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소리 때문에 기차역 출구 쪽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그중에서도 열광하던 팬들은 총소리를 듣더니 비명을 지르며 미친 듯이 뿔뿔이 흩어졌다.은설아 또한 겁을 먹었다.그녀의 옆에 있던 십여 명의 경호원들은 그녀를 경호하며 크게 외쳤다.“어서, 어서 은설아 씨를 경호해서 옆으로 빠져!”경호원 여러 명이 은설아를 지키며 옆으로 빠져나갔고 나머지는 남아서 싸웠다.그 킬러들은 준비를 단단히 하고 온 듯했다.게다가 모두 무사 이상의 무인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은설아 곁에 있던 경호원 몇 명이 총에 맞아 죽었다.대스타 은설아는 경호원 세 명의 경호를 받으며 허둥지둥 도망쳤다.그 광경을 바라보던 정태웅이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섰다.“저하, 저희가 좀 도와줄까요?”윤구주는 덤덤히 현장을 쓱 둘러보았다.“도와주고 싶으면 돕든가.”“네!”정태웅은 그렇게 대답한 뒤 곧바로 사람들 틈 사이로 돌진했다.윤구주는 고개를 들어 대스타 은설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경호원 세 명의 보호를 받고 있었는데 그녀의 맞은편에 갑자기 무인 십여 명의 기운이 나타났다.그 기운을 느낀 윤구주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중얼거렸다.“꽤 많이 왔네.”은설아를 지키던 세 명의 경호원은 사력을 다해 겁먹은 은설아를 지키려고 했다.“은설아 씨, 이쪽으로 도망치세요!”한 경호원이 말을 마치자마자 슉 소리와 함께 은빛 화살이 어둠을 뚫고 나와 그의 목을 꿰뚫었다.가엽게도 그 경호원은 목을 움켜쥔 채로 비명을 지르더니 그대로 쓰러져서 숨을 거뒀다.다른 두 명이 손을 쓰려는 데 또 화살 두 개가 공기를 가르며 날아들었고 곧 그 두 사람도 바닥에 쓰러져서 더는 일어나질 못했다.세 명의 경호원들이 모두 죽자 대스타 은설아는 겁을 먹고 크게 울면서 비명을 질렀다.심지어 신고 있던 유리 구두 한 쪽이 벗겨졌다.그녀는 구석에 움츠리고 앉아 울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했다.“킥킥! 은설아, 이제 와서 살려달라고 하다니 너무 늦은 거 아냐?”그 말과 함께 복면을 쓴 사람 십여 명의 은
마르고 키가 큰 킬러는 뒤에서 비명이 들리자 서둘러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고개를 돌려 보니 조금 전까지 그의 뒤에 있던 십여 명의 킬러 중 반이 쓰러지고 반만 남아 있었다.몇 명은 어느샌가 몸이 반으로 갈라져서 피바다 위에 쓰러져 있었다.더욱 충격적인 건 어느샌가 사람 세 명이 그의 등 뒤에 귀신같이 나타나 서 있다는 점이었다.윤구주와 남궁서준, 시괴 동산이었다.갑자기 나타난 윤구주 일행 때문에 마르고 키가 큰 킬러는 본능적으로 눈가가 떨렸다.옆에 있던 은설아도 당황스러워 보였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갑자기 나타난 윤구주 일행을 바라보았다.“젠장, 너희는 누구야? 감히 우리 일을 망치려고 들어?”마르고 키가 큰 킬러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허리춤에서 총을 뽑아 들더니 윤구주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그가 총을 꺼내 들자 윤구주는 덤덤히 말했다.“오늘 죽고 싶지 않다면 당장 꺼져.”“뭔 소리야? 감히 나한테 꺼지라고 해?”마르고 키가 큰 남자는 윤구주의 말을 듣더니 헛웃음을 쳤다.“그래. 꺼지지 않으면 죽을 거야.”윤구주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렸다.“빌어먹을, 죽으려고!”마르고 키가 큰 남자는 사람을 죽일 때 눈 한 번 깜빡이지 않는 아주 무자비하고 잔인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윤구주의 말을 들은 그는 곧바로 총을 쐈다.탕!총알이 윤구주를 향해 날아들었다.총소리를 들은 대스타 은설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그런데 총알이 날아드는 순간, 쿵 소리와 함께 거인이 윤구주의 앞을 막아섰다.시괴 동산이었다.동산이 나서는 순간, 날아들던 총알이 그의 몸에 부딪히며 팅 소리를 냈고, 총알은 곧 바닥에 떨어졌다.바닥에 떨어진 총알과 다친 곳 없이 멀쩡한 동산을 본 마르코 키가 큰 킬러는 얼이 빠졌다.“세상에! 저 거인, 몸으로 총알을 막은 거야?”주위에 있던 킬러들은 깜짝 놀랐다.마르고 키가 큰 킬러가 총을 쏜 뒤 윤구주는 차갑게 말했다.“동산아, 찢어 죽여.”윤구주의 명령이 떨어지자 동산은 곧바로
