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명의 대화에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날 죽이겠다고?”“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그럴 수는 없을 텐데.”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국제킬러들이 벙찐 채 서 있었다.“누구야!”그들은 서둘러 총과 칼을 꺼내 들며 경계했지만 모든 건 이미 늦은 뒤였다.달빛 아래에서 검은 인영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더니 세 킬러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 인영은 오른손을 들어 휘둘렀다.그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칼이 되어 순식간의 삼 인의 목과 몸을 갈라놓는 탓에 세 명은 모두 두 동강이 난 채 숨이 끊어져 버렸다.하지만 오늘 밤 죽여야 하는 게 셋뿐이 아니었기에 윤구주는 시간을 낭비할 수 없어 불빛이 아른거리는 밤길을 스파이더맨처럼 헤쳐가며 고층 건물을 발판 삼아 십 미터씩 뛰어올랐다.아직 윤구주의 기력이 전성기 때처럼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국제킬러 몇십 명쯤 죽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60층 높이의 호텔에 다다랐을 때는 곰 같은 백인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노트북을 펼치고 앉아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 옆에는 마찬가지로 옷을 다 벗어낸 묘령의 여인 둘이 누워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이미 숨이 끊어져 시체마저 차갑게 식어있었다.자세히 보니 바닥에는 속옷들과 채찍 같은 도구들이 널브러져 있었다.두 명의 여자 몸에 울긋불긋하게 난 상처들로 보아 저 백인 남자에게 갖은 수모를 당한 게 분명했다.백인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위스키를 마시며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노트북에 떠 있는 게 바로 윤구주가 탁시현을 죽이는 영상이었다.그 백인 남자가 바로 다크 사이트 랭킹 7위의 파멸자 쿠카였던 것이다.그가 이번에 화진에 온 것도 물론 윤구주에게 걸린 현상금 10억 달러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그리고 지금 보고 있는 영상도 쿠카가 6억이라는 큰돈을 들여 어렵게 구한 영상이었다.영상 속의 윤구주는 손가락을 튕기는 것만으로 손쉽게 탁시현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그 시체까지 재로 만들어 버렸다.그 모습을 보건 쿠카는 비록 자신이 다크 사이트 랭킹
다크 사이트 랭킹 7위의 파멸자가 자신이 직접 제작한 총알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총에 넣을 때 갑자기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인영이 유리를 뚫고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Fuck!”“뭐야, 너 어떻게 한 거야! 여기 60층이 넘는데 어떻게 들어왔어!”역시 랭킹 7위의 파멸자답게 쿠카는 윤구주를 보자마자 바닥으로 구르더니 바로 특수제작 총알을 장전한 총을 윤구주를 향해 겨눴다.“너, 너, 누구야!”그리고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묻자 윤구주가 냉소를 흘리며 답했다.“왜, 그걸로 날 죽이기라도 하려고?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윤구주의 말에 벙찐 쿠카가 그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까 영상 속의 남자와 동일인물이었다.그에 쿠카는 눈을 크게 뜨며 말을 더듬었다.“너... 네가 그 현상금 10억의 화진인이야?”“그걸 알았으면 넌 이제 죽어야겠네.”자신을 담담히 쳐다보며 말하는 윤구주에 탑 킬러인 쿠카는 1초도 허투루 쓰지 않고 바로 방아쇠에 손을 올렸다.여기서 더 망설이면 죽는 건 본인이 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이어서 미련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무시무시하게 빠른 속도로 총구를 빠져나간 총알이 윤구주를 향해 날아갔다.C4 화약보다 더 강하고 탱크도 한 번에 폭파시킬 수 있는 총알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데도 윤구주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제 자리에 서서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딸랑!