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결혼 3년 차. 남편 준석의 오해로 외도 누명을 쓰고 이혼 위기에 몰린 여진. 결백을 증명하려 애쓰지만, 이 모든 것은 그녀를 되찾으려는 전 약혼자의 치밀한 덫이었다. 평온했던 부부 관계는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데....
view more1화.
아직은 겨울의 찬 기운이 남아있는 봄밤.
여진은 상아색 실크 가운 차림으로 1층 거실을 서성이며 남편 준석을 기다렸다.
서늘함을 느낀 그녀는 양팔을 교차한 채 현관 쪽으로 서서히 향했다.
남편은 최근 해외 출장을 다녀온 뒤로 귀가 시간이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다.
워낙 바쁜 사람이라 평소에도 늦는 건 흔한 일이었으나, 늦는다는 연락을 안 한 적은 없었다.
그가 변한 것은 정확히 2주 전부터였다.
출장을 갔다 온 날부터 각방을 쓰길래, 일이 많아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었다.
처음엔 그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살인적인 일정으로 피곤해서겠지 생각했다.
평소 준석은 아무리 바빠도 일주일에 서너 번은 여진과 잠자리를 가졌었다.
한데 해외 출장 이후 무슨 일인지 그는 그녀를 본채만 채 했고 어느새 한 달이 넘도록 두 사람은 부부 관계를 맺지 않았다.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여진은 이 상황이 무척이나 낯설었고 차곡차곡 쌓여가는 초조함과 조급함에 하루하루가 날이 선 듯 긴장 상태였다.
준석은 장기간 해외 출장을 떠나면 집에 돌아오기가 무섭게 저를 지칠 때까지 안아 대던 남자가 아니었나.
어쩔 땐 너무 버거워 눈물을 보이기 일 수였다.
애원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해야 그는 한발 물러나 하던 것을 멈췄었다.
그랬던 남편이었는데….
항상 저를 먼저 갈구하던 손길이 뚝 끊기니, 여진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그녀는 너무도 순진하게 자신이 남편에게 먼저 요구하지 않아서 그러나 생각했었다.
그래서 며칠 전 용기를 내어 남편이 지내는 서재의 문을 두드렸었다. 평소 잘 입지 않은 속이 은근하게 비치는 얇은 란제리를 입고서.
똑똑.
들어오라는 말이 없었으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우리는 부부니까. 이 야심한 밤에 이 집에 있는 사람은 그와 나뿐이니까. 그 누가 부부 사이를 방해하겠는가.
고급스러운 진갈색의 원목으로 꾸며진 서재는 평소 과묵한 그와 아주 잘 어울렸다.
서재로 들어선 저를 보며 남편은 뜻밖인 듯 잠시 한쪽 눈가를 올리는가 싶더니, 보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여진은 그에게 다가가지 않고 곧장 서재 한편에 있는 침대로 향했다.
그러곤 나름 요염한 자태로 살포시 침대 위에 앉았다.
정갈하게 정돈된 화이트 침구가 그녀의 움직임에 잘게 구겨져 갔다.
“이런 걸 두고, 무단 침입이라고 하지.”
딱딱한 나무토막 같은 음성이었다.
여진은 좀처럼 곁은 내주지 않는 남편을 마주하자, 순간 억눌러왔던 서운함을 드러냈다.
“준석 씨, 요즘… 나한테 왜 그래요? 내가 뭘 잘못했나요?”
흰 눈처럼 새하얗고 순진한 여자의 얼굴이 곧 처연하게 변해갔다.
그 모습에 준석의 얼굴이 감정을 억누르려는 듯 잘게 일그러져갔다.
하나 언제 그랬냐는 듯 곧 평정을 찾은 그는 다시 냉랭한 표정으로 여진을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훑었다.
‘젠장, 어디서 저런 옷 같지도 않은 것을 입고 와선…!’
그녀와 결혼 생활 동안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야한 란제리였다.
평소 다소곳한 여진과는 지극히 상반된 란제리 차림에 준석은 욕정보다는 부아가 끓어올랐다.
‘딴 새X랑 놀아나더니, 속옷 취향도 바뀌었군.’
속이 뒤틀리는 듯한 참을 수 없는 지저분한 감정에 준석은 앉은 자리에서 서랍을 거칠게 열었다.
이윽고 그 안에서 며칠 전부터 준비해 뒀던 서류를 끄집어냈다.
서류를 쥐고 있던 그의 손마디 마디가 분노를 머금고 튀어나올 듯 도드라졌다.
윤여진은 그 어떤 것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차준석이 사랑해 마지않던 순진한 아내였다.
그렇기에 그녀의 외도는 그에게 더 큰 충격이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로 설명될 수 없는 엄청난 분노와 허탈감, 설마 아닐 거야 라는 지극히 일차원적인 현실 부정에 이르기까지 했었다. 천하의 차준석이 말이다.
묻어갈까….
생각을 안 해 본 것도 아니었다.
