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깜짝할 사이, 윤구주는 구류족 족장과 살아있던 구류족 사람들을 전부 몰살했다.현장에는 군형 삼마 방지형 혼자만 남았다.안타깝게도 그는 얼굴이 파랗게 질린 상태였다.그는 주위의 시체와 눈앞의 모든 걸 둘러보았다. 그는 이제야 독고명이 왜 그가 반드시 죽을 거라고 확신했는지를 깨달았다. 방지형은 그제야 비참하게 웃었다.“이젠 당신 차례야!”윤구주의 살기가 번뜩이는 눈빛이 방지형에게 닿았다.그의 눈빛은 방지형의 영혼을 집어삼킬 듯했고, 방지혀은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말해. 왜 채은이를 해친 거야? 누가 지시한 것이지?”윤구주의 검과 같은 두 눈이 방지형을 바라보고 있었다.옆에 있던 아름다운 연규비와 동산은 모두 윤구주의 뒤에 서 있었다.방지형은 입가에 쓴 미소를 지었다. 그는 들고 있던 검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오늘 난 틀림없이 죽겠지?”그는 갑자기 절망 가득한 얼굴로 윤구주에게 물었다.“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데?”윤구주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방지형은 비참한 미소를 지었다.“이젠 무슨 얘기를 해도 늦었겠지. 네 여자를 해친 일은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얘기해줄 수는 없어. 넌 그 대단한 인물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만 알면 돼.”윤구주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그는 소채은을 해치려고 한 사람이 누군지 짐작이 갔다.“됐어. 얘기는 끝냈지? 끝났으면 이젠 죽어야지!”윤구주가 말했다.“그래. 이제 난 죽어야 할 때가 됐어. 죽기 직전에 이 얘기는 해주고 싶어. 사실 천시 고충은...”방지형은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갑자기 윤구주에게 다가갔다.그가 천시 고충 얘기를 꺼내자 갑자기 그의 입가에 잔인하고 기괴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갑자기 가슴팍을 툭 쳤다.펑 소리와 함께 그의 체내에 숨어있던 무궁한 힘이 갑자기 폭발했다.패도멸정!이루 형언할 수 없는 엄청난 검광이 방지형의 가슴에서 나왔다.검의가 나타나자 검은색 검의 형태가 불시에 나타났다.비록 진짜 검은 아니지만 조금 전 암흑의 무신보다 더욱 무시무시했다.패도
그의 머리 위쪽에서 허공을 가르며 내려왔던 패도가 그의 손에 가로막혀 있었다.“뭐? 죽... 죽지 않은 거야?”방지형은 윤구주가 한 손으로 패도를 잡은 걸 보자 공황에 빠졌다.연규비는 윤구주의 멀쩡한 모습을 보자 무척 기뻤다.“겨우 패도멸정으로 날 죽이고 싶었어? 넌 모르겠지만, 독고 일가의 최강이었던 패도윤회참도 날 다치게 하지 못했어. 그런데 네가 날 다치게 할 수 있을 리가.”윤구주는 갑자기 고개를 들면서 서늘한 시선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그는 방지형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그는 기괴하게 말한 뒤 손가락에 힘을 주었고 댕강 소리와 함께 수많은 검의로 이루어진 패도는 그대로 부러졌다.윤구주가 패도 검의를 부러뜨리는 순간 그는 고개를 홱 들어 방지형을 바라보았다.“이젠 채은이에게 진 빚을 갚을 때가 됐어.”말이 끝나기 무섭게 윤구주가 손가락에 힘을 주었고 순간 속박하는 힘이 방지형의 온몸을 휘감았다.그것은 마치 트럭에 깔린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빠각 소리와 함께 방지형은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기분을 느꼈다.몸은 속박의 힘 때문에 일그러져서 변형했고 혈흔이 그의 피부와 얼굴에 생겼다.그는 몸의 모든 구멍에서 피를 흘리기 시작했고 몸도 피범벅이 되었다.결국에 그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면서 윤구주에 의해 고깃덩이가 된 채 죽었다.방진형이 완전히 고깃덩이가 된 걸 본 윤구주는 손을 들었고 순간 금빛 연꽃 화염이 펑 소리를 내면서 불타올랐다.잠시 뒤 방지형은 완전히 타버렸다.“채은아, 드디어 널 위해 복수했어.”윤구주는 방지형을 죽인 뒤 중얼거렸다.옆에 있던 연규비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윤구주의 곁을 지켰다.군형 삼마가 드디어 죽었다.그들만 죽은 게 아니라 심지어 그들을 감싸고 돌던 5대 가족마저 전부 몰살당했다.윤구주는 모든 이들을 죽였다. 멀리 떨어진 곳에 세 사람이 가만히 서 있었다.윤구주가 패도 검의를 부서뜨리고 방지형을 죽이자 제일 뒤에 서 있던 검을 안은 남자가
