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심이 계단을 내려올 때, 금빛 커피색 롱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거실을 지날 때 남궁민이 이미 잠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아심은 다가가서 여전히 김이 나는 커피를 들어서 바 뒤로 가서 버리고, 하인에게 남궁민을 잘 돌보라고 지시한 뒤 나갔다. 저택을 나와서 아심은 차에 올라타며 운전사에게 말했다. “웰오드 씨를 만나러 가죠.”운전사는 아심을 요하네스버그의 사무실 건물로 데려갔고 도착하자 아심은 차에서 내려서 바로 안으로 걸어갔다. 경비들은 아심이 이디야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막지 않았다. 이에 아심은 별일 없이 꼭대기 층에 올라가 웰오드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들어오세요!” 웰오드의 목소리가 방 안에서 들리자 아심은 문을 열고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웰오드 씨!”웰오드는 이미 경비의 통보를 받았기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라나 씨,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나요?”아심은 두 걸음 다가가며 얼굴에 쓰고 있던 고양이 가면을 벗고, 눈가를 가늘게 뜨며 매력적으로 웃었다. “웰오드 씨, 예전에 우리가 만난 적이 있나요? 처음 뵀을 때, 왠지 익숙하게 느껴졌어요.”웰오드는 아심의 예쁘장한 얼굴을 보며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우리가 만난 적이 있나요?”“런던에서, 닉의 개인 클럽에서 만났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아심이 부드럽게 말하자 웰오드는 노력해서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런던에서 재벌인 닉의 개인 클럽에 갔을 때, 아름다운 여자와 하룻밤을 보낸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영국 소녀였지, 한국 소녀는 아니었다.‘내가 착각한 걸까?’아심은 다시 다가가며 웰오드를 사무실 책상 쪽으로 몰아붙였다. 살짝 몸을 기울이며 입술을 혀로 살짝 핥고, 남자의 귀에 속삭였다. “하지만 저는 웰오드 씨를 기억하고, 결코 잊지 못했어요.”아심의 목소리는 마치 최면이라도 하는 듯 매력적이었다. 웰오드는 아심의 아름다운 옆모습을 보자, 숨이 가빠지며
헤이브는 차가운 시선으로 웰오드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 일이 레이든 님에게 알려지면, 당신은 곤란해질 것입니다.”웰오드는 급히 말했다. “라나가 먼저 유혹한 거예요!”“이디야 님이 당신의 설명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나요?”웰오드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음에는 절대 그런 일 없을 거예요. 헤이브, 제발 비밀로 해주세요!”이에 헤이브는 냉소하며 말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물론이죠. 제가 약속합니다. 레이든에게 절대 알리지 마세요.” 웰오드의 말에 헤이브는 한 번 쳐다보고는 돌아서서 나갔다. 웰오드는 길게 한숨을 쉬며, 매우 후회스러워했다. ‘라나 이 여자 때문에 거의 죽을 뻔했네!’헤이브는 사무실 빌딩을 떠나면서, 아직 떠나지 않은 강아심을 보았다. 아심은 헤이브를 바라보며 약간의 장난기 있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이 두 번째예요. 헤이브 씨가 제 일을 망친 게.”헤이브는 아심을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 “라나 씨가 이디야 님 몰래 남자를 유혹하는 건 상관없지만, 요하네스버그에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디야 님을 화나게 할 수 없어요.”아심은 어깨를 으쓱하며 손을 내밀었고 장난기 있는 태도에서 다소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잘못했어요. 헤이브 씨, 봐주세요. 저 평소에는 잘 지내잖아요!”헤이브는 아심의 손을 바라보았다. 가느다랗고 흰 손가락이 예술품처럼 완벽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손톱은 깔끔하고 단정하게 다듬어져, 햇빛 아래서 은은하게 빛났다. 헤이브는 손을 내밀어 가볍게 아심의 손을 잡았다. “오늘 일은 넘어가겠습니다. 라나 씨,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헤이브의 손은 커서 아심의 손을 완전히 감쌀 수 있었지만, 헤이브는 예의 바르게 아심의 손가락만 가볍게 잡았다가 금방 놓았다.“물론이죠!” 아심은 손을 빼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 지었다. “저 먼저 가볼게요.”말을 마치고, 아심은 차로 걸어갔다. 우아한 몸매가 매혹적이면서도 청순한 기운을 풍
