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그 말소리는 조금 낮았지만 온다연은 요 며칠 눈이 안 보이는 관계로 귀가 평상시보다 더 예민해 있었다.그녀는 은은하게 유하령과 유자성의 이름을 들은 것 같았다.그녀는 우산을 들고 안으로 걸어 들어가지 않았다.쌀쌀한 바람이 불어 추위는 한껏 더 심해졌다. 온다연은 기다란 눈초리를 가볍게 드리운 채 눈 밑의 감정을 감추었다.하인들은 말을 마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들어가기 전에 저도 모르게 가여운 눈빛으로 온다연을 몇 번 쳐다보았다.지금 온다연의 눈은 그저 모호하게 사람의 윤곽만 보일 뿐 그들의 눈빛은 당연히 보아낼 수 없었다. 그녀는 커다란 검은 우산을 들고서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장 집사님, 아저씨네 집에 손님이 온 건가요?”집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여전히 무표정으로 대답했다.“온다연 씨, 집에는 확실히 손님이 와 계십니다. 저희는 먼저 옆에 있는 집으로 가서 잠시 기다립시다. 셋째 도련님께서는 이 부근에 집을 한 채 더 갖고 계십니다.”온다연은 말이 없었다.그녀는 이미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누구든 온다연의 신분은 빛을 볼 수 없는 것이었다.게다가 지금 집 안에 있는 사람은 유씨 가문의 사람들이었다.온다연은 온순하게 고개를 끄덕이었다.“네.”장 집사는 어쩌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온다연을 데리고 차 쪽으로 걸어갔다.하지만 온다연이 차 안에 안자마자 날카로운 외침이 들렸다.“온다연!”온다연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무의식적으로 문을 닫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유하령은 이미 그녀에게 달려와서 차 문고리를 꼭 잡고 문을 닫지 못하게 했다.“정말 너네. 정말로 너였다니! 유민준이 네가 아직 살아있다고 했을 때 난 안 믿었어. 근데 삼촌의 호텔에서 나타난 사람이 정말로 너였다니!”유하령은 위에서 아래로 온다연을 내려보았다. 그러자 온다연의 아름답고 정교한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온다연의 얼굴은 정말로 정교하게 빚어낸 아름다운 조각상 얼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유하령이 어릴
하지만 지금 온다연의 눈빛은 의외로 엄청나게 냉랭했으며 심지어 오싹한 느낌까지 들게 했다.그녀는 그저 그렇게 유하령을 한 눈 보고는 눈빛을 거두었다. 너무 순식간이어서 유강후는 자기가 착각을 한 건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온다연은 유강후 쪽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떠보았다.“아저씨?”유강후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유하령은 온다연에게 달려들어 험상궂게 삿대질하며 말했다.“누구보고 아저씨라고 하는 거야?”온다연은 살짝 몸을 떨더니 무의식적으로 뒤로 피했다.얼굴은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려 조금의 혈색도 보이지 않았으며 말소리까지 부들부들 떨렸다.“그럼 난, 난 뭐라고 불러야...”온다연의 이 모습은 마치 정말 유하령을 무서워하는 것으로 보였다.유하령은 연약한 모습을 한 온다연을 보자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눈빛으로라도 온다연의 몸에서 살을 파내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하지만 유강후가 옆에 있는 관계로 유하령은 너무 나댈 수 없었으며 고개를 유강후 쪽으로 돌려 물었다.“삼촌, 온다연이 왜 삼촌 차에 있어요? 이 여자는 삼촌 차에 탈 자격도 없어요!”“닥쳐!”유강후의 눈빛은 어둡고 냉랭하게 변하더니, 그의 시선은 조금 더 야윈 것 같은 온다연의 작은 얼굴에 쏠렸다.이삼일 안 본 사이에 온다연의 어렵게 생긴 볼살은 또 온데간데없어졌고 눈 밑은 거무스름한 게 딱 봐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보였다.‘나를 화나게 했으면 자기는 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왜 더 초췌해진 거 같지?’그는 온다연을 빤히 쳐다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려와!”유하령은 이 말을 듣더니 유강후가 온다연을 내쫓는 줄 알고 득의양양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으며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들었어? 삼촌이 너 보고 차에서 내리라고 하잖아!”온다연은 입술을 깨물며 눈매를 내리 드리우고는 작은 소리로 유강후를 한번 불렀다.“아저씨!”그녀의 소리는 말랑말랑하고 나지막한 것이 마치 용서를 비는 듯한 느낌이 살짝 깃들어있었다.유강후는 눈빛이 조금 어둡게 변했
