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남편의 첫사랑이 불치병에 걸렸다. 남편은 하지율에게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지율아, 채아한테 남은 날이 얼마 없어. 그러니까 네가 참아.” 그는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첫사랑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심지어 하지율이 정성껏 준비한 결혼식까지 임채아에게 양보해야 했다. 다섯 살 된 아들이 남편 첫사랑의 다리를 꽉 붙잡았다. “엄마는 예쁜 누나보다 하나도 안 예뻐요. 왜 예쁜 누나가 우리 엄마가 아니예요?” 하지율은 두 사람을 위해 이혼 합의서를 던져두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나중에 남편과 아이가 그녀 앞에 무릎을 꿇는데... 전 남편은 후회로 가득 찬 얼굴이었고 아들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지율아, 정말 우릴 버릴 거야?” “엄마, 진짜 우릴 버릴 거예요?” 그때 한 잘생긴 남자가 하지율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여보, 여기서 뭐 해? 아들이 배고프대.”
View More유소린은 숨김없이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얘기했다.“해리가 원한을 산 사람이야 많지만, 이번 건... 너무 절묘하거든. 게다가 화야 씨 실력이라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어.”화야를 알수록 유소린은 화야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무엇이든 배워서 곧잘 해내는 거의 만능에 가까운 사람이었다.이 일이 정말 화야가 한 일이라고 해도 유소린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하지율은 그 말을 듣고 눈빛이 약간 어두워졌다. 그리고 컵을 내려놓으며 담담히 말했다.“해리는 많은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들을 얼마나 꺾어 왔어. 이런 결말은 자업자득이야. 아마 통쾌해하는 사람이 안타까워하는 사람보다 훨씬 많을걸.”뜻밖의 대답에 유소린이 잠깐 말을 잃었다.“너는... 화야 씨가 잔인하다는 생각은 안 해?”솔직히 유소린은 아무렇지 않았다.다만 하지율은 착하고 마음이 약하니 화야를 어떻게 생각할지 몰랐다.하지율이 말했다.“정말 화야 씨가 한 일이라면, 민폐인 사람을 처리한 거잖아. 잘한 일이야. 나는 자선단체 홍보대사라서 많은 시선이 너무 붙어. 직접 손댈 수 없는 일이 많아.”하지율은 잠깐 멈추더니 웃었다.“해리가 재능이 뛰어난 건 맞지만 해리가 사라지면 앞으로 더 많은 유망한 음악가들이 기회를 얻을 거야. 나중에 그들의 업적이 꼭 해리보다 못 한다는 법도 없고. 나는 늘 생각해. 센 상대를 짓눌러 없앨 게 아니라, 그를 기준점으로 삼고 더 성장해야 한다고. 내가 충분히 강하면, 무서운 신인이 나타나도 두려울 게 없지. 설령 평생 넘어설 수 없는 천재가 나타나더라도, 그건 우리 시대가 끝났다는 뜻일 뿐이야.”유소린은 멍하니 하지율을 바라봤다.“지율아, 너... 많이 달라진 것 같아.”하지율이 물었다.“그럼 이 변화가 좋은 것 같아, 아니면 나쁜 것 같아?”유소린은 잠깐 진지하게 생각하더니 말했다.“좋은 것 같아. 예전의 넌 정말 너무 착하고 마음이 약했어. 그래서 임채아가 그렇게까지 널 만만하게 본 거고. 이
해리는 자신이 입에 올렸던 그 비윤리적인 고통을 똑같이 당했다.얼굴은 처참히 망가졌고, 두 손은 완전히 못 쓰게 됐다. 심지어 순결마저 잃었고, 사진과 동영상까지 찍혔다.해리는 수치와 분노에 죽고 싶어졌지만, 그럴 용기도 없었다.모든 게 끝났을 때, 해리는 영혼이 빠져버린 껍데기처럼 바닥에 널브러져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봤다.그 시야 사이로 정교하고 잘생긴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남자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떠 있었는데 아주 평범한 교회 청년 같았다.이 남자가 조금 전까지 얼마나 잔혹했는지, 겉모습만으로는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해리는 피범벅이 된 자기의 손을 힐끗 내려다봤다.힘줄은 끊겨 있었고, 치료로 회복될 여지를 없애려는 듯 손가락까지 강제로 잘려 나갔다.바이올린을 다시 잡는 일은 영영 불가능했다.천재로 불리던 해리의 커리어는 완전히 끝장났다.해리는 중얼거렸다.“하지율이 널 고용한 거냐...?”남자가 고개를 저었다.“해리 씨, 스스로를 너무 높이 사시네요. 당신은 하지율 씨한테 패배한 루저일 뿐이에요. 하지율 씨가 그런 사람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 것 같아요?”해리는 갑자기 흥분해 눈이 붉어졌다.“그럼 넌 누구야? 왜 나한테 이러는 건데?! 내가 인맥을 알기나 해? 이렇게 해놓고 네가 무사할 줄 알아?”남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웃었다.“해리 씨가 하지율하고 무슨 내기를 했던, 그건 저랑 상관없어요. 하지만 하지율 씨한테 바이올린을 접으라는 말은 하지 말았어야죠.”남자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태연하게, 하지만 살기 어린 눈동자로 얘기했다.“당신이 뭔데 감히 하지율한테 이래라저래라 예요?”끓어오르던 해리의 분노가 그 말 한마디에 식어버렸다.어느새 눈빛에는 공포가 어렸다.이 남자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잠시 잊고 있었다. “어, 어쨌든 결과적으론 은퇴 안 했잖아?”남자는 담담하게 해리를 응시했다.“그래요, 은퇴는 하지 않았지만 나는 하지율을 은퇴하게 만드는 조금의 균열도 허락하지 않아요.”남자는 시선을 내
