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6년의 헌신 끝에 남겨진 건 불임이라는 억울한 누명과 길거리로 쫓겨난 비참한 현실뿐이었다. 남편 에이든은 내연녀와 손을 잡았고, 시어머니는 임신한 그녀를 빗속으로 내던졌다. 하지만 그 누구도 몰랐다. 그들이 쓰레기처럼 버린 여자가 이 나라 최고 재벌, 모리슨 가문의 사라진 막내딸이라는 것을. "찾았다, 우리 막내동생." 길거리에서 쓰러진 그녀를 찾아낸 세 명의 거물 오빠들. 하룻밤 사이에 버스 정류장의 노숙자에서 조 단위 대기업의 CEO로 거듭난 리나. 짓밟힌 존엄과 아이를 위해, 그녀는 철저한 복수를 시작한다. "모리슨가는 결코 용서하지 않아. 오직 파멸시킬 뿐."
View More리나의 시점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나는 무릎 위에 손바닥을 얹고 지그시 눌렀다. 아무 소용없었다. 떨리는 다리는 멈출 줄 몰랐고, 몸을 옴짝달싹할 때마다 플라스틱 의자가 끼익거리는 소리를 냈다. 두 칸 떨어져 앉은 여자가 또다시 나를 눈짓으로 흘끔거렸다.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엄지손톱을 깨물며 진료실 문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만약 음성이면 어쩌지? 내 착각이면?* "아, 리나. 정신 차려." 나지막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허리를 바짝 세우고 입가에 댔던 손을 치웠다. 양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지그시 누르며 숨을 가다듬었다. 6년이었다. 플라스틱 의자, 특유의 소독약 냄새, 닫힌 문 너머로 들려오는 기계의 기계적인 경고음, 그리고 매번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 않던 소식을 기다려온 지 어느덧 6년. 에이든과 함께 병원을 전전하고, 커튼 뒤에서 옷을 갈아입고, 차가운 청진기와 진단 기구가 피부에 닿는 동안 종이 시트가 깔린 침대에 누워 있던 6년의 세월. 바로 이런 대기실에서 숨을 죽인 채, 최악의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몇 번이고 연기하며 스몰토크를 준비하던 시간들. 나는 한 번도 준비된 적이 없었다. 의사들은 늘 똑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두 분 모두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생식 기관은 더없이 건강합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원인도, 설명도, 이름조차 없어 그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 있는 이 상태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에이든의 어머니가 나를 뭐라고 부르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에이든이 내가 잠든 줄 알고 중얼거리던 그 단어 역시. 대기실 안은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음으로 웅성거렸다. 두 줄 건너앉은 어린아이가 칭얼거렸다. 진작에 기운이 다 빠진 듯 헐떡이는 그저 피곤에 지친 울음소리였다. 간호사 한 명이 차트를 든 채 발걸음도 무심하게 지나쳤다. 닫힌 문 너머 어디선가 기계음만이 일정하고 무심한 박자로 삐- 삐- 울려댔다. 이 모든 과정을 함께 버텨주어야 했던 내 남편은, 어느새 나를 향해 가장 날 선 칼날을 휘두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는 시어머니가 나에게 모욕을 퍼부을 때 단 한 번도 말리지 않았다. 그저 방관자로 서서 방관하고, 방조했다. 그리고 지난 수년간, 그가 집 안으로, 심지어 우리가 함께 쓰던 침대로 들였던 수많은 여자들. 그는 내게 어디 한 번 말해보라는 듯 오만하게 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견뎠다. 달리 갈 곳이 없었으니까. 조금만 더 버티면, 조금만 더 참아내면 모든 게 달라질 거라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속이면서. 진료실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의사가 나를 향해 두 걸음도 떼기 전에 나는 이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있었다. 그는 따뜻한 미소를 띤 채 오른쪽 손을 내밀며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갈색 봉투가 들려 있었다. "결과 나왔습니다, 리나 씨." 찰나의 주저함 끝에 봉투를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의사는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두 손 위에 얹힌 봉투. 