유하령이 기억을 더듬을 때부터, 그의 삼촌인 유강후는 다른 사람과 친하게 지낸 적이 없었다. 아무리 그가 어릴 때부터 유하령을 아끼고 사달라는 대로 다 사줬지만 사실, 두 사람의 사이에는 소외감과 냉랭함이 묻어나 있었다.그리고 이런 소외감과 냉랭함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다. 유강후는 태생부터 성격이 야박하고 냉정해서 유하령한테 뿐만아니라 전체 유씨 가문 사람들한테도, 심지어 그의 아버지인 유재성한테도 그랬으며 다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이 몇 년간, 유하령이 본 유일하게 유강후와 가깝게 지낸 사람이 바로 나은별이었다.하지만 나은별은 그의 약혼녀이자 앞으로 유씨 가문의 안주인이 될 사람이니 두 사람이 가깝게 지내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근데 온다연이 뭐라고? 걔는 그저 유씨 가문에서 내다 버린 한 마리 개나 다름이 없는데 무슨 자격으로 삼촌의 아낌을 받는 거야? 그저 눈이 멀었다고?’유하령은 울화가 치밀어 올라 앞으로 다가가 유강후의 팔을 잡고 놀랍고 화난 말투로 물었다,“삼촌, 뭐 하는 거예요? 잘 보세요. 이 여자는 온다연이에요. 그 첩의 조카라고요. 심지어 며칠 전에 사람까지 때려서 지금 온갖 사람들이 이 여자를 찾고 있다고요!”유하령이 한마디를 할 때마다 온다연은 몸을 한번 부르르 떨곤 하였다. 그녀는 유강후의 품에 옹크린 채 그의 옷깃을 한사코 잡고 있으며 온몸을 떠는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온다연을 안고 있는 손에 힘을 꽉 주면서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냉랭한 눈빛으로 유하령을 쳐다보았다.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그렇게 쌀쌀한 기운과 살벌한 기운이 넘쳐날 것만 같은 눈빛으로 유하령을 쳐다보았다. 이에 놀란 유하령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삼, 삼촌...”유하령은 벌벌 떨었다. 그녀는 20년 동안 자신을 아끼던 삼촌이 이렇게 무서운 눈빛을 하고 자기를 바라보는 것을 전혀 받아들일 수 없었다.유강후는 쌀쌀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유하령, 난 이미 너에게 경고했었어. 내가 누구에게 잘 해주든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
“강후야, 얘가 왜 네 집에 있어?”유자성은 유강후가자기의 친 동생이 자기 아내의 조카를 안고 있는 것을 보니 어딘가 모르게 찝찝한 감이 들었다.하지만 지금 그는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았으며 그저 이마를 찌푸렸다.“고씨 가문에서 계속 얘를 찾고 있었어. 네가 얘를 숨겨놓은 거야? 그러니까 고씨 가문에서 온갖 곳을 뒤져도 얘를 찾아내지 못했지!”이 말에 온다연은 더욱 부들부들 몸을 떨었으며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밀어 유강후의 손목을 잡았다. 유강후는 그녀의 등을 몇 번 살살 토닥이고는 엄청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무서워하지 마. 괜찮아. 내가 있잖아.”유강후는 자기의 맏형을 보며 눈 밑의 싸늘한 기운이은 더 짙어졌도로 증가했다.“형이 여긴 웬일로 왔어요?”유자성은 아직 유강후의 품에 안겨 있는 온다연을 보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쟤가 왜 이곳에 있는지부터 말해.”유강후는 대답하지 않고 온다연을 안은 손에 힘을 꼭 주면서 성큼성큼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방 안에 들어온 후, 유강후는 온다연을 소파에 내려놓고 허리를 펴려고 한 순간, 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녀의 정교한 얼굴은 혈색 한 점 없이 하얗고 그 잠깐 사이에 그녀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귀밑머리를 적셨다.그녀는 말없이 그저 고개를 들어 유강후를 바라보았다. 아직 시력을 회복하지 않은 두 눈에는 선명하게 초조함이 깃들어있었다.유강후는 손을 내밀어 가볍게 그녀 이마의 땀을 닦아 내리고는 손가락으로 가볍게살랑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누르며 말했다.“다연아, 내 영역에서 널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은 없어.”그의 목소리는 아주 낮고 묵직한 것이 사람에게 믿음을 안겨주었다.온다연은 조금 긴장을 푼 것으로 보였지만 여전히 그의 옷깃을 잡은 채 손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초점이 없는 새까만 눈동자로 유강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아저씨는 지금 그 사람들에게 우리의 관계를 말해줄 건가요?”유강후는 온다연을 보며 침착하고 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넌 그들에게
