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지에 묻은 피가 너무 창피해서 다희는 끝내 문을 열지 못했다.안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강우림은 미칠 지경이었다.어릴 적부터 그는 다희가 우는 걸 가장 견디기 힘들어했다. 그녀가 눈물을 흘리면 마치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다희가 끝내 문을 열지 않자 강우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발로 문을 밀어 열었다.그가 들어서는 순간 다희는 세면대 아래로 황급히 몸을 숨겼다.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엔 붉은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강우림은 순간 멈칫했다. 하지만 곧 상황을 이해했고 복잡한 감정이 그의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 안도와 동시에 짙은 긴장감이 뒤따랐다.그는 다희 앞에 조심스럽게 웅크려 앉아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조용히 물었다.“그래서 오빠 문 안 열어준 거야?”다희는 눈이 빨갛게 물든 채 울먹였다.“피가 이렇게 많이 나면 나 죽는 거예요?”그녀는 자신의 생각에 겁에 질려 말을 이었다.“내가 죽으면 아빠 엄마는 어떻게 해요? 분명 엄청 슬퍼할 거예요. 오빠 부탁이에요. 나랑 똑같이 생긴 사람을 찾아서 아빠 엄마 딸인 척해줘요. 그러면 아빠 엄마가 덜 슬퍼할 거예요.”강우림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참고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울지 마. 죽지 않아. 이건 아주 정상적인 생리 현상이야. 우리 다희가 그만큼 자랐다는 뜻이지. 이제 어른이 된 거야. 무서울 거 하나도 없어. 오빠가 다 처리해 줄게.”그렇게 말한 그는 화장실을 빠져나갔다.잠시 후 여자 비서가 새 옷과 생리대를 들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희가 다시 나왔다.아까 일이 너무 부끄러웠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강우림을 마주 보지 못했다.그는 다정하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배 아파?”그는 미리 준비해둔 따뜻한 생강차를 건네주며 스마트폰으로 생리에 관한 설명 영상을 보여주었다.잠시 후 다희의 얼굴에는 다시 익숙한 장난기 어린 표정이 돌아오기 시작했다.그녀가 한결 편해진 모습에 안심한 강우림은 다희를 가볍게 안아
강우림은 냉랭한 표정으로 비서에게 물었다.“방금 누가 다희 간식을 사러 갔어요?”비서는 무슨 상황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제가 다녀왔습니다.”강우림의 눈빛이 차가워졌다.“당신 아버지 곁에 오래 있었죠. 다희가 어릴 때부터 소화가 약하다는 걸 몰랐어요? 아이스크림을 사줄 생각을 했다는 건가요?”비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강우림은 말을 이었다.“그렇게 오래 곁에 있었으면서 이런 기본적인 눈치도 없다니. 시장부로 가서 3개월간 연수받고 오세요.”비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떴다.강우림은 닫힌 휴게실 문을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말했다.“다희가 좋아하는 고구마 맛 밀크티 맛있는 매장에서 따뜻하게 한잔 사 오세요.”“네, 대표님.”그 시각 방 안에서는 다희가 소파에 누운 채 베개를 몇 번 세게 내리치고 있었다.집에서는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먹을 수 없었다. 부모님이 집에 없으면 좀 편해질 줄 알았지만 강우림은 여전히 그녀가 먹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그녀는 강우림이 자신을 정말 아껴준다고 믿었지만 그게 모두 거짓이라는 생각에 점점 억울해져 눈가가 붉어졌다.그때 갑자기 아랫배에서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고 그녀는 깜짝 놀라 서둘러 화장실로 향했다.속옷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자신에게 첫 생리가 시작되었음을 깨달았다.이번이 그녀의 첫 생리였다. 온다연이 여러 번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었고 선생님도 대처법을 가르쳐주었지만 실제 상황을 맞닥뜨리니 막막하기만 했다.그런데 또 따뜻한 것이 흘러나와 바지를 온통 적셨다. 다희는 깜짝 놀라 당황했다.책과 인터넷에서 첫 생리는 양이 적다고 조금만 나온다고 읽었는데 왜 이렇게 많은지 알 수 없었다.오히려 과다 출혈로 병원에 간 사람 심지어 사망 사례까지 있다는 글들이 떠올랐다. 그 생각에 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피는 점점 더 많아졌고 그녀는 휴지를 깔아 두었지만 이내 휴지가 부족해졌다. 휴대폰도 없어서 온다연에게 전화할 수도 없