윤구주가 동산과 남궁서준, 정태웅을 데리고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 건장한 체격의 암부 구성원들은 정중한 태도로 문 앞에 줄지어 서 있었다.그리고 그들의 뒤에는 비싼 차들이 길게 늘어져 서 있었다.암부 구성원들을 본 윤구주는 미간을 찌푸렸다.“정태용, 서남의 암부 부하들에게 연락한 거야?”정태웅은 서둘러 달려가서 대답했다.“네! 저하께서 친히 서남까지 오셨는데 당연히 암부 구성원들이 저하를 맞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멍청하긴, 이러면 너무 눈에 띄잖아! 내 신분이 공개되면 안 된다는 걸 깜빡한 거야?”윤구주는 정태웅을 매섭게 노려보았다.정태웅은 억울한 얼굴이었지만 감히 대꾸하지는 못했다.“정태웅, 명심해. 절대 사람들 앞에서 내 정체를 알려서는 안 돼. 알겠어?”윤구주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정태웅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저하. 절대 티 내지 않겠습니다!”정태웅의 말을 들은 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윤구주는 아직 정체를 드러낼 수 없었다.암부 사람들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정체를 알릴 수 없었다.그의 신분이 너무 엄청났기 때문이다.그가 아직 살아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면 화진 전체가 순간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암부 쪽.윤구주와 정태웅, 남궁서준, 시괴 동산이 도착하자 건장한 체구의 중년 남성이 빠르게 그들에게로 다가갔다.“서남 암부, 제 39여단 여단장 원건우, 지휘사님을 뵙습니다.”자신을 사단장이라고 칭한 건장한 남자는 말을 마친 뒤 곧바로 정태웅을 향해 예를 갖췄다.다른 서남 암부 구성원들도 서둘러 경례했다.화진 암부에는 40만 명 가까이 되는 정예병들이 있었다.40만 명의 정예병 중 3대 지휘사 민규현, 정태웅, 천현수를 제외하고 68개의 사단으로 나뉜다.각 사단의 사단장들은 엄격한 기준으로 선정된 자들로 모두 대가 이상의 수준이었다.눈앞의 우람한 남자는 서남 39사단의 사단장이었다.“음? 처음 보는 얼굴인데?”정태웅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건장한 남자를 바라보았다.자신을 원건
...백화궁 입구.누런색의 긴 도포를 입은 노인이 문 앞의 돌계단에 앉아 있었다.그 노인은 다름 아닌 백경재였다.윤구주가 백화궁을 떠난 뒤로 백경재는 온종일 문 앞에서 윤구주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오늘로 벌써 7일째였다.이때 위풍당당한 차량 행렬이 백화궁 앞에 멈춰 섰다.차량 행렬을 본 백경재는 서둘러 일어나 긴장한 얼굴로 차들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무슨 상황이지?”차 문이 열리더니 건장한 체구의 암부 구성원들이 하나둘 차에서 내렸다.그리고 곧 거인만큼 우람진 남자가 백경재의 앞에 나타났다.시괴 동산이었다.“어? 동산이잖아... 저하께서 돌아온 건가?”백경재가 놀라워하고 있는 와중에 윤구주의 잘생긴 얼굴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하하, 저하! 정말로 저하네요! 드디어 돌아오셨군요!”백경재는 윤구주를 보자 곧바로 기쁜 얼굴로 그에게 달려갔다.그리고 곧 윤구주를 따라 정태웅과 남궁서준도 차에서 내렸다.“정태웅 지휘사님도 계셨어요?”정태웅을 본 백경재는 깜짝 놀랐다.정태웅은 눈을 접어 웃으면서 말했다.“네! 전 저하를 보러 왔어요!”윤구주는 백경재를 보고 물었다.“백 선생, 채은이는?”“저하, 채은 씨는 잘 지내고 계십니다. 저하가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렸어요!”“그래, 얼른 채은이를 보러 가야겠어. 안내해.”“네!”백경재는 서둘러 윤구주를 소채은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었다.윤구주가 사람들을 잔뜩 데리고 오자 백화궁의 아름다운 여성들이 모두 밖으로 나왔다. 선두에 선 사람은 잔혹한 나찰 인해민이었다.풍만한 엉덩이에 희고 아름다운 다리를 가진 인해민은 푸른색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는데 아주 섹시하고 요염했다.그녀는 밖으로 나온 뒤 곧바로 윤구주에게 말했다.“드디어 돌아오셨군요! 그거 알아요? 구주 오빠가 자리를 비운 동안 우리 궁주님과 채은 씨가 구주 오빠를 아주 보고 싶어 했어요.”윤구주는 인해민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그래서 지금 왔잖아.”“돌아왔으니 얼른 가서 채은 씨를 달