유자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고씨 가문이 무서울 게 뭐가 있어. 난 그저 지금 미래 그룹과 무한테크가 합작 관계이니 중요하지 않은 사람을 위해 고씨 가문에게 밉보일 필요가 없다는 거지.”“중요하지 않은 사람이요?”유강후는 휙 고개를 들더니 아까 복도 반대편에서 걸어 나오는 심미진을 보고 눈 밑에는 풍자의 기운이 깃들었다.“그 당시 큰형수가 돌아가신 지 몇 달 안 되었는데, 형은 모든 사람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사코 심미진과 결혼했잖아요. 근데 그 여자의 조카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고요? 아니면 심미진이 이미 한물 건너갔다는 거예요?”유자성의 안색이 확 돌변했다.“강후야, 너 그게 무슨 말이야?”유강후의 눈빛은 지극히 냉랭했다.“형한테 다연이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난 아니에요. 얘가 유씨 가문에서 그렇게 오래 지냈는데, 아무리 고양이를 키워도 10년이면 정이 들었겠어요.”이때 심미진이 어느덧 걸어왔다.배가 살짝 나온 심미진은 여주인 행세를 하면서 아까까지도 두 사용인을 지휘해 유강후네 집 복도에 있는 한 쌍의 골동품 꽃병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진정한 집주인이 돌아온 것을 보더니 그녀는 얼른 기세를 줄이고는 형수 행세를 하며 미소를 지었다.“강후가 돌아왔구나. 너도 참, 집에 여자가 없으니, 생기가 안 돌아. 내가 볼 땐 너도 하루빨리 은별 씨랑...”그녀의 시선은 갑자기 소파에 있는 온다연에게 떨어졌고 이내 큰소리로 외쳤다.“다연아!”온다연은 일어서서 유강후의 옷깃을 살짝 당기고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아저씨, 저 방으로 돌아가고 싶어요.”이때 심미진은 이미 다가와 온다연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너 어디 갔었어? 그렇게 큰 사고를 쳐놓고 어디에 있었던 거야? 너 이 계집애, 온종일 일을 벌일 줄만 알았지. 빨리 나랑 같이 고씨 저택으로 가서 용서를...”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심미진의 팔목은 갑자기 커다란 손에 잡혔다.“아, 아파!”고개를 들고 보니 유강후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다들 그가 방금 한 말에 놀라서 어리둥절했다.특히 심미진은 유강후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며 물었다.“도련님, 무슨 뜻이에요?”유강후는 표정도 차갑고 목소리도 차가웠다.“말 그대로예요.”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안색이 더 쌀쌀하게 변했다.“전 오늘 두 분에게 통지하는 것이지 두 분의 의견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에요. 형과 형수님께서 이해해주길 바라요.”그러자 뒤에 있던 온다연이 그의 옷을 잡아당기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아저씨, 아직 내 이모예요.”유강후는 두 눈에 피어난 차가움이 더 짙어진 채 그곳에서 차를 끓이고 있는 집사를 바라보며 말했다.“화연아, 온다연이 좀 불편해 보이니 방으로 데리고 가서 쉬도록 해.”집사가 다가와 온다연을 이끌고 갔다. 유자성과 심미진은 그제야 온다연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다.심미진은 안색이 좋지 않은 채 온다연 앞을 막아 나서려 했지만 유자성이 붙잡았다.온다연의 모습이 복도로 사라지자 유자성는 비로소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눈이 안 보이는 거야?”유강후는 시선을 거두며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네, 스트레스가 심해서 실명했어요.”그는 심미진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두 달 전 온다연이 버스에 치여 멀리 날아갈 정도였는데 일어나자마자 도망갔어요.”심미진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그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3일 후 한 오래된 동네에서 찾았는데 갈비뼈가 몇 개 부러지고 그중 한 개가 간을 뚫었더라고요. 찾아갔을 때 이미 배가 부어서 거의 죽을 뻔했어요.”그때를 생각하면 유강후는 아직도 살을 에는 듯한 그 한기를 느낄 수 있다. 바로 그때 그는 마음을 정했는데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 온다연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심미진을 노려보며 그의 두 눈엔 한기가 더욱 짙어졌다. “온다연이 사고를 당했을 때부터 찾아낼 때까지 사흘 동안 형수님은 온다연이 사고를 당했다는 것을 알았을 거잖아요. 하지만 형수님은 한 마디도 묻지 않은 것 같았고, 지난 두세 달 동안에도 온다연에 대해 아