깊은 숲속.윤구주가 마지막으로 방진형을 죽인 뒤 연규비는 천천히 윤구주의 곁으로 다가가서 말했다.“구주야, 드디어 채은 씨를 위해서 복수했으니 이제 우리도 돌아가자.”“아니, 난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어.”윤구주가 말했다.연규비는 당황했다.“무슨 일인데?”윤구주는 대답하지 않고 갑자기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했다.“요기를 거두어들여야 해.”“뭐라고? 요기?”그 두 글자에 연규비는 당황했다.“맞아. 채은이가 당한 천시 고충은 군형에서 가장 지독한 독이야. 난 지금 당장은 이 독을 해독할 수 없어. 하지만 소생술로 군형 사람들의 요기를 흡수해서 채은이 체내의 시독이 몸에 퍼지는 걸 막을 수 있어.”연규비는 그제야 깨달았다. 윤구주는 소채은의 독이 퍼지는 걸 막을 생각이었다.윤구주는 말을 마친 뒤 자신의 봉왕팔기 중 하나인 소생술을 시전했다.그는 두 손으로 수인을 맺었고 한 줄기 녹색 빛이 그의 손바닥에 나타났다.“요기여, 여기 모이거라!”그가 소생술을 시전하는 순간, 아수라장이던 대지에서 갑자기 검은색의 사악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그 기운들은 죽임당한 구류족 사람들의 기운이었다.거기에는 무신도 포함이었다.검은색 요기들이 나타나자 윤구주는 그것을 손바닥으로 빨아들였고 순간 무수한 기운이 그의 손바닥에 빨려 들어갔다.모든 걸 마친 뒤 윤구주는 천천히 일어났다.“드디어 끝났어. 이 요기들로 당분간 채은이 체내의 독이 퍼지는 걸 완벽히 막을 수 있었으면 좋겠네.”...서남, 백화궁.윤구주와 연규비가 떠난 뒤 백경재는 줄곧 혼수상태인 소채은의 곁을 지켰다.그를 제외하고 백화궁의 여자들과 잔인한 나찰 인해민도 있었다.현재 백화궁의 모든 여자가 병상 위에 누워있는 여자가 윤구주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그들은 비록 소채은의 신분은 몰랐지만 다들 소채은을 부러워했다.그들이 보기에 윤구주는 신과 같은 남자였고 거기에 잘생기기까지 했다.그의 여자가 된다는 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었다.“휴, 저하는 왜 아직도 안
백경재가 기쁘게 말했다.윤구주가 말했다.“백 선생, 채은이는?”“저하, 채은 씨는 잘 계십니다. 백화궁에 계세요.”“그래, 일단 그곳으로 안내해 줘!”백경재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윤구주를 백화궁 안으로 안내했다.이때 백화궁 안에 있던 여자들도 윤구주와 연규비가 돌아온 걸 보고 전부 기쁜 얼굴로 밖으로 달려 나왔다.윤구주는 소채은이 걱정되는 마음에 빠르게 백경재를 따라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방 안, 소채은은 조용히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천시 고충에 당한 그녀는 지금까지도 혼수상태였고 예쁜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채은아, 나 돌아왔어.”윤구주는 부드럽게 말한 뒤 소채은의 곁에 앉으며 그녀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저하, 군형의 그 몹쓸 자식들은요?”뒤에 있던 백경재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전부 죽였어.”윤구주가 덤덤히 말했다.“잘됐습니다. 드디어 채은 아가씨를 위해서 복수하셨군요!”백경재는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백 선생, 백 선생은 먼저 나가 있어. 난 채은이를 치료할 거야.”윤구주가 말했다.“네!”백경재는 곧바로 방을 나섰다.백경재가 떠난 뒤 윤구주는 소채은을 치료하기 시작했다.소생술을 시전하자 녹색 빛이 윤구주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왔고 곧이어 윤구주는 손가락으로 소채은의 등에 있는 혈 자리를 십여 곳 눌렀다. 그러고서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오른 손바닥을 펼쳤다. 그러자 넘실대는 사악한 검은색 요기가 그의 손바닥에 나타났다.이것은 윤구주가 떠나기 직전 군형에서 수집했던 요기였다.“이 기운이 당분간 시독을 억누를 수 있었으면 좋겠어.”윤구주가 말을 마친 뒤 오른손가락으로 가리키자 검은색 요기가 흐르는 물처럼 소채은의 체내로 파고들었다.요기가 소채은의 체내로 들어간 뒤 윤구주는 소생술을 시전하여 소채은을 위해 고독을 억눌렀다.안에서 윤구주가 소채은을 치료하고 있을 때 밖에서 백경재는 보초를 서고 있었다.그런데 갑자기 거인이 백경재의 시야에 들어왔다.그 거대한 몸집의 거인은 다름 아닌 동산이