차준석은 윤여진을 미치도록 사랑했으니까.
자신이 지나친 망상에 사로잡힌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남녀가 호텔 객실에 들어간다고 해서 다들, 그 짓거리를 하는 건 아니니까.
순진하긴, 차준석.
사랑에 눈이 멀더니, 아내의 외도마저 부정하는 스스로를 보며 준석은 자신이 천하의 머저리 중의 머저리처럼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제 사랑의 깊이만큼 거대한 분노가 그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7화.며칠 뒤.갤러리 빈센트, 관장실.“1층 전시관에는 Morning, 2층은 Afternoon, 3층은 Night로 섹션을 분리해서 전시될 거야. GLORIA 쪽 디렉터와 마지막 미팅을 잡아놨어.”여진은 갤러리 관장, 정혁의 설명을 들으며 전시 기획안을 꼼꼼히 살폈다.이번 전시는 명품 하이주얼리 브랜드 GLORIA와 협업이었다.여진의 도예 작품이 주얼리 행사에 사용되어 2주 동안 전시가 된다.명품 업체와 협업은 처음이라 신경 쓸 게 많은 프로젝트였다.“여진아.”여진이 저를 부르는 소리에 기획안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반대편에 앉아 있던 정혁이 그녀와 눈을 맞추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많이 피곤해 보이네.”“아, 그래? 요즘… 잠을 좀 못 잤어.”여진은 멋쩍은 듯 손을 들어 제 한쪽 뺨을 쓸었다.“이번 전시, 신경 많이 쓰이지? 나유미 팀장이 좀 깐깐한 편이야. 그쪽 업계에선 소문난 능력자기도 하고. 원래 실력 있는 사람들이 까칠하잖아.”나유미 팀장은 GLROIA의 전시 총괄팀 디렉터였다.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자인스쿨을 나오고, GLROIA에 입사해 최연소 팀장을 단 그야말로 나무랄 데 없는 실력자였다.그에 비해 여진은 국내에서 미술로 알아주는 명문대를 나왔다고는 하나, 이제 27살밖에 되지 않은 신진 작가였다.당연히 미술계에 쌓은 경력이 미비했다.도예 작가로서 개인전 및 각종 아트페어에서 활발히 활동했지만, 명품 하이주얼리의 러브콜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그래서 남편이 그녀의 옛 약혼자 한정혁과 함께 일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여진은 차준석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도예가 윤여진으로서 능력을 인정받고 증명하고 싶었다.“그것 보다, 오빠….”여진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정혁을 향해 입을 열었다.“응. 뭔데, 말해 봐.”정혁은 여진의 표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경청할 자세를 취했다.한정혁. 여진보다 세 살 많은 그는 어릴 적부터 여진과 알고 지낸 사이다. 정혁
6화.그가 제 아내를 향해 몸을 완전히 틀었다. 그러고는 한발 내딛으며 아내와 간격을 좁혔다.그 순간, 준석은 미간을 와락 구겼다. 그의 후각을 강하게 자극하는 향기 때문이었다.평소 여진에게서 나는 은은하고 부드러운 향이 아니었다.지나치게 달콤한 꿀 향기였는데, 이런 역겨운 향기를 뒤집어쓴 아내가 지독히도 거슬려 삽시간에 두통이 몰려왔다.어제의 야한 란제리와 오늘의 달콤한 꿀 향의 향수.삼 년을 함께 살면서 남편의 취향을 모르지 않을 텐데….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외도남이나 좋아할 만한 취향을 하고 제 앞에 당당히 서 있다니!물기가 가득 찬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여진을 보며 준석은 호텔 객실로 들어서는 아내와 한정혁의 모습이 찍힌 사진을 떠올렸다.‘감히, 어디서!’핏발 선 눈동자가 여진을 향했다. 강하게 올라오는 분노의 감정을 억누르며 그가 입술을 열었다.“당신이 이렇게 뻔뻔한 여잔 줄 미처 몰랐어. 이런 여잔 줄 알았다면, 청혼 따윈 하지 않았을 거야.”“…!”“놀랍더군. 이혼 서류를 찢어서 보낼 배짱이 당신한테 있었다니. 지금껏 내 앞에서 보이던 순종적인 모습은 다 거짓이었던 거지.”“아, 아니에요! 난 당신과 이혼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너무 속상해서 그랬던 거예요!”“다른 남자와 밤을 보냈으면서도 이혼하지 않겠다는 뻔뻔한 이유가 뭐지?”준석은 여진을 경멸이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며 따져 물었다.여진은 그 눈빛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게 너무 괴로웠다. 제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사그라져 가는 것만 같았다.혼미해지려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여진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정말 그런 적 없어요! 나, 당신 사랑해요! 그런 내가 왜 다른 남자와-.”“입 다물어.”“몇 번을 말해요! 난 당신을…!”“날 사랑한다는 그딴 개소리 집어치워!”“…!”“당신 아버지 회사를 지키고 싶은 거겠지. 날 사랑해서가 아니라….”“그렇지 않아요!”억울함에 바들바들 떨리는 여진의 턱을 준석이 한 줌에 움켜쥐었다.여자의 처연한 얼굴이 차가
