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이준은 헛웃음이 나왔다.“그럴 줄 알았어. 수신인이 네 비서로 되어있더라고. 유강후, 내가 돈으로 임혜린을 막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 도대체 왜 300벌이나 주문한 거야? 너 미쳤냐?”유강후의 태도는 여전했다.“내가 천 벌을 주문하든 만 벌을 주문하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이때 온다연이 그의 핸드폰을 갈아채고 한이준에게 말했다.“대표님, 안녕하세요. 온다연입니다. 혜린이는 대표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돈에 환장한 사람이 아니에요. 겉으로는 별일 없어 보이지만 어릴 때부터 남녀 차별하는 집안에서 자라서 많이 힘들었어요. 그리고 가족이 많이 아파서 큰 금액의 돈이 필요했던 거예요.”한이준은 잠자코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차갑게 답했다.“그래서 뭐? 고작 그 이유때문에 날 ATM기로 사용해도 된다는 거야?”“정말 혜린이를 조금이라도 좋아했다면 인품을 의심해서는 안돼죠. 대표님처럼 명문가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영원히 모를 거예요. 수백만 원으로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요.”“혜린을 싫어하는 거면 이제 그만 놓아주세요. 대표님이 아니더라도 아껴주고 사랑해 줄 사람은 많거든요. 돈으로 옆에 묶어두면서 한편으로는 돈 때문에 굴복하는 모습을 업신여기는 게 참...”“역겹다는 생각이 드네요.”그 말을 끝으로 온다연은 곧장 전화를 끊고선 핸드폰을 유강후에게 건넸다.유강후는 흥미로운 듯 온다연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배짱이 점점 커지네? 날 욕하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 내 친구까지 욕하는 거야? 속이 좀 후련해졌어?”온다연은 콧방귀를 뀌더니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작은 얼굴을 한쪽으로 돌렸다.유강후는 하얀 국물이 담긴 삼계탕을 온다연에게 건넸다.“얼른 먹어. 장 집사가 몇 시간 동안 푹 삶은 거야.”“다 먹고 수강 신청하러 가자. 네가 좋아할 만한게 있을 거야.”온다연은 국물을 마시며 단호하게 말했다.“이번에는 아저씨 말 안 들을 거예요. 임혜린은 영원히 내 친구예요.”유강후는 못 들은 척 새우 껍질을 벗기더니 하얗고 부드러운
온다연이 몸을 떨고 있다는 게 느껴진 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물었다.“왜 그래?”온다연은 작은 얼굴을 품에 파묻고 손으로 그의 코트를 꽉 움켜쥐며 눈물을 쏟아냈다.온다연이 답을 하지 않자 유강후는 그제야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어느새 눈물범벅이 되었고 고운 얼굴에 몇 가닥의 젖은 머리카락이 달라붙었다. 조명 아래 비춰진 그녀의 피부는 눈이 부실 정도로 더욱 하얗게 빛났다.짙고 검은 눈동자로 애틋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온다연을 보니 그 청순함과 아련함을 괴롭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온다연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 있다.매번 이런 눈빛으로 바라볼 때마다 유강후는 저도 모르게 음침한 생각이 들었다.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온다연을 가둬 평생 본인의 소유로 만들고 싶었다.가두고 나서는 매일 같이 괴롭혀서 울리고 이런 불쌍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게 하는 게 소원이다.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온다연을 학교에 보내는 게 후회되기 시작했다.아무리 꽁꽁 싸매도 온다연의 아름다움은 가려지지 않았고 오가는 남학생들은 뒤를 돌아볼 정도로 눈을 떼지 못했다.유강후는 마치 가장 소중하고 아끼는 물건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밖에 내놓은 것 같아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곧바로 손을 뻗어 온다연의 눈물을 닦아주며 부드럽게 물었다.“왜 울어? 학교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 다른 곳으로 바꿔줄까?”온다연은 그의 옷을 움켜쥐고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에요.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나네요...”그녀는 유강후의 손에 얼굴을 비비며 조용히 말했다.“행복해요. 곁에 아저씨도 있고 아이도 있고 이제 공부도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사실 꿈에서도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거든요.”온다연을 코를 훌쩍이며 그의 따듯한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부모도 없이 무시만 받으며 살아온 저한테 이렇게 행복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한평생 복수만 하다가 죽는 줄 알았는데...”