동산은 백경재에게 맞았음에도 꼼짝하지 않았다.마치 외부의 모든 것이 그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듯 말이다.백경재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흰 치마를 입은 여신 같은 연규비가 앞에서 걸어왔다.“백경재 씨, 구주는요?”백경재가 다급하게 말했다.“연 궁주님, 저하는 지금 채은 아가씨를 위해 치료하고 계십니다.”연규비는 그 말을 듣자 굳게 닫힌 문을 바라봤다.“연 궁주님, 이놈 누군지 아십니까? 왜 우리 저하의 방문 앞에 서 있는 겁니까? 게다가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바위처럼 굽니다.”백경재는 눈앞의 동산을 가리키면서 연규비를 향해 궁금한 듯 물었다.연규비는 웃었다.“시체니까 당연히 말을 못 하죠.”“뭐라고요? 시체요?”그 말을 들은 백경재는 화들짝 놀라서 흠칫하며 빠르게 뒤로 몸을 물렸다. 그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눈앞의 동산을 바라보았다.“맞아요! 군형 전씨 일족의 시괴 거인이에요. 하지만 지금은 구주로 인해 영지를 갖추게 되어서 구주의 충실한 노예가 되었어요.”연규비가 다시 말했다.그 말에 백경재는 멍해졌다.그는 두려움이 드리워진 두 눈으로 눈앞의 시괴 거인 동산을 바라보았다. 그는 궁금한 듯 동산을 위아래로 훑어봤다.과거 용호산 태진도의 제자였던 그는 당연히 시괴술에 대해 알고 있었다.하지만 직접 두 눈으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오늘 이렇게 진정한 시괴 거인을 만날 줄은 생각지 못했다.“맙소사, 시괴라고요?”백경재는 중얼거리면서 조심스레 동산의 곁으로 걸어갔다.동산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심지어 눈빛도 멍했다.자세히 살펴본 뒤 백경재는 용기를 내서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동산의 피부를 만져봤다. 뼈가 시리도록 차가운 기분이 들었고, 툭툭 두드리기까지 하더니 백경재는 매우 흥분했다.“세상에, 이 거인 왜 철 같습니까?”연규비가 대답했다.“틀렸어요. 철이 아니라 구리를 뒤집어써서 이렇게 된 거예요.”“구리요?”“맞아요!백경재는 그 말을 듣자 눈을 빛냈다.탕탕탕.동산의 몸을 다시 쳐보던 백경
“채은아!”소채은이 깨어난 소리를 들은 윤구주는 곧바로 들뜬 얼굴로 서둘러 그녀에게 달려갔다.연규비와 백경재도 그를 뒤따랐다.병상 위.소채은이 입술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미간에서 검은색 요기가 한 줄기 나와서 그녀의 온 몸의 경맥으로 퍼졌다.“요기가 소용이 있네!”윤구주는 검은색 요기가 소채은의 전신으로 뻗어져 나가는 걸 바라보면서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흥분한 그는 소채은의 차가운 손을 잡고 외쳤다.“채은아, 채은아!”몇 번 부르자 소채은의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 그녀는 아름다운 눈을 천천히 떴다.소채은이 드디어 정신을 차리자 옆에 있던 연규비와 백경재는 모두 기뻐했다.정신을 차린 소채은은 아주 힘이 없었다. 그녀는 눈앞의 윤구주를 바라보았다.“구... 주야? 너야?”윤구주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야!”“구주야, 나 죽은 거 아니었어? 여긴 어디야?”소채은이 의아한 듯 물었다.천시 고충에 당한 뒤 소채은은 끝없는 어둠의 심연 속에 빠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그녀는 자신이 죽은 줄로 알았다. 그러나 윤구주가 자신의 앞에 나타나자 소채은은 무척 의아했다.“바보야! 내가 왜 널 죽게 놔두겠어?”윤구주는 손을 들어 그녀의 창백한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나 안 죽었어? 하지만 난 어둠 속에 빠진 지 아주 오래된 걸로 기억하는데. 구주야, 여긴 어디야? 우리 부모님은? 우리 집은?”소채은은 힘겹게 낯선 사방을 둘러보면서 참지 못하고 물었다.“채은아, 두려워하지 마. 우리는 지금 서남에 있어. 군형이 아니라!”“뭐라고? 서남?”소채은은 의아했다.“맞아.”“구주야, 내가 왜 서남에 있는 거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소채은은 몸을 일으켜 앉으려 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윤구주는 그녀를 부축하면서 부드럽게 말했다.“괜찮아, 넌 그냥 고독에 당한 것뿐이야.”“고독?”소채은은 그 말을 듣고 두려워했다.“맞아.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내가 치료해 줄 거니까!”윤구주가