소희는 빈 커피잔을 테이블에 놓으며 남궁민에게 말했다. “오래 머물렀네요. 이제 가야겠어요.”남궁민은 소희가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자신이 너무 걱정했음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어젯밤 잠을 제대로 못 자서 피곤했다. 남궁민은 다시 이전의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라나 씨, 이디야 님에게 우리의 감사 인사를 전해주세요. 저희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다시 한번 이디야 님의 호의에 감사합니다.”이에 강아심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민 씨, 자주 오세요.”남궁민은 소희를 다정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가죠.”돌아가는 차 안에서, 남궁민은 계속해서 소희에게 물었다.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요?”“내?” 소희는 의아해하며 남궁민을 바라보자 남궁민은 어깨를 으쓱하며 설명하지 않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이 너무 걱정한 것일지도 몰랐다.밤이 깊어지자 요하네스버그의 축제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고, 술집은 소란스러웠다.건물 49층.경비는 웰오드가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공손하게 인사하자 웰오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니까, 여러분들도 축제에 참여해. 나는 안으로 들어가 볼 테니, 들어오지 말고요.”이에 경비는 말했다. “웰오드 씨, 고맙습니다. 하지만 레이든 님의 지시로, 경비 시간에는 누구도 자리를 비워서는 안 됩니다.”그러자 웰오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실험실로 들어가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에는 지문 인식 장치가 있었고, 경비는 웰오드가 지문 인식을 통해 문을 여는 것을 보고, 시선을 돌렸다.실험실은 매우 컸고, 안에는 다양한 정밀 기기들이 있었다. 두 명의 연구원이 표본을 채취하며 실험을 하고 있었고, 웰오드를 보자마자 인사를 했다. 웰오드는 간단히 두세 마디 묻고 나서 바이러스가 보관된 실험실로 걸어갔다. 바이러스 샘플은 보온 장치 안에 보관되어 있었고, 총 10개의 서로 다른 샘플이 있었다. 보온 장치는 연구원의 눈동자와 지문 인식을 통해서만 열 수 있
“아주 좋군!” 웰오드는 그 연구원을 바라보며 갑자기 총을 꺼내 그의 심장을 향해 쏘았다. “그 하녀를 대신해서 고마움을 표합니다!”총성은 소음기가 있었기에 아주 작은 소리만 냈다. 연구원은 한 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심장이 폭발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웰오드는 총을 집어넣고, 보온 장치의 소각 시스템을 가동했다. 시스템이 가동되자, 가상의 키보드가 나타났고, 웰오드는 빠르게 소각 프로그램을 입력하자 곧 프로그램이 실행되었다.갑자기 다른 연구원이 달려와 바닥에 쓰러진 동료를 보고 깜짝 놀라며, 재빨리 밖으로 달려갔다. 웰오드는 곧바로 쫓지 않고, 차분하게 프로그램이 완료되기를 기다렸다. 최종 확인 버튼을 누르고, 바이러스가 모두 소각되는 것을 본 후, 실험실을 나섰다.밖의 경비들은 이미 실험실로 뛰어 들어와 총을 웰오드에게 겨눴는데 상대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 그 틈을 타서, 웰오드는 굉장히 빠르게 움직여 한 경비의 총을 빼앗고, 땅! 소리와 함께 다른 한 명을 쏘았다. 그러고는 총을 가진 경비의 머리를 잡아 실험실 유리문에 부딪혔다. 그러자 피가 터져 나왔고, 두 경비는 순식간에 죽었다. 그때 다른 연구원이 보온 상자를 들고 다른 방에서 나왔다. 연구원은 웰오드의 다리 근처에 있는 두 구의 시체를 보고 겁에 질려 보온 상자를 들고 도망쳤다. 웰오드는 빠르게 움직여 연구원의 머리를 강하게 차자 앞으로 쓰러졌고, 보온 상자는 연구원의 손에서 떨어져 몇 미터나 굴러갔다.웰오드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자, 연구원은 두려운 표정으로 물러났다. 그제야 마침내 웰오드가 자신을 왜 놓아두었는지 깨달았다. 웰오드는 숨겨진 바이러스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가져오게 하기 위해 자신을 놓아준 것이었다. 그러자 연구원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미 경보를 울렸어요. 요하네스버그의 경비가 곧 도착할 거니까 나를 놓아줘요. 그러면 나는 당신을 본 적이 없다고 할게요!”웰오드는 연구원의 머리를 겨누며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기회는 없어!”땅