“그런데 밖에서 너절한 친구를 사귀고 있는데 집을 팔거나 사기를 당할까 봐...”유강후는 그녀의 말을 끊고 입을 열었다.“다연이가 지금 나를 따라온 이상, 이런 일은 형수님이 관여할 수 없어요. 나중에 서류를 보내줘요. 제가 가서 대신 명의 변경을 해 줄게요.”심미진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유자성를 힘껏 잡아당겼다.유자성은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집 한 채는 안중에도 없었기에 덤덤하게 한마디 했다. “이왕이면 빨리 돌려줘.”그는 어조를 좀 누그러뜨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강후야, 우리는 친형제이니 너무 따지지는 말아라.”유강후는 대답하지 않고 그들 옆을 지나 소파에 앉았다.찻상 위에 따뜻한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는데 서서히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안개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어서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고, 그는 한참 뒤에야 덤덤하게 물었다. “형님은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어요?”유자성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이 있겠어. 며칠 동안 집에 안 왔잖아. 아빠가 와서 널 보라고 했어. 서주랑 하령이의 약혼에 대해 상의할 겸 왔어.”유강후는 탁자 위의 담뱃갑을 가져다가 한 개 꺼내 불을 붙였지만 피우지 않고 냉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형의 아들딸이에요. 결혼 같은 일은 나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어요.”유자성는 그 속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소파에 앉아 한 마디씩 늘어놓았다.방안에서 집사가 온다연의 가정복을 가져와서 갈아입혀 주고는 따뜻한 우유를 들고 그녀가 마시는 것을 지켜보았다.우유를 다 마시자 컵을 받아들고 막 방을 나서려는데 온다연이 작은 소리로 그녀를 불렀다.“장 집사님, 아저씨 아직도 얘기해요? ”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아직 얘기 중이세요.”온다연은 다시 얼굴이 창백해지며 낮게 말했다.“이모가 절 아저씨한테 보내는 거예요?”며칠을 함께 지낸 집사는 그녀의 사정을 딱하게 생각하며 걱정스러운 듯 조용히 말했다. “다연 아가씨는 이미 스무
방에 들어선 유하령은 비싼 가구들의 우아한 기풍에 질투가 났다.유강후가 사는 곳은 장식이 언제나 고급스럽고 품격이 있었다.예를 들어 이곳 말이다. 발밑에 흰색의 순수한 수제 캐시미어 카펫을 현관에서 침대 옆까지 깔았는데, 밟으면 두툼하고 부드러운 질감이 매우 비싸다는 것을 보여줬다.비싸다고 소문난 수작업으로 만든 페르시아 융단이었는데, 그녀의 방에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물건이 없었다.그리고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인 온다연은 카펫 끝에 있는 침대에 앉아 있었는데, 부드러운 불빛이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물들였다.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유하령은 온다연의 촘촘한 속눈썹이 가볍게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연약하고 정교해서 사람을 잘 끄는 모습이었다.‘바로 이런 모습으로 아저씨를 꼬신 건가? 나도 아직 이 집에 발을 들이지 못했는데 이 천한 년이 먼저 들어왔다니! 무슨 근거로? 그럴 자격이 없어!’유하령가 질투 나서 미칠 것 같았다.그녀는 달려들어 온다연에게 뺨을 한 대 때리고 이를 악물었다. “온다연, 감히 내 아저씨에게 눈독을 들여? 너 죽고 싶어 환장했어?”그녀가 들어오자 온다연은 상대방이 집사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유하령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그녀는 심미진인 줄 알았다.실망했지만 이내 유하령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라는 걸 예감했다.하지만 여기는 유씨 가문이 아니니 그녀도 그렇게 무섭지 않았다.그녀는 방금 맞은 곳을 더듬었는데, 그곳은 불타고 있는 것처럼 따끔했다. 얼얼하게 부어오른 그녀는 혀로 까진 입안을 헤치고 있었는데 초점 없는 두 눈이 차가워 보였다.“유하령, 뺏긴 기분은 어때? ”유하령은 몸을 부르르 떨며 온다연의 머리채를 잡고 흉악하게 말했다.“너 역시 일부러 그랬구나. 일부러 내 아저씨에게 접근해서 그의 동정을 이용하며 권세에 빌붙은 건 너에게 높은 가문의 자제를 소개해 달라고 하려고? 잘 들어, 너 그거 그냥 꿈이야!”“얼마나 오랫동안 동정해 줄 것 같아? 아저씨는 내년에 약혼을 앞두고 있어. 지금