온다연은 자신의 사소한 행동이 남자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매점에 도착한 온다연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다. 하나는 보온팩에 넣었고 다른 하나는 손에 쥔 채 유강후에게 다가갔다.온다연은 빨대를 꽂아 유강후에게 건넸다.“한입 먹어봐요.”그 시각 유강후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온다연을 계속 쳐다보던 몇몇 남학생들을 째려봤다. 그러고선 보란 듯이 온다연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난 단 거 안 좋아해.”말투는 다소 차가웠다.“온다연, 앞으로는 남자들 보고 웃지 마. 이게 세 번째 조항이야.”속 좁게 질투하는 그의 모습이 이제는 익숙해진 온다연은 자연스레 달래주기 시작했다.온다연은 밀크티를 한 모금 마시고선 다시 유강후에게 건넸다.“얼른 마셔봐요.”유강후의 표정은 여전히 싸늘했다.그러자 온다연은 옆에서 알콩달콩하게 밀크티를 마시는 커플을 가리키며 속삭였다.“봐봐요. 커플들은 이렇게 같이 마시잖아요. 나도 저런 거 하고 싶었는데...”그제야 안색이 풀린 유강후는 밀크티 한 모금 들이마셨다.너무 달아서 입에 맞지 않았지만 온다연의 기대에 찬 눈빛을 마주하니 싫어도 삼킬 수밖에 없었다.“달고 괜찮네.”온다연은 기분 좋은 듯 해맑게 웃었다.“그쵸? 단언컨대 이 세상에 밀크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여기는 맛이 살짝 별로네요. 심지어 하나에 3천 원이에요. 예전이랑 주한이랑...”말을 내뱉고서야 실수했다는 걸 깨달은 온다연은 재빨리 고개를 숙여 밀크티를 마시며 조심스럽게 유강후의 눈치를 살폈다.반응을 보아하니 화가 난 것 같지 않았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저랑 주한이는 아저씨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우리는...”유강후는 그녀의 말을 잘랐다.“그때도 이렇게 하나를 같이 먹었어?”거짓말하기 싫었던 온다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비쌌어요. 하나에 천 원이었는데 그때는 돈이 없었으니까... 가끔 기분 좋을 일이 있을 땐 같이 하나 서서 나눠 먹었거든요.”순간 입맛이 사라진 온
최근에 화양대에 이상한 일이 생겼다고 소문이 자자했다.금융학과에 알게 모르게 소규모 반이 개설되었는데 교사부터 학생까지 전부 세심하게 고른 사람들이라고 한다.이는 화양대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다들 천재 클래스라고 생각하며 눈도장을 찍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심지어 한동안 의논이 분분했다.그러나 점차 모든 사람들이 이 반의 학생들이 모두 여학생인 걸 발견했고 다른 학과에서 배정받아 옮겨온 일반 학생들이 많다는 걸 알고선 소문은 잠잠해졌다.일부 세심하고 꼼꼼한 사람들은 이 반의 학생들이 대부분 외모가 뛰어나고 집안 배경이 좋은 명문가의 자제들인 걸 발견했다. 예술에 대한 조예가 깊을뿐더러 일부는 심지어 국제적인 상을 받기도 했다.화양대에는 그런 사람들이 넘쳐났기에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주목받을 만한 일은 아니다.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사람들이 관심이 가라앉자 평화가 찾아왔다.온다연은 학교 일정에 빠르게 적응했다.아침 8시에 집에서 나와 오후 4시까지 수업을 받고 나면 끝나고 학교 미술실에 남아서 유화를 그렸다.사실 온다연이 입학한 바로 다음 날 세계적인 유화의 거장 모비크가 학교에서 전시회를 열었다.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던 온다연은 몰래 전시회를 보러 갔고 정말 운 좋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모비크 본인을 마주치게 되었다.첫인사만으로 온다연에게 호의 보인 모비크는 곧바로 온다연에게 제자를 해볼 생각이 없냐고 제안했다.놀라고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던 온다연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승낙했다.따라서 하루 종일 수업이 꽉 찼고 주말에도 인턴십 활동에 참여했기에 눈코 뜰 새 없는 바쁜 나날을 보냈다.집에 있는 시간이 줄어드니 아이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도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아무리 몸이 힘들어도 매일 밤 아이과 함께 보내는 한 시간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다.아이를 빼앗아 가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니 언제든지 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 계발에 충실했다. 온다연은 스스로가 더 성장하고 강해져야만 나중에 직접 아이를 가르치고 교육할 수
