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다인이랑 화목하게 지내. 다인이는 마음이 여리잖아. 게다가 둘은 원래부터 친구였으니까 다시 예전처럼 지내기 더 쉽겠지. 네 동생도 무사해. 난 네 동생한테 손을 댄 적 없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말을 하고 나니 배정우는 다소 힘들어져 한참 가만히 임슬기를 빤히 보았다.그녀는 확실히 전보다 많이 야윈 상태였고 더는 예전처럼 활기차지 않았다.배정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그날 밤 어디 아픈 곳이 있었다면 그를 불렀어도 그 오랜 시간 비를 맞지 않았으리라 생각했으니까......반도에 있는 별장.이미 오전 10시가
‘장 보러 갔다고?'오정태는 다소 미심쩍었다.그도 그럴 것이 임슬기는 임씨 가문에서 귀하게 자랐기 때문에 단 한 번도 직접 주방에 들어가 무언가를 만들어 본 적 없었다. 설령 배정우와 결혼한 뒤에도 임슬기는 손에 물 한 방울 묻힌 적 없었기에 직접 장 보러 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양녀인 연다인은 집에 가만히 있다니 말이 되지 않았다.게다가 그는 이미 임슬기에게 연락해 보았지만 받지 않았다.줄곧 연다인이 수상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신분 차이 때문에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고 직설적으로 묻는 것 대신 일단 관찰하기로 했
오정태는 그대로 쓰러져 버렸고 머리에선 피가 흘러나왔다.하지만 연다인은 그가 죽는 걸 원치 않았다. 여하간에 여기서 죽게 된다면 분명 그녀가 한 짓임을 알게 될 테니까.머리를 굴리니 금방 좋은 생각이 떠오른 그녀는 임슬기가 돌아오면 임슬기에게 이 모든 것을 뒤집어씌우기로 했다.조금 걱정되는 것은 오정태가 무언가를 알고 있을지 모르니 일단 지켜보자고 생각했다.그녀는 서둘러 문을 닫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다가 방금 힘을 너무 세게 준 탓에 상처가 벌어져 피가 새어 나오면서 옷을 붉게 물들였다는 것을 발견했다.결국 하는 수 없이 그
임슬기는 여전히 머릿속이 조금 흐릿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연다인을 위한 배정우의 억지로 차가운 돌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원래는 자신이 날이 밝을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갑자기 세차게 내리는 비에 그녀는 점차 정신이 아득해지기 시작했고 폐에 경련이 일어나면서 피가 울컥울컥 입안으로 역류해 나왔다.그러다가 시간이 조금 더 지나니 더는 버틸 수 없었던 그녀는 눈을 감게 되었고 그대로 쓰러진 것이다.그녀는 자신이 죽은 줄 알았고 그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몇 숟가락 먹고 나니 임슬기는 드디어 목이 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러나 기침을 하자 목이 찢어질 듯 아파 그녀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고마워요, 변호사님. 이젠 제가 알아서 떠먹을게요.”진승윤은 고개를 끄덕인 후 침대를 정리해 주었다.“뭐라도 조금 먹어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일단 죽을 데워 왔어요. 살코기 죽인데 괜찮아요?”그는 지난번 살코기 죽을 먹고 싶다고 하던 게 떠올랐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살코기 죽으로 사 오라고 했고 두 시간 동안 보온 팩에 있긴 했지만 이미 식어버려 다시 데워 왔다.임
“난 바람을 피운 적 없어.”임슬기는 다시 한번 분명하게 말했다.그녀는 정말로 바람을 피운 적 없었지만 배정우가 왜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그러자 배정우는 차갑게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럼 그때 남자랑 호텔은 왜 간 건데? 설마 연기라도 했다는 거냐?”임슬기는 고개를 저었다.“난 남자와 호텔에 간 적도 없어.”“없다고? 임슬기, 넌 내가 바보로 보이나 봐? 내가 두 눈 뜨고 네가 남자와 호텔로 들어가는 걸 봤는데 없다고!”“날 믿어줘.”그날 그녀는 확실히 호텔을 간 적 있었지만 그런 목적으로 간
“대표님, 연다인 씨가 또 출혈 과다로 쓰러졌습니다. 지금 혈액 창고에도 연다인 씨 혈액형과 맞는 혈액이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배정우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임슬기 손등에서 새어 나오는 피를 보고는 차갑게 말했다.“다인이를 병원으로 데리고 와. 나한테 방법이 있으니까.”“네, 알겠습니다.”그는 임슬기의 곁을 지키느라 하루 동안 연다인의 상태를 살펴보지 못했다. 여하간에 연다인의 몸 상태는 연약해도 너무 연약했기 때문이지만 임슬기는 달랐다. 철인이었으니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방금도 살아남지 않았는가. 이렇듯 팔팔
임슬기는 온몸이 아팠다. 폐는 물론이고 복부, 손, 무릎 전부 아팠고 아무리 힘을 넣어보려고 해도 넣어지지 않았기에 배정우에게 끌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리에 힘이 풀리며 주저앉고 말았다.두 무릎은 원래부터 돌에 부딪혀 상처가 난 상태였고 빨갛게 부어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차가운 타일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리니 그 고통은 말 못 할 정도였다.그 순간 임슬기는 눈물이 흘러나왔지만 울지 않으려고 이를 빠득 갈며 애를 쓰면서 배정우에게 멈추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결국 이상함을 감지한 배정우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잔뜩 고
연다인은 임슬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걸 보곤 그녀가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는 걸 단숨에 눈치챘다.“임슬기, 너 이렇게 무너지는 모습 배정우도 꼭 봤어야 하는데.”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연다인을 외면했지만 눈물은 마치 연다인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듯 흘러내렸다.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임슬기는 울지 않았다.하지만 배정우가 자신의 죽음을 원했다는 걸 들은 순간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애써 괜찮은 척해봤지만 17년을 사랑한 그 남자가 자신의 원수에게 자길 죽여달라고 했다는 걸 들었을 땐 결국 무너져버리고 말았다.임슬기는 자