5화.당당하게 말대꾸한 사람답지 않게 정 비서는 열중쉬어를 한 채로 서 있었다.그런 정 비서를 응시하며, 준석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곧이어 굵고 긴 다리를 한쪽으로 꼬았다.“성훈아.”자못 부드러운 음성이었다.“네, 대표님.”도통 표정 변화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성훈도 제 이름을 듣고는 으레 얼굴 근육을 부드럽게 풀었다.“보고 해.”준석의 명령에 성훈이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윤여진이 차준석과 이혼할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대표님이 보내신 서류를 찢으셨습니다.”“뭐? 서류를 찢어?”준석의 미간이 삽시간에 좁혀졌다.그런 배짱이 제 아내에게 있을 거라고 생각지 못한 표정이었다.“적반하장이 따로 없군.”등받이에 기댔던 몸을 바로 한 준석은 봉투에 든 찢어진 서류를 꺼냈다.‘협의이혼 의사 확인서’와 ‘혼전 계약서’가 마구잡이로 섞여 있었다.“하…!”준석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원 상태로 붙여 봐.”준석의 명령에 성훈이 문서의 찢어진 부분을 테이프로 이었다.찢어진 서류는 정교한 손놀림에 제법 온전한 모양새를 갖췄다.그렇다고 한들, 상처 난 부위가 완전히 이어지진 않았다.“그 서류 그대로 윤여진에게 갖다줘. 이혼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관계는 앞으로 이런 상태일 거라고. 벌어진 부위를 감당할 자신 있으면, 어디 잘 버텨 보라고.”“네, 대표님.”정 비서는 테이프로 간신히 봉합된 서류를 챙겨 대표실을 나갔다.“하아….”홀로 대표실에 남게 된 준석은 그제야 깊은 탄식과 같은 한숨을 뱉어냈다.곧이어 그가 서랍을 열어 봉투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 내용물을 테이블 위로 끄집어냈다.수십 장의 사진들이 테이블 위에 수십 개의 파편처럼 펼쳐졌다.한정혁과 환하게 미소 지으며 식사하는 아내, 어느새 그에게 기대어 호텔 엘리베이터를 타는 아내, 열린 객실 문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그리고… 사진에 담기지 않은 시간 동안, 그들은 무엇을 했나.대낮, 호텔에서….“제기
4화.여진에게 그 계약 조건을 지키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왜냐하면 차준석은 그녀가 오랫동안 홀로 짝사랑했던 상대였으니까 말이다.8년 전.금성 산업이 꽤 잘나가는 중견기업이었던 시절, 여진은 재벌 자제들의 파티에 몇 번 초대받았었다.그 모임에서 단연 돋보이는 사람이 차준석이었다.수많은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는 거대 기업, HK 그룹의 후계자.누구나 다 선망하는 정점의 자리에 그가 있었다.19살 여진의 눈에는 파티의 중심에 있는 26살의 차준석은 그녀가 감히 올려다볼 수 없는 고귀한 존재였다.그곳에 모인 수십여 명의 사람들이 술이 든 잔을 부딪힐 때,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그의 손에는 코발트 색의 탄산수가 들려있었다.여진은 자신과 똑같은 탄산수를 마시고 있는 그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자신이야 미성년자니 화려한 파티에서 기껏해야 무알콜 음료를 마시는 게 다였다.한데 성인의 나이를 훌쩍 넘은 차준석이 자신과 같은 것을 마시고 있다니….저 사람, 나랑 취향이 같아.첫눈에 반한 듯한 여진의 맑은 눈동자가 준석에게 한참 동안 고정됐을 때였다.그가, 차준석이 여진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여진과 그의 시선이 정면에서 엉켰다.“…!”흡! 여진은 순간 숨을 참았다.그런 그녀를 보며 싱긋, 분명 그렇게 웃었다. 차준석이.그것도 찰라, 그는 여진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다시 그를 둘러싼 사람들과 무심한 듯 대화를 이어갔다.그와 달리 여진은 수줍음에 어쩔 줄 몰라 했다.진분홍 작약이 활짝 핀 것처럼 새하얀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여진은 제 얼굴이 그리 변한 줄도 모르고, 사람들 속에서 웃을 듯 말 듯 입가를 올리는 남자를 홀린 듯 바라봤다.아…, 눈이 부시다. 차준석.그는 형언할 수 없는 찬란한 빛을 전신에서 뿜어내고 있었다.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에게 귀속된 심장처럼 여진은 그 순간 그에게 제 심장을 내어 주고 말았다.하나 차준석 그는 사랑한다고 하여 가질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파티에 모인 기업의 자녀들은 각자 기업의 규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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