소희는 마스크를 쓰고 눈만 드러낸 채로, 단호한 눈빛을 드러냈다. 소희는 기관총의 반동 때문에 팔이 약간 떨렸지만, 느긋하게 걸어가며 탄피가 바닥에 떨어져 차가운 소리를 냈다.순간적으로 실험실 안에서는 비명, 신음, 기관총 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졌고,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수많은 사지와 잔해가 실험실의 유리벽에 부딪치며, 카펫은 피로 물들고 강한 피 냄새가 퍼졌다. 수많은 사람이 쓰러졌고, 또 수많은 사람이 밀려 들어왔다.소희와 웰오드는 완벽하게 호흡을 맞추며, 앞뒤로 움직이며 공격했다. 소희는 한편으로 경비와 싸우면서도, 웰오드가 퇴각하는 방향을 주시했다. 웰오드가 갑자기 화력을 증가시키자, 소희는 바로 이해하고 웰오드가 엄호하는 동안 큰 기구를 이용해 몸을 숨기며 빠르게 움직였다. 밀폐된 출입구를 발견했다.소희는 기관총을 한 번 쏘고 출입구를 열자 그 안에는 피투성이의 사람들이 가득했다. 순간 소희의 온몸이 차가워졌다.“받아!” 웰오드는 마지막 바이러스 샘플을 소희에게 던졌고 소희는 기관총으로 경비들을 쏘며 몸을 날려 바이러스를 받아들고, 재빨리 실험실로 걸어갔다. 피투성이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한 번 보고, 검은 폭발물 조각을 출입구에 붙이고 돌아서며 바이러스 샘플을 던졌다.쿵! 하는 큰 폭발음과 함께, 건물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소희는 매우 빠르게 달려 나갔고, 뒤에 있는 실험실은 이미 불바다였다. 비명이 불길 속에서 울려 퍼졌고, 마치 지옥처럼 참혹했다.소희는 총을 쏘며 웰오드의 방향으로 달렸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마주치고 동시에 창문으로 뛰어들었고 뒤에는 수많은 경비가 몰려오고 있었다. 창문 밖에서 헬리콥터의 소리가 들려왔는데 헬리콥터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에 소희와 웰오드는 동시에 몸을 날렸다. 와장창하는 큰 소리와 함께, 유리가 부서지며 총성이 뒤따랐다. 두 사람은 공중으로 뛰어내리며, 총성이 뒤따랐다. 부서진 유리는 공중에서 산산조각이 나며, 방 안에서 타오르는 불빛과 어우러져 마치 불꽃같았다.헬리콥터는 빠르게 접
밖에서는 격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지만, 22층의 바에서는 여전히 환락의 분위기였다. 남궁민은 바 테이블 앞에 앉아 소희에게 전화를 두 번이나 걸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이 시간에 소희가 방에서 자는 것도 아니고, 바에도 없는데,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갑자기, 남궁민은 자신이 소희를 너무나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희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온두리에서 찾고 있는 오빠는 대체 누구일까?’예전에는 이런 걸 알아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몹시 알고 싶어졌다. 남궁민은 신비로운 여자를 좋아했지만, 소희한테는 단순한 호감이 아니라 걱정이었다. 또한, 손에 잡히지 않는 불안감도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괴로워할 때, 꽤 섹시하고 풍만한 몸매의 여성이 남궁민의 옆에 앉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술 한잔 사 주실 수 있나요?”여자는 젊고 아름다운 얼굴에 눈동자를 반짝이며 남궁민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남궁민은 마음이 복잡해 여자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에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죄송하지만, 저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여자는 거절당하자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일부러 더 가까이 다가와 남궁민의 다리를 슬쩍 건드렸다.“혹시 저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닌가요?”남궁민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막 말을 하려는데, 뒤에서 거칠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제티!”술에 반쯤 취한 남자가 다가오며 사나운 표정으로 남궁민을 노려보았다.“지금 감히 나의 제티를 빼앗으려고 하는 거야?”그러자 남궁민은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전혀 관심 없으니까 당장 데려가!”그러나 여자는 반쯤 취한 남자를 피하려는 듯, 남궁민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난 당신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방해하지 말고 꺼져!”남자는 화가 나서 여자에게 냉정하게 말했다.“제티, 너!”남자는 거친 숨을 몰아쉬더니 갑자기 손을 들어 남궁민을 때리려 하자 제티는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물러났다“악!” 그러나 주먹은 남궁민의 얼굴에