“혼자 와. 한 시간 줄게. 안 오면 지금 당장 임종현 한쪽 팔부터 박살 낸다.”속으론 수상하다고 느꼈지만 종현이를 걸고 도박을 할 순 없었다.임슬기는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임종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임슬기는 열 번도 넘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기 너머에서는 계속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음뿐이었다.이쯤 되자 임슬기는 완전히 패닉에 빠졌다.결국 임슬기는 어쩔 수 없이 강재호를 불러 김현정 곁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강재호는 도착하자마자 급히 나가려는 임슬기를 덥석 붙잡았다.“임슬기 씨, 어디 가세요?”강재호가 보기에도 어딘가
“슬기 언니, 매일 내 곁에 있지 않아도 돼요. 주말엔 종현이 데리고 잠깐 놀러 다녀와요.”임슬기는 김현정을 흘낏 쳐다보며 말했다.“네가 자꾸 나 보내려고 하니까 더 마음이 쓰여. 종현이도 이제 중3이라 주말에도 공부하느라 바쁠 거야.”김현정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정말이예요. 슬기 언니, 나 다시는 그런 바보 같은 짓 안 해요.”“밥 먹자, 반찬 다 식겠다.”그 말에 김현정은 고개를 숙이고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임슬기는 몰래 그녀를 흘낏 바라보곤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최근 들어 밤마다 피투성이가 된 김현정이 욕조에
아파트.연다인이 막 집에 들어서자마자 노크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콧노래를 흥얼대며 들뜬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그런데 문 앞에 선 얼굴을 본 순간, 그녀의 표정이 굳어버렸다.“배정우, 너 여기 왜 왔어?”“내 집인데, 내가 오면 안 돼?”연다인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그런 뜻이 아니라 나는 네가...”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정우는 싸늘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네가 김현정한테 그런 짓을 한 거야?”“무슨 짓?”연다인은 잽싸게 그의 팔을 감싸며 새침하게 말했다.“배정우, 설마 너도 날 의심해? 날 믿는다고
배정우는 날카로운 눈을 가늘게 뜨며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지금 질투하는 거야?”...질투?임슬기는 한동안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예전 같았으면 분명 질투하고 속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마음은 한없이 차분했다.굳이 말하자면 남은 감정이라곤 혐오뿐이었다.“배정우 씨, 참 재밌네요. 다른 건 몰라도 세상에 두 다리 달린 남자는 널렸어요. 내가 연다인이 남자를 가졌다고 부러워할 이유라도 있어요?”배정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손을 뻗어 임슬기의 손목을 움켜쥐고 그대로 끌어당겨 품에
“언니가 나 대신 전해줘요. 그냥...”깊게 숨을 들이쉰 김현정은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쥔 채 돌아서서 임슬기를 바라보며 말했다.“나 그 사람 싫다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내 앞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임슬기는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눈썹을 찌푸린 채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김현정과 육문주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들 사이엔 원망도, 오해도 없었다. 오직 자신으로 인해 생겨난 비극적인 사고만 있을 뿐이었다.어떻게 그녀가 그 두 사람을 갈라놓을 수 있을까...그들은 자신과 배정우처럼 넘
“현정 씨,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줘요. 내가 다 설명할게요, 네?”육문주가 다가오며 애타게 말했다. 하지만 김현정은 옆에 있던 과도 하나를 집어 들더니, 손목에 바짝 갖다 댄 채 이를 악물고 말했다.“꺼져! 더 다가오면 진짜 그어버릴 거야.”“현정아!”임슬기가 놀라서 곧장 달려들어 과도를 낚아챘다. 그러고는 육문주 쪽으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문주 씨, 나가요. 현정이가 진정되면 그때 다시 얘기해요.”육문주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떨군 채 불안과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밖으로 나갔다.그가 나가자 임슬기는 과도를 방 한구
임슬기는 여전히 김현정이 걱정돼 매일 병원에 머물며 곁을 지켰다.하루하루 달래고 위로하며 시간을 보내자 삼사일쯤 지나서는 김현정의 상태도 많이 나아졌다. 웃음도 점점 많아졌고 말수도 늘었다.모든 게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던 찰나 연다인이 불쑥 병실에 나타났다.병실 안에서 웃으며 이야기하던 두 사람을 보며 연다인은 비웃듯 콧방귀를 뀌었다.“임슬기, 정우가 전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변호사 붙여줬거든? 네가 들고 온 그 내용증명? 그냥 휴지 조각일 뿐이야.”그 목소리를 들은 임슬기의 웃음이 순간 굳었다.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연다인
임슬기는 김현정의 눈물을 닦아주며 웃었다.“바보야, 울고 싶을 땐 내 뒤로 숨어. 나는 네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걸 보고 싶어. 알겠지?”“네, 알아요.”두 사람은 서로를 꼭 끌어안고 낮게 흐느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강재호는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게 눈치 보이기 시작했다. 조용히 나가려 일어섰지만, 하필 그 순간 임슬기의 눈에 띄고 말았다.임슬기는 손등으로 얼굴의 눈물을 대충 훔치며 강재호를 바라봤다.“아, 미안해요. 잠깐 잊고 있었어요.”“슬기 씨, 그런 말씀 마세요.”강재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딱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