지예솔이 다른 것을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계속 말했다.“걱정하지 마. 봉현수는 아직 내가 귀국 한 걸 몰라. 내가 새로운 이름과 신분을 바꿨고 또 경원시에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지예솔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여기는 어떻게 찾은 거예요?”정연석은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고 마음속에 깊은 미련이 남아있었다.“솔아, 넌 나한테 그렇게 신뢰가 가지 않았어? 그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지예솔이 말했다.“저는 원래 모든 일이 잠잠해지면 예전의 친구들에게 연락하려고 했어요. 연석 오빠가 찾아올 줄을 몰랐어요. 예전에 이미 많은 폐를 끼쳤기 때문에...”정연석은 마음이 아팠지만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폐를 끼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너도 전에 나를 도와줬던 것이 기억이 안 나?”지예솔이 말했다.“제가 도와준 것은 모두 작은 일이에요. 게다가 매번 제가 도와준 후 현수 씨가 찾아와서 괴롭혔잖아요.”정연석이 웃으면서 말했다.“맞다. 아직 너랑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이번에 귀국하고 다시 외국에 가지 않으려고 해. 최근 나는 운산시에 머물면서 이쪽 시장 상황을 둘러보고 적절하다면 본사를 이쪽으로 옮길 생각이야.”지현우는 갑자기 몸을 돌리며 말했다.“연석이 형, 운산시에서 회사를 차릴 생각인가요?”정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는 수출입 무역을 하는 사람이라 2년 사이에 과일도 수출해 볼 생각이야. 내가 전에 2년 동안 조사해 봤는데 이곳은 과일 시장이 좋고 발전 전망도 커. 그런데 시장 조사를 위해 이곳에 왔을 때 우연히 너희들의 사진을 보게 될 줄을 몰랐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이건 내 친구가 저번 주 이곳에 과일나무 보러 왔다가 우연히 찍은 거야.”사진 속에는 지예솔과 지현우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물건을 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이 어두웠지만 지예솔의 그 얼굴은 유난히 눈에 띄어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다.지예솔은 안도의 숨
지예솔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닐 거야, 단지 개발부만 왔을 거야·현수 씨는 이런 산업을 많이 하고 있으니 직접 오지는 않았을 거야.”지현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러면 됐어.”저녁이 될 무렵 마당 입구에 갑자기 검은색 벤츠 두 대가 와서 멈추어 섰다.이 마을에는 이런 고급 차가 거의 오지 않았다. 차가 갑자기 문 앞에 멈추는 것을 본 지현우는 깜짝 놀라서 문을 닫으려고 하자 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검은색 외투를 입은 그 사람은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은색 테두리 안경을 쓰고 있어 매우 점잖게 보였다.지현우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곧 놀라 소리를 질렀다.“연석이 형?”알고 보니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던 정연석이었다.정연석은 웃으면서 말했다.“현우 키 컸네.”지현우는 달려가 정연석을 끌어안고 기뻐서 울었다.“연석이 형, 몇 년 동안 어디에 계셨어요?”정연석은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웃었다.“곧 스무 살이 다 되어가는 애가 왜 아직도 이리 어린아이 같은 거야? 너의 누나가 또 뭐라고 하겠어.”이때 인기척 소리를 듣고 나온 지 예술은 정연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달빛이 흐릿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그저 평범한 검은색 패딩을 입었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정연석은 그녀를 보고 눈빛이 어두워졌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말했다.“여러 곳을 찾아다니다가 겨우 찾았어.”지예솔은 문 앞에 서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현우는 기뻐하며 말했다.“밖이 추워요. 곧 비도 올 거 같으니 얼른 들어와요, 연석이 형.”정연석은 트렁크를 열고 말했다.“현우야, 와서 도와줘.”또 다른 차의 문도 열리자 두 명의 비서가 내려오더니 물건을 함께 집안으로 옮겼다.잠시 후 두 차의 물건을 모두 옮겨 거실에 가지런히 쌓았다.정연석은 다른 차를 돌려보내고 혼자 남았다.지현우는 흐뭇해서 그 물건들을 지켜보았고 그들이 필요한 좋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가볍고 부드러운