소채은의 방 안. 소채은은 여전히 윤구주를 그리워하고 있었다.그녀는 매일 윤구주가 당부했던 대로 먼저 윤구주가 그녀를 위해 제작했던 경체단을 먹은 뒤 홀로 묵묵히 그를 그리워했다.이때 누군가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누구예요?”소채은이 물었다.“나야!”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소채은은 흠칫했다.그녀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윤구주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구주야?”방문을 벌컥 열어보니 문 앞에 준수한 외모의 윤구주가 서 있었다.“채은아, 나 돌아왔어!”윤구주가 말을 마치자마자 소채은은 곧바로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갑작스러운 포옹에 윤구주는 웃는 얼굴로 그녀의 가는 허리를 끌어안았다.“구주야, 드디어 돌아왔구나! 내가 널 얼마나 그리워한 줄 알아?”소채은은 윤구주를 꼭 안은 채 원망스레 말했다.윤구주는 그녀를 위로했다.“미안해. 일이 좀 있어서 시간이 좀 지체됐어.”“그래? 앞으로는 절대 날 이렇게 오랫동안 혼자 내버려둬서는 안 돼. 널 다른 여자에게 빼앗긴다면 난 어떡해?”소채은의 바보 같은 말에 윤구주는 미소 띤 얼굴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바보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다른 여자에게 빼앗긴다니, 그럴 리가 있겠어?”“그럴 수도 있지! 우리 구주, 얼굴도 잘생기고 성격도 좋아서 다른 여자들이 분명 눈독을 들일 거란 말이야!”소채은은 그렇게 말하면서 그를 잃을까 봐 두렵다는 얼굴로 윤구주의 팔짱을 꼈다.소채은의 모습에 윤구주는 웃었다.“구주야, 얼른 얘기해 봐. 그동안 뭘 했던 거야?”소채은은 윤구주를 잡고서 오랜만에 만난 사이처럼 물었다.윤구주는 그녀에게 간단히 봉안보리구슬을 찾은 과정을 얘기했다.그리고 어떻게 고씨 일가를 상대했는지, 어떻게 서남을 주름잡았는지에 대해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다.소채은은 그의 얘기를 듣더니 의아해하면서 말했다.“응? 그 봉안보리구슬이 그렇게 중요한 거야?”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응, 아주 중요해.”소채은은 그렇냐고 짧게 대꾸했다.“나한테 보여줄 수 있어
천시 고충!가장 무시무시한 건 그것의 시독이었다.시독이 심장을 공격하게 되면 오장육부가 괴사하고 사지가 마비된다.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사람은 안에서부터 천천히 썩어 들어가기 시작하고 결국에는 몸 전체가 썩는다.그런 생각에 윤구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구주야, 나 상태가 많이 심각해?”윤구주의 표정이 확 어두워지자 소채은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아냐, 아냐. 채은이 너는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이것만 기억해. 내가 있으니까 넌 무조건 나을 거야!”소채은은 별말 하지 않고 윤구주의 품에 고개를 기댄 채 말했다.“구주야, 사실 난 내 병이 무섭지 않아. 내가 두려운 건 내 인생에서 네가 사라지는 거야. 네가 없으면 난 어떡해?”소채은의 말에 윤구주는 마음이 저렸다. 그녀는 다시금 소채은을 품에 안았다.“채은아, 걱정하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반드시 널 치료할 거야. 내가 깨끗이 낫게 해줄게!”소채은은 말없이 윤구주의 품에 안긴 채로 이 순간을 즐겼다.한참 뒤에야 윤구주가 입을 열었다.“참, 채은아. 내 지인 두 명이 왔는데 나랑 같이 나가서 인사 나누자!”“응? 지인?”“응. 지금 밖에 있어. 가자, 내가 소개해 줄게.”윤구주는 그렇게 말하면서 소채은의 손을 잡고 정태웅과 남궁서준을 만나러 갔다.커다란 백화궁 대전 안, 가장 먼저 들려온 건 정태웅의 목소리였다.“세상에, 연규비 씨. 몇 년 못 본 사이에 더 아름다워지셨네요.”이내 아름다운 연규비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흰색 원피스를 입은 연규비는 여신처럼 안에서 나왔고, 정태웅의 목소리를 들었다.“정태웅, 너도 서남에 온 거야?”연규비는 살찌다 못해 공처럼 보이는 정태웅을 보며 말했다.“연규비 씨가 너무 보고 싶어서 왔죠!”정태웅이 웃으면서 대답했다.“그딴 소리 한 번만 더하면 가만 안 둘 줄 알아.”연규비가 말했다.말을 마친 뒤 연규비는 곁눈질로 옆을 보았다. 갑자기 엄청난 한기를 띤 검의가 느껴졌기 때문이다.아주 놀라운 검의였다.연규비는 그것을 느끼고
