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요? 사장님도 이젠 다 나으셨잖아요.”나는 의아해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그러자 정 사장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내가 마사지해 줄 때면 유미가 별로 못 느끼는 것 같거든.”그 말에 내 심장은 튀어나올 것처럼 두근거렸다. 그 순간 사장님이 모든 걸 다 알았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사장님, 천수당이 이제 막 개업해 요즘 너무 바빠요. 마사지는 못할 것 같아요.”나는 왠지 불안해 핑계를 대서 거절했다.그러자 정 사장님이 웃으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수호 씨, 사실 나 우리 아내 마음 다 알아. 우리가 부부로 지낸 시간이 너무 길어서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거든. 하지만 수호 씨는 달라. 수호 씨는 젊잖아. 수호 씨가 대신 마사지해 주면 그래도 젊음의 활력을 느낄 수 있을 것 같거든.”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눈이 커다래졌다.“사, 사장님, 혹시 다 아셨어요?”정 사장님은 여전히 허허 웃으셨다.“너무 놀랄 것 없어. 남자든 여자든 일정한 나이가 되면 다 그쪽으로 수요가 생기는 건 당연해. 그리고 난 수호 씨가 우리 아내 사이에 아무 일도 없다는 거 알아. 그래서 마음 놓고 마사지를 맡길 수 있는 거야.”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나와 유미 사모님은 용천 호텔에서 하마터면 잘 뻔했는데 사장님은 여전히 나를 이토록 믿고 있다는 사실에 죄책감이 밀려왔다.때문에 나는 더 강하게 거절했다.“사장님, 정말 안 돼요. 사장님께서 이러실수록 전 그럴 수 없어요. 다른 사람 찾으세요.”정 사장님은 내가 이렇게까지 거절할 줄 몰랐는지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알겠어. 정 싫다면 할 수 없지. 식사하자고 식사.”사장님이 이렇게 말하자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정 사장님은 모든 걸 눈치채고 있었고 인간의 가장 나약한 부분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지나치게 따지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하지만 정 사장님이 이럴수록 나는 유미 사장님과 거리를 두어야 했다.나는 용천 호텔에서
“청첩장 보내면 당연히 가지.”나는 일부러 비꼬며 말했다. 연승호가 아무리 도발해도 나는 무섭지 않았다.그때 연승호는 바로 청첩장을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당연하지. 친구잖아. 잘 받아 둬.”연승호가 주니 나는 말없이 받았다.내가 못 갈 게 뭐가 있나? 이 자식은 내가 못 갈 줄 아나 본데. 누가 무서워할 줄 알고?“그럼 이제 좀 비켜주지?”연승호는 웃으며 몸을 틀어 자리를 내주었다.그제야 나는 정 사장님과 함께 그곳을 떠났다.정 사장님은 상세한 상황을 몰랐지만 우리가 서로 대치하는 모습을 봤기에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이미 눈치챘다.“연승호는 왜 수호 씨를 적대시하는 거야? 혹시 백연우 씨 때문에 그래?”가게를 나오자마자 정 사장님은 먼저 물어 왔다.나도 정 사장님께 숨길 필요가 없었기에 우리 세 사람 사이의 일을 대충 설명했다.“저도 백 쌤이 갑자기 약혼할 줄 몰랐어요. 연승호가 갑자기 저를 계속 괴롭힐 줄은 더더욱 몰랐고요.”내 말을 듣던 정 사장님은 진지하게 귀띔했다.“연승호는 재벌가 도련님이라 어릴 때부터 가족 사람을 듬뿍 받고 자랐을 거야. 그러니 되도록 정면으로 부딪히지 마. 약혼식에도 가지 말고. 안 그러면 분명 수호 씨를 괴롭힐 거야.”나는 약혼식 청첩장을 꺼내 바로 쓰레기통에 던졌다.“저 안 갈 거예요. 아까는 장난 친 거예요.”정 사장님은 내 말에 싱긋 웃으셨다.우리는 각자 본인 가게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시각, 레스토랑 안에서 연승호가 의자에 앉자마자 여준휘는 쪼르르 다가가 물었다.“승호 도련님, 혹시 정수호 그 자식 정말 약혼식에 초대할 생각이세요?”“흥! 내가 뭐 하러 그런 광대 같은 자식을 초대해? 그냥 사람들 앞에서 개망신 주려고 부른 거야.”그 말에 여준휘는 또 부채질했다.“승호 도련님, 정수호 그 자식 좋은 놈 아니에요. 백연우 씨가 그 자식이랑 몇 번이나 뒹굴었는지 몰라요.”연승호는 두말없이 여준휘의 뺨을 후려 갈겼다.“개자식이 너 뭐라고 했어? 죽고 싶어?”여준휘는 화끈거리는