남궁민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하며 소희를 한 번 바라보고는 물었다.“무슨 일이 생겼죠?”“건물의 1층 연구소가 파괴되었습니다. 연구소에서 라일락 씨로 추정되는 인물이 목격되었고요.” 헤이브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추정되는 인물이라고요?” 남궁민은 소희 앞에 서서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헤이브,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지금 이 바에 라일락과 비슷한 체형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보세요.”“근데 왜 하필 라일락이라고 콕 집어서 얘기하시는 거죠? 그리고 레이든에게 전해주세요. 라일락은 저와 함께 밤새 있었으니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다고요!”헤이브는 말했다.“남궁민 씨, 정말 라일락 씨가 계속 당신과 함께 있었나요?”남궁민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물론입니다.”그러자 헤이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고는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섰다.“그럼 됐습니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남궁민은 헤이브의 태도가 이상하다고 느끼며 그가 멀어지는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나서 소희를 바라보았다.“우리가 밤새 함께 있었던 것 맞죠?”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하죠.”남궁민은 그제야 낮게 웃으며 말했다.“우리 이만 돌아가죠.”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남궁민과 함께 바를 떠났다. 별장에 도착하고 소희가 위층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남궁민이 그녀를 불렀다.“라일락!”소희가 돌아서자, 남궁민은 진지한 눈빛으로 소희를 바라보며 물었다.“당신은 대체 어떤 사람인가요?” 소희는 담담하게 말했다.“저는 소희입니다.”소희는 담담하게 말하자 남궁민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좋아요, 당신이 누구든 상관없어요. 난 신경 쓰지 않으니까.”“음?” 소희는 남궁민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저랑 사귀시죠. 전, 제가 당신을 좋아하게 됐다는 걸 깨달았거든요.”남궁민의 갑작스러운 고백임에도 불구하고 소희는 무표정하게 답했다.“감사하지만, 전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요.”소희는 말을 마치고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다.“라일락, 아니, 소희!” 남궁
이에 남궁민은 비웃으며 말했다. “라일락, 내가 당신을 깎아내리려는 게 아닙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나보다 뛰어나다는 건 너무 주관적인 판단이거든.”“아니요, 매우 객관적인 사실이에요.” 소희는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쓸데없이 이런 화제로 왈가왈부하지는 말죠. 제가 아까 말했던 것을 생각해 볼 시간을 줄게요.”“생각할 필요 없어요!” 소희는 다시 남궁민의 말을 끊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지 말라고요!”말을 마치고, 소희는 남궁민을 지나쳐 위층으로 올라갔다.“라일락.” 남궁민은 소희의 뒷모습을 집요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모든 것을 줄 수 있고 이건 결코 빈말이 아니에요.”소희는 뒤돌아보며 말했다. “하지만 저는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서 필요가 없네요!”그날 그 사당을 떠올리며, 오늘 남궁민이 자신을 보호해 준 것을 떠올리며, 소희는 남궁민의 감정을 경멸하지 않고 진지하게 대답했다.“정말 미안하지만, 당신의 감정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진심으로 당신이 진정 사랑하는 사람을 찾길 바랍니다.”남궁민은 고개를 들고 말했다. “나는 이미 찾았다고 생각해요!”“착각이라고 생각하세요.” 소희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서 걸어가자 남궁민은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소희가 너무 조심스러운 걸까? 정말 남자친구가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소희를 혼자 온두리에 보낼 수 있었을까?’남궁민은 소희를 여기에 두고 싶었고 소희가 자발적으로 남도록 만들 자신이 있었다.문을 닫고 나서야 소희는 짜증난 표정을 지었다. 그날 임구택이 소희에게 남궁민이 자신을 좋아하는지 물었을 때, 소희는 확신에 차서 아니라고 대답했다. ‘남자들은 정말로 고통을 즐기는 거야?’소희는 남궁민에게 한 번도 웃거나 좋아하는 표정을 지어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 이에 대해 더 이상 다투지 않기로 했다.소희는 옷을 챙겨 들고, 긴장이 풀린 표정으로 샤워를 준비했다. ...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