“연규비 씨는 저하를 이미 만나셨죠?”정태웅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연규비에게 물었다.“그럼, 당연하지.”연규비가 대답했다.“저하를 만났군요. 우리 저하 더 멋있어지고 훤칠해지지 않았어요?”연규비가 말했다.“이 자식, 할 말 있으면 그냥 해.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지 말고.”정태웅은 실실 웃으면서 얄밉게 말했다.“저하와 오랜만에 만나신 거잖아요. 게다가 연규비 씨는 예전에 전하를 아주 사랑했죠.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번 기회에 조금 더 진도를 나가야지 않겠어요?”정태웅의 말을 들은 연규비는 표정이 차갑게 굳으면서 화를 냈다.“이 자식, 한 번만 더 그딴 소리 하면 혀를 잘라버릴 줄 알아. 내가 못 할 것 같아?”정태웅은 서둘러 뒷걸음질 치면서 말했다.“전 그저 솔직히 말한 것뿐이에요.”콜록콜록.정태웅과 연규비가 장난을 치고 있을 때 콜록거리는 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정태웅은 기침 소리를 듣더니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고, 곧 윤구주가 소채은을 데리고 나오는 걸 보았다.“저하!”윤구주를 본 그는 서둘러 외쳤다.그리고 곧 불손한 시선이 소채은에게 닿았다.“왕비님, 드디어 깨셨군요!”갑자기 형수님이라고 불린 소채은은 어리둥절해졌다.“구주야, 저 사람은 누구야? 왜 날 왕비라고 부르는 거야?”윤구주는 정태웅을 매섭게 노려보았다.정태웅은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걸 깨닫고 서둘러 말을 고쳤다.“퉤퉤퉤, 형수님! 죄송해요, 제가 말실수를 했네요. 절대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이번에는 형수님이라니, 소채은은 의아한 얼굴로 윤구주를 바라보았다.윤구주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내 지인이야. 정태웅이라고 부르면 돼.”소채은은 그 말을 듣더니 그제야 정태웅에게 말했다.“안녕하세요, 전 소채은이라고 해요.”“형수님, 저한테는 반말하셔도 돼요. 앞으로는 태웅이라고 부르시면 돼요.”정태웅이 서둘러 말했고 소채은은 미소를 지었다.“꼬맹아, 이리 와봐!”윤구주는 소채은을 소개한 뒤 옆에 서 있던 남궁서준을 불렀다.흰옷을 입은 소녀는 빠른 걸
“다행이네.”윤구주가 소채은을 데리고 나와서 그녀에게 정태웅과 남궁서준을 간단히 소개해 준 뒤 소채은이 과로할까 봐 걱정되어 곧바로 그녀를 방으로 돌아갔다.방에 도착한 뒤 소채은이 갑자기 물었다.“구주야, 요즘에도 많이 바빠?”윤구주는 그 말을 듣더니 흠칫하며 말했다.“아니, 왜?”“헤헤, 안 바쁘면 나랑 같이 우리 친척 집에 갔다 오면 안 돼?”소채은은 윤구주의 팔을 잡고 말했다.“어? 친척?”“응, 우리 외당숙이 서남 고대 도시에 있거든. 내가 찾아봤는데 여기서 20km 정도 떨어져 있어. 그래서 네가 바쁘지 않다면 너랑 같이 우리 외당숙을 보러 가고 싶어.”소채은은 외당숙의 일을 간단히 얘기했다.윤구주는 소채은이 천시 고충에 당한 뒤로 줄곧 백화궁에만 있어서 무척 심심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친척 집에 가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곧바로 동의했다.“그래, 그러면 내일 나랑 같이 가자.”“진짜? 동의한 거야?”“그럼.”“헤헤, 고마워.”소채은은 기쁜 얼굴로 윤구주의 품에 머리를 기대었다.다음 날, 윤구주는 정말로 소채은과 그녀의 외당숙 집에 방문할 준비를 했다.소채은은 아침 일찍 일어나 꾸몄다.예쁜 플라워 패턴의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풀어 헤쳐서 더욱더 아름다웠다.윤구주는 캐주얼한 차림으로 정태웅과 남궁서준 등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저하, 저희가 가지 않아도 괜찮나요?”정태웅은 윤구주가 소채은의 친척 집에 가려 한다는 걸 알고 물었다.“응. 너희는 일단 백화궁에 머물러. 아무래도 채은이 친척들은 일반인이라서 말이야.”윤구주가 말했다.그의 말에 정태웅과 남궁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채은아, 가자!”윤구주는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난 뒤 소채은을 데리고 그녀의 외당숙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윤구주는 백화궁의 차를 타지 않고 큰길로 나가서 택시를 잡았다.그들이 차에 오르려고 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구주 오빠, 잠깐만요