“개인적인 생각인데 얼굴만 봤을 땐 온다연이 훨씬 예쁜 것 같은데?”“저 남자 지금 우리 쪽 쳐다보는 거 맞지? 왜 하필 오늘이야. 나 화장 안 했는데.”...온다연은 인파를 뚫고 유강후를 향해 달려갔다.어렴풋이 사람들의 의논 소리가 들렸지만 어떤 말을 하든지 더 이상 별 관심이 없었다.빨리 유강후를 만나고 싶었고 그와 뭔가를 상의하고 싶었다.유강후는 온다연이 나타나자마자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고 단 1초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온다연은 인터넷으로 주문한 연보라색 튜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달리는 동작에 맞춰 망사 소재의 치맛자락이 하늘로 날렸고 높게 묶은 포니테일과 조화롭게 어우러져 발랄하면서도 청순한 매력을 뽐냈다.유강후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온다연을 바라봤다.바로 조금 전에 그는 온다연의 멘토와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온다연은 학습 능력이 뛰어난 데다가 IQ가 높아 숫자에 민감하고 그 덕분에 금융 분야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인다고 한다.불과 한 달 만에 온다연은 독학으로 다른 사람들이 6개월 정도 배우는 지식을 습득했다. 게다가 논문에서는 매우 참신하고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했다고 한다.이는 금융 학과에서 극히 높은 권위를 가진 여교수를 놀라게 할 정도였다.방금 대화에서 여교수는 온다연은 자신의 후계자로 양성하고 싶다는 욕심을 은근히 내비쳤다.뿐만 아니라 모비크도 온다연이 그림에 소질이 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대충 툭 던진 말을 캐치해 자신만의 스타일로 소화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천재나 다름없다.심지어 얼마 전에 그린 유화는 모비크의 전시회에 출시되어 몇만 달러의 고가에 낙찰되었다.온다연은 유강후의 손바닥에서 천천히 피어났다. 처음 그녀를 곁에 데려왔을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환골탈태라고 할 수 있다.마치 누에고치에서 깨어난 나비가 눈부신 날개를 펼치며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 같았다. 온다연은 점점 더 당당해졌고 더 높은 곳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했다.분명히 기뻐해야 하는 일이지만 유강후는 그닥 기쁘지 않았고 오
유강후는 점점 무질서해지는 장화연에게 전화를 걸어 한바탕 혼을 내고 싶었다.아침에 아주 잠깐 시선을 돌렸을 뿐인데 온다연이 이런 옷을 입고 외출하는 걸 막지 않았으니 이번 달의 보너스를 꿈도 못 꾸는 게 맞다.유강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온다연은 불만을 표시했다.“아저씨, 이 치마 별로예요?”유강후는 바람에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사랑스럽게 바라봤다.“당연히 예쁘지. 우리 다연이는 뭘 입든 다 예뻐.”유강후는 잠시 흠칫하다가 말을 덧붙였다.“아직은 날이 쌀쌀하니까 두껍게 입었으면 좋겠어. 이렇게 얇은 옷을 입으면 금방 감기 걸릴 텐데 컨디션 안 좋아지면 공부도 못하고 우림이랑 같이 있을 수가 없잖아.”아이 얘기를 꺼내자 온다연은 눈빛이 어두워졌다.“아이랑 보내는 시간이 하루에 한 시간밖에 없어요. 아저씨, 난 엄마 될 자격이 부족한 사람이죠?”유강후는 진지하게 답했다.“다들 이렇게 자라는 거야. 특히 명문가 자제들은 태어날 때부터 막강한 책임감을 갖고 있으니까 부모랑 보내는 시간이 별로 없는 게 맞아. 전혀 이상할 것 없어.”한참 동안 생각하던 온다연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2년안에 모든 과정을 마칠 수 있도록 노력할 거예요.”유강후는 그녀의 부드러운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점심은 집에서 먹을 거야? 아니면 학교 휴게실로 가져다줄까?”온다연은 서둘러 답했다.“괜찮아요. 그냥 식당에서 먹을래요.”기숙사에서 지내는 것도 아닌데 학교에서는 온다연에게 별도의 휴게실을 마련해줬다.방 하나에 작은 부엌과 화장실이 따로 있고 인테리어도 정교하게 되어 있었다.처음에는 점심을 먹고 휴게실에서 잠깐 쉬다가 바로 오후 수업을 들으러 갈 수 있으니 너무 좋았다.그러나 온다연은 점차 뭔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유강후는 거의 매일 점심 찾아와 그녀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점심을 먹은 후에는...유강후의 줄어들지 않는 체력과 성욕에 더불어 매번 이상한 걸 제안하는 모습까지 떠올라 저도 모르게 귀가 빨개졌다.온다연은 무의식적으로