그리고 맑고 청아한 소리가 들리더니 총알이 윤구주의 두 손가락 사이로 안착했다.수천 도가 넘는 붉게 달아오른 총알이 마치 돌덩이마냥 차갑게 식어버린 모습을 보고 다크 사이트 랭킹 7위인 국제킬러는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었다.“이게... 어떻게 가능해?”“이건 탱크도 부숴버릴 수 있는 티탄합금 총알인데?”“그래? 그럼 이거 너한테 돌려줄게.”가소롭다는 듯 웃은 윤구주가 손가락을 튕기자 폭파 소리가 하늘도 울릴 만큼 크게 나며 총알이 윤구주 손에서 터져버렸다.폭발하면서 터져 나온 기운에 호텔의 절반이 날아가 버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총알이었
말을 마친 윤구주가 손가락을 들어 지현을 쿠카의 미간을 향해 던지자 또 한차례의 폭파음이 들리더니 세계 랭킹 7위인 파멸자가 머리부터 산산조각이 나며 죽어버렸다.“한 시간에 스물일곱이네.”윤구주는 칠흑 같은 밤사이로 다시 몸을 숨기며 60층의 호텔을 벗어났다.그 하룻밤 사이에 서남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큰 호텔, 작은 여관, 주민 구역, 목욕탕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그리고 죽은 사람들은 전부 외국인들이었다.죽임당한 모습도 각양각색이었는데 누구는 허리가 잘려있었고 누구는 몸이 다 갈려있었으며 누구는 사지가 멀쩡하지 않았다.그 다양한 시체보다 더 놀라운 건 이 모든 일이 1시간 사이에 일어났다는 것이다.그 짧은 한 시간 사이에 서른 명이 넘는 외국인들이 몰살당했다.그리고 하필 오늘 경찰서가 전체 휴가라 당직을 서는 경찰이 없어 누구도 신고를 할 수가 없었다.그리고 또 지현으로 한 국제킬러를 죽인 윤구주가 이번에는 나이트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그 재수 없는 킬러는 윤구주의 인영도 보지 못한 채 피바다 속에 잠겨버렸다.나이트를 나온 윤구주가 고개를 들어 아직도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이게 64번째네.”“백화궁을 나와서부터 지금까지 64명의 국제킬러를 죽였으니 이만하면 경고가 되었겠지?”윤구주가 이토록 대범하게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는 건 다크 사이트에 경고하기 위함이었다.화진은 모든 고용인과 킬러들의 무덤이 될 거라는 경고.그건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진리였다.그 진리를 알려주고자 윤구주는 모든 경찰들에게 휴가를 준 것이고 또 다들 알 수 있게 킬러들을 잔인하게 죽여버린 것이다.“아직 부족한 것 같은데.”윤구주는 시린 눈으로 차가운 말을 뱉어냈다.“이런 조무래기들 말고 그 대가리를 잡아야겠어. 그래야 국제킬러들에게 제대로 알려주지.”윤구주는 윗사람을 잡을 생각으로 다시 신념술을 썼다.하지만 이번에는 사람을 찾기 위해 쓴 신념술이 아니었다.윤구주는 두 손을 모아 신념에 올챙이
그는 자신의 신식혼인을 이용하여 킬러들의 신해에 각인시켰다.마치 목소리 하나가 그들의 귓가에 윤구주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는 것 같았다.윤구주가 그렇게 하자 서남 여러 지역에 숨어있던 국제 킬러들의 머릿속에 그 목소리가 들렸다.동시에 그들은 윤구주의 위치를 알게 되었다.“현상금이 10억이라고?”“그놈이 드디어 나타났어. 어서 그놈을 죽여야겠어!”이곳저곳의 국제 킬러들이 미친 듯이 윤구주를 향해 달려들었다.백화궁.윤구주가 국제 킬러들을 학살하고 있을 때, 정태웅은 다리를 꼬고 앉은 채로 편하게 백화궁 마당 중앙에 놓인 의자 위에 누워있었다.옆 테이블에는 고급 와인 한 병과 두 가지 음식이 놓여 있었다.“오늘 밤경치가 정말 아름다워. 살인하기 딱 좋은 날이야. 그런데 저하께서는 그 자식들을 몇 명쯤이나 죽이셨을까?”정태웅은 중얼거리면서 땅콩 하나를 입안에 쑥 넣었다.이때 누군가 소리 없이 정태웅의 앞에 나타났다.“지휘사님!”정태웅의 앞에 선 사람은 암부 제36여단 여단장 원건우였다.원건우가 온 걸 봤음에도 정태웅은 여전히 누운 채로 물었다.“조사는 어떻게 됐어?”“지휘사님, 지금까지 저희 암부 구성원들은 64곳에서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죽은 자들은 전부 국제 랭킹에 이름을 올린 킬러들이었습니다.”정태웅은 원건우의 말을 듣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육중한 몸이 빠르게 움직였다.“뭐라고? 64곳? 세상에나, 겨우 1시간 안에 국제 킬러 64명을 죽였다고?”정태웅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그는 윤구주가 1시간 이내에 기껏해야 10여 명을 죽일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킬러들을 일일이 찾아내서 죽여야 했기 때문이다.그러나 64곳에서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말을 들으니 말문이 막혔다.“네. 게다가... 죽은 사람은 64명뿐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총 83명입니다.”원건우가 한마디 보탰다.정태웅은 입을 떡 벌렸다.“세상에, 우리 저하는 신이 틀림없어. 겨우 1시간 사이에 국제 킬러 83명을 죽이다니. 사람을 무 썰듯 썰어버