여준휘는 연승호한테 절대적으로 충성할 것처럼 아부했다.“승호 도련님, 혹시 뭐 내부 소식이라도 있는 겁니까?”“그건... 알려고 들지 마. 네가 해야 할 일이나 잘해.”“네네. 제가 쓸데없는 말이 많았네요.”여준휘는 자기가 연승호의 신임을 받는 존재라는 생각에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이러다가 연승호가 다연 한식당을 인수하면 자기가 매니저라도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렇게 되면 그는 더 이상 윤지은을 쫓앚다닐 필요가 없다.그리고 반대로 만약 윤지은이라는 나무에 제대로 오를 수 있다면 남은 인생은 출셋길이 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여준휘는 너무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연승호에게 더 아부했다.“그 개자식은 할 일 없을 때 가서 더 밟아 줘. 난 그 자식만 보면 기분 잡치더라. 절대 편하게 살게 두지 마.”연승호는 또 내가 떠올랐는지 갑자기 언짢아했다.그 말에 여준휘는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승호 도련님. 저 수단과 방법 많아요. 절대 그 자식 곱게 두지 않아요.”...천수당.나는 연승호와 여준휘의 일을 크게 마음에 두지 않고 한의관으로 돌아온 뒤 민우와 현성에게 주의를 주었다. 요즘 들어오는 약재를 눈여겨보라고.“걱정하지 마. 우리가 잘 지켜볼게.”우리가 한창 얘기하고 있을 때 밖에서 갑자기 고함이 들렸다.“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알고 보니 가게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교통사고가 났는데 작은 자동차 한 대가 전기 바이크와 부딪힌 모양이었다. 하지만 자동차는 이미 도망치고 없었다.나는 가게 직원들을 불러 신속히 부상자의 상처를 살피게 했다.“다리가 부러져 빨리 치료해야 합니다.”내 첫 번째 반응은 환자를 빨리 치료해 주는 거였다. 그 첫 번째 이유는 환자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 이유는 구급차가 오기 전 출혈량을 줄이기 위해서였다.하지만 환자 가족은 우리가 환자의 치료를 도우려고 하자 버럭 소리 질렀다.“뭐 하는 거예요?”나는 얼
“우리 같은 의사도 모른 체하면 누가 환자들을 도와줘? 우리만 잘못한 게 없으면 되지. 나머지는 상관할 거 없어.”현성은 나를 향해 엄지를 추켜세웠다.“넌 참 대단해. 난 영원히 너 같은 마음은 먹지 못하겠다.”이건 내가 대단한 게 아니다. 아마 나도 정 사장님의 영향을 받아 시시콜콜 따지지 않게 되었을지도 모른다.정 사장님은 바로 그런 분이다. 좋은 일을 하고도 이름을 남기지 않는 분.내 기억에 정 사장님은 고아라고 했다. 어릴 때 온갖 고생을 다 해서 인생의 고난을 모두 맛보고 이해한다고 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지금 가진 능력도 모두 사람들을 도와주고 그 사람들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배우고 익힌 거라고 했다.정 사장님은 참 착한 분이다.나도 그런 착한 사람이 되고 싶다.나는 할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할아버지는 가장 행복한 일이 다른 사람 얼굴에서 미소를 보는 일이라고 하셨다.“됐다. 가자.”우리는 짐을 챙겨 가게로 돌아가려고 했다.그때 갑자기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착한 척 오지네.”고개를 돌아보니 목소리의 주인공은 여준휘였다.나는 여준휘를 상대하지 않았다. 내 눈에 그 자식은 그저 공기 같은 존재였으니까.여준휘는 그런 말로 나를 자극하려고 했는데 내가 무시하자 다급히 다가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정수호, 방금 한 짓 다 쇼지? 하. 여기 다른 사람도 없는데 순순히 인정하지 그래? 정수호, 네가 말하지 않는다고 내가 네 속내를 모를 줄 알아? 내 앞에서까지 고고한 척하기는. 가식 떨기는...”가끔 이렇게 열폭하는 사람의 말은 가볍게 무시하면 된다. 어쨌든 우리는 인간이니 개한테까지 일일이 따질 필요는 없으니까.여준휘는 내 화를 돋우기는커녕 자기 화만 불타올랐다.“정수호, 거기 서!”나는 민우와 현성에게 물건을 건네며 두 사람더러 먼저 가게로 돌아가게 하고는 여준휘를 보며 냉소했다.“연승호가 보냈어?”여준휘는 그 말에 움찔하더니 바로 부정했다.“내가 오고 싶어서 오는
