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이 너무 컸다. 하지만 이렇게 잔혹한 전투 속에서도 청관 수비군은 단 한 명도 물러서지 않았다. 모두 앞다투어 최전선에서 죽음을 각오하며 싸웠고 모든 이가 필사의 각오로 끝까지 버텼다. 격렬한 전투 속에서 병사들이 끊임없이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 싸웠지만 북라국의 광전사들은 한 곳에 힘을 집중해 방어선을 뚫어냈다. 한 곳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전체 전선이 위협받기 시작했다. 삼만 명의 병력은 너무 적었기에 북라국 병사들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전투가 시작된 지 반 시간 만에 청관의 절반 이상이 함락되었다. 상황이 통제 불능 상태에 이르자 엄연은 곧바로 대영의 잔류 병력에 명령을 내렸다. “서울에 보고 해. 베테랑 장군 엄연이 무능하여 청관이 곧 함락될 것이니 서둘러 금지 무기를 투하하라고!” 명령을 받은 소령은 바로 서울에 연락했다. “청관이 곧 함락됩니다. 서울은 바로 금지 무기를 투하하세요!” 서울 사령부에서는 사람들이 안절부절못하며 뛰어다녔다. 육도진은 분노로 거의 기절할 지경이었다. 그 이유는 금지 무기 투하를 담당하던 장군이 육도진의 명령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북라국 백만 대군이 청관을 함락시키고 화진 중원으로 쳐들어온다면 그 책임을 질 수 있겠어요?” 육도진은 날카롭게 질책했다. “우상님, 저는 구주부의 명령을 받아 무기 발사를 금지한 것입니다!” 그쪽의 담당 장군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망할, 현모가 방해할 리가 없고 진동왕도 분별없는 사람이 아니야.” 육도진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둘은 모두 대국을 생각하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십만 명으로 북라국 백만 대군을 막으려 하는 거지? 승리하더라도 피해가 너무 클 거야. 이 십만 명은 현재 화진의 가장 정예 부대야. 한 번의 전투로 모두 소모된다면 다음 전투는 어떻게 치르지?’ “우상님, 저는 말씀드렸습니다. 저에게 명령을 내린 것은 구주부입니다! 현모 대장이나 진동왕도 구주부의 이름으로 저에게 명령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 장군은 단호하게 말했
그것은 바로 윤구주의 명령이었다. 구주왕이 살아있다. 육도진은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어느새 눈물이 글썽해졌다. 사령부에서는 천둥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청관에서는 관문이 함락 직전에 이르렀지만 왕도에서는 아직 명령이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엄 장군님! 왕도에서 아직 회신이 없습니다. 무기를 지키는 장군이 왕도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전령병이 엄연에게 소식을 전했다. “지금 상황이 매우 급박합니다. 한시도 지체할 수 없어요.” “만약 북라국의 백만 군사들이 북주에 주둔하게 된다면 그 결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할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엄연은 화진의 죄인이 될 것이다. 청관의 절반 이상이 이미 함락되었다. 북라국의 광전사들은 장기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엄연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절체절명의 순간, 어두운 하늘에 갑자기 금빛이 번쩍이며 퍼져 나갔다. 한 줄기 햇빛이 먹구름을 뚫고 청관 대지에 비추었다. 청관의 병사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지만 정신이 맑아지고 피로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새로운 국운이었다. 북라국 대군의 후방 진영에 있던 아사 신전에서 온 몇 명의 신사들이 눈썹을 찌푸렸다. 한편, 옆에 있던 문씨 가문의 한 일원은 얼굴빛이 급격히 변했다. “윤구주는 천옥에 갇혀 있고 국운은 이미 흩어졌다고 들었는데 설마 윤구주가 천옥 탈출을 강행한 건가? 그렇게 되면 천옥에 갇혀 있던 난폭한 영기가 유출되어 구주에 위협을 가할 것이고 윤구주도 반드시 중상을 입을 텐데. 국운이 흩어지지 않더라도 약해져야 할 텐데 어떻게 이렇게 강한 기운이 나오는 거지?” 문씨 가문의 일원은 즉시 이 상황을 설산 정상에 있는 문창정에게 알렸다. 동시에 북주 문씨 가문 내부의 첩보원이 보고했다. “현모와 진동왕이 십만 대군을 이끌고 전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청관까지는 50리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설산 정상에 있는 문창정의 얼