밤이 되었다.윤구주가 백화궁을 떠난 지 1시간 30분쯤 되었다.이때 서남 외곽 지역의 황량한 언덕에 한 사람이 책상다리를 하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그의 머리카락이 찬 바람에 휘날렸다.환한 달빛이 그의 조각처럼 날카로운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남자는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마치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말이다.그런데 바로 이때, 먼 곳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사람이 그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마치 사냥감을 노리듯 말이다.그들은 윤구주의 신식혼인에 이끌려 국제 킬러들이었다.대충 봐도 3, 40명은 될 듯했다.국제 킬러로서 그들의 몸을 숨기는 실력과 암살 실력은 수준급이었다.어떤 이는 저격총을, 어떤 이는 다른 암살 무기를 들고 있었다.심지어 어떤 이들은 독약을 지니고 윤구주의 주변에 잠복해 있었다.“젠장, 바로 저놈이야?”윤구주에게서 1km 정도 떨어진 풀숲에 엎드려서 배럿 대물저격총을 들고 있던 남자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그의 옆에 엎드려 있는 건 붉은색 머리의 여자였다.여자는 군용 망원경으로 윤구주를 지켜보면서 말했다.“그런 것 같아.”“겨우 저놈 한 명인데 10억을 준다고? 잘못 안 거 아냐?”배럿 저격총을 든 백인 남자가 물었다.“아닌 거 같은데?”“자료에 따르면 저놈이야.”붉은색 머리의 여자가 진지하게 말했다.“젠장, 일단 죽이고 보자.”풀숲에 엎드려 있던 백인 남자는 그렇게 말한 뒤 윤구주에게로 총구를 겨누었다.“거리 1,100야드. 풍속 0.3m/초.”군용 망원경을 든 붉은색 머리의 여자가 엎드린 채로 수치를 읊었다.백인 남자는 조준을 시작했다.윤구주의 머리에 총구가 겨눠지는 순간, 붉은색 머리의 여자가 말했다.“정확해. 쏴도 돼.”탕!귀를 찌르는 소리가 어둠을 뚫었다.총알이 윤구주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다.눈앞의 두 킬러는 국제 다크 사이트 랭킹에서 유명한 킬러 듀오였다.남자는 특수부대 출신이었고 여자는 남자의 파트너였다.두 사람이 함께 나서서 실패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그러나
정말로 귀신 곡할 노릇이었다.두 사람이 경악하고 있을 때 윤구주가 갑자기 빛나는 두 눈을 번쩍 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이젠 나오지 그래?”그는 말을 마친 뒤 허공에 대고 손가락을 움직였다.그 순간 눈에 보이는 현기가 긴 청색 검의 형태를 갖추었고 그 검은 허공에 호선을 그리며 두 킬러가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아아!”비명이 들렸고 곧 반으로 갈라진 시체 두 구가 풀숲에 널브러졌다.윤구주는 단칼에 두 킬러를 죽인 뒤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하나, 둘, 셋... 총 38명이네. 날 죽여서 상금을 받을 생각이면서 왜 감히 나오지 못하는 거지?”윤구주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밤하늘을 울렸다.캄캄한 어둠 속, 몸을 숨기고 있던 38명의 킬러 중 감히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 모두 윤구주가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다.저격총으로도 죽이지 못하는데 무엇으로 그를 죽인단 말인가?킬러들이 하나같이 꼼짝도 못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앞의 작은 도랑에서 킬러 하나가 소란을 피웠다.“다들 두려워하지 말아요. 여기까지 온 이상 다 같이 저놈을 죽이자고요! 우리가 힘을 합쳐 이놈을 죽인다면 상금 10억 달러를 나눠 갖는 거예요.”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웃통을 벗은 건장한 금발 남자가 사람들 속에서 걸어 나왔다.그가 우지 기관단총을 들고나오자 숨어있던 킬러들도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그들 모두 10억 달러의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누가 10억을 원하지 않겠는가?어떤 킬러는 나무 위에 숨어있었고 어떤 킬러는 풀숲에 숨어있었으며 또 어떤 킬러는 바닥에 구덩이를 파고 숨어있었다.30여 명의 킬러들이 윤구주의 앞에 나타났다.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었으며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계도 있었다.주위에 숨어있던 킬러들은 모습을 드러낸 뒤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윤구주를 바라보았다.그들은 각양각색의 무기를 들고 있었는데 그중 총기가 가장 많았다.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우지 기관단총을 들고 있던 금발의 남자가 먼저 입을 뗐다.