“여진구 제대로야. 임씨 집안 딸이랑 결혼하면 우리 집안의 공신 되는 거지. 할아버지도 계속 웃고만 계시잖아. 아이, 우린 왜 그런 복이 없을까.”“네가 저 아가씨랑 결혼했으면, 진구 대신 네가 후계자 됐겠지.”누군가 농담을 건네자. 여인후는 코웃음을 치며 비꼬듯 말했다.“너희는 저 여자가 뭐 대단한 줄 아는 모양인데, 내 눈엔 그냥 싸구려야. 한쪽으론 우리 집안 며느리 노릇하려 들고, 한쪽으론 구씨그룹 사장한테 붙어먹고 있다니까?”순간 주변이 조용해졌고, 다른 한 명이 조심스레 물었다.“그거 어떻게 알아?”“내가 봤다니까, 거짓말일 것 같아? 할아버지 생신 잔치 때, 임유진이 구은정이랑 서로 잡고 끌고 하는 장면 내가 직접 목격했어.”인후는 비웃듯 말했다.“진구는 그걸 모르고 좋아 죽고 있겠지. 이미 유진한테 다른 남자가 생긴 줄도 모르고.”이에 사람들 사이에선 탄식이 터져 나왔다.“저 아가씨는 겉으론 참 청순해 보였는데, 의외네.”인후는 유진이 자신을 무시했던 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고, 진구에 대한 질투도 더해져 그의 말은 점점 도를 넘었다.“겉으로 고상하고 순해 보이는 애들이, 뒤로는 더 음란한 거 몰라? 저런 여자가 제일 문란하게 노는 법이지.”“쾅!”갑작스레 문이 거칠게 열렸고, 인후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지만,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강한 주먹이 얼굴을 가격했다.그 한 방에 코뼈가 부러지고, 머릿속은 울려댔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아찔했다.문 안으로 들어온 남자는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살기 서린 기운을 뿜어내며, 냉혹한 기세로 여인후를 주먹질하고 발길질했다.순식간에 그 자리에 있던 몇몇 여씨 집안 사촌 형제들도 함께 맞았다. 차례차례 쓰러져 바닥을 뒹굴었다.유진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옆방에서 들려온 날카로운 비명과 고통스러운 신음을 듣고 깜짝 놀라 즉시 방향을 틀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고는 멍하니 굳어버렸다.바닥엔 네댓 명이 쓰러져 있었고, 은정은 여인후의 머리채를 붙잡고
그날 밤, 여씨 집안의 한 어르신이 귀국해, 강성의 모 유명 5성급 호텔에서 가족 만찬이 열렸다.임유진은 여진구와 함께 도착했다. 메인 테이블은 여씨 직계 가족들로만 채워져 있었고, 무려 30명 가까이 앉을 수 있는 커다란 원탁이었다.진구의 할아버지 옆자리에 앉아 있던 백발의 노인은 그의 큰할아버지였다. 회장님의 친형으로, Y국에서 거주하다 이번에 가족을 데리고 일시 귀국한 것이다. 그만큼 이번 가족 모임은 여씨 집안에서 굉장히 중요한 자리였다.유진은 처음에는 단순히 가족들끼리 조용히 저녁식사를 하는 줄 알고 있었다. 자신을 초대한 것도 분위기만 맞춰주면 될 줄 알았다.하지만 파티장에 들어서자, 진구는 유진을 이끌고 바로 메인 테이블로 향해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렸다.한혜란 여사와 여순호도 유진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고 따뜻하게 인사를 건넸다.여순호는 직접 자신의 큰형에게 유진을 소개하며 자애로운 웃음을 지었다.“우리 진구가 신뢰하는 아가씨야.”그러고는 자기 옆자리에 의자를 추가해 유진이 외부인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옆에 앉게 했다.물론 유진은 임씨 집안의 딸이라는 명확한 신분이 있긴 하지만, 이토록 특별하게 대우하는 것을 보며, 진구와 유진의 관계는 이미 대부분의 사람 머릿속에서 확정된 분위기가 되었다.순식간에 파티장 안은 칭찬과 축하, 아첨의 말들로 가득 찼고, 진구와 동년배의 친척 중 몇몇은 눈에 띄게 부러움과 질투를 숨기지 못하며 억지로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유진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자리는 단순한 가족 식사가 아니었다. 이에 유진은 재빨리 핸드백을 챙겨 나갈 구실을 찾고 파티장을 빠져나왔다.호텔 복도 쪽으로 나와서야 숨을 돌린 유진은 진구에게 따졌다.“선배 왜 말 안 했어요? 오늘 선배 큰할아버지 귀국한 날이고, 집안 전체가 다 모이는 행사였다는 걸요. 처음부터 알았으면 나 안 왔을 거예요.”“할아버지가 꼭 널 데려오라고 했어. 부탁이라기보단 명령이었지.”진구는 웃으며 말했으나, 유진은 고개