여주휘는 살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내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조금 더 둘러보고.”“여준휘 씨 윤지은 씨와 동창이라고 했죠?”그때 나는 바로 화제를 전환했다.그 말에 여준휘는 경계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그건 갑자기 왜 물어?”“윤지은 씨한테 구애까지 한 걸 보면 집안 배경과 신분 그리고 학식 모두 너무 떨어지는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좋은 하수오는 선물하든 본인이 사용하든 괜찮은 선택일 텐데, 정말 생각이 없어요?”“이제 곧 추석이잖아요. 우리 가게에 선물 세트도 파는데 모두 고급 포장이라 선물하면 체면이 살거든요.”“아, 그러고 보니 연승호 도련님과 같이 다녔죠? 그 분과 그 가족분한테는 선불 안 해요?”여준휘의 얼굴은 울긋불긋해지더니 이내 반박하려고 했다.“네가 뭔 상관...”“아. 알겠다. 하수오는 연승호 씨 눈에 차지 않겠네. 그럼 인삼음 어때요? 얼마 전에 갓 들여온 인삼이 있는데. 산에서 캔 자연산 인삼이라 신분 높은 사람들을 위해 남겨 두거든요. 이래 봬도 여준휘 씨와 연승호 씨는 우리 지인이나 다름없잖아요. 그래서 내가 특별히 남겨드렸어요.”“어디 보자. 연승호 씨 한 세트, 연승호 씨 부모님께 각각 한 세트씩, 그리고 곧 약혼한다고 하셨으니까 약혼녀한테도 한 세트 선물하고 약혼녀 가족한테도 보내려면 두 세트 또 더 필요하겠네?”“그렇게 기본으로 여섯 세트 사면 되겠네요. 제가 바로 백연우 씨한테 사진 찍어 보내드릴게요. 아주 기뻐하겠네요.”나는 일부러 여준휘가 사진에 보이게 찍어 사지 않으면 안 되게 상황을 만들었다.내 행동에 여준휘의 얼굴은 시커메졌다.“설, 설마 사진 보냈어?”“그럼요. 곧 추석인데 선물도 안 하려고요? 내가 골라준 거 다 가장 좋은 것들인데. 고마워할 거 없어요.”나는 일부러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내 말에 여준휘는 화가 나서 가슴을 들썩거렸다.“우선 고민 좀 할게.”하지만 나는 여준휘에게 생각할 겨를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웃으며 말했다.“아. 어떡해요? 아까 백
여준휘는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선물 세트 옆에 자리 잡고 섰다.“그럼 나도 한 장 찍어줘. 멋있게 찍어줘.”어차피 돈 뽑을 대로 뽑았으니 당연히 최대한의 역할은 해줘야 했다. 때문에 나는 여준휘의 소원대로 사진을 찍어줬다.그 뒤로 여준휘는 모든 선물 세트를 들고 떠나갔다.민우와 현성은 나를 향해 엄지를 추켜세웠다.“수호 너 진짜 대박이다. 저 자식 시비 걸러 왔다가 144만 떼인 거 실화야?”현성은 아예 배를 끌어안고 뒤로 넘어질 듯 웃었다.“이런 게 혹 떼러 왔다가 혹 붙여 간다는 건가? 저 자식 아부할 생각에 신나서 돌아가는 거 봤어? 웃겨 죽겠어 정말.”“됐어. 일하자.”그 대화를 끝으로 우리는 각자 일에 매진했다.여준휘는 천수당을 나간 뒤에야 얼굴에 드리운 미소가 싹 가셨다.“젠장. 정수호, 감히 나를 엿 먹여? 두고 봐. 내가 너 질질 짜게 만들어준다.”방금 전까지 여유로운 척했던 모두 여준휘의 연기였다.일이 그 지경에 이르렀는데 구매하지 않고는 안 되는 상황이라 여준휘는 마지못해 연기했던 거다. 어쨌든 백연우에게 성의를 보여줘야 했으니까.하지만 그렇다고 그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자기가 된통 당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때문에 오늘의 원한은 잘 기억해 뒀다가 꼭 갚으리라고 다짐했다.여준휘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실루엣이 천수당에 나타났다.나는 백연우를 본 순간 마음이 복잡했다. 어떤 마음으로 백연우를 마주해야 할지 몰랐으니까.그래도 가게에 왔으니 손님 대접을 해줘야 하기에 쫓아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웃는 얼굴로 맞이하는 건 불가능했다.때문에 나는 백연우를 보자마자 내실로 향하며 민우에게 말했다.“따라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하지만 나는 백연우를 너무 얕잡아 봤다. 민우는 백연우의 상대가 아니었다. ‘나 만지고 싶어요?’라는 한마디에 민우는 깜짝 놀라 연신 뒷걸음쳤으니까.나는 백연우가 나를 찾으러 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나를 따라 내실까지 쫓아와 나는 숨을 곳도 없었다.“왜 또 찾아