단 한 걸음,그 한 걸음만 넘기면, 그는 곧 성급 바로 직전 경지에 이른다.그리고 그 마지막 문턱을 박살내는 순간 반쯤 성인이 된 경지, 반성급이다!지금 이 자리, 그 반성급 경지에 선 자는 바로 인마라고 불리는 무명이었다.“과연... 화진의 인황, 구주왕이라 불릴 자격은 있군. 하지만 너도 알겠지. 지금 네 수준으론 몸을 직접 이 판에 던지지 않는 이상 나랑 맞붙을 자격조차 없어. 네가 그 잘난 원신출체를 어떻게 하겠다는지 구경이나 해보자고. ”무명이 입꼬리를 비틀며 코웃음쳤다.팔기귀일에 도달한 윤구주의 전투력은 이미 황의 지경을 뛰어넘었다.하지만 무명과의 경지 차이는 여전히 너무 컸다.실력은 분명 엄청났지만 격이 다르였다.지금 상태로도 보통의 황자의 경지까지 초월한 상태지만 무명을 상대하긴 아직 한참 부족했다.심지어 무명이랑 싸울 실력은커녕 참마검조차 손에 제대로 못 잡는 게 현실이었다.“팔기로 부족하다면... 제구기는 어때? 구기:적선!”부우우우웅!윤구주의 온몸을 하얀 선기가 감싸는 순간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비웃고 있던 무명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뭐라고? 이건 네 따위가 쓸 수 있는 기술이 아니잖아! ”그 순간, 무명조차 숨을 삼켰다.이건 상식의 틀을 깨부수는 광경이었다.근대에 들어서면서 도에 대한 수련는 사실상 약해졌다.그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세상에 흐르는 천지영기가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봉신전쟁 당시, 상상을 초월하는 영기가 소모됐고 그 전쟁이 끝난 후 곤륜구역은 세상의 영기 90%를 신계에 봉인해버렸다.거기서 마음껏 영기를 탕진한 것도 모자라 바깥의 산수들까지 무분별하게 빨아들인 탓에세상의 영기는 걷잡을 수 없이 줄어들고 말았다.결국 세상은 고위 수련자가 태어나기 어려운 구조가 되었다.그래서 화진에선 500년에 한 번 황자가 나올까 말까 할 정도이고 황자의 경지에 도달하는 건 지독하게 어려운 일이었다.임정설이 황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처음부터 그가 강해서가 아니라 윤구주를 돕기 위해 왕
마기가 검종 제자들의 혼백에 침투하자 그 순간 제자들의 몸에서 시커먼 마기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이를 목격한 장인 대진인은 망설임 없이 즉시 결단을 내렸다. 오염된 제자들을 그 자리에서 곧바로 정화해 버린 것이다.“모든 제자들아, 입문 첫날 내가 분명히 말했을 것이다. 서요산은 찬란한 성지 화진 정통의 계승지다. 정은 사악함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정은 사악함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은 바로 서요산 제자들이 평생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는 도의였다.입문과 동시에 깨달음을 얻은 그들은 언젠가 반드시 도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저 화진 정통의 수호자가 되기 위해서였다.그 순간 진요탑 외곽에서는 7대 진인을 중심으로 전 종문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 진요탑을 사수하고 있었다.하늘을 뒤덮을 듯한 마기의 기세는 점점 거세져 어느새 검종의 경내 전역을 삼켜버렸다.검종 제자들은 마기를 막아내면서도 동시에 진요탑의 결계를 유지해야 하는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정도를 지키는 일은 그만큼 고통스럽고 힘든 투쟁이었다.산 아래 상황도 마찬가지로 치열했다.온갖 요괴와 귀신들이 들이닥치는 가운데 임정설은 황운을 등에 업고 이씨 가문의 국운을 모두 모아 홀로 수백만 마기를 막아서고 있었다.백호는 마인으로 완전히 변신해 광란의 충격 속으로 몸을 던졌고, 스스로 마를 품은 채 적진을 난도질했다.청해는 천뢰신술을 펼쳐 수만 개의 천뢰를 무기로 변환시켜 온갖 사도와 악귀를 쓸어내기 시작했다.그 무렵 진요탑 내부에서 풍무극의 기세는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구주야, 내 한계에 도달했다. 이제 내 500년 수련의 혼을 너에게 바치겠다."”풍무극의 준비는 이미 완료되었다.그는 미리 준비해 둔 제천 법기를 꺼냈고 전법이 발동되는 순간 그의 육신은 산산조각 부서졌다.그의 정기와 천지 정기를 모두 품은 찬란한 진신 영혼은 한 자루의 참마검으로 변해 윤구주 앞에 떠올랐다.“풍 종주...” 윤구주는 입술을 깨물었다.슬프고 아쉬
윤구주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새로운 국운의 기운이 그의 발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그가 진요탑의 문에 도달했을 무렵 모든 국운이 윤구주에게 집중되었다.윤구주의 주변으로는 천인신광이 펼쳐져 있었다.이 순간만큼은 그가 천지의 주재자 화진의 영겁을 관통한 유일한 존재였다.윤구주는 홀로 진요탑 안으로 들어섰다.겉보기에 거대한 산 같았던 진요탑의 내부는 참혹한 말세의 풍경이었다. 땅은 끝없이 펼쳐진 용암으로 뒤덮여 있었고 하늘에서는 강줄기가 거꾸로 흘러내리고 있었다.불과 물이 충돌할 때마다 하늘과 땅을 뒤흔드는 격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거꾸로 흐르는 강물 위에 한 노인이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백발이 성성한 그 인물은 다름 아닌 서요산 검종의 종주였다.