정현준은 업무 능력은 있었지만, 결국 남녀 문제로 스스로 무너졌다. 임유진과 관련된 일이 정리되자 여진구는 한결 가벼운 표정으로 말했다.“오늘 저녁, 우리 집에서 가족 모임 있어. 같이 가자.”그러자 유진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가족 모임에 내가 왜 가요?”이에 진구는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우리 할아버지가 널 보고 싶대. 지난번 생신 때는 제대로 인사도 못 했다면서, 꼭 데리고 오라고 하셨어. 그리고 나도 할 말이 있어.”사실 진구는 오늘 저녁, 유진에게 고백할 계획이었다. 유진은 진구의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 한다는 말에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몇 시에 가면 돼요?”“저녁 7시쯤. 내가 호텔로 데려다줄게.”“그래요.”진구는 미리 소혜와 시양의 해고를 결정해 두었기에, 두 사람의 자리를 대신할 인력을 미리 배치해 두었고, 업무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유진이 사무실로 돌아오자, 마케팅 부서 직원들이 하나둘 들어와 그녀에게 사과를 전했다.“팀장님, 저희가 소혜 씨한테 휘둘려서 그랬어요. 정말 죄송해요.”“앞으론 함부로 휩쓸리지 않을게요. 이번 일로 크게 깨달았어요.”“눈으로 본 게 다가 아니더라고요. 그깟 사진 몇 장으로 괜한 오해 했네요.”...유진은 담담하게 모두의 사과를 받아주며 말했다.“괜찮아요. 이미 지난 일이고, 전 이 일로 누구 미워하지 않아요. 앞으로 일에만 집중하죠.”유진의 대인배적인 반응에 부서 내에서의 평판은 확 올라갔다. 유진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신뢰와 존재감을 동시에 확보했다.더 이상 누구도 진구 라인이라는 말로 그녀의 실력을 깎아내리려 하지 않았다. 어쩌면 현준이 사직과 업무 인수인계를 하러 다시 회사에 오게 된다면, 자신이 예전에 소혜에게 했던 말을 떠올릴지도 모른다.타협이 안 되면, 뿌리째 잘라낸다는 그 말, 소혜는 그 말을 흘려들었다. 그리고 현준도 이와 얽히고설켜 끝내 유진이 베어내야 할 대상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업무를 마치기 전, 진구는 방연하에게 메
곽시양은 임유진의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있다가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시양은 다들 자신이 승진한 걸로 수군대는 줄 알고 웃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시양 씨, 얼른 회사 이메일 확인해 봐요.”시양은 곧장 사내 메일함을 열어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뒤 3분 넘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대로 진소혜를 향해 달려들며 집어던졌다.소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순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둘을 떼어놓자, 시양은 눈에 광기를 담고 소리쳤다.“진소혜, 이 악랄한 년! 팀장님도 모함하고, 나도 똑같은 수법으로 뒤통수 쳐? 너 같은 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버려야 해!”소혜도 물러서지 않았다.“미쳤어?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딴 더러운 짓을 해놓고 몰래 찍혔다고 나한테 화를 내?”“너야! 너밖에 없잖아!”시양은 미친 사람처럼 소혜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이때, 현준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진정 좀 해!”“꺼져!”시양은 손을 뻗어 정현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당신이 날 찍었지! 그리고 진소혜한테 넘겼지! 둘 다 정말 비열해!”현준도 결국 폭발했다.“유혹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시양은 그대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아악!”유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이 난장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간 건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시양은 입사 이후 내내 소혜에게 눌려 지냈다. 겉으론 아첨하며 따라다녔지만, 소혜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듯 대하던 걸 속으로는 원망하고 있었다.시양은 현준이 소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소혜에게 특혜를 줬던 그를 시양은 일부러 유혹했다. 현준을 차지해 소혜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준은 시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