앞면에 적힌 내 이름, *'리나 노먼(Mrs. Lena Norman)'*. 'L' 자의 잉크가 살짝 번져 있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멈췄다. 기계음은 여전히 울렸고, 아까 그 간호사가 반대편으로 다시 지나쳐 갔다. 역시나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 손이 미친 듯이 떨렸다. 눈을 감았다. 코로 숨을 깊고 천천히 마셨다. 가슴속에 모아두었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아직도 차분하고, 인내심 있고, 착하게 구는 것이 언젠가 상황을 바꿀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수년 전에 익힌 습관이었다. 눈을 떴다. 봉투를 찢어 열었다. 안에 들어있던 종이는 삼등분으로 접혀 있었다. 조심스럽게 꺼내어 첫 번째 장을 폈다. 그리고 두 번째 장을 폈다.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시야가 흐려졌다. 그 문장을 다시 읽었다. 보고, 또 보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일어서 있었다.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는 결코 고상하거나 조용한 것이 아니었다. 대기실 사방의 벽을 찢을 듯 터져 나온 비명에 가까웠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문가에 간호사가 나타났고, 아이는 완전히 숨을 죽였다. 이미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가방과 봉투를 낚아채듯 쥐고 걸었다. 아니, 출구를 향해 달렸다. 육중한 여닫이문이 쿵 소리를 내며 열리고, 밖의 차가운 공기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세상에…… 나, 임신했어!" 입 밖으로 터져 나온 단어가 갈라졌다. "임신이라고! 그 오랜 세월이 지나서, 드디어 내게 아이가 생겼어!" 병원 앞 보도블록 위에 선 채, 나는 울다가 웃었다. 엉망진창으로 흉하게, 컨트롤조차 되지 않는 감정의 폭발이었다. 턱끝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가슴이 격렬하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사방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불임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산 지 6년. 모든 모욕을 삼키고,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도 입을 다문 채 견뎌온 6년. 어머니의 학대를 방관하고 외면했던 남편 곁에서 버틴 6년. 내가, 임신을 했다. 이제 그 누구도 내게 그 비참한 단어를 입에 담지 못하리라. 절대로. 손등으로 눈물을 쓱 닦아냈다. 어깨를 바짝 편 채, 봉투를 가슴에 다시 한번 꼭 껴안았다. 그리고 차를 향해 걸어갔다. 운전대를 잡은 두 손에 힘을 주고 집으로 향하는 내내 심장은 터질 듯이 뛰었다. 집에 들어서는 순간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문울 열고 들어가 이 봉투를 꺼내 보여주는 장면. 에이든의 얼굴에 번질 죄책감과 충격, 그리고 지난 세월 동안의 방관과 집으로 들였던 여자들, 시어머니가 나를 물어뜯게 방치했던 그 모든 순간에 대해 그가 내게 게 토해내야 할 사죄. 오늘, 모든 것이 바뀐다. 차도로 접어들어 차고에 차를 대었다. 시동을 끄고 잠시 가만히 앉아 숨을 가다듬었다. 에이든의 차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낯선 차 한 대가 더 있었다. 매끈하고 어두운 색상의, 처음 보는 고급 세단. 개의치 않고 차에서 내렸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현관문으로 걸어갔다. 손이 손잡이에 닿기도 전에 고용인 마리아가 문을 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오셨어요, 사모님." "마리아." 나는 그녀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정말로 오랜만에 짓는, 진심 어린 미소였다. "잘 지냈어요?" 마리아가 놀란 듯 눈을 번뜩였다. 나의 온기가 낯선 모양이었다. "네, 사모님. 감사합니다." 그녀의 팔을 가볍게 한 번 쥐어주고는 거실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가장 먼저 들려온 것은 웃음소리였다. 낮고 낮게 깔린, 완벽하게 편안한 공간에 있는 사람들끼리 나누는 유쾌한 웃음소리. 