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경악한 표정으로 소희의 휴대폰을 주시하고 있었다.이에 임구택이 일부러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입을 열어 물었다.“누구시죠?”[나 마민영이잖아! 잠깐…….]맞은편에서 대답하고 있던 마민영이 뜬금없는 남자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그러는 그쪽은 누구시죠? 왜 소희의 휴대폰을 그쪽이 가지고 있어요?]“소동이 그쪽 개인 디자이너 맞죠? 지금 소동이 해고되었다고 소씨네 가족들이 소희를 탓하고 있어요.”[뭐라고요?]자신이 제일 중히 여기는 친구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소리에 마민영이 화가 나 펄쩍 뛰었다.[그 사람들이 왜 소희를 탓해요? 분명 소동이 실력도 안 되고 인성도 쓰레기라서 해고된 건데! 드레스를 개똥처럼 만들어 나한테 욕 좀 먹었다고 바로 구은서한테 아첨 떨러나 가고, 결국 구은서도 그 여인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받아주지 않았다고 제작팀에 더는 있지 못할 것 같으니까 알아서 꺼진 건데, 왜 소희를 탓하냐고요!]임구택이 듣더니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소씨네 가족들을 훑으며 냉소를 드러냈다.“그런 거군요.”[당연하죠! 안 되겠다, 소희 지금 어디에 있어요? 내가 당장 가서 그 나쁜 여인에게 본때를 보여줄 거예요! 감히 소희에게 누명을 씌우다니! 오늘 다 뒤졌어!]마민영이 한다면 무조건 하는 불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걸 소희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바로 임구택의 손에서 휴대폰을 앗아갔다.“올 필요 없어요. 오늘은 혼자 쇼핑하러 가요, 나 일이 있어 못 가요.”[소희야, 너 소동 그 나쁜 여인한테 모함을 당한 거 아니야? 겁내지 마, 내가 대신 복수해 줄게!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그 여인을 제작팀으로 들이는 거 아니었는데.]“괜찮아요, 어서 가 놀아요.”[알았어, 그럼 일이 있으면 나한테 전화해, 언제든지 달려갈 테니까.]“네.”“…….”두 사람의 통화가 끝난 후 거실은 삽시간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고, 다들 각기 다른 표정으로 소희를 쳐다보고 있었다.그러다 소희가 휴대폰을 다시 내려놓자 소해덕이 순간 얼굴색이 차가워
임구택의 눈동자는 여전히 차가웠고, 그러는 임구택의 얼굴에서 소해덕 그들은 아무런 정서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다음에요. 오늘은 유민이의 성적이 많이 진보되어 제가 두 사람한테 점심을 사주기로 했거든요.”“하하, 우리 소희가 임씨네 가문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임 대표가 많이 보살펴준 덕이죠. 다음에 꼭 와서 밥 한번 먹어요, 나도 소희의 할아버지로서 제대로 한번 임 대표한테 고마움을 표하고 싶어요.”자애로운 할아버지의 역을 하고 있는 소해덕의 모습에 임구택이 여전히 덤덤하게 웃으며 말했다.“밥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다만 다음부터는 소희가 이 가문에 들어서자마자 욕부터 듣게 되는 일은 없었으면 하네요.”“그럼요! 절대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없을 겁니다! 게다가 오늘은 오해였잖아요.”임구택이 변명하고 있는 소해덕을 한번 덤덤하게 쳐다보고는 고개를 돌려 소희에게 물었다.“갈래?”소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임유민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이에 소씨네 가족들이 일제히 일어나 세 사람을 대문까지 바래다주었다.그러던 중 소찬호가 임유민의 곁으로 다가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너희 둘째 삼촌 짱 멋있어!”“당연하지. 심지어 네가 오늘에 본 건 아무것도 아니야.”“진짜 너와 네 둘째 삼촌이 와서 다행이야. 안 그러면 가족 어른들이 소희 누나를 엄청 꾸짖었을 텐데.”소찬호의 말에 임유민이 눈썹을 찌푸린 채 물었다.“너 입을 뒀다 뭐하는데? 네가 나서서 소희 쌤 편을 들면 되잖아.”“내가 당연히 편을 들었지! 하지만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는다고!”소찬호가 좌절감이 섞인 표정으로 대답했고, 이에 임유민이 다시 한번 그를 향해 흰자를 드러냈다.그렇게 다 같이 별장을 나선 후, 임구택이 직접 소희를 위해 조수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소설아의 얼굴색이 순간 차가워졌다.