“백연우 씨, 앞으로 찾아오지 마세요. 난 백연우 씨 때문에 번거로운 일에 엮이고 싶지 않아요.”“그래서 내가 꼴도 보기 싫은 거야 아니면 성가시다는 거야?”백연우는 나에게 아주 현실적인 질문을 했다.나는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뭐가 다른데요?”“당연히 다르지. 전자라면 앞으로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게. 난 나한테 관심 있는 사람한테만 관심 있거든. 상대가 나 거절하면 나도 들러붙지 않아. 하지만 후자라면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어. 약속할게. 앞으로 연승호가 절대 너 괴롭히지 못하게 할게.”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그럼 잘 들어요. 두 가지 다예요.”“왜? 네가 후자라면 이해할 수 있어. 그런데 왜 전자도 있는데?”나는 그날 밤 백연우를 만나러 학교까지 찾아갔던 사실을 털어 놓았다.“백연우 씨, 내가 전에는 몰랐는데 백연우 씨한테 남자는 그저 장난감 같은 존재였더라고요. 그런데 이제 알았어요.”“백연우 씨도 백연우 씨만의 생각이 있고 나도 내 생각이 있으니 애초에 서로 즐기려고 만난 거겠죠. 서로 사생활 터치하지 않는 조건으로요. 하지만 도구로 생각하면 안 되죠.”백연우는 시종일관 눈웃음을 치며 나를 바라보더니 말할 때 갑자기 말투를 바꾸었다.“설마 나도 다른 여자들처럼 네 주위만 맴돌기를 바랐던 건 아니지?”“난 그런 생각 한 적 없어요. 아직도 내 말 못 알아듣네요. 난 백연우 씨가 남자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게 싫은 거예요. 백연우 씨를 만나면 내가 그저 도구가 된 기분이에요.”백연우는 팔짱을 끼며 물었다.“그거 알아? 그동안 나를 거절한 남자는 없었어. 네가 처음이야. 널 어떡하면 좋지? 가죽을 벗겨버릴까? 아니면 강물에 던져버릴까?”나는 흠칫 놀라 소름이 돋았다.“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갖지 못하면 망가트리겠다는 거예요?”백연우는 아주 매력적으로 웃었다.“맞아. 나 원래 그런 사람이야. 정수호, 난 네 가죽 벗기기 싫어. 하지만 나 화나게 하면 어떤 짓을 할지 몰라.”이 순간 내 머릿속에 든 생각은 백연우가
하지만 내가 배연우를 밀어내려고 할 때 백연우는 정말 칼로 내 어깨를 긁었다.그 순간 갑자기 고통이 밀려오더니 어깨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다.나는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내 팔을 바라봤다.“벤다는 거 진심이었어요?”백연우는 여전히 눈웃음을 살살 쳤다.“어머. 미안해.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고의로 그런 거지.”“정말 미쳤네요!”나는 더 이상 백연우와 같은 공간에서 실랑이하고 싶지 않았다.백연우는 내가 떠나가는데도 막지 않았다. 내 가게가 여기 있으니 본인은 오고 싶을 때 언제든 올 수 있다는 뜻이었다.백연우가 깔깔 웃으며 떠나자 민우와 현승은 다급히 내실로 달려와 나를 살폈다.“수호야. 너 팔 다쳤어. 아까 그 여자 짓이야?”현성은 놀란 듯 버럭 소리쳤다.“저 여자 미친 거 아니야? 정말 칼로 너를 벴다고? 대체 왜 이랬대?”나는 내 상처를 소독하면서 말했다.“됐어. 이미 떠났는데 뭐. 내 탓이야. 애초에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는데.”“어디 봐 봐.”“그냥 살짝 베인 것뿐이야. 상처가 깊지 않아서 괜찮아.”나는 팔에 난 상처를 신속히 치료했다.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백연우에 대해 제대로 요해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얼른 윤지은에게 전화해 백연우에 관한 걸 물었다.“지은 씨 친구 대체 어떤 성격이에요?”윤지은은 내 말을 듣더니 오히려 되물었다.[아무 사이도 아니라더니. 그건 왜 묻는 건데?]“그냥 궁금해서요.”나는 양심에 찔려 대답을 피했다.그러자 윤지은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나도 할 얘기 없어. 끊을게.]역시 윤지은 아니랄까 봐 한번 아니라고 하면 얄짤 없었다.나는 그제야 다급히 나와 백연우 사이에 있었던 일을 간단히 얘기했다.내 말을 들은 윤지은의 말투에 갑자기 화가 잔뜩 나 있었다.[아무 일 없었다더니. 이게 아무 일 없었던 거야?]“용천 호텔에서는 백연우 씨가 먼저 유혹한 거거든요. 나는 남자지 성인군자가 아니에요. 상대가 그렇게 유혹하는데 내가 어떻게 버텨요?