거실로 들어선 순간, 내 발걸음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내 짐가방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모든 수트케이스, 모든 가방들. 내가 가진 모든 물건이 마치 공항 탑승구 앞에 쌓여 있는 수하물처럼 거실 한가운데 수북이 쌓여 있었다. 에이든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어떤 여자를 얹은 채로. 그 여자는 아름다웠다. 다가오는 헤드라이트를 발견하듯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길고 검은 머리타래, 붉은 네일, 내 한 달 생활비보다แพ싼 드레스. 여자의 손은 에이든의 가슴에 얹혀 있었고,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에이든의 손은 여자의 허리에 가 있었다. 그 역시 웃고 있었다. 내가 들어온 것조차 눈치채지 못한 채. "아이고, 제때 맞춰 왔네." 거실 구석 1인용 소파에서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발목을 교차하고 와인 잔을 든 채, 쥐를 구석에 몰아넣은 고양이 같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불임 싹퉁바가지가 돌아왔어." 그녀를 보지 않았다. 남편과 그의 무릎 위에 앉은 여자, 그리고 바닥에 쌓인 내 인생 전부인 짐가방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이 빌어먹을 년이."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찌르는 듯 낮아졌다. "너한테 말하고 있잖아!" 그녀는 세 걸음 만에 거실을 가로질러 오더니, 내 뺨을 후려쳤다.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균형을 잃고 벽에 부딪혔다. 찰싹하는 굉음이 거실에 울려 퍼졌다. 뺨에서 시작된 통증이 턱과 귀까지 얼얼하게 퍼져나갔다. 얼굴을 감싸 쥐고 시어머니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내 손에는 여전히 임신 진단서 봉투가 들려 있었다. 시어머니는 내 팔통을 낚아채 짐가방 더미 쪽으로 끌고 가 바닥에 팽개쳤다. "에이든……."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작게 터져 나왔다. "이게 다 뭐야? 저 여자는 누구고? 내 짐은 왜 여기 있어?" 심장이 너무 무섭게 뛰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가슴속 깊은 곳이 바느질실이 하나씩 터져 나가는 것처럼 아려왔다. 에이든은 무릎 위 여자를 바라보았다. "자기야, 잠시만 여기 앉아 있어. 금방 끝낼게."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무릎에서 내려왔다. 소파 끝으로 이동해 자리를 잡고 앉아, 다리를 꼬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관조하듯 바라보았다. 에이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겨진 셔츠를 정돈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는, 세상 급할 것 없다는 걸음걸이로 내게 다가왔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나를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내려다보았다. "리나."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완벽히 통제된, 더 이상 더 논할 가치도 없다는 것을 알릴 때나 쓰는 그 특유의 톤. "첫째, 더 이상 날 '에이든'이라 부르지 마. 둘째, 저기 앉아 있는 여자?" 그는 여자 쪽으로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바네사야. 내 약혼녀지. 그리고 내 아이를 가졌어." 그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했다. 동요조차 없었다. 마치 일기예보라도 전달하듯이. 내 세계가 발 밑에서부터 무너져 내렸다. 온몸이 떨렸다. 눈물이 흘렀다. 제정신을 차리려 애썼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입을 벌렸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6년이라는 세월 동안 누군가를 사랑하고, 견디고, 그 사람 하나만 바라보며 버텨온 삶의 끝이 겨우 이런 식이라면,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너랑은 끝이야." 그가 말했다. "당장 내 집에서 나가." " 그래!" 뒤에서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당장 나가, 이 재수 없는 년아!" 