밖에서 보이던 강건한 중년의 모습은 단지 화신에 불과했으며, 본체는 수백 년 전부터 이 진요탑에서 마인을 봉인해 왔다.서요산 검종 종주는 극도로 지쳐 있었고 이제는 마지막 호흡으로 버티고 있었다.“드디어 왔구나.” 서요산 검종 종주는 허약한 전음으로 말을 건넸다.“오백 년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종주님.” 윤구주는 고개를 숙였다.풍무극은 현 서요산의 종주이자 당대 최고의 영웅, 화진 제일 검으로 불리던 남자였다.원래는 풍속을 다루는 수련자로 젊은 시절엔 검 하나로 화진을 호령한 사내로 알려졌다.그의 검은 아무도 궤적을 볼 수 없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500년 전 마인이 봉인되고 서요산의 조사가 승천한 후, 풍무극은 서요산의 거자로서 종주의 자리를 이어받았다.그날 이후 진요탑에 몸을 묻고 마인과의 싸움을 500년간 지속해 왔다.풍을 다루던 그였지만 지속적인 봉인을 위해 익숙하지 않은 수속까지 수련하며 지금까지 버텨왔다.그가 마도에 빠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미 기적이었다.“그래도 괜찮다. 다행히 이 시대에 또다시 인황이 나왔으니. 화진은 연달아 두 명의 인황을 배출했다. 임정설이 인황에 등극한 지금 쇠락하던 이씨 가문의 국운이 다시 살아났다. 그가 천지의
마인이 출현하면 곤륜 구역조차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서요산 검종의 진요탑은 이미 오백 년 동안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켜왔다.이는 곧 그 마인이 오백 년 동안 진요탑 안에 봉인되어 있었음을 의미했다.“우리가 가진 유일한 이점은 저 마인이 지난 오백 년간 수련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 오백 년 동안 분명 무언가를 '깨달았을' 가능성도 있겠지요. 정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사도가 존재하는 법입니다. 만약 그가 이곳을 벗어나 다시 한번 돌파에 성공하여 진정한 성인의 경지에 오른다면… 그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전 우리 종문의 선대 종주께서 이 마인을 직접 봉인하셨습니다. 하지만 선대 종주께서는 진요탑만으로는 그를 완전히 봉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찍이 아셨지요. 그래서 마침내 구천으로 비상하셔서 바깥 세계에 존재한다는 신기를 찾기 위해 떠나신 것입니다.”장인 대진인이 비밀을 털어놓자 임정설은 왜 그 옛날 서요산 검종을 창립한 선조가 갑자기 사라졌는지 이해했다.“구천을 비상했다고? 전설 속 그 이야기 설마 전부 사실이었단 말인가? 이 세상 위에 더 위대한 세계가 있다는 건가?” 임정설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을 이었다.“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들은 바로는 성인이란 육지에서 신선이 된 자를 이르는 말이고 준성은 그보다 한 단계 아래 반쯤 신선이 된 존재라 하더군요. 우리보다 더 풍부한 영기의 세계가 과연 존재하는지는 이 몸 역시 감히 짐작할 수 없습니다.” 장인 대진인은 고개를 저었다.그때였다.진요탑이 거칠게 흔들렸고 모든 호법 제자의 얼굴이 딱딱해졌다.수련이 부족한 제자 몇몇은 그 자리에서 마기의 침식으로 피를 토했다.“모든 제자에게 고한다. 나와 함께 현문을 수호하라.” 장인 대진인이 친히 자리에 앉아 온 종문의 기운을 모아 마인을 억제하기 시작했다.마인은 일시적으로 제압되었지만 산 밖의 요괴들과 악귀들은 마기의 부름을 받아 사방팔방에서 서요산으로 몰려들고 있었다.임정설은 이제 자신이 이곳에 온 진짜 이
“저하,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그를 죽여야 합니까? 저자의 기운이 이토록 흉악한데 성수의 혈기로 진압할 순 없습니까?” 백호는 이미 싸우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안 된다. 너희 네 명이 함께라면 잠시나마 억누를 수는 있겠지만, 너희는 그저 성수의 정혈을 가졌을 뿐이니 마인을 완전히 없애려면 성수가 직접 나타나야 한다. 지금 이 세상에 성수가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스럽다.”윤구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말을 마친 윤구주는 곧장 진요탑 쪽으로 향했다.백호와 임정설, 청해가 함께 가서 돕고자 했으나 장인 대진인이 그들을 가로막았다.“이 마인은 오직 구주만이 상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중요한 임무가 있습니다. 국주님, 곧 전투가 시작될 터인데 서요산의 진법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이 호법의 중임을 몇 분께 맡기겠습니다.”