윤구주가 쓸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그 말을 들은 연규비는 당황했다.“구주야, 어떡해야 이 빌어먹을 기린화독을 깨끗이 없앨 수 있는 거야? 나한테 얘기해 줘. 내가 도와줄게.”연규비가 말했다.그러나 윤구주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넌 도와줄 수 없어. 내 체내의 기린화독을 없애기 위해서는 천년초 세 개를 전부 모아서 내 내공이 절정에 다르게 해야만 가능해.”“천년초 세 개?”윤구주의 말에 연규비는 흠칫했다.“맞아. 이런 엄청난 보물은 아마 화진의 보물 창고에도 없을 거야. 아주 찾기 어려운 것이지.”윤구주가 탄식했다.그의 말대로였다.기린화독에 당한 두 윤구주는 지금까지 계속 천년초 세 개를 찾아서 자신의 화독을 치료하려 했다.그러나 지금까지 그는 오직 천년 빙설화 하나만 찾았다.다른 두 개는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그 말을 들은 연규비가 말했다.“구주야, 걱정하지 마.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다른 천년초 두 개를 찾아줄게.”연규비의 말에 윤구주는 아주 감동했다.소채은은 그래도 잠깐 정신을 차렸다.하지만 너무 허약한 탓에 이내 깊은 잠에 빠졌다.소채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윤구주는 갑자기 백경재에게 말했다..“백 선생, 컵 하나 가져다줘.”‘응? 컵?’백경재는 당황했지만 별 생각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서 투명한 컵 하나를 들고 와서 윤구주에게 건넸다.윤구주는 그것을 건네받은 뒤 손가락으로 자신의 팔에 상처를 냈고, 그의 팔 위로 피가 흘렀다.윤구주가 자신의 팔에 상처를 내는 걸 보고 연규비는 깜짝 놀랐다.“구주야, 뭐 하는 거야?”그녀는 아름다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앞의 윤구주를 바라보았다.백경재 또한 당황한 얼굴이었다.윤구주만이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 요기로 인해 소채은이 잠깐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시독이 퍼지는 걸 막는 건 어렵다는 걸 말이다. 정말로 그 시독을 막으려면 윤구주 체내의 구양진용기를 이용해야 했다.“너희는 몰라서 그래. 내가 수련한 구양진용기 혈액으로만 채은이 체내의 시
소채은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비록 여전히 힘이 없었지만 침대에 혼수상태로 누워있는 것보다는 나았다.방 안에서 윤구주는 홀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내공을 회복하고 있었다.그는 자신의 체내 정혈로 고독을 억눌렀다. 그로 인해 윤구주의 소모가 엄청났기에 반드시 서둘러 회복해야 했다.밖에서 연규비는 문 앞에 서서 방 안의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에는 걱정이 가득했다.그녀는 윤구주를 사랑했다.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다.그러나 아쉽게도 윤구주는 달랐다.윤구주는 줄곧 연규비를 여동생처럼 여겻다.연규비 또한 그 점을 알고 있었기에 뭔가를 바란 적이 없었다.묵묵히 윤구주의 방을 바라보던 연규비가 중얼거렸다.“구주야, 걱정하지 마. 난 네 체내의 기린화독을 없앨 수 있게 그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널 위해 천년초를 찾아낼 거야.”그렇게 말한 뒤 연규비는 그제야 떠났다.눈 깜짝할 사이 이틀이 지났다.이틀 사이 소채은의 시독이 드디어 윤구주의 구양진용기에 의해 억눌러졌다.예상대로라면 앞으로 한두 달 동안, 소채은은 더는 시독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다.소채은이 깨어났다.정신을 차리니 목이 탔다.윤구주는 서둘러 그녀에게 물 한 컵을 건넸고 그걸 마신 뒤 소채은은 또 음식을 조금 먹었다.체력이 조금 회복된 것 같자 소채은은 그제야 윤구주에게 물었다.“구주야, 나 나가서 걷고 싶은데 나랑 같이 나가줄래?”“당연하지!”그렇게 윤구주는 소채은이 침대에서 내려올 수 있게 그녀를 부축했다.방문을 열고 윤구주는 소채은을 데리고 백화궁 뒷마당으로 나왔다.뒷마당은 아주 컸고 그곳에는 정자도, 인공 산도, 강도 있어서 무릉도원과 다름없었다.게다가 주위에는 엄청난 미모의 백화궁 여자들이 서 있었다.백화궁이 미녀들은 윤구주가 나오자 다들 아름다운 눈을 반짝이면서 작은 목소리로 의논했다.많은 예쁜 여자들이 마당에 있자 방금 정신을 차린 소채은은 무척 의아했다. 그녀는 아름다운 눈을 깜빡이면서 예쁜 여자들을 바라보며 윤구주에게 물었다.“구주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