잠시 후 그녀는 다시 말했다.“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어대든 신경 쓰지 마. 사람이 개랑 싸울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제발 앞으로는 싸우지 마.”온가희의 은은한 향기가 소년의 코끝을 스쳤고 진강남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밀쳤다.“신경 쓰지 말라고.”그렇게 말한 그는 의무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온가희는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의무실 안은 숨 막히도록 무거운 분위기였고 맞은 두 남학생은 벽 모퉁이에 웅크린 채 덜덜 떨고 있었다.그들은 지금 몹시 후회하고 있었다.차라리 온가희를 '귀머거리'라 놀리지 말아야 했고 진강남에게 싸움을 걸지도 말아야 했다.진강남은 평소 언제나 1등을 놓치지 않았고 자신만만한 태도로 주목을 받았다.몇 번이나 자신들의 패거리에 끌어들이려 했지만 그는 매번 무시했ㄱ 그런 그가 오늘 직접 옥상에서 싸우자고 제안한 것이다.그들은 진강남을 혼내주려 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한 명은 이가 빠졌고 다른 한 명은 손이 부러질 뻔했다.그것도 모자라 ‘센 언니’라는 별명이 붙은 강아름이 갑자기 들이닥쳐 그들을 더 심하게 두들겨 팼다.그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도 모른 채 어느새 사나운 기운을 뿜어내는 젊은 남자가 나타났다.겉보기엔 20대 초반쯤으로 보였지만 그의 눈빛에는 사람을 산 채로 삼킬 듯한 살기가 서려 있었다.그 남자는 지금 강아름을 안은 채 그녀 손에 난 작은 상처를 조심스럽게 들여다보고 있었다.그 상처는 분명 그들이 때린 것이 아니라 강아름이 벽에 부딪혀 긁힌 것이었다.한편 강우림은 다희의 손목에서 피가 흐르는 걸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목소리에도 감정이 실렸다.“아파?”다희는 훌쩍이며 눈가가 붉어진 얼굴로 누가 봐도 심하게 괴롭힘을 당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오빠, 아파요. 재네들이 저랑 가희를 괴롭혔어요.”강우림은 다시 두 남학생을 바라보았다.그 눈빛은 서늘했고 마치 당장이라도 그들을 박살 낼 듯한 살벌함이 담겨 있었고 겁에 질린 두 사람은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사실 이들은 평소 학
몇몇 학부모들은 그 말을 듣고 격분해 욕설을 퍼부으며 의무실로 달려갔다.진강남도 화가 난 채 그들 뒤를 따라 달려갔다.그러나 복도 끝 모퉁이에 다다랐을 즈음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모퉁이 기둥 옆에 온가희가 서 있었다.단정하게 땋은 양갈래 머리와 눈에 띄게 고운 피부 그리고 그 눈동자는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서늘하고 아름다웠다.지금 그녀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분명 울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그녀는 진강남 곁으로 다가가 그의 얼굴에 난 상처를 바라보다가 눈물이 더욱 붉어졌다.“아파? 사실 그냥 몇 마디 욕한 거잖아. 신경 쓰지 말고... 싸우지 말았으면 좋겠어.”그녀의 붉어진 눈을 바라보며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별로 아픈 것도 아닌데 왜 울어?”온가희는 조용히 말했다.“싸움은 좋은 게 아니야. 게다가 상대가 많잖아. 만약 네가 지고 다치면 어떡해? 난 정말 걱정돼...”진강남의 눈빛이 반짝였다.“왜 나를 걱정하는 거야?”온가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너는 내 동생이잖아. 당연히 걱정해야지.”하지만 진강남의 얼굴이 갑자기 굳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너를 내 누나라고 생각한다고 했어? 나는 너 같은 누나 없어.”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돌아서서 뒷걸음질 쳤다.온가희는 그의 차가운 말에 마음이 상했지만 그래도 뒤따라갔다.“강남아, 네가 다쳤으니까 내가 치료해 줄게.”진강남은 걸음을 멈추고 차갑게 말했다.“괜찮아. 신경 쓰지 마.”온가희는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너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어. 엄마가 떠날 때 너와 여동생을 잘 돌보라고 했어...”진강남은 팔을 뿌리치고 큰 걸음으로 앞서 나갔다.온가희는 뒤처져 무릎을 꿇은 채 억울한 표정으로 진강남을 바라보았다.그 모습을 본 진강남은 재빨리 돌아서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다친 데가 없는지 살폈다.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왜 손을 놓지 않는 거야? 정말 멍청하네.”온가희는 진강남의 얼굴에 난 상처를 걱정스레 바