윤구주는 손가락을 움직여 검결을 시전했다. 그의 주위에 있던 현기가 한데 뭉쳐져 청색의 검으로 변했다. 검이 윙윙거리면서 소리를 내자 윤구주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죽여!”검은 순식간에 날아갔다.촤악!날카로운 검이 독사처럼 국제 킬러들의 목을 연달아 꿰뚫었다.그렇게 서남 외곽은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했다.처참한 비명과, 죽이라고 외치는 소리, 그리고 총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그러나 이내 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윤구주의 어검술과 함께 그 자리에 있던 킬러들 대다수가 죽었다.윤구주가 킬러들을 학살하고 있을 때, 어둠 속에서 검은색 독뱀 한 마리를 몸에 두른 요염한 여자가 나타났다.그녀는 화진 전 세계 다크 사이트 랭킹 3위인 살모사 아리나였다.잔혹하기 그지없는 그녀는 지금 이 순간, 눈이 휘둥그레진 채 겁에 질린 얼굴로 눈앞의 학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몸을 흠칫 떨었다.“젠장, 젠장! 더는 화진에 남아있을 수 없겠어. 10억은 포기해야겠어!”그녀는 말을 마친 뒤 서둘러 어둠 속으로 달려갔다.도망쳐야 했다.어쩔 수 없었다.백여 명 넘는 킬러가 윤구주의 손에 죽었다. 그러니 아무리 10억이 욕심 나도 감히 덤벼들 수 없었다.아리나가 어둠을 헤치며 도망치고 있을 때 윤구주의 현기로 이루어진 검이 마지막 남은 흑인 킬러를 죽였다. 동시에 윤구주는 신해를 통해 아주 강렬한 정신이 먼 곳에서 도망치고 있는 걸 발견했다.“응? 드디어 고수가 나타났네! 도망치려고? 하지만 과연 내게서 도망칠 수 있겠어?”윤구주는 살모사 아리나가 도망치는 방향을 바라보면서 냉소를 흘렸다. 그는 두 다리에 힘을 줘서 빠르게 아리나를 쫓아갔다.어두운 밤, 누군가 빠르게 도망치고 있었다.그자는 다름 아닌 살모사 아리나였다.아리나는 이미 단숨에 10km 넘게 달렸다. 그녀는 한 어두운 골목길 안으로 숨어 들었다.그녀는 파란색 눈동자로 깜깜한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두려움에 질린 채로 헐떡거리며 말했다.“야크, 어서, 어서 배를 한 척 준비해 줘. 내일, 아니,
살모사 아리나가 은색 나이프를 빼 든 것을 본 윤구주는 덤덤히 말했다.“당신이 바로 전 세계 다크 사이트 랭킹 3위의 살모사야?”“날 알아?”살모사 아리나는 아주 놀란 듯 보였다.“당신 이름이 우리 화진 천망수배록에 나타난 적이 있어. 그래서 기억하고 있지.”윤구주는 계속해 말했다.살모사는 침묵했다.“이제 공격해 봐. 다크 사이트 킬러들이 얼마나 실력이 대단하길래 감히 화진에 쳐들어온 건지 궁금하네.”윤구주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마치자마자 살모사는 곧바로 움직였다.업계 톱이라고 인정받는 킬러로서 살모사는 지금 이 순간 목숨 걸고 싸울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모든 기회를 틀어쥐어야 했다.그녀는 은색 나이프를 들고 번개처럼 빠르게 움직여 윤구주의 목을 노렸다.윤구주는 뒷짐을 진 채로 순식간에 몸을 움직였다. 그는 살모사의 나이프가 가까워지자 곧바로 3m 거리를 움직였다.솨아악!다섯 번의 공격이 이어졌다.다섯 번의 공격 모두 번개처럼 빠르고 뱀처럼 무자비했다.번뜩이는 칼날이 윤구주의 몸 위를 지나쳤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매번 공격할 때마다 윤구주는 그녀의 공격을 정확히 피했다.마치 그녀의 공격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말이다.“젠장, 정말 강하네!”살모사는 자신의 공격이 먹혀들지 않자 낮게 읊조리면서 몸을 굴리며 동시에 입에서 녹색 독을 뿜어댔다.윤구주는 자신에게로 뿜어진 독을 향해 손을 움직였다. 그 순간 펑 소리와 함께 독은 차가운 벽으로 날아가서 부딪혔다.견고한 벽 위에 독이 묻는 순간 치지직 소리와 함께 벽이 부식되었다.잠시 뒤, 돌 부스러기가 후드득 떨어졌다.“독? 재밌네!”윤구주는 벽에 묻은 녹색 독을 바라보며 말했다.살모사는 계속해 공격했다. 그는 나이프를 쓰면서 입에서는 녹색 독을 뿜었다.살모사는 독으로 윤구주를 완전히 제압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윤구주가 대충 휘두른 손에서 현기가 손바닥 모양이 되어 살모사의 가슴을 강타했다.쾅 소리와 함께 살모사는 차에 치인 사람처럼 멀리 날아가면서 피를 토했다.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