‘임씨 가문에 있어 소희는 외부인에 불과한 건데, 대표님이 소희를 조수석에 앉히고 임유민을 뒷자리에 앉힌다고?’임구택의 행동을 눈치챈 건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소희가 임구택을 향해 미소를 한번 짓고는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그런데 이때, 소희의 휴대폰이 울렸다.소시연이 보내온 메시지였다.[소희 언니! 아까 소동이 뺨 맞을 때 나 속이 엄청 후련했어!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도 쌤통이야! 조만간 배은망덕하고 마음씨 고약한 소동을 키운 거에 엄청 후회하실 거야!]진연 부부가 소동을 엄청 좋아하고 있다는 건 소희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설사 소동이 아무리 마음씨가 고약하더라 해도 두 부부는 여전히 소동을 자신의 친딸로 여길 거라는 것도.[참!]소희가 한참 멍을 때리고 있는데 소시연이 또 메시지를 보내왔다.[헤헤, 언니, 임 대표님이랑 무슨 사이인 거야? 임 대표님이 왜 그렇게 언니를 감싸고 도는 건데?]이에 소희가 천천히 타자를 하며 답장을 했다.[고용주와 고용인 사이. 내가 임유민에게 수업을 가르쳐 주고, 그 사람이 나한테 임금을 주는 사이.][거짓말. 고용주가 고용인한테 그렇게 잘해 줄 수 있다고?][당연하지. 나의 고용주는 직원을 엄청 감싸고 도는 분이야.]소희가 답장을 다 입력하고 메시지를 보내려는데 마침 소정인의 전화가 걸려왔다.이에 소희는 소시연에게 답장을 마저 보내고 나서야 천천히 전화를 받았다.그러자 소정인의 죄책감이 섞인 목소리가 바로 휴대폰 맞은편에서 들려왔다.[소희야, 오늘 일은 아빠랑 엄마가 잘못했어. 우리가 진심으로 사과할 게.]“괜찮아요, 저도 이미 익숙해져서.”너무 덤덤하여 아무런 정서도 읽어낼 수 없는 소희의 어투에 소정인은 더욱 난처해졌다.[앞으로 두 번 다시 소동의 말만 듣고 너를 탓하는 일이 없을 거야. 사실 너와 우리 간의 사이가 이렇게 틀어진 것도 어떻게 보면 다 소동이 탓이야. 네 할아버지의 말이 맞아. 우리가 확실히 너에게 너무 소홀했어. 그러니 소희야, 집으로 돌아와, 우리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자.]“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세요?”[소희야, 엄마와 아빠가 너한테 많이 미안해.]“미안함은 됐고, 저를 미워하지만 않으시면 돼요.”
“당연하죠!”소설아가 경멸의 웃음을 드러내며 대답했다.“소희가 어떻게 임구택 씨의 안중에 들겠어요.”“하긴. 소희가 예쁘게 생긴 건 사실이지만 세상에는 예쁜 여인이 많고도 많잖아, 임구택이 소희보다 더 예쁘게 생긴 여인을 보지 못한 것도 아닐 거고.”장연경이 덩달아 냉소를 한번 짓더니 다시 말을 이어갔다.“방금 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소희의 비위를 맞추는 걸 봤어? 마치 소희가 정말 임씨네 사모님이라도 된 것 마냥! 가소로워 죽겠네.”“걱정 마세요. 소희는 절대 임구택 씨의 아내가 되지 못할 거예요.”소설아가 한기 가득한 눈빛으로 한마디 내뱉고는 몸을 돌려 거실로 들어갔다.같은 시각, 소정인이 소희와 통화를 끝나고 마침 휴대폰을 거두고 있는데 소해덕이 그를 서재로 불렀다.그리고 소정인이 서재로 들어서자마자 소해덕이 바로 차가워진 얼굴로 화를 내며 말했다.“당장 소희를 집으로 데려가!”“저도 그러고 싶은데 소희가 돌아가려 하지 않아요.”“소희가 왜 돌아가려 하지 않는 건데? 너와 진연이 소희한테 잘해 주지 못했으니까 그러는 거 아니야! 오늘의 상황은 너도 봤겠지만, 임구택이 소희를 매우 중시하고 있어. 설령 둘이 결혼하지 않는다고 해도 소희가 임구택의 마음속에서 분량이 있는 건 확실해.”소해덕이 한참 말하다 갑자기 무엇이 생각났는지 또 다시 화를 내며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소동이는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전에는 분명 출세하나 싶었는데, 어떻게 점점 나를 실망시킬 수 있어? 어휴! 너희 두 부부가 이래 봬도 소동을 20년 넘게 키웠고, 또 그 아이한테 깊은 정이 있다는 걸 나도 알아, 그래서 그 아이와 관계를 끊으라고는 강요하지 않을 게. 대신 서둘러 그 아이에게 괜찮은 시댁을 찾아주고 시집을 보내. 적어도 우리 소씨 가문을 위해 힘을 보태야지.”“그건…….”소정인이 순간 망설였다. 그러다 한참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진연이랑 한번 상의해보겠습니다.”“진연이는 집에만 붙어있어 견해가 짧아. 그러니 매사에 진연의 말을 들어서는