해리가 천천히 눈을 떴다.시야에 들어온 건 불빛이 거의 닿지 않는 음습한 창고였다.해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문지르며 낮게 중얼거렸다.“여기가 어디지?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야?”며칠째 해리는 술에 절어 살았다. 하지율이 그에게 남긴 충격 때문에 하루 종일 고통 속에서 헤맸다.하지율이 준 모욕만 떠올리면 해리는 분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마음에 걸린 무거운 짐을 도저히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그래서 결국 해리는 몰래 킬러까지 알아봤다. 하지율을 없애버리려고 말이다.해리는 하지율만 사라지면 이 고통도 끝날 거라고 믿었다.그리고 마침내 어제 그 의뢰를 수락한 사람이 나타나 Z국으로 넘어와 연락하겠다고 했다.해리는 기뻐서 또 술을 진탕 들이마셨다.하지율만 죽으면 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갈 것이다.해리는 벌떡 일어나 환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너희들이 내가 부른 킬러들이지?”길쭉하고 마른 실루엣의 남자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눈앞에 서 있는 젊고 잘생긴 남자를 보면서 해리는 문득 놀랐다.스무 살 갓 넘은 듯한 그 남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킬러보다는 오히려 햇살 미소가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해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금 킬러는 얼굴도 보는 건가?’젊은 남자가 해리를 바라봤다.“해리 씨, 요구 사항이 뭡니까?”해리의 눈빛이 독사처럼 서늘하게 번뜩였다.“그 여자를 성폭행한 다음에 죽여. 좋기는 얼굴도 망가뜨리고, 손도 못 쓰게 만들어. 그리고 입막음도 확실히 해. 하지율을 죽여만 준다면, 값은 너희가 부르는 대로 주지.”해리의 말을 들은 남자가 옅게 웃었다.“해리 씨, 정말 통이 크시네요.”해리는 하지율을 뼛속까지 증오하고 있었다.며칠 동안 해리의 머릿속에는 하지율을 괴롭혀 죽이는 방법이 수천, 수만 가지나 떠올랐다.해리는 계속 말을 내뱉었다.“하지율이 죽으면 그 나체 사진을 인터넷에 뿌려. 나머지는 내가 처리할 거야.”해리는 하지율이 죽은 뒤에도 편히 눈 못 감게 만들 참이었다.이런 불명예와 오
현성 대가는 길고 아주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 만에 10년이 늙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지금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다. 이 와중에 임채아를 내보낸다면, 저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욕하겠어. 지금은 섣불리 움직일 게 아니라, 천천히 상황을 보며 처리해야 한다.”아무도 더 말을 보태지 못했다....초고난도 곡 ‘눈빛’을 완주한 하지율이 이번 대회의 우승을 거머쥐리라는 건, 이제 사실상 기정사실이었다.하지율이 해리를 꺾는 장면을 담은 영상은 빠른 속도로 확산 중이었고, 각종 음악 교류회의 초청장이 눈처럼 쏟아졌다. 유소린은 연락을 받다 손이 저릴 지경이었다.하지율의 연주회와 대회는 항상 전석 매진이었다.유소린은 일이 많아졌음에도 힘들어하기는커녕 오히려 밤늦게 야근을 해도 피곤한 줄 몰랐다.“지율아, 우리 진짜 대박 터졌어! 임채아가 아무리 고지후를 배후로 두고, 현성 대가의 손을 빌린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야! 이젠 아무도 임채아를 언급하지 않아! 그냥 다들 현성 대가님의 안목이 좋지 않다고 할 뿐이지.”유소린은 하지율의 커리어가 곧 전성기를 맞이할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다만, 하지율은 연주회를 준비해야 하기에, 유소린은 불필요한 비즈니스 공연을 모조리 거절하고 하지율이 연주회 준비에 집중할 수 있게 했다.유소린이 뉴스를 훑어보며 말했다.“지금 분위기로는 국제 대회의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도 너야. 무대에서 ‘눈빛’ 한 번만 연주하면 따라올 사람이 없다고들 해.”신예인 하지율이 해리보다 강하다는 사실은 전 세계 음악가의 주목을 받았다.하지율은 담담했다.“이번에는 컨디션이 평소보다 확실히 좋았어. 하지만 이런 컨디션을 다시 끌어올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 다시 연주한다고 해도 저번보다 잘 연주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유소린이 괜찮다는 듯 얘기했다.“컨디션 난조는 누구나 있어. 키를 올리지 않은 ‘눈빛’이라면 충분히 안정적으로 연주할 수 있잖아. 지율아, 너무 스스로를 몰지 마. 넌 이미 충분히 대단해.”하지율은