백호는 아직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어느덧 이백오십 계단까지 올라왔다. 이 단계부터는 실체화된 술법이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람, 불 번개와 같은 속성의 영기가 점점 강해졌다. 여기서부터는 육신 횡련의 수련자는 강력한 체질로 버티고 술도 재능이 뛰어난 수련자는 천지 영기를 다루는 능력으로 버텨야 했다. 한마디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갈리는 구간이었다. 어느 한 분야라도 특출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백호는 술도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강인한 육체 하나로 견디고 있었다.웅!성수의 피가 진동하며 백호의 몸을 지탱했다. 각종 속성의 영기가 몰아쳤지만 백호는 성수혈의 힘을 빌려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수련자에게 있어서 성수의 혈맥이나 법보 등은 모두 신체 외적인 재능으로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꼼수나 편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천 가지 변화와 만 가지 신통력이 있어도 결국 만법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법기든 혈맥이든 이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천지 영기를 이용한 술법도 결국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반작용을 맞게 된다. 따라서 수련의 길에는 애초에 편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성수 혈맥 같은 천지의 보물은 보통 사람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윤구주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이를 감당하는 건 백호 자신이었다. 성수 혈맥의 힘을 온전히 감당하며 백호는 결국 삼백 계단까지 올라섰다.계단의 꼭대기 근처에는 이미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이 여럿 서 있었다. 서요산 검종은 근대에 들어 삼백 계단을 넘는 인재가 드물었다. 최근 백 년 동안 삼백 계단을 넘은 사람이 고작 열 명 남짓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삼백여 계단에서 멈췄다. 그런데 지금 백호는 삼백이십 계단까지 올라선 것이다. 이 정도면 서요산 검종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한 성과였다.이런 제자가 나타난다면 종문 전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서요산의 진인들까
“한 사람의 품성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그렇게 많은 수련자를 키워낸다면 결국 천하의 마인을 직접 만들어 내는 꼴이 아니겠어?”청현이 바로 그 실패한 예다. 서요산 검종 종주가 청현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나머지 그의 인성을 무시하고 양성한 끝에 결국 역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그럼 저하 서요산에 입문한 무술 무인들은 평균적으로 몇 계단까지 오르는지 아십니까?” 백호가 호기심에 물었다. 윤구주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무술 무인의 정확한 데이터는 모르지만 검종 종주와 잡담할 때 들어보니 검종 제자들의 수준이 갈수록 떨어져서 천 년 전만 해도 평균 삼백 계단 정도였는데 요즘엔 백 계단도 못 오른다고 하더구나. 가끔 삼백 계단을 오르는 자라도 나오면 검종 전체가 몇 년은 떠들썩할 정도라고 했어.”“구백구십구 계단까지 있는 시험인데 천 년 전 전성기에도 겨우 삼백 계단이요?” 백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요산 검종의 수준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때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야?” 윤구주는 흥미롭게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는 당장이라도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윤구주의 허락을 구한 뒤 바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계단 두 계단... 