 볼 거예요! 할머니, 솔직히 얘기할게요. 구주는 이미 제 몸을 가졌어요. 저는 이번 생에 오직 구주뿐이에요. 아무도 제게서 구주를 빼앗아 갈 수 없어요!”이홍연은 상황을 전부 얘기했다.하미연은 그 말을 듣고 기가 막혀서 눈을 끔벅이며 이홍연에게 물었다.“그게 정말이니?”이홍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당연하죠!”하미연은 그 말을 듣고 기뻐했다.“그래, 그래! 홍연아, 지금부터 마음 놓거라. 그놈이 네 몸을 가졌다면 평생 널 책임져야 해. 만약 걔가 책임지지 않겠다고 한다면 내가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다!”하미연이 그렇게 얘기하자 이홍연은 그제야 눈물을 닦으면서 말했다.“할머니, 꼭 제 편을 들어주셔야 해요!”“그럼, 그럼. 지금부터 넌 우리 윤씨 일가의 며느리야. 할머니는 당연히 네 편이 되어줄 거란다.”하미연이 가슴을 툭툭 치면서 장담했고, 이홍연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서울 상공, 호화로운 전용기가 서울 안으로 들어왔다.호화로운 전용기 안에는 흰옷을 입은 윤구주가 가만히 앉아 있었고 그의 곁에는 백화궁의 연규비, 백경재, 그리고 그가 가장 사랑하는 소채은 세 사람이 있었다.윤구주는 폐황령이 내려졌다는 걸 알게 된 뒤로 서울에 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짐작했다.그래서 그는 반드시 당장 서울로 돌아가야 했다.다만 이번에 윤구주는 사람들을 많이 데려가지 않았다.그는 오직 세 명만 데려왔다.주세호와 박창용 등 사람들은 데려오지 않았다.“저하, 저희 서울에 도착한 것 같습니다. 와, 여기 강성보다 몇 배는 더 화려한 것 같은데요?”백경재는 유리를 통해서 아래의 화려한 도시의 밤경치를 바라보며 감탄했
개인 비행장에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는데 민규현, 정태웅, 천현수, 공수이 등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윤구주가 서울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접한 뒤 그들은 매우 들떴고, 두 시간 전부터 그곳에서 윤구주를 기다리고 있었다.다만 윤신우는 그곳에 없었고 대신 윤창현과 윤정석 두 사람이 있었다.“태웅이 형님, 구주 형님께서 돌아오시면 우리 둘을 혼내지 않을까요?”공수이는 눈을 깜빡이면서 비행장 상공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정태웅에게 물었다.“걱정하지 마. 내가 형님들께 미리 얘기했어. 형님들께서는 우리가 몰래 서울을 벗어났다는 얘기를 저하에게 알리지 않을 거야.”정태웅은 웃으면서 말했다.“정말요?”공수이는 그 말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당연하지. 이 형님은 아주 믿음직스러운 사람이라고!”“하하, 역시 형님은 대단하시네요! 정말 듬직해요!”공수이는 더는 걱정하지 않았다.사람들은 계속 비행장에 서서 윤구주를 기다렸다.얼마 뒤, 호화로운 전용기가 상공에 나타났다.“왔어!”“저하께서 돌아오셨어!”다들 흥분했다.윤창현과 윤정석도 기뻤다.“우리 조카가 드디어 돌아왔어. 하지만 신우 형님은 우리 조카가 돌아오는 모습을 보지 못하네.”윤창현이 탄식하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전 구주가 언젠가는 형님과 화해할 거라고 믿어요.”“휴, 그랬으면 좋겠어.”윤창현이 탄식하며 말했다.하늘에서 호화로운 전용기가 서서히 착륙하자 윤구주의 형제들은 서둘러 맞이했다.전용기 문이 열리면서 흰옷을 입은 멋진 윤구주가 도착했다.윤구주의 뒤에는 아름다운 연규비와 소채은이 있었고 백경재도 있었다.“저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구주 형님, 정말 너무 보고 싶었어요!”“구주야, 돌아왔구나!”다들 윤구주에게 인사를 건넸다.윤구주는 형제들 외에 윤창현과 윤정석도 있을 줄은 몰랐다.그는 웃으면서 그들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그의 뒤에 있던 소채은은 낯선 얼굴들을 보자 저도 모르게 긴장하면서 몸을 살짝 뒤로 물리며 뒤에 섰다.“연규비 씨도 오셨군요!”