장인 대진인이 임정설에게 경건하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좋다. 오늘 이 자리에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저 마인을 죽이고야 말겠다.” 임정설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황자의 위엄을 한껏 드높였다.화진의 존망이 걸린 일이라면 임정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하지만 마기가 몰려와 서요산 전체를 뒤덮고 세상이 오직 흑백 두 가지 색깔만으로 변해버리며 그 끔찍한 살기가 강림했을 때 임정설마저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떨렸다.“이 마인의 기운이 이렇게까지 무서울 줄이야.” 임정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마기로 가득 찼고 윤구주마저 그 기세에 눌리고 있었다.진요탑에서 흘러나온 마기는 실체가 되어 넘쳐흘렀다. 마기가 나타나자 서요산을 지키는 모든 검종 제자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어떤 제자는 순간적으로 십여 년을 늙어버렸다.수련이 부족하면 수명으로라도 채워야 하는 참혹한 상황이었다.웅웅.하늘에는 먹구름이 밀집했고 그 안에서 요괴의 번개가 끊임없이 터졌다.“이젠 영기조차 요기로 변하고 있다. 풍수 비술로 보건대 머지않아 이곳에서 요마가 출현하겠구나.” 임정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요산 외부에서 짙은 요기
도가는 인연이라는 두 글자를 대단히 중히 여긴다.그의 한 번의 인연, 한 번의 생각은 곧 만백성의 생사를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윤구주가 정상에 오르자 앞서 온 다른 이들과는 달리 서요산 검종의 모든 이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깊은 존경을 표했다. 그들이 경배한 대상은 단순한 한 인간이 아니라 구주의 저하, 화진의 인황, 오방 천지의 주재자였다.“모두 일어나십시오. 제가 오늘 서요산에 온 이유는 오직 진요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진요탑 안의 마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문 씨 세가의 역심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마인을 죽여야만 문 씨 세가의 야심도 함께 근절할 수 있습니다.”윤구주는 서요산 검종의 모든 제자를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이번 서요산 행차의 목적은 바로 문 씨 세가의 역심을 뿌리째 뽑는 것이었다.검종 제자들이 앞장서 일행을 이끌었고 모두가 금정을 지나 뒷산으로 향했다.뒷산에 막 들어서자마자 음산한 기운이 얼굴을 스쳤다.후산 중앙에는 높이 오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산이 서 있었는데 그 산은 무려 구백구십구 개의 쇠사슬로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다.이 쇠사슬은 그저 평범한 사슬이 아니었다. 절반은 땅속의 지맥과 연결되어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하늘 높이 떠올라 천지의 영기를 끌어모으고 있었다.이런 수준의 봉인이라면 설령 윤구주 자신이 여기에 갇혀 있다고 해도 빠져나가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처럼 견고한 고진마저 지금은 마인의 사기로 조금씩 부식되어 가고 있었다. 본래는 영기가 흘러넘치는 명산이었으나 지금은 온 서요산이 마인의 기운에 물들어 음침하고 괴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이 강렬한 악기운을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모두 얼굴을 찌푸렸다.솟구치는 사기를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찌푸렸다.최근 몇 대에 걸쳐 입종한 서요산의 제자들은 이런 마인의 사기와 요마의 위협 속에서 수련해야 했다.천지의 영기조차 마인의 기운에 오염되어 수련에 큰 지장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남은 현