가슴도, 눈도, 온몸이 불에 타는 듯 고통스러웠다. 바네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천천히 걸어와 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내 턱을 손으로 쥐고 얼굴을 강제로 들어 올렸다. 그 아귀힘은 지독할 정도로 세고 단단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내 눈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언니." 그녀의 목소리는 다정하다 못해 모욕적이었다. "울지 마. 울어봤자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그녀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 집은 이제 내 집이야. 난 언니가 그 수년 동안 못 해낸 에이든의 아이를 가졌거든. 정신 차리고 나갈 준비나 해. 내가 한 번 더 말하게 만들면, 그땐 정말 매운맛을 보게 될 테니까." 그녀는 내 턱을 팽개치듯 놓아버렸다. 나는 바닥에 뒤로 나자빠졌다. 에이든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팔짱을 낀 채 그 모든 과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내가 어서 이 비참한 연극을 끝내기만을 기다리면서. 바네사는 아름다웠다. 세련되고 완벽했다. 긴 머릿결, 고급스러운 옷, 한 번도 삶에서 작아져 본 적 없는 여자 특유의 여유로움. 그리고 나는 내 집 바닥에 엎드려, 내가 여태껏 받아온 모욕의 형상 그 자체로 굴러다니고 있었다. "여보, 제발……." 그를 멈추기도 전에 애원이 터져 나왔다. 나도 모르게 그를 향해 몸을 움직이며 손을 뻗었다. "제발 이러지 마. 난 당신한테 내 모든 걸 줬잖아……." 그는 내 손길이 불길이라도 되는 양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 마." 그의 목소리가 날카롭고 낮게 가라앉았다. "감히 어디서 손을 대? 너 이 구두 살 돈은 있어? 이 바지 사 입을 능력은 되고? 단 하루라도 네 힘으로 호구지책이나 할 수 있냐고?" 그는 나를 벌레 보듯 내려다보았다. "넌 빈털터리야. 내게 올 때도 빈손이었고, 나갈 때도 빈손으로 나가는 거야. 당장 일어나서 나가. 다시는 이 집에 발붙일 생각 마." 시어머니가 비웃음을 터뜨렸다. 바네사는 그저 가만히 구경할 뿐이었다. 말해주고 싶었다. 목구멍까지 말이 치밀어 올랐다. *나 임신했어, 에이든. 내가 당신 아이를 가졌다고. 이 봉투를 봐, 이걸 보란 말이야.* 하지만 입술을 짓씹으며 그 말을 다시 가슴속 깊이 눌러 앉혔다. 안 돼. 이자는 알 자격조차 없다. 이 아이를 가질 자격이 없다. 더 이상 내게서 단 하나도 빼앗아가게 둘 순 없다. 그가 내 팔을 낚아챘다. 멍이 들 정도로 세게 쥐고 나를 문밖으로 끌고 갔다. 시어머니와 바네사가 뒤따라오며 내 짐가방들을 바닥에 문지르듯 끌고 나와 현관 밖으로 내던졌다. "아파, 이거 놔!" 그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나를 내팽개쳤다. 나는 현관 계단 위로 비틀거리며 내던져졌다. 뒤이어 내 짐가방들이 줄줄이 내 주변으로 떨어졌다. 차갑고 장대 같은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며 순식간에 옷을 적셔왔다. 쿵. 문이 닫혔다. 문 너머로 들려오는 시어머니의 비웃음 소리가 마지막이었다. 발밑에 흩뿌려진 내 삶의 집기들, 그리고 가방 속 가슴에 꼭 쥔 봉투를 품은 채 나는 빗속에 홀로 서 있었다. 가방 손잡이 두 개를 쥐었다. 어깨를 바짝 폈다. 그리고 걸음을 옮겼다.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고, 거리에는 어둠이 짙게 깔리고 있었다. 갈 곳도, 돈도, 가족도 없이, 그저 차가운 젖은 보도블록과 뒤에서 끌려오는 짐가방 소리만이 나와 함께했다. 하지만 나는 그 집 문앞에서 했던 맹세를 잊지 않았다. 그건 진심이었다. "당신들,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야." 빗소리와 어둠을 향해, 아무도 들을 수 없도록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모두 다, 내가 반드시 파멸시켜 줄 테니까."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7월의 모리슨 저택, 재회의 날 특유의 공기가 온 저택을 감쌌다. 웅장한 정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진입로에는 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으며, 분수대는 시원하게 물줄기를 내뿜었다. 현관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헨리 오빠가 요리하는 맛있는 냄새가 홀까지 풍겨왔다. 