“서 사장님, 괜찮습니까?”“서 사장님...”룸에 함께 있던 사람들은 잇달아 서윤기를 부축했다.서윤기는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지만 코에서 이미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모두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젠장. 누군데 서 사장님을 때려?”사람들은 나를 보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서윤기가 손을 뻗자 사람들은 단번에 입을 다물었다.서윤기는 휴지로 피를 닦더니 나를 싸늘하게 바라봤다.“정수호, 이런 우연이 다 있네. 이렇게 큰 Y시에서 다 만나고.”나는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정 사장님이 여기로 인도해 주셨어. 네놈이 여기 있는 줄 알고 너 처리하라고 여기로 이끌어 주셨어.”서윤기는 그 말에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정호섭 말이야? 그렇다면 좋겠지만 정호섭이 그럴 수 있어? 그렇게 신통하다면 왜 자기 죽음도 못 막았겠어?”정 사장님이 불상사를 당한 뒤 모든 사람이 비통했는데, 서윤기는 오히려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는 울화가 치밀어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룸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나를 막아섰다.그때 이동민이 굳은 얼굴로 나에게 걸어왔다.“젠장. 감히 내 앞에서 서 사장님께 폭력을 써?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이동민은 키가 크고 덩치가 산만 했다. 듣기로 이동민은 예전에 백정이라서 아주 포악했었다는 말도 있다.나 역시 그의 몸에서 피비린내를 맡을 수 있었다.도살업자는 설령 그 일을 그만두더라도 피부와 핏속까지 스며든 피비린내를 지우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는 이동민이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커다란 주먹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두 주먹이 부딪히는 순간 나와 이동민의 표정은 동시에 일그러졌다.이동민은 내 주먹이 그렇게 단단할 걸 몰랐는지, 아니면 내가 자기 주먹을 받아낼 줄 몰랐는지 살짝 당황했다.나 역시 꽤 센 이동민의 주먹에 흠칫 놀랐다.싸움을 배운 뒤로 나는 이 정도 상대를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주먹끼리 부딪힌 뒤 한동안 팔이 저리더니 잠
버섯전골은 Y시 명물이라 다른 곳에서는 먹을 수 없다. 어느새 냄비 안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이 방안 전체에 퍼져 버섯 냄새가 가득했다.윤지은은 사모님한테 음식을 집어주며 말했다.“유미야, 너 요즘 밥도 제대로 못 먹었는데 많이 먹어.”“그만 집어 줘. 내가 직접 먹을 수 있어. 두 사람도 먹어.”우리는 묵묵히 전골을 먹었다. 그동안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라 분위기는 다소 조용했다.나는 몇 번이나 분위기를 띄워주려고 했지만 사모님이 별 반응이 없고, 윤지은도 협조하지 않아 혼자 원맨쇼를 하는 느낌이 들어 포기했다.“차 마시고 싶어...”사모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벌떡 일어났다.“제가 물어볼게요.”무엇보다 나는 어렵게 말을 꺼낸 사모님의 요구를 얼른 만족시켜 주고 싶은 생각뿐이었다.나는 얼른 밖으로 나가 큰 방을 지나다가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걸 보고 무의식적으로 안을 들여다봤다.그랬더니 내 눈에 익숙한 실루엣, 서윤기가 들어왔다.‘서윤기가 Y시에 왔다고?’나는 얼른 몸을 숨긴 채 안대성에게 전화했다.“서윤기를 감사하라고 했잖아. Y시에 온 건 왜 말 안 했어?”[네? 서윤기가 Y시에 갔다고요? 몰랐는데요? 형님, 제가 부하들한테 서윤기 잘 감시하라고 시켰는데...]안대성은 자기가 말실수했다는 걸 인지하고 얼른 입을 막았다. 그 순간 나는 당장 놈을 발로 걷어차고 싶었다.나는 얼른 전화를 끊고 룸 안을 훔쳐봤다.룸 안에는 서윤기 외에 Y시 현지인으로 보이는 남자 몇 명이 있었다. 그중 한 중년 남성은 왠지 낯이 익었다.나는 몰래 중년 남자의 사진을 찍어 판자촌 노랑머리에게 보냈다.[이 사람 알아요?]노랑머리는 곧바로 답장했다.[그 사람은 이연화의 아버지 판자촌 터줏대감 이동민이에요.]‘젠장. 어쩐지 낯이 익다 했더니 이연화와 닮았잖아.’‘이동민이 여기 나타난 데다 서윤기와 웃고 떠드는 걸 보니 설마 정 사장님 교통사고가 서윤기 짓인가?’나는 그럴 가능성이 무척 크다고 생각했다.서윤기가 강북 시장