오십 계단까지는 아무 어려움도 없었다. 백호는 오십 계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서요산 검종이 별것 아니라며 놀려댔다. 하지만 육십 계단쯤 올랐을 때 처음으로 압력을 느꼈다. 마치 몸 위에 작은 차 한 대가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백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백 계단에 도달하자 압력이 갑자기 커졌다. 등에 작은 승용차 대신 소형 트럭이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백호의 한계에도 가지 못했다.“근래 사람들의 평균이 백 계단도 못 넘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예전의 무인 횡련은 황제도 오를 수 있었지만 요즘 무인 횡련은 죽어라 노력해도 소형 트럭 하나 못 버티는 수준이니 말입니다.”백호는 농담을 던지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
전에 임정설은 구오 지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힘쓰며 수모를 견뎌내고 살아남으려 했다.하지만 이제 황제가 된 그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그 탓에 이번 관문 앞에서 그는 망설였다.살아 있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었다.죽음을 마음에 품은 자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관문이었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청해만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황제가 되면 곤륜 구역에서 최고 경지에 도달하는 건데.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왜 죽음을 택하려는 거지?’“저하, 국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합니다. 저하도 사랑하던 이에게 배신당했어도 결국 극복해 나갔잖습니까.”백호도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여전히 국주보다는 왕이 더 낫다고 여겼다.“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느냐.” 윤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백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는 어리숙하고 말솜씨도 없기에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내가 문아름에게 배신당한 건 억울한 일이지만 나는 그녀에게 잘못한 게 없다. 오히려 그녀가 날 배신한 거다. 하지만 국주는 그 반대였지. 그가 그녀를 저버린 거야. 정이 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지혜가 지나치면 오히려 상처를 입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쓰라린 후회는 가진 뒤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생사를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윤구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소채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도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느꼈다.“그럼 복수하면 되지 않나요?” 백호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이때 청해가 눈치를 채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상대가 너무 강해서 못 이기는 거지. 황제에 오르기 전까진 제대로 맞붙을 힘도 안 돼. 오르고 나서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하고.”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 말이 맞았다.“그럼 우리가 국주님 대신 복수해 드리면 되잖아요? 국주님은 제 왕이기도 하지만 제 윗사람이기도 하잖아요.”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하하! 만약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솔직하다면 이런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