같은 정신적 힘이 군인들에게 부여되어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상승했고 마치 각성제를 맞은 듯 돌격하며 전투에 임했다. ‘쿵!’ 현모는 하늘에서 내려와 혼자 관문을 막아섰다. 북라국은 백만 대군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현모 한 사람의 봉쇄를 뚫지 못했다. 가장 먼저 청관에 올라간 북라국의 광전사들은 오히려 수적으로 열세인 청관 수비군에게 포위당했다. 북라국의 최정예 광전사들이 포위당하는 것을 본 북라국 총사령관은 즉시 구조 명령을 내렸다. 그들은 냉병기로 관문을 점령하려는 생각을 포기하고 중포를 끌어와 청관을 맹폭격했다. 수 톤의 포탄이 쏟아졌지만 성수 대진에 의해 모두 막혔다. 어쩔 수 없이 북라국은 열병기로 무장한 대군을 이끌고 강행 돌파를 시도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500대의 주력 전차로 구성된 전투 군단이 전장 한쪽에서 돌진해 왔다. 그들은 험하고 울퉁불퉁한 산지를 가로질러 북라국 대군을 향해 달렸다. 더 먼 곳에서는 산지에 집결한 10개의 중포 부대가 일제히 포격을 가했다. 엄청난 포격이 지속되었다. 한데 모여 있던 북라국 대군은 전장의 살아있는 표적이 되었다. 한 발의 중포에 수백 명의 병사들이 산산조각 났다. 10여 분 동안의 맹폭격으로 최소 30만 명이 죽거나 다쳤다. 그와 동시에 전차들이 전장에 돌입해 북라국 병사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나를 따르라! 이 개자식들을 짓밟아 버려!” 왕실 휘장이 찍힌 전차가 선두에서 돌진했다. 그 전차의 지휘관은 다름 아닌 화진의 여섯째 공주 이홍연이었다. 그녀는 윤구주가 위기에 처하고 부왕이 유서를 남기고 지하 궁전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청관의 긴급한 군사 상황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이제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대국 따위 이제 신경 안 써!’ 그녀는 밤새 전국을 날아다니며 왕실의 은퇴한 베테랑 장군들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마침내 강철 대군을 집결했다. 그들은 산악을 넘어 북라국 대군의 측면을 기습하기 위
현모와 진동왕이 이끄는 십만 대군이 북라국의 백만 대군을 쓸어버렸다. 이렇게 비교해 보면 북라국이 모아놓은 백만 대군은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이 십만 명은 본래 수많은 전투를 겪어 온 전쟁의 베테랑들이자 엄선된 정예부대였다. 천옥에서의 전투를 거치며 그들은 모두 무술의 고수로서 혼자서 백 명을 상대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반면 북라국에서 이 십만 명과 맞설 만한 것은 광전사뿐이었다. 하지만 가장 앞서 돌격한 광전사들은 이미 전멸했고 냉병기 교전에서 북라국은 완전히 상대가 되지 못했다. 전세가 역전된 것을 본 북라국 총사령관은 남은 30만 명도 전멸할까 봐 두려웠다. 북라국의 사기도 완전히 무너졌다. 그는 포위된 선봉 부대와 중앙 부대를 버리고 후방 부대를 이끌고 전면 철수를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바로 문씨 가문이 말한 한 번의 전투로 화진의 국운을 멸한다는 건가요?” 북라국 총사령관은 문씨 가문을 원망했다. “실수했어요. 진동왕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 현모는 지금 구오지존의 경지에 올랐어요. 우리 아사 신전에서도 상위 10위 안에 드는 신이에요. 일단 철수하는 수밖에 없어요.” 아사 신전의 몇몇 신사들이 의견을 나눈 후, 대군을 버리고 먼저 철수했다. 그런데 갑자기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북라국이 철수하려는 방향에 서리가 내리며 눈에 보이는 얼음벽이 길을 막아섰다. “현모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어! 수백 리의 전법을 이렇게 짧은 시간에 펼칠 수는 없어. 그렇다면 누구지?” 아사 신전의 신사들이 의아해했다. 그들이 누가 북라국의 길을 막았는지 추측하는 사이에 넓은 평원 위에 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조용히 서 있었다. 사신 같은 눈빛으로 전장을 훑어보았다. 이미 사기가 완전히 무너진 북라국 병사들은 이 사람의 위압감에 눌려 일부 병사들은 그대로 미쳐버렸다. “당신은 우리 아사 신전과 적대하려는 거야?” 아사 신전의 신관들이 그 신적인 존재에게 소리쳤다. 그 말을 들은 그 사람은 아무런 동작도 하지 않았