물론 그 말은 반은 진실, 반은 거짓이었다. 감사한 마음도 있었지만 더 큰 감정은 질투였다.온전히 온다연의 신뢰와 의지까지 품에 안은 그가 부러웠다!가끔 그는 생각했다.다행히 주한은 이미 이 세상에 없으니 망정이지, 만약 그가 여전히 살아 있었다면 자신이 온다연을 그의 손에서 빼앗아 올 자신이 있었을까?만약 그런 상황이 됐다면, 자신이 얼마나 미쳐버릴지조차 예측할 수 없었다. 온다연은 약간 놀랐지만, 동시에 기분이 좋았다.“우리 먼저 밥 먹고 꽃 사요. 그리고 제 자취방에 들러 짐을 챙기고 가요!”그녀는 시계를 보며 약간 조급해졌다.“시간이 없어요. 서둘러야 해요.”유강후는 그녀 뒤를 가리켰다.“꽃은 내가 이미 준비해 뒀어.”온다연이 뒤를 돌아보자, 예쁘게 포장된 싱싱한 해바라기와 흰 국화가 한 아름 놓여 있었다. 그녀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어떻게 알았어요?”유강후는 그 질문을 피하며 말했다.“자, 자취방으로 가자. 점심은 미리 보내두었어.”온다연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유강후가 어떤 사람인지, 그가 얼마나 치밀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여기까지 해준 것도 이미 그녀의 예상을 넘어섰다.감사한 마음은 있었지만 동시에 불안감도 스며들었다. 그는 너무 강했고 그의 마음은 너무나도 치밀했다. 모든 일을 빈틈없이 처리해서 가끔은 숨이 막힐 정도였다.이번 독서 모임도 겉으론 평범해 보이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그래도, 때로는 모른 척하는 편이 낫다며 넘겨버렸다. 그들에겐 이미 아이가 있었고, 온다연은 그와 평생을 함께할 생각이었다. 때로는 적당히 모르는 척 사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자취방에 도착해 점심을 먹은 뒤, 온다연은 빨간 스카프를 가지러 방에 들어갔다. 그런데 유강후가 옷을 갈아입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는 이미 모든 옷을 벗고, 검은색 속옷만 입은 상태였다. 어둑한 빛 속에서 드러난 그의 넓고 탄탄한 등은 강인하면서도 매력적으로 보였다. 힘이 느껴지는 두 다리는 보는 것만으로도 가
온몸이 유강후의 키스에 녹아버린 온다연은 거부하고 싶으면서도 참을 수 없는 갈증에 휩싸였다.만족되지 않은 공허감이 그녀의 의식을 완전히 잠식해 버렸다.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가늘고 긴 다리가 그의 단단한 허리를 감쌌다. 손은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거의 눈물처럼 흐르는 목소리로 말했다.“강후 씨... 나, 힘들어요...”유강후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그는 그녀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조금만 참아. 오늘은 키스만 할 거야... 더는 안 해.”그렇게 말하면서도 그의 손길은 점점 더 대담해졌다. 온다연의 눈은 흐릿해졌고, 입술은 이미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그녀의 몸은 그의 단단한 허리와 밀착되어 있었다.겨우 남은 의식이 더는 계속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지만, 그가 고개를 숙여 다시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그녀가 입고 있던 얇은 시폰 드레스는 이미 찢겨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이렇게 매일 서로에게 가장 가까운 순간들을 보내다 보니, 온다연의 몸은 그의 손길에 자연스럽게 반응하기 시작했다.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둘 사이의 호흡이 점점 맞아가면서 이제는 그녀도 그를 갈망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부인할 수 없었다. 그녀도 가끔은 그를 원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단지 키스만으로 끝나는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안에서 타오르는 갈증을 느꼈다.“강후 씨...”유강후도 거칠게 숨을 내쉬며 그녀의 몸을 더듬었지만, 여전히 억제하고 있었다.사실 이 집, 그리고 이 아파트 단지는 이미 그의 소유였다. 온다연뿐만 아니라 그에게도 이곳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그는 이곳에서 그녀의 기억에 새로운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이곳이 더는 주한만을 떠올리게 하는 슬픈 장소가 아니라, 그와 함께한 달콤한 순간들로 가득 차기를 원했다.그는 이곳이 온전히 둘만의 사랑으로 기억되기를 바랐다. 온다연이 이 집을 떠올릴 때마다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자신만을 생각하게 되기를.오늘이라는 날이 더는 주한에게 머무는 날이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