백호는 아직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어느덧 이백오십 계단까지 올라왔다. 이 단계부터는 실체화된 술법이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람, 불 번개와 같은 속성의 영기가 점점 강해졌다. 여기서부터는 육신 횡련의 수련자는 강력한 체질로 버티고 술도 재능이 뛰어난 수련자는 천지 영기를 다루는 능력으로 버텨야 했다. 한마디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갈리는 구간이었다. 어느 한 분야라도 특출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백호는 술도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강인한 육체 하나로 견디고 있었다.웅!성수의 피가 진동하며 백호의 몸을 지탱했다. 각종 속성의 영기가 몰아쳤지만 백호는 성수혈의 힘을 빌려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수련자에게 있어서 성수의 혈맥이나 법보 등은 모두 신체 외적인 재능으로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꼼수나 편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천 가지 변화와 만 가지 신통력이 있어도 결국 만법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법기든 혈맥이든 이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천지 영기를 이용한 술법도 결국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반작용을 맞게 된다. 따라서 수련의 길에는 애초에 편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성수 혈맥 같은 천지의 보물은 보통 사람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윤구주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이를 감당하는 건 백호 자신이었다. 성수 혈맥의 힘을 온전히 감당하며 백호는 결국 삼백 계단까지 올라섰다.계단의 꼭대기 근처에는 이미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이 여럿 서 있었다. 서요산 검종은 근대에 들어 삼백 계단을 넘는 인재가 드물었다. 최근 백 년 동안 삼백 계단을 넘은 사람이 고작 열 명 남짓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삼백여 계단에서 멈췄다. 그런데 지금 백호는 삼백이십 계단까지 올라선 것이다. 이 정도면 서요산 검종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한 성과였다.이런 제자가 나타난다면 종문 전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서요산의 진인들까
“한 사람의 품성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그렇게 많은 수련자를 키워낸다면 결국 천하의 마인을 직접 만들어 내는 꼴이 아니겠어?”청현이 바로 그 실패한 예다. 서요산 검종 종주가 청현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나머지 그의 인성을 무시하고 양성한 끝에 결국 역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그럼 저하 서요산에 입문한 무술 무인들은 평균적으로 몇 계단까지 오르는지 아십니까?” 백호가 호기심에 물었다. 윤구주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무술 무인의 정확한 데이터는 모르지만 검종 종주와 잡담할 때 들어보니 검종 제자들의 수준이 갈수록 떨어져서 천 년 전만 해도 평균 삼백 계단 정도였는데 요즘엔 백 계단도 못 오른다고 하더구나. 가끔 삼백 계단을 오르는 자라도 나오면 검종 전체가 몇 년은 떠들썩할 정도라고 했어.”“구백구십구 계단까지 있는 시험인데 천 년 전 전성기에도 겨우 삼백 계단이요?” 백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요산 검종의 수준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때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야?” 윤구주는 흥미롭게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는 당장이라도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윤구주의 허락을 구한 뒤 바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계단 두 계단... 오십 계단까지는 아무 어려움도 없었다. 