“영령전? 그런 게 있긴 하지. 하지만 그냥 사악한 영혼들일 뿐이야. 사신이라고 부르기도 어렵지.” “뭐? 이 망할 놈! 감히 우리 신주를 모욕하다니!” “모욕? 맞아! 내가 곤륜 구역을 누볐을 때 아사 신전을 쓸어버렸지. 영령전의 십만 개 사악한 영혼들을 내가 모조리 죽여버렸어. 그렇지 않다면 너희 뒤에 있는 그 아사 신전의 신사들이 왜 나를 이렇게 두려워하겠어?” 윤구주는 차갑게 비웃으며 말했다. 북라국 총사령관은 잠시 멍해졌지만 잠시 망설인 후 다시 도끼를 들고 돌격했다. “너는 그래도 남자네. 그 가짜 신들보다 훨씬 나아. 하지만 화진을 건드리면 안 됐어.” 윤구주가 손가락을 튕기자 거대한 도끼와 함께 그의 두 팔이 부서졌다. 북라국 총사령관은 고통에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소리가 나오기도 전에 빠른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곧이어 그의 시야가 빙글빙글 돌더니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자신의 머리가 없는 몸통이었다. 윤구주는 북라국 총사령관의 머리를 한 방에 날려버렸다. 그리고 그 피 묻은 머리를 들고 북라국 대군을 향해 걸어갔다. 북라국 병사들은 이미 정신이 붕괴한 상태였다. 그들은 마지막 희망을 아사 신전의 신사들에게 걸었다. 그들이 의지하던 신사들은 잠시 고민하더니 결국 무릎을 꿇고 항복했다. “구주왕, 항복할게요! 저희는 문씨 가문의 많은 정보를 알고 있어요. 곤륜 구역에서도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어요. 당신이 분명 흥미로워할 거예요!” “저희의 유일한 요청은 목숨만은 살려달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저희의 수련을 없애도 괜찮습니다!” 신사들은 말을 마치고 머리를 땅에 닿도록 숙이며 복종을 표했다. 윤구주는 대답하지 않고 남은 북라국 병사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는? 항복하면 전쟁 포로로 처리해 주겠다. 항복한다고 다 살 수는 없지만 모두 죽지는 않을 것이다. 계속 저항하면 너희에게 기다리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야.” 윤구주의 말은 단순한 경고였지만 이 말이 그들의 반항심을 자극해 자신에게 덤벼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울지 마, 내가 돌아왔잖아. 그리고 누군가는 분명 실망했을 거야.” 윤구주는 기를 모아 물을 만들어 이홍연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군중을 뚫고 문씨 가문의 일원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그 한 번의 눈빛에 그는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구주왕! 모든 것은 저와 무관합니다! 저는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 우리 아가씨의 명령을 어길 수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무릎을 꿇고 울부짖었다. “그런 말은 나에게 하지 마. 네가 죽을 만한지 아닌지는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야. 국법이 판단할 일이지.” 윤구주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십만 대군은 전진하며 분리된 북라국 군대를 전멸시켰다. 만약 진동왕이 소리치지 않았다면 그들은 항복한 십수만 명도 함께 죽였을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쉬워도 마음을 죽이는 것은 어려워. 어떤 나라에도 선과 악이 공존하지. 죽임을 멈추지 않으면 원한도 끝나지 않아. 중요한 것은 권력자들을 굴복시키는 거야.” 진동왕은 진지하게 말했다. 과거를 겪은 그는 전쟁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소위 전쟁이란 권력자의 사욕에 불과하다. 권력자의 야심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들은 원한을 이용해 세력을 만드는 데 능숙하다. 문명이라는 큰 국면에서 봐도 마찬가지다. 권력을 쥔 자들이 가장 잘하는 일은 시비를 뒤엎고 진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북라국이 이번에 명분 없이 화진을 침공했을 때도 그들은 병사들을 동원하며 일련의 정당한 이유를 붙였다. “아저씨 말이 맞아요. 근본은 아사 신전에 있고 북라국의 왕은 광신적인 종교 주의자예요.” 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진동왕은 살기가 가득한 십만 대군을 진정시키고 윤구주에게로 다가왔다. 윤구주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진동왕은 눈물을 흘리며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아저씨, 이렇게 나이가 들었는데 어째서 아이처럼 우는 거예요?” 윤구주는 농담을 던졌다. “그게 같아? 너 같은 인물이 화진에서 태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아? 우리나라는 너처럼 천