“채은아, 소개할게. 이 스님은 내 동생 수이야.”윤구주가 말을 마치자마자 공수이는 곧바로 앞으로 쑥 나서면서 자기소개를 했다.“안녕하세요, 형수님! 저는 공수이라고 해요. 법명은 나최고예요!”공수이의 법명을 들은 소채은은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 세상에 이런 이상한 이름이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형수님, 정말 너무 예쁘세요! 그래서 구주 형님께서 매일 형수님을 그리워하다가 바로 강성으로 형수님을 찾으러 간 거였군요! 형수님, 형수님 주위에 형수님처럼 아름다운 여성분이 또 있을까요? 비록 전 스님이긴 하지만 술도 마실 수 있고, 여자도 만날 수 있고, 사람도 죽일 수 있고, 방화도 할 수 있어요! 심지어 잘해요!”공수이는 가슴팍을 치면서 장담했다.공수이가 말을 마치자마자 윤구주가 공수이의 동그란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넌 입 좀 다물어!”꿀밤을 맞은 공수이는 머리를 부여잡고 억울한 표정으로 투덜댔다.“전 사실만을 얘기한걸요.”“채은아, 이 자식은 그냥 무시해. 그냥 장난친 거야.”소채은에게 말한 뒤 윤구주는 그녀를 데리고 윤창현과 윤정석에게로 향했다.“채은아, 이쪽은 내 둘째 삼촌과 셋째 삼촌이야.”삼촌이라는 호칭에 소채은은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둘째 삼촌, 셋째 삼촌. 안녕하세요!”윤창현과 윤정석은 소채은을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예의 차릴 필요는 없단다. 우리 구주의 여자 친구라면 우리 가족이니까. 그런데 구주가 미리 우리에게 얘기해주지 않아서 선물은 준비하지 못했어. 미안해.”윤창현은 웃으면서 말했다.“형님, 급할 이유는 없죠. 구주가 결혼할 때 큰 선물을 안겨주자고요!”윤정석이 말했다.“하하, 네 말이 맞아.”윤구주는 그렇게 모든 이들에게 소채은을 소개했고 그들은 그 뒤에야 비행장을 떠났다.“구주야, 우리와 같이 저택으로 돌아가자. 네가 떠난 뒤로 서울에 많은 일이 일어났어. 그리고 형님께서도 널 기다리고 있단다.”갈 때가 되자 윤창현이 나서서 윤구주에게 말했다.윤신우
차 몇 대가 어둠을 뚫고 도시 외곽으로 질주하고 있었다.차 안에는 서울로 돌아온 윤구주와 그의 형제들이 있었다.윤구주와 소채은은 단둘이 한 차에 앉아 있었고 다른 형제들은 모두 다른 차에 앉았다.비행장을 떠난 뒤 윤구주는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소채은이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는 윤구주를 향해 말했다.“구주야, 고민이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줄 수 있어?”윤구주는 소채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리더니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윤구주가 입을 열려고 하지 않자 소채은은 그의 큰 손을 잡으면서 더는 묻지 않았다.차는 계속 달렸다.몇 분 뒤, 윤구주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채은아, 사실 네게 숨긴 게 있어. 혹시 날 탓할 거야?”“무슨 거짓말인데?”소채은이 물었다.“우리 가족에 관한 거야.”윤구주는 성실하게 대답했다.소채은을 알게 되고부터 지금까지 윤구주는 단 한 번도 그녀에게 가족에 관한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그리고 자신이 천하제일 윤씨 일가 사람이라는 것도 얘기하지 않았다.소채은은 윤구주의 말을 듣고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네가 얘기하지 않았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겠지. 그래서 난 널 탓하지 않을 거야.”윤구주는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따뜻했다.“사실 우리 집안일을 얘기해줄 수도 있어.”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면서 창밖의 밤경치를 바라보았다.“우리 집안은 서울의 윤씨 일가야.”윤구주는 드디어 가족 얘기를 꺼냈다.소채은은 윤구주가 천하제일 가문인 윤씨 일가의 자제라는 것을 알게 되자 살짝 놀랐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난 어릴 때부터 아주 풍족하게 자랐어.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9살이 되던 해, 나는 내가 누리던 모든 걸 잃었어.”윤구주는 그 얘기를 꺼내자 목소리가 갑자기 차가워졌다.곧이어 그는 자신과 어머니가 윤씨 일가에서 내쫓긴 사실을 얘기했다.그리고 그런 짓을 벌인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 윤신우라는 것도 얘기했다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
백호는 아직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어느덧 이백오십 계단까지 올라왔다. 이 단계부터는 실체화된 술법이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람, 불 번개와 같은 속성의 영기가 점점 강해졌다. 여기서부터는 육신 횡련의 수련자는 강력한 체질로 버티고 술도 재능이 뛰어난 수련자는 천지 영기를 다루는 능력으로 버텨야 했다. 한마디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갈리는 구간이었다. 어느 한 분야라도 특출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백호는 술도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강인한 육체 하나로 견디고 있었다.웅!성수의 피가 진동하며 백호의 몸을 지탱했다. 각종 속성의 영기가 몰아쳤지만 백호는 성수혈의 힘을 빌려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수련자에게 있어서 성수의 혈맥이나 법보 등은 모두 신체 외적인 재능으로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꼼수나 편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천 가지 변화와 만 가지 신통력이 있어도 결국 만법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법기든 혈맥이든 이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천지 영기를 이용한 술법도 결국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반작용을 맞게 된다. 따라서 수련의 길에는 애초에 편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성수 혈맥 같은 천지의 보물은 보통 사람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윤구주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이를 감당하는 건 백호 자신이었다. 성수 혈맥의 힘을 온전히 감당하며 백호는 결국 삼백 계단까지 올라섰다.계단의 꼭대기 근처에는 이미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이 여럿 서 있었다. 서요산 검종은 근대에 들어 삼백 계단을 넘는 인재가 드물었다. 최근 백 년 동안 삼백 계단을 넘은 사람이 고작 열 명 남짓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삼백여 계단에서 멈췄다. 그런데 지금 백호는 삼백이십 계단까지 올라선 것이다. 이 정도면 서요산 검종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한 성과였다.이런 제자가 나타난다면 종문 전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서요산의 진인들까