“한 번에 천만 원? 여기가 뭔 금은방인 줄 알아요?”나도 이제는 돈 좀 있지만 한 번에 음식점에 천만 원을 충전하는 건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북에서 최고급 호텔 멤버십에 가입하는 것도 고작 몇백만 원인데, 길가에 널리고 널린 버섯전골 집이 멤버십 카드만 천만 원이라니?매니저는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돈 없으면 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얼른 나가요.”“잠깐!”나는 언성을 높였다.그러자 매니저가 나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왜요? 또 무슨 일이죠?”나는 얼른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난 이 가게가 악의적으로 손님들에게 소비를 강요한다고 의심되거든. 그래서 지금 신고할 생각이야.”내가 신고하겠다는 말에 매니저는 얼굴색이 싹 바뀌더니 나를 삿대질하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당신 미쳤어? 본인이 밥 먹을 돈 없으면서 왜 남의 가게를 신고해?”“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더니, 왜? 내가 신고할까 봐 두려워? 불법 경영한 거 걸릴까 봐 걱정돼? 그렇다면 더 신고해야겠네. 이렇게 부도덕한 가게는 문 닫아야 하니까.”윤지은은 네 행동을 지지했다. 심지어 사모님 역시 이 일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했다.나는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이 없었는데 매니저의 태도가 너무 괘씸해 밥을 먹지 못하더라도 이분을 풀 생각이었다.내가 정말 전화하자 매니저는 이내 태도를 누그러뜨렸다.“알았어요. 오늘 일은 저희 측 책임이니 사과드리죠. 지금 당장 자리 내어드릴게요. 됐죠?”“어디? 홀? 아니면 구석?”내가 따져 물었다.그러자 매니저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그럴 리가요. 당연히 룸을 내드려야죠. 하지만 큰 룸은 이미 손님이 꽉 차 작은 룸밖에 남지 않았어요. 비용은 사과하는 의미에서 받지 않겠습니다.”나는 손을 뻗어 매니저의 말을 잘랐다.“됐어. 값은 원래대로 받아요. 안 그러면 음식에 또 뭔 짓 할지도 모르니까.”매니저는 내 말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내 말은 매니저가 비열한 소인배라고 공개 처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나는 윤지은과
결국 어쩔 수 없었던 나는 할 수 없이 내려가 가게를 찾기 시작했다.Y시에 버섯전골 맛집은 꽤 많았다. 하지만 사모님 기분이 안 좋은 지금 작은 가게를 가면 보는 눈이 많고 시끄러워 기분이 더 안 좋아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때문에 나는 한적한 가게를 찾으려고 한참을 더 걸었다. 다행히 그런 가게를 찾는데 겨우 성공했다.“안녕하세요. 프라이빗룸 하나 예약하게요.”이 가게는 환경도 좋고 손님도 많은 걸 보니 맛도 괜찮은 듯 시었다.“큰 룸 하나가 남아 있는데 괜찮으신가요?”“큰 룸은 얼마인데요?”“큰 룸은 기본 소비가 60만 원 이상입니다.”“좋아요. 그걸로 주세요.”60만 원이면 괜찮았다.룸을 예약한 뒤 나는 또 운전해서 윤지은과 사모님을 픽업하러 호텔로 돌아갔다.두 사람은 어느새 현지 특색이 담겨 있는 꽃무늬 옷으로 갈아입었다. 역시 절세 미녀들이라 그런지 뭘 입어도 예뻤다.물론 나는 칭찬의 말을 아꼈다. 지금 장소와 분위기에 그런 칭찬은 맞지 않았으니까.잘못했다가 또 윤지은의 욕지거리를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나는 일부러 맞을 짓을 골라 할 이유가 없었다.30분 뒤, 우리는 버섯전골 가게에 도착했다. 하지만 나하테 큰 룸 예약을 도와줬던 종업원이 충격적인 얘기를 했다.“손님, 죄송하지만 큰 룸은 이미 다른 분이 예약하셨습니다.”“방금 분명 내가 먼저 예약했잖아요. 왜 남의 방을 함부로 다른 손님한테 내줘요?”나는 순간 울화가 치밀었다.하지만 종업원은 터무니없는 변명을 늘어놓았다.“저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어요. 인터넷 오류가 났는지 그 방은 이미 예약한 분이 있어요.”이미 이곳에 왔는데 그대로 갈 수 없었기에 나는 차선책을 제시했다.“그럼 작은 방이라도 줘요.”“죄송하지만 오늘 가게에 있는 모든 룸은 이미 예약돼서 남은 룸이 없어요. 괜찮으시면 홀에 있는 자리를 내어줄게요. 동남쪽에 한 테이블이 비어 있어요.”나는 순간 화가 치밀어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당신들 장사 이따위로 할 거야? 내가 예약한 자리가
요즘 겪은 일이 너무 많은 탓인지 나도 가끔 감회가 새로울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다.특히 사장님처럼 좋은 분이 유골이 된 걸 보니 마음이 무거웠다.우리는 한동안 돌아갈 수 없기에 사모님은 부모님을 불러 사장님의 유골함을 강북으로 가져가 매장했다.두 어르신은 충격이 너무 컸는지 순식간에 더 늙어진 것 같았다. 항상 친아들처럼 생각했던 사위가 그렇게 됐으니. 간암인 줄 알았을 때도 그렇게 믿기 어려웠는데 또 이런 불상사를 겪었으니 당연히 충격이 컸을 거다.하지만 임민수는 딸이 더 걱정됐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유미야, 너 정말 강북에 안 돌아갈 거니?”사모님은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진실을 파헤치기 전에 절대 안 돌아가요. 엄마, 아빠, 호섭 씨는 두 분께 맡길게요.”사모님은 무척 아쉬워하며 사장님의 유골함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그 순간 사모님의 눈빛은 매우 복잡했다. 아쉬움과 슬픔, 괴로움 그리고 아름다운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도 한데 섞여 있었다.