엄연은 윤구주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성 아래의 시체 더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보세요. 그들은 모두 누군가의 자식이고 누군가의 아버지예요. 화진도 그렇고 북라국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들은 가장 안전한 곳에 숨어서 전사들이 줄줄이 쓰러지는 것을 마치 남의 일처럼 바라보고 있어요. 전쟁에서 승리하면 공로와 영예는 모두 그들의 것이 되죠. 전쟁에서 패배하면 그들은 복수를 꿈꿔요. 패배로 국가 경제가 무너지면 고통받는 것은 누구 일가요? 복수를 위해 싸울 때도 목숨을 잃는 건 언제나 같은 부류의 사람들의 자손들이에요.” 이 말을 하며 엄연은 윤구주를 깊이 바라보았다. 윤구주는 그 속뜻을 이해했다. “엄 장군, 안심하세요. 이번에 종맹과 전쟁을 벌이는 것은 모든 위험 요소를 일거에 해결하기 위함이에요. 우리 이 세대의 희생으로 화진의 천추만대의 평화를 얻으려 합니다.” 윤구주의 눈빛은 단호했다. 이 결심은 끝까지 흔들리지 않을 것이었다. “네, 구주왕이 있으니 안심이 되네요.” 엄연은 무거운 고개를 끄덕이며 윤구주 뒤에 서 있는 현모와 사기가 충만한 십만 명의 신세대 대군을 바라보았다. 장군과 병사들이 하나가 된 모습을 보며 그는 이제 안심하고 은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몇 장군들이 이제는 뒤로 물러나 쉴 때가 됐다고 생각하던 순간, 윤구주의 날카로운 황금빛이 번뜩이며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장군, 북경에서 이렇게 많은 일이 일어났으니 아직도 당신이 큰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은퇴는 서두르지 마세요.” 엄연은 잠시 멍해졌다가 몇몇 동료들과 눈을 마주치며 모든 것을 이해했다. 원래 엄연이 은퇴하면 북경왕이 북역을 지킬 예정이었다. 그러나 북경왕이 갑자기 실종된 이후로 돌아오지 않았고 왕부의 대장들은 죽거나 실종되었다. 북역 삼주의 군사력도 심각하게 손실을 보았다. 거의 모든 장군이 전사한 상태였다. 엄연은 누가 이런 일을 벌였는지는 몰랐지만 현재 상황을 보면 실종된 북경왕도 이미 목숨을 잃었을 가능성이 컸다. 역시나
“형님!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형님이 죽을까 봐 정말 무서웠어요.” 공수이는 윤구주를 붙잡고 울부짖었다. “울면 울지, 코물 같은 건 내 옷에 묻히지 마! 저리 비켜!” 다른 사람들이 윤구주의 생사를 걱정하는 것은 윤구주가 나라를 지키는 중심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국면이 흔들리지 않도록 걱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공수이는 순수하게 윤구주를 잃을까 봐 두려웠다. 윤구주는 비록 그를 꾸짖었지만 공수이는 정신없는 구석이 있어도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돌격대에 나섰다. 공수이는 여섯째 공주 이홍연을 찾아갔을 때 그는 이미 살아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때 공수이는 공씨 가문을 원망했다. 적국이 국문을 넘어 화진의 무술을 짓밟으려 했는데 공씨 가문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던 건 아니야. 공씨 가문도 사람을 보내려고 했잖아?” 윤구주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사람을 보내려고 했지만 육도진이 금지 무기로 청관을 폭격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철수 명령을 내렸다. 윤구주는 강요하지 않았다. 이런 위기 속에서도 화진의 백개 가문 중 공씨 가문만이 나설 수 있었다. 화진의 안정을 유지하려면 단순히 살육만으로는 안 된다. 도울 것은 도우고 상을 줄 것은 상을 주어야 한다. 윤구주는 이미 진동왕에게 공씨 가문을 포상하는 문서를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구주왕, 기자회견 장소가 준비되었습니다. 모두 준비되었고 구주왕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모가 보고했다. “알았어.” 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수이를 밀어내고 현모를 따라 기자회견 장소로 향했다. 이번 기자회견은 정부 중심에서 열렸고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다. 윤구주가 회장에 들어서자 현장의 장군들이 일제히 윤구주에게 경의를 표했다. 카메라 렌즈는 윤구주에게 초점이 맞춰졌다. 윤구주가 전 세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화진의 거의 모든 가정에서는 TV나 휴대폰으로 이 생중계를 시청하고 있었다. 윤구주의 모습이 화면에 비치자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