그러자 심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아... 아냐. 난 그런 거 몰라. 그냥 네가 언니 친딸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어. 집에 데려왔을 때 벌써 한두 살쯤 됐었지. 근데... 그때 네가 입고 있던 옷이 최고급 명품 아동복이었어. 몸에 착용한 액세서리들도 다 외국 브랜드였고. 온준용이 그거 팔아서 꽤 많은 돈을 챙겼어. 그걸로 그 시절 경원시에 작은 집 한 채는 살 수 있었을 거야. 난 그 정도만 알아. 진짜로.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전부 다 온준용이 한 짓이야.”온다연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심미진, 넌 정말 끝까지 구제 불능이야. 내 진짜 신분... 넌 분명히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신고하지 않았어? 왜 온준용과 함께 짜고 다 숨겼냐고? 설마 너랑 온준용이 같이 잤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심미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다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온준용은 내 형부야. 내가 어떻게 형부랑 그런 일을 해!”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너희 둘 사이가 어떤 사인지는 관심 없어. 하지만 유씨 집안 사람들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 널 왜 갑자기 내쫓았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 자신이 제일 잘 알잖아.”심미진은 얼굴이 새하얘져 거의 몸을 못 가눴다.“아니야... 난 그런 일 없었어. 온준용은 그냥 양아치잖아.”온다연은 서늘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온준용은 예전에 동남아에서 마약 유통으로 큰돈 벌었어. 넌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 따라다니며 돈 쓰는 거 보면서 질투가 났고 결국 네 형부를 꼬셨어. 언니를 두 번 죽이는 짓을 해놓고 온준용이랑 같이 엄마를 협박했지. 경찰에 신고하거나 내 출생 관련한 말을 꺼내기만 하면 둘 다 죽이겠다고 말이야.”“우리 엄마는 약한 사람이었어. 내가 친딸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날 진심으로 아끼고 지켜줬어. 하지만 너... 심미진, 넌 인간도 아니야. 네 형부를 꼬시고 또 네 선생님 남편까지 건드려? 겉으론 착한 척하면서 날 친딸처럼 키워주겠다고? 네가
유재성의 상태는 며칠간 고비를 반복하다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유민준은 유자성의 장례를 정리한 뒤 줄곧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유자성의 죽음은 둘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특히 유재성에게는 타격이 더 컸다. 비록 유자성은 친아들이 아니었고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40년 가까이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이었다.그를 일으켜 세운 것도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끌어온 것도 유재성이었다.심지어 유강후에게 쏟은 시간보다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인 존재였다.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유강후와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요 며칠은 쌍둥이들도 종종 병문안을 왔다.막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한 시기인지라 유재성을 보면 할아버지하고 앵앵거리며 다가와 안기곤 했다.