나는 절친한 사람을 잃어본 적 없어 사모님의 심정을 깊이 공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족을 잃은 고통이 얼마나 괴로운지는 알고 있었다.나와 윤지은은 사모님을 위로하려고 했지만, 사모님은 우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아무 말도 하지 마.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아니까.”사모님은 매우 침착했고 엉엉 울지도 않았다.그런 사모님의 모습이 나와 윤지은은 모두 걱정되었다.하지만 사모님이 말했다.“걱정할 거 없어. 내 상태는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비록 슬프고 안타깝지만 이대로 주저앉아 있지 않을 거야. 호섭 씨도 내가 이러는 모습 원하지 않을 거야.”“유미야,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야.”윤지은은 감개무량하듯 말했다. 하지만 내가 앞으로 다가가려 하자 이내 나를 째려봤다.‘벌써 하루가 지났는데 아직도 화가 안 풀렸나?’무엇보다 난 아직도 내가 대체 언제 무엇 때문에 윤지은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결국 나는 할 수 없이 묵묵히 두 사람을 따라 호텔로 돌아갔다.윤지은
우리는 희망을 이연화에게 거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때문에 그 백수들이 소식을 전하기 전에 우리는 호텔에서 기다리기만 했다.하지만 윤지은은 호텔에 갇혀만 있으면 사모님이 답답해할까 봐 한가할 때면 사모님과 함께 산책하곤 했다.사모님이 자기 컨디션을 끌어 올리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우리는 알 수 있었다.하지만 동력과 희망이 없는 탓에 사모님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Y시에 온 지 사흘 만에 강한나는 다시 강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떠나기 전 우리와 함께 시사 자리를 가졌다.“정말 여기 남아서 조사할 거야?”나와 윤지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강한나가 말했다.“알았어. 나도 도와줄 건 없으니 성공하길 빌게.”나와 윤지은은 곧바로 강한나가 우리에게 할 말이 있다는 걸 눈치챘다. 아니나 다를까, 사모님이 화장실 간 틈에 강한나는 얼른 우리에게 말했다.“호섭 씨 시신 어느 때 화장할 거야?”나와 윤지은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몰라. 유미가 아직 동의하지 않았어.”그 말에 강한나가 말했다.“시체를 화장하지 않아도 시체에서 단서를 찾는 건 어려울 거야. 난 고인 편히 쉬게 해주는 게 좋다고 봐.”“하. 그런데 문제는 유미가...”사모님이 아쉬워하는 게 문제다.화장하지 않으면 그래도 보러 갈 수 있지만 화장하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사실 나도 강한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우리도 그 말 이해해요. 사모님은 저희가 설득해 볼게요.”식사를 마친 뒤 강한나는 그 길로 떠났다.나와 윤지은은 호텔로 돌아가는 내내 어떻게 말을 꺼낼지 고민했다.“두 사람 먼저 돌아가. 난 장례식장에 가볼 거니까.”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우리는 사모님이 또 사장님 보러 간다는 걸 알았다.하지만 장례식장도 규정이 있는데, 아무 때나 들여보낼 수 있을 리가 없다.그건 다른 것도 아닌 시신이니까.그때 윤지은이 입을 열었다.“유미야, 이번에 보고 난 뒤 호섭 씨 편히 자게 해주자.”“안 돼!”사모
“왕정민 이 파렴치한 놈. 어떻게 이럴 수 있지?”분명 자기가 잘못했으면서 뻔뻔하게 애교 누나한테 집착하다니.“애교 누나는 그럼 어떻게 처리했어요? 신고는 했어요?”[애교가 예전보다 많이 강해졌더라고요. 그걸 다시 왕정민한테 보냈어요. 심지어 안에 뭔갈 더 추가해서.]“네? 하하. 애교 누나가 정말 변했네요.”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그러니까요. 그것도 다 왕정민 때문에 할 수 없이 변한 거긴 하지만요. 애교가 만만한 줄 알고 애교만 괴롭히다니. 그렇게 대단하면 그 여자를 그렇게 괴롭히지...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는 못 할 걸요.][그런 사람들은 원래 그래요. 여자들은 뭐 드세고 화를 자주 내는 여자가 되고 싶어서 되겠어요? 다 남자들이 행복한 줄 모르고 기어오르니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변한 거죠.][특히 우리 여자들은 가끔 독해질 필요가 있어요. 독하지 않으면 남들이 괴롭혀도 되는 줄 알아요...]나는 형수의 말에 백 번 동의한다.애교 누나가 이토록 강해졌다니 나는 많은 걱정을 덜 수 있었다. 형수도 마찬가지고.두 사람이 다른 사람의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내가 마음 놓고 할 일을 할 수 있다.형수와 한참 얘기한 뒤 나는 곧바로 애교 누나에게 전화했다.“누나, 왕정민 일은 왜 말 안 했어요?”애교 누나 목소리는 여전히 간질거리고 듣기 좋았다.[수호 씨가 Y시에 있는데 얘기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어요? 수호 씨 가 나 때문에 와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나 이제 많이 변했어요. 다른 사람의 보호만 받으면서 살 수는 없어요.][그동안 아빠한테 반항하면서 독립적인 여자가 될 거라고 큰소리쳤는데, 지금껏 한 번도 그렇게 산 적이 없어요.][예전에 결혼에 묶여 나를 잃었고, 행복한 결혼만 있으면 모두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알았어요. 여자는 자기 마음이 강해져야 진짜 강한 거예요.]애교 누나의 말을 들으니 나는 순간 누나를 다시 알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이 사람이 아직도 내가 알던 나약하기만 하고, 무