지난 5년 동안 수많은 뜻깊은 순간들이 쌓이고 쌓여, 저택의 공기 자체가 완벽하고 온화하게 바뀐 듯했다.나는 거실 문가에 서서 그 모든 풍경을 가만히 지켜보았다.이단은 이제 여덟 살이었다.태어날 때부터 남달랐던 의연함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또렷해졌다. 아이는 데미안 오빠의 단호함, 즉 사물을 서두르지 않고 온전히 직시하는 태도와 스스로 확신하지 않은 의견에는 절대로 휩쓸리지 않는 주관을 빼닮아 있었다. 동시에 마커스의 다정함, 즉 상대를 바라볼 때 따뜻하게 다독여주는 눈빛과 웃기로 마음먹기도 전에 튀어나오는 유쾌한 웃음소리도 그대로 품고 있었다.물론, 아이의 고집은 여전했다.그것만큼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다.이단은 지금 아벨 오빠와 무언가 심각한 협상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자신의 주장을 피력할 때 나오는 아벨 오빠 특유의 화려한 손짓과, 설득당하지 않았을 때 나오는 이단 특유의 팔짱 낀 자세가 눈에 들어왔다. 주제가 무엇이든, 이단은 데미안 오빠에게서 배운 대로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정적을 유지하며 단단하게 자기 자리를 지켜내고 있었다.아벨 오빠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이단은 묵묵히 버티고 있었다.이 싸움이 누구의 승리로 끝날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클라라는 네 살이었다.네 살이 된 지 석 달째였고, 아이는 그 석 달이라는 시간을 지극히 생산적으로 보내는 중이었다.사건은 지난 4월, 정원 사업에서 시작되었다.클라라가 명쾌한 논리로 몇 번이나 설명해 주었지만, 아이의 논리를 단번에 이해하지 못한 나를 오히려 의아해하는 눈빛 때문에 이 사업의 정확한 기원은 여전히 불분명했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텃밭과 헨리 오빠의 씨앗 몇 봉지, 그리고
1월의 어느 수요일, 새벽 3시 17분. 클라라가 세상에 태어났다.수요일이나 새벽 3시 17분이라는 시간이 특별해서도, 1월이라는 계절에 거창한 의미가 있어서도 아니었다. 단지 크리스마스를 지나며 만삭의 몸으로 거대한 변화를 마주할 준비를 하듯 조심스럽고도 단단한 걸음으로 저택을 거닐던, 춥고 어두운 그달에 클라라가 찾아왔을 뿐이었다.아이가 그때 태어난 건, 순전히 스스로 그렇게 결정했기 때문이었다.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건 지극히 클라라다운 방식이었다.진통은 한밤중인 12시에 시작되었다.나는 잠들지 못하고 깨어 있었다. 지난 2주 동안 도통 숙면을 취하지 못하던 터였다. 임신 막바지의 지독한 신체적 불편함, 배 속의 공간이 좁아지며 아기와 나 사이에 묘한 밀당이 이어지던 중이었다. 첫 진통이 찾아왔을 때, 나는 잠시 미동도 없이 누워 생각했다. *'방금 그건 평소와 다른데.'*다음 세 번의 진통 간격을 쟀다.그러고 나서 마커스를 깨웠다."때가 됐어요."내가 문장을 채 마치기도 전에 그가 눈을 떴다.마커스는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는, 몇 주 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왔던 사람 특유의 완벽한 몰입과 집중으로 나를 바라보았다."간격이 어떻게 돼?" 그가 물었다."8분이요.""알았어." 그가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다. "알았어. 아다에제 의사에게 연락할게.""벌써 문자 보냈어요." 내가 말했다.마커스가 나를 건너다보았다."당신을 깨우기 전에 진통 간격을 세 번 쟀거든요." 내가 덧붙였다. "확실히 하고 싶어서."그는 다정함과 황당함, 그리고 깊은 사랑이 한데 얽힌 표정으로 나를 딱 1초 동안 바라보았다."당연히 그랬겠지." 그가 고개를 내저으며 미소를 지었다.마커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는 데미안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밤중에 오빠에게 꼭 연락을 취해야 할 의무는 없었지만, 오빠는 3주 전 나지막이 '시작되면 반드시 알려달라'고 부닥했었고 마커스는 그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복도 너머로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