그 모습에 유재성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두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생겼기에 마치 광고 속 아기 모델처럼 예뻤고 병원 안에서도 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아이들이 병실에 나타날 때마다 간호사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게 일이었다.그럴 때마다 유강후는 은근히 신경 쓰였다.속으로는 우리 애 좀 그만 봐요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했다.일주일이 지나 유재성의 건강이 더 안정되자 유강후는 병문안을 조금씩 줄였다. 그리고 유민준에게 지분 문서를 돌려주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경원시에서 떠나.”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는 유민준을 만나지 않았다.유민준은 그 말을 곱씹으며 유재성이 퇴원하자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경원시를 떠났다.그리고 유재성 퇴원 당일에 온다연은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그런데 병원 복도 끝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쳤다.바로 심미진이었다.몇 년 전만 해도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하며 번쩍거리던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낡은 옷차림에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졌다.병원 입구에서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온다
유강후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여 온다연에게 입을 맞췄다.“이제 큰 문제는 없어. 네가 준 약 덕분에 상태가 꽤 안정됐어. 지금 병실 안에 있는 전문가들이 모여서 그 약을 분석하느라 정신없어. 하나만 실험용으로 가져가겠다고 하던데 내가 거절했어.”온다연은 웃으며 말했다.“그건 곽 박사님이 주신 약이니까 당연히 귀하겠죠. 그러니 그 사람들은 아마 분석해도 별 소득 없을걸요.”“맞아.”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꼭 필요하다니까 며칠 정도는 맡겨둘까 해.”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고 발끝을 살짝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점심 준비가 다 됐어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리고... 수염 좀 정리해요. 이따가 다희랑 놀다가 얼굴 찔리면 어쩌려고 그래요.”마침 그때 복도 끝에서 다희가 기어 나오더니 유강후를 보자마자 벌떡 앉아 흔들흔들 달려오기 시작했다.하지만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쿵 하고 넘어졌다.“다희야!”유강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바로 달려가 딸을 안아 올렸다.“아빠 보고 싶었어?”다희는 입을 삐죽이며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고 조그만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손바닥엔 희미한 붉은 자국이 두 줄 남아 있었다.유강후는 금세 눈치를 챘다.“엄마가 자로 손바닥 때렸어?”다희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더니 입만 우는 소리를 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만 컸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딸이 아빠에게 고자질하듯 안겨 있는 모습에 온다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장난이 너무 심했어요. 큰 우유 잔을 통째로 내 노트북에 다 쏟아버렸어요. 지난 이틀 동안 만든 데이터가 다 날아갔으니 다시 해야 해요.”유강후는 아이 손을 잡고 후후 불며 말했다.“때리지는 말지. 아직 어려서 잘 모르잖아. 천천히 말해주고 가르쳐야지.”그의 딸바보스러운 모습에 온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러다가 얘 완전 버릇 나빠지겠어요. 지금도 거의 날뛰는 수준이죠. 서재 한 번 가보지 그래요?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