백호는 오십 계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서요산 검종이 별것 아니라며 놀려댔다. 하지만 육십 계단쯤 올랐을 때 처음으로 압력을 느꼈다. 마치 몸 위에 작은 차 한 대가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백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백 계단에 도달하자 압력이 갑자기 커졌다. 등에 작은 승용차 대신 소형 트럭이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백호의 한계에도 가지 못했다.“근래 사람들의 평균이 백 계단도 못 넘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예전의 무인 횡련은 황제도 오를 수 있었지만 요즘 무인 횡련은 죽어라 노력해도 소형 트럭 하나 못 버티는 수준이니 말입니다.”백호는 농담을 던지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
전에 임정설은 구오 지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힘쓰며 수모를 견뎌내고 살아남으려 했다.하지만 이제 황제가 된 그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그 탓에 이번 관문 앞에서 그는 망설였다.살아 있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었다.죽음을 마음에 품은 자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관문이었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청해만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황제가 되면 곤륜 구역에서 최고 경지에 도달하는 건데.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왜 죽음을 택하려는 거지?’“저하, 국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합니다. 저하도 사랑하던 이에게 배신당했어도 결국 극복해 나갔잖습니까.”백호도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여전히 국주보다는 왕이 더 낫다고 여겼다.“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느냐.” 윤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백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는 어리숙하고 말솜씨도 없기에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내가 문아름에게 배신당한 건 억울한 일이지만 나는 그녀에게 잘못한 게 없다. 오히려 그녀가 날 배신한 거다. 하지만 국주는 그 반대였지. 그가 그녀를 저버린 거야. 정이 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지혜가 지나치면 오히려 상처를 입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쓰라린 후회는 가진 뒤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생사를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윤구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소채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도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느꼈다.“그럼 복수하면 되지 않나요?” 백호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이때 청해가 눈치를 채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상대가 너무 강해서 못 이기는 거지. 황제에 오르기 전까진 제대로 맞붙을 힘도 안 돼. 오르고 나서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하고.”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 말이 맞았다.“그럼 우리가 국주님 대신 복수해 드리면 되잖아요? 국주님은 제 왕이기도 하지만 제 윗사람이기도 하잖아요.”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하하! 만약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솔직하다면 이런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