백호는 아직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어느덧 이백오십 계단까지 올라왔다. 이 단계부터는 실체화된 술법이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람, 불 번개와 같은 속성의 영기가 점점 강해졌다. 여기서부터는 육신 횡련의 수련자는 강력한 체질로 버티고 술도 재능이 뛰어난 수련자는 천지 영기를 다루는 능력으로 버텨야 했다. 한마디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갈리는 구간이었다. 어느 한 분야라도 특출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백호는 술도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강인한 육체 하나로 견디고 있었다.웅!성수의 피가 진동하며 백호의 몸을 지탱했다. 각종 속성의 영기가 몰아쳤지만 백호는 성수혈의 힘을 빌려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수련자에게 있어서 성수의 혈맥이나 법보 등은 모두 신체 외적인 재능으로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꼼수나 편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천 가지 변화와 만 가지 신통력이 있어도 결국 만법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법기든 혈맥이든 이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천지 영기를 이용한 술법도 결국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반작용을 맞게 된다. 따라서 수련의 길에는 애초에 편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성수 혈맥 같은 천지의 보물은 보통 사람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윤구주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이를 감당하는 건 백호 자신이었다. 성수 혈맥의 힘을 온전히 감당하며 백호는 결국 삼백 계단까지 올라섰다.계단의 꼭대기 근처에는 이미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이 여럿 서 있었다. 서요산 검종은 근대에 들어 삼백 계단을 넘는 인재가 드물었다. 최근 백 년 동안 삼백 계단을 넘은 사람이 고작 열 명 남짓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삼백여 계단에서 멈췄다. 그런데 지금 백호는 삼백이십 계단까지 올라선 것이다. 이 정도면 서요산 검종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한 성과였다.이런 제자가 나타난다면 종문 전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서요산의 진인들까
“한 사람의 품성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그렇게 많은 수련자를 키워낸다면 결국 천하의 마인을 직접 만들어 내는 꼴이 아니겠어?”청현이 바로 그 실패한 예다. 서요산 검종 종주가 청현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나머지 그의 인성을 무시하고 양성한 끝에 결국 역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그럼 저하 서요산에 입문한 무술 무인들은 평균적으로 몇 계단까지 오르는지 아십니까?” 백호가 호기심에 물었다. 윤구주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무술 무인의 정확한 데이터는 모르지만 검종 종주와 잡담할 때 들어보니 검종 제자들의 수준이 갈수록 떨어져서 천 년 전만 해도 평균 삼백 계단 정도였는데 요즘엔 백 계단도 못 오른다고 하더구나. 가끔 삼백 계단을 오르는 자라도 나오면 검종 전체가 몇 년은 떠들썩할 정도라고 했어.”“구백구십구 계단까지 있는 시험인데 천 년 전 전성기에도 겨우 삼백 계단이요?” 백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요산 검종의 수준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때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야?” 윤구주는 흥미롭게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는 당장이라도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윤구주의 허락을 구한 뒤 바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계단 두 계단... 