“내가 방 하나 더 잡을게요.”나는 말하면서 방을 나가려고 했다. 그때 뒤에서 갑자기 사모님 목소리가 들렸다.“수호 씨, 먼저 내 침대에서 눈 붙여요.”고개를 돌아보니 사모님은 안쪽으로 자리를 옮겨 내가 누울 공간을 내주었다.나는 속으로 거절했다.비록 사모님이 다른 마음 없이 그저 나를 휴식하라고 호의를 베푸는 거라는 걸 알지만, 사장님이 그런 일을 당했는데 내가 사모님과 같은 침대에 누워 있는 건 말도 안 됐다.게다가 윤지은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는데, 내가 동의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나는 결국 거절했다.“아니에요. 가서 다른 방 구하면 돼요.”나는 다급히 방을 나가 프런트 데스크로 달려갔다.처음 온 날 우리는 사실 싱글룸 세 개를 잡았다. 하지만 나중에 사모님 상태가 걱정되어 나와 윤지은이 사모님 방에 들어와 지내게 되면서 나머지 싱글룸 두 개를 취소했다.확인 결과 더블룸 하나가 나왔다는 말에 나는 얼른 그 방을 잡았다. 그러면 사모님과 윤지은이 더블룸에서 함께 지내고 내가 싱글룸에서 지내면 되니까.나는 카드키를 챙겨 방으로 들어갔다. 이 방은 조용한 데다 환경도 좋아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내가 침대에 눕기 바쁘게 핸드폰이 징징 울렸다. 전화한 사람은 다름 아닌 형수였다.요즘 사장님 일 때문에 여기저기 달려 다니느라 형수와 오랫동안 얘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때문에 마침 조용한 틈을 타 나는 형수와 얘기하려고 여상 통화를 받았다.형수는 사모님 상태를 걱정하며 일의 진전을 물어봤다.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쉽지 않아요. 조사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어 한동안 여기서 지내야 할 것 같아요.”[수호 씨 사장님 내외가 수호 씨한테 그렇게 잘해줬는데, 이번 기회에 유미 씨 옆에서 많이 도와줘요.]형수가 말했다.그 말에 나는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네, 저도 알아요. 형수는 요즘 어때요?”[좋아요. 잘 먹고 잘 자고 이제 천천히 걸을 수도 있어요.]“진짜예요? 사진 찍어 보내 봐요.”나는 너무 기뻐 흥
내가 노랑머리한테 준 것도 적은 돈이 아니었다. 족히 10만 원 가까이는 됐으니까. 백수들한테는 이것도 큰돈이나 다름없다.노랑머리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결국 입을 다물었다.아직 대답을 못한 사람들은 얼른 다른 질문을 하라고 나를 재촉했다.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두 번째 질문을 했다.“그럼 혹시 이연화 혹은 조금희가 요즘 낯선 사람과 만난 걸 본 사람이 있어요?”그 물음에 모든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나는 실망했다.“세 번째 질문, 혹시 누가 나 대신 이연화를 감시할래요?”모든 사람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그럼 다 같이 해요.”“그럼 돈은 어떻게 계산하는 거예요?”노랑머리가 물었다.나는 가방에서 또 돈 두 뭉치를 꺼냈다.“세 명이 감시해요. 한 사람당 200씩 줄게요.”세 사람의 눈은 커다래지더니 급기야 반짝반짝 빛이 났다.나는 세 사람에게 귀띔했다.“이 돈은 수고비예요. 누가 만약 유용한 단서를 제공하면 이 외에도 큰 보상을 받게 될 거예요.”‘역시 돈이 있으니 뭐든 쉽게 되네.’이 사람들이 나를 위해 성실하게 일하게 하려면 이 사람들 마음을 매수하는 게 우선이다.몇백만 원은 지금의 나한테 큰돈이 아니다. 무엇보다 사장님과 사모님을 도울 수 있다면 나는 뭐든 할 수 있다.모든 일을 마친 뒤 나는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윤지은의 말을 들어보니 사모님은 이미 잠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모님 정서가 여전히 불안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기분이 다운된 사람은 쉽게 졸리고 무기력해지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나는 방금 전 일을 윤지은에게 말했다.“이번 일 조사하기 엄청 어려울 거예요. 언제 진실이 밝혀질지도 모르겠고. 장기전을 할 준비는 됐어요?나는 윤지은을 보며 말했다.그러자 윤지은이 나를 째려봤다.“그걸 말이라고 해? 유미는 내 베스트 프렌드야. 유미한테 이런 일이 생겼는데 내가 같이 있어 주지 않으면 누가 같이 있어 줘? 그러는 너야말로,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데? 설마