“넌 이쁘고 이런 그림도 그릴 줄도 아는데, 이렇게 좋은 여자아이가 왜 아직도 남친이 없는 거야? 아니면 이모가 남자 친구 한 명 소개 해줄게...”정신을 차린 지예솔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이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결혼을 못 해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죠.”그녀가 집에 돌아온 반년 동안 중매를 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외숙모들도 그녀를 설득하면서 자신의 조카를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그녀는 그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하려고 애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장미연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아이고! 넌 이쁘게 생기고 성격도 좋은데, 만약 이런 문제가 없다면 며느리로 들이고 싶었는데...”장미연은 채소 바구니에 담긴 채소를 꺼냈다.“여기엔 방금 뜯은 채소야, 무와 배추 뭐 이런 것들이 있어. 그리고 달걀도 금방 주운 거야.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나으니 가져다 먹어. 너의 남매는 절약하느라 채소도 별로 사지 않는 것 같더구나.”“가련한 것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 집안의 모든 가구도 중고 시장에서 사 온 거고…”“밖에 고기를 파는 노점상이 너희가 매번 고기를 반 근만 산다고 했어. 게다가 매일 사서 먹는 것도 아니라며, 이렇게 큰 성인들이 그것으로 먹자면 부족하지 않아?”...한동안 수다를 떨던 장미연은 끝내 떠났다.지예솔은 한참 넋이 나가 있다가 지현우에게 말했다.“현우야, 그 차가 정말 봉씨 그룹의 것인지 가서 한번 보고와.”지예솔은 스쿠터를 타고 떠나려는 지현우를 붙잡고 말했다.“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가.”지현우가 말했다.“누나, 그렇게 조심할 필요 없어. 반년도 지났어, 아마 우리를 찾는 걸 포기했을 수도 있어. 며칠 전 연예 뉴스를 봤는데 그 주연아란 연예인이 또 새로운 영화를 찍었어.”“그런 연기력으로 이렇게 큰 투자가 들어간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은 걸 보면 현수 형이 투자한 것일 거야. 주연아는 자신이 현수 형과 죽마고우이며 약혼할 것이라
봉현수가 말했다.“그러지 않을 거야, 이번엔 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거야.”비슷한 시각 남쪽의 읍내 마을에서 지예솔과 지현우가 정원에서 바삐 일하고 있었다.작은 정원이 딸린 농가는 반년의 시간을 거쳐 제대로 리모델링되었다.원래 낡았던 벽돌담은 다시 흰 페인트를 칠했고 진흙투성이였던 앞마당은 절반을 낡은 벽돌로 메웠으며 나머지 절반에는 채소를 조금 심어서 깔끔하고 생기가 넘쳐흘러 보였다.벽 쪽에 있는 몇 그루의 과일나무에는 겨울 대추와 감귤 그리고 감이 가득 달려서 열매들이 나뭇가지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는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다.집안도 다시 페인트를 칠했고 집에 쓸 수 있는 나무 가구도 다시 다듬어서 칠했다. 중고 시장에서 구매해 온 오래된 가구는 지현우가 사포로 갈아서 페인트를 새로 칠했더니 꽤 괜찮아 보였다.당연히 지씨 가문의 환상적인 럭셔리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남매 둘 다 마음이 편안하고 안심이 되었다.작은 마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일하러 나갔고 외부인들도 적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택배는 도시와 별 차이가 없어서 남매는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지현우는 마을의 중고 시장에서 몇백만 원을 주고 중고 승합차를 샀다. 가끔 지예솔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읍내에 생활용품을 사러 나갔다.천천히 남매는 느린 템포의 마을 생활에 적응했다.지현우는 원래 읍내에서 일자리를 찾고 싶었지만 대학 졸업장을 아직 받지 못했고 심장병도 있는 데다 봉현수에게 실마리라도 들 키울까 봐 연말까지 집에 머물면서 다시 생각해 보려고 했다.요즘 남매는 온라인 액세서리 가게에서 서서히 주문을 받고 있다. 비록 많이 벌지는 못하고 제일 큰돈도 몇만 원 밖에 안되지만 이는 남매에게 좋은 시그널이었다.지예솔은 오늘 또 다른 주문을 받았는데 재료비를 제외하고도 몇만 원 정도를 더 벌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이른 아침부터 마당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도면을 수정했다.점심쯤 정원의 문이 열리더니 이웃인 장미연이 채소 한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