오십 계단까지는 아무 어려움도 없었다. 백호는 오십 계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서요산 검종이 별것 아니라며 놀려댔다. 하지만 육십 계단쯤 올랐을 때 처음으로 압력을 느꼈다. 마치 몸 위에 작은 차 한 대가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백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백 계단에 도달하자 압력이 갑자기 커졌다. 등에 작은 승용차 대신 소형 트럭이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백호의 한계에도 가지 못했다.“근래 사람들의 평균이 백 계단도 못 넘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예전의 무인 횡련은 황제도 오를 수 있었지만 요즘 무인 횡련은 죽어라 노력해도 소형 트럭 하나 못 버티는 수준이니 말입니다.”백호는 농담을 던지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
전에 임정설은 구오 지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힘쓰며 수모를 견뎌내고 살아남으려 했다.하지만 이제 황제가 된 그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그 탓에 이번 관문 앞에서 그는 망설였다.살아 있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었다.죽음을 마음에 품은 자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관문이었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청해만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황제가 되면 곤륜 구역에서 최고 경지에 도달하는 건데.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왜 죽음을 택하려는 거지?’“저하, 국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합니다. 저하도 사랑하던 이에게 배신당했어도 결국 극복해 나갔잖습니까.”백호도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여전히 국주보다는 왕이 더 낫다고 여겼다.“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느냐.” 윤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백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는 어리숙하고 말솜씨도 없기에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내가 문아름에게 배신당한 건 억울한 일이지만 나는 그녀에게 잘못한 게 없다. 오히려 그녀가 날 배신한 거다. 하지만 국주는 그 반대였지. 그가 그녀를 저버린 거야. 정이 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지혜가 지나치면 오히려 상처를 입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쓰라린 후회는 가진 뒤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생사를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윤구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소채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도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느꼈다.“그럼 복수하면 되지 않나요?” 백호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이때 청해가 눈치를 채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상대가 너무 강해서 못 이기는 거지. 황제에 오르기 전까진 제대로 맞붙을 힘도 안 돼. 오르고 나서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하고.”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 말이 맞았다.“그럼 우리가 국주님 대신 복수해 드리면 되잖아요? 국주님은 제 왕이기도 하지만 제 윗사람이기도 하잖아요.”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하하! 만약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솔직하다면 이런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