이 말을 듣자 모든 이들은 천 년 전 마지막으로 나타난 그 성인이 바로 서요산 검종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짐은 서요산 검종의 선대 종주께서 우화등선하셨다고만 들었는데 그저 떠도는 신화 속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더니 은 성인의 경지에 이르신 것이었군.” 임정설이 깊은 감탄과 함께 말했다.구백 계단 윤구주는 이미 전설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하지만 그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구백삼십 계단 사십 계단을 오르면서 윤구주의 발걸음은 오히려 더욱 가벼워졌고 그가 세우는 기록은 사람들의 상식을 계속해서 뒤흔들었다.구백팔십 계단을 지나 정상까지 겨우 십여 계단만 남은 그 순간 윤구주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구백구십구 계단에 이르러 결국 완전히 멈추었다.드디어 한계에 도달한 것인가?모두가 숨을 죽이고 윤구주를 지켜봤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분명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시험일 터였다.윤구주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십여 분을 견뎌냈다. 사람들은 그가 언제 다시 계단을 오를지 초조하게 기다렸다.마침내 윤구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됐습니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시험을 포기하지요.”말을 마치고 계단에서 내려서는 순간 청석 계단 아래에서 강력한 영기가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쳤고 곧바로 서요산을 감싸던 어둠의 기운을 깨끗이 몰아냈다.오랫동안 음울했던 서요산 상공은 순식간에 환해졌고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맑은 하늘이 펼쳐졌다.서요산의 모든 이들은 충격에 빠져 넋을 잃었다.그제야 그들은 윤구주가 왜 그토록 여유롭게 올라올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서요산의 청석 계단이 가진 진법의 힘을 계속해서 억누르고 있었다.“참으로 대단하신 신위군요! 우리 서요산의 청석 진법마저 제압하셨다니! 마지막 한 걸음을 분명 넘으실 수 있었을 텐데 혹시 강제로 넘었다가 진법이 견디지 못해 영기가 새 나가고 진법이 무너져 진요탑까지 영향을 미칠지 걱정하신 건 아닌가요?” 장인 대진인이
도법의 깊이는 워낙 심오해서 임정설조차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다.“쉽게 말씀드리자면 구주는 천지의 운기를 완전히 장악한 데다가 하늘이 직접 영광을 내리신 거죠.” 장인 대진인이 말했다.임정설은 이 말을 듣고 비로소 이해한 듯 말했다.“대진인의 말은 윤구주가 바로 하늘이 점지한 사람이라는 뜻인가?”“맞습니다. 우리 화진 사람들은 운명의 갈림길에 서면 본심에 따라 도법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깁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사는 다하고 하늘의 뜻을 따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윤구주는 분명 큰 복을 타고났지만 그 엄청난 복을 감당할 힘도 필요합니다.”대진인이 설명했다.말이 끝날 무렵 윤구주는 이미 육백삼십 계단을 거뜬히 올라와 있었다.한 걸음도 멈추지 않고 더욱 확고한 걸음으로 계속 전진했다.그의 발걸음마다 천지의 기운이 응축되었다.어느 순간 서요산의 계단조차 윤구주의 기세를 가두지 못했다. 그는 마치 천지를 밟으며 오르는 듯했다.곧이어 그는 칠백 계단마저 돌파했다.칠백 계단이란 천 년 전 서요산의 전성기에도 극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경지였다. 지금 만약 윤구주가 구주왕이 아니라 일반 수련자였다면 이 기록만으로 서요산 전체가 들썩였을 것이다. 만일 윤구주가 서요산에 입문을 원했다면 서요산은 모든 자원을 쏟아부어 그를 키웠을 것이며 서요산 검종의 다음 종주 자리는 당연히 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그러나 이미 칠백 계단에 이르렀음에도 윤구주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칠백오십 계단 팔백 계단 팔백오십 계단!그는 끊임없이 정상의 기록을 깨며 전설을 써 내려갔다.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윤구주 앞에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 같았다. 이쯤 되자 장인 대진인조차 감히 그를 함부로 평가할 수 없었다.왜냐하면 자신도 과거에 겨우 칠백 계단에 그쳤으니 팔백 계단을 오른 사람을 감히 평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윤구주는 멈추지 않고 계속 올라갔다. 마치 천지를 흔들어 이 강산을 뒤엎어버리겠다는 기세였다.그리고 마침내 구백 계단에 이르렀다.“구백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