“아버지도 나와 같은 뜻이야. 소희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감정을 키우고, 소동은 괜찮은 시댁을 찾아 시집 보내라셔.”“소희를 집으로 데리고 오는 일은 급하지 않아, 하지만 소동의 혼사는 먼저 생각해 봐도 될 것 같아. 우리가 소동의 작업실에 퍼붓은 돈만 해도 얼마야? 그 아이의 작업실은 밑 빠진 독이나 다름이 없어. 그러니 계속 그렇게 돈을 낭비할 바엔 돈 많은 집에 시집을 보내 부잣집 사모님을 시키는 것도 나쁠 게 없지.”“괜찮은 사람 있어?”소정인의 물음에 진연이 한참 생각하다 대답했다.“나와 자주 카드놀이를 하던 유 부인의 아들이 금방 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왔거든. 애가 키는 작아도 잘 생기긴 했어. 게다가 유씨 가문의 장사가 근 2년 들어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고…….”방안에서는 소정인과 진연이 계속해서 진지하게 상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동은 채 듣지도 않고 표정이 어두워져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그리고 침대에 몸을 던진 소동의 마음속에서는 원한의 씨앗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두 사람이 지금 나를 팔아버릴 생각을 하고 있어.’‘나를 팔아버리고, 소희를 집으로 데려와 세 식구끼리 행복하게 남은 생을 보낼 계획인 거야.’‘이렇게 되면 나중에 소씨 가문의 재산과 그룹도 전부 소희의 것으로 될 거야!’‘결국 그들이야말로 한 가족이고, 난 아무리 노력하고 잘해도 영원히 남인 거야!’‘안 돼!’‘절대로 그런 일이 발생하는 걸 허락해서는 안 돼.’‘난 죽어도 시집가지 않아! 소희도 절대 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거고! 이곳의 모든 것은 반드시 나의 것이여야 해.’‘그렇게 하려면 진연과 소정인이 나에 대해 다시 신심을 가지도록 방법을 찾아야 해, 그들 눈에서 쓸모가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소동은 갑자기 오늘 작업실의 직원이 연락이 와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최근 방송국에서 새로 개설한 프로그램이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연예인과 복장 디자이너를 초청해, 연예인을 모델로 디자이너들이 복장을 디자인하는 프로그램이라 했었나?’‘게다가 요
[누가 누나를 따돌렸는데?]“…….”추소용의 물음에 소동은 입을 다문 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하지만 추소용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전에 누나가 마민영한테 가서 돈을 빌리겠다고 한 후 몰래 도망갔다고 이 일이 이렇게 쉽게 끝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 내가 직접 한 번 소씨 가문에 찾아가 줘?]“너 대체 뭘 하려는 거야! 너 소씨 가문의 사람들을 잘못 건드렸다간 그들이 나까지 함께 가문에서 쫓아낼 수 있어. 그러면 그때 가서 넌 아무것도 얻지 못해.”소동의 경고에 추소용이 잠깐 멍해 있더니 바로 냉소를 드러냈다.[거짓말하지 마. 그 사람들이 누나를 그렇게 아끼는데 어떻게 누나를 쫓아낼 수 있겠어?]“아무리 아낀다고 해도 결국 난 소씨 가문의 친자식이 아니잖아. 그러니 그들의 심기를 잘못 건드렸다간 사정없이 나를 쫓아낼 거야. 너희 부모님이 소희가 친딸이 아니라고 소희를 엄청 학대했던 것처럼.”[그것 봐! 누나는 소씨네 사람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남이야, 우리 둘이야 말로 진정한 가족이라고. 그러니까 소씨 가문의 돈을 전부 나한테 맡겨, 그러면 우리 더 이상 두려울 것도 없을 거야.]“너한테 맡기라고? 그들이 나까지 경계하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너한테 맡겨?”[난 누나한테 분명 방법이 있을 거라고 믿어. 누나, 소씨 가문의 돈은 반드시 누나가 손에 쥐고 있어야 해. 내가 도와줄 게, 필경 우리 둘이야 말로 한 가족이니까.]추소용의 말에 소동은 정말로 마음이 동요하기 시작했다.“나한테 방법이 있긴 해, 대신 너 절대 소씨 가문에 찾아와서는 안 돼, 안 그러면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할 거야.”[그래, 안 가도 돼. 하지만 나 지금 쓸 돈이 없어, 그러니까 600만원만 입금해 줘, 그러면 다시는 누나한테 연락 안 할 게.]“허, 나한테 뭔 600만원이 있다고 너한테 입금해 줘?”[그거야 나도 모르지. 아무튼 지금 당장 돈을 입금해 주지 않으면 나 매일 누나한테 전화할 거야.]“…….”소동은 화가 치밀어 오른 나머지 얼