이런 식의 패배와 모욕을 당한 것은 생전 처음이어서 충격이 너무 컸다.지금 해리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했다.현성 대가는 레이나 등 몇몇 제자와 함께 해리를 부축해 먼저 자리를 떴다.해리의 몰골을 본 현성 대가는 속으로 길게 한숨을 삼켰다.하지율에게 패배한 고통을, 해리가 과연 딛고 일어날 수 있을까. 출구 쪽으로 향하던 현성 대가의 시야에 꽃다발을 든 고지후와 임채아가 들어왔다.임채아가 서둘러 인사했다. “선생님.”그러나 현성 대가의 표정은 싸늘했다. 현성 대가는 임채아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뭐라고 말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임채아는 잠깐 멈칫했다가 곧 깨달았다.현성 대가는 해리와 하지율의 내기를 임채아 탓으로 돌리고 있다고.하지만 임채아는 억울했다.해리를 부른 사람은 현성 대가였고 내기 얘기를 꺼낸 것도 해리였다.억울함이 치밀었지만 임채아는 겉으로 드러낼 수 없었다.임채아는 그저 서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해리 선배는... 괜찮으신가요?”이사키와가 대신 답했다. “큰일은 아닙니다. 돌아가 쉬면 괜찮아질 겁니다.”고지후도 모른 척 지나칠 수는 없었기에 가볍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현성 대가님.”그제야 현성 대가가 고개를 돌렸다. 맑지만 노련한 눈빛은 매처럼 예리했다.현성 대가가 고지후를 곧게 응시하며 말했다. “고지후 씨. 우리 사이에 원한도, 악연도 없는데 왜 나를 해친 겁니까?”고지후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제가요? 제가 대가님을 해쳤다고요?”현성 대가가 씁쓸한 비웃음을 흘렸다.“내가 원래 찾으려던 사람은 하지율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하지율을 두고 아무것도 못 하는 가정주부라고 했어요. 그리고 내게 임채아를 추천했죠. 정말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 어떻게 ‘눈빛’을 연주하고, 어떻게 해리를 꺾을 수 있습니까? 당신은 하지율을 한낱 보잘것없는 존재로 깎아내리고 결국 임채아를 제자로 받도록 나를 설득했죠. 그리고 그 결과...”현성 대가의 차가운 시선이 임채아에게 꽂혔다.“임채아를 제자로 받
주용화가 품에 들고 있던 안개 꽃다발을 내밀었다.“하지율 씨, 오늘 경기 우승,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하지율은 주용화가 내민 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안개꽃.그건 하지율이 가장 좋아하는 꽃이었다. 아마 유소린이 미리 알아보고 준비해 달라고 부탁한 모양이었다.하지율은 미소를 띠며 꽃을 받아서 들었다. “고마워요.”그때 복도 끝에서 성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밖으로 나온 고지후는 하지율이 웃으면서 주용화가 주는 꽃을 받는 모습을 똑똑히 목격했다.그 미소는 놀랄 만큼 환했고 따뜻했다. 조금 전 고지후를 대하던 차가운 태도와는 완전히 달랐다.무언가를 감지한 듯, 주용화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그리고 고지후 손에 들린 장미꽃다발을 내려다보며 가볍게 눈썹을 올렸다.“고지후 씨도 하지율 씨한테 꽃을 드리러 온 건가요?”고지후의 잘생긴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당신과는 상관없습니다.”주용화가 옅게 웃었다.“그래도 한 마디 드린다면, 꽃은 받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으로 고르셔야 하지 않겠나요? 모든 여자가 장미를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율 씨가 좋아하시는 건 안개꽃이에요.”고지후는 본능적으로 하지율을 바라보았다.하지율은 고개를 숙인 채 손안의 안개꽃을 부드럽게 매만지고 있었다.그 눈빛에 스민 기쁨과 애정은 연기가 아닌 진심이었다.고지후의 눈매가 어둡게 가라앉았고, 목소리도 약간 잠겼다.“지율아, 나...”하지율은 고지후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들어 주용화를 향해 말했다.“시간이 꽤 늦었네요. 먼저 가요.”주용화가 하지율의 바이올린 케이스를 자연스럽게 받아서 들었다.“네. 소린 씨가 레스토랑 예약을 마쳤어요. 가시죠.”하지율은 고개를 끄덕이고 망설임 없이 발을 뗐다.고지후가 뒤따르려는 순간, 주용화가 가볍게 길을 막았다.“고지후 씨. 오늘은 지율 씨에게 아주 좋은 날입니다. 괜히 따라오셔서 분위기를 망치지 않기를 바라요.”고지후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내가 따라가면 분위기를 망치는 거고, 당신이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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