“한 사람의 품성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그렇게 많은 수련자를 키워낸다면 결국 천하의 마인을 직접 만들어 내는 꼴이 아니겠어?”청현이 바로 그 실패한 예다. 서요산 검종 종주가 청현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나머지 그의 인성을 무시하고 양성한 끝에 결국 역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그럼 저하 서요산에 입문한 무술 무인들은 평균적으로 몇 계단까지 오르는지 아십니까?” 백호가 호기심에 물었다. 윤구주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무술 무인의 정확한 데이터는 모르지만 검종 종주와 잡담할 때 들어보니 검종 제자들의 수준이 갈수록 떨어져서 천 년 전만 해도 평균 삼백 계단 정도였는데 요즘엔 백 계단도 못 오른다고 하더구나. 가끔 삼백 계단을 오르는 자라도 나오면 검종 전체가 몇 년은 떠들썩할 정도라고 했어.”“구백구십구 계단까지 있는 시험인데 천 년 전 전성기에도 겨우 삼백 계단이요?” 백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요산 검종의 수준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때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야?” 윤구주는 흥미롭게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는 당장이라도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윤구주의 허락을 구한 뒤 바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계단 두 계단... 오십 계단까지는 아무 어려움도 없었다. 백호는 오십 계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서요산 검종이 별것 아니라며 놀려댔다. 하지만 육십 계단쯤 올랐을 때 처음으로 압력을 느꼈다. 마치 몸 위에 작은 차 한 대가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백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백 계단에 도달하자 압력이 갑자기 커졌다. 등에 작은 승용차 대신 소형 트럭이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백호의 한계에도 가지 못했다.“근래 사람들의 평균이 백 계단도 못 넘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예전의 무인 횡련은 황제도 오를 수 있었지만 요즘 무인 횡련은 죽어라 노력해도 소형 트럭 하나 못 버티는 수준이니 말입니다.”백호는 농담을 던지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
전에 임정설은 구오 지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힘쓰며 수모를 견뎌내고 살아남으려 했다.하지만 이제 황제가 된 그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그 탓에 이번 관문 앞에서 그는 망설였다.살아 있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었다.죽음을 마음에 품은 자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관문이었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청해만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황제가 되면 곤륜 구역에서 최고 경지에 도달하는 건데.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왜 죽음을 택하려는 거지?’“저하, 국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합니다. 저하도 사랑하던 이에게 배신당했어도 결국 극복해 나갔잖습니까.”백호도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여전히 국주보다는 왕이 더 낫다고 여겼다.“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느냐.” 윤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백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는 어리숙하고 말솜씨도 없기에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내가 문아름에게 배신당한 건 억울한 일이지만 나는 그녀에게 잘못한 게 없다. 오히려 그녀가 날 배신한 거다. 하지만 국주는 그 반대였지. 그가 그녀를 저버린 거야. 정이 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지혜가 지나치면 오히려 상처를 입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쓰라린 후회는 가진 뒤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생사를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윤구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소채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도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느꼈다.“그럼 복수하면 되지 않나요?” 백호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이때 청해가 눈치를 채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상대가 너무 강해서 못 이기는 거지. 황제에 오르기 전까진 제대로 맞붙을 힘도 안 돼. 오르고 나서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하고.”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 말이 맞았다.“그럼 우리가 국주님 대신 복수해 드리면 되잖아요? 국주님은 제 왕이기도 하지만 제 윗사람이기도 하잖아요.”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하하! 만약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솔직하다면 이런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