그렇게 또 한 시간을 놀고 난 후, 소희가 숨을 헐떡이며 임구택이 쉬고 있는 곳으로 달려가 물을 마셨다.격렬한 몸놀림에 묶었던 머리가 많이 풀린 상태라 소희가 아예 머리 끈을 풀어버렸다.임구택이 보더니 소희를 옆에 앉히고는 손가락으로 소희의 긴 생 머리를 천천히 빗겨주기 시작했다.이에 소희가 땀투성이 된 얼굴을 들어 살짝 놀란 눈빛으로 임구택을 바라보며 물었다.“당신 머리 빗겨줄 줄도 알았어?”하지만 묻자마자 소희는 문득 임구택이 머리 빗겨주는 방법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묶어줄 줄도 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임구택의 동작은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처음엔 실패했지만, 다행히도 두 번째에는 성공적으로 머리를 예쁘게 묶어주었다. 그러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웃으며 소희를 향해 말했다.“매일 당신을 위해 머리를 빗겨줄 수도 있는데.”“…….”임구택의 다정한 말투에 순간 가슴속 깊은 곳이 뜨거워 난 소희는 고개를 들어 물을 한 모금 크게 마셨다.그 모습에 임구택이 부드럽게 한 번 웃고는 다시 소희를 향해 물었다.“오후 내내 놀았는데, 이만 돌아갈까?”“유민이 오전에 그렇게 나를 감싸줬는데, 좀 더 놀아줘서 기쁘게 해줘야지.”소희가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임구택이 다시 소희의 어깨를 누르며 눈살을 찌푸렸다.“나도 당신을 감싸줬는데 왜 나한테 보답할 생각은 안 해?”소희가 듣더니 고개를 돌려 임구택을 한번 흘겨보았다. 그러고는 눈썹을 올리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당신이 날 감싸주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미소를 머금고 있는 소희의 모습에 임구택이 잠깐 멍해졌다. 그러다 두 눈동자가 순간 밝아지더니 입꼬리를 올리고 다정한 말투로 소희를 향해 말했다.“그럼 30분만 더 놀다 가자. 날이 어두워지고 있어.”“응.”소희가 대답하고는 다시 공 치러 갔다.그렇게 다 놀고 체육관에서 나왔을 땐,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그리고 명우가 어느새 따로 차 한 대를 몰고 와 관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임구택이 소희의 손을 잡고 자신의
우청아는 감격스러웠다.“사장님, 감사합니다.”“사장님 말고 오빠라고 부르는 건 어때?”“그래요!”능글맞게 말하는 임구택은 우청아의 기뻐하는 표정을 보고 부엌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그녀의 미소는 서서히 식어갔다. 지난번 장시원이 찾아왔을 때는 서로 좋지 않은 인상으로 헤어졌었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다 상황이 난처했다. 뿐만 아니라 장시원은 여전히 그녀에게 화를 내고 있었기에, 임구택은 그를 부르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임구택은 거실에 앉아 장시원에게 문자를 보냈다.[너 우청아랑 싸웠어?][우청아가 너한테 뭐라고 해?][아니, 아무 얘기도 안 했어.][너, 어디야?][소희랑 같이 있어.]직접 어디에 있는지 말하지 않았지만 우청아의 집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방금 임구택이 자신에게 물었을 때, 장시원은 임구택에게 전화를 걸어 같이 가자고 제안했을 때 우청아가 막은 것도 눈치챘다.술자리에서 장시원은 휴대전화를 들여보며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그 내면에는 화가 치밀어 올라있었다. ‘아직도 내가 그 일 때문에 본인한테 화를 낸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 내가 왜 화가 났는지는 알기나 하고?’그녀는 분명히 생각이 없는 듯했다. 마치 누가 어떻게 대해주는지 모르는 곰처럼 보였다. 이런 상황에 우청아를 만나면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그녀에게 화를 낼까 두려워서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어떤 이유인지 숨이 턱턱 차오르는 듯한 답답함이 느껴졌다. ……월요일오전 내내 회의에 참석한 우청아는 점심에 장시원이 없었기에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 장시원이 돌아오자, 최결은 장시원의 사무실에 가서 결재 서류를 건네주며 말했다.“저녁에 기원의 진유현 사장이 주최하는 축하 파티 행사가 있습니다.”장시원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결재 서류를 살펴보았다.“우청아 씨 들어오라고 하세요.”“알겠습니다.”최결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청아가 들어왔는데 그와 1미터 간격을 유지하였다.“사장님, 부르셨습니까?”장시원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