2년 전 유럽에서 돌아온 강우림은 유강후에게서 경영을 배우기 시작했다.불과 1년 만에 겨우 16세의 나이로 그룹 업무를 능숙하게 처리하게 된 강우림을 보며 유강후는 무척 기뻐했고 점차 경영 일선에서 손을 떼기 시작했다.그는 아내 온다연과 함께 종종 자취를 감췄으며 특히 최근 1년 동안은 매달 2주씩 모습을 감췄다.사실 미래 그룹은 유강후가 있든 없든 무리 없이 잘 운영되고 있었기에 그의 부재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문제는 다희의 학부모 상담이었다.거의 일주일에 한 번 많을 땐 두 번씩 상담이 있었지만 유강후와 온다연 모두 연락이 되지 않자 결국 이권이 혼자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담임 선생님은 학부모가 오지 않는 데 대해 점점 더 화를 내며 이권에게 불만을 쏟아냈고 이권은 반박조차 할 수 없었다.‘정말 화가 나네.’다행히 최근 몇 번은 강우림이 대신 상담에 참석해 주었고 그 덕분에 이권은 한결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강우림이 가는 것 역시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그는 선생님 앞에서는 늘 여동생을 잘 돌보겠다고 약속하면서도 뒤에서는 다희와 싸운 아이들의 집안을 몰래 괴롭혔다. 강우림의 편애는 오히려 유강후를 능가할 정도였다.이번에도 어느 집안이 불행을 당하게 될지 몰랐고 이권은 그 불행한 집안을 떠올리며 속으로 걱정했다.“우림 도련님, 이제 학교로 가시겠습니까?”강우림은 대답 대신 먼저 물었다.“아버지 어머니는 아직도 연락이 안 되나요?”이권은 서둘러 대답했다.“네. 깊은 산골에 가셨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비행기에 탑승하신 이후로는 연락이 두절되었고 동행한 보좌관도 행방을 밝히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긴급한 서류만 간헐적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부부의 행동은 점점 더 과감해졌다. 처음엔 가끔 연락이라도 왔지만 이제는 외출하면 보름 가까이 연락이 끊겼고 쌍둥이 교육까지 모두 강우림에게 맡겨버렸다.강우림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차 준비해 주세요. 감히 단오를 건드린 녀석이 누군지 보러 가야겠어요.”이권은 잠시 망설이다가
아이 입양을 결정하고 온다연은 바로 부모님께 연락드렸다.부모님도 온다연의 결정을 응원했고, 하던 일도 멈추고 H국을 찾아 손녀를 위한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했다.하지만 온다연은 아직 아이가 안정을 취해야 한다며 파티를 미뤘다.온가희의 문제로 원래 천원군에서 3박을 하려던 일정은 이틀로 줄어들었다.이튿날 저녁, 유강후와 온다연은 세 아이와 함께 경원시로 돌아갔다.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어느새 또 가을이 되었다.1년 뒤, 송지원은 더 멀고 동떨어진 지방으로 발령을 받았다.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교통도 불편하고 경제도 제자리걸음이었다. 제대로 된 철도 하나 없어 마을 사람들은 옆 도시로 가려면 몇 시간의 버스를 타야 했다.이러한 단점들을 제외하면 단 한 가지 장점이 있었는데, 바로 눈에 닿는 모든 곳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던 것이었다.봄이 되면, 산과 뜰에는 핑크빛 꽃으로 물들었고 꽃밭에 있으면 마치 천국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여름에는 가장 높은 기온이 30도를 넘기지 않아 피서지로 적격이었다.겨울에는 사방이 눈으로 뒤덮여 있고 마치 얼음 세계로 온 듯 풍경이 아름다웠다.이곳은 주변이 모두 산이고 주거지들도 잇닿아 있지 않고 조금씩 동떨어져 있었다. 가끔은 몇십 리를 운전해도 마을이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산지 특성상, 새로 길을 닦는 건 더더욱 까다로운 문제였다.송지원이 발령받은 지 반년쯤 지났을 무렵, 인터넷에 한 편의 영상이 올라오며 순식간에 화제를 모았다.끝이 보이지 않는 벚꽃 숲을 배경으로, 고전 의상을 입은 한 여인이 말을 타고 숲을 가로지르는 장면이었다.여인은 새하얀 옷차림에 얼굴을 하얀 베일로 가린 채, 아련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거침없이 달리는 말 위에서 긴 머리카락을 흩날리고, 벚꽃 사이를 빠르게 누비는 모습은 반전 매력을 선보였다.하지만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만든 건 바로 그 벚꽃 숲이었다.수십 리에 걸쳐 이어진 벚꽃 숲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드넓었고, 웅장하면서도 아련한 낭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