나는 서재에서 데미안 오빠를 찾아냈다.오빠는 모니터 화면들을 띄워둔 채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양손을 책상 표면에 평평하게 얹은 자세였다. 중앙 모니터에는 바로 그 기사가 떠 있었다. 내가 노크하고 들어왔을 때 이미 그 기사를 읽고 있었으며, 굳이 탭을 닫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오빠는 이 상황을 내게 숨기거나 조작하려 들지 않고 있었다.내가 들어서자 오빠가 고개를 들었다.나는 오빠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알고 있는 거 다 말해줘요." 내가 말했다."기사는 읽었겠지." 오빠가 말했다."읽었어요. 내가 알고 싶은 건 이 정보의 출처에 대해 오빠가 파악한 내용이에요."오빠가 모니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애시워스 건에 관한 내부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던 자야." 오빠가 입을 열었다. "나와 애시워스의 과거사, 그러니까 공개된 기록에는 없는 개인적인 원한이라는 프레임을 짜 넣었다는 건 회사 내부 문서에 접근할 수 있었다는 뜻이지." 오빠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다시 말해, 내부자의 소행이라는 거다.""아벨 오빠가 추적 중이에요." 내가 말했다."알고 있다." 데미안 오빠가 응수했다."어떻게 할 생각이에요?"오빠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내가 늘 하던 대로 해야지." 오빠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완벽한 정보를 손에 쥐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는다.""오빠가 그러고 있는 동안에도 기사는 계속 퍼져나가고 있어요.""그렇겠지.""그리고 사실도 아닌 헛소문에 오빠 이름이 들먹거려지고 있고요.""그래." 오빠가 다시 한번 대답했다. 완벽하게 평정심을 유지한 목소리였다.나는 오빠를 가만히 건너다보았다.데미안 모리슨. 지난 수십 년 동안 이 가문의 모두를 지켜온 사람. 회사를 이끌고, 약속을 지키고, 끄나풀을 솎아내고, 위협을 제거하며,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복도 끝에 서 있던 사람. 그런 사람이 자신을 향한 왜곡된 비난 기사가 언론에 도배되고 있는 순간에도 책상 앞에 손을
**리나의 시점**진료 예약은 오전 9시였다. 아다에제 의사의 진료실은 모리슨 저택에 입성한 뒤 첫 검진을 받았던 곳이자, 내 상황을 완벽히 숙지한 의사가 나를 취조받는 기분이 들지 않게 배려하며 신중하고 능숙하게 질문을 던졌던,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의미 있는 말들이 오갔던 바로 그 공간이었다.마커스가 나와 함께해 주었다.그는 매 검진마다 단 한 번도 빠짐없이 동행했다.내가 부탁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임신 초기, 나는 의학적 검진 정도는 혼자서도 충분히 받을 수 있고 그의 일정을 변경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말했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마커스는 내 말을 가만히 들은 뒤 이렇게 답했었다. *'당신에게 내가 필요 없다는 건 알아. 내가 같이 가고 싶어서 그래. 그 둘은 엄연히 다른 거야.'* 나는 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래, 그 둘은 다른 거지.'* 그리고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아다에제 의사가 초음파 검사를 진행했다.진료실 안은 정적에 휩싸였다.모니터 화면이 밝게 빛났다."성별을 알고 싶으신가요?" 의사가 물었다.마커스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았다."네." 내가 대답했다."딸이네요." 아다에제 의사가 미소를 지었다.나는 화면을 바라보았다.그리고 마커스를 건너다보았다.그의 얼굴.나는 이사회의장에서, 강변 산책로에서, 밤 11시의 주방에서, 결혼식 단상 앞에서, 그리고 새벽 2시의 아이 방에서 마커스 그레이의 얼굴을 보아왔다. 서로를 선택하며 함께한 3년의 세월 동안 그가 보여준 온갖 무수한 표정들을 하나하나 기억해 두었기에, 나는 그 사람의 모든 얼굴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하지만 이런 표정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완전히 무장 해제된 남자의 얼굴이었다.압도당한 것이 아니라, 경계가 완전히 풀려버린 모습. 늘 유지하던 특유의 단단한 틀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그 아래 숨겨진 본연의 모습이 아무런 방어막 없이 오롯이 드러난 표정